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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전교회 제7대 담임목사 최종후보자로 백신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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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16일 박성규 목사(총신대 총장)의 마지막 설교 이후 근 2년 동안 담임목사가 공석이었던 부전교회가 최근 최종 후보자를 선택하고 오는 6월 3째주 담임목사 청빙을 위한 공동의회를 개최한다.
최종 후보자는 미 동부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벧엘교회 백신종 목사다. 백 목사는 98년 도미해 풀러신학교에서 선교학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LA ANC온누리교회와 와싱톤중앙장로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하다가 2004년부터 캄보디아 선교사로 활동했다. 이후 11년 동안 캄보디아 선교사로 활동하다 지난 2015년 9월 볼티모어 벧엘교회 담임목사로 청빙 받았다. 중학교 1학년 때 선교사가 되겠다고 서원해 중앙대 재학시절 OM선교회, OMF선교회, 선교한국 등에서 선교훈련을 받았고, 총신대 신대원 재학 시절 합동 해외선교국 선교훈련원 간사로 일한 바 있다. 백 목사의 아내는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 사무총장과 회장을 지낸 강승삼 선교사 딸로 선교사 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부전교회는 오는 13일부터 15일 새벽 5:30분에 ‘제7대 담임목사 청빙을 위한 특별기도회’를 개최한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담임목사가 세워질 수 있도록 기도의 끈을 놓지 않고 힘써 기도하자’는 마음으로 온 성도들이 기도로 준비하고 있다. 지역교계도 부산의 상징적인 교회중 하나인 부전교회 담임목사 청빙이 이번에는 이뤄질 수 있을지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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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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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 특강] 교회법과 양삼의 자유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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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사회는 극단적인 이념 대립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 결과 중립을 지켜야 할 국가기관과 공무원이 종종 정치의 도구로 이용되기도 한다. 참담한 것은 일부 교회가 정치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교회법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할까?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재가 되시어 신앙 혹은 예배에 대한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사람의 교리와 명령으로부터 사람의 양심을 자유롭게 하셨다” 이 글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20장(기독신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 2조에 나온다. 이 문구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은 장로교회의 교회정치원리 제1원리 첫 문장에도 나오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 도입된 교회정치 8대 원리는 본래 1788년 미국 장로교회가 제1회 총회를 앞두고 작성되어 이후 미국장로교회의 정치원리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1원리는 한국교회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교회정치원리를 한국교회에 전한 이는 미국 북장로교회 소속 곽안련 선교사다. J. A. Hodge가 1882년에 쓴 <교회정치문답조례>(원제: 장로교회 헌법이란 무엇인가)를 축약 번역한 책에서 그렇게 했다.
본래 제1원리는 위에 소개한 “양심의 자유”에 대한 고백을 시작으로 문장이 두 개 더 있다. 그런데 곽안련 선교사는 그중에서 두 번째 문장을 제1원리에서 엉뚱하게 제2원리(교회의 자유)로 이동시켰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두 번째 문장 내용이 어떠하기에 그렇게 했을까? 두 번째 문장은 “교회와 국가의 전적인 분리”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곽 선교사가 위 책을 번역하여 처음 출간한 1917년, 1922년에는 제자리에 있었다. 근데 1930년 판부터는 두 번째 문장이 제2원리로 이동되었다. 당시 1930년대는 당시 조선총독부가 교회에 대해 국가에 대한 충성과 동방요배, 신사참배 등을 강요한 반면 교회는 여러 일로 특혜를 받기 위해 조선총독부와 교섭하며 그들의 권력을 의지할 때였다.
“양심의 자유” 선언에 이어지는 첫째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래서 종교와 관련한 모든 문제에서 개인적인 판단의 권리를 보편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제2원리로 옮긴 두 번째 문장은 다음과 같다: “심지어 보호와 안전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또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고 보편적인 것 이상으로 국가 권력에 도움을 받는 어떤 종교적인 법을 바라지 않는다.” 이 문구만으로 이것이 무슨 뜻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런데 곽 선교사는 1882년 미국에서 출간된 <교회정치문답조례>에서 의도적으로 제1원리의 일부를 제2원리로 옮길 뿐 아니라, 심지어 이 문구에 대한 해설도 생략해버렸다. 당시 국가를 최고 가치로 강요한 조선총독부의 눈치를 의식한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민감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해설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신조나 정치가 국가에 의해 강요되어선 안 된다. 우리 교회도 보호와 안전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고 보편적인 것 이상으로 국가 권력에 도움을 받는 어떤 종교적인 법을 바라서는 안 된다...국가는 교회정치형태의 어떤 것이라도 부과하고 강요할 권한이 없으며 교회 일부를 특별하게 지지하고 후원할 권리가 없다. 사람들이 양심을 따라 예배하도록 공평하고 보편적인 보호를 제공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다. 이 나라와 관련해서 교회와 국가의 전적인 분리(the entire separation)보다 더 좋은 원리가 세워지지 않았다. 로마천주교나 어떤 다른 교파라도 설립과 확장을 위해 헌금하도록 시민에게 세금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 이제 의문이 풀렸다. 곽안련 선교사가 교회와 국가의 전적인 분리 조항을 엉뚱한 곳으로 옮기고, 이에 대한 해설도 생략한 것은 당시 우리나라는 총독부가 국가 권력을 대신해서 교회에 신사참배, 국가헌금을 강요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교회정치원리가 가르치는 교회와 국가의 전적인 분리 원리가 지금 우리에게 간절한 때다. 물론 신앙과 정치는 분리할 수 없다. 그러나 신앙은 누룩처럼 정치에 역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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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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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원 목사] 가정의 달, 천국을 닮은 가정을 다시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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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가족 간의 살인 사건들은 우리 사회에 깊은 충격을 안겨준다. 부모가 자녀를, 자녀가 부모를 해치는 참혹한 일들이 더 이상 예외적 사례가 아닌 시대가 되었다. 몇 달 전에는 생활고에 시달리던 한 가장이 가족을 살해한 후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자녀의 훈육 문제를 둘러싼 갈등 끝에 부부 간의 심각한 폭력이 벌어지는 일도 잇따르고 있다.
