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7-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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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어른성경학교로 여름사역의 시동을 걸라!
    이제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 등 다음세대 부서들의 여름행사가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다음세대 부서들의 여름행사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아 할까요? 필자가 섬기는 성민교회에서는 어른들이 먼저 올여름 어린이들이 경험할 여름성경학교를 미리 배우고 느끼는 “어른성경학교”를 3주간 미리 치릅니다. 어른성경학교의 핵심은 설교자가 여름성경학교의 컨셉과 내용을 잘 이해해서 장년예배 시간에 이를 잘 구현해내는 것입니다. 필자의 경우 지난 6월 16일과 23일, 30일까지 세번의 주일예배를 통해 구조대 컨셉의 복장을 하고 구조헬리콥터 모형을 타고 등장하는 등의 연출을 했습니다. 이번 저희 교단의 여름성경학교 주제와 핵심내용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치유였기 때문입니다. 첫 날은 1과 내용을 설교했습니다. “오늘부터 2024 어른성경학교가 시작됩니다. 아이들이 성경학교를 시작하기 전에 어른들이 먼저 올해 성경학교의 주제와 내용을 배우고 은혜를 받아 온세대가 함께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가기 위함입니다. 올해 여름성경학교 주제는 ‘SOS 라파구조대’입니다. 황폐해져가는 이 세상을 치유하실 분은 오직 한 분, 여호와라파 하나님이심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도 망가져가는 세상과 관계와 영혼을 치유하는 사명을 믿음으로 감당해 나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중 1과 ‘SOS 라파구조대, 하나님과 함께 레츠고~!’는 천지만물의 치유자 하나님을 만납니다. 출애굽 후 홍해를 지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로 인한 큰 구원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삼 일만에 목이 말라 물이 없는 고통을 호소합니다. 그때 발견한 샘 마라는 먹을 수 없는 쓴 물이었습니다. 왜 구원의 감격에 젖었던 그들이 쓴 물을 만났을까요? 그들이 구원받은 이유는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함이었는데 그들이 예배를 잊고 그들의 마음에 맞는 풍성한 물과 더 나은 삶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나무로 마라를 단 물로 바꾸심을 통해서 진정한 치유자는 하나님 한 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말씀대로 순종하고 의와 규례를 행하는 자랑스러운 참 자녀가 됩시다. 이 말씀이 우리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인도할 것입니다.” 둘째 주일은 어른성경학교 2과였습니다. “‘SOS 라파구조대, 예수님과 함께 레츠고~!’ 우리 삶에는 여러 가지 고난이 찾아옵니다. 그 고난은 무엇을 알려주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던 맹인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내실 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말씀에 순종했고 그 결과로 앞을 볼 수 있게 되어 주님을 높이며 경배했습니다. 맹인이던 그가 보게 되었을 때 그는 예수가 구세주이심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앞을 보며 살아가는데도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높이거나 자랑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기적이나 신기한 일은 놀랍게 여기면서도 우리에게 이미 임한 구원은 당연하게 여기는 게 아닐까요? 또한 예수님께서 그에게 실로암 물가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이유는 실로암이 구원의 본질을 보여주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실로암은 스스로 생긴 못이 아니라 성밖의 기혼샘에서 터널을 통해 끌어들여 만든 샘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앗수르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이 터널은 구원이 우리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오는 것임을 알려줍니다. 우리도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오직 예수님께만 구원이 있음을 믿고, 누리고, 선포하며 살아갑시다.” 세번째 주일에는 어른성경학교 3과였습니다. “성전 미문 앞에 늘 무기력하게 앉아 행인들에게 돈을 구걸하며 살던 한 사람의 인생은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면서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그는 여전히 은과 금을 요구하며 손을 내밀었지만 그들은 세상의 가치가 아닌 나사렛 예수 그리스의 이름으로 그를 그 자리에서 일으켜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름이 왜 능력과 권세가 있는 걸까요? 그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과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내어주시는 가장 큰 사랑의 결단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의 능력이 오늘도 우리의 모든 결핍을 채우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합니다. 사랑이 없어서 오늘도 갈급한 우리의 존재를 풍성하게 채우십니다. 미식축구의 전설 빈스 롬바디 감독은 ‘미식축구는 사랑이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이 거친 사내들의 스포츠에서 사랑이 중요한 이유는 동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 몸을 던지지 않으면 내 동료가 부상을 입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상대팀까지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서로 다치지 않고 훌륭한 경기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처럼 서로 사랑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을 치유하는 라파 구조대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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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4-07-05
