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06(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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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임중칼럼] leader는 있고 leadership은 없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지도자는 많은데 지도력 부재의 시대라고 아파한다. 지도자다운 지도자가 없다는 말이다. 국가 지도자든 사회지도자든 종교 지도자이든지를 무론하고 우리는 참 ‘지도자’가 그립다. 요즈음 듣는 여의도 1번지 이야기는 속이 뒤집혀 먹던 것도 내뱉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정말 해도 너무 한다. 소위 선량(選良)이라는 분들의 사고력(思考力)이나 언행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이라면 정치인들에게서 어떻게 국태민안을 기대하겠는가. 마음이 천근만근이 된다. 모두가 ‘내 잘못은 없고 네 잘못 뿐’이라는 논리를 당연시하는 정치 지도자들의 의식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를 생각하며 그들을 선택한 국민으로서 자괴지심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오죽하면 ‘내로남불’의 발상지가 여의도 1번지라는 말이 회자(膾炙) 될까. 야당대표가 생사를 건 단식투쟁을 한다. 그를 두고 개인비리를 덮으려고 국정을 마비시키는 꼼수라며 매정하게 논평하는 여당 지도자들, 그것이 국정쇄신을 위한 애국충정이라고 옹호하는 야당 지도자들, 이들의 언행을 보면 어린아이도 돌아서서 코웃음을 칠 상황이 아닌가. 그들의 행태를 보면 문제를 풀어내고 화해와 상생의 멋을 이끌어내는 지도력을 가진 사람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다. 너 죽고 나 죽자는 희한한 판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어느 기자가 보도한 대로 “코미디도 이렇지는 않다”는 말이 가슴을 후벼 판다. 경제가 곤두박질을 치고, 학원이 막판 장터가 되었으며, 사회가 시궁창 냄새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내 탓이오’하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슬프기만 하다. 모두가 ‘네 탓’이다. 카톨릭의 신뢰 회복 운동의 하나인 ‘내 탓이오’ 캠페인은 1990년부터 시작된 것이다. 사회적으로 불신과 갈등이 만연하게 된 원인이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됨을 자각하고 자기반성 운동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래서 고 김수환 추기경이 승용차에 ‘내 탓이오’스티커를 붙인 것을 시작으로 전 카톨릭 신자는 승용차에 “내 탓이오”스티커를 부착하여 사회 정화 및 자기반성 운동으로 솔선수범을 해왔다. 고 김수환 추기경의 이와 같은 리더십에 우리는 박수를 보냈고 동참했다. 이 아름다운 운동이 확산되어 개신교인들은 ‘익수스(Ιχθυς)’ 물고기 모양의 스티커를 승용차에 붙이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공표하면서 모든 사회생활에 귀감이 되기를 다짐하는 것도 같은 의미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그런 스티커를 부착한 승용차들이 신호를 위반하고 교통질서를 무시하고 운전을 하는 것을 심심찮게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양심의 소리에 그나마 부끄러워져서일까? 이제는 ‘내 탓이오’도 ‘익수스’도 일상에서 볼 수가 없다. 요즈음 시대를 유튜브 범람 시대라 한다. 공적으로 사적으로 유튜브 방송이 미디어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그런데 이 유튜브가 우리의 마음을 감동케 하고 삶의 질을 다듬어주기보다는 정사(正邪)가 분별되지 않는 자극적이고 무분별한 내용으로 여과없이 쏟아지고 있다. 사리판단은 뒷전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선호하고 믿고 싶은 대로 생각이 기울어져 흑을 백이라 해도 박수를 보내고, 백을 흑이라 해도 박수를 보내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니 우리 사회가 흑백으로 나뉘어져 나만 옳고 너는 틀렸다는 공멸을 향해 달음질하고 있다.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간디는 일찍 우리를 파멸하게 하는 일곱 가지를 갈파했다. 원칙 없는 정치, 근로 없는 축재, 도의 없는 기업, 인격 없는 지식, 인간성 없는 과학, 양심 없는 쾌락, 희생 없는 신앙이 그것이다.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 이 일곱 가지가 현존하기 때문에 우리는 천천히 천천히 공멸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논어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보면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가르침이 있다. 자신을 죽여서라도 인(仁)을 이룬다는 뜻인데, 높은 뜻을 지닌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삶을 구하여 ‘인’을 저버리지 않으며 자신을 죽여서라도 ‘인’을 이룬다‘(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고 했다. 이 가르침으로 우리의 선조들은 공(公)을 위해 사(私)를 희생하는 것을 최고의 삶의 가치로 알았고 이를 수행하는 것이 지고한 군자의 길임을 가르쳤다. 이에서 진정한 지도자의 지도력이 나왔다. 언론에 오르내린 수많은 잘난 분들, 조금만 힘이 있어도 그 힘을 못 써먹어 안달하는 소인배, 좁쌀만 한 명예와 권력이 있거나 관계되면 별별 희한한 짓을 당연한 듯 행사하는 졸부들이 지도자로 있는 한 공리(公利)는 요원하다. 세월이 그래서인가? 요즘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는 ‘내 탓이오’가 없다. 모두 너의 잘못으로 돌리면서 ‘나는 소크라테스요 너는 돼지’라는 논리를 펼친다. 예수님이 그토록 경계하셨던 바리새인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 이 세태가 걱정스럽기만 하다. 이 황량한 사막 같은 삶의 현장일지라도 그리스도인만큼은 오늘의 난국이 나의 잘못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엎드림의 삶이 절실히 요구된다. 古稀의 중반을 넘기면서도 나는 1년에 70여 교회의 초청을 받으며 말씀사역을 하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끄럽고 벌판이 되어가는 교회의 중심에는 항상 목사와 장로라는 지도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갖는 직분을 마치 계급사회의 직무로 오해하면서 자기 자신을 지도자가 아닌 지배자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leader는 있는데 leadership이 없다면 결과는 언제나 공동체 전체가 아파하게 되고 결국에는 파멸에 이른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리더십의 내용은 긍휼과 겸손과 섬김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리더십의 방법은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었다. 진정한 leadership을 가진 leader가 있을 때 그 조직과 공동체는 평행감축(平幸感祝)의 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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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2
  • [성서연구] 성도가 알아야 할 것
