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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경영안개론] ①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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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경영학개론(Principles of Biblical Business Administration; P-BBA)’이라는 주제로 칼럼을 시작한다. 월1회, 1년을 목표로 연재를 이어갔으면 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경제 환경이 정상화되었다. 그럼에도 기업을 둘러싼 경영환경은 어느 때보다도 복잡하고 불확실하다. AI와 디지털 전환이라는 거대한 플랫폼은 물론, 많은 크리스천 경영자들이 이윤 극대화와 무한 경쟁이란 세속적 가치관 속에서 여전히 신앙과 현실의 긴장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적 경영학이란 무엇일까? 본 칼럼은 기업의 목적과 인간의 가치, 그리고 재화의 흐름을 성경 원리에 따라 창조주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탐구하는 학문적·실천적 체계로 정의하며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자이자 목회자인 제임스 패커(J.I. Packer, 1926–2020)는 그리스도인이 기업경영을 하는 목적을 다음과 같이 체계화하였다. 첫째, 경영은 단순히 부를 창출하는 과정을 넘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수행하는 소명으로, 이윤 극대화의 경제적 가치를 넘어 신앙적 가치를 통합한다. 둘째,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경영(Glorifying God)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시장을 통해 새로운 기업가치를 창출한다. 셋째,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봉사 경영(Service to Neighbors)으로, 구성원을 생산의 수단 아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격체로 대우하고 고객과의 관계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경영을 한다. 넷째, 성화의 경영(Sanctification in Business)으로 경영자가 경험하는 고민과 의사결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성화의 도구 역할을 한다. 다섯째, 청지기적 사명(Stewardship)의 실천 경영으로 위탁된 자원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관리하여 사회 유익과 복음을 위해 사용한다.
즉 패커는 기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절대 주권과 더불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화롭게 하는데 있음을 제시한 종교개혁자 존 칼뱅(John Calvin, 1509–1564)은 물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7)과 일치하는 기업경영론을 제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사상은 앞으로 본 칼럼이 개혁 신앙의 토대위에 글을 집필해 가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근간이 될 것이다. 본 칼럼은 ‘경영학원론’과는 다른 ‘경영학개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경영에 대한 지식을 자세히 전달하는 것보다, 일련의 경영학의 큰 흐름속에서 이를 기독교 신앙과 연결한 신학적 통찰의 제시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1998년 학위를 취득하고 필자가 지금의 대학 경영학부에 재직한지 28년이 되어 간다. 아울러 그동안 로고스경영학회 학술지 <로고스경영연구> 편집위원장 3년 업무를 마치고, 올해부터 학회장으로 봉사하게 되었다.
본 칼럼은 2002년에 설립된 로고스경영학회의 논문을 일부 반영하고 있다. 또 기독경영연구원(KOCAM)의 축적된 이슈와 한국기독인실업인회(CBMC)의 활동을 포함한 경영사례도 반영할 예정이다. 주요 참고문헌은 리처드 츄닝(Richard Chewning)의 <기업경영과 성경적 원리>, 스콧 레이(Scott B. Rae)와 켄만 웡(Ken Man-Wong)의 <비즈니스 윤리와 지속가능 경영>, 개혁주의학술원의 <칼빈과 사회> 등이 있다. 이 칼럼의 논리는 영리 목적의 기업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국가와 가정, 사회 그리고 교회 등 신앙생활의 주체가 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다양하게 활용될 수도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언16:9)’. 스스로 자문해 보길 바란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성경적 경영의 삶을 살고 있는가’ 그리고 함께 칼럼을 출발해 갔으면 한다.
* 문의: sblee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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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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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봄동비빔밥과 라캉의 욕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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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두쫀쿠’(두바이쫀득쿠키) 열풍이 불더니 이제는 ‘봄동비빔밥’이 대유행입니다. 최근 썸트렌드(Sometrend)의 빅데이터 집계 결과 지난달 13일부터 한 달 동안 ‘봄동비빔밥’ 언급량이 작년 같은 기간 대비 540% 이상 치솟았다고 합니다(세계일보). 구글트렌드 검색 추이에서도 동일한 검색어의 관심도가 한 달 사이에 15에서 100으로 최고치를 찍었답니다(한국경제신문). 검색은 구매를 촉발했습니다. 공급이 수요보다 모자라는 상황입니다. 당연히 가격도 올라 불과 1주 만에 32% 상승했고 전년 대비로는 78% 올랐답니다(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 호들갑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벌써 ‘봄동 대란’이란 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두쫀쿠’에 열광하며 ‘두쫀쿠 지도’를 제작하고 ‘두케팅’이란 신조어를 만들기까지 하면서 가히 ‘두쫀쿠 신드롬’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봄동 기차로 갈아탄 느낌입니다.
