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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의 설교 분석과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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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김삼환 목사는 주일예배 설교시간에 “신학대학에서 저에 대한 김삼환목사학과를 개설 하는 방안을 연구 중에 있다고 하는데 다 쓸데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다. 왜 신대원에서 김 목사의 목회와 설교에 대해 주목하고 연구대상으로 삼는가? 우연한 일이나 장난삼아 하는 실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우뚝 선 목회 성공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연구할만한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가 근10년 이상을 영상 설교를 눈여겨 관찰 한 것을 여기에 다 기록한다면 마치 대학 논문과 같을 것이다.
경북 영양군의 시골 출신으로, 특별하지 않는 촌부에 가까운 그에게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평범한 질문이다. 지금의 김삼환 목사는 하루아침에 유명세를 탄 것이 아니다. 36년이란 긴 시간동안 한 눈 팔지 않고 오직 믿음과 복음에 매달리고 전념했던 그의 불굴의 목회는 그야말로 눈물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압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했던 야곱처럼 목회기도실이나 기도원에서 눈물과 땀으로 흠뻑 젖어가며 했던 절박한 기도에 응답하신 것은 아니었을까?
포항중앙교회 원로인 서임중 목사의 아들이 서울 명성교회 부목사로 있을 때 옆에서 지켜본 것을 집회에서 말했던 기억이 난다. 김삼환 목사가 기도실에서 기도할 때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하는 지 모든 사무가 올스톱이 될 정도였으며, 기도실 근처에 가면 비통하리만치 눈물의 기도가 계속됐다면서 존경심이 우러나온다고 말했다. 그리고 김삼환 목사의 바라보면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들고 내려오던 모세의 얼굴처럼 빛나더라는 표현에 왠지 수긍이 간다.
▲목회의 기본은 기도의 열정
하루 중 많은 시간을 기도하는 데 전념한 것은 부인 못 할 사실이다. 그의 목회의 기본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만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주는 메시지가 가슴에 와 닿는다.
두 번째 그의 목회의 기본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일 것이다. 김 목사는 어느 곳이든지 설교하는 곳에서 꼭 찬양을 한다. 설교 중간이나 끝자락에는 찬양 한 두곡이 부른다. 설교시간에 찬양은 교인들을 더 집중하게 한다. 교인들과 함께 부름으로 집중력을 모으고 보다 경건하게 설교를 들을 수 있게 한다.
세 번째, 김 목사는 설교 중에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유명한 명언을 인용하거나 뛰어난 학자들의 책 내용 요약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시골에 흐르는 시냇물처럼 고향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런 평범하고 쉬운 용어를 구사하거나 일상생활이 묻어 있는 삶의 현장을 소개하면서 살아있는 실체를 담은 설교로 감동을 주고 있다. 그리고 설교 중 절정에 이르면 오른손을 가슴에 댄다. 사람의 몸에서 가장 중요한 심장에 손을 얹는 모습은 마치 우리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모습과 같아 하나님께 충성을 맹세하는 것 같다
가난한 목회자로 교회에서 쫓겨나고 8번 넘게 이사를 해야 했던 김 목사는 늘 “나는 수도권 안에서 목회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많이 이사하고 넓은 평수의 아파트보다 가난하게 살아왔다”고 말한다. 그것이 몸에 묻어나 설교와 일치되는 점을 보이고 있다. 어려운 목회환경과 생활을 경험 한 김 목사이기에 주변의 선후배 목회자들이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면 도움을 주는 것이 대부분이다. 어느 후배 목회자가 개척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자 은행에서 긴급 자금으로 대출받아 3천만 원을 빌려줬다. 수년 내에 꼭 갚겠다고 했던 후배 목사는 시간이 지나도 갚지 않았다. 계속 이자를 무는 상황에서 후배목사에게 갚아줄 것을 요청하자 오히려 큰소리를 내며 하나님 돈 아니냐, 좀 거저 주면 안 되냐는 식의 대답이 돌아왔다고 했다.
2015년 12월 27일 공동의회가 열리는 오후시간, 4천3백여 명의 교인들 앞에서 수석장로인 김성태 장로가 35년간의 퇴직금 3억6천만 원과 공로위로금 29억6천여만 원을 전달했다. 김 목사는 이 자리에서 “여기까지 온 것도 다 하나님의 갚을 길 없는 은혜”라면서 부목사와 어려운 교인 그리고 선교기금으로 써달라며 전액을 교회에 도로 내어놓았다. 빈 마음으로 돌아가는 모습에 교인들은 존경을 표했다. 후임자 없이 은퇴한 후 노회가 정한 임시당회장과 해외일정을 위해 자리를 비웠을 때 두 명의 장신대 교수가 설교자로 나서기도 했지만, 교인들이 지금도 김삼환 목사의 설교를 듣기 원하는 것은 그가 보인 언행일치의 모습 때문이지 않을까.