  • [다음세대칼럼] 감사와 찬양
    한국교회에는 좋은 전통이 있다. 보리를 거둘 시기에는 ‘맥추(麥秋)감사절’로, 쌀을 수확하는 시기에는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다. 성경의 절기, 혹은 기독교 역사에서 감사의 전통들이 우리나라 특유의 농경문화와 융화되어서 토착화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맥추절에는 꼭 이런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있다. “맥추절은 구약시대의 절기인데 이 시대에도 꼭 지켜야 합니까?” “추수감사절은 청교도들이 미국 땅에서 지키던 문화인데 우리가 꼭 따라가야 합니까?”, “사라져 버린 절기, 외국의 문화를 무턱대고 답습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심지어는, “우리는 구약 절기까지 제대로 지키라고 하면서, 유월절 절기들을 열심히 지키는 이단들에게 뭐라고 할 말이 있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있다. 이해가 되고,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끝이 없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본다면, 감사 절기가 따로 필요한 것이 아니다. 매일 같이 감사하며 사는 것이 습관이 되어야 한다. 이단들이야 자신들의 특정 교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절기를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꾸할 가치도 없습니다. 하지만 질문하는 분들에게, “그럼 우리는 범사에, 매일 같이 감사하시며 살고 계십니까?”, “앞으로 교회에서는 따로 감사 절기를 하지 않겠으니, 감사 절기의 의미에 맞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실 자신이 있으십니까”라고 다시 되묻는다면 답변하기 어려울 것이다. 필자도 자신이 없다. 생각을 바꾸셔서, 맥추절, 추수감사절, 일 년에 두 번이나 감사할 수 있는 날짜를 정해 주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시기 바란다. 평소에 못했던 감사 생활을 이날 만큼이라도 감사드릴 수 있음에 더욱 감사하시기 바란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이 오시기까지의 기간이 7주(50일)였기 때문에, 이 절기의 이름을 ‘오순절’, 혹은 ‘성령강림주일’로 지키고 있다. ‘맥추절’이라는 절기의 이름은 한국문화에 맞게 번역해 놓은 것이다. 실제 어원을 직역하면, “첫 열매의 절기”이다. 보리와 밀 같은 곡식이 주 식량이었던 당시의 시대에서 처음 맺은 곡식의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중요한 의미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하나님이 모든 열매를 맺게 해 주시는 ‘복의 근원(유일한 신, 전능자)’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심을 선포하는 신앙고백을 담고 있다. 둘째, 모든 복을 내려주신 하나님께 가장 처음 것으로 제사(예배, 영광)드리는 신앙인의 기본 삶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주셨으면 감사하고, 감사했으면 다시 주실 것을 믿고 생활해 나가는 것, 이를 확인하고 예배하는 것이 감사 절기의 모습이어야 한다. 농사의 첫 열매가 아니어도 감사 생활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하다. 사역자들 중에 처음 사역지에서 처음 사례비를, 신앙인 중에 처음 직장에서 처음 월급을, 사업자들 중에서 하루 처음 매출 금액들을 모아서,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 분들이 있다. 이런 것들이 시대 상황에 맞는 변형된 ‘첫 열매’의 감사 생활이다. 실제로 전에 목회하던 교회에서도 아르바이트해서 받은 첫 월급을 첫 열매라고 해서 헌금하는 청년들이 있었다. 절기를 구약시대에만 지켜야 하느냐, 신약시대에는 폐지해야 하느냐의 논쟁은 사실 소모적이다. 아마도 그 청년이 “첫 열매의 절기”라는 맥추절의 어원을 알고 드렸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성경 지식으로 논쟁하는 어느 누구보다도 감사의 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이다. 첫 열매를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렸다. 문자적인 해석보다는 실제적인 감사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가 취할 자세이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여기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셀’의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란다. 또한, 올 후반기에도 더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을 믿고 인도함을 구하는 맥추절이 되길 바란다. 오늘 맥추 절기를 지키라는 신명기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시는 감사 생활의 의미를 함께 묵상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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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5
  • [신앙교육나침반] 부모가 자녀를 “데려다주기만 하면 되는” 여름사역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는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책임지는 존재가 바로 교회학교 사역자라고 생각합니다. 수영코치가 자녀에게 수영을 가르치고, 영어학원 선생님이 영어를 가르치고, 수학학원 선생님이 수학을 가르치는 것처럼, 교회학교가 자녀의 신앙을 가르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대다수의 교회는 이러한 현실에 부응하기 위해, 다음세대의 신앙교육을 체계적이고 효과적으로 실행하려고 연초마다 엄청난 사명선언문을 내어놓습니다. 교회는 교회학교 사역의 존재목적에 ‘다음세대를 그리스도를 위한 제자로 재생산하기’, ‘믿음생활 회복하기’, ‘믿음 성장하기’, ‘세상 섬기기’와 같은 내용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명 선언문에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부모와 함께 자녀를 어떻게 훈련시킬 것인지”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이와같이 자녀세대의 신앙교육 책임을 전적으로 맡고 있는 연령별 사역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2006년에 사우스 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의 리처드 로스 교수는 다음을 예견했습니다 “교회는 세대간 분리된 교육을 위해 새 건물을 멋지게 지을 것이다. 