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20(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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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혜의말씀] 그리스도의 향기 (고후 2:14–15)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동·식물은 저마다의 독특한 냄새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동물들이 자기만의 독특한 냄새로 자기의 영역을 표시하기도 하고, 다른 짐승에게 자기 존재를 알리기도 합니다. 나아가 우리 사람들도 저마다의 독특한 냄새가 있습니다. 이처럼 냄새라는 것은 그만의 독특한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며, 그의 존재를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성도로서 우리를 나타내는 냄새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자신을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15절) 우리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도록 세우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1. 왜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었습니까? 우리는 본래 죄의 냄새, 사망의 냄새를 가지고 태어난 존재입니다. 다시말해 우리는 악취를 풍기는 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엡 2:4,5) 죄의 냄새, 사망의 냄새로 가득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을 통하여 의의 냄새, 생명의 냄새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성도들은 생각을 해도 의로운 생각, 말을 해도 축복의 말, 사랑의 말, 격려의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2.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라면, 향기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14절) 바울은 각 처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삶을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바울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도록 세우신 사명자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거하는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예수 안에서의 참 기쁨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천국이 무엇인지 알게 해야 합니다. 이제 이일을 통하여 사망의 냄새에 찌들려 살던 그들에게 생명의 향기,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선물해야 합니다. 향기는 숨어있거나 감춰져 있으면 안 됩니다. 널리 뿌려지고 퍼져야 향기 자체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 향기를 맡는 사람들이 복음의 꿀을 먹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영혼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향기를 찾으십니다. 모양만 있다고 신자가 아니라 예수의 능력이 있고, 예수의 향기가 있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여러분의 심령에 그리스도로 가득 채우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이 땅에 만발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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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시사칼럼] 라인 사태와 디지털 국유화
    한 때 자국 내 외국기업 혹은 다국적기업의 자원 독점 및 수탈을 막기 위해 주로 개발도상국에서 국유화 조치를 감행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1974년 베네수엘라는 50년 간 부여했던 미국철강회사들의 철광채광권을 국유화한다면서 국내 외국기업은 소유주식의 80%를 베네수엘라 투자가들에게 매각하여 국영기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조치들은 대단한 저항과 수많은 논란을 야기했지만, 국가의 주권적 행위인지라 국제사회에서 뚜렷한 해결책과 원만한 합의점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시장자본주의가 범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차츰 자취를 감추어가던 국유화조치가 최근 들어 다시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만 이전 세기와 사뭇 다른 점은 동일한 ‘자원민족주의(Resource Nationalism)’를 이론적 배경으로 내세우면서 과거에 그렇지 않았던 국가들이나 지금은 경제대국이라 할 수 있는 나라들 역시 유사한 조치를 감행하는 현상에 있습니다. 먼저 새천년 시대에 접어들면서 전격적으로 실시된 중남미 일대의 국유화 조치를 살펴보겠습니다. 2006년 5월 1일 볼리비아 정부는 석유 · 가스 산업을 국유화하는 내용을 담은 포고령을 발표합니다. 2009년 5월 8일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 역시 마라카이보 호수 유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60여 개의 국내외 석유서비스기업 자산을 국유화하는 조치를 단행하였습니다. 