필자는 김삼환 목사와 두 번 정도 만난 적이 있다. 2014년 9월 통합교단 총회에서 였다. 그때 총회 장소가 명성교회였는데, 총회 둘째 날 새벽기도 후 아침식사 시간에 교회 옆에 있는 식당에 초대받았다. 자그마한 시락국집이었다. 식당 안 부엌에서 김 목사가 직접 국을 뜨고 있었다. 시골 고향집에서의 소박한 모습으로 손님에게 직접 대접하는 광경에 예수님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제자들에게 조반을 먹으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했다. 그 후 2015년 3월 명성교회 당회장실에서 김 목사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서로 주고받은 말들과 그의 표정이 퍽 인상적이었다. 교회비자금 논란과 관련한 인터뷰였다. 그때 김 목사는 교회를 어렵게 하기 위한 사탄의 속임수라고 일축했다.
서울 명성교회의 교인들은 여전히 김삼환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이고 있다. 은퇴한 김 목사를 향해 이제 그만 하라는 사람이 없다. 설교의 감동은 시간이 지나도 빛을 바래지 않는다. 필자도 주일이면 방송을 통해 하루 두 차례 그의 설교를 듣고 있지만, 지루하지 않지 않고 그저 감동만 받는다.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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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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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산] 풀무불 속의 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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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을 어떻게 무사히 보낼 수 있을까?” 무더위에 지쳐가고 있는 노약자들과 제대로 피서를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지 못한 서민들의 절박한 하소연이다. 지구촌 이곳 저곳에서 폭염으로 인한 사고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올 여름 더위가 참으로 큰 문제이다. 더위를 피해 시원한 곳을 찾아 떠날 수 있는 자들에게는 별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지만, 여름 더위를 견디지 못해 열사병의 위협까지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일을 해야 하는 자들에게는 참으로 힘든 시간이 되고 있다.
이런 별난 여름 더위를 생각하면서, 떠 올리는 한 장면이 있다. 고대 기독교예술사 연구자들에 따르면, 프리스킬라 카타콤의 장막의 묘실에 여러 조형물이 그려져 있는데, 이 중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것이 다니엘서 3장 19- 25절에 나오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세 청년에 얽힌 이야기를 조형화한 그림이라고 한다.
이 그림에는 세 청년이 프리기아풍의 모자에 통이 넓은 바지와 겉옷을 입고 있으며, 발 아래로는 뜨거운 풀무불이 이들을 삼킬 듯 불길이 요동치고 있다. 이들의 위로는 올리브 잎사귀를 입에 물은 비둘기 한 마리가 스쳐지나가고 있고, 세 청년은 두 손을 들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형상을 내보이고 있다.
세 청년이 던짐을 당한 풀무불의 온도가 얼마나 높았던지, 그 때 상황을 성경은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단 3:22)라고 기록하고 있다. 풀무불은 풀무질을 하여 피운 불이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풀무는 손잡이를 잡고 밀고 당기는 손풀무와 발로 밟아서 바람을 내는 골풀무(발풀무 혹은 디딜풀무)로 나뉘어지는데, 바벨론 제국 시대에 어떤 형태의 풀무가 사용되었는지는 고고학적 연구가 더 필요한 부분이다. 풀무를 움직이는 불매꾼들이 동원되어 풀무불의 온도를 최고조로 높였을 것이다. 사실 옛한글 성경은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라고 번역해 두고 있지만, 현재는 풀무불로 번역해 두고 있다. 풀무를 사용해서 온도를 높인 일종의 용광로가 뜨거워진 것이다. 그래서 영어 번역에는 불타는 용광로('blazing furnace')라고 번역해 놓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세 청년을 붙든 느부갓네살의 신하들이 이 풀무불에 태워져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온도였기에 죽음을 당했을까? 현재의 자료들을 참고하면, 대장간에서 사용하는 쇠를 다루는 최고의 온도는 섭씨 2000도 정도이며, 쇠를 녹이는 용광로에서 사용하는 온도는 섭씨 1400 - 3500도 정도라고 한다. 바벨론 제국 시대에 화형을 한 기록들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분명 불에 태워죽이는 처형에 세 청년이 해당된 것은 확실하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세 청년이 던져졌던 풀무불의 온도는 지금의 대장간이나 용광로에서 쇠를 녹이고 다루는 정도의 높은 온도는 아니었겠지만, 사람의 생명을 순간적으로 정지시킬 수 있는 온도였음은 확실하다. 또한 보통 때보다 칠 배나 더 뜨겁게 하라고 명령한 것을 감안한다면,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상태의 최소 섭씨 100도 이상의 온도였음은 확실하다.
