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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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을 보면, 생명을 살리려고 하시는 우리 주님과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 나옵니다. 안식일날 회당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 주시하고는 고발할 조건을 찾으려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완악함을 다 아시면서도, 손 마른 사람을 한 가운데 세우고는 “네 손을 내밀어라” 하시면서, 그의 손을 고쳐주십니다. 안식일에도 선을 행하는 것이,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죽일까 의논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 땅에는 이웃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 하나 살자고 이웃을 죽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5절을 보시면,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시고 노하셨다고 합니다. '완악하다'란 단어의 뜻은 ‘자기밖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자기만의 생각으로 굳어진 마음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경건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나는 이런, 이런 계명들을 지켰다고 하면서” 자기 행위와 자기 의를 내세웁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깔보고, 멸시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열심을 다한 사람인데 왜 이렇게 살기가 등등합니까? 복음이 없고, 율법이 강조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옳다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적으로 몰아 죽이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을 다 죄인으로 만들어버리고, 자기 혼자 의인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형제의 잘못을 보거든 정죄하기보다 먼저 우십시오. 새벽에 그 영혼 생각하면서, 눈물을 쏟으십시오.

그것이 십자가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죄인을 지적하고 비판하고, 그래서 교회가 죄인의 무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쌍히 여기고 살려내는 클리닉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자,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주시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모의할 것을 아시면서도, 불쌍한 한 영혼을 위해, 한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 옳은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불쌍한 사람을 보셨습니다. 말할 수 없이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심정과 자비를 가지고 손 마른 사람을 보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예수님처럼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새 포도주를 담았다면, 우리의 생활양식, 우리의 의식구조도 바뀌어야 합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가?’ 여기서부터 우리의 복음적 삶의 모습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상대를 살리기 위해 나를 죽이는 것,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입니다. 주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자들을 살리러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회복과 치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이 일은 생명을 살리는 일인가?’ 질문해야 합니다. 교회는 말씀으로 세상을 정죄하고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섬김을 통해 세상을 구하고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리는 일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을 죽이는 일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마십시오.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살리는 일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이는 것이 아니라

회복과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일을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와 사랑으로 이웃을 살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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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생명을 구하는 것(막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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