2012년 아르헨티나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 또한 자국 내 최대 다국적에너지기업인 YFP 국유화를 선언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전쟁 중인 러시아 정부가 이와 관련하여 깜짝 놀랄만한 발언들을 쏟아내어 화제입니다. 지난 4월 12일 러시아 하원이 자국 내 외국인투자회사의 국유화와 관련된 법안을 발의하여 심의 중에 있고 조만간 그 입법 여부가 결정될 예정이라는 보도가 있었습니다(법률신문 5. 16). 한 때 사회주의 진영의 종주국이자 최고의 산업국이던 러시아가 이런 조치를 발표한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러시아만이 아닙니다.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을 자처하는 중국도 최근 몇 년 간 상당히 주목할 만한 비정상적인 경제적 조치들을 단행한 바 있습니다. 독특한 화학적, 전기적 특성을 띠어 미사일을 비롯한 각종 첨단 장치에 필수적인 17종 원소를 통칭하는 “희토류(稀土類, Rare Earth Resources)”라는 말이 최근 수년 간 엄청나게 회자되지 않았습니까? 최대의 매장량을 자랑하는 중국이 2010년부터 희토류를 일종의 ‘자원 무기(Resource Weapon)’로 만들어서 우호적인 국가에만 수출하고 대립하거나 자신들을 제재하는 나라들에는 수출을 금지하기 일쑤였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자원민족주의는 석유나 가스 등 자원에 국한되었고 주로 국유화조치가 문제였다면, 지금은 희토류뿐만 아니라 니켈이나 리튬 같은 자원으로 대상이 확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양상 또한 생산량 제한이나 선별적 수출과 같이 다양화되고 있어 문제입니다. 특히 화석연료의 사용을 자제하자는 세계적인 추세에 맞추어 그 중요성이 급증하고 있는 탄소중립 필수자원의 공급망을 관리하는 방식(SCM, Supply Chain Management)을 활용하고 나서기 시작하면서 더욱 문제가 복잡해지고 커졌습니다. 그러던 차에 최근에 상기한 자원민족주의의 신종 형태로 등장하여, 우리나라가 거기 엮여서 그 자체로도 문제인데다 이를 둘러싼 국론조차 대립하고 분열되어 더욱 심각한 근심거리가 되고 있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일본 내에서 메신저 역할을 전담하다시피 하고 있는 온라인서비스 ‘라인’을 둘러싼 일본 정부의 일종의 국유화 시도가 그러합니다. 물론 이전에도 이른바 ‘플랫폼 데이터 규제’ 조치가 미국이나 유럽연합 그리고 일본이나 중국에서 이루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이는 미국 내에서 중국 산 ‘틱톡’ 앱의 퇴출 방안과 이에 대항하여 중국이 취한 자국 내 미국 동종 플랫폼의 사용 금지 조치 등에 국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일본 정부는 개인 정보 유출을 이유로 한국 기업 네이버에 라인야후 지분을 매각하도록 압박하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우리나라 일각에서는 굴종외교라며 정치화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고 반면 반일몰이라며 경제논리에 맡겨야 한다는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우리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조치를 통해 앞으로 ‘디지털 국유화(Digital Nationalization)’ 내지는 ‘온라인 자원무기화(Online Resource Weaponization)’가 더욱 기승을 부리지 않을까 우려합니다. 영토나 주권을 배경으로 하던 시대와는 그 결을 달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경도 없고 장벽도 없는 인터넷 세계를 자국의 이익을 위해 혼란에 빠뜨리고자 하는 시도는 옳지 못합니다. 부디 이번 사태로 인해 디지털 세상의 자유와 정의가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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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믿음의 하인리히 법칙
    20세기 초, 인류는 산업의 발전을 경험하면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 큰 사고도 많이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산업 현장에서 죽거나 다치는 등의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1931년도 미국의 보험 설계사였던 윌리엄 하인리히가 찾아낸 ‘하인리히 법칙’이 있습니다. 그는 산업 현장의 사고에 대해서 ‘1:29:300’이라는 비율을 제시합니다. 이 법칙은 ‘중대형 사고 1: 경미한 사고 29: 사고의 징후 300’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산업 현장에서 사람이 죽고 크게 다치는 정도의 아주 심각한 중대사고 한 건이 벌어질 때, 그 일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인리히의 연구에 따르면 이미 그 전에 같은 건으로 경상자가 29명 나왔었는데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이 일이 커져서 큰 사고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이 큰 사고가 나기 전, 가벼운 사고가 29건 일어나는 동안 이미 이 사고의 징후는 이미 300번이나 있었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어? 이거 사고 날 것 같은데! 사고 날 것 같은데!”하는데도 이를 가벼이 여겨 고치지 않고,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아서 특별히 돈이나 시간을 들여서 보수하지 않고 손을 보지 않으니까 그러다보니 “어? 또 사고 났는데!” 