지금 우리는 섭씨 30도에서 40도 사이의 뜨거운 열기에 견디기가 힘들어 어디론가 시원한 곳을 찾아 피서를 떠나고 있다. 이 무더위를 넘어서기 위해 에어콘 밑으로, 선풍기 앞으로, 그늘이 있는 산 속으로, 시원한 바다로 모두들 떠나기에 바쁘다.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참 모습이다.
그렇다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세 청년이 섭씨 100도 이상의 풀무불에서 견뎠던 피서법을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것은 특별한 경우이니, 어찌 일상에 적용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반드시 따라 오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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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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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관련, 군형법 92조6 합헌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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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법재판소가 '군형법 92조 6' 합헌 판결을 내렸다.
동성애자 단체와 일부 국회의원들이 군형법 92조6(추행)이 동성 군인간 합의에 의한 성관계를 규율하는 것은 성적 자기 결정권, 사생활의 자유 침해, 헌법상 평등원칙, 과잉금지원칙에 위배한다며 헌법소원을 제기한 것에 대해 지난 7월28일 헌법재판소가 5:4로 합헌 판결을 결정했다. 헌재는 “재판관 5인의 법정의견은 ‘군이라는 공동사회의 건전한 생활과 군기’ 나아가 국가존립과 모든 자유의 전제조건인 ‘국가안보를 위한 전투력 보존’이라는 심판대상조항의 입법목적이 정당화하고, 우리나라의 안보상황 및 징병제도를 고려할 때 심판대상조항은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으나, 재판관 4인의 반대의견은 심판대상조항이 죄형법정주의 명확성원칙에 위반됨을 지적하였다”고 밝혔다. 이번 판결에 대해 동성애를 반대하는 한국교회와 보수단체들이 일제히 환영의사를 밝혔다. 한국교회언론회도 “군대를 유지케 하는 군기 확립은 물론, 전투력에도 심대한 영향을 줄 사안을 헌법재판소가 정확히 판단한 것이다”고 환영했다.한편, 동성애 반대 단체들은 보건복지부에 국내 에이즈의 주요 감염경로가 남성 동성애임을 밝혀 달라는 탄원운동에 착수했다. 보건복지부 자체 자료(제4차 국민건강증진종합계획)에는 남성 동성애가 국내 에이즈의 주요 감염경로라고 되어 있지만, 질병관리본부 홈페이지나 에이즈 관련 인쇄물에는 전혀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 동성애 반대 단체들은 “청소년들과 청년들은 알지 못하고 매년 수백명씩 동성애로 에이즈에 감염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번 탄원운동으로 동성애가 에이즈의 주 원인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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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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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희 교수] 안전과 생명살림, 기억과 책임, 그리고 교회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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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8일 헌법재판소에서 군형법 92조의 6(구 군형법 제 92조의 5)에 대한 합헌 판결을 내려 많은 애국시민단체들의 환영과 지지를 받았다. 이 조항은 ‘군대 내 항문성교 금지’ 조항으로 동성간 성행위를 금지하는 남한 내 유일한 법안으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던 중 헌법재판관 9명 중 5명이 합헌, 4명이 위헌 의견을 내 합헌으로 판결되었다.
이번 판결은 애국시민이라면 당연히 환영할 결정이었다. 첫 번째로 우리나라의 특수상황을 볼 때에 그렇다. 현재 우리나라는 남북한 대치중인 휴전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군대내 동성애를 허용하는 것은 군전투력뿐만 아니라 군인들의 사기를 저하시킬 것이다. 북한에서는 동성애를 사형, 감옥형 등으로 엄격하게 처형하고 있는데 남한에서만 군대내 동성애를 허용한다면 심각한 국가안보에 위협이 될 것이다.
둘째로 군대내 동성애를 허용하면 많은 젊은이들이 군대에 가서 상급자에게 성적으로 피해를 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이는 동성애자 폭증이라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또한 자연스럽게 동성간 성행위로 인해 에이즈 발병률이 높아지게 되고 변실금 등 각종 질환 유발로 국민 보건과 의료비용에도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키는 망국적인 결과를 초래시킬 것이다.
헌재의 이번 합헌 판결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지만, 우리나라는 마냥 넋 놓고 좋아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그 이유는 계속되는 동성애 합법화 시도와 기성세대와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10, 20대들의 매우 진보적인 성향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부모와 교육자들은 남겨진 과제와 같은 일들을 해 나가야 한다.
