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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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의 결과로 시작된 이 군목제도의 시행은 한국기독교회에 대한 특혜였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 제도는 “한국 역사상 유래가 없는 선교의 전환점이 되었고,” 그 이후 군선교에 끼친 영향을 고려한다면 군종제도는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획기적인 사건이라는 김양선의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김양선은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었으나 잃은 것 못지않게 얻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백만의 국군장병에게 복음을 전하여 확고한 정신무장을 시킬 수 있는 종군목사 제도의 실시라고 할 것이다. 이 사업은 실로 한국교회 반세기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대하고 위대한 획기적인 사실일 것이다.”

 

1951년 2월부터 1953년 4월까지 270여 명의 한국인 목사가 군목으로 투입되었는데, 6개월 이상 참전한 군목 중 2015년 5월 말 당시 기준으로 볼 때 생존자는 30여명에 불가했다고 한다(국민일보, 2015. 6. 2)

 

6.25 참전 미군 군목들: 한국전쟁 당시 연합군에 속한 군종장교는 140명이었다고 한다. 이중 13명이 순직하고 26명이 부상당했다. 연합군에 속한 군종 장교들 가운데 저래 다수가 미군에 속한 군종목사들이었는데, 한국전쟁에 제일 먼저 투입된 미군 군목은 일본 오끼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칼 허드슨(Carl R. Hudson) 목사였다. 그는 1950년 7월 5일 이른 아침 오산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전사한 군목은 미 제24보병사단 제19보병연대 소속의 헤르만 G. 펠호엘터(Chaplain Herman G. Felhoelter) 목사였다. 그는 대전 금강전투에서 미군 방어선이 무너지자 낙오된 부상병을 안고 기도하다가 북한군 수색대에 잡혀 30여명의 병사들과 함께 현장에서 총살되었다. 37세 때였다. 그는 한국서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혀 죽은 12명의 군목 중 첫 번째 희생자였다.

제25보병 사단 제35보병연대 군목 바이런 리(Byron D. Lee) 목사는 1950년 7월 인민군 격투기 폭격으로 사망했다. 이처럼 한국 전쟁시 희생된 미군 군목은 12명에 달하는데, 제19보병연대 케네스 히슬러(Kenneth C. Hyslop), 제2보병사단 제2보병대대 웨인 버듀(Wayne H. Burdue), 32보병연대 7보병대대 로렌스 브런너트(Lawrence F. Brunnert) 목사 등 군목들은 포로가 되었고, 3연대의 에밀 카폰(Emil J. Kapaun, 1916-1951) 신부는 중공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 병사들을 돌보던 중 사망했고, 다른 군목 포로들은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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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군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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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부산 교계: 군목제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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