이제 가정은 더 이상 무조건적인 사랑과 안정의 보금자리만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때로는 분노와 외로움, 고립과 억압이 가장 날카롭게 표출되는, 사랑과 상처가 교차하는 가장 복잡한 공간이 되었다. 따뜻해야 할 공간이 추위의 중심이 되고, 보호받아야 할 울타리가 위협의 경로가 되며, 서로를 살리는 관계가 서로를 해치는 고리가 되는 현실은 가정의 본질적 회복을 시급히 요청한다.
2024년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의 사회지표」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의 이혼 건수는 9만 건에 달하며, 혼인율은 통계 집계 이래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하였다. 한편, 전체 가구 중 1인 가구의 비율은 33.4%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생활 양식의 변화가 아닌 공동체 기반의 해체와 개인화의 심화를 보여주는 상징적 수치다. 청년 세대에게 ‘비혼’과 ‘비출산’은 더 이상 미래를 유보하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전략이 되었고, 노년 세대는 점점 고립과 단절 속에 내몰리고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고령화 사회에서 급증하고 있는 고독사 현상이다. 가족과의 관계가 단절되거나, 배우자 또는 자녀와의 사별,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인해 노년기에 깊은 외로움과 삶의 무력감을 경험하는 이들이 많다. 주변과 단절된 채 세상을 떠나는 고독사의 사례는 이제 낯선 뉴스가 아니며, 심지어 발견되는 데 십 수일 이상 걸리는 일도 허다하다. 이는 가정이 더 이상 전 생애를 품는 지속적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오늘날 우리는 ‘가정’이라는 단어 앞에 멈춰 서지 않을 수 없다. 단지 혈연에 의한 물리적 구조를 넘어, 관계의 본질과 영적 정체성으로서의 가정에 대한 성찰이 요청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성경은 여전히 우리에게 한 가지 꿈을 심어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천국을 닮은 가정’이다.
시편 128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집을 이렇게 노래한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하나님의 뜻이 머무는 가정은 결실이 있고, 생명이 넘치며, 세대 간에 축복이 흐른다. 에베소서 5장과 6장 역시 부부 간의 상호 존중과 사랑, 자녀와 부모 간의 순종과 양육을 통해 질서와 자비, 사랑과 책임이 공존하는 가정의 모습을 제시한다. 이 비전은 단지 관념적 이상향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임하는 실제적 통로로 제시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이 천국 가정을 실현해 갈 수 있을까?
첫째, 교회는 가정 회복의 공동체로 기능해야 한다. 교회는 단지 주일에 모이는 신앙 공동체가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믿음을 구현하는 영적 울타리가 되어야 한다. 세대 간의 단절을 이어주는 다리이자, 결혼과 양육, 갈등과 상실, 노년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생애 전반을 품을 수 있는 전인적 목회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가정사역, 부부상담, 시니어 사역 등 다양한 연령층을 위한 맞춤형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둘째, 가정은 ‘작은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가정은 예배와 말씀, 나눔과 기도, 식탁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일상을 실현하는 거룩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 단지 종교 행위로서의 예배가 아닌, 살아 있는 영성의 호흡이 깃드는 장소, 사랑이 선포되고 용서가 연습되는 장소로의 회복이 필요하다.
셋째, 개인은 사랑과 책임의 결단을 새롭게 해야 한다. 타인을 탓하기에 앞서 용서를 먼저 실천하고, 침묵 대신 대화를 선택하며, 무관심보다 기도를 선택하는 태도야말로 천국의 문을 여는 가장 실제적인 열쇠가 된다. 공동체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고, 가정의 변화는 한 사람의 회복으로부터 가능해진다.
가정의 회복은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한 사람의 회복, 한 기도의 시작, 한 걸음의 결단이 모여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의 가정을 조금씩 그려나갈 수 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첫 번째 선물이자, 마지막 보루다. 가정의 회복 없이는 교회의 회복도, 사회의 회복도 완전할 수 없다.
가정의 달 5월, 다시금 이 땅의 모든 가정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천국의 모습을 회복해 가기를, 그리고 그 회복이 교회와 사회의 새로운 희망으로 이어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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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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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아이는 어른의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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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연당 이양연(李亮淵, 1771-1853)은 조선 후기의 시인이다. 그의 시 野雪에서 穿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朝我行跡, 遂作後人程.(천설야중거, 불수호란행. 금조아적행, 수작후인정“- 눈을 뚫고 들판 길을 걸어 갈 때는 모름지기 어지럽게 걷지를 마라 오늘 내가 밟고 간 이 발자취가 뒷사람이 따르는 길이 될 터이니”)이라 노래했다.