    본문은 바울 사도께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해 드린 기도입니다. 이때 바울은 감옥에 계셨습니다. 그는 감옥의 고통 중에도 성도를 위해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정말 주님의 충성된 종이요, 성도를 사랑하는 목자였습니다. 그는 육체의 안락함과 세상의 부귀영화 따위에 눈길을 주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나라를 위해,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울이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께서 알고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것을 바울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해 드린 기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반복되는 표현이 있는데, <알게 하소서>입니다. 성도는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알았고,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알아야 했고, 우리가 알아야 할 진리는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의 기본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기독교강요』제1권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 말합니다. 사람은 자신을 위한 이기적 동기에서 움직이게 되는데, 하나님을 믿는 것도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여길 때 열심을 내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사람에게 결정적으로 유익합니다. 하나님의 존재, 사랑과 능력을 알 때, 그분이 온갖 우상과는 다른 유일한 참 신이심을 알 때 비로소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에베소서가 기록되던 당시 로마 세계에는 온갖 우상숭배가 판을 쳤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하나님이 우상과 다른 분임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는데, 그 부르심 안에 있는 소망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말씀입니다. 우리를 생명으로 부르셨고, 믿음으로 부르시고, 사명으로 부르십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가나안으로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는 그 안에 엄청난 복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게 부르심 안에 있는 소망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장차 얻게 될 복을 소망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큰 민족의 조상이요, 믿음의 조상이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또 성도는 주님께서 주시는 기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기 기업이란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장소적 개념을 추구한다면 천국을 생각해도 좋습니다. 장차 주실 천국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풍성한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아픈 것, 눈물, 죽음이 없는 영생의 나라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또 성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능력이 얼마나 큰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입니다. 그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능력입니다. 홍해를 가르치고, 어린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우리는 사탄을 이길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것들을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감옥에서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로마 황제보다 크심을 알았고, 하나님 나라가 로마 제국을 백 개 이상 합친 것보다 크심을 알았고,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 있는 엄청난 복과 그 능력을 알았습니다. 비록 현실이 성도를 억압하지만, 그건 잠시뿐임을 알았기에 그는 철저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성도가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악을 행하고, 하나님 아닌 것들을 의지합니다. 목회자와 교회 중직자 중에도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 있는 영광과 소망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세상의 것을 의지하여 교회와 교단과 교계의 권리를 얻으려고 온갖 추한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아마 이 세상이 영원할 줄로 착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무리 교회가 커도 하나님 나라에 비할 수 없을 텐데, 교회를 사유화하여 마음대로 주무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세상을 믿는 것이요, 자신을 믿는 것이요, 사단을 믿는 것입니다. 진실로 바울의 기도에 나오는 것들을 우리 모두가 알길 원하고, 그것으로 기뻐하면서, 세상을 극복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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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2
  • [시사칼럼] 삼십 퍼센트의 진실
    집권한 지 1년이 지난 현재 대한민국 대통령의 국정지지도를 바라보면서 의아한 점이 한 가지 생겼습니다. 온갖 억측을 불러일으켰던 용산으로 관저 이동, 이태원 참사의 후속처리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과오, 가족의 비리 문제, 국제잼버리대회 졸속 운영 문제, 양평고속도로 사태, 해병대 수사단장 박 대령 사건 등 숨 돌릴 틈조차 없이 이어진 연이은 사건사고 속에서도 콘크리트 같은 30% 지지율을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민주 정부가 시작되면서 들어섰던 전직 대통령들 모두 저마다의 암초를 만나 지지층 급락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우 IMF 사태, 고 김대중 정부의 경우 두 아들의 구속,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 FTA 체결과 이라크 파병, 이명박 전 대통령의 경우 광우병 사태와 BBK 문제,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문재인 정부의 경우 부동산 문제 등이 불거져 나올 때마다 국정지지도가 추락하는 수모를 겪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현재 대통령은 굵직굵직한 문제들이 줄지어 발생하는데도 굳건한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으니 신기한 일입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지 나름대로 분석을 시도합니다. 마침 올해가 파레토(Vilfredo Pareto, 1848-1923) 사망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해서 먼저 ‘파레토 법칙’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정치경제학자였던 그는 자국 내 부(富)의 분배 상황을 연구한 후 20% 인구가 80% 부(富)를 차지하고 있다는 결과를 발표했는데 이를 후학들이 ‘파레토 법칙’이라 명명하면서 유명해진 이론입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파레토 법칙은 오늘날에도 많은 분야에서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상위 20% 소득자가 전체 세금의 80% 이상을 부담하고, 백화점 20% 고객이 전체 매출의 80%를 책임지며,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20%의 버그를 수정하면 오류 및 충돌의 80%가 해결된다거나(Microsoft), 심지어 평소 즐겨 입는 옷조차도 옷장 속 20%에 불과하다든지 하는 식으로 다양한 통계적 사실들을 말할 때 곧잘 파레토 법칙을 거론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마케팅 전략을 세울 때 이러한 20%를 공략하라는 선택과 집중의 원리를 내세우기도 합니다. 