건물의 외형적인 매력과 각 부서별 훈련 프로그램은 다음세대를 자신의 또래들과만 어울리게 할 것이다. 어른들은 자녀를 축복하는 특권을 잃게 될 것이고, 청년들은 장년들과의 관계로 인해 얻게 되는 풍성함을 잃어버리고, 가족들은 집에 돌아가는 차 안에서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연령별 프로그램 중심 사역은 부모와 자녀를 연결하는 신앙 양육에 무지하며 무관심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맡은 부서의 사역을 성공키시기 위해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벤트를 통해 현재 주일학교 학생수를 유지하며 부모님을 안심시키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명령하신 신앙교육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명령하신 자녀세대의 영적 훈련을 위한 주된 장소는 어디입니까?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명기 6:5-7) 성경에는 분명한 정답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신앙교육의 주체는? 부모 하나님이 명령하신 자녀세대의 영적 훈련을 위한 주된 장소는? 가정 하나님은 믿음의 부모들에게 자녀의 영혼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가정에서 복음을 정기적으로 교육해야 함을 명령하셨습니다. 다음세대에게 가장 큰 영향력은 ‘부모’입니다. 부모는 다음세대에게 복음을 강력하게 전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미디어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부모를 자녀의 신앙교육을 위해 특별히 부르셨습니다. 그럼에도 연령별 교육부서의 사역자와 교사들은 자녀의 영적 책임을 전적으로 떠맡으면서, 올해도 부모가 자녀들을 행사장소에 “데려다주기만 하면 되는” 여름사역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매우 유감스럽게도, 교회는 1년 52번의 주일을 부모와 자녀를 분리한 채 예배드리고 신앙을 교육하면서,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마저 부모와 자녀를 떼어놓은 채, 자신들의 신앙교육적 주도권을 과시하며, 부모들에게 자녀를 수련회 당일에 데려오기만 하면 된다고 큰 소리칩니다. 향기나무 사역팀은 기대합니다. 한국교회가 이제는 잘못된 방향을 꺠닫고, 자녀의 신앙교육의 주된 책임을 져야 할 부모를 일깨우고 훈련시키기 위한 자리를 의도적이고, 반복적이며, 전략적으로 확장해나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러한 자리가 점차 늘어갈수록, 우리의 다음세대도 믿음의 가정을 통해 든든히 세워지며, 교회의 성도로서의 소속감을 강력하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0-100세까지 온세대가 경험하는 복음전파와 복음놀이를 담고 있는 [복음놀이리부트50] 책은 부모와 자녀를 복음으로 연결하기 원하는 여름사역 현장에 귀한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아울러 향기나무 사역팀은 올 여름, 다음세대 성경학교와 수련회 현장에서 수백 가정을 만날 예정입니다. 수많은 교회가 이러한 온세대 성경학교와 수련회를 통하여 부모를 영적으로 일깨우고 훈련하며, 부모와 자녀의 신앙 단절이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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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교육 나침반
    2024-07-05
  •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 감독 : 조너던 글레이저 출연 : 크리스티안 프리델(루돌프 회스), 잔드라 휠러(헤드비그 회스), 이모겐 코게(린나 헨셀) 기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긴다. 우리가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부분이다. 유대교나 이슬람교는 유일신론을 믿는다. 유대교는 야훼만이 하나님이고 이슬람은 알라만이 하나님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믿는다. 세 분이면서 동시에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다. 초기 교회는 이 교리를 사수하기 위해 공을 많이 들였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동일본질(homoousius)이다. 성부와 성자, 성령은 동일본질이시다. 차등이 없다. 또한 삼위하나님은 상호내주(perichoresis) 하신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셨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 창세기의 선언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 한 지점은 공동체라는 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여 그에게 돕는 배필인 하와를 만드셨다. 둘이 한 몸을 이루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따라서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공동체적이며 신적 공동체에 참여하는 종교다. 따라서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사도 바울도, 사도 요한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았으며 교회에 당부했다. “각각 자기 몸을 돌 볼 뿐 아니라 이웃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보이는 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조너던 글레이저 감독의 신작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다루는 영화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나찌가 감행한 유대인 대 학살인 홀로코스트, 그 중심에 있는 폴란드 아우슈비츠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영화 내내 홀로코스트의 참상, 아우수비츠의 비참함은 등장하지 않는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가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보여주고, 페델리코 펠리니의 [인생은 아름다워]가 우회적으로 수용소를 보여주는 것과 달리 조너던 글레이저는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조너던 글레이저 감독은 다만 수용소장인 루돌프 회스와 그의 아내 회드비그 회스, 그리고 자녀들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아낸다. 영화는 회스의 가족들의 소풍으로 시작한다. 