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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교회, 전광훈 측에 성명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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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교회(손현보 목사)가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와 관련해 예배를 방해한 전광훈 측에 성명을 발표했다. 세계로교회는 연합예배 다음날인 28일 성명서를 통해 “집회 및 시위법 상 같은 장소에 두 단체 이상이 집회를 신청할 경우, 먼저 사용하던 단체에 우선권을 주게 돼 있다. 그래서 광화문 지역 중간에 위치한 동화면세점 앞은 이미 전광훈 측이 사용하고 있어 여러 차례 찾아가고 연락해 전광훈 측은 주일 오후에는 그 장소를 사용하지 않는다며,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 집회를 열고 이후 우리 연합예배가 가능하도록 약속했다”고 전하면서 “그러나 약속과 달리 전광훈 측은 한국교회와 전 세계에 흩어진 성도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는 시간 도중, 예배가 끝날 때까지 한 시간 넘게 본인의 정치 집회 영상으로 화면을 변경하고, 음향을 110데시벨 이상으로 더 높여, 더 멀리까지 들리도록 큰 소음으로 예배를 방해했다”고 주장했다.
세계로교회 당회는 ‘오늘(11월 28일) 이후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방해하고 하나님을 모독한 전광훈 측 정치집회에 참여하는 사람은 정관에 따라 당회 결의로 출교 및 제명에 조치한다’, ‘이 단체에 정치 자금이나 헌금 명목으로 기부하는 사람 역시 동일하게 출교 및 제명 조치한다’, ‘고신총회 이단대책위원회에 전광훈에 대한 이단성 조사를 재개할 것을 요구하며, 그동안 중단되었던 이단성 조사가 신속히 진행되도록 촉구한다’는 결의문까지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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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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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떠날지 모를 내 삶, 떠날 때는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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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젊었을 때는 미래를 모르고 하루하루 그날만을 위해 살아 왔다. 그야말로 형편과 처지에 따라 그날 그날 만을 위해 살아 온 셈이다. 인생에 목표가 있고 꿈과 비전을 위해 달려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냥 되는대로 방향과 비전도 없이 환경에 주어진대로 살아 온 지난 날이 몹시도 후회스럽다. 30대 결혼하고 40대 생활의 기반을 잡아야 하는데 될대로 되어라 하고 하루 살이 인생으로 살아 온 것이 한번 뿐인 인생 실패작으로 세월과 나이만 먹어 허송세월로 지나 온 것이 너무 가소롭고 허망하기 그지없다. 왜 내가 그 때에 마음먹고 정신차리고 목표를 향하여 열심을 다하지 못했을까 생각하니 너무 창피하고 후회스럽다.
결혼 하기 전 20대에 폐결핵으로 몸이 무너져 내린 것이 주요 원인으로 모든 것이 허망하고 이렇게 되고 나서부터는 죽는 날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 무슨 희망과 꿈이 있었겠는가. 그저 세월아 네월아 그때 그 순간 세월만 흐르고 인생 낙오자처럼 살았으니 무슨 꿈이 있고 앞날에 희망을 품고 살았겠는가? 첫 단추가 건강을 잃고 살아가니까 매사에 용기와비전 없이 살아지고 만 것이었다. 겨우 닥치는대로 뱀탕이며 몸에 좋은 것은 다 먹고 나니 그 몹쓸 결핵도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는 결혼을 30대 초반에 하고 생활에 매달려 하루 하루 먹고 살기가 바빴다. 직장도 없이 월급 한번 받아 온 적이 없는 하루 살이 인생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처가집 생활 아니었다면 벌써 거지나 방랑자로 인생 폐품으로 남아서 인생 종지부로 갔을 것이었다.
한번 뿐인 인생인데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야 되는데 그렇게 못하고 살았으니 실패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재미교포였던 김영봉 목사가 쓴 책에서 ‘죽음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가기 위한 통로’라고 했다. 인생의 시작과 끝이 모두가 주님께 속한 질서로 받아들여지는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이제 여든이 되고 보니 불과 10년 전후로 밖에 살지는 못할 것인데 다가 올 죽음을 어떻게 잘 준비해야 될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날마다 참되게 살기는 살아야 되는데, 말과 같이 잘 되면 오죽 좋으련만 그렇게 되기 어렵지않을까 싶은 기우다. 항공기 사고가 나면 골든타임 90초 룰이 있다. 사고 발생 직후 90초 안에 비행기로부터 벗어나야 생존율이 높아진다. 순식간에 비행기 안은 지옥을 방불케 된다. 평상시 훈련 받은대로 메뉴얼 대로 행동하여 비상구 위치 탈출 요령을 설명할 사이 없이 비행기 안은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우리 인간이 살아 가는데 우선 순위가 무얼까? 생각하니 첫째가 뭐니 뭐니 해도 건강이고 그 다음이 잠언 4:1~9에서 지혜이다고 했다. 옛 어른들은 지식은 부족해도 지혜는 배운 공부와 상관이 없다고 했다. 지혜는 어디서 얻을 수가 있을까? 바로 어릴 때부터 부모 공경으로부터 얻는다. 부모는 우리에게 돈이 재산이 아니라 지혜 곧 효를 통해 생명을 물려 주는 것이다. 인생 선배로서의 가치가 가장 지혜로운 가치가 아니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쉰 살이 넘으면 철학자가 된다고 한다. 어느 시골 농부가 어머니를 지개에 얹고 깊은 산골짜기를 가고 있는데 어머니는 자식이 집에 못 돌아갈까봐 가는 길마다 나뭇잎으로 표시를 해 두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아들은 지개를 내려 놓고는 “어머니 잘못했습니다”라고 하고 후회한 이후로 고려장이 없었졌다고 한다.