다방면에서 상당히 수긍이 가는 이론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정치 분야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엄청난 지지율을 자랑했던 전직 대통령들이 상기한 여러 문제로 인해 한 자릿수의 처참한 지지율을 기록했던 사실을 우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이론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30% 원리’를 주장하는 사례들도 존재합니다. ‘패션의 70/30 법칙’이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패션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경험에서 비롯된 말인데, 브랜드의 상위 30% 스타일에서 전체 매출의 70%가 나오더라는 얘기입니다. ‘연애 강자 3할의 법칙’도 있습니다. 연애 잘 하는 사람은 전체의 30%에 불과하더라는 의미입니다. 주로 일본 쪽에서 많이 나오는 말인데(일본인구문제연구소), 『솔로사회가 온다』(북바이북, 2022)의 저자 아라카와 가즈히사에 의하면 연애를 하든지 이미 결혼을 했든지 불문하고, 심지어 바람을 피우는 사람들 중에서도 연애 강자의 비율이 30%를 차지하고 있더랍니다. 야구의 경우에도 타격을 잘 하는 기준이 3할입니다. 즉 세 번 나와서 한 번꼴로 살아나가면 훌륭한 타자라는 칭송을 받습니다. 이처럼 30%라는 비율은 정확하게 설명할 길은 없어도 우리 일상에서 실질적으로 임상적으로 체험하는 경험적인 수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치 영역만큼 경험치가 무의미할 때가 많은 분야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원리 역시 지금 대통령의 지지율 30%의 정밀한 기반이 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30%’ 견고한 장벽의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얼마 전 대통령의 발언과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움직임으로부터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윤석열 대통령은 최근 1년 전과 달리 ‘문제는 이념이다’라는 발언을 했습니다. 새는 두 날개로 나는 법이지만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고도 하셨습니다. 지금 첨예하게 벌어지고 있는 ‘홍범도 장군’ 같은 논쟁이 이로부터 기인한다고 봅니다. 독립전쟁의 영웅이지만 공산주의는 안 된다는 시각에서 촉발된 논쟁이 아닙니까? 공산주의 세력과 맞서 싸우는 것이 중요하므로 한-미 동맹 강화가 가장 중요한 정책일 수밖에 없고, 필요하다면 일본과도 손을 잡고 반공을 위해서라면 강제징용이나 오염수 같은 문제에 있어서 조금은 양보해도 좋다는 인식이 나타나지 않나 합니다. 올해로 어느덧 휴전 70년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6. 25 세대들에게 전쟁은 아직도 실제적으로 현재진행형입니다. 전쟁을 직접 경험하거나 전쟁 종료 후 약 10년 안에 태어나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학습한 세대가 바로 나이 60대 이상이며 현재 전체 인구의 30%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바로 견고한 콘크리트 지지층의 중요한 기반 중 하나가 아닐까요? 이념이 물론 중요합니다. 우리 현실에서 반공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민주나 민생과 같은 모든 가치를 집어삼키는 리바이어던을 정당화시켜줄 수는 없습니다. 반공은 국시일 수 있으되 우상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이러한 영적인 하한선만은 반드시 지키며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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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2
  • [은혜의말씀] 최고의 예배자가 되십시오(창 4:1-5)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와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열왕기상 3장을 보면,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후 기브온에 가서 일천 번제를 드렸는데, 그 밤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말씀하시지요.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1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수한 제물을 가지고 성전에 제사하러 오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는 숫양의 번제와 실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다” 하시면서 “다시는 가져오지 말라, 다시는 제사하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예배는 받으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예배는 받으시고,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습니까? 성경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히 11장은 그 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있습니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답은 믿음으로 드리느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아벨은 자신의 예배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예배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순간임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도 자기 편의대로, 자기 생각대로 드렸지, 하나님을 생각함이나,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었습니다. 자,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믿음의 예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받으시는 믿음의 예배는 최고의 것을 드리는 예배입니다.(4절) 아벨은 뜨거운 감사와 감격으로 첫 새끼를 바쳤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자기 인생의 첫 번째였습니다. 이런 우선순위는 우리 인생의 출발이 어디인지를 보여주는 신앙고백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주일 예배를 미리 준비하십시오. 예배를 가장 우선순위에 두십시오. 주일 예배에 좀 일찍 나오셔서 한 주를 돌아보고, 오늘도 예배를 통해 주실 말씀을 기대하며, 미리 설교 본문을 읽고 기도한다면, 얼마나 예배가 은혜롭겠습니까? 우리의 우선 순위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받으시는 믿음의 예배는 자신을 드리는 예배입니다.(4,5절) 우리가 드림을 강조할 때 항상 따라오는 것이 예물입니다. 그런데 헌금은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라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만 받으신 것이 아니라 아벨 그 자체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제물보다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대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배의 의식이나 모습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배는 그 사람의 전 인격을 드리는 것입니다. 삶이 곧 예배입니다. 예배는 예배드리는 한 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삶 가운데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주목하여 찾으십니다. 모든 성도님들은 아벨처럼 믿음으로 최고의 예배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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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2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다음세대 사역으로 부흥하는 교회