청량한 새소리, 강가의 물소리,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그리고 단란하고 웃음이 가득한 가족이 등장한다. 언뜻 이 장면은 전쟁의 참상이나 끔찍함과는 전혀 상관없이 보인다. 그 어디에도 전쟁은 보이지 않는다. 소풍을 끝낸 가족은 귀가하여 단란한 저녁 식사를 하고 아이들을 씻기고 잠자리에 든다. 지극히 단란하고 평범한 한 가족의 일상이다. 그런데 이 가족이 거주하는 크고 화려한 집은 거대한 담벼락이 접해 있다. 그렇다. 그 담벼락 너머는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다. 거대한 담 뒤에는 매일 수 백명의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밤이 되면 담벼락 너머의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는다. 간혹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음소리, 울부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그리고 회스 가족이 수영을 즐기고 보트를 타는 강물이 잿빛으로 변한다. 회스 중령은 아이들을 강물에서 나오라 소리치고 노이로제처럼 씻긴다. 부인 회드비그 회스는 대여섯명의 하녀를 두고 있다. 하녀들이 밥도 짓고 아이들도 씻기고 남편의 옷도 다린다. 전투화를 벗어놓기 바쁘게 하인 한 명이 들고 가서 반짝 반짝 빛이 나게 닦아다 둔다. 이 가족은 언제나 정갈하며 깨끗하다. 아이들도 군더더기 하나 없다. 회스 부인은 자기 어머니를 집으로 초청하여 집이며 정원을 보여준다. 어머니는 “여기가 바로 천국이구나. 어쩜 이렇게 좋을 수가 있니?”라며 감탄한다. 그도 그럴것이 전쟁이 한창인 시절에 그녀의 정원은 각종 꽃들로 가득하며 풀장에서는 아이들이 수영을 즐긴다. 지상 천국이 따로 없다. 그러던 중 이 지상천국 같은 가정에 균열이 생긴다. 상부에서 회스 중령의 전출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회스 부인은 남편인 회스 중령에게 로비를 해서라도 여기를 사수하라고 다그친다. “내가 이 곳을 어떻게 가꾸었는지 알아요? 황무지 같은 이 곳을 천국의 정원처럼 가꾸었다고요. 아이들도 이 곳에 적응해서 얼마나 행복해 하는 지 알잖아요. 이 곳을 떠날 수는 없어요.” 혹여나 남편이 전쟁터로 전출을 가게 되고 자신의 가족도 이사를 가게 될 까 조바심이 난 회스 부인은 신경질적이 된다. 일을 도와주는 유대인 하녀가 작은 실수를 했을 대 그녀는 화를 내며 소리친다. “내가 남편에게 말 한 마디 하면 너도 저 가스실로 간다는 것을 모르니?” 조너던 글레이저 감독은 너무나 평범한 한 가정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드러낸다. 벽 하나 사이에 천국과 지옥이 공존한다. 그가 보여주는 수용소장의 가족은 자신들은 천국에서 지낸다 하지만, 실상 지옥을 만드는 자들임을 감독은 보여준다. 맞다. 그 벽 너머에 지옥이 있다. 소장 루돌프 회스는 그 벽에 난 문을 통해 천국에서 지옥으로 매일 드나든다. 그런데 그 지옥은 천국에 살아간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만들어 낸 곳이다. 아니, 그 지옥을 통해 자신들의 천국을 유지하고 있다. 회스 가족이 사용하는 생필품은 그 수용소의 공장에서 조달되고, 가끔 유대인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옷가지가 자루에 실려 이 집으로 들어온다. 회스 부인은 그 중 모피 코트를 챙긴다. 그리고 코트 주머니에 들어 있던 립스틱을 꺼내어 자신의 입술에 바른다. 담 너머의 죽어가는 자들이 이 쪽의 천국을 만들어 낸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묘사한 상황이 그대로 연출된다. 아렌트는 전후 전범 재판정에 선 아이히만을 방청석에서 보았다. 그는 자신이 억울하다고 항변했다. 자신도 전쟁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자신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죽음의 수용소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했다. 한나 아렌트는 그 지점에서 오열했다. 저렇게 평범한 사람이, 이웃집 아저씨같은 사람이 그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 데 동조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녀는 깨달았다. 누구나 본성에 잔인함이 들어있고 특수한 상황에서 악에 가담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그것을 ‘악의 평범성’이라 칭했다. 동시에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게 유죄를 선언했다. 아이히만의 죄는 ‘생각지 않은 죄’ 즉 사유하지 않은 죄였다. 악을 악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죄, 불의가 행해지는 상황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죄, 동참한 죄를 선언했다. 악한 일에 단순하게 따른 것도 죄였다. 최소한의 저항, 최소한의 양심을 저버린 죄, 그 죄가 더 컸다. 회스 가족의 죄가 그러하다. 벽 너머에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범죄, 악, 비참한 일에 이 가족은 너무나 무심하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독일인이기에, 게다가 수용소장의 가족이기에 이 권리를 누리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밤이 되면 회스는 문을 걸어잠그고 창문도 걸어잠그고 커튼을 친다. 그 벽 너머의 참상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이 이중성, 외면을 감독은 차분하게 그러나 심각하게 고발하고 있다. 조너던 글레이저 감독이 묘사한 장면이 단지 아우슈비츠 뿐일까? 분명 아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전쟁이 아닐 뿐, 총이나 대포로 무장하지 않았을 뿐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끔찍한 일이다. 소위 능력주의라는 이름으로, 엘리트주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현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소위 불경기라며 힘들어 한다. 최저 생계비에 겨우 의존해 살아가고 있다. 이제 맞벌이는 일상이다. 수많은 청년들은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을 하지 못한 채 단순 아르바이트로 살아가고 있다. 집 한 채 마련해 보려는 소망으로 대출하여 구매한 아파트, 인상된 금리로 인해 빚에 허덕이고 있다. 반면 돈이 넘치는 사람들도 있다. 억대가 넘는 비싼 외제 자동차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십만원이 훨씬 넘는 호텔의 식당들은 대기줄로 가득하다. 해외 여행자들은 넘치고 여행지의 비싼 호텔들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하룻밤에 50만원에서 100만원 하는 호텔들에 방이 없다고 한다. 도대체 불경기는 누구에게 해당되는 일인가? 오히려 불경기라는 것을 이용해 수익을 올리는 자들도 있다. 돈이 돈을 낳는다. 빈익빈 부익부가 가중된다. 