어느 전문 매거진은 ‘두쫀쿠→봄동비빔밥’의 갑작스런 환승 이유를 몇 가지로 분석했습니다(푸슬레터). 우선 낮은 레시피 장벽입니다. 봄동도 결국 배추인지라 누구에게나 겉절이로 무쳐내는 일이 낯설거나 어렵지가 않고 모양을 꾸미거나 참기름을 제외하면 특별한 첨가물이 필요한 것도 아니라서 단번에 일반 가정의 식탁을 휘어잡는 장악력을 발휘했다는 것입니다. 한편 두쫀쿠는 점점 가격이 올라 나중에는 한 알이 만원에 육박하는 미친 인플레를 보여주었는데, 봄동은 아무리 올랐다지만 3~4천 원이면 4인 가정이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반전의 가성비를 보여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지도까지 나올 정도로 구매하기 어렵던 두쫀쿠와 달리 인근 마트에 가면 언제든지 구할 수 있는 접근성 또한 봄동의 돌풍에 단단히 한몫을 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 가족도 봄동비빔밥을 여러 번 맛있게 먹었을 정도니까요.
그러나 둘은 비록 확연히 다른 먹을거리지만 순식간에 국민 음식이 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이들 열풍은 일종의 루틴을 따르는데, 일단 셀럽들이 소개하여 화제가 되고 이후 인플루언서들이 가세하면서 폭발적으로 확대재생산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요즘 용어로 정의한다면 ‘알고리즘에 의한 따라하기’라 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욕망’에서 기인하는 현상이라고 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조차도 성경을 인용하면서(요일 2:16) 인간을 욕망의 존재로 간주하고, “내게 네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면, 나는 네가 어떤 존재인지를 말해주겠다”고 한 바 있습니다(고백록 3권). 그런데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 수 있나요? 현대의 욕망에 관한 심리학적 이론들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듭니다. 자크 라캉은 욕망의 개념에 관해 ‘전염’(프로이트)이나 ‘모방’(르네 지라르)을 넘어서 아예 ‘주체의 욕망은 곧 타자의 욕망’이라 선언했습니다. 그럴듯한 주장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봄동 먹고 싶다’고 스스로 생각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대부분은 유튜브 같은 매체를 통해서 식욕을 느꼈을 텐데, 그렇다면 타자의 욕망이 나(주체)의 욕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라캉 식의 ‘욕망의 전이’나 ‘상상적(상징적) 동일시’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겠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존재합니다. 첫째, 무기력과 약점이나 죄의식을 타자와 공유할 수 있습니다. 부정적 욕망은 감염역이 강합니다. 집단적으로 동일시 과정을 거치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릇된 애국주의나 인종차별주의 혹은 극우나 극좌 같은 편향된 사상에 물들기도 합니다. 둘째,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l'homme désire le désir de l'Autre)는 라캉의 명제는 필연적으로 타인을 향한 경쟁심과 시기·질투를 동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욕망이 분쟁의 불씨인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셋째, 주체의 요구와 타자의 요구가 딱 맞아떨어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끊임없는 욕구 불만과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시달리게 마련입니다. 넷째, 주체성의 상실이라고 하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싸르트르가 ‘타자의 눈은 지옥’이라(닫힌 방) 말한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전통적 신학은 이런 욕망을 ‘뒤틀린 사랑’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해결책을 신의 은총에서 구했습니다. 타인의 욕망은 나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타인의 신앙도 결코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건강에도 좋은 제철음식인 봄동비빔밥은 맛있게 드시되, 누구에게나 혹은 무엇에게든 나의 정체성을 뺏기지 말고, 특히 자기 신앙을 지키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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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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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60년 전 부산교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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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전 당시 부산교회의 모습은 한국교회의 분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먼저, 1960년대 부산교계는 한국교회 분열기의 여진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교회쇄신운동을 전개하던 경남(법통)노회가 1951년 장로교 총회(제36회 총회)에서 추방되었다. 1907년 독노회 조직과 1912년 총회를 구성했던 장로교 총회는 단일 총회였던 것이 교회쇄신운동 과정에서 분열되기 시작했다. 고신측(1951)이 총회에서 추방되어 대한예수교장로회총노회를 구성했고(1952), 자유주의 신학 문제로 기장측(1953)으로 나뉘어 졌으며, WCC 가입 문제와 박형룡 교장의 3,000만환 사기 사건으로 인해 다시 승동측과 연동측으로 분열되었다(1959). 60년 전 부산은 장로교회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통합측 63교회, 합동측 62교회, 고신측 43교회로 삼분되어 있다. 신설된 성경장로회의 모습도 볼 수 있다. 해방 후 교회쇄신운동 과정에서 부산진교회에서 성산교회가, 구표교회에서 구포제일교회가 분리되었다.