하면서 그 자리에서 예상되었던 사고가 생겨났고, 결국 그것이 쌓이다보니 사람이 죽고 회사와 사회에도 큰 손해를 끼치는 중상해 사건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 하인리히 법칙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세상이 뒤흔들리는 커다란 사건은 반드시 그 이전에 수많은 징조와 징후를 통해서 간파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우리 주변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미리 우리의 위기를 대비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삶의 변화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징조와 징후가 산업현장만의 이야기일까요? 이는 우리의 믿음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일들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세상의 편에 서게 된 것은 어쩌다 갑자기 한 번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전에 분명히 많은 징후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믿음을 가볍게 여기는 적어도 29번의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고, 돌이켜보면 그 전에 벌써 300여 번의 번성과 돈과 성공에 집착하여 그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모습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한 번에 하나님을 떠나지는 않지만, 돈이 귀하게 여겨지고 하나님보다 돈이 좋아질 때 빨리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야 합니다. 마태복음 16장 2~3절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을 잘 알고 섬기는 종교인들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믿음의 위기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로마의 압제 속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간절히 메시야를 사모하며 기도하는지 그들은 전혀 알지 못한채 자신의 입장을 세우기에만 열을 올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믿음의 제 자리를 찾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징조와 표적을 잘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믿음을 다음세대에게 전해줄 수 있을까요? 하인리히의 법칙을 이제는 이것을 믿음의 법칙으로 바꿔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온전한 승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도 한 번에 쉽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 전에 적어도 29번의 물질과 시간의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바른 물질 사용의 회개가 있어야 하고 바른 시간 사용에 회개가 있어야만 우리는 온전한 믿음의 승리를 거둘 수 있는데, 그걸 위해서 그 전에 많이 필요하고, 매일매일 필요한 건 바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 즉 내 필요와 내 욕심을 조금 더 내려놓고 내 주위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물질에 대해 자유할 수 있고, 시간에 대해 자유할 수 있고, 하나님을 마음으로 모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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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4-05-17
  • [다음세대칼럼] 주님의 가치를 추구하라
    필자는 청소년 사역을 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위기 청소년 사역이다. 가정 밖 청소년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학교 안 가는 청소년들을 학교로 돌려보내는 사역을 한다. 자주 이런 질문을 받는다. 한 건당 얼마를 받는지 물어본다. 필자는 매우 당당하게 말한다. 돈을 받는게 아니라 돈을 지불하면서 그 일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되묻는다. 그럼 왜 하는지 물어본다. 세상 사람들은 돈에 가치를 두고 살기에 이런 질문을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물질을 추구하고, 어떤 사람은 명예를 추구하고, 어떤 사람은 인생의 즐거움을 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의 것들은 다 사라지고 말 것들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영원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 세상에 오직 예수님밖에는 없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위해 사는 인생보다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필자는 이런 이유로 이 사역을 한다.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는 사역, 이것이야말로 정말 예수님을 위해 사는 인생이다. 가난하고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일이 정말 가치 있는 인생을 사는 것이다. 빌립보서를 쓴 사도 바울도 보면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쳤던 사람이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복음을 전했고, 신약성경 가운데 13권을 썼고, 나중에는 로마에서 순교까지 당했다. 