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남송우 교수.jpg▲ 남송우 교수(부경대학교)
 양의 해가 시작된 지 벌써 몇 주가 지났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을 다시금 몸으로 느낀다. 양의 해를 맞으며 모두가 양처럼 살기를 기원하며 새해를 출발했다. 양처럼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 우선은 모두가 양처럼 순하게 산다는 것을 떠올린다. 그리고 양의 이미지가 지닌 평화로움과 속죄양이 지닌 희생적인 삶을 떠울리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현실은 우리 모두가 양처럼만 살도록 놓아두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양처럼 살아가는 자들이 바보취급당하며, 순한 양이 결국은 참지 못하고 반항자로 변신하도록 만드는 부조리한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이 지닌 긍정적인 이미지를 닮아가려는 노력을 포기할 수는 없다. 양은 선한 목자를 만나 양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새해 우리가 모색해야 할 삶의 자세를 양과 관련된 몇 가지 고사성어를 중심으로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양과 관련되어 만들어진 고사성어 속에는 우리가 양의 해를 살아가면서 음미해야 할 삶의 지혜들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생각해야 할 사자성어가 망양보뢰(亡羊補牢)이다. 새해를 제대로 엮어나기기 위해서는 지난 해의 시행착오를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새로운 성숙의 단계로 나아간다. 똑같은 시행착오를 매번 반복한다면 그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실패의 경험이 실패를 초극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지난 해에 잃었던 양을 생각하면서, 이제는 양을 잃지 않기 위한 채비를 철저히 해가야 한다. 다시는 양을 잃지 않기 위해 양의 우리를 제대로 마련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그 동안 양을 잃고서야 양의 우리를 고치는 일들을 얼마나 경험했는가? 많은 재난과 사고들이 끊이지 않는 근본적 이유를 깊이 성찰할 때이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양을 잃고서 양우리를 고치는 잘못을 다시는 범하지 않으리라는 각오가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각각 소유하는 양을 잃지 않고 제대로 간수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구절양장(九折羊腸)처럼 복잡하여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의 특징인 다원성과 전문성은 갈수록 삶에 복잡성을 더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의 복잡성은 이 세상을 더욱 다기망양(多岐亡羊)하게 만들어, 그 해결책을 찾기가 쉽지 않다. 너무 길이 많기에 제대로 된 길을 찾기가 더욱 힘든 것이 오늘의 세태이다. 그러나 문제의 근원을 찾아, 이를 극복하기 위한 길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늘 공부하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문제의 근본을 해결하지 않는 처방은 늘 임시방편으로 끝나 언제나 또다시 문제가 생길 소지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사에서 문제의 근원을 완전히 한꺼번에 해결한다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이를 포기할 수는 없다. 부단히 완전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현실을 살아가면서 이를 실현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다. 우리가 살고 있는 포스트모던한 사회는 겉은 화려하지만 내실은 빈약한 것들이 세상을 주도하는 양질호피(羊質虎皮)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겉과 속이 다른 세상에서 진실을 찾아 실현하기란 참으로 힘들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양질호피의 세파에 휩쓸려 살아가는 데 자신도 모르게 익숙해져있다. 세상풍조를 거슬리기보다는 풍조에 따라 사는 것이 세상사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태가 일상화되어버리면, 세상사의 가치는 쉽게 양두구육(羊頭狗肉)이 판을 치게 된다.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하는 근원적 문제 중의 하나가 신뢰구축이라면, 양머리를 걸어두고 개고기라고 팔고 있는 양두구육(羊頭狗肉)의 현실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 사욕에 눈이 멀어 공의가 사라져 도덕과 윤리관념이 밑바닥을 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양들이 양으로서의 삶을 제대로 산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힘들다. 이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양들이 목자를 제대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경우가 많다. 인류역사를 통해서 포악한 관리가 백성을 착취했던 여랑목양(如狼牧羊)의 시절이 얼마나 많았던가? 민주화 과정을 통해 이는 많이 완화되었지만, 아직도 십양구목(十羊九牧)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에게는 오직 선한 한 목자만 있을 뿐이다. 우리 사회가 선한 한 목자를 따르는 순한 양들의 공동체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속죄양이 더 필요한 것일까? 한국사회의 변화는 얼마나 많은 속죄양이 나타나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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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산]양의 해에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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