잠언 4:1~10에 있는 것 같이 “너는 내 말을 잘 들어라 내 말을 잊어 버리지 말라 소중히 여기라. 그리고 사랑하라 지혜를 사랑하라”고 했다. 영어에 philosophy 헬라어에서 나왔는데 필로는 사랑한다, 소피아는 지혜라는 말로 ‘지혜를 사랑한다’는 말이고 지혜를 사랑하면 철학자가 된다고. 곧 부모의 교훈을 소중히 여겨 지혜가 너를 지키고 너를 높이고 너를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은 절대로 인생 낙오자가 되지도 않고 자살하는 법이 없을 뿐 아니라 문제아가 되는 법이 없다. 바로 효자가 효자를 낳는 이치이다. 하나님은 지혜와 장수와 능력을 약속해 주고 있다.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이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지혜가 해답이다’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옛말에 ‘보약을 잡수려 하지 말고 효도하십시오’라고 했다. 부모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를 기쁘게 하면 바로 행복해지고 지혜의 길이 열린다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 땅의 모든 자식들아 내 말이 아니고 성경에서 당부하는 하나님의 첫째 약속이라는 것을 잊지를 말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은 “너무도 감사했습니다”라는 말을 하고 하늘 나라로 떠나고 싶다. 우리 모두가 돈 드는 것도 아니고 순종하면 이런 좋은 선물을 안겨 준다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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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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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시종여일하고 신시경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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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로서 연합사역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다양한 사람들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말로 감당할 수 없는 복이며 은혜다. 괜찮은 사람에 대한 기준이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기준은 처음 함께 했을 때의 마음이 시간이 지나도 쉽게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물론 그 처음의 마음은 당연히 공동체의 가치와 목적에 합하고, 순리적 정의의 관점에서 볼 때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이다.
우리 말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시작이 중요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지만, 깊게 살펴보면 시작하는 일의 내용과 자세가 더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악하고 나쁜 일도 시작만 하면 이미 반은 진행되었기에, 시작하는 일이 선하고 아름다워야 함은 명약관화하다. 또 시작이 반이라면 선하고 아름다운 일은 시작과 함께 이미 반을 이루었기에, 그 나머지 절반의 성공을 위해서도 끝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진행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신시경종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당나라 충신 위징이 당 태종에게 올린 글에 나온다. 그 의미는 “시작을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능히 끝을 잘 마치는 자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나태하고 게을러질까하는 두려움이 찾아올 때는 신중하게 일을 시작하고 일의 끝을 잘 마무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라고 진언하였다. 우리의 역사에서는 한명회가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의 사위였던 성종에게 유언처럼 당부한 말이 바로 신시경종이다. 군주가 조금만 마음을 게을리 하면 간신배들의 아첨에 넘어가기 때문에 항상 일의 처음과 마지막을 바라보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간언했다. 대국을 다스리는 왕이라 할지라도 신시경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충신이 자신의 주군에게 목숨과 마음을 담은 글을 올린 것이다.
한명회가 남긴 말 중에 신시경종과 함께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준 말은 “시근종태는 인지상정이지만 종신여시 하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작할 때는 부지런하지만 끝날 때에는 태만해 진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라 할지라도 군자는 처음과 끝이 동일하게 근면해야 한다는 뜻이다. 종신여시와 비슷한 말은 시종여일이다. 시작과 마침이 동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새도 떨어뜨렸던 한명회가 노년에 유배를 당하고, 비참한 최후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후회와 회한 그리고 성종이 자신과 같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진언한 것이다.