루돌프 회스에게는 보이는 벽이 있었다면, 오늘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할 뿐이다. 상황은 그대로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공동체로 만드셨다. ‘나’는 ‘너’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마틴 부버의 말처럼 ‘나, 너’가 아니라 ‘나-너’, 즉 ‘우리’다. 인간은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나’가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너’를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오롯이 ‘나’만 잘 되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소비자인 ‘너’가 없다면 생산자인 ‘나’가 어찌 유지될 수 있겠는가? 소망이 있다. 글레이저 감독의 영화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소녀의 등장이다.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수용소의 담을 지나 흙더미에 사과를 숨겨 놓는다. 누군가 일하다 그 사과를 발견해 먹을 수 있도록. 원죄에 동참한 사과가 아니라 구원을 이루는 사과다. 그 사과가 하나가 되고, 둘이 되고, 소녀가 한 명이 되고, 두 명이 될 때 우리는 소망을 가진다. 회스 가족을 무너뜨리는 작은 사과, 오늘 우리가 전해 주어야 할 사명이다. 이기적 욕망을 내려 놓고, 무관심의 벽을 허물어 뜨릴 사과 한 알을 나도 너도 나누면 좋겠다. 그것이 우리가 인간다워지는 길이며 공존하는 길이기에. 한나 아렌트의 경고에 귀 기울이자. 사유하지 않은 것도 죄라는 것을. 애써 외면하는 것도 죄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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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2024-07-05
  • 이단성 논란 인터콥 선교사들 대거 탈퇴
    이단성 논란을 겪고 있는 인터콥선교회 내분이 심상치 않다. 최근 인터콥 선교사 300여명이 인터콥 선교회에서 대거 탈퇴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한우(최바울) 본부장이 선교회 돈으로 막대한 부동산을 사들이면서 공적 자산을 사유화 한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선교사 탈퇴가 줄을 잇고 있다는 것. 최근 CBS는 최한우 본부장이 본인의 명의로 경북 상주시 화서면 금산리 일대 31,864제곱미터의 땅을 매입했는데, 대다수 인터콥 선교사들은 최한우 본부장 개인 명의로 된 것을 모르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이 땅은 축구장 4.5배, 구입금액만 13억 8천여만원에 이른다. 또 인터콥이 지난 2019년 12억에 사들인 서울시 마포구 신공덕동에 위치한 상가건물이 2021년 1월 부산에 거주하는 최한우 본부장의 딸 최모씨에게 건물 지분의 49%가 2억 5천만원에 매도된 사실이 드러났다. 부동산 매입가 1/4에도 못 미치는 헐값에 건물 지분 절반을 본부장의 딸에게 넘긴 셈이다. 논란이 확산되자, 지난 4월 일부 인터콥 선교사들이 인터콥 소유 부동산 현황과 최한우 본부장 본인, 직계 가족 재산 상황 전체를 공개하라고 최 본부장 측에 내용증명을 보내기도 했다. 또 자체 조사위원회를 꾸려 인터콥의 자산을 최 본부장 명의로 등기한 것은 명백한 위법이라고 주장했고, 최한우 본부장이 거주하는 상주 미션하우스는 누구 소유로 돼 있는지 해명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최한우 본부장은 일부 선교사들의 지적에 대해 일종의 쿠데타라면서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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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5
  • 높아져 가는 김의식 총회장 사퇴 요구
    예장통합 김의식 총회장의 사퇴 요구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지난 27일 장로회신학대 교수평의회가 성명을 내고 “(불륜)의혹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즉시 교회와 교단의 모든 직위와 직무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신대 신대원 학생들도 김 총회장의 사죄와 사퇴를 요구하는 서명에 들어갔다. 신대원 학생들은 김의식 총회장의 신속한 사퇴를 요구하며 “한국교회 자정 노력에 지금이라도 동참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강조했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이사장 지형은 목사)와 한국교회목회자윤리위원회(회장 전병금 목사)도 입장문을 발표하고 “총회장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현재의 직무에서 사퇴해야 하고 이로써 교단과 한국교회에 늦게나마 조금이라도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해당 교단의 지도자들을 비롯해 한국교회의 지도자 모두가 이 사태를 계기로 다시금 통절하게 자신을 성찰하며 회개의 기도를 올려야 한다”며 “이번 사태가 현재 한국교회의 병든 단면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모두가 재를 뒤집어쓰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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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5
  • 부산이 사라지면 교회도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부산시가 전국광역시 중 처음으로 ‘소멸위험지역’에 진입했다는 지난 7월 1일자 일간지에서 처음으로 보도가 나왔다. 부산 16개 기초지자제 중에서 절반 이상인 11개가 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었다는 내용이 일면 탑 기사로 뉴스로 보도되자 부산교계도 매우 당황하는 상황이다. 현재 부산지역 교회 숫자가 1800여개교회로 공표된 2019년 코로나19 이전에 교계가 풍요를 울렸으나 그 이후 급속도로 하향 곡선으로 떨어져 실제 교회 출석하는 교인과 교회는 최소 10%~20%미만으로 감소 추세를 보여 주고 있다. 인구 감소가 더 빠르게 확산되는 징후에 대비하여 부산교계도 고령화와 저출산 대책에 공동으로 힘을 모아야 할 방안이 시급함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는 정황이다. 30일 한국고용정보원이 발간한 ‘지역산업과 고용’ 2024년 여름호에 실린 ‘지방 소멸 2024: 광역 대도시로 확산하는 소멸위험’(한국고용정보원 이상호 연구위원)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처음 소멸위험 지역 측정한 이후 부산시가 전국 광역시 중에 처음으로 소멸위험지역으로 진입했다는 보고서에 충격을 주고 있다. 