이 시를 백범 김구 선생이 널리 애송했다. 김구 선생이 애송한 시는 이양연의 시가 아니라 서산대사가 지은 선시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답설야중거, 불수호란행. 금일아적행, 수작후인정-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는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이였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도덕과 윤리의 핵심은 정직이다. 정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제자나 자녀들에게 항상 정직하라고 가르치고 훈계한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어른이 되면 될수록 배우면 배울수록, 출세하면 출세할수록 정직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오히려 어릴수록 더 정직하다. 어린 아이들은 선생님의 가르침과 자신이 배운 것을 따라 본능적으로 바르게 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세상 사욕에 물든 어른들은 습관적으로 정직을 회피하려고 한다. 자신과 타인을 속이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분이 된다. 거짓말과 거짓 행동이 일상생활이 된다. 따라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신의 감정을 잘 감추고, 표가 나지 않게 진실을 숨기고, 거짓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실력이 좋아지는 것과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정직에 있어서 결코 순수하지가 않다.
어른들 중에 정직하지 못한 상위 부류들이 정치인들과 고위관료들이다. 청문회나 국정조사가 TV를 통해서 생중계가 될 때 가만히 보면, 소위 이 나라의 지도자들과 리더라고 지칭되는 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아니다.” “기억이 안 난다.” “모르겠다.” 등이다. “아기모”의 행진이다. 정말 머리가 나쁜 사람들만 모인 것 같다. 저들이 어떻게 대한민국의 지도자와 리더로 살아왔는지 또 앞으로 살아갈 것인지가 정말 궁금하고 걱정이 된다. 일반 서민들과 국민들보다 더 무지하고 아둔한 사람들이다. 저들의 통치를 받아왔고 또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속이 쓰리고, 삶이 슬프고, 마음이 아프다. 만약 그들이 머리가 아둔하지 않다면 정직을 상실한 거짓의 달인들이다.
어른과 지도자들은 눈 덮인 들판 길을 먼저 걸어가는 선각자들이다. 이들의 발자국을 따라 아이들과 국민들이 그 뒤를 따라간다. 앞선 자들이 잘못된 길로 가면 뒤 따라 가는 자들도 동일한 잘못을 범할 수밖에 없다. 언제 우리나라는 먼저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가는 어른들과 지도자들의 발자국을 따라 아이들과 국민들이 걱정 없이 따라 걸어갈 수 있을까? 방정환 선생이 아이들은 어른들의 선생이요 아버지라고 했다. 요즘의 세태를 보면 진실인 것 같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이들이 어른들을 가르치고 있다. 도덕과 윤리의 핵심은 정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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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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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이승만의 반공주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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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귀국한 이승만은 정략적 고려에서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에 대하여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준 바 있고, 1945년 10월 21일 행한 방송 연설에서, 경제적인 면에서 근로대중에게 복리를 줄 목적으로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인사들과는 협조할 용의가 있다는 식의 발언을 한 바 있으나 이런 시사는 정략적인 의도였다. 1945년 12월 17일과 19일 행한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연설에서 이승만은 자신의 진심을 드러냈다. 그는 조선공산당 내의 친소파당원들을 소련의 세계적화 정책에 농락당한 반민족적 이기주의 집단으로 규정하고 이들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1946년 1월 13일 좌우합작을 위한 5당 회담이 결렬되자 이승만은 기자회견을 통해 “공산분자와 합동이 사실상 될 수 없는 것을 알고도 성의를 다해 왔으나 파괴자와 건설자가 어떻게 합동되며, 애국자와 매국자가 어떻게 한길 갈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재차 공산당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그 후 동서냉전이 악화되자 공산당은 계급 간 알력을 조장하고 계급투쟁을 선동한다며 강력하게 비판했다. 1949년 5월의 일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에서의 반공운동은 ‘세계 모든 자유민들의 싸움’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하고 공산주의에 대항할 명분으로 일민주의(一民主義)를 제창했다. 이것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혹은 건국과 함께 대통령이 된 이승만의 반공체제 구축을 위한 새로운 이념 제시였다.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6.25 전쟁 이후 심화되어, “공산주의와는 절대로 함께 살 수 없다”는 보다 철저한 반공주의로 발전했다. 이런 이승만의 신념은 그 시대의 보편적 가치로 수용되었다. 그것은 북한에서의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경험적 확신이자 6.25 전쟁을 통해 얻는 교훈이었다. 해방 이후부터 전쟁기까지 100만이 넘은 월남 인구도 반공주의의 심화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뒤돌아보면 우리나라는 건국 전후 좌익세력의 건국준비위위원회 활동, 좌우합작운동 혹은 박헌영의 인민공화국의 선포, 신탁통치안에 대한 좌우익의 대립, 미소공동위원회, 남한에서의 좌익 활동, 유엔의 한반도 문제 논의, 남북협상, 5.10 총선거 등 고비 고비마다 한반도는 이념적 경계에서 심각한 위기를 경험했다. 