이런 삶의 모습들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고, 불쌍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를 보면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도 그 역사의 대열 안에 같이 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면 예수님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필자는 오늘 이 부분에 대해서 두 가지 관점에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먼저, 예수님을 추구하는 사람의 특징은 주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이다. 빌립보서 3장 1절은 이렇게 기록한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언제든지 주 안에서 기쁨을 누려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래 죄로 인해 마땅히 죽었어야 할 사람들이다. 마치 죽은 지 너무 오래 되어서 바싹 마른 뼈와 같이 우리는 죄와 허물로 이미 사망 선고가 내려진 사람들이었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었고 오직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그 결과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 안에 기쁨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하셨는지를 모르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다. 바로 내가 그렇게 구원을 얻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땅히 주 안에서 기뻐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두 번째로, 예수님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부활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빌립보서 3장 10절과 11절 말씀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사도 바울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보면 바울이 부활을 얼마나 간절하게 소망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고린도전서 15:20절 말씀은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님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다시 말하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말씀은 우리도 죽은 다음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가 죽은 다음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은 이 땅을 사는 우리에게 얼마나 소망이 되는 말씀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의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땅에서부터 부활의 삶을 경험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옛사람이 죽는 것이다. 부활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이 죽어야 하듯이, 우리의 옛 성품, 옛 습관, 옛날 욕심들이 다 죽을 때 우리는 이 땅에서부터 부활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힘쓰고 노력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는 이 땅에서 부활의 삶을 살도록 힘쓰고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땅의 것들은 우리가 죽고 난 다음 모두 다 사라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 애쓰고 노력한 모든 것들은 저 하늘나라에까지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이라는 가장 중요한 가치를 허락해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언제나 주 안에서 기뻐하고, 날마다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 힘쓰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 다음 세대가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주님의 가치를 따라 기뻐하고, 부활을 소망하며 살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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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신앙교육나침반] 바빠도 힘들어도 자녀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속에서 자녀세대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핵심전략을 분명하게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명기 6장의 쉐마 명령에 나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명기 6:5-7)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에서의 화려하고 바쁜 정착생활을 앞두고 있습니다. 광야는 날마다 구름기둥과 불기동, 만나와 메추라기 등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은 완전히 다릅니다. 