부산 인구 329만 명으로 65세이상 인구는 23.0%, 20~39세 여성인구는 11.3%에 불과해 소멸 위험지수 값 0.490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17개 광역 시중에 유일하게 8개 도시 중 부산이 포함되고 그것도 광역시 중 처음으로 초고령사회로 진입한 데 이어 첫 소멸 위험 지역 케이스로 분류되어 모든 16개 구청들은 물론 종교계 특히 부산 교계 연합 단체 지방회 지역 노회 모두가 비상이 걸렸다. 이 보고서는 통계청 ‘주민등록 인구 통계’를 활용해 올해 3월 인구를 기준으로 분석한 결과물이다. 부산이 타 도시 유출로 인해 한국 내에서도 제일 먼저 소멸할지도 모르는 광역시로 처음으로 이름을 올렸다는 것이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중 부산 영도구가 소멸 위험지수 0.256으로 소멸 위험 전국에서 1위를 차지했다. 해운대구는 0.491로 전국에서 14위, 동래구 역시 0.499로 15위이고 부산 서구, 동구, 중구, 금정구, 사하구가 4~8위를 차지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정부와 대통령실은 고위 당정협의회에서 저출산 고령화 대응을 위한 컨트롤 타워로 부총리급 기획 부처인 ‘인구 전략기획부’를 신설하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그러면 한국교회나 부산교회들도 그냥 불구경하듯이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 있겠는가? 사람이 없는데 어찌 교회가 존재하겠는가? 다 같이 죽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지구촌에서 제일 먼저 사라진다고 하여 국가 비상사태라도 발동하여 대책을 세워 나가야 한다. 국회에서 이런 민생 중에 가장 시급한 문제를 다루지 않고 저급하게 김건희 여사 고급 핸드백이나 다룰 시간인가? 재미교포 최 아무개 목사라는 분으로 기독교가 이런 꼼수나 쓰는 형편없는 짓이나 행동하는 그런 목사로 인해 이미지 추락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다. OECD 38개국 회원국 중에 출산율이 1명이하인 나라가 선진국이라고 자처하는 대한민국이라니 너무 창피하지 않는가? 향후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어느 정당·국회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대통령, 목회자 등 성직자가 과연 필요하겠는가. 먼저 출생 인센티브로 한국 교회가 교회, 노회, 총회마다 각종 지원책을 세워 주거, 교육, 복지 등 다방면으로 예산을 세워 나가야 할 것이다. 지금 교회들이 한가하게 여름 컨퍼런스로 외국에 나가 선교 비전을 할 때인가 자기 집안, 나라가 사라지는 판인데 과거 정책은 재고하여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교회들이 앞장서야 할 것이다. 무슨 협의체, 총연합회 등은 불필요한 존재로 남아 허수아비 기구로 전락할 것다. 어느 기업체가 출생하는 부모들에게 무조건 현금 1억원씩 주는 믿지 않는 기업체 보다 못해서야 되겠는가? 한국교회나 노회, 지방회, 총회가 저출산 해결을 먼저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 하지 못할 시에는 전도나 선교도, 교회도 존재 마저 꽃피우지 못하고 시들어 버리고 말 것이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과거 산아제한 캐치프레이저가 얼마나 저속한 채로 낙후된 것임을 미리 예견하지 못한 것이 몹시도 부끄럽고 국가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왜 진작 느끼지를 못했을까? 우선 순위에 놓고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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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5
  • [목회자칼럼] 효율지상주의에 물든 나의 사고 방식
    기업의 목적은 이윤이다. 적은 비용을 투자해서 큰 이익을 남기는 것이 기업의 생존 전략이자 경영 철학이다. ‘효율성’이라는 단어는 기업의 경영을 밝게 하고, 미래를 준비한는 핵심 가치이다. 기업 경영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이는 ‘효율성’을 그대로 가정으로 데려 와보자. 가정의 목적이 이윤이 될 수 있을까? 적은 비용을 투자해서 큰 수익을 남기는 것이 자녀를 양육할 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까? 너도나도 가성비를 중심으로 한 효율성을 따질 때, 가정에서도 가성비가 좋은 관계, 가성비가 좋은 양육, 가성비가 좋은 부부사이가 가능할까? 가정에 아기가 태어나면, 이 아기에게는 온통 소비하는 일만 발생한다. 경제적 소비, 정서적 소비, 심리적 소비 등 효율성으로 따지자면 한마디로 밑지는 장사다. 그러나 아이는 온 가족에게 돈으로 살 수 없는 조건없는 기쁨, 무한한 사랑, 경외로운 생명을 선물한다. 이건 효율로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효율을 넘어선 가족 관계, 사랑의 가치다. 산업화 시대를 지나며, 물질만능주의가 사회 속에 자리잡으면서 어느덧 효율지상주의가 우리 일상에 스며들었다. 이 일이 경제적으로 나에게 유익이 되냐, 되지 않느냐가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되버린 것이다. 젊은이들이 직업을 선택할 때, 나의 재능, 직업으로 인한 사회의 기여도 등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연봉, 휴가 등을 고려하는 풍조, 가정을 섬기고 돌보아야 할 언약 공동체로 보는 것이 아닌 기능적인 부분만 하고 살아가는 현상 등이 모두 효율지상주의에 갇힌 우리 사회의 단면이다. 그러나 여기, 효율성과는 전혀 거리가 먼, 효율적인 측면으로 따지자면 평생 마이너스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아흔아홉마리의 양을 두고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다. 효율성으로 보자면 완전 말도 안되는 선택이다. 경제적으로 따지자면 이익될 것이 하나도 없는 행보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잃은 한 마리의 양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다. 이게 바로 최고의 효율, 사랑이라는 것을 마치 온 몸으로 보여주듯 말이다. 성경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야기 전체가 인생 최고의 효율이자 가치인 사랑임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가 가져야 할 기독교 사상임을 나타내고 있다. 요즘 세상에서는 효율지상주의에서 최고로 꼽는 검사와 의사들의 갈등이 종종 드러난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검사와 의사의 민낯을 국민들이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 하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 시대의 어두운 면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음에도 부끄러워 하지 않고 오히려 고개를 들고 있는 그들을 선망하고 있다. 