한반도 공산화를 위한 소련의 기도, 남로당의 활동, 특히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대중의 무지 가운데 남한에서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 반공 체제를 구축한 것은 이승만의 지도력의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사실상 미군정은 공산주의와의 대립보다는 타협을 원해 좌우합작을 선호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과 충돌하면서까지 소련편에 선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대한민국의 건국을 이끌었다. 이것은 그의 기독교적 가치, 국제 정치 질서에 대한 인식,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신, 그리고 공산주의의 허구성에 대한 깊은 이해에 기초한 것이었다. 정리하면,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건국투쟁에서 3개의 이념 구릅이 대립하고 경쟁했다. 첫째는, 자유민주주의 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우익진영이었고, 둘째는, 공산주의 통일국가를 세우고자 했던 좌익 진영이 있었다. 셋째는 좌우합작 정부를 세우고자 했던 중간파 집단이 있었다. 임시정부 구성원 중에서도 우파는 우익진영을, 좌파는 공산진영을, 일부는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하거나 참여했다. 이런 혼란과 대립 가운데서도 자유민주의 공화제 정부를 건국한 것은 이승만의 공헌이라 할 수 있고 특히 그의 반공주의가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의 반공 노선은 그의 건국 사상이라기보다는 그가 추구했던 자유민주주의의 소극적인 측면이었지만, 그가 청년 시절부터 가졌던 반로(反露)사상은 약 60년 이후 전개되는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지침이 된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이승만은 1898년 3월 19일자 「협성회회보」에 기고한 논설에서 제정 러시아의 부산 절영도(지금의 영도) 조차 기도를 비판하여 이를 좌절시킨 바 있고, 그 후 한성감옥에서 쓴 한문논설에서, 그리고 1904년 2월부터 한성감옥에서 저술한 자신의 『독립정신』(1910)에서 반로사상을 피력한 바 있다. 러시아에서의 공산혁명과 공산주의의 확산, 소련에 의한 북한에서의 공산화, 그리고 한반도 공산화를 기도했던 점을 고려해 볼 때 이승만의 반로 사상은 시대를 앞서가는 성찰의 결과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사상은 김재준 한경직 손양원 김홍도 김준곤 조용목 목사 등 교계지도자들에 의해 계승되었고 한국교회는 반공주의적 성격을 띄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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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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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건축칼럼] 교회공간의 다양성 연출을 위한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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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공간구조는 본당위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교육공간이나 지역사회를 위한 공간이 절대 부족한 현실이다. 특히 입당 후 3-4년이 경과되면 교육공간의 절대부족 현상이 초래된다. 따라서 내부 공간의 합리적인 계획은 융통성과 가변성이 절대로 요청된다. 내부는 항시 유기적으로 변화 가능하게 계획되어야 한다.
교회의 첫인상은 주출입구의 로비와 홀에서 어느 정도 결정되어질 만큼 중요하다. 대부분 교회의 로비와 홀은 단순히 공유면적의 개념으로 제공되어진 면이 보편적 현실이다. 하지만 로비와 홀이 덩그러니 면적만 차지하고 통로의 기능만 수행한다면, 이 역시 대단히 비경제적이다. 로비와 홀은 교회의 첫인상으로서 밝고 쾌적한 연출이 요청되므로 기능면에서도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로비와 홀은 지역주민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며 교회의 대외적 이미지를 연출할 수 있고 문화적공간의 연출이 가장 효과적인 위치이다. 따라서 로비와 홀은 단순히 머무르는 곳이나 통로의 공간이 아니라 북카페나 갤러리, 교회홍보관 커피숍, 서점, 문화공연장 등과 같이 다양한 활동이 연출되는 곳으로 꾸며야 한다. 일반인도 쉽게 와서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용도의 설정도 중요하다. 보통 전체연면적의 15~20% 정도의 면적을 점유하므로, 시야의 확장과 개방감, 바닥의 레벨차를 도입하여 역동적인 곳으로 특별히 계획해야 하며 교회의 규모가 크더라도 로비, 홀이 협소하면 전체교회가 협소해보이게 된다. 반면 교회규모가 작더라도 로비, 홀이 넓으면 교회규모도 넓게 인식된다. 로비홀은 교회 여건상 협소하게 배치할 수밖에 없다면 수직면으로 개방하는 것도 지혜이다. 공간이 수평적으로 넓지 못한 경우 수직으로 넓히면 시야가 수직으로 확장되어지므로 넓게 그리고 개방감이 확보된다. 남가주 사랑의 교회는 협소한 로비홀이 수직으로 개방되여져서 넓게 보이게 되어있다. 또 비교적 교회역사가 오래되거나 기념비적인 내용을 홍보할 경우 로비홀은 홍보 전시관, 교회를 알리는 정보공간으로 꾸며서 교회를 처음 출석하는 초신자와 지역주민에게 교회를 소개하는 곳으로 사용해도 효과적이다. 로비홀은 교인의 작품이나 유명작가의 미술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로 이용해도 문화적 공간으로 활동될 수 있다. 지구촌 교회의 로비홀은 미술품을 상설 전시하는 공간으로 이용되며 테이블을 설치하여 차도마시고 만남의 장이되며 휴게공간이 되기도 한다.
복도에 면한 각 실의 벽은 유리창을 크고 넓게 배열하여 쾌적한 복도가 되게 해야 하며 창을 통해 외부의 빛이 간접적으로 도입하면 복도도 밝고 생기 있는 공간이 된다. 또 복도에서는 내부실이 들여다보이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부에 중요한 행사를 할 경우에는 브라인드로 가리게 하면 되므로 평시에는 빛과 안전에서 창을 설치해야하며 복도의 벽은 획일적으로 처리하기보단 작은 그림이나 성경문구 그래픽, 게시판, 알림판, 행사홍보전시공간 등 정보와 다양한 표정이 상존하는 곳으로 꾸며서 단순한 통로에서 의미 있는 곳으로 변화가 필요하다.