정신없이 바쁘고 분주한 삶속에서는 하나님을 떠올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정착생활 속에서도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떠올릴 수 있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세워야겠다고 결단하셨습니다. 가나안에 세운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무엇일까요? 바로 ‘부모’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힘을 다해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전하는 부모여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충전된 부모는 악한 세상으로부터 자녀를 지키는 든든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됩니다. 지금 수많은 우리의 자녀세대의 뇌는 하나님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작은 몸집의 아이들이 여러 종류의 학원가방을 메고 분주하게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영어단어를 외우고, 수학문제를 풀고, 태권도를 배우고, 피아노를 배우면서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올릴 여유는 없습니다. 너무 바쁘거든요. 그러한 시간속에서 자녀들의 영혼은 더욱 깊은 잠에 빠지게 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녀들의 영혼은 돌처럼 굳어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무감각한 자로 성장합니다. 자녀들에게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더욱 강력한 복음입니다. 잠자는 영혼을 깨울 초강력 복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는구나!’, ‘하나님이 나의 생명이구나!’, ‘하나님이 나의 빛이구나!’를 감탄할 수 있는 일상이 필요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생각 그 이상의 위대한 영향력이 있는 존재입니다. 부모의 무표정이 지속되면, 자녀의 얼굴이 굳어집니다. 부모의 미소가 지속되면, 자녀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해집니다. 그래서 초강력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최고의 통로는 하나님으로 충전된 부모입니다. 향기나무교육개발원은 부모를 통해서 자녀에게 복음이 리듬있게 전파되기를 바라며, <복음놀이리부트50> 책을 출간하였습니다. 이 책에는 부모가 자녀에게 꼭 들려주어야 할 50가지의 복음과 복음놀이가 담겨 있습니다. 바쁘고 분주한 삶이지만, 등교전이나 잠자리에 들기 전에 자녀에게 복음을 읽어주면 됩니다. 시간이 좀 더 있다면, 복음의 내용과 연결된 복음놀이를 간단하게 합니다. 부모가 자녀의 영혼을 사랑으로 부둥켜안고 전하는 복음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복음입니다. 바쁘고 분주한 삶속에서 우리의 부모들이 자녀에게 복음을 강력하고 리듬있게 전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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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교육 나침반
    2024-05-17
  •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2022 재개봉/2023.03.01. 장르/액션/코미디 국가/미국 등급/15세이상관람가 러닝타임/150분 감독 : 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 출연 : 양자경(에블린 왕), 스테파니 수(조이/조부 투파키), 키 호이 콴(웨이먼드 왕) 1. Everything 모든 것이 엉망이다. 삶이 뒤엉켜 버렸다. 미국으로 이민 와서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며 살았다. 세탁 일을 하는 동안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 세탁이 맘에 안 든다며 돈을 내지 않는 손님, 옷감이 상했다며 물어내라는 손님, 이런 저런 일을 다 겪었다. 게다가 지금은 세무서, 이 깐깐한 직원은 온갖 잔소리를 하며 서류를 보완해 내라고 요구한다. 어쩌란 말인가? 그래도 살만했다. 에블린은 가족을 생각하면서 견뎌냈다. 다소 융통성이 없이 착하기만 한 남편, 가끔 속을 뒤집어 놓지만 사랑스런 딸 그리고 묵묵히 자리를 지켜 준 아버지 때문에 견뎠다. 가족은 그녀에게 희망이었고 삶을 견뎌내는 힘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착하기만 한 줄 알았던 남편이 이혼 소송 장을 내민다. ‘당신하고 더 이상 못 살겠다, 당신은 일 밖에 모른다. 나에게 관심도 없다.’고 같잖은 이유를 들이댄다. 딸은 미국 여자 아이를 데려와서 굳이 가족들에게 소개하겠단다. 자기는 동성애자라고, 여자 친구랑 결혼하겠다고 한다. 잘 지켜왔던 세탁소는 세무관련 법적으로 몇 가지 문제가 생겨서 골칫거리다. 한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첩첩산중이라더니 내 삶이 그렇다. 이렇게 모든 것이 한 꺼 번에 내려앉다니. 2. Everywhere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려는 시점에 이상한 일이 생겼다. 세무서에 앉아 있던 에블린에게 이상한 모습을 한 남편이 등장한다. 분명 소심한 남편인데 무언가 다르다. 알 수 없는 괴한들이 공격을 가하는데 남편이 다 물리친다. 그리고 에블린은 남편의 손에 이끌려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남편의 말에 의하면 그는 다른 멀티버스에서 왔고, 엉망이 되어 버린 세상을 구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에블린 당신이 그 세계의 희망이라고 한다. 순간 다른 세계의 악당이 등장하는데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딸 조이 아닌가? 