명감에는 이러한 교회분열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같은 이름의 교회가 분리된 채로 다른 두 교단에 속한 교회들이 등장한다. 제2영도교회가 고신측의 환원으로 인해 두 교회로 분열되어 합동측과 고신측에 존재하고, 또 평양성 중심 52교회의 피난민들이 세운 ‘평양교회’도 1959년 장로교 대분열 때 나뉘어져 통합측과 합동측에 각각 같은 이름을 올리고 있다.
평양교회는 전쟁이 끝나고도 무려 17년이 되기까지 ‘평양교회’ 이름을 달고 있다가, 평양 출신 한부선 선교사의 제안으로 1970년에야 지역의 이름을 따 합동측 평양교회는 지역 이름을 따 대청교회로 이름을 바꾸었고, 금정구로 이전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는 9교회였으며 산정현교회(장상선 목사)와 서부교회(백영희 목사)는 독립교회로 존재했다. 재건교회는 4교회, 감리회는 22교회, 침례교회는 9교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와 예수교대한성결교회로 양분된 성결교회는 기성이 6교회, 예성이 11교회였고, 수정동성결교회와 중앙성결교회는 1965년까지 중립을 유지하였다.
이 《부산 기독교 명감》은 고신측과 합동측의 환원의 여파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고신측은 1960년에 이미 590교회였는데, 3년이 채 되지않는 환원으로 큰 손실을 보았다. 환원 과정에 함께하지 않은 교회가 145교회, 경기노회 보류파까지 합치면 177교회가 되었다. 북부산교회에서 고신계가 분립 부산북교회를 설립하였다. 성산교회 목회자가 환원에 동참하지 않으면서 성서교회가 설립되었다. 부민교회는 합동측과 중립 양쪽에 이름을 올렸다가, 훗날 고신측으로 돌아왔다. 김창인 전도사가 개척한 동일교회도 환원 당시 합동측에 속해 있다가 뒤늦게 고신측으로 돌아왔다. 이 시기에 가장 큰 어려움을 겪은 교단이 고신측이었다. 합동측과 합동과 환원 과정에서 고신측이던 송도, 북부산, 해운대제일, 충일, 범일 등 여러 교회들이 환원하지 않았다. 교단 통합과 환원의 성급한 판단이 얼마나 아픈 상처를 가져다 주었는가를 알게 한다. 고신측이 합동 당시에 590교회였는데, 600교회를 회복한 것이 1977년도였다. 한국교회 성장기에 고신측은 20년을 제자리 걸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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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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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건축칼럼]미래 교회공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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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시대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의 속도가 너무 급격하여 자고일어나면 세계곳곳이 빠르게 변화되고 있으며 국내의 사정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속화되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미래의 교회공간은 어떻게 진화될 것인가를 예측해 보는 것도 교회성장과 복음의 확장성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예측하는 미래교회공간의 핵심키워드는 하이브리드(Hybrid)와 메타버스(Metaverse)를 지적한다. 물리적인 현실공간과 디지털 가상공간이 합성되어지면 예배는 지금의 영상예배보다 더 생동감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메타버스내에서는 신구약이 결합되어지고 세계가 하나의장소로 압축되어지며 시공간을 초월하게 한다. 이런 기술은 다양한 직업군을 만들어내고 성도의 예배환경도 변화시킬것이다.
건물에 모여 집합예배드리는 형식도 있지만 반대로 흩어져서 삶의 처소에서 예배드리는 흩어지는 교회도 생겨날 수 있으며 카페, 공유오피스 가정과 같은 일상교회가 새로운 형태의 교회로 등장할 수도 있을것이다.
라이프스타일 중심의 신앙이 고착화되어 한 곳에 모이는 것이 쉽지 않게되며 이 현상은 팬테믹을 겪으면서 심화되어있다.
미래는 탈권위 세대가 주도적인 계층이 되어지므로 기존의 수직적 구조의교회형태는 사라질 것이다.