첫째로 국가인권위원회법 2조 3항(동성애차별금지조항)을 삭제시키는 것이다. 이 조항으로부터 동성애에 대해서 부정적인 말을 못 하게 하는 ‘인권보도준칙’이 만들어졌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계속적으로 권고하며 청소년들에게도 동성애를 옹호, 미화, 선전하는 근거가 제공되고 있다.
둘째로 교과서 내에 이미 삽입 된 동성애 옹호, 미화 내용을 삭제해야 한다. 현재 초·중·고등학교에서 편향된 보건, 사회 등의 교과서로 이미 동성애를 미화하고 옹호하는 잘못된 성윤리가 가르쳐지고 있다. 이 내용을 바로 잡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우리의 자녀들이 올바른 성윤리를 배우며 자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동성애를 불법화한 80개 국가와 동성애가 불법은 아니지만 부도덕하게 간주되며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 120개 국가들이 서로 연합하여 ‘200개 국가’가 ‘국제적인 연대’를 조직하여야 한다. 그래서 동성애를 합법화한 20여개 국가들이 추진하고 있는 전세계 국가들을 향한 동성애 합법화 압력을 막아서야 한다.
시대가 점점 악해지면서 사단은 ‘동성애 합법화’라는 카드를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거부하며, 반성경적인 풍조로 이 시대를 장악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마지막 시대라 하며 이런 동성애 문화의 흐름은 어쩔 수 없다고 핑계대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은 악인이 돌이키는 것이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이 나라가 동성애가 합법화 되지 않는 나라가 되도록, 서양에서 밀려오는 동성애의 물결을 막아서는 세계적인 방파제가 되어 열방을 의의 길로 선도하는 거룩한 대한민국으로 세워지도록 깨어 기도하며 행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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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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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칼럼]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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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를 〈인간답게 , 품위 있게 살 수 있는 사회〉로 만들기 위하여 인류는 오랜 세월 다양한 실험을 해 보았다. 참으로 긴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하나의 이상적인 사회제도를 만들어 내었는데 그것이 곧 〈민주주의, 民主主義〉이다 민주주의 요체 (핵심)는 ①천부 인권사상 ②시장 경제이다 시장경제의 내용은 시장(수요와 공급)의 자유 사유재산인정, 자본흐름의 자유이다.
지금은 ‘시장경제’가 민주주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시장경제는 〈소비가 미덕이다〉고 줄기차게 외친다. 생존과 생계조차 힘들던 1960~70년대에 우리는 이런 구호를 사치스럽고 꿈같은 희망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소비가 남용되고 과잉소비로 말미암는 여러 가지 폐단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 소비하는 것이 취미가 되더니 그것도 이제는 싫증을 느끼면서 사람들은 너도 나도 심심하다고 한다.
이 집단적 〈무관심과 심심함〉이 “먹는 것, 요리하는 것, 음식 열풍”으로 쏟아지고 있다.
근래에 읽은 충격적인 글 일부분을 소개한다. 「어느 시간에 TV 채널을 돌려도 요리 Program을 만난다.〈건강 식단 만들기〉도 있고 산해진미 프로도 있다. 어느 여배우 집의 냉장고를 열어젖히자 프랑스에서 비행기로 공수해온 진기한 버섯과 지중해産 요리 재료가 그득했다.
배곯던 시절을 경험한 우리세대의 눈에는 ‘호기심’보다 “저러고도 벼락 안 맞겠나?” 하는 두려움이 밀려온다.... 〈요리사〉라는 좋은 우리말을 밀어내고 〈세프〉라는 서양어를 유식한 척 더 선호한다.
영국이 세계를 제패하고 있을 때 후발국가 독일이 영국을 추격해오자 영국국민들은 〈국가적 위기〉라고 모두 소리를 높였다. 그 때가 100년 전 일이다... 그러나 이내 영국 사람들은 〈무관심과 심심하다〉라는 유행병에 빠져 들었다. 「맛없는 소박한 음식」도 감사하면서 달게 잘 먹던 영국인들이 미식열풍(美食?風)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맛집〉을 찾아 도버해협을 건너 프랑스와 이태리 까지 맛을 찾아 떠나는 순례행렬이 줄을 이었다....」
오늘 우리 사회가 국력이 기울기 시작하던 100년 전의 저 영국과 닮은꼴이 돼간다.