그렇다면, 효율지상주의에 찌들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첫째, 내가 먼저 나누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성경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 이야기는 돈을 낭비하고 마음대로 살다 온 둘째 아들을 위해 아버지를 포함한 온 공동체가 송아지를 잡으며 함께 기뻐하는 장면이 주 내용이다. 세상의 논리라면 효율성이 전혀 없지만, 성경의 논리로 힘든 사람을 품고 내가 먼저 나누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자세이다.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하며 나누는 것이 바로 효율지상주의를 넘어 한걸음 나아가야 할 실천이다. 둘째, 기쁨에 이어 잔치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나의 가진 것을 내어놓고 이웃과 함께 잔치함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는 것, 이것이 바로 성도가 살아있는 사회이다. 내가 내어놓아야 할 잔치 비용이 아까워 기뻐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슬퍼할 수도 없는 상태. 이런 모습은 어쩌면 하나님 나라와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마음을 개혁해서 하나님이 원하는 사회, 함께 나누며 기뻐하고 잔치하는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 셋째 함께 선한 일을 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효율을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선한 일’을 ‘함께’하지 않는다. 주로 이익이 되는 일을 혼자 한다. 우리는 함께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내는 언약 공동체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변해야 하며, 내가 먼저 낮아지는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 세상에 불고 있는 맹목적인 경쟁의 광풍에 저항하며 함께 선한 일을 하는 관계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이 줄 수 없는 사랑이라는 가치를 품는 자들이 될 것이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되돌아보자. 우리 공동체는 과연 ‘교회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효율을 추구하는 집단인지, 아니면 진정 형제 자매가 하나가 되어 ‘사랑’이라는 가치를 살아내는 언약 공동체인지 말이다. 이 언약 공동체를 내가 먼저 세워나가길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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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5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6.25 전쟁기 부산에서의 교회
    6.25전쟁기 부산지방의 기독교회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부산에서 기독교회는 1892년 부산진교회와 초량교회(혹 1893년) 설립이후 여러 지역에 교회가 설립되는데, 1896년에는 영도교회(현 제일영도교회), 1904년에는 엄궁교회(현 은혜로교회)와 하단교회, 1905년에는 항서교회, 수안교회, 금성교회, 기장교회, 구포교회가 설립되고, 이어 두구동교회(1906, 소실됨), 대연교회(1907), 초읍교회(1909), 사상교회(1909), 상애원교회(감만동, 1910) 등이 설립된다. 또 수영교회(1919), 부전교회(1932), 남부민정교회(현 항남교회, 1936), 해운대교회(1937) 등이 설립된다. 이렇게 되어 1940년 당시 부산 지역의 장로교회는 23개 처였고, 다른 교파 교회로는 부산성공회(대청동, 1903), 수정동성결교회(1918. 4), 온천중앙성결교회(1918. 9) 그리고 구세군부산중앙교회(1935) 등 몇 되지 않았다. 1945년 해방 당시 부산지역 인구는 28만 정도였고 30-35개의 교회가 있었다. 해방이 되자 여러 교회가 설립되는데, 은혜교회(현 새부산진교회, 1946), 성산교회(1947), 성경교회(현 충일교회, 1948), 거제교회(1948), 거성교회(1948), 온천교회(1948), 항도교회(1948), 복음교회(현 신평로교회, 1949), 부민교회(1949), 부산남교회(1949), 제2영도교회(1949), 제3영도교회(1949), 서문교회(1950) 등이다. 해방과 함께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교회당을 접수하여 시작된 교회도 있었다. 그것이 광복교회(1945. 11)와 부산중앙교회(1945. 12)였다. 일제 통치기 부산에서 일본인 교회가 가장 많았을 때는 7개 교회가 있었는데, 해방 당시 대표적인 두 일본인 교회가 광복교회와 부산중앙교회로 개편된 것이다. 전자는 윤인구 목사에 의해, 후자는 노진현 목사에 의해서였다. 해방 후 부산에는 여러 교회가 신설되는데, 1949년에는 장로교회만 31개 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중 19개 교회는 부산부에, 12개 교회는 동래부에 소재하고 있었다. 해방 이전까지 부산지방 교회는 교파적으로 볼 때 장로교 중심이었고, 해방 이전 부산에는 성공회 1개처, 구세군 2개처, 성결교회 2개 처뿐이었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부산에도 장로교 아닌 타 종파 교회가 설립되기 시작한다. 예컨대, 성결교의 경우, 동광성결교회(1945. 12)와 영도성결교회(1951. 11)가 설립된다. 감리교의 경우, 1948년 7월 부산제일교회가 설립되는데, 이 교회가 부산지방 최초의 감리교회였다. 이 교회는 1949년 4월 부산 서구 동대신동 1가 49번지의 적산 가옥을 매입하여 예배처소로 사용했다. 이어서 부암감리교회(1951.1), 해운대감리교회(1951.1), 수정교회(현 성일교회), 대교교회(1951. 3), 시온중앙교회(1951. 9), 보수교회(1952. 1), 영도중앙교회, 온천교회 등이 설립된다. 1950년 말에는 부산의 장로교회는 41개 처에 지나지 않았고, 목사 10명, 전도사 23명으로 교역자는 33명으로 보고되어 있다. 다른 교파의 교회는 10여 개 정도에 불과했으므로 부산지방의 교회는 50개 정도에 불과했다. 이는 1950년 말 통계라고 하지만 6.25 전쟁 발발 당시 부산의 교회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전쟁 기간 중 부산의 교회수는 급증하게 된다. 기존교회로부터의 개척(설립)도 없지 않았으나 교회분규나 내분, 특히 고려신학측(현 고신총회)을 따르는 신앙노선 문제로 기존 교회로부터 분리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전쟁기 설립된 다수의 교회는 월남한 피난민들이 세운 피난민교회였다. 6.25 전쟁 전후 부산지방으로 월남 피난민들이 유입하게 되자 피난민들은 두고 온 북한 지역의 교회를 부사에 재건하는 등 피난민 교회가 설립되는데, 약 50여개 처로 파악되는데 장로교계가 40여개 처에 달한다. 이들 장로교계 피난민 교회를 설립 년 중심으로 정리하면, 북성교회(현 대성교회, 1950. 2), 성도교회(1950. 