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02-07(화)
 


송길원 목사.JPG

조르주와 안느, 음악가 출신의 80대 부부다. 평온한 노후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아내 안느에게 갑작스런 뇌경색이 덮친다. 다정한 노부부의 일상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태는 점점 악화된다. 수술후유증으로 오른쪽 편마비가 찾아든다. 스스로 배변을 해결할 수 없다. 몸을 씻을 수도 없다. 음식은커녕 물조차 삼키기가 어렵다. 서서히 말라간다. 말조차 어렵다. 딸과 사위는 입원을 시키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아내의 뜻은 아니다. 남편 조르주는 병원에 보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게 해달라는 아내와 실랑이를 벌이다 자신도 모르게 아내의 뺨을 후려갈긴다. 상황은 처절하다.

결국 아내를 베개로 눌러 질식사시킨다. 조르주는 죽은 아내를 꽃으로 장식하고, 방문을 테이프로 봉인한다. 장문의 편지를 남겨놓고 사라진다. 딸이 아빠⸱엄마를 찾았을 때 잠긴 문 뒤로 엄마의 시신은 꽃에 둘러싸인 채 썩고 있었다.

2012년 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아무르>의 줄거리다. 영화는 끊임없이 묻는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당신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가?” 나라면 무엇이라 답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우리네 삶은 ‘맞이하고 싶은 죽음’과는 거리가 먼 죽음을 맞이한다. 연간 사망자 30만 명 가운데 80% 이상이 요양시설과 종합병원 응급실ㆍ중환자실을 오가다 그 쳇바퀴 어딘가에서 죽음을 맞는다. 4명 중 3명꼴이다. 정든 집에서 가족들의 손을 잡고 떠나는 죽음은 전설이 되었다. 66~83세까지 17년, 삶의 5분의 1을 각종 질병에 시달린다. 사망 직전 1년의 의료비가 평생 쓴 의료비를 웃돌기도 한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렁주렁 기계장치를 달게 된다. 사지가 포승줄에 결박당하듯 묶이기도 한다. 콧줄로 영양 공급을 받으며 고통 속에 서서히 죽어간다. 우리나라 ‘최빈도 죽음’의 풍경이다.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사전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은 130만 명이다. 3년 새 6배로 늘었다. 하지만 전 국민의 3%에 불과하다. 통증을 줄여주는 완화의료센터를 이용하기도 어렵다. 매년 8만 명이 암으로 숨진다. 호스피스 병상은 1,500개도 되지 않는다. 암 환자의 호스피스 이용률은 23%에 그쳤다. 의료강국의 이면은 의외로 어둡다. 반지하 방만이 아니다.

잠시 병원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병원에는 응급실에서 입원실, 수술실, 회복실, 재활치료실... 숱한 방들로 가득 차 있다. 장례식장으로 내려가 보자. 안내실, 추모실, 접객실, 휴게실, 안치실.... 그런데 정작 있어야 방이 보이지를 않는다. ‘임종실’, 의료진은 죽음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는 것을 안다. 더 이상 의료행위가 도움이 되지 않을 때, 죽음을 눈앞에 둔 이들이 가족과 함께 임종을 그들을 임종실에서 가족들과 함께 머물며 죽음을 맞이하게 도울 수는 없을까? 현재 우리나라는 빅 파이브에 해당하는 대학병원들조차 한둘 정도의 임종실을 두고 있을 뿐이다. 종합병원은 아예 없다. 우선 돈이 안 된다. 코로나 상황 속에서 감염과 방역 규칙에 따른 운영지침도 없다. 제도와 법령준비도 필요하다.

결국 ‘편안한 죽음’을 원하지만 기대와 달리 대부분이 ‘고독사’로 세상을 뜬다. 곁에 가족은 없다. 의료진이 임종을 지켜보는 경우는 희귀하다. 신음소리를 내는 또 다른 환자 옆에서 가족의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곁에 가족이 있다 해도 소리 내 울지도 못한다. 다른 환자들에게 방해가 될까 봐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아무르의 영화 이야기가 프랑스만의 이야기일까? 최근 대한민국 국회에도 조력 존엄사법이 제출되었다. 말이 존엄사지 속을 들여다보면 조력 존엄사는 의사조력 ‘자살을 통한 안락사’이다. 이런 법안이 법안 통과를 원하는 사람들이 80%가 넘는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근거로 한다. 어쩌다 죽음마저도 여론조사를 따라야 하는 세상이 된 것일까?

임종실이 있으면 달라진다. 더 이상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 환자가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줄 수 있고 함께 부를 수도 있다. 못다 한 사랑고백을 나눌 수 있다. 멋진 엔딩파티를 준비할 수도 있다. 이때 세족식을 할 수 있다면 더 좋겠다. 고인이 남기는 말이 유훈이 되고 고인에게 건네는 사랑의 말이 위로가 되는....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장면이 떠오른다. 존 H. 밀러 대위는 라이언에게 말한다.

“라이언 꼭 살아서 돌아가. 잘 살아야 돼”

어느 날, 가족들과 함께 밀러 대위의 무덤을 찾은 라이언이 말한다.

“가족과 같이 왔습니다. 오고 싶어 해서요. 여기 오면 기분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다리에서 하신 말씀을 매일 생각했죠. 최대한 잘 살려고 노력했고 그런대로 잘 살아왔습니다. 최소한 대위님의 눈에 대위님의 희생이 헛되지 않아 보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말한다.

“여보, 훌륭히 살았다고 말해줘”

아내가 답한다.

“물론이죠”

다시 라이언이 말한다.

“내가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해줘”

“당신은 훌륭해요”

나는 많은 돌봄 가운데 ‘임종 돌봄’이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라 여긴다. 기독병원들이 먼저 나설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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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원 목사] 임종실, 임종돌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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