일방향적 설교나 성경공부가 쌍방향적인 방향으로 전환되어 평신도 교역자의 역할과 교회내 전문가들이 더 적극적인 사역자로서 활동할 것이다. 이런 현상은 교회내 나눔과 소통의 공간이 본당비율보다 더 크게 자리잡을 것이며 지역 사회와 연합되어지는 범위도 더 확장될 수 밖에 없다. 이 변화를 소극적으로 대처할 때 교회고립의 현상은 더욱 가속화 된다.
시대의 다양한 네트워크는 교회가 주일하루 사용되는 지금의 비기능적이고 비효율적인 공간구조는 생존할 수가 없게 된다. 주중 비어있는 공간을 주민과 지역사회의 공간 셰어링으로 바뀌어야한다. 많은 한국교회는 아직도 교회공간을 자기들만의 공간으로 인식하여 개방에 소극적이다. 이것은 미래시대의 교회에서는 공동화로 직결되어진다.
AI와 성도의 신앙은 목회의 주요수단으로 자리잡게되며 교회성장과 복음의 확장이란 측면에서 너무 익숙치 않은 과제이나 현실은 더 익숙해질 것을 요구할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계신다. 이것이 유비쿼터스이다. 유비쿼터스는 편재성, 비가시성 유동성 실시간성을 뜻한다. 어디서든 네트워크가 상존하는 이 개념은 인간과 하나님이 소통하고 하나님의임재를 믿는 성도의 신앙과 맥을 같이하는 개념이다.
기술이 기술로서 파편화되는 이질적 개념으로 이해하기에는 현대 기술이 너무 가까이 와있다. 에스겔서에서 마른 뼈에 살이 붙고 생기가 일어나서 거대한 집단으로 변해가는 것을 현대 기술은 디스토피아로 귀결시키는 개념이라면 성경의 디지털은 생명으로 복귀는 내용이다.
매래 교회공간은 장소성에 한계지움 받지 않고 유동적이고 유기적인 공간으로 이해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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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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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칼럼]새학기, 다음세대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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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학기가 시작되면 아이들의 얼굴에는 기대와 불안이 동시에 묻어난다. 새로운 교실, 새로운 친구, 새로운 규칙. 어른들 역시 다르지 않다. 이번 학기는 별일 없이 지나갈 수 있을지, 아이들이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보이지 않는 걱정을 안고 한 해를 시작한다.
성경은 이런 ‘전환의 시기’에 우리가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역대하에 등장하는 남유다의 왕 아사는 혼란의 시대 한가운데서 중요한 선택을 했던 지도자다. 아사는 왕이 되자마자 종교 개혁을 시작했다. 겉으로만 남아 있던 신앙을 정리하고, 우상을 제거하며,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가 만든 우상 앞에서도 타협하지 않았다. 권력과 혈연보다 신앙의 방향을 우선시한 선택이었다. 그 개혁의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위기가 닥친다. 구스 사람들, 오늘날의 에티오피아 지역에서 백만의 군대가 쳐들어온 것이다. 군사력으로 보면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아사는 전쟁터에서 계산보다 기도를 선택한다. “여호와여, 주밖에는 약한 자를 도와 강한 자를 대적할 이가 없나이다.” 이 기도는 단순한 요청이 아니다.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도움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고백하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기록한다. 전쟁은 유다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승리 후 돌아오는 길에 하나님은 아사에게 선지자 아사랴를 보내신다. 그가 전한 메시지는 축하가 아니라 경고에 가까웠다.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 것이요, 너희가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나, 그를 버리면 그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역대하 15장의 중심 메시지는 분명하다.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이다. 여기서 ‘찾는다’라는 말은 단순히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차원이 아니다.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위해 시간과 마음을 들이는 선택, 삶의 기준을 그분께 맞추는 태도, 관계를 회복하려는 적극적인 행동을 뜻한다.
아사와 백성들이 보여 준 태도에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그들은 혼자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왕 개인의 경건함으로 만족하지 않았고, 몇몇 열심 있는 사람에게 신앙을 맡기지도 않았다. 온 백성이 함께 언약하고, 함께 결단하며, 함께 하나님을 찾았다. 신앙은 개인적이지만 결코 개인주의적이지 않다. 한 사람의 방향은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찾지 않는 문제를 단순한 개인의 선택이나 취향으로 다루지 않는다. 더 깊이 생각해 볼 지점은 그들이 ‘자기 시대의 하나님’이 아니라 ‘조상들의 하나님’을 찾았다는 사실이다. 출애굽의 하나님, 광야에서 길을 내셨던 하나님, 다윗과 여호수아의 시대에 역사하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오늘의 시대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시기를 바랐던 것이다.
