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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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인류 구원에 크게 기여한 위대한 인물 가운데 ‘알베르트 슈바이처’를 우리는 잊지 못한다. 지금은 프랑스 영토지만 1875년 당시 독일의 영토이던 ‘알사스’ 지방에서 목사의 아들로 그는 태어났다. 5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피아노를 배웠고, 장성하여 스트라스부르대학에 입학, 신학과 철학, 음악을 공부하였는데, 24살 때 철학 박사가 되어 스트라스부르대학 신학부의 교수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파리의 유명한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인 샤를 비도르에게서 연주를 배워 성 빌헬름 교회에서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로도 활동했다. 신학자, 철학가, 음악가로 이름을 날린 그였지만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있었고 자신이 누리는 행복을 모든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했다. 천재이자 목사의 아들인 그는 부유한 나라,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안락하고 윤택한 생활을 하였지만 생각하는 것은 달랐다. 온갖 물질적 혜택을 누리며 살았지만 이런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아프리카 사람들에 대한 생각으로 늘 마음이 무거웠다.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 하지 않는다면 자신도 결국 성경속의 부자와 나사로 같은 부자일 뿐이라는 생각이 그를 힘들게 했다. 종내 그는 고난 받는 작은 자들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기에 이르고 30세에 의과대학에 들어가 8년 동안 의학을 공부를 한다. 부와 명예, 세상의 온갖 좋은 것을 다 뿌리치고 그는 간호사가 된 아내와 함께 마침내 아프리카로 들어갔다. 부유한 자가 빈한한 삶을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는 부유한 자였으나 빈곤한 자들을 위해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었다. 후에 세계 평화에 기여한 그의 공로를 기리며 노벨 평화상이 내려졌다.

 

한 해의 마지막 캘린더를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빨간색으로 표시된 25일이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구주께서 세상에 오신 날이다. 천사들은 노래하기를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라고 했다. 그러나 이 노래를 곰곰이 묵상해 보면 참으로 ‘아픔’이 담긴 노래다. ‘아픔’이란 예수님이 하늘 영광을 포기하고 더럽고 추하고 죄 많은 세상에 오시되 누구도 관심 가지지 않는 초라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이며, 하나님께도 아픈 날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결국 십자가 참혹한 죽임을 당하게 하셔야 했기에 큰 고통을 안고 세상에 보내신 날이기 때문이다. 그런 날이, 바로 그 날이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만나는 기쁜 날인 성탄일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임마누엘의 은총’이다.

 

‘임마누엘’이라는 단어는 예수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성부 하나님께 대한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位格과 사역의 한 단면을 암시하는 용어다. ‘임마누엘’은 ‘함께(with)’라는 뜻의 히브리어 ‘임(עמ)’과, ‘우리와(us)’라는 뜻의 ‘마누(מנו)’, ‘하나님(God)’이라는 뜻의 ‘엘(אל)’이 결합된 형태로서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God with us)’ 분이심을 강조한 호칭이다. 즉 하나님께서 높고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않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몸소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는 것이 임마누엘이다.

 

이사야 9:6절에는 임마누엘의 다른 이름들의 기록이 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라는 기록이다. 여기 기묘자는 ‘아름다운 분(Wonderful)’, 모사는 ‘상담하시는 분(Counsellor)’, 전능하신 하나님은 ‘못하시는 일이 없으신 분(The Mighty God)’이다.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아버지(The everlasting Father)’, 평강의 왕은 ‘평강을 주도하시는 왕(The Prince of Peace)’이다. 신약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이름이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Messiah)’, 인자는 ‘사람의 아들(son of man)’, 예수(Jesus)는 ‘죄인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을 기르고 먹이는 자, 양을 위하여 죽는 자(Good shepherd)’이다. 이 모든 이름의 뜻과 능력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이 ‘임마누엘’의 은총이 된 그 날이 12월 25일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고 함께 하시는 은총은 어떻게 누리는가? 그것은 나와 함께 하시고자 오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요1:12). 영접하게 되면 삶의 가치관의 변화가 있다(빌3:5~9, 롬14:7~8). 거기에는 일치와 화합이 있다(행2:42~47). 이것이 임마누엘의 은총을 누리는 것이며 찬양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과 인간의 높은 담을 헐어버리고 인간과 인간의 불신의 벽을 허물어 버리는 것, 곧 일치와 화합의 은총이다. 신분과 세력, 학력과 성격적인 특성을 뛰어넘은 일치가 실현된 것,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의 은총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합뿐만 아니라 인간과 물질과의 조화가 이루어졌으며, 인간과 하나님과의 일치가 이루어졌다. 하나님과의 일치라는 것은 이로부터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과 물질과의 조화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실현하기 어려운 재산의 공유라는 것이다. 즉 가난한 자를 위하여 나의 재산을 아낌없이 사용하는 아름다운 역사의 시작이다. 인간과 인간과의 화합이라는 것은 이로써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 실천되었으며 미움도 갈등도 다툼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라지고 아름다운 복음의 역사가 실현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다. 임마누엘의 은총을 입은 성도들의 아름다운 오늘의 삶의 현장이 교회다. 곧 일치와 화합을 통한 천국을 경험하는 삶의 장이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금도 세상은 여전히 소란하다. 대선을 앞둔 여의도 정계는 날마다 분쟁이다. covid 19는 우리 사회를 카오스 상황으로 만들어 놓았다. 경제 현장도 소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임마누엘의 은총을 통해 이 모든 상황을 일치와 화합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교회다. 그런데 교회들마저도 많은 것이 소란스러운 것을 본다. 명목상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들썩거리기에 그렇다. ‘임마누엘의 은총이 있는 곳’은 일치와 화합과 조화가 있다. 그러나 ‘임마누엘의 은총이 없는 곳’은 분쟁과 분열이 있다.

2021년의 성탄절을 맞으면서 온 누리에 임마누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충심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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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 임마누엘의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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