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2(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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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서점가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책의 주인공이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입니다. 화제의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유노북스, 2023)는 교양서적으로서는 최초로(그것도 철학책으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망라하고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질주하고 있습니다. 전혀 팔릴 것 같지 않아 출판사에서 들어온 제의조차 처음에는 거절했다는 저자(강용수 고려대 교수,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 박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본인이 활동할 당시에도 대중적인 인기가 없었음은 물론 학계에서는 거의 따돌림을 당하다시피했던 보통은 염세주의자로 잘 알려진 이 철학자가 이토록 지금 이 시대의 한국 사회에서 각광을 받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사실 쇼펜하우어의 가장 위대한 학문적 업적은 헤겔의 낭만주의적 이성주의 철학에 반기를 들고 발표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1819)입니다(발간 후 100권밖에 팔리지 않자 실망함). 하지만 21세기 한국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들로 유행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는 두 가지 적수가 고통과 무료함인데, 우리의 인생이란 이 두 가지 사이를 오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마흔에..”, 36).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욕망)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능력)을 분별하는 자기 인식이 행복의 전제 조건이다”(71). “미래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현재만이 진실하고 현실적이고 확실하다”(201).

 

쇼펜하우어 하면 동시대를 살았고 성향 자체도 일견 유사해 보이는 또 한 사람의 철학자가 생각납니다. 쇼펜하우어보다 25년 늦게 태어나서 5년 먼저 사망한 덴마크의 사상가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입니다. 두 사람은 당대 주류 중의 주류였던 헤겔에 대한 반감과 근대 과학의 오만함에 대한 비판 같은 측면에서, 그리고 ‘고통’(쇼펜하우어)과 “불안”(키르케고르) 같은 실존적인 개념을 자기 철학의 핵심 키워드로 삼았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작 키르케고르는 죽기 얼마 전에야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었다니 의외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두 사람의 영향력이 사후에 오히려 더 크게 발휘되었다는 점도 비슷한데, 쇼펜하우어는 니체와 러셀과 비트겐쉬타인 같은 철학자뿐만 아니라 프로이트 및 융에게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고 나아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작가들이나 바그너 같은 음악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야스퍼스와 하이데거로 이어지는 실존주의와 현상학의 출발점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현저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칼 바르트와 위르겐 몰트만 그리고 폴 틸리히에도 크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가 득세하는 반면 키르케고르는 왜 여전히 인기가 별로 없을까요? 아마도 인간은 누구든지 『절망에 이르는 병』(1849)을 면할 길이 없는데,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이라고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1843)과 『공포와 전율(두려움과 떨림)』(1843)에서부터 모색해 오던, 철학적 이성의 길이 아니라 종교적 신앙의 길에서 키르케고르는 인생과 철학에 대한 답을 찾았기 때문 아닐까요?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시대적 흐름 속에 갇혔습니다. 20세기 말에 선각자로 자처하던 인물들이 이른바 “제3의 길”(Anthony Giddens)을 제창했었는데, 이제는 그나마 ‘제4의 길’이나 ‘제5의 길’이라도 제시하려는 시도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강원대의 이현훈 교수 같은 분은 2년 전『예정된 미래: 네 가지 뉴노멀과 제4의 길』(파지트)이라는 책을 통해 이제 인류는 “디지털사회”, “노인사회”, “양극화사회”, “홀로세(holocene)”를 극복할 수 있는 ‘제4의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게다가 점차 일상이 되어가는 전쟁과 기후변화와 환경재앙과 국내적 정쟁 등으로 인해 현대인들은 답답함과 우울함에서 오는 압박을 견뎌나가야 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속이라도 시원하게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거나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까?”라고 일갈하는 ‘꼰대 철학자’ 쇼펜하우어에게 대중들은 “자기계발서의 거짓 위로에 지쳤는데 철학책에 위로 받았다” 혹은 “거침없는 팩폭에 감동했다”는 반응을 보이며 열광하는 겁니다. 하지만 실존적인 위기에 직면한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선은 바로 인간의 실존 가운데로 직접 뛰어드신 하나님의 실존인 그리스도이며, 그를 믿는 신앙만이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키르케고르의 사상이 사실은 핵심을 더 찌르지 않았습니까? 어느 때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많이 묵상할 이 계절에, 대중들에게는 쇼펜하우어보다는 차라리 키르케고르가 이제는 더 가까이 다가서길 바라는 마음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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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쇼펜하우어와 키르케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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