교회의 화장실은 문화공간으로 변해가는 추세에 있다. 한편의 시와 성경문구, 아름다운 성화 한쪽구석에서 가지런히 정돈된 책자들 나무와 어항, 새소리가 들리는 화장실은 아마 문화적 공간으로 손색이 없는 연출이다. 교회화장실 역시 교회의 첫인상을 결정 짖는 중요한 요소이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 여성화장실에는 화장을 고칠 수 있는 카운터설치, 유아용 기저귀부스, 변기에는 온좌를 설치하여 이용자를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는 인상을 심어주고 수납공간을 충분히 두어 물건을 잘 놓고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화장실에 자연적인 요소를 많이 도입할수록 화장실은 쾌적해 진다. 마감재료도 타일과 같은 소재를 너무 획일적으로 사용하여 화장실이 획일화되지 않도록 적절한 재료를 잘 배열하여 기존의 화장실다움에서 탈피하는 발상이 필요하다. 또 계단도 고려할 점이 많다.
대부분 교회계단은 정상인과 성인위주로 되어있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 난간의 손잡이는 90cm로 성인들만 잡을 수 있고 노약자나 어린아이들은 어렵게 되어있다. 이것은 노약자나 어린이도 난간을 잡고 오르내릴 수 있게 동시에 2개의 손잡이 난간을 설치하여야 하며 난간 재질도 차가운 금속성의 소재로 대부분 되어있다. 이 부분도 목재나 부드러운 마감으로 바꾸어야 한다. 계단이 통로의 기능만 수행하는 것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기능이 수반하도록 세심히 배려할 필요가 있는데 예를 들면 어린이 교육관 쪽의 계단은 옆에 미끄럼틀을 배치하면 내려올 땐 미끄럼틀이된다. 계단의 벽면은 성경의 이야기를 그래픽으로 연출하여 교육의 기능도 병행할 수 있고 계단참에는 간단한 화분이나 꽃과 같은 자연적인 연출을 도입하면 계단공간이 단순한 통로에서 다양성이 있고 표정이 풍부한 공간으로 바뀔 수 있다. 어린이들이 머무는 유초등부실, 유아부실, 소년부실 등은 안전에 특별히 고려해야 한다. 바닥은 딱딱한 후로링과 같은 소재나 벽은 콘크리트소재 등을 사용하면 넘어지거나 부딪히면 안전사고가 빈번히 발생되는 부위이다. 보통 바닥은 쿠션이 있는 다공질의 매트릭스와 같은 바닥재를 깔아야 하며 바닥에서 1.5m 정도까지의 벽은 쿠션이 있는 소재나 스펀지가 내장된 천류 등으로 마감하여 마음 놓고 행동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어야 한다. 어린이위주의 공간은 다양한 학습기구나 보조 장치물, 장난감등이 많이 수반되므로 실 한쪽에는 반드시 수납공간을 배치해야 하며 면적상 배치가 어려울 경우 천정 속에라도 수납공간을 설치해 봄도 바람직하다. 보통 신발을 벗고 들어가므로 신발수납공간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으면 끝나고 나올 때 굉장히 혼잡한 입구가 된다.
교회의 가구도 일반적인 가구의 도입은 적절치 않다. 왜냐하면 하나의 공간에서 하나의 기능만 수행하지 않기 때문이며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이 다양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공간의 이동성과 더불어 가구의 융통성이다. 예를 들면 중고등부실에서 예배를 드릴 때 청소년들은 개인의자와 테이블을 하나씩 이용할 것이다. 이 경우 예배후에 분반공부가 시작된다고 할 때 개인의자와 테이블 10개를 맞추면 10명이 모일 수 있는 원탁으로 바로 조립된다면 10명단위의 분반이 신속히 이루어지고 이동식 칸막이 4개가 중고등부실을 구획하면 분반 교실로 바로 변하는 것처럼 공간의 융통성과 이를 대응하는 가구의 모듈개념은 교회내부공간의 중요한 개념이다.