오늘의 다음 세대는 전례 없는 속도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정보는 넘치지만, 기준은 흐려지고, 성공의 언어는 크지만, 신앙의 언어는 점점 작아지고 있다. 교회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신앙이 삶의 중심이 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시대에 필요한 것은 더 자극적인 콘텐츠나 더 세련된 방법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다시 하나님을 찾는 일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찾은 공동체의 결과를 이렇게 기록한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대하15:4).” 이 평안은 문제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조건이 완벽해졌다는 의미도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설 때 주어지는 깊은 쉼과 안정이다.
새학기를 시작하는 다음 세대에게, 그들을 키우고 가르치는 어른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찾고 있는가? 성적과 결과인가, 아니면 하나님인가, 하나님을 찾을 때, 그분은 여전히 만나 주시는 분이시다. 새학기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 성공하는 새학기가 되길 간절히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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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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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목사의다음세대이야기]다음세대여, 일어나 빛을 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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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의 다음세대를 보신다면 무엇이라 말씀하실까요? 돈과 명예, 성공과 성적을 향해서 무한질주를 벌이는 지금의 다음세대들에게 하나님이 꼭 들려주고자하시는 말씀은 과연 무엇일까요? 저는 우리의 다음세대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이사야 60장 1절 말씀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사60:1)
이 말씀은 매우 유명한 말씀이고 우리에게는 찬양 가사로도 익숙합니다. 하지만 오늘 이 말씀을 지금 나에게,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우리 다음세대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직접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지금까지와는 다른 특별한 느낌이 들 것입니다. 어느 부모도 내 자녀가 움츠리고 있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부모도 자기 자녀가 어두움 가운데 다니길 만족할 이는 없을 것입니다. 모든 부모는 자기 자녀가 떨쳐서 일어나길 원하고 그렇게 일어나서 세상 곳곳을 다니면서 빛을 비추며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였음을 드러내고 전파하길 원할 것입니다. 아마 우리의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마음도 똑같지 않을까요?
먼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더 이상 주저앉아 있지 말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며 현상 유지에 머물지 말고, 떨쳐 일어나서 도전하고 시도하고 싸워내고 마침내 이루고 기뻐하며 감사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빛을 발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빛을 어떻게 만들어낼지 구상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에게 이른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소망, 하나님의 선하고 인자하신 능력을 이제 발할 때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소망을 품고 일어나십시오. 빛을 발하십시오. 위대하신 여호와의 영광이 이미 우리 위에 임하였습니다.
이런 말씀을 받을 때 아마도 어떤 분들은 “아니, 내가 지금 먹고 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어떻게 일어납니까? 그냥 이렇게 살다 죽는 거지요”라는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든 시대가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말씀이 선포되던 당시의 상황 역시 똑같았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시대는 이스라엘이 잘나가던 때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도리어 이스라엘의 최악의 시기, 절망의 시기였습니다. 나라는 바벨론에 의해 망해버렸고, 땅을 잃어버렸으며, 성전은 불타버렸고 성벽은 무너진 절망적인 상태였습니다. 현실은 매우 부정적이고 막막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나 상황이 말씀을 해석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이 상황을 이겨낼 수 있도록 ‘말씀으로 상황을 재해석해내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상황이 말씀을 판단하게 두지 마십시오. 