    저는 다음세대 사역에 관한 강의나 설교를 할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리는 저를 정말 행복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하는 것이 저는 가슴 떨리게 좋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미래가 굉장히 밝습니다. 많은 분들이 교회의 미래를 너무 어렵고, 어둡고, 힘들게만 말씀하시는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음세대 사역으로 부흥하는 교회를 바라고 기대하는 우리의 소원과 이 기도의 제목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몸된 교회에 주신 비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께 “다음 세대 사역으로 부흥하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강의하거나 이러한 노하우를 소개하기를 매우 기뻐합니다. “다음 세대 사역으로 부흥하는 교회” 여러분, 이런 교회를 바라십니까? 물론 바라시겠죠. 그런데 정말 이런 교회가 있을까요? 있습니다. 이런 교회를 바라긴 하지만 이런 교회가 있냐? 라고 물으면 다들 주저주저하세요. 아니, 다음 세대 사역이 좋긴 하지만, 필요는 할 텐데 그걸로 교회가 부흥할까? 라고 하는 반신반의를 가지고 계세요. 그런데 제가 저희 성민교회에 부임한 지는 8년 됐습니다. 그전까지 저희 교회는 세워진 지 25년 된 전통교회. 모든 것이 일반적인 교회였습니다. 특별할 것이라고는 크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제가 부임해서 첫 1년 동안을 설교하고, 심방하고, 성경 공부하는 데만 전념을 했어요. 그런데 1년 만에 저희 장로님들이 저를 보고 당회 시간에 정책 당회를 하는데 “목사님! 이제 좀 정체를 드러내시죠.” 그러시는 거예요. “목사님! 분홍 목사님 아니십니까? 다음 세대 사역하시는 거 저희가 알고 모셨는데 목사님! 한 1년 동안은 설교와 심방과 성경 공부만 하셨으니까 이미 저희와는 이제 신뢰 관계가 형성이 됐습니다. 이제 목사님 무슨 말씀을 하셔도 저희가 다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그래서 제가 <다음 세대 부흥 5개년 계획>안을 들고 나와서 “그러면 이걸 한번 해보실까요?” 그랬더니 장로님들이 “오케이!” 하셨어요. 그래서 2017년도부터 제가 5개년 계획을 했는데 여러분, 놀라지 마세요. 5년 안 걸렸습니다. 시도한 첫해 우리가 꿈꾸던 게 다 됐어요. 그래서 숫자만 커진 게 아니라 질적으로도 그 행복 지수가 너무 높아졌습니다. 저희 아이들은 부모님들이 어디 가서 우리 애에 대해 소개할 때 그렇게 소개합니다. “우리 애들 전교 1등입니다. 행복 지수가.” 성적 전교 1등은 소용없어요. 여러분, 그거 해봤자 잘 먹고 잘사는 거 아니거든요. 그런데 행복 지수는 전교 1등이에요. 그래서 저희 교회는 30분, 1시간 걸려서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교회, 부모님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교회, 그래서 아이들 때문에 등록하는 교회, 아이 때문에 우리 교회로 찾아오는 교회가 되었어요. 그래서 부산뿐만 아니라 김해, 양산, 진해. 저희 경남 모든 지역에서 가장 주목받는 교회,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교회, 그리고 가장 핫한 교회가 되었어요. 저는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다음 세대 사역으로 부흥하는 교회는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바로 저희 교회입니다. 그래서 저는 늘 저희 교회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해서 현실적인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그냥 이러면 좋겠다가 아니라 해보니까 이렇더라. 우리도 할 수 있다, 이런 마음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의 다음 세대 사역 표어는 “다음 세대를 주인공으로”입니다. 여러분, 이게 정말 중요합니다. 과연 우리 아이들은 주인공인가? 라고 하는 거예요. 과연 어른들이 주인공을 다 하시고, 아이들은 그냥 엑스트라 아니면 애들은 조연 배우, 아니면 그냥 지나가는 사람1,2 정도로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다음 세대란 말이 문제가 있다고 그래요. 다음 세대니까 다음에 도와주자고 자꾸 그러신다고. 그러나 다음 세대는 주인공이고요. 지금 아이들은 가장 대우받고 사랑받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이게 왜 다음 세대가 주인공이냐면요. 저희 때 70년대만 해도 한 해에 100만 명이 태어났어요. 100만 명이면 길거리에 치는 게 아이들이었어요. 그러니까 길거리에서 북만 쳐도 따라왔어요. 그런데 이게 2000년대 들어서면서 한 해에 64만으로 훅 줄어버립니다. 이때부터 교회 학교 위기론이 나왔어요. 애를 안 낳아요. 그러다가 2010년도 들어가니까 연간 평균 47만 명으로 훅 줄어들더니 이게 2020년도에 들어가니까 드디어 27만 명. 지금은 20만 명이 안 돼요. 즉, 5분의 1 이하로 줄어들었어요. 길거리에 애들이 없어요. 학교가 줄고 있고, 폐교되고 있고. 여러분, 부산 시내에 시내 복판에 있는 학교가 지금 폐교되고 있어요. 그건 매우 심각한 위기예요. 그러니까 학교를 끼고 편하게 교회학교 사역을 하던 교회들이 지금 위기를 만난 거예요. 그러면서 그 교회들이 지금 누구에게 전화를 거느냐? 저희 교회에 전화 옵니다. “홍 목사! 심각하다.” 이러면서 저한테 요즘 굉장히 많은 전화가 오는데요. 제가 다음 세대를 사역하면서 “다음 세대 위기입니다. 필요합니다.” 아무리 얘기해도 귓등으로도 안 듣던 목사님들이 이제 교회에 코로나가 딱 터지니까 애들이 사라졌잖아요. 애들이 교회 안 나오고 문을 닫았다가 다시 문을 열었는데 또 안 와요. 그러니까 이제서야 위기를 깨닫고 저한테 전화가 오고 찾아오시고 어떻게 해야 하느냐? 라고 솔루션을 묻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지면을 통해서 몇 회에 걸쳐서 솔루션들을 아주 자세히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기대해주시고 계속 이 지면에 관심을 가져주시고 주목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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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3-09-22