조이 라고 부르지만 그녀는 조부 타파키라면서 사정없이 에블린을 공격한다. 알고 있던 세상이 모두 달라졌다. 남편 에드먼드가 하라는 대로 엉뚱한 짓들을 하자, 에블린 역시 대단한 능력자로 변신한다. 그녀는 다른 세상에서 굉장한 실력자다. 어찌 되었건 그녀는 조부 타파키를 물리쳐야 한다. 에블린은 이 세상, 저 세상, 다양한 멀티 버스를 오간다. 에블린이 오가는 세상에서는 그녀의 과거가 펼쳐진다. 다른 세상에서 그녀는 다른 선택을 한다. 그녀는 멋진 영화배우며, 남편 에드먼드 역시 멋진 미남 배우다. 또 다른 세상에서 에블린은 화려한 무술 실력을 발휘하는 여 전사다. 멋진 투사가 된 에드먼드가 에블린에게 말한다. “당신은 스스로를 투사로 생각하겠지. 당신은 항상 긍정적인 내가 나약하다고 생각할 거야. 그런데 말야, 그게 내가 싸우는 방식이야. 부드러움은 살아남기 위한 내 전략이야. 내 삶에서는 나도 투사야.” 에드먼드의 말에 따라 에블린도 다정하게 싸우는 법을 익힌다. 억척스럽게 투사처럼 살아야만 하는 것이 아님을 배운다. 그렇게 모든 곳을 다니며 삶을 지켜나가는 에블린에게 최강의 빌런이 등장한다. 딸인 줄 알았지만, 그녀는 조부 투파키 &#8211; 우주의 최강 빌런이다. 조부 투파키는 베이글 모양의 블랙홀을 만들어 모든 것을 집어 삼키며 파괴해 나간다. 조부 투파키는 죽어 버리고 싶어서,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고 싶어서 베이글(블랙홀)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실은 사랑 받고 싶었다는 고백이다. 일을 좀 내려놓고 나를 바라봐 주면 안 되냐고 외치는 딸의 투정이다. 3. All at Once 다시 삶이다. 멀티 버스에서 돌아온 에블린의 삶은 바뀌었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달라 보인다. 후회와 한숨으로 살아온 자신의 세탁소는 아름다운 곳으로,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남편은 다정한 사람으로, 속 썩이는 딸은 사랑스런 아이로 다가온다. 꿈을 꾼 듯 멀티버스의 경험이 에블린의 삶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모든 것이 달라졌고 새로워졌다. 달라진 것은 결국 에블린의 내면이다. 그녀는 진짜 투사로 거듭났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장착한 진짜 투사다. 가정을 지켜 온 그녀가 세상을 구한 영웅이다. 죽음의 포로수용소에서 지냈던 빅터 프랭클 박사는 말했다. “삶은 의미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작은 빵 한 조각을 건네주던 동료에게서 그는 진정한 삶을 배웠다. 죽음은 희망의 상실이지만, 희망은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다. 빅터 프랭클은 삶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 가족 때문에 죽음을 이겨냈다. 월터 브루그만은 예언자적 상상력을 가지자고 역설한다. 현실은 불의와 악이 가득하다. 강대국에 의해 침략당한 채 포로 생활을 하는 중이다. 하지만 예언자들은 현실 너머의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었다. 그 나라에서는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뒹굴며, 독사 굴에 어린 아이가 손을 넣어도 물지 않는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지 않으며, 대립과 반목은 사라진다. 불화와 오해는 사라지고 사랑만이 존재한다. 그 나라는 나의 상상에서 현존한다. 아니, 믿음은 지금의 현실을 뛰어 넘어 그 나라를 살아가게 한다. 천국은 멀리 동떨어져 있는 곳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멀티 버스로 존재한다. 언젠가 그 나라로 충만해 질 때, 모든 것, 모든 곳이 한꺼번에 새롭게 될 것이다. 그 나라를 소망한다. 추신 : 멀티 버스는 존재하는가? 요즘 멀티 버스가 화두다. 영화사들이 앞 다투어 멀티 버스를 소재로 제작하고 있다. 마블은 일찍이 멀티 버스를 자신들의 세계관으로 채택하고 있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제목이 멀티 버스의 혼란이고, 스파이더맨에서는 다른 지구에서 온 주인공을 소개하고 있다. 로키라는 시리즈에서도 멀티 버스를 오가며 그들이 설정한 타임-라인을 혼란시키는 존재로 그린다. 그럼 멀티 버스(Multi-verse)라는 개념은 어디에서 왔을까? 갑자기 튀어나온 용어일까? 그렇지 않다. 콜럼비아 대학의 브라이언 그린은 자신의 저서 멀티 유니버스를 통해 이 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힘들지만, 어쨌든 이들 물리 천문학자들이 멀티 버스라는 개념을 도입한 이유는 빅뱅의 원인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빅뱅이 일어나 오늘날까지 우주가 서서히 팽창하면서 존재해 왔으나 그 원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이론적으로 확증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꺼낸 것이 멀티-유니버스다. 즉 다중우주론이다. 우주는 유니버스(Universe)가 아니라 멀티버스(Multi-verse)라는 이야기다. 그 중 하나가 우리가 확인하고 존재하고 있는 이 우주라는 말이다. 다중우주를 설명하기 위해 이들은 우선 인플레이션 이론을 가져왔다. 빅뱅 이후 우주 초기에 공간이 엄청난 속도로 팽창했는데, 현재의 공간을 창출한 폭발 이외에 또 다른 폭발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고, 그 결과로 멀티 버스가 발생했다고 한다. 또한 끈 이론으로 다중우주를 설명하는데, 끈 이론은 한 마디로 우리가 살아가는 4차원 이외에 여분의 차원이 존재한다는 설명이다. 어쨌든 이러한 가설을 영화는 스크린에 녹여 내고 있다. 이들은 멀티 버스를 실재로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럼 정말 멀티 버스는 존재할까? 수많은 물리학자들이 이를 증명하기 위한 가설을 가져오지만, 여전히 확인할 가능성은 없다. 또한 어떤 천문학자들은 말도 안 되는 공상 과학이라고 일축하기도 한다. 