이 말씀을 받는 모든 부모와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처한 상황을 재해석해내는 믿음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라는 망하고 예배는 사라졌으나, 이 말씀이 선포되자 바벨론에 포로로 있던 자들이 믿음으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정말 놀랍게도 전 세계를 통치하던 가장 강력한 제국 바벨론이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바사 제국 고레스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이여, 돌아가서 여호와를 찬양하고 성전을 지으며 나라를 재건하십시오”라고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구약성경 역대하와 에스라를 읽으며 그 감격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역대하에서 이스라엘 나라가 망해가는 모습을 읽어보세요. 눈물이 앞을 가리고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에스라서를 읽으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있던 자들이 하나 둘씩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으로 이 상황을 재해석하며 돌아오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절망의 끝에서 선포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지금 나를 움직여 가시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자리에 내가 뛰어들어야 합니다. 나에게는 빛이 없고 힘이 없지만, “일어나 빛을 발하라” 하시니 일어나 보는 것입니다. 내가 빛을 만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빛이 되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내게 임한 그 빛, 하나님의 빛을 일어나 비추면 됩니다. 그러면 놀랍게도 빛이 나갑니다. 그렇게, 이미 내 안에 임한 여호와의 영광과 하나님의 빛이 드러나게 될 줄 믿습니다. 이 빛으로 올 한해 우리의 가정과 학교와 나의 미래를 비추는 다음세대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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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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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현 목사의 영화이야기]왕과 사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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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장항준
주연 : 유해진(엄홍도), 박지훈(이홍위), 유지태(한명회), 전미도(매화)
한 번씩 대정향교를 가곤 한다. 대정향교 한 쪽 동재에는 추사 김정희가 써 준 현판이 걸려 있다. 疑問堂(의문당), 의심이 생기면 질문을 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1846년 대정향교의 훈장이었던 강사공이 유배를 와 있던 김정희에게 부탁해서 써 준 현판이다. 추사는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으니 학문에 있어 경지에 이르렀던 인물이다. 강사공은 추사에게 여러 번 강의를 부탁했었고 추사는 이에 응했다. 당시 추사에게 글을 배운 제자들은 강사공· 박혜백·허숙 ·이시형 ·김여추 ·이한우 ·김구오 ·강도순· 강기석· 김좌겸· 홍석호 등이 있다. 추사의 상황은 비록 유배중이었으나,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학자에게 글을 배울 수 있었으니 최고의 혜택을 누린 셈이다. 유배자들은 그 지역의 학문 발전에 직간접적 역할을 했다.
1453년 수양대군은 조카인 단종의 후원자였던 김종서, 황보인등을 제거하고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그는 왕으로 등극하고 선왕이자 조카인 단종을 상왕으로 몰아냈다. 이후 단종을 복위하려는 움직임이 집현전 학자 출신 신하들에게서 있었고, 발각되어 성삼문, 박팽년 등이 고문 끝에 단죄가 된다. 세조는 이를 문제 삼아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키고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를 보낸다.
한편 영월의 한 촌락인 광천골, 먹고 살기 힘든 하루 하루를 보내는 부락민들이 있다. 이 마을의 촌장인 엄흥도는 고민이 많다. 부락민들을 돌보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날 사냥을 나갔다 비탈길에 넘어져 정신을 잃었다. 한참 지나 정신을 차려보니 이웃 산골마을이다. 그런데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이 마을에는 잔치가 벌어졌다. 흰 쌀밥에 고깃국에 닭요리가 한 상 가득하다. 아니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정신을 차린 엄흥도는 촌장에게 비결이 무엇인지 물었다. 촌장의 말인즉 얼마 전 고관대작이던 양반이 이 마을로 유배를 왔는데 처음에는 양반 행세를 해서 귀찮고 성가신 존재였지만, 점차 이 양반을 찾아 많은 선비들이 오더라는 것이다. 양 손에 각종 선물 보따리를 가득 들고서. 유배 중인 양반이 혼자먹을 수 없으니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준 것이고, 심심하니 아이들을 불러 글공부를 가르쳤다는 게다. 그래서 마을이 활기차고 풍성해 졌다고 한다.
엄흥도의 눈이 반짝인다. 그는 즉시 영월 관아로 가서 사또를 찾아 뵙고 다짜고짜 다음 유배지는 광천골로 해 달라고 요청한다. 물이 굽이 치는 청령포가 있어서 유배지로 딱이라는 것이다. 우리 마을 사람들이 유배자를 잘 돌보고 감시할 것이라고 약조한다. 얼마 후 엄흥도의 소원대로 광천골 청령포에 한 사람이 유배를 오게 되었다. 엄흥도는 옳거니 하면서 그를 반긴다. 하지만 엄흥도의 예상과 달리 왠 젊은이가 오게 되었고, 알고 보니 그는 폐위된 임금이다. 게다가 한명회라는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양반이 엄흥도에게 경고를 한다. 유배자를 잘못 감시하면 마을 전체가 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는다.
