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송길원 목사.JPG

"오, 신이시여, 당신의 바다는 더 없이 크고, 제 배는 더 없이 작습니다.”(O, God. Thy sea is so Great and my Boat is so Small.)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어부의 기도’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집무실 책상 위 동판에 새겨졌었다고 한다. 기도는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3.30.~1890.7.29.)의 첫 설교에도 인용된다. 그의 나이 23살 때다. ‘나는 이 땅의 나그네이오니...’ 어린 나이에 무슨 ‘나그네’일까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다. 아니다. 나그네는 초기기독교인들의 이름이었다. 그 이름에 신앙고백이 담겼다.

아브라함이 말한다. “나는 당신네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창 23:4). 어느 날 야곱이 바로 앞에 선다. 바로가 야곱에게 나이를 묻는다. 야곱이 자신의 나이를 밝히기에 앞서 스스로를 나그네라 칭한다. 묻지도 않은 일에 대한 고백이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 삼십 년이니이다”(창 47:9).

 

나그네는 돌아갈 본향이 있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삶의 본적지는 하늘나라다. 지난 주, 한국 지성의 대들보라 불리는 이어령 교수가 ‘돌아가셨다’. 그는 생전에 죽음을 신나게 놀고 있는데 엄마가 ‘얘야, 밥 먹어라’ 하는 것과 같은 거라고 말했다.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어!’ 이 한 마디로 우리는 돌아서야 한다.

“이쪽으로, 엄마의 세계로 건너오라는 명령이지. 어릴 때 엄마는 밥이고 품이고 생명이잖아. 이제 그만 놀고 생명으로 오라는 부름이야‧‧‧‧‧‧ 그렇게 보면 죽음이 또 하나의 생명이지. 어머니 곁. 원래 있던 모태로의 귀환이니까.”(김지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

 

우리 모두 ‘귀환명령’을 따라 돌아가야 한다.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앞서 세계 권력을 손에 쥔 케네디도 알았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를. 작고 작은 보트에 비유된 겸손의 자기무장이었다. 고흐도 그랬다. 동생 테오에게 늘 빚진 삶을 살아야 했다. 하루하루가 고단했다.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자살을 시도할 만큼 생은 험난했다. 야곱만이 아니었다. 모든 인생은 고통과 함께 살아간다. 파도가 없는 바다가 진짜 바다가 아니듯 고통이 없는 인생은 진짜 인생이 아니다.

 

지난 주, 내가 담임으로 있는 청란교회 가족들은 나그네를 주제로 삶의 수칙을 만들어보았다.

하나. 낯선 것은 당연하다. 설렘으로 바라본다. 그렇다고 동경하지도 않는다.

둘. 불평하거나 투덜대지 않고 감사한다. 더 좋은 것이 있음을 알아서다.

셋. 다른 언어를 갑갑해 하지 않는다. 친절과 미소의 제 2 모국어를 쓴다.

넷. 너덜너덜 많은 짐을 거추장스러워 한다. 심플한 것의 자유를 누린다.

다섯. 조급하거나 초조해 하지 않는다. 영원히 머무르지 않은 것을 알아서다.

형제, 자매, 집사, 장로... 그 어떤 호칭보다 ‘나그네’가 정겹게 들리기 시작했다. 나그네는 초대교인들을 위로하고 다독이는 소망이고 꿈이었다. 그 삶이 파도로 일렁이는 바다를 헤쳐 나가는 조각배와 같을지라도 그들은 겁먹지 않았다. 엄마 태속의 아이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듯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나그네는 하나님의 마음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게 있음도 안다. 그러기에 그들은 약자들을 돌볼 줄 안다.

 

나그네들은 ‘험악한 세월’을 살고 세상을 떠날 때라도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고백처럼 ‘나의 집을 떠나듯이 인생을 하직하는 것이 아니라, 여인숙을 떠나듯이 인생을 하직’할 것이다.

재의 수요일(3월 2일)로 시작해 우리 모두 자기 검역의 사순절을 보내게 되었다. 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시간인가? 나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가?“나는 나그네이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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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원 목사] 자기 검역의 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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