그럼 신학적으로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멀티버스가 신학적으로 가능할까? 그럼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 외에 또 다른 우주가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또 다른 메시야가 필요한 것인가? 그들은(만약 있다면) 죄를 지었을까? 아닐까? 복잡한 문제다. 다만, 성경을 읽어갈 때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차원과 다른 영역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발견한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존재한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역에 계시고 우리는 보이는 영역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땅으로 오신 존재다. 또한 성경의 인물들은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는 것을 환상으로 보았다. 야곱은 하늘과 맞닿은 사다리를 보았고, 다니엘은 하늘 보좌를 보았으며,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셨다. 사도 요한은 하늘이 열리고 거기 하나님과 어린 양이 있는 것을 보았다. 또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천사들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멀티버스에 존재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현 시점에서 말할 수 있는 정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유니버스(Universe)의 다른 차원(Dimentions)이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높은 차원에 존재하시며 우리를 지켜보실 것 같다. 일찍이 에드윈 A. 애벗이 쓴 플랫랜드에서 그린 것처럼, 우리보다 높은 차원, 그것을 우리는 영원, 영적 차원이라 부를 수 있겠다. 정리하면 멀티버스라기보다 유니버스의 다른 차원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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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위기의식 느끼는 침례교단
    침례교단이 총회장과 제1부총회장의 직무가 법원에 의해 정지되면서 교단 안팎에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지난 4월 30일 서울남부지방법원은 제1부총회장 선거 무효확인 소송에서 본안 판결 확정시까지 홍석훈 제1부총회장의 직무를 정지한다고 판결했다. 그리고 직무대행자로 총회 총무 김일엽 목사를 선임했다. 여기에 캄선교회 대표의 믿기 힘든 일들이 폭로되면서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다. 당사자가 모든 책임을 지고 대표직에서 물러나고, 교단도 탈퇴했지만, 그 휴유증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또 교단이 직영하고 있는 한국침례신학대학교(총장 피영민 목사)가 대학기관인증평가에서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전임교원확보율 64%가 중요한 지표인데, 교육부 고시 전에 교원확보가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교단안에서는 “대의원들이 교단을 살리기 위해 보다 냉철하고 객관적인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목소리를 낼 때”, “규약과 각 기관과 위원회의 정관과 내규 또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내용들을 논의해 교단의 환골탈퇴 할 수 있는 길을 마련” 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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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4-05-17
  • 연합의지 나타낸 한교총
    한국교회총연합이 지난 14일 연합운동공로자 초청 오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말씀을 전한 이철 감독회장은 “한교총을 중심으로 연합을 잘 하고 있지만, 아직 한기총과 한교연이 남아있다. 가능한 통합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참석한 이들에게 협력을 당부했다. 환영인사에 나선 장종현 대표회장도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를 위해 힘써주신 모든 목사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여러분의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한국교회 연합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겠다”고 말했다. 또 “교파 교리 문제로 분열을 거듭한 한국교회 역사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며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한국교회연합 등 연합기관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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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4-05-17
  • 고신, 합신, 대신 대법원 앞 규탄 시위
