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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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6.25 전쟁당시의 부산지방 상황과 기독교계의 활동, 기독교계의 전도 및 구제활동, 기독교 병원의 설립과 의료활동 등 전쟁기 상황에 대해 소개하였다. 이제 2년여에 걸친 연재를 마무리하면서 보다 근원적인 문제, 곧 전쟁에 대한 기독교의 인식이 어떠했던 것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만행은 전쟁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살인이 가장 극악한 죄라고 한다면, 수많은 사람들, 전쟁에 아무 책임이 없는 민간인들이 전쟁수행자들(군인) 보다 더 많이 죽거나 다친다는 것은 전쟁이 한 두 사람을 죽이는 살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권을 유린하고 정의를 파괴한다. 우리는 흔히 행위자의 동기에 따라 그 행동의 옳고 그름을 평가한다. 그래서 고의적 살인만 죄악이지 과실치사나 전쟁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살상은 큰 죄악이라고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행위주체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는 잘못이다. 훨씬 더 중한 것은 피해자와 피해자가 감당해야 하는 고통인데, 전쟁에서 우연하게 죽었다고 해서 고의적 살인행위로 인한 죽음보다 덜 억울하거나 덜 고통스런 것은 아니다.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힘의 정도가 과거의 어느 때보다 커졌고, 그 방법 또한 다양해진 오늘날에는 사람의 행위의 옳고 그름을 피해자 입장에서 판단하는 것이 평등의 원칙에 부합되고 그것이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다. 현대의 윤리는 행위주체 중심적이 아니라 피해자 중심적이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전쟁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만행이었다. 1차 대전 당시 8백만 명의 군인을 포함하여 1천5백만 명이 희생되었는데, 당시에는 이를 ‘최악의 소모전’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제2차 대전에서는 7천만 명이 희생되었는데 이중 민간인이 4천만 명이었다. 나치독일이 일으킨 독소전 당시 소련의 20대 남성 70%(1,400만 명)가 전사했다. 스탈린의 학살이 2천만 명, 마오쩌뚱의 학살 4천만 명에 달했다. 6.25전쟁은 3년 1개월 2일 간의 전쟁이었는데, 당시 재산피해는 그만두고 인적 피해를 보면, 한국 및 UN군 피해자가 776,360(사망 전사 부상 실종)명, 북한 및 중공군 피해자 1,773,600(북한군: 801,000명, 중공군: 972,600명)명이었고, 민간인 피해(사망 학살 부상 실종)는 2,540,968명에 달했다. 그 외에도 피난민 320만 명, 전쟁미망인 30만 명, 고아 10만 명, 이산가족 1,000만여 명이 발생했다. 사망자만 말한다면 군인 40만, 민간인 약 200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 지난 5,600년 동안 1만 4천5백 번의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고 약 35억 명이 전쟁의 와중에서 생명을 잃었다고 한다.

무기로 인명을 살상하는 것 외에도 전쟁 중에는 평상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강간, 납치, 협박, 인권모독, 인권유린이 자행 된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고 기독교인들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한다. 독일의 위험사회학자 율리히 베커(Ulich Backer)는 현대의 재난에는 3가지 특징이 있다고 했는데, 첫째는 재난의 원인 규명이 어렵고, 둘째, 재난의 범위가 대규모적이며, 셋째, 재난의 고통이 무한정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런 재난의 아픔을 안고 70년을 살아왔다.

그래서 기독교 일각에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전쟁은 거부하거나 피해야 하며 무저항 비폭력 반전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는데, 이런 입장을 기독교평화주의(Christian Pacifism)라고 부른다. 그런가하면, 전쟁을 불가피하게 하는 방어적 전쟁이나 정당한 동기와 원인을 지닌 경우에는 전쟁을 거부할 수 없다는 정당전쟁론(Just war), 혹은 전쟁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성전론(The Crusade)도 있고 미국의 윤리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현실적 평화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어느 것이든 완전한 주장일 수 없지만 그래도 평화주의가 성경의 가르침에 근접한, 그래서 지상의 평화를 위한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를 괴롭히는 질문은, 평화주의는 타인에게 가해지는 피해를 해소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전쟁의 피해가 나 자신에게만 국한된다면 기꺼이 평화주의를 선택할 수 있지만, 나의 평화주의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경감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 온다면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죄한 이웃을 위해서 싸워야 할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희생당할 아무런 이유나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평화주의 확신 때문에 더 큰 희생을 당할 수 있는데, 나에게는 그런 희생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는 점이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가 평화주의 원칙을 난처하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폭력, 비전의 윤리는 고상한 가치라는 점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동안 인내해 준 독자들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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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 어떻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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