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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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회신학교: 지금 감리교신학대학교로 불리는 감리교회의 신학교육이 시작된 것은 1893년부터라고 한다. 한국에서의 감리교 선교는 아펜젤러의 내한으로 시작되는데 그가 1885년 8월에 설립한 ‘배재학당’은 조선에서의 최초의 선교학교였다. 1887년에는 배재학당 내에 ‘신학부’를 설치했는데, 이것이 감리교회의 신학교육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신학부가 계획대로 발전하지 못했다. 1888년에 일어난 ‘영아소동’ 때문이었다. 영아소동이란 근대화 정책에 반감을 가진 수구세력들이 퍼트린 거짓에서 비롯된 폭력 소동인데, 서양인들이 조선 아이들의 눈을 뽑아 사진기 렌즈를 만들고 아이의 간(肝)을 약으로 쓴다는 소문을 퍼뜨려 분노한 민중들이 서양인들을 폭행하는 소동을 말한다. 이런 소동이 일어나자 고종은 서양인들의 활동을 잠시 중단시켰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도 잠정 폐쇄 되고, 배재학당 내에서 이루어졌던 신학 교육도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893년 겨울에는 ‘본처(本處) 전도인 양성과정’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신학반’(Theological class)을 열었는데, 이것이 한국에서의 감리교 신학교육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1899년 2월에는 ‘신학반’이 ‘신학회’으로 개칭되었다. 이 무렵 공부했던 이들이 김기범과 김창식인데 이들은 1901년 한국 감리교 첫 목사가 된다. 1893년부터 한국선교를 시작한 남감리교가 북감리교회와 공동으로 신학교육을 시행하자고 제의하여 남북감리교 선교부는 이에 합의하여 1907년부터 신학교를 ‘감리교 협성성경학원’(Union Theological Seminary)로 개칭하였다. 1910년에는 ‘감리교회 협성신학교’로 발전했다. 이때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31번지에 부지를 확보하고 교사를 신축했다. 1931년 12월에는 전문학교령에 준하는 4년제 ‘감리교회 신학교’로 개칭된다.

 그런데 이화학당을 세운 스크랜튼 여사가 여전도사 양성을 위하여 서울 종로에서 감리교여자성경학원을 시작했는데, 이 학교가 1920년에는 최초의 여자신학교인 ‘협성여자신학교’로 발전했다. 이 학교가 1932년에는 감리교협성신학교와 통합되어 남녀공학의 신학교가 되었다. 이 감리교신학교가 일제 말엽 학교가 잠정폐쇄된 일도 있으나 해방 후 1946년 3월 다시 개교하였고, 1959년에는 ‘감리교신학대학’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다가 1993년 대학명 자율화 조치에 따라 ‘감리교신학대학교’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감리교신학대학은 130여년의 역사를 지닌 신학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말했지만 1940년 학교가 잠정 폐쇄 되었다가 해방 이후 다시 개교한 감리교신학교는 1948년에 45명, 1949년에 40명, 1950년에는 38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며 안정을 누리게 되지만, 1950년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휴교하게 된다. 학생들과 교직원들은 피난을 가거나 고향으로 돌아갔고 1951년 봄 학기 서울 교정에서 개강할 수 없었다. 결국 피난지 부산에서 신학교 개교를 논의하게 된다. 부산에서의 첫 감리교회는 1948년 동대신동 대티턴널 인근에 설립된 부산제일감리교회였는데, 이 교회를 비롯한 부산 감리교계 지도자들의 협조를 얻어 감리교신학교는 부산시 동구 수정동 551번지의 민가를 구입하였다. 이곳은 지금의 수정초등학교와 경남여자고등학교, 부산진세무소 중간 쯤 되는 곳인데 이곳에 판자로 임시교사를 짓고 1951년 5월 4일 이곳에서 전시 신학교를 개교하게 된다. 교사는 강의실이자 강당이었고 야간에는 학생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수정동 임시교사에는 우물이 있어 여기서 학생들이 취식도 할 수 있었다. 당시 학제는 예과 2년, 본과 3년 총 5년 과정이었다. 부산 임시 신학교 당시 교장은 유형기 박사였고 교수는 김용옥, 송정률, 윤성범, 장기수, 홍현설 등이었다. 이곳에서 1951년 43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들은 서울 냉천동 교정에서 수학했던 이들이었다. 1952년부터는 홍현설 박사가 교장으로 봉사했는데, 그해에는 6명, 1953년에는 6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1952년에 입학한 이들로는 김경숙, 김경섭, 안평호 등이 있었고, 1953년에 입학한 이가 이성삼이었는데 그는 후일 교회사가가 된다. 임시교사 시절인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이루어지지만 곧장 서울로 돌아가지 못했다. 1953년 11월 5일 보수감리교회에서 피난기 부산의 임시 신학교 마지막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졸업한 이들이 곽종옥, 김희태, 박봉배, 변선환, 이인석, 이희정, 조영칠 등이었다. 부산에서 3년간 임시 교육을 마감하고 1954년 4월 2일 부산을 떠나 서울 서대문의 본래 교사로 돌아갔다. 부산을 떠나기 꼭 20일 전인 1954년 3월 13일 촬영한 마지막 사진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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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부산에서의 신학교육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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