  • [다음세대칼럼] 우리 시대와 사사 시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믿음대로 말씀대로 살아가기 어려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묻지마 범죄들과 폭행이 난무하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자녀를 폭행하고, 살해하는 일들도 심심찮게 일어납니다. 우리 시대가 왜 이처럼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비단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가정이 붕괴되고, 학교 교육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교권이 무너졌습니다. 시대가 갈수록 악해져만 갑니다. 그런데 사사기를 묵상하다 보면 우리 시대가 보이고 우리 자신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중에서 사사기 17장과 사사기 17장의 ‘미가’야 말로 사사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각종 사건 사고들이 우리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오늘 본문의 ‘미가’가 사사 시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미가는 자기 시대와 그 시대 사람들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미가는 어떤 사람이었고, 미가가 보여주는 그 시대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사사시대의 특징은 하나님보다 먼저인 것이 많은 시대입니다. 에브라임 지파의 어느 부유한 집안에서 어느 날 거액의 돈이 도둑을 맞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은 1,100세겔이 없어졌습니다. 그 돈의 규모는 어마어마했습니다. 사사기 17장 10절에 보면 미가가 자기 집의 제사장에게 준 1년 연봉이 ‘은 10세겔’이었습니다. 최소한 100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거액의 돈이 없어졌습니다. 오늘날 월급을 200만원으로 계산하면 연봉 2,400만원 정도이고, 약 24억 정도 되는 돈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집안의 여주인이 훔쳐간 자를 저주했습니다. 그런데 저주를 듣고, 두려움으로 훔쳐간 돈을 돌려준 사람은 놀랍게도 그 집안의 아들 ‘미가’였습니다. 미가는 왜? 도대체 어디에 쓰려고 어머니의 재산을 훔쳤습니까? 이런 아들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그의 어머니였습니다. 그 어머니는 자신의 거액의 돈을 훔쳐간 자를 ‘저주’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범인이 아들인 줄 알고, 돈을 돌려주자 급하게 말을 바꿉니다. 사사기 17장 2절 말씀에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하면서 ‘축복’했습니다. 죄를 지은 아들을 책망하지도 않고, 도리어 ‘축복’한 것이 바로 미가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사사 시대 모습입니다. 이렇게 사사 시대는 내게 해가 되면 저주를 퍼붓고, 내가 득이 되면 축복을 남발하는 시대였습니다. 복과 저주를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즉 자신이 왕이고 신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미가든 그의 어머니든 복과 저주를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조금의 인정함도 없습니다. 입으로는 여호와를 말하고 범사에 제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에게는 하나님도 율법도 없었습니다. 결국 미가와 미가의 어머니, 그리고 그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도 하나님의 말씀도 겁내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사람과 사람의 저주에는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하나님께는 무디고, 세상과 사람에 대해서는 민감했던 것이 이 시대 사람들의 특징이었습니다. 이렇게 사사 시대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어떻습니까? 아들에 대해서 끔찍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들이 잘못되면 큰일 납니다. 아무리 아들이 잘못된 행동을 해도 잘되어야 합니다. 굳이 아들이 잘못한 것을 지적해서 기죽일 필요가 없습니다. 왜 내 아들 기를 죽입니까? 누가 내 아들 기를 죽입니까? 누구도 내 아들 건드리면 안 됩니다. 설사 하나님이라도! 내 아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되도록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주리라!’ 이것이 미가의 어머니의 마음이었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하나님보다 내 아들’, ‘말씀보다 내 아들이 더 우선’입니다. 어머니가 이러니 미가도 똑같은 죄를 짓습니다. 사사기 17장 5절 말씀입니다. “그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그가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더라.” 레위인도 아니고, 아론의 후손도 아닌 사람은 절대로 제사장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운 것이 미가입니다. 결국 아들을 말씀 위, 하나님 위에 둔 것이 그들의 모습입니다. 미가의 어머니와 미가에게 있어서 하나님보다 더 위인 존재,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그들을 돕는 존재, 복 주는 존재, 저주를 막아주는 존재, 인생 무대의 엑스트라에 불과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이 퇴색한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어떻습니까? 우리 시대도 이렇지 않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 예배, 말씀, 교회보다 우선하는 것이 너무나 많은 시대 아닙니까? 시간이 남아야 예배하고, 돈이 있어야 헌금하고, 여유가 있어야 봉사할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은 자꾸 우리 삶에서 뒤로 밀리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또한, 다음 세대를 외치지만 이 시대의 미가를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먼저인 것이 너무 많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 중심의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시대가 갈수록 악해져 가도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 절대적인 신앙으로 살아가고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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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2
  • [양육칼럼] 듣는 마음으로 자녀와 소통하라
    오늘날 자녀 간, 가족 간의 갈등은 물론 최근 들어 발생하고 있는 다양한 사회문제의 원인으로 가족 간, 세대 간 소통부재가 자주 회자되고 있다. 최근 한 교육기관에서 실시한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를 대상으로 가정에서 자녀와 어떻게 소통하는지 설문조사한 결과, 하루 평균 자녀와 나누는 대화시간이 어느 정도인지를 묻는 질문에 '30분 이상 1시간 미만'이라는 응답이 30.9%로 가장 많았다. 그 뒤를 이어 '10분 이상 30분 미만'(29.1%), '1시간 이상 2시간 미만'(22.0%), '2시간 이상'(11.9%), '10분 미만'(6.2%) 순으로 집계됐다. 즉 응답자의 66.2%가 자녀와 하루 평균 1시간이 안 되는 대화시간을 갖는 셈이다. 또 자녀와의 대화는 '엄마'(55.3%)가 주도적으로 이끌어 간다는 응답이 절반 이상이었고, '자녀'(33.6%), '아빠'(9.1%) 순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결과는 대화의 주도권은 엄마가 가장 많이 가지고 있고 아빠는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하는 비율이 미미한 것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는 초등학생에서 청소년기로 이어지는 시기에 아빠와 자녀 사이에 대화의 단절을 초래할 수 있어 민감한 청소년기의 자녀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지 사뭇 염려가 된다. 또 다른 조사에서 초ㆍ중ㆍ고교생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하루 평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단 13분(평일 기준)에 그쳤다. 가장 가까워야 할 가족끼리 대화를 나누거나 같이 노는 시간이 하루 0.9%밖에 안 된다. 반면 학원ㆍ숙제 등 학교 밖 공부 시간은 190분, TVㆍ스마트폰 등 각종 미디어 이용 시간은 84분으로 훨씬 많았다. ‘거의 매일 자녀와 대화하는 부모’의 비율은 53.7%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인 70%에 한참 모자랐다. 