교회 로비와 홀은 단순히 공유공간의 제공에서 탈피하여 기능이 수반되도록 연출해야 한다. 로비와 홀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는 면에서 대화와 만남, 음료, 스넥, 커피, 서점, 갤러리와 같은 공공적 기능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단순히 통로에서 적극적인 공간으로 변한다. 특히 지역사회주민이나 초신자들에게는 종교적인 기존 선입감을 없에고 교회가 친근하고 접근하기 쉬운 장소라는 느낌을 제공할 수 있어 더욱 효과적이다. 예수소망교회의 로비와 홀은 이와 같은 기능이 비교적 잘 고려되어있어 일반 보행자나 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머무를 수 있는 곳이다. 로비와 홀은 만남의 장소로서 약속장소로서 매력적이고 부담 없는 곳이다. 이곳은 일반 공간과는 달리 경영마인드가 도입되고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은연중에 기독교적인 문화가 전달되고 보다 자연스럽게 복음의 영역이 확장되는 곳이므로 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지역의 특성을 잘 고려하여 교회가 지역사회와 유기적으로 연합되어 질 수 있는 프로그램의 실행이 필요하다. 다양한 교회 교육의 프로그램, 세미나, 문화강좌 등이 이곳에서 충분히 홍보되고 교회의 비젼과 사역의 내용, 교회의 역사 등을 알릴 수 있는 다양한 로비, 홀의 연출이 필요하다. 따라서 로비, 홀은 접근하기 쉬운 주출입구 부근이 좋다. 이 교회의 서점과 카페는 근접되어있어 동선의 이동이 짧고 편리하다. 복도칸막이가 완전히 유리로 되어있으므로 시선의 개방감이 좋고 쾌적하다. 복도에는 상시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으므로 잠시 감상하면서 사색할 수 있어 표정이 풍부한 공간으로 잘 꾸며저 있다. 일반 교육관과는 달리 복도 천장이 간접조명, 색체의 계획, 바닥 재료나 벽체의구성 등 인테리어의 연출이 교회의 도입부를 세련되게 구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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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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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 칼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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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위로가 필요했던 시대도 없을 듯하다. 사회 양극화 현상은 너무나도 뚜렷하다. 경제는 모두가 고통스러워할 만큼 힘이 든다. 정치는 언제나처럼 희망을 주지 못한다. 곳곳에서 산불로 고통받거나 어려움을 겪는 이웃들도 많다. 남북이 분단되어 불안한 마음은 언제나 똑같다. 국제정세도 만만치 않다. 곳곳에서 전쟁과 재해, 사고로 어려움을 겪는 나라도 적지 않다. 이렇게 위로가 필요하다는 말은 그만큼 우리 인생이 고달프다는 말이다. 어떤 분들은 설교라도 자주 위로가 되는 말씀을 전해 달라고 할 정도로 마음의 고난과 버거움이 심각한 시대를 우리는 살아간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아니 모든 사람이 위로를 구하면서 살지만 실제로 진정한 위로나 강력한 위로는 좀체 찾아내지를 못한다. 가장 흔하게는 ‘잘 될 겁니다. 힘내세요.’ 하는 식의 피상적인 위로가 있다. 잘 안된다고 해서 책임질 것도 아니다. 그냥 하는 말이다. 때로는 임종을 앞두고 있는 환자 앞에서도 ‘곧 다시 일어서실 겁니다.’라는 말들이 다 그렇다. 수험생에게 재수하면 내년에는 잘 될 거야. 이 말도 큰 위로가 되지 않는다. 세상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위로의 대부분은 이런 수준이다. 이 말들이 우리의 마음에 참된 위로를 가져다주겠는가? 병이 낫고 회복되어도 결국은 다 죽는다.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진짜 딜레마는 바로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의 실존은 불안과 근심이라는 요소를 피할 수 없이 안고 살아가게 되어있다. 그렇다면 진짜 위로는 어디 있는가? 싸구려 위로가 아닌 진짜 위로는 무엇인가? 우리 인생의 모든 근심과 불안을 이길 수 있는 진짜 위로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성경 전체에서 위로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최고의 말씀 요한복음 14장 1절 말씀일 것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최고의 본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한계 있는 인간이 주는 위로가 아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인간의 한계와 고통과 근심을 경험하시고 주신 위로이다. ‘근심하지 말라’ 반대말이 무엇인가? ‘주 예수를 믿으라’이다.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신 위로의 말씀은 오늘 고민과 걱정거리가 많은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주님의 위로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라는 것이다. 이 위로는 잠깐의 만족과 감정적 위안이나 고통의 감소를 가져오는 위로가 아니다. 이 위로는 궁극적인 위로이다. 우리 인생이 가진 근본적인 불안과 근심의 문제를 이기게 만드는 위로이다. 병든 자가 건강을 찾는다고 해도 그건 일시적일 뿐이다. 사업을 다시 일으켜 재물을 많이 모으게 되었다고 해도 잠깐 있다가 다 놓고 가야 하는 길이다. 그 어느 것도 이 세상에서는 완전한 보장을 줄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리고 인간이 주는 위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주님의 위로는 다르다. 어떤 상황, 어떤 근심거리도 이 위로를 빼앗지 못한다. 도리어 이 위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가지는 모든 근심을 다 앗아갈 만큼 강력한 실재이다. 오늘 우리 근심의 대부분이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어찌 살까? 이 문제를 어찌 해결할까? 이 사람을 어찌할까? 이런 근심은 땅에 속한 근심들이다. 이런 근심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천국을 잊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근심은 다른 것이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뜻을 바르게 알 수 있을까? 내 삶에서 혹은 내 결정에 있어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근심들이다. 여기서 이 위로는 오직 하나님의 자녀만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과
그 일의 능력을 믿는 자들을 위한 위로이다. 그리스도를 만난 자,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갈망하는 자만을 위한 위로이다. 오늘 이 위로가 필요한 모든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길 기도한다. 우리 다음 세대가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하늘의 위로를 받고 살아가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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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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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가정에서의 신앙교육, 5가지만 기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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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 5월입니다. 이때쯤이면 교회마다 신앙전승을 잇기 위한 여러 가지 특별한 프로그램을 합니다. 하지만 원리에 대한 이해 없이 당장 눈앞의 변화만을 위해서 프로그램에 매달린다면 매년 또 다른 갈증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기독교교육학자인 존 웨스터호프가 제시한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을 위한 5가지 지침을 알아보겠습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 교육, 특히 가정에서의 신앙 형성에 깊은 관심을 가진 학자입니다. 그가 제시한 이 다섯 가지 지침은, 신앙이 단순히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함께 경험되고 공유되어야 한다는 관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1. 성서 이야기를 함께 반복하며 이야기해야 한다.