참으로 애타는 마음이 일어난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 동안 음식 잔반으로 내버려지는 음식이 어느 정도냐 하면 북한주민 전체가 한 해 동안 먹을 수 있는 분량이라고 한다. 전국 곳곳이 지나친 소비와 낭비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폐기물, 쓰레기처리 문제 때문에 대 홍역을 치루고 있다. 정말 “우리가 이렇게 마구 낭비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책망 받지 않을 까?”하는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우선 우리 그리스도인들부터〈절제의 은사〉를 발휘하자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충분히 〈부요해진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는 부요하고 부족함이 없다. 이제는 얼마든지 적게 쓰고 절제할 수 있다. 지구가 지니고 있는 자원은 한정돼 있다. 우리는 다음세대 우리 후손들도 이 땅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뱃새다 들판에서 큰 무리를 먹이신 후에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끼고 절제할 때 귀한 줄을 알게 되고 감사하고 만족하게 된다. 편리주의, 낭비주의, 사치화를 경계하고 절제의 미덕을 세워 나감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아름다움을 널리 펼쳐 보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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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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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률상식] 비대위의 교인 총회 노회 탈퇴는 불법, 당연 무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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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담임목사 해임을 위한 공동의회 소집 청원에 대하여
정치 제4장 제4조 1항에 “위임목사는 지교회의 청빙으로 노회의 위임을 받은 목사니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그 담임한 교회를 만 70세까지 시무한다.”고 규정하였다.
즉 위임목사는 만 70세까지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위임을 해제(해임)할 수가 없는 것이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규정이다. 다만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해임을 할 수 있는데 그 특별한 경우에도 반드시 노회가 해임하는 것이지(정치 제16장, 제17장) 그 목사를 청빙한 지교회가 해임할 수는 없다. 만일 지교회가 정당한 이유 없이 위임목사를 해제하려 함은 하나님과 공회 앞에서 서약한 교회 헌법 정치 제15장 제11조 2의 서약을 어긴 범법행위가 된다.
즉 장로는 지교회가 장립 위임하였으니 지교회가 공동의회로(정치 제13장 제4조) 시무 해임을 할 수 있고, 당회 결의로 권고사직(정치 제13장 제6조) 등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목사는 교회가 담임목사의 해임이나 권고 사임이나 권고사직 등을 할 수 없고, 상술한바와 같이 오직 노회의 직무로서 노회만 할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러므로 만일 지교회가 장로의 시무 투표를 하는 것과 같이 담임목사의 해임이나 계속 시무를 묻는 공동의회를 했다면 이는 그 공동의회의 결과는 효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용서 받을 수 없는 범죄 행위이다.
그런데 분당의 대형교회인 모 교회는 목사 스스로 7년마다 장로처럼 공동의회로 위임목사의 계속 시무를 묻는 투표를 한다고 자랑삼아 TV방송으로 공개까지 하였으니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해 교회는 전국 교회와 교단의 헌정 질서를 위하여 즉시 그 위헌적 불법 공동의회를 취소해야 한다. 전국의 많은 교회들이 분당의 그 교회를 사례로 들면서 우리 교회도 “7년마다 위임목사 계속 시무 투표를 시행하자”는 위헌적 불법 요청으로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현실을 분당의 그 대형교회 목사는 아는가 모르는가?
부언컨대 소위 비대위가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하여 “영동중앙교회 담임목사 해임 결의 및 신임 담임목사 선임을 위한 임시 공동의회 소집 요청 건”을 통보하였다고 하니 이는 담임목사에게 담임목사 자신의 해임을 위한 공동의회 소집 요청이므로 허락하지 않을 것을 예견하고 2주 동안 기다렸다가 법원에 공동의회(교인 총회) 소집 허락 청원을 하고자 하는 꼼수를 부리는 것 같아 보인다.
이에 대하여 법원은 종교 단체인 교회를 종교 단체로 보지 않고 비법인 사단으로 비하하여 교회의 공동의회 소집 청원을 허락한 예가 있다. 그러나 교회 헌법은 장로를 공동의회로 시무 해임하는 것은 교회 헌법의 정한바 당연하지만(정치 제13장 제4조) 위임목사의 시무 해임을 위한 공동의회는 교회 헌법이 정한바 없으므로 법원도 역시 정교분리의 원칙에 의하여 법이 정한 다른 일반 행정 사안이라면 혹 몰라도 “담임목사 해임을 위한 공동의회”를 허락해서는 절대 안 된다.
소위 비대위에 묻노니 비대위는 청빙하고자 하는 신임 목사를 미리 지정해 놓고 신임 목사 선임을 위한 공동의회 소집을 청원한다고 허세를 부리는가? 현재 담임목사가 버젓이 시무를 하고 있는데 어찌 잠꼬대 같은 신임 목사 선임을 위한 공동의회 운운하는가?