망연자실한 엄흥도, 일이 꼬여도 그렇지 어떻게 이럴 수 있나라면서 한탄을 한다. 하지만 자신이 맡은 일을 해야 하니, 엄흥도는 유배된 단종에게 식사 수발을 하기 위해 드나들 수밖에 없다. 단종 역시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예상치도 못한 유배 생활을 하게 되니 삶의 의미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하염없이 누워있고 하늘만 쳐다보기 일쑤다. 식음을 전폐한 채 누워만 지내는 단종을 보는 엄흥도의 심정도 타들어간다. 만에 하나 잘못 되기라도 한다면 자기 목숨이 날아갈 판이다. 엄흥도는 노산군의 방 앞에서 불평을 늘어놓는다. “젠장, 고관대작을 바랬더니 폐위된 왕이 왠 말인가? 이러다 나도 가족들도 다 죽게 생겼구나”
엄흥도의 불평을 들은 단종의 마음도 복잡하다. 왕으로 있을 때도 백성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는데, 유배되어 와서도 백성을 위태롭게 하고 있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다. 단종은 기운을 차리고 일어난다. 마을 사람들이 준비한 밥상을 맞고, 마을 나들이도 하기 시작한다. 마을 아이들에게 글도 가르친다. 얼마 후 단종이 유배된 사실이 소문을 타고 나더니, 전국 각지에서 단종을 안타까워하는 선비들이 선물을 싸들고 마을을 방문한다. 엄흥도가 바라던 일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들의 행복한 동거는 얼마가지 못했다. 영주에 유배 중이던 금성대군(세종의 여섯째 아들, 세조의 동생)이 조카이자 왕이었던 단종의 복위를 꿰하기 시작했다. 그를 따르는 충신들을 모으고, 군사들을 모았다. 단종에게 사람을 보내어 거사를 전하고 윤허해 주기를 바란다. 단종은 윤허를 하고 금성대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명회가 호락 호락 당할 인물이 아니다. 심어놓은 첩자를 통해 이 사실을 인지하고 군사들을 보내어 역모를 꾀한다는 이유로 처단을 한다. 그리고 단종에게도 사약이 날아든다. 어명으로 노산군의 장례를 치르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노산군으로 유배를 했던 단종과 그의 유배를 보살펴야 했던 엄흥도와 마을 사람들의 행복했던 날들을 그렸다. 역사적 진실을 떠나 감독이 그린 영화의 내용은 우리에게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왕은 무엇하는 사람인지, 왕이 추구해야 할 정치는 어떤 것인지 말이다. 어좌에 앉아 있을 때 단종은 신하들과 궁궐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서 백성들을 만나지 못했다. 당연히 백성들의 희노애락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유배 생활 동안 그는 너무나 평범한 백성들의 삶을 경험한다. 그리고 백성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몸소 알게 된다. 잠시나마 폐위된 신분으로 오히려 진짜 왕의 역할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면서 자신의 백성은 지켜내는 진짜 왕의 모습을 보게 된다. 왕은 권세를 부리는 자가 아니라 백성들을 위한 존재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렸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위에 사실 상 유배를 오셨다. 낮은 신분으로 유배오셨다. 하지만 그 유배 기간 동안 우리 왕이신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의 삶을 몸소 체험하셨다. 그리고 돌보셨다. 자기 백성을 먹이고 입히고 고치셨다. 권세를 부리며 세금을 거둬가는 로마의 왕이나 헤롯 왕과는 달랐다. 친히 자기 백성의 고충을 경험하고 그 아픔을 끌어안으며 동고동락한 왕이었다. 참된 왕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영화 말미에 엄흥도는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르고 종적을 감추었다는 자막이 흐른다. 세조의 어명을 어기고 단종의 시신을 거둔 것은 그의 사랑이자 자신의 왕이었던 분에 대한 예의였을 것이다. 천한 신분으로 왕을 보살피고 왕과 함께 했으며 그 은덕을 얻었으니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엄흥도는 국법 대신 하늘의 법을 따랐다.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테베의 왕이었던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왕이었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해서 아이들을 낳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오열한다. 운명의 장난을 견딜 수 없었던 오이디푸스는 두 눈을 빼 버린채 방랑길에 오른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는 서로 왕이 되겠다고 싸우다 둘 다 죽는다. 어부지리로 왕이 된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의 장례는 치러 주지만, 폴리네이케스는 외국의 군대를 끌어온 반역죄를 물어 사체를 들판에 버리게 했다. 하지만 이들의 동생이었던 안티고네가 몰래 폴리네이케스의 사체를 거둬 장례를 치른다. 국법을 어긴 죄로 감옥에 갇히고 사형을 언도 받은 안티고네는 크레온 왕에게 당당하게 말한다. “제게는 왕의 명령보다 하늘의 명령이 더 소중합니다. 인륜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왕도 하늘의 명령을 따라야 할 것이고, 그 하늘의 명령은 백성을 잘 돌보는 것이다. 그 왕과 함께 사는 백성도 행복할 것이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우리 시대에 정치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또 교회의 리더로써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경종을 울린다. 왕의 의자에서 내려와 백성의 삶의 현장으로 들어갈 때 왕은 왕이 되고, 그런 왕을 섬기는 백성 역시 행복하다. 우리왕이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왕과 함께 사는 사람으로써 이런 왕국을 만들어가는 인생이 되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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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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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교역자 욕설파문 일파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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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교회 김문훈 목사가 부교역자에게 상습적인 욕설을 했다는 보도가 A 매체를 통해 2월 10일 오후 보도됐다. 그런데 이 매체가 보도과정에서 음성파일을 첨부해 파장이 더 커지고 있다. A 매체는 지난 20일 저녁 이 보도를 홈페이지에서 내렸지만, 문제는 첨부된 음성파일이 일파만파 퍼지면서, 타 매체들을 통해 후속보도 등이 이어지고 있다.