12), 구덕교회(1951), 영락교회(1951. 1. 7), 서북교회(1951. 2), 철산교회(현 산성교회, 1951.3), 선천교회(현 산성교회, 1951.3), 우암교회(1951.3), 영도교회(1951), 평광교회(1951. 6), 수정동교회(1951. 7), 평북교회(현 산성교회, 1951. 8), 평동교회 (1951), 남성교회(1951. 10), 산정현교회(1951.10), 평양교회(1951.6.10, 평광교회와 대청교회로 분리된다), 모라교회(1951), 양정중앙교회(1951), 연산제일교회(1951), 원산제일교회(현 성덕교회, 1951. 12), 서북교회(현 동광교회, 1952.1. 6), 거양교회(1952. 1), 한양교회(1952. 3. 2. 이 교회에서 그해 6월 남부민교회가 분리되었으나 1973년 은성교회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다), 삼성교회(1952), 영도중앙교회(1952), 부산서교회(1952. 4. 27), 감만교회(1952. 6), 신암교회(1952. 10), 양정교회(1953. 7), 영주교회(1953. 8), 명신교회(1954. 5) 등이다. 그리고 감리교회로는, 원산지역 피난민 중심의 부산제2교회(현 충무로교회), 해주 출신 교인들로 구성된 일신교회, 평양 출신 중심의 시온중앙교회, 그리고 서울아현교회 성도들 중심의 보수교회 등이 설립되었다. 이렇게 되어 1953년 당시 부산에는 160여개의 교회가 있었다. 전쟁 중이던 1952년 3월 부산을 방문한 호주빅토리아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였던 조지 앤더슨(안다손, George Anderson)은 당시 부산교계인사들의 정보를 종합하여 당시 부산에는 156개 교회가 있다고 보고했는데 상당힌 신뢰할 만 하다. 그때로부터 10년 지난 1965년 당시 부산에는 300여 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1년 당시 920-950개 교회가 있었고, 현재 부산에는 1800-1850여개의 교회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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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4-07-05
  • [황대우 교수] 장로교회의 기원
    장로는 구약의 이스라엘에도 신약의 교회에도 있었다. 구약성경의 장로는 나이가 많고 통치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신약성경의 장로 요건은 신앙이 깊고 통치능력을 갖춘 사람을 의미한다. 신약교회에서 장로는 유대교 전통의 용어인 반면에 장로와 동일한 의미의 감독은 로마제국의 명칭이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러서 고별설교를 하면서 그들을 “감독”으로 지칭하기 때문에 장로와 감독은 동의어다.(행 19:17-38) 또한 바울은 신약교회의 감독 즉 장로를 주요 업무에 따라 두 종류 즉 “잘 다스리는 장로”와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로 구분한다(딤전 5:17). 다스리는 장로는 흔히 우리가 부르는 장로에 해당하고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는 오늘날 목사에 해당한다. 목사든 장로든 초대교회에서는 모두 하나님의 종으로 동일한 교회의 사역자를 의미한다. 바울은 그들 모두를 교회가 마땅히 존경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경의 감독 즉 장로로서 목사와 장로는 2세기경부터 감독인 주교와 장로로 확실하게 나뉜다. 감독은 공적 지도자로서 교회를 책임지고 목회하는 사제인데 반하여 장로는 교회 행정을 담당하는 사무 행정가다. 장로는 교회의 통일성을 위해 감독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것은 장로가 감독과 동등하지 않다는 증거이자 서열화를 암시한다. “감독(주교) 없이는 교회도 없다.” 3세기 교회는 확실하게 위계적 감독제도로 보인다. 장로들도 사도직을 계승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이 감독을 따르는 한에서만 그렇다. 점차 감독이 절대적 권위를 갖게 됨으로써 장로의 자리는 점차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하는데, 결국 로마의 감독 즉 교황 중심의 중세교회에서는 장로 직분이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고 만다. 중세 천년 동안 사라진 장로 직분을 부활시킨 것은 개혁파 종교개혁자들이다. 오늘날 장로교회는 16세기 종교개혁, 특히 칼빈의 제네바 종교개혁으로부터 유래한다. 칼빈이 장로제도의 이론을 체계화한 인물이라면 장로교회의 기초를 놓은 인물은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써(Martin Bucer)다. 칼빈은 가시적 교회 즉 지상교회에 관한 많은 것들을 부써에게서 배웠다. 하지만 장로교회는 부써교회도 칼빈교회도, 심지어 낙스교회도 아니다. 부써와 칼빈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세워진 교회에는 요한 낙스(John Knox)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 뿌리를 둔 전 세계의 모든 장로교회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위그노교회와 네덜란드 개혁교회, 그리고 독일의 개혁교회 등 대륙의 교회들도 포함된다. 칼빈의 제네바 종교개혁과 낙스의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가장 큰 차이점은 하나는 일개 도시 단위의 종교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 단위의 종교개혁이라는 사실에 있다. 제네바교회의 정치제도는 가깝게는 프랑스 위그노교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데, 프랑스 개혁교회와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각 도시나 마을에 개별적으로 교회를 설립하고 그 후에 일정 지역 내의 교회들이 연합하여 노회를 구성하는 형태였다. 다시 말하면 도시교회인 제네바교회와도 다르고 국가교회인 스코틀랜드교회와도 다른 모습이었다. 프랑스 개혁교회는 16세기 후반에, 네덜란드는 17세기 중반에 특정 지역의 유일한 교회형태로 인정받고 자리를 잡게 되었다. 오늘날 장로교회는 로마교회, 영국국교회, 감리교회, 회중교회, 침례교회, 루터교회 등과 확연하게 구분된다. 장로교회라는 이름의 기원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다. 그렇다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알아야 장로교회를 안다고 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특징은 1560년의 제1 스코틀랜드 교회치리서와 1578년의 제2 스코틀랜드 교회치리서, 그리고 1645년의 웨스트민스터 정치질서에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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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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