4. 총회 사무국의 서류 발급 거부에 대하여
총회 사무국은 스스로 비대위 측 영동중앙교회 측 운운하면서 양측에 대하여 서류 발급을 거부하지는 아니한 것으로 본다.
다만 비대위가 총회 임원회에 6월 8일 교인 총회를 하였고, 6월 9일 비상대책회의를 하였고, 6월 10일 노회 탈퇴 공고를 하였다고 통고한 것을 빙자하여 총회 임원회가 총회 사무국 담당 직원에게 지시한 것이 아니겠는가?
총회 임원회는 상술한바 교회의 비대위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 총회 서기는 비대위가 서류 발급을 요청하는 것은 거부할지언정 영동중앙교회의 담임목사가 합법적인 서류 발급을 요구할 경우 정당한 이유 없이 서류 발급을 거부하면 직무 유기가 될 뿐만 아니라 노회가 사건을 수습하는 일에 훼방 자가 됨에 다름 아니다.
5. 결론
질의자의 질의 내용으로 볼 때 비대위가 행한 일은 한 가지도 합법적인 행위는 없고, 불법만 골라서 행함으로 교회와 노회와 총회 임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 같아 보인다.
해 노회는 본 건을 처리함에 있어서 정치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마18:15-17에 말씀한 주님의 교훈대로 권고하여(권징 제9조, 제18조) 비대위의 해산과 그들의 범죄 행위를 회개케 함으로 신령적 유익을 도모하여(권징 제3조) 교회를 더 잘 섬기는 성숙한 성도들이 되게 할 것이요, 끝까지 회개치 아니하면 권징하여(권징 제35조: 출교도 할 수 있음) 교회를 평안케 해야 한다.
또한 본 건에 관하여 총회 임원회가 간섭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총회 임원회가 이와 같은 사건을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이나 임무를 규정한 헌법 규정이나 어떤 법규에도 명문 규정을 찾아볼 수가 없고, 제100회 총회로부터 위임받은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며, 교회와 노회가 사건을 처리함에 있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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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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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칼럼] 진리는 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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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길이며 생명이다. 길이 없으면 살 수 없다. 그러므로 진리를 믿고 영접하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진리 속에 사랑과 선을 행하려는 의도가 없거나 진리 혹은 길을 알기만하고 그 길을 가지 않으면 이 진리는 생명의 길인가? 죽음의 길인가? 요즘은 가짜를 보면 더 진짜 같다. 그래서 속는 사람이 생기는 것이다. 악한 자의 모습을 살펴보면 그 어떤 사람보다 멋지고 말도 부드럽고 선해 보이고 좋은 일을 많이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는 악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사람들의 진리는 말만 진리일 뿐, 그 사람은 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리는 진리대로 살아야 진리가 생명이 되고 믿음이 있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아무리 대단해도 내가 살지 않으면 그 진리는 알맹이 빠진 껍데기가 되는 것이다.
또 진리는 그릇이며 옷이다. 진리는 사랑을 담는 그릇이며 나를 표현하는 옷이기도 하다. 하나님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담은 신적진리이고 악한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진리인 척 하는 진리인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라는 그릇 속에 사랑을 얼마나 담느냐에 따라 좋은 그릇, 찬란한 옷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의 옷 즉 역할, 사람들이 갖고 있는 돈, 권력 등은 나름대로 진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담는 그릇은 반드시 상대방에게 선으로 드러나야 한다. 만약 자신이 사람들에게 악한 것으로 드러나면 나는 거짓이 되며, 추한 옷을 입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인 나는 속에는 사랑이, 사람들에게 나타날 때는 선으로 나타나야 진리가 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빠지면 진리가 아닌 것이다. 진리에는 생각, 지식, 사상, 말이 있고, 지위, 역할, 권력, 물건 등의 모든 힘들이 있을 것이다. 이 속에 사랑이 담겨있으면 진리이지만, 사랑대신에 이기심이나 악한 의도가 담겨 있으면 이것은 진리로 가장한 악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남편, 아버지, 목사, 의사, 검사 등은 진리라고 할 수 있다. 부부를 예로 들어서 설명하자면 결혼 하려는 남자가 아내가 될 사람을 사랑하고 위해주고 힘이 되고 기쁨이 되고자 하는 마음 없이 결혼을 한다고 하면 이것은 아내를 수단으로, 자신의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악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친구가 친구를 사랑하고 친구에게 힘이 되어주는 마음 없이 친구를 만난다면 이것은 악한 의도로 만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만나서 자신의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계속 이용할 것이고,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버리든지 위협하든지 악한 행동을 할 것이다.