    지난 8일 청주지방법원 영동지원이 수술을 받지 않은 A씨 등 5명을 가족관계 등록부에서 성별을 남성에서 여성으로 정정하는 것을 허가한 판결이 내려지자, 예장 고신⦁합신⦁대신 3개교단동성애대책협의회(대표 이일호 목사)가 15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동성애 반대 기도회 및 기자회견을 개최하며 규탄하는 성명서 발표했다. 대책위는 성명서를 통해 “대한민국 국민들은 지금 가장 정직하고 공정해야 할 법원의 어처구니없는 판결과 방침에 극심한 분노와 실망감에 흥분하고 있다. 법원은 이념과 권력의 눈치를 보고 있고, 이 칼끝은 힘없고 선량한 국민들을 향해 휘두르고 있는 것 처럼 비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전환수술을 하지 않은 사람의 성별정정 허용은 고스란히 선량하고 연약한 여성들의 피해로 주어질 것”이라며 “법원이 정말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존경받기 바란다면, 권력과 이념을 떠나 법 앞에서 사심 없는 태도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 길은 잘못된 방침을 즉시 철회하고 공정과 법 앞에서의 평등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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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목회자칼럼] 익숙함에서 오는 착각
    ‘내가 잘한다는 착각, 내가 서툴다는 착각, 내가 소중하지 않다는 착각, 내가 이쁘다는 착각’ ‘인생은 착각의 역사다’는 말이 있듯 사람은 알게 모르게 많은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 그 중 하나가 익숙함에서 오는 착각이다. 오랜 시간을 함께 했기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나도 모르게 무심하게 대하는 내 모습을 본다. 항상 내 옆에 있기에 편하게 생각하고 행동한 아내, 오랜 시간 한 교회를 섬기며 서로 잘 안다고 생각하는 동역자들과 교인들. 편한 친구들과 동생들. 모두 익숙한 사람들이기에 잘 안다고 여겼는데, 문득 생각하니 나 중심으로 착각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크라테스 형님이 “너 자신을 알라”고 했으니, 익숙함으로 인한 착각 속에 살고 있는 내 모습을 다시 한 번 돌아본다. 첫째, 마음 속 우월감, 열등감을 돌아보자.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내가 나를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주변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는다. 비교란 언제 생길까? 나의 정체성이 약해질 때, 내 모습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 시선이 나에게서 타인으로 옮겨간다. 그러면서 내게 있는 좋은 점들은 사라지고 다른 사람의 좋은 점들에 시선이 멈추며 생각을 혼란스럽게 한다. 우월감, 열등감이 물밀 듯 밀려오는 시점이다. 분명, 나는 하나님께 부름받은 자녀인데, 그 정체성은 사라지고 비교의 함정에 빠진게 된다. 토끼가 거북이와 비교할 때 빠르지, 기린과 비교하면 빠르다고 할 수 있을까? 상대적인 비교에 빠지만 착각의 늪에 헤매고 만다. 둘째, 나의 정체성을 생각해보자. 나는 장년부 사역도 하지만, 오래 전부터 청소년 사역자로 섬기고 있다. 38년 동안 청소년 사역을 한다고 청소년들을 만나고 이들에게 말씀을 전하지만 과연 나는 청소년을 잘 알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혹시, 내가 오랫동안 청소년 사역을 해왔기에 청소년을 잘 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들의 고민, 아픔, 갈등, 내면의 생각을 깊게 알고 있기는 한건지 나의 정체성을 다시 돌아본다. 셋째, 나의 내면을 자세히 보자.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시대에 나의 내면을 자세하게 볼 여유가 없다. 마음을 잡고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어도 나의 자아를 특정할 수 없고, 타인을 대하는 태도조차 일관성있지 않는 모습, 나와 타인을 수용하지 못해 요동치는 내 마음. 어느 것 하나 내 뜻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이 아닌가? 실제로 나의 내면을 직면하면 결국 남는 것은 “내가 착각 속에 살고 있구나”라는 사실 뿐이다. 넷째, 내 생각의 뿌리를 살펴보자. 예수님의 제자라면 삶 속에서 예수님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러나야 할 것이다. 말로는 믿음, 사랑, 소망, 섬김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행동으로는 철저하게 나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크고 작은 결정을 할 때, 타인과 관계할 때, 어떤 일에 진행할 때, 예수님의 생각이, 성경적 생각이 먼저 떠올라야 하는데 오늘도 나는 내 생각이 무의식으로 흘러나온다. 익숙함에 착각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채로 말이다. 살다보면, 더 늦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익숙함에서 오는 착각들, 나에 대한 깊은 고민들을 더 늦기 전에 시작해보기 바란다. 그리고 착각을 멈춘 후에, 내가 존재적으로 죄인인 것을 깨닫고 죄인인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우리가 은혜스럽게 부르는 이 찬양의 가사를 몇 번이고 곱씹어 보자.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란 이 표현이 삶으로 동의가 되는지. 내 삶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아픔과 꺾임이 있는지 자문해보자. 사랑하는 동역자, 성도님들과 이같은 고민, 갈등을 함께 나누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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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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