짧게 이루어지는 대화마저도 ‘숙제 했냐’ ‘스마트폰 한 시간만 해라’ 이런 식이다. 건강한 사회로 나아가는 기본 요소가 가족인데 대화다운 대화는 없고 각자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가족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으면서도 끊임없이 SNS와 핸드폰 메시지를 확인하느라 지금 당장 내 눈앞에 있는 가족의 말투와 표정, 혹은 동작에 주의를 기울일 여력이 없다. 소통의 핵심은 말보다 마음이다. 기술보다 진정성이며, 논리보다 태도다. 자녀와 올바르게 소통하기 위해서는 평소 자녀의 일상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귀 기울여 듣는 즉 경청하는 태도가 우선이다. 열왕기상 3장을 보면 솔로몬은 기브온에서 일천 번제를 드린 후 꿈에 나타난 여호와께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라고 하자 ‘듣는 마음’ 구한다. '듣는 마음'은 히브리어로 '레브 쇼메아(לב שמע)'이다. 레브는 '마음'이고 쇼메아는 '듣는'이란 뜻이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한 것은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지혜'와 '민초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이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이 탁월한 선택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셨다. 솔로몬의 모든 지혜는 하늘의 소리와 백성을 소리를 듣고자 하는 그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부모들도 듣는 마음으로 자녀의 말을 경청한다면 소통은 물론이거니와 자녀의 의사전달력과 경청하는 태도를 함께 키워주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자녀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날 있었던 상황보다는 그 상황으로 인해 자녀가 느꼈던 감정을 물어야 한다. 자녀는 자신의 감정을 공감 받을 때 진정으로 부모와 소통하는 기쁨을 느끼게 되며 위안을 얻을 뿐만 아니라 자아존중감도 높아지게 된다. 또한 자녀가 잘했을 때 칭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소통은 실수하거나 실패했을 때 비난하지 않고 진심으로 격려하는 것이다. 부모로부터 진심어린 격려를 받는 자녀는 자신감을 갖게 되며 실패해도 재도전하는 용기를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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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2
  • [신앙교육나침반] 10월 31일은 할로윈(Halloween)? 종교개혁기념일(Holy Win)? (1)
    10월 31일은 흥미롭고 매력적인 날, 바로 할로윈 데이입니다. 사람들은 유령, 마녀, 괴물 등으로 변장하여 집집마다 돌면서 사탕을 받습니다. 사탕을 받아온 후에는, 다양한 놀이 파티를 합니다. 할로윈 데이는 정말 흥미롭고 매력적인 날일까요? 그 기원에 대해 살펴봅시다. 기원전 500년경, 고대 아일랜드 캘트족은 11월 1일에 죽은 사람의 영혼이 1년간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 머물렀다가 떠난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하루전인 10월 31일은 지상에 수많은 악령이 내려와 난동을 부릴 것이라 믿으며, 그들을 두려워하여 검은 옷과 검은 두건 차림으로 횃불을 들고 사탄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신 ‘삼하인’(Samhain)에게 처녀를 재물로 바치기 위해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Trick or Treat!”(처녀를 내놓지 않으면 해코지를 하겠다!) 협박을 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탄숭배 제사의 문화가 할로윈 데이의 뿌리가 되어, 오늘날 수많은 자녀들이 귀신의 모습으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Trick or Treat!”를 외치고 사탕을 받습니다. 영향력있는 사탄숭배자 존 라미레즈(John Ramirez)는 하나님을 믿은 후 기적적으로 사탄숭배가정에서 탈출한 후에 다음과 같이 경고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당신과 당신의 자녀가 할로윈데이에 귀신의 흉내를 내는 순간, 사탄의 영이 당신을 소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당신이 할로윈을 어떤 형태로든 참여함과 동시에 당신은 악마를 기념하는 희생제사로 바쳐졌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가? 당신은 단순한 흥미로움으로 참여하였지만, 그 찰나에 당신은 원수와 화친협정을 맺고, 당신의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탄의 자녀로 바꾸는 희생제물로 바친 것이다. 당신은 그러한 무서운 희생제사를 매년 한번씩 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라!” 종교개혁이 일어날 당시, 수많은 로마카톨릭교회 신도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외에 죽은 성인(聖人)들을 믿고 숭배했습니다. 그들 역시 매년 11월 1일은 죽은 성인들의 영혼을 위한 성인 대축제일로 지켰는데, 바로 하루 전날인 10월 31일에 성인(聖人)들의 영혼이 세상에 나오는 날로 생각했습니다. 로마카톨릭 신자들은 성인(聖人)들을 예수님과 동등한 위치에 두고, 믿고 숭배하였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물건을 비싼 돈에 구입하여 만지면, 구원을 얻는다고 믿었습니다.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루터 역시 복음의 진리를 깨닫기 전, 무려 21명의 성인을 숭배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21명을 일주일로 나누어서, 매일 세 명의 성인(聖人)을 숭배하였다고 합니다. 루터는 날마다 죄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금식하고 노동하며, 하나님과 성인(聖人)들에게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고행은 전혀 루터의 영혼에 평안을 가지고 오지 못했습니다. 그는 날마다 “나는 사탄의 사슬에 꽉 묶여 누워있네!”라며 고뇌하였습니다. 이후에 루터는 1507년에 사제로 안수를 받고,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헬라어 성경 원전을 읽고 연구하던 중,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을 만나 지금까지 믿고 따랐던 모든 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는 ‘죄인인 나를 의롭게 하시는 의’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 그는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인간의 모든 선행과 노력으로는 결코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으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붙잡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눈을 뜨게 된 루터는 자신이 지금까지 진리라고 믿었던 모든 것이 거짓 복음이었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제서야 로마 카톨릭교회의 심각한 타락이 낱낱이 보였습니다. 1517년, 루터는 로마카톨릭 교회에 뿌리깊게 박혀 있는 죄악된 관습에 대해 복음에 근거한 95개조의 반박문을 작성하여 비텐베르크 성당문에 게시하였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바로 이날을 시작으로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믿음!”, “오직 영광!”의 강령을 외치는 종교개혁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10월 31일에 우리 모두는 사탄의 형상이 아닌, 빛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옷’은 사탄의 간계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적하여 공격하는 전신갑주입니다. 