예수께서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 라고 말씀하셨으며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께 하리라” 그러면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요한복음에서 볼 수 있다. 예수께서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인 것은 그 속에 하나님 아버지라는 신령사랑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진리는 그릇이며 포장지며 현재 있는 모든 실존이다. 이 실존 안에 존재가 있어야 진리가 되는 것이다. 사랑은 존재이며 사랑이 담겨있는 진리가 실존인 것이다. 즉 영원한 존재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며, 영원한 실존은 하나님 아들이다. 이렇게 하여 아들 안에 아버지가 늘 함께 계시는 것이며 길이며 진리이신 하나님 아들을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믿음을 통해서 사랑의 세계에 가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소유하고 대단한 재물과 힘을 갖고 있다고 해도 자신 속에 이기적인 마음과 악한 의도를 갖고 있으면 그 사람은 진리로 가장한 거짓이기에 늘 깨어있어 자신을 경계하면서 자신 속에 사랑이 있는지, 자신의 행동이 모든 사람에게 선을 더 많이 나타내는지 살피는 진리의 사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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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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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욘 3장10절~4장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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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는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2세의 통치 시절 활동하던 선지자 입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니느웨로 가서 멸망할 날이 다가왔으니 회개할 것을 선포하라는 명을 받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을 지키고 싶지 않아 다시스(스페인)행 배를 탑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로 상종도 하기 싫은 나라였습니다. 자신들 유대인들만이 하나님께로부터 선택과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요나는 어차피 구원 받지 못할 이방나라가 망하든가 말든가 먼 길을 가서 에너지를 소비하여 외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 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이성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고 감정적으로도 도저히 수용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탄 배가 큰 폭풍으로 더 이상 항해 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폭풍의 원인으로 요나가 지목되었고 결국 요나는 바다에 던져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커다란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게 하였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자신의 잘못으로 고난 받고 있음을 고백하며 하나님만 바라보며 서원을 갚겠노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3일 후 물고기는 요나를 뭍에 토합니다. 요나는 자신이 받는 고난과 환난을 아뢰며 자신을 구해 준 하나님께 감사하며 아직까지도 자신에게 집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요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신지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두 번째로 명하십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니느웨는 4일을 걸어야 다 돌아 볼 수 있는 큰 성읍입니다. 요나는 하루 동안 다니며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다.”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발생합니다. 저 악독한 이방 니느웨가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심지어 왕까지 회개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진심 어린 회개를 보시고 뜻을 돌이키시어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너무나 약이 오르고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폭발하여 막말을 하는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질문하십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는 성읍 동쪽에 초막을 짓고 니느웨가 정말 망하는지 안 망하는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 있는 요나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을 미리 준비하여 요나의 머리에 그늘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튿날 새벽에 벌레가 박넝쿨을 갉아 먹어 시들어버립니다. 요나는 열기로 고통스러워하며 정신이 혼미해져 사는 것 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십니다. “너는 네가 수고 한 것이 하나도 없는 하루 피고 지는 이 박넝쿨도 매우 아끼는 구나. 그런데 이 니느웨 성읍에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분별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 여명이고 가축도 매우 많이 있다. 그러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않겠는냐?” 요나는 자신이 이제껏 감정적으로 대처하며 고집을 부린 것이 잘못임을 깨닫게 됩니다.
내 마음을 방치하거나 그냥 감정 흘러가는 대로 놔두면 안 됩니다. 내 기분과 감정이 중요한 게 아니고 하나님의 본성, 하나님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살아갈 때 하나님 아버지의 본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 자기 감정선에 빠져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 세계에서 충실한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이제는 자기만의 이기적인 세계가 아니라 열방과 원수를 품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넉살을 가지고 이 마지막 시대에 감정선을 벗어나서 쓰임 받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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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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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탐구] 예수께서 꾸짖으시는 야고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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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와 요한은 둘 다 세베대의 아들로서 매우 급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보아너게 즉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까지 있었습니다. 그들은 원래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어부였습니다. 갈릴리 주민들은 미개하고 상스러웠으며 매우 거칠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부 출신이었기 때문에 더 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핵심적인 제자의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그들의 급한 성격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철저히 자아를 죽여야 하는데 그들은 여전히 혈기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성격을 통제하지 못하고 크게 분개한 야고보와 요한에게 주님은 꾸짖으셨습니다. 이들은 오랜 기간 주님과 동고동락하면서도 예수님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주님은 죄인을 멸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주님의 뜻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감정과 성급함을 표출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능력을 오용하거나 남용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말을 주님은 꾸짖으신 것입니다.