신앙은 이야기를 통해 전해진다고 웨스터호프는 강조합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성경 속 이야기를 자주 나누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자연스럽게 익히도록 해야 합니다. 단순히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기억하고, 질문하고, 토론하는 것이 중요해요. 이야기를 삶에 연결시키는 반복이 신앙의 뿌리를 깊게 합니다. 이를 위해 매주 저녁 한 번은 ‘성경 이야기 시간’을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아이와 함께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읽고, "너라면 동물 한 쌍을 데려간다면 어떤 동물을 고를래?" 하고 묻는 것이죠. 이야기를 읽은 후에는 아이가 이해한 것을 직접 말하게 하고, 그림으로 그려보기도 하면 더 좋습니다. 또 일상 속에서 비가 오는 날 "비가 오니까 노아 이야기 생각나네!" 하며 자연스럽게 다시 연결 지을 수 있습니다.
2. 신앙과 생활을 즐거워하며 삶 속에서 찬양해야 한다.
신앙은 우리 삶에 기쁨이 되는 모습,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일상 속 작은 일에도 “하나님께 감사해”라고 말하거나, 즐거운 마음으로 찬양을 함께 부르는 것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를테면 아침에 아이를 깨울 때 "오늘도 하나님이 주신 좋은 하루야~" 하고 노래하듯 말하거나, 차를 타고 가면서 가족이 좋아하는 찬양곡을 크게 틀고 다 함께 신나게 따라 부르는 것이 좋습니다. 또, 생일이나 기념일에는 "하나님이 너를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 하고 축복의 말을 던짐을 통해 신앙과 기쁨이 연결되게 하는 것도 좋습니다.
3. 함께 기도해야 한다.
가족이 함께 기도하는 것은 공동체로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식사 전 짧은 기도, 잠들기 전 함께 드리는 감사기도 등 일상의 순간마다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특히 아이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함께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식사 전 "짧은 기도 릴레이"를 하는 것도 좋습니다. 아빠가 "하나님, 오늘 하루 감사합니다" 하고 시작하면, 아이는 "맛있는 음식 주셔서 고마워요" 하고 이어가는 것입니다. 잠들기 전에는 오늘 하루 있었던 기쁜 일 한 가지와 힘들었던 일 한 가지를 이야기하고, 그걸 가지고 함께 기도한다. 예를 들어 "하람이가 친구랑 놀아서 기뻤대요. 친구를 지켜주세요" 이렇게 말이죠.
4. 서로 상대방의 말을 듣고 말해야 한다.
신앙의 대화는 일방향이 아니어야 합니다. 아이들도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부모는 그것을 진심으로 경청해야 합니다. “이건 맞고 저건 틀려”라고 바로 재단하기보다, 아이의 신앙적 질문이나 고민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소통할 때 아이들은 신앙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만약 아이가 "하나님은 왜 눈에 안 보여?"라고 물을 때, "그런 생각을 했구나!" 하고 반가워하며 들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답을 바로 주기보다는 "너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되묻고, 아이의 생각을 끝까지 경청합니다. 신앙 질문에 대해 무조건 정답을 주려 하지 않고, 대화를 통해 아이가 스스로 신앙을 탐색하게 도와주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5. 봉사와 증거의 신앙적인 활동을 함께 수행해야 한다.
신앙은 말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체득됩니다. 가족이 함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거나, 교회나 지역사회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신앙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아이들은 신앙이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가족이 함께 김장을 하면서 "이 김치는 어려운 이웃들과 나눌 거야"라고 설명해줄 수 있습니다. 아이가 직접 배추 한 포기를 포장하게 하면서, 작은 손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걸 느끼게 합니다. 혹은, 동네 청소나 교회 봉사를 가족 프로젝트처럼 함께 진행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이렇게 행동하는 거야" 하고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것도 좋습니다.
웨스터호프는 전체적으로 "신앙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이 다섯 가지 모두 ‘함께’, ‘생활 속에서’, ‘즐거움과 진심으로’가 핵심 키워드입니다. 이 다섯 가지는 딱딱한 '교육'이 아니라 ➡이야기하기 ➡ 즐거워하기 ➡ 함께 기도하기 ➡ 진심으로 듣고 말하기 ➡ 사랑을 행동으로 보이기 라는 삶 속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번 오월은 자녀들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행복한 한 달로 보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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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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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애] 장애에 대한 자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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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부심’이란 말을 한 번쯤은 들어보거나 사용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 자부심’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자신의 가치나 능력을 믿고 당당히 여기는 마음’이 ‘자부심’(自負心, pride)인데, “장애에도 자부심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거나, 의구심을 갖는 사람이 있는 가 반면, “장애를 갖고 있다고 해도 자부심이 있지”하는 사람도 있다.