처음 세운 뜻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의미를 지닌 초지일관도 있다. 이것 또한 논어 위령공편에 나오는 ‘일이관지’ 즉 처음의 뜻을 끝까지 꿰뚫는다와 모든 것은 하나로 꿴다와 같은데, 처음의 마음이 마침의 시간까지 뜻을 잃지 아니하고, 전체를 뚫고 지나가는 것을 말한다.
이상과 같이 시종여일, 신시경종, 종신여시, 초지일관 등은 거의 다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선하고 아름다운 초심을 끝까지 잃지 않고 실천하는 것이 곧 성공한 삶이며 승리한 인생이다. 역사 이래로 충신들은 한결같이 자신들도, 그리고 자신의 주군도 그렇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초심을 지켜 성공한 사람은 더 강력하게, 초심을 잃어버려 실패한 사람은 자신과 같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진솔하고 담대하게 진언한다. 나도 시종여일 신시경종 하는 사람들이 참 좋다. 참 괜찮은 사람들이다. 내 곁에 이들이 있기를, 내가 이런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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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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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감부열 선교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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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 내한하여 강계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감부열 선교사는 1940년 6월 세 번째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대동아전쟁의 발발로 다시 내한하지 못했다. 이때 감부열은 뉴저지의 플레인필드제일장로교회와 엘리자벳제3교회에서 목회자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게 되자 선교지를 위해 기도하며 미국에서 목회를 정리하고 1947년 4월 4일 다시 내한했다. 해방된 한국교회의 재건이 시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속히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한국어도 능통했고 한국에서의 선교사역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확신했다. 이때는 다시 북한의 강계로 돌아갈 수 없었기에 대구지부로 배속되었다.
대구 정착과 교회 재건으로 분주하게 지냈는데 1950년 6월에는 전쟁이 발발했다. 대구로 피난해 온 피난민들을 돕고 교인들을 보살폈다. 그의 대구 주택은 피난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의 피난처였다. 전세가 불리하여 위험하다고 본 그는 안의와 선교사와 같이 안동으로 가서 안동선교부의 기물과 주요 문서를 대구로 옮겼다. 안동이 점령당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인천상륙 작전 이후 서울을 수복하고 평양으로 진격하여 평양에서 수복감사예배를 드릴 때 그는 미군 군목 자격으로 킨슬러와 힐, 아담스, 보켈, 마펫 등과 같이 평양으로 가서 예배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는 대구로 돌아왔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아군이 후퇴하는 긴박한 현실에서도 한국에서의 군목제도 도입을 위해 노력했다. 미국 군목병과의 교범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여 군목제도를 도입하는 일에도 기여하였다고 한다.
전쟁 중에서도 한국교회는 신학교 문제로 혼란하였고, 총회가 두 학교, 곧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직영을 취소하고 제3의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1951년 9월 대구에서 총회신학교를 설립할 때 대구의 감부열을 초대 교장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인돈(William Linton), 권세열(Francis Kinsler), 조하파(Joseph Hopper) 선교사와 박형룡, 김치선, 계일승, 명신홍 한경직 등은 초대 교수로 추대되었다. 이 학교가 오늘 총신대학교로 발전했다.
감부열 선교사가 대구에서 일할 때 그 가까이에서 일한 한국인이 서정환(徐廷煥, 1906-1952) 전도사였다. 평안북도 강계군 고산면(高山面) 고산진(高山鎭) 출신인 서정환은 감부열 선교사의 전도로 신자가 되었고,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되었다가 해방 후 석방되었고, 감부열 선교사가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대구로 와 그와 함께 일했다. 서정환은 감부열 선교사 부부를 부모처럼 여기고 함께 일하기도 했다.
감부열 선교사는 1952년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가 펜실베니아 주 젱킨스타운의 비버대학(Beaver college)과 일리노이주 휘튼의 휘튼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DD) 학위를 얻고 1953년 대구로 돌아왔다. 1954년 4월에는 대구에 계명기독대학이 설립되는데, 초대학장으로 추대되었다. 처음 120명으로 출발했으나 1958년 3월에는 첫 졸업생 49명을 배출했다. 도서를 확보하고 도서관을 건축하고 또 음악당을 건축하는 등 학교 발전에 기여하고 1958년 7월에는 학장직을 안두화 선교사에게 넘겨주고 8월에는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960년 선교사직에서 은퇴했다.
그는 한국선교 경험을 담은 The Christ of the Korean Heart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1958년 김윤국에 의해 ‘한인 중심의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한역되었다. 길지 않는 145쪽에 지나지 않는 짧은 책이지만 전 1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서 5-6명의 선교사 외에도 고난과 시련 가운데 믿음을 지켰던 한국인 17명을 소개하고 있는데, 김익두, 서정환, 손양원, 안의숙, 이대영, 이승만, 이영식, 임한성, 주기철, 한경직, 한병혁 등이다. 그가 남긴 또 한 가지 저서는 강계에서 함께 사역한 바 있는 노혜리, 곧 로즈(H. A. Rhhodes)와 1935년 이후의 북장로교의 한국선교사를 정리한 500여 쪽에 달하는 역사책(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1935-1959)이다.
