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5-27(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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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 훗날 유의미한 역사적 출발로 평가 받음직한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무언가 대대적으로 달라지리라는 예측은 많으나 그 변화의 폭과 깊이를 가늠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서 이런 개념 혹은 가치가 득세하겠다는 일반적 추정은 가능합니다. 먼저 정치 분야에 있어서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2-2004)가 말한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Messianicity without messianism)’를 주목합니다. 위기의 시대에 사람들은 일종의 초인(超人)을 갈망합니다. 정도령 사상이나 히틀러의 나치즘을 생각해 보십시오. 더군다나 급격하게 비종교화 · 탈정치화가 진행 중인 지금, 위기에 빠진 많은 인생들이 메시아 아닌 메시아를 고대합니다. 이 나라가 나아갈 향방 자체를 바꿀 수도 있는 대선(大選)을 앞두고 있습니다만, 선거권자들이 더 이상 ‘브이아이피(VIP)’ 즉 후보자들의 비전(vision)과 정체성(identity)과 정책(policy)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바람직하다고 보기는 어려운 경향입니다. 따라서 각별히 주의하고 집중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특별한 영웅이 아니라 보편적 시민이, 신화적 인간이 아니라 신(神)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경제 분야에 있어서는 ‘신(新)경제학’이 대두할 개연성이 높습니다. 21세기 들어서 주류경제학은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 최전방 미국의 경제를 되살리는 일에 실패했습니다(2008년 리먼 사태). 그래서 등장한 책이 『시민경제학(Economia Civile』(Zamagni, Bruni)이었고, 공감이나 사회성에 바탕을 둔 이를테면 ‘공유경제’와 같은 새로운 요소들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이런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곳이 있습니다. 최근 일어난 요소수 대란 사태를 생각해 보십시오. 소방서 앞에 밤낮으로 익명의 기부자들이 줄지어 나타난 곳이 어디였습니까? 한국이었습니다. 바이러스로 인해 멈추어버린 세계경제는 앞으로 커다란 도전에 직면할 것이 분명합니다. 미국연방준비위원회는 계속해서 금리인상의 카드를 꺼내들고 있고, 일본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의 우려 속에서도 엔화를 찍어내는 행로를 포기할 줄 모릅니다. 하지만 기존의 경제학이 닥쳐올 경제적 혼돈에 창조적 질서를 부여할 능력이 있는지 의구심은 깊어져가고 있습니다. 최근 등장한 신종 코인(BTC)이나 신종 토큰(NFT)을 보십시오. 마치 기업이나 집단에 맞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다윗의 물맷돌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사회 분야에 있어서는 당분간 ‘공정(Fairness)’이 계속해서 뜨거운 감자로 남지 않을까 합니다. 특히 2030세대가 치중하는 ‘공정’은 지난날의 ‘정의’나 ‘공평’과도 다른 개념입니다. 다음세대 내부 갈등의 도화선인 페미니즘 논쟁도 이와 관련이 깊습니다. 여성을 향한 사회적 차별보다는 그 격차나 장벽을 제거하기 위해 여성에게만 주어지는 일방적 혜택에 더 크게 분노하는 ‘이대남(이십대 남자)’들이 많습니다. 인천공항의 비정규직 직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시책에 대해 그와 무관한 직종에 있는 청춘들마저 격렬하게 반대한 이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의’를 위한 명분이라도 ‘공정’하지 않다고 여긴다는 뜻입니다. 라캉(Jacques Lacan)의 표현을 빌자면 전형적으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행위인데, 또 하나의 현대적 추세인 공감이나 이타성과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 존재합니다. 다가오는 두 차례의 선거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이들 세대를 모른 채 할 수도 없는 실정이라, 당분간 우리 사회는 구조적 모순이나 제도적 차별보다는 개인의 복리나 분배적 정의에 영점(零點)을 맞추리라 예상합니다. 교회의 균형자적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입니다.

 

 문화 분야에 있어서는 ‘포스트 한류(post-Hallyu)’를 준비해야 합니다. 백범 김 구 선생께서 꿈꾸던 문화강국의 비전이 이렇게 이루어질 줄 누가 알았을까요? 우리는 현재 참으로 감격스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영화감독 봉준호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고 했지만, 이 말 속에는 보이지 않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소위 ‘국뽕’ 혹은 나아가 ‘문화제국주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면 왜 이제야 한류가 세상을 강타하고 있습니까? 그 표현을 이렇게 바꾸어야 합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보편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에 세계가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라는 백범의 말과(1947, ‘내가 원하는 나라’),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의 이념에서 기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에 가장 가까운 우리의 보편적 유산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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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향후 한국사회의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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