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택정 장로]다수가 정의인가?

입력 : 2025.10.24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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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한국 사회는 ‘크기’와 ‘숫자’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다. 정치에서는 의석의 수가 곧 힘의 근거가 되고, 교회에서는 교인의 수가 힘의 잣대가 되고 있다. 그러나 숫자가 곧 옳음의 증거는 아니다. 최근 국회에서도 절대 다수의 힘으로 법안을 밀어붙이거나, 다른 의견을 불편한 존재로 치부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겉으로는 ‘국민의 뜻’이라 말하지만, 그 안에 진정한 공론과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다수결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수의 독주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현상은 교회 안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대형화되고 조직화된 교회의 흐름 속에서 “많이 모이는 것”이 곧 “하나님의 축복”으로 오해되는 경향이 있다. 교회의 사업이나 목회적 결정이 성경적 원칙에 부합하는가를 검토하기보다는, “다들 그렇게 하니 우리도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앞선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은 다수의 관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 있다. 다수가 찬성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으나, 언제나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성경은 그 반대의 사례를 더 많이 기록하고 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다수의 불평에 휩쓸려 모세를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민수기 14장). 바알 선지자 450명과 맞섰던 엘리야는 외로웠으나 진리의 편에 섰기에 하늘의 불을 경험했다(열왕기상 18장). 미가야 선지자는 왕과 400명의 예언자들 앞에서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신 것, 곧 그것을 말하리라”(열왕기상 22:14)고 선언했다. 이처럼 성경의 역사는 다수의 여론이 언제나 옳지 않음을 보여준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이러한 성경의 경고를 깊이 새겨야 한다. 교단은 종종 정치화되고, 언론은 침묵하며, 성도들은 혼란 속에 방황한다. 교회의 성장이나 재정의 풍요가 곧 신앙의 성공으로 오해되고, 진리를 지키려는 소수의 외침은 ‘비판’으로 치부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복음 7:13) 하셨고, “많은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행하는 자”(요한

복음 18:37)를 귀히 여기셨다. 교회의 본질은 규모가 아니라 그 안에서 진리가 얼마나 살아 있는가에 달려 있다.


오늘의 교회 위기는 외형의 축소가 아니라 비판과 검증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성숙한 공동체 일수록 다양한 의견을 경청하고, 성경으로 검증하며, 말씀 앞에서 자신을 비추는 법이다. 바울사도는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데살로니가전서 5:21)고 교훈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의 면역력을 지키는 길이다.


교회와 사회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검증 없는 순종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성찰이다. 다수의 편에 서는 것이 편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곧 진리의 길은 아니다. 때로는 소수의 자리에서 외롭게 서야 한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마태복음 5:13-14) 하셨다. 빛은 어둠 속에서 드러나며, 소금은 적을수록 그 맛이 깊다. 교회가 다시금 빛과 소금의 사명

을 회복할 때, 사회도 방향을 잃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수의 함성이 아니라 양심의 고백, 힘의 논리보다 진리의 기준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많은 자가 아니라 충성된 자”(디모데후서 2:2)이다. 다수의 찬성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한 사람의 헌신이 교회를 살린다.


다수가 정의가 아니다. 정의는 언제나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진리는 말씀 안에 있다. 한국교회가 다시 이 단순한 진리를 붙잡는 날, 우리는 외형의 크기보다 내면의 깊이로, 세상의 인정이 아닌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공동체로 회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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