A 매체 발행인 B 목사는 금년 초 본보와의 전화통화에서 “(욕설을 하는)이런 분이 교단의 수장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부총회장직)내려 놓는다면 보도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하지만 내려놓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보도를 할 생각이다. 돈으로 해결 될 수 없다는 것이 있다는 것을 꼭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을 중재하기 위해 B 목사와 만난 C 목사는 “B 목사가 녹취록을 17개 정도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번에 보도한 것은 가장 약한 것 중 하나”라며 “만약 추가 보도를 한다면 더 큰 파장이 일어날 수 있다”고 걱정했다.
김문훈 목사는 지난 24일 교단지에 사과문을 게재했다. 피해를 입은 부목사들과 사역자들에게 진심어린 사과와 피해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선출직(부총회장)을 총회 임원회와 선거관리위원회의 판단에 맡기겠다는 말에 대해서는 교단내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모 교단관계자는 “진정한 사과라면 그 사과문 안에 ‘부총회장직을 사임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른 교단관계자도 “총회임원회에 맡긴다는 것 자체가 부총회장직에 연연하는 모습으로 비춰진다고 볼 수 있다”며 “사과문의 진정성이 떨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문훈 목사를 옹호하는 교단 내 목소리도 존재한다. D 목사는 “부교역자에게 욕설한 것은 분명한 잘못이지만, 14년 전 불법 녹취된 내용이 지금와서 논란이 된다는 것 자체가 어떤 불손한 의도가 있다고 본다”고 전했고, A 장로도 “어떤 사람이라도 10년 전 사건사고를 뒤진다면 먼지 안 날 사람이 어디있느냐?”며 “(부총회장직을)낙마 시키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교단 중진 모 목회자는 “이번 사건을 통해 부교역자를 대하는 담임목사들의 태도와 언어가 달라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부교역자에게 함부로 한다면 이번처럼 큰 홍역을 치룰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한편, 김문훈 목사는 지난 26일 총회임원회에 부총회장직을 사임서를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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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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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보 사장 선거 과열조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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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고신(총회장 최성은 목사) 교단지 기독교보(고신언론사) 사장 선거가 금년 중순에 예정되어 있다. 지난 2020년 9월, 9대 사장으로 취임한 최정기 사장은 한차례 연임한 뒤 금년 9월 은퇴한다. 기독교보 사장을 선출하는 총회유지재단이사회는 금년 5월 경 모집공고를 통해 7-8월 경 기독교보 사장을 선출할 예정이다. 9월 총회에서 인준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거론되는 인물은 2명의 목회자와 2명의 장로. 이들은 직간접적으로 출마 의사를 비춰왔다. 또 5번째 후보도 나올 수 있다는 소문도 무성한 상황에서 대략 4-5명의 후보들이 고신언론사 사장 자리를 놓고, 총회유지재단 이사들의 판단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교단내에서는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A 목사와 B 장로의 싸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두 사람 모두 좋은 평판을 받고 있어서, 결국 고신언론사 운영방향과 어떤 비전을 제시하는냐에 따라 승패가 좌우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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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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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교단 탈퇴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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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전교회 백신종 목사측 성도들은 현 임시당회장이 공동의회를 열어주지 않는다며 법원에 임시당회장 선임과 공동의회를 열어달라는 소송을 3월초 준비중이다. 현재 성도 1/3이상 서명을 받아 놓았고, 변호사 선임도 마무리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 목사측 모 성도는 “3월 초 소송에 들어가면 판결 및 교회 공동의회 등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면 대략 5-6월 경에 백신종 목사님을 담임목사로 모실 수 있을 것 같다”며 (교단탈퇴는)불가피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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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