앞에서 말했지만 그는 여러 일화를 남겼는데, 그가 북한에 있을 때 사냥도 즐겼는데 동료들과 곰사냥도 한 일이 있다고 한다. 어려움 중에서도 그는 평정을 잃지 않았고, 곰으로부터 큰 화를 당한 일도 있는데, 그런 중에서도 “나는 살겠으나 곰은 살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하면서 위기를 벗어난 일도 있다고 한다. 그가 대구에서 일할 때 정일영 목사가 그를 힘들게 하고 괴
롭혔다고 한다. 정일영(鄭一永, 1901-?) 목사는 평양신학교 31회 졸업생(1936)으로 대구 대봉동에서 일하고 있었다. 감부열 선교사는 참고 지내다가 한 말이, “정 목사, 예수 사면이요!”라고 했다고 한다.
1972년 1월에는 부인 안혜리(헬렌) 여사가 사망했다. 미국펜실베니아주 빌라 신위드의 웨스트민스터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해에 감부열은 루시 링컨(Lucy E. Lincoln, 1905-?) 여사와 재혼했다. 루시 여사는 남편과 사별하고 10년째 혼자 지내던 여성이었다. 5년을 같이 살고 1977년 1월 감부열 선교사는 86세로 사망하여 첫 부인 헬렌 옆에 안장되었다. 감부열은 헬렌과 사이에 1남(Archibold) 3녀(Helen, Frances, Ann)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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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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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종 교수] 그리스도인과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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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생어무위(福生於無爲) 이환생어다욕(而患生於多慾)’이라는 말이 있다. ‘전한(前漢)’시대(BC 200-8)의 학자 ‘한영(韓嬰)’의 저술인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오는 표현으로 ‘복은 욕심을 내지 않는 것에서 생겨나고, 염려는 욕심이 많은 것에서 비롯된다’는 뜻이다. 사람이 마음먹기에 따라 행복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는 말로도 들린다. 정말 인간이 욕심을 내지 않고, 모든 것에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면 행복할 수 있는 것일까?
현대인들은 대부분 행복하기를 갈망한다. 행복이 삶의 목표가 되기도 한다. 행복해지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유엔산하자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에서는 매년 140여 국가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기초로 행복지수를 산출하여 순위를 발표한다. 2024년에는 10점 만점에 7.741점을 받은 핀란드가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국가로 발표되었다. 우리나라는 6.058점으로 52위에 랭크되었다. 2021년에는 5.845점으로 62위, 2022년에는 5.935점으로 59위, 2023년에는 57위였다. 전체적으로 행복 지수가 나아지고 있지만, OECD 국가들 가운데서는 거의 최하위권에 해당한다. 이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들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셈이다.
사실 ‘행복’이란 매우 주관적인 감정으로 기준을 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현대 심리학에서 행복은 기본적으로 ‘쾌락’을 의미한다. 이 ‘쾌락’은 개인의 만족감이나 긍정적인 감정에 초점을 맞춘다. 내가 만족스러우면 행복하다고 느끼게 된다. 이런 생각을 쉽게 확인하는 방법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언제 행복한가?’라고 질문해 보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원하는 것을 이루었을 때’ 혹은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를 얻었을 때’라고 답할 가능성이 높다. 행복학을 연구하는 연세대 서은국 교수는 내가 즐거움을 느끼면 행복하다고 말한다. 행복의 기준이 개인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소유하면 정말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행복에 대해 근원적 질문을 던진 대표적인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는 이성을 통해 인간의 탁월함을 나타냄으로써 인간다움을 추구하고 최고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행복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의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말하면서 행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나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과 고통 위에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과연 우리는 이 행복을 올바른 삶의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행복을 성경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자신의 만족과 즐거움을 우선적으로 추구하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행복에 대한 언급보다 평화에 대한 가르침이 압도적이다. 성경은 나의 마음을 다스리고 욕심에서 벗어나 만족하는 삶을 추구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개인의 행복보다는 함께 누리는 평화에 주목한다. 평화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이레네’이고 히브리어는 ‘샬롬’이다. 신구약 성경은 ‘평화’에 대한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나아가 성경은 우리가 행복한 사람이 되기보다 ‘평화를 가져오는 사람(peacemaker)’이 되라고 가르친다. 우리 시대의 행복은 개인적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평화는 관계적이다. 그리스도인은 나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인 시대를 살지만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기 보다 함께 평화를 누리는 삶을 소망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그 평화를 사람들과 함께 누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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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