‘장애 자부심’이란, ‘기존의 사회가 만들어 온 부정적인 장애 이미지에 대한 장애인 스스로의 도전이며, 역량강화된 자기 인정이고, 외부 세계에 대한 긍정적이고 주체적인 자기표현’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 대부분이 전신거울을 보지 않는다고 한다. 집에 전신거울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장애를 가진 자신의 모습을 마주할 용기가 아직은 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본인 역시 선천적 뇌성마비장애와 스무 살에 갖게 된 왼쪽 편마비장애로 인하여 왼쪽과 오른쪽 어깨 길이에 차이가 있고, 허벅지 굵기 차이도 크게 난다. 그리고 마비된 왼손은 대체적으로 굽어 있고 얼굴은 기울어져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샤워를 한 후, 또는 옷을 입기 전이나 외출을 하기 전에 현관 신발장에 있는 전신거울을 자주 본다.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장애로 인하여 비틀어지고 좌우대칭이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누군가는 꺼려하고 보기 싫어할 수도 있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장애를 가진 그 모습도 인정해야 할 나의 모습이며, 하나님께서도 있는 모습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아름답게 여겨 주시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만약 장애를 가진 몸에서 장애를 갖지 않은 몸을 가질 수 있는 신약이 개발된다면 어떠할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아픔을 겪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나를 아픔과 고통, 장애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신약을 구입해서 복용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선택은 무엇일까? 먹지 않을 것이다. 왜 먹지 않을 거냐고? 내게 장애 자부심이 없었던 예전이었으면 복용한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타인이 보기에 불편해 보이고 행복할 것 같지 않아 보이는 내 모습이 좋다. 물론 불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불행하지는 않다. 오히려 장애로 인하여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어서 행복하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장애인식개선강사로, 목사로 학생들이나 성도들에게 알려줄 수 있다는 사실이 나의 장애 자부심을 가득 채우고 있다.
장애당사자이면서, 장애인식개선교육 강사인 내가 먼저 나의 장애를 마주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한다면, 즉 장애 자부심이 없다면 어찌 타인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어찌 글을 쓸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복음을 증거하고 전파함에 있어서 머뭇거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장애인식개선은 물리적 환경변화도 중요하고, 비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우선적으로 장애 당사자부터 자신이 가진 장애에 대한 자부심을 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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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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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누가 본회퍼와 히틀러를 자꾸 소환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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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총신의 조직신학자 문병호 교수가 <칼 바르트 비판>을 출간했습니다, 저자는 지피지기의 마음으로 바르트의 대표작인 <교회교의학> 4권 16부 내용 전체를 개괄하고 핵심 내용을 병기한 한국 최초의 작업물을 저서의 말미에 남겼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바르트 신학을 비판하는 7가지의 테제를 역시 권말에 결론처럼 제시합니다. 하지만 자신만의 도그마에 빠지지 않기 위해 칼빈, 투레틴, 하지, 바빙크, 워필드, 오웬 등을 소환하면서도 불트만, 몰트만, 블로허, 판넨베르크 등 현대신학자들의 견해를 인용하고 심지어 가톨릭 계열의 칼 라너와 발타자르까지 언급합니다. 뿐만 아니라 최근 학자들 즉 미글리오리나 마이클 호튼 등의 성과도 소개하고 특히 현대 바르트의 권위자라 할 수 있는 맥코막이나 헌싱어 등의 의견을 빠짐없이 인용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주목할 사람은 에버하르트 부시인데, 방대하고 탁월한 바르트 전기를 기록한 학자이기 때문입니다. 상기한 비판서 앞부분도 바르트의 일대기를 간략하게 소개하는데 그럴 때 필연적으로 만나는 인물이 있습니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바르트는 히틀러를 비판하면서 바르멘 선언(1934)의 주역을 자처했는데 당연하게도 나치당의 핍박을 받아 추방과 망명 아닌 망명을 거듭해야 했습니다.
나치의 전체주의가 지배하던 푸코 식으로 말하자면 광기의 시대에 히틀러를 공박하던 또 하나의 상징적인 인물이 바로 본회퍼입니다. 그는 “일부 사람의 권력은 다른 이들의 어리석음을 필요로 한다”고 설파했는데, 당시 히틀러를 메시아처럼 추앙했던 독일 교회를 두고 한 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종교개혁의 발상지였던 독일 기독교는 히틀러를 지지하고 심지어 일종의 메시아라면서 추종했습니다. 다시 독일을 하나가 되게 하고 부강하게 만들며 경제를 일으키고 민족자긍심을 높여준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들은 히틀러 정권이 자행했던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인권 모독 및 억압 그리고 민주주의에 가한 모욕은 물론 유대인 학살 같은 만행도 눈을 감거나 옹호하기 바빴습니다. 당시에는 그들이 주류였고, 그들이 옳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칼 바르트는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타국으로 이주를 거듭해야 했고, 본회퍼는 1945년 4월 9일 결국 나치정권에 의해 사형에 처해집니다. 하지만 불과 한 달이 지나지 않는 1945년 4월 30일 히틀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후 역사는 누구도 히틀러를 정당화하고 당시 그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던 독일의 그리스도인들을 의롭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최근 한국에 그것도 기독교계에 “미친 자에게 운전대를 맡길 수 없다”는 본회퍼의 말을 인용하면서 본회퍼를 자처하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본회퍼 전문가인 김성호 박사에 따르면 정확한 표현은 ‘거리에 미친 사람이 차를 몰고 인도로 돌진하는 모습을 본다면 목사로서 죽은 자의 장례를 치르거나 유족을 위로하기보다는 먼저 차에 뛰어올라 운전대에서 운전자를 끌어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1946년 3월 본회퍼 사후 공개된 편지에서)이며, 설령 그와 같이 바르트 식으로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를 하더라도 과연 운전대를 잡은 미친 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왜곡이 있고 역사적 평가 앞에 정당할 수 있겠는가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정치인 한 사람도 현재 일단의 세력이 히틀러보다 더하다고 발언하는 바람에 이번에는 <해리 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볼드모트” 같은 그 이름이 직접적으로 언급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시대에 히틀러 같은 존재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만일 있다면 누가 과연 히틀러 같은 존재입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역사는 냉정하게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바로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서는 누가 과연 옳은 지, 누가 과연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지,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공의를 구현하는 길을 가고 있는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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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