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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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Australia)의 ‘150년 전쟁’ 혹은 ‘회색 전쟁’이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토끼” 때문에 벌어진 전쟁 같은 실화입니다. 1859년 거대한 미지의 대륙에 정착한 토마스 오스틴이라는 사람이 고향인 영국이 그리워 사냥용 토끼 24마리를 들여왔는데 이것이 발단이었습니다. 가공할만한 번식력을 자랑하는 토끼들은 순식간에 불어나서 농작물을 비롯한 생태계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사람들은 토끼들을 없애기로 결심했고, 1870년 무렵엔 200만 마리 이상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이동이라도 막아보고자 1900년대에는 3,000km 넘는 울타리를 쳤건만 이 또한 곧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1920년대가 되자 토끼의 숫자는 100억 마리에 육박합니다. 이후 정부는 여우를 비롯한 천적도 동원해 보았고, 독극물을 사용하기도 했으며, 생물학자 파스퇴르까지 나서서 바이러스를 활용한 퇴치법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현재도 2~3억 마리 이상의 토끼떼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합니다.(『인간의 흑역사』(2019), 『재난 인류』(2022))

토끼의 번식력과 생존력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해주는 이야기가 있을까요? 바로 그 “토끼”의 해 곧 ‘계묘(癸卯)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토끼는 동양에서 열두 종(種)의 상징 가운데 하나로 불릴 정도로 친숙할 뿐 아니라, 속담이나 격언에도 토끼가 등장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습니다. “두 마리 토끼 잡으려다 다 놓친다”거나 “호랑이 없는 골에 토끼가 왕노릇한다” 그리고 “토사구팽(兎死狗烹)”이나 “토의 간”(별주부전) 같은 익숙한 표현들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반면 서양의 중세시대에 토끼는 의외로 악당이나 불한당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생긴 모양 때문에 회색토끼(hare)가 주로 그러했는데, 반대로 다산의 특성이나 온순한 이미지 덕분에 에덴동산이나 성모 같은 다수의 성화(聖畵)에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잠을 잘 때도 눈을 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바람에 부활을 상징하는 동물로도 쓰였습니다. 베네치아의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가 1479년 완성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치에 있는 지붕 위에 두 마리 토끼가 보입니다.

그러나 뭐니 해도 토끼와 기독교 관계의 백미는 성경 속 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토끼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레 11:6, 신 14:7 참고)가 그러하고 여기서도 “새김질”이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사실 토끼는 소나 양처럼 위가 서너 개라 소화를 위해서 되새김질을 하는 반추동물(ruminant)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토끼가 “새김질”을 한다고 했습니다. 생물학적 지식이 부족하던 시절이라 토끼가 쉴 새 없이 입을 오물거리는 모양을 보고 여타 반추동물처럼 되새김질을 하는 것으로 표현했을 뿐이라는 견해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성경은 고대인이 쓴 비과학적 기록이며 오류투성이의 문서일 뿐입니다. 그런데 1972년 독일의 동물학자 그리지멕(Grizimek) 박사가 편찬한 동물백과사전에는 토끼를 ‘유사되새김질(pseudo-rumination)’을 하는 반추동물의 일종으로 분류해 두었습니다. 1880년대부터 이미 토끼가 비타민이 풍부한 특수한 물질(씨코트로프, caecotroph)을 밤이나 새벽에 내놓고 이를 다시 새김질해서 소화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두고 현대과학이 19세기에 와서야 밝힌 사실을 3,500년 전에 기록한 ‘성경무오성’의 승리라고 찬사를 바치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무튼 토끼가 “새김질”을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새김질”은 ‘묵상’과 관련이 깊습니다. 한글성경이 침묵할 묵(黙)과 생각할 상(想)을 써서 번역한 이 말의 원어는 ‘하가’로 비둘기소리나 사람이 중얼거리고 속삭이는 모습을 가리키는 의성어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너무 많이 알려져 버린 일부 구절을 제외하고(시 1:2; 수 1:8 등) 해당 단어를 대부분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로 바꿨습니다(시 49:3, 119:97 등). 작은 소리로 읊조리려면 당연히 우물거리는 입 모양이 되겠지요(삼상 1:13). 일종의 “새김질”에 해당합니다. 물론 인간에게는 생물학적 의미의 새김질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의 새김질은 필요합니다. 질긴 풀이나 고기를 되새김질할 하등의 이유가 없지만, 꿀 같은 하나님 말씀을 되새김질해야 할 절대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 말씀이야말로 우리의 길이고 빛이며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토끼의 해라고들 합니다. 그렇다면 잘 되었습니다. 올해야말로 제대로 “새김질”을 하는 원년이 되도록 목표를 정합시다. 주야로 끊임없이 하나님 말씀을 우물거리면서 읊조리고 소화시킵시다. 그래서 영적으로 더 건강과 성숙을 얻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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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토끼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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