(눅 9:54-55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주의 마음을 갖지 못한 사람은 육을 좇아 행하게 됩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 행하는 것 전부가 주의 뜻에 어긋나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죽기까지 아버지께 복종하신 예수님의 마음, 자기를 버리기까지 영혼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할 때 육을 좇아 행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주의 뜻에 무지하여 자기에게 주어진 직무를 남용하게 됩니다. 그들은 아무리 힘써 달음질할지라도 주께서 원하시는 목표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직무를 남용한 사람들은 나중에 주님 앞에 설 때에 불법을 행한 자라는 엄한 책망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됩니다.
분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은 주님의 마음을 갖지 못한 자입니다.
주님의 일행을 배척한 사마리아인들에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멸할 것을 주님께 제안한 것은 야고보와 요한이 분을 이기지 못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주님의 온유하신 모습, 죄인을 사랑하시는 마음을 소유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분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엡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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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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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칼럼] 상처치유, 가정에서 해야 한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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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피하고 싶고 잊어버리고 싶지만 반드시 직면해서 깨뜨려야 할 악순환이 있다. 나는 아버지가 싫다.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싫다. 그 사람이 나의 인생에 끼친 너무나도 많은 굴레들. 정죄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정죄함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의 모습이 이렇게 일그러진 것이 나의 어린 시절 때문이라는 사실은 내게 너무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설 수 있는 열쇠는 현재가 아니며 미래도 아닌 가장 생각도 하기 싫은 외로운 과거에 있다. 놓아주지 않은 풀려고도 하지 않는 단단한 과거의 운명의 줄, 아버지는 내게 너무 큰 고통이다. 새 어머니는 주말만 되면 나와 동생을 목욕을 시켜 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칠일마다 돌아오는 그 날이 너무나도 괴로운 날이었다. 비록 우리의 몸은 깨끗하였지만 우리의 마음은 증오들로 더욱 더러워지는 것이었다. 그 순간만큼 우리는 어머니에게 화풀이 대상이었다. 우리의 때를 밀어 주는 그 손길에서 느끼는 것은 미움과 그것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이었다. 지금도 생각만 하면 도살장의 소와 같은 기분이었다고 생각이 들고 소름이 끼친다. 그러면서 우리는 고등학생이 되기까지 매일매일 정말 이유도 없이 두들겨 맞았다. 7살 때부터 그 작은 몸뚱이는 구타를 당하며 커 나갔던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내일이 오는 것이 얼마나 두려웠던가? 초등학생 때 얼마나 죽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던가? 그 당시 미래가 나에게 준 것은 단지 고통과 두려움뿐이었다. 그 때 나와 내 동생은 누구에겐가 구원의 손길을 뻗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도. 우리는 철저하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희생자였다. 지금껏 나는 이러한 미래의 두려움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한 청년의 가슴 먹먹한 고백을 들으며 맹인 가수이면서 작사가인 켄 미드머(Ken Medema)가 부른 노래 ‘이곳이 아니라면’(If This Is Not a Place)을 떠올렸다.
여기에서 눈물을 이해 받지 못한다면/ 나는 어디에 가서 울어야 하나/ 내 마음에 날개를 달아 줄 수 없는 곳이라면/ 나는 어디에 가서 날아야 하나/ 착하고 덕스런 모습으로/ 당신의/ 기억에 남기 위해 다른 곳은 필요치 않아/ 언제나 남보다 뛰어나기 위해 또 다른 곳은 필요치 않아/ 거짓말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어.//(중략)
내 의문에 답해 줄 수 없는 곳이라면/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내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곳이라면/ 어디에 가서 말해야 하나/ 여기에서 눈물을 이해 받지 못한다면/ 나는 어디에 가서 울어야 하나.
그래서 가정은 치유의 센터라 한다. 위로와 격려, 용서와 용납, 친밀감과 존중감이 그 핵심이다. 그런데 도리어 가정으로부터 상처를 받는다. 어느새 가정은 형무소가 되고 만다. 의학적 통계에 의하면 인간의 많은 질병이 용서하지 않는 마음 상태에서 생긴다고 한다. 정신과 의사 메닝거는 인간의 모든 질병의 70%는 스트레스에서 오고 모든 스트레스의 90%는 정신적 질병, 곧 미움과 증오 그리고 용서의 결핍에서 온다고 했다. 미움과 증오와 용서의 결핍이 결국 암, 고혈압, 심장병, 뇌졸중, 치매, 우울증 등의 원인이 된다.
가정은 과연 치유의 센터로서 어떻게 기능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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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