10월 31일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신갑주로 무장하여, 종교개혁자들이 생명걸고 외친 다섯 가지의 핵심 5대 강령을 가슴깊이 새겨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10월 31일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을 기념하며 온 세대가 함께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 자료를 공유드리려고 합니다. 온세대가 참여하는 복음 가득한 종교개혁기념 파티에 대한 활동 자료는 유튜브채널 [향기나무 성경놀이터]를 통해서 9월 22일부터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교회와 가정에 복음을 전하는 [향기나무 성경놀이터] 채널의 많은 구독과 추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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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교육 나침반
    2023-09-22
  • [영화] 새 영화와 옛 영화의 만남을 노래하다
    기독교 영화제의 덕목 서울국제사랑영화제(2023.09.14.~09.19)가 20주년을 맞이했다. 명실공히 아시아 최초의 국제기독교영화제로 출범했지만 서울시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기 위해 ‘기독교’ 대신 보편적인 용어인‘사랑’을 선택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대신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 영화 전문 상영관으로 ‘필름포럼’을 인수하여 2개의 상영관을 상시운영할 수 있게 된 것은 장기간 운영이 가능하도록 큰 버팀목을 갖추게 된 일이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가 20년 동안 한국 기독교 영화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나름 기독교 영화 발전에 공헌해온 것은 분명 한국 기독교사에 기록될 만한 역사적인 일이다. 한국 교회 성도들의 숫자가 증가하고 우리 사회가 문화의 시대로 들어갔을 때 예배당 대신 영화관을 선택한 일 자체가 놀라울 따름인 까닭이다. 특히 세속적인 문화와 영화에 길들여져 신앙 따로 영화 따로 생활했던 기독교인들에게 적어도 신앙과 영화와의 관계를 일치시킬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 점은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그래서 주최 측은 20주년을 맞아 매년 수여하던 ‘기독교 영화인상’을 대신해서 영화제 발전에 이바지한 사람들에게 ‘공로상’을 수여하는 행사를 개막식 무대 위에서 진행하였다. 주최 측이 아닌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 서울국제사랑영화제는 영화제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최신 기독교 영화와 너무 오래돼서 구하기 힘든 옛날 기독교 영화를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영화전문가들이나 조직 없이 한 개인이 외국의 새로운 기독교 영화들을 찾아보는 일은 쉽지 않다. 기독교 영화제는 개인의 수고를 덜어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독교 영화예술의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기독교 영화가 가지고 있는 메시지는 신앙을 돌아보게 만들며 세속적 문화에 대한 저항과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향한 강한 의지를 북돋는다는 점에서 어떤 유명 설교가도 할 수 없는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20회를 맞아 서울국제사랑영화제가 준비한 개막작 <지저스 레볼루션>(Jesus Revolution, 2023)은 일반 극장에서는 만나볼 수 없는 새로운 기독교 영화다. 금년 봄 미국에서 개봉하여 흥행적인 면과 대중적 관심을 모으는 데 성공했지만, 국내 어떤 영화사도 이 영화를 수입할 수는 없었다. 미국의 배급사는 한국 내 영화관에서 개봉하는 데 따른 수고나 비용을 감수하기보다는 넷플릭스라는 손쉬운 플랫폼을 택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손양원 목사의 순교사를 다룬 <사랑의 원자탄>(1977)은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을 끝내고 관객을 맞이한 옛날 영화다. 강대진 감독의 이 역작은 한국 기독교 영화의 역사를 일으킨 작품으로 익히 알려져 있지만 요즘 세대 가운데 이 영화를 본 사람은 극히 드물다. 비디오 플레이어가 각 가정마다 있었던 199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사랑의 원자탄>은 비디오테이프로 존재했었다. 그러나 비디오테이프는 장기간 보관이 어렵고 디지털 기기에 적용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을 하는 일은 현시대에 옛 작품을 경험하게 할 뿐만 아니라 영구 보존이 가능하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히피문화 속의 미국교회를 들여다 보다 흔히 어윈 형제 감독으로 불리우는 존 어윈(Jon Erwin)의 최신작 <지저스 레볼루션>은 우리 시대에 기독교 영화의 가치를 제대로 전수해준 수작이다. 갈보리 교회를 이끌었던 척 스미스 목사의 신학적 평가를 앞세우지 않고 미국 사회와 기성세대가 외면한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어떻게 예수님께로 돌아왔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교훈을 얻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까지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히피 문화 속에서 진리를 잃어버린 양들과 이들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갈보리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척 스미스(켈시 그래머) 목사는 히피들에 대한 혐오 대신 그들의 영혼에 관심을 기울이고 교회로 인도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히피 출신의 열정적인 전도자인 로니 프리스비(조나단 로미)를 만나 자신의 집에 머무르고 식사를 제공하는 등의 간단한 친절을 베푼 일이 계기가 되어 한 명 두 명 히피들이 모여들더니 어느새 그들은 갈보리 교회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맨발로 다니고 목욕은 언제 했는지 까마득하고 교육과 결혼에 대한 전통적 가치관을 배제한 채 마약을 하고 반전운동에 나선 이들을 당시 교회들이 수용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히피들 가운데는 기성세대의 문화에 반기를 들었지만 교회가 가르치는 영적인 가르침에는 귀를 연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 가운데는 10대에 마약을 하며 히피들과 어울려 다니는 그렉 로리(조엘 코트니)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현재 하베스트 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며 이 영화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백미는 ‘피레이츠 코브 해변(Pirate's Cove Beach)’에서 히피들이 바닷물에 들어가 세례(침례)를 받는 장면이다. 캘리포니아 해변에서 마약에 심취했던 히피들이 거듭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그 숫자만 무려 4,500명이 넘었다고 한다. 반문화주의자이며 미국사회의 골칫거리였던 히피들이 거듭나는 이 장면을 시사주간 타임지는 ‘예수 혁명(Jesus Revolution)’이란 타이틀을 붙였다. 강대진 감독의 발견 <사랑의 원자탄>을 만든 강대진 감독은 1960년대와 7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영화사인 ‘신필름’에서 활동했던 다작의 연출자였다. 