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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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문창교회(혹은 제일문창교회)는 마산지역 최초의 기독교회이자 호주장로교 선교부의 마산지역 거점교회였다. 한국장로교회의 첫 목사였던 한석진을 비롯하여 후에 부통령이 되는 함태영, 위대한 순교자 주기철, 고신의 지도자 한상동과 송상석, 이금도 목사 등이 시무했던 교회였다. 이 교회는 마산에서 사역했던 미국북장로교회의 시릴 로스(노세영)와 호주장로교회의 앤드류 아담스(손안로) 두 선교사에 의해 1901년과 1902년 시작된 교회가 1903년 3월 19일 통합되어 구마산(舊馬山)교회, 마산포교회, 마산교회, 그리고 상남동교회 등으로 불리다가 1919년 새로운 석조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지역 이름을 따서 문창(文昌)교회로 불리게 된다. 물론 크고 작은 시련이 없지 않았으나 형식상 50년간 평화를 누리던 이 교회는 백리언 목사 부임 이후 내분이 일어나 1951년 결국 문창교회와 제일문창교회로 분리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문창교회 설립초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가 이승규(李承奎, 1860-1922)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병직과 김주은 아들로 1860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그런데 이들 가족이 천주교를 신봉한다하여 종중(宗中)에서 축출 당하게 되자 밤중에 서울을 떠나 경상도 지방으로 향해 순례길을 떠나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 동래에 정착했다. 이승규가 6살 때였다. 이곳에서 이승규는 김영유(金永柔)와 혼인하였고, 한약을 공부하여 한의사가 되었다. 근면했던 그는 명의라는 명성을 얻었고 상당한 재산도 모았다. 그가 불혹의 40살이 되었을 때, “이전까지는 나 자신을 위해 살며 재산을 모았지만 이제는 남을 위해 살며 남을 위해 재물을 써야겠다.”고 다짐하고 자신의 뜻을 펼칠 곳을 찾다가 부모를 모시고 경상남도 마산으로 이거하여 상남동 지역에 정착하게 된다. 바로 이곳에서 이승규는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그의 어머니 김주은(金主恩)은 호주 선교사 앤드류 아담스(손안로)를 통해 전도를 받고 신자가 되었고, 김주은의 인도로 아들 승규 또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 때부터 이승규는 호주 선교사 손안로를 도와 전도에 협력하여 마산지방 첫 교회인 마산포교회를 성호리에 설립하게 된다. 어떤 점에서 그를 문창교회 설립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선교사와 더불어 마산포교회당에서 작은 독서숙(讀書塾)을 설립했는데 이것이 마산지방 첫 근대학교인 창신학교로 발전했다. 이승규는 교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고 자신의 재물을 교회를 위해 기꺼이 헌납하였다. 그의 아들이 노산 이은상(李殷相, 1903-1982)인데, 이은상은 젊은 날을 회고하면서, “구마산역에서 북마산역으로 뚫린 큰 길이 전부 우리집 마당이었다.”라고 말했을 만큼 이승규는 부유한 재력가였다. 그는 용하다는 한의사였고 지역 사회에서 존경을 받았고, 교회를 위해서도 기꺼이 헌신했다. 마산포교회를 설립하고 예배처소로 한옥을 구입할 때도 이승규가 감당했다.

그런데 마산포교회의 첫 장로로 피임된 이는 의외의 인물 최경호였다. 그는 1912년 3월 6일 대구 남문내교회에서 모인 제2회 경상도노회에서 문답을 받고 3월 17일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그래서 마산포교회가 당회를 구성하게 된다. 손안로 목사가 당회장이 되었고 당회원은 손안로의 동료 선교사였던 왓슨(왕대선) 목사, 그리고 최경호 장로였다. 그로부터 약 2년 후인 1914년 1월 18일 이승규는 두 번째 장로가 된다. 제일문창교회 120년사를 쓰면서 나에게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어떻게 교회의 설립자라고 할 수 있고 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이었던 이승규가 첫 장로가 되지 못했을까? 당회록을 보면 처음으로 장로로 피택된 이는 생각지도 못한 ‘이경중’이라는 인물이었다. 교회기록을 보면 여러 인물들이 거명되기 마련인데 이경중은 처음 언급되는 인물이고 그 이후 교회기록에 다시 언급되지 않았다. 당회록 등 교회 기록에 단한 번 등장하는 이경중, 그가 어떻게 피택 장로가 되었을까? 그런데 그는 왜 장립되지 못했을까? 그는 왜 교회 기록에서 다시 언급되지 못했을까? 그렇다면 타지로 옮겨 간 것인가?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으나 분명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든 중 송상석 목사의 ‘법정소송과 종교재판’이라는 책을 읽던 중 ‘이경중’은 ‘이승규’의 별명이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다. 대수롭지 않는 언급이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단서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문창교회 당회록에서 이승규라는 공식 이름을 기재하지 않고 일부의 사람만 알고 있던 이경중이라는 별명으로 기재했을까? 이승규는 아들을 불신혼인하게 하여 6개 월 간 책벌을 받았고 그 일로 장로 장립을 받지 못한 것이다. 영예롭지 못한 일이기에 당회록은 의도적으로 ‘이승규’라고 기록하지 않고 ‘이경중’이라는 별명을 기록한 것이다. 6개월간의 책벌기간이 경과한 후 손안로 선교사는 그의 해벌을 노회에 보고하였으나 노회원들은 “더 기다려주기를 가결하여” 장로 장립은 다시 미루어졌고, 최경호 보다 2년 후 장립을 받게 된 것이다.

당회 기록을 보면서 세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첫째, 당시 교회는 불신 결혼은 성도들이 피해야 할 중한 죄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교회의 법은 지키면서도 교회는 치리 받은 사람도 보호해 주려는 애정어린 배려를 볼 수 있다. 셋째, 이승규는 치리에 복종하고 인내하였고 비록 후배 보다 늦게 임직을 받았으나 변함없는 마음으로 주님을 섬겼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그는 존경과 신뢰를 받았고, 그의 믿음의 여정은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아름다운 유산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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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마산의 기독교 지도자 이승규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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