같은 ‘신필름’에 소속되어 1974년 <별들의 고향>으로 영화계에 입문한 이장호 감독조차도 강대진 감독의 영화는 보았지만 강대진 감독을 만난 기억이 없을 만큼 그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그가 한국 기독교 드라마 영화에 새로운 장을 연 <사랑의 원자탄>(1977)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사랑의 뿌리>(1978)와 <석양의 10번가>(1979) 그리고 <죽으면 살리라>(1982) 등으로 이어진 기독교 영화들을 순식간에 만든 사람임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 영화제가 아니라면 강대진 감독의 기독교 영화예술의 세계는 알려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영화제 기간 중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을 통해 복원된 <사랑의 원자탄>을 감상할 수 있고, 또한 이 영화가 영구 보존될 수 있게 된 것은 매우 잘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다른 기독교 영화들도 모두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을 서두를 필요가 있음은 두말한 나위가 없다. <사랑의 원자탄>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손양원 목사의 순교자로서의 삶을 묘사한 작품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일반 기독교 영화와는 다르게 두 가지의 특징을 담고 있음이 발견된다. 하나는 반공정신에 대한 강하고 함축된 메시지를 읽을 수 있는 점과 다른 하나는 손양원 목사의 아들 동인이를 둘러싼 두 여학생 사이의 묘한 연애 구도가 펼쳐진 점이다. 손양원 목사의 순교를 다룬 영화 속에 반공사상이 들어 있는 것은 두 아들이 공산분자에 의해 살해된 데다 손목사 또한 6.25전쟁 당시 인민군에 의해 처형된 역사적 사실, 그리고 1970년대 반공사상이 널리 퍼져있었던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손목사의 두 아들을 살해한 안재선을 양자로 삼았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용서와 사랑의 가치가 살아있음을 분명하지만 기독교 신앙과 반공사상이 쉽게 결합되어 1970년대 첫 기독교 영화로 탄생한 점은 당시의 시대상과도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순교영화에 등장한 멜로 드라마적 요소이다. 영화에서 손목사의 큰 아들 동인은 고등학교 시절 리더십이 뛰어났고 영실과 경혜라는 두 여학생이 그를 좋아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손목사 가정에서는 영실이를 아꼈고 이를 질투한 경혜의 보복행위는 손목사의 순교정신을 기대한 관객들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은 <박서방>(1960)과 <마부>(1961)등의 한국영화사의 명작을 연출하며 축적된 연출능력과 당시 인기 있었던 멜로 드라마의 요소를 삽입함으로써 대중성을 확보하려는 시도 가운데 벌어진 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강대진 감독은 1987년 54세의 나이에 영면한 까닭에 더 이상 그의 기독교 작품에 담긴 정확한 그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특히 증산도 교주 강일순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화평의 길>(1984)을 연출한 사실은 왜 그랬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든다. 기독교 신앙이 없다면 여러 편의 기독교 영화들을 만들 수 없다고 보는 데 갑자기 웬 증산도 영화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이에 대해 이장호 감독은 당시 영화감독들의 사정이 대부분 어려웠던 점을 감안하면 생활고에 따른 선택이 아니겠냐는 추측을 내리고 있기는 하다. 기독교 역사를 다룬 영화들의 의미 두 영화는 모두 과거를 다루고 있지만 현재의 신앙에 각성을 일으키는 작용을 한다. <지저스 레볼루션>과 <사랑의 원자탄>이 현시대의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던지는 교훈은 분명해 보인다. 첫째, 사회적 평판이나 주관적 시각에서 사람을 판단하지 말 것을 영화는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다. 맨발로 다니고 마약이나 하는 히피들을 쓸모없는 사람들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사람들로 바라보는 시선은 손양원 목사가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았던 애양원 사역을 바라보는 시각과 일치한다. 세상에서 버려지고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이 신앙에 바탕을 둔 사랑의 손길에 의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지를 깨닫도록 영화는 우리를 돕고 있다. 둘째, 기독교인 혹은 교회에는 관심이 없지만 영적인 존재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영혼 구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음을 영화는 깨닫게 한다. 히피들은 세속적이며 물질만능주의 문화에 반기를 든 반문화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새로운 영적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있다. 1960년대 기독교를 떠난 히피들이 동양에서 건너온 뉴에이지 전도사들의 유혹에 넘어간 것도 이 때문이다.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양자로 삼은 손양원 목사의 모습 또한 천국을 사모하는 영적인 이해 없이는 불가능해 보인다. 셋째, 현대의 교회는 영적 구원을 갈구하는 사람들 곁으로 먼저 다가서야 함을 영화는 보여준다. 척 스미스 목사는 벽돌로 지어진 예배당을 넘어서 해변으로 나아가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렸다. 히피들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손양원 목사는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애양원으로 갔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 거기에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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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2
  • 사건 해결을 위해 적극 나서는 이상한 언론인
    ‘나는 동료 고신 목사에게 형사 고소를 당했습니다’라는 본보 홈페이지 팝업창 광고가 나간 뒤 이 광고를 게재한 하성철 목사가 모 언론사 편집인 A씨의 ‘압력성’ 전화와 문자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다수의 교단 관계자들은 “해당 고소인이나 교단 관계자가 아닌 특정 언론사 편집인이 왜 광고를 내리라는 압력을 행사하는지 이해가 안된다”는 반응. A 편집인은 “000 목사건은 어째든 서로 오해에다 골이 깊은 듯하니 내가 총회 끝나고 한번 화해의 자리를 마련해볼까 하는데. 한국기독신문 00광고는 이쯤해서 내리는게 좋을 듯하오. 통화하면서도 권면했지만 또 무고나 명예훼손으로 서로 시비거리가 되는 일은 만들지 않는게 좋을듯”이라고 문자를 보냈다. 하성철 목사는 “A편집인의 전화나 문자는 ‘광고를 내리라’는 압력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특히 문자 말미에는 학교법인 전 이사장에게 대한 경고의 문구도 포함하고 있다. “00 목사는 이사장 물러나면서 자가용 바꾼게 뒷말이 많던데 몸조심하라고 귀띔해 주시구료” 이 문자를 본 모 교단 관계자는 “사건 관련자도 아닌 A씨가 문제해결에 적극 나서는 것도 이해가 안되지만, 이 문자를 보고 A씨 언론사에서 보도(고소인이 출마하는 부총회장 선거 관련 기사)된 기사를 얼마나 신뢰할지 의문”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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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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