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12-08(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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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8월 어느 날 부산에서 발행하는 국제신문 <국제춘추 칼럼>난에 가룟유다 예찬론이라는 글이 실렸다. 이 글은 전국에서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칼럼을 직접 쓴 김광일 집사(변호사)는 판사의 법복을 벗고 첫 변호사 개업을 부산 부민동 당시 부산지방법원 정문 앞에 개업을 한 지 불과 6개월 가량 된 시기였다. 그가 출석한 교회는 부산중앙교회(중구 대청동 미문화원 뒤편)였고, 교회 내부에서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이 문제를 들고 나온 김상권 집사는 장년부 부장으로 우리는 가룟유다 예찬론을 절대 반대한다며 김광일 집사를 즉시 권징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김광일 집사를 동조한 쪽과 선명하게 갈라졌다. 김광일 집사는 가룟유다가 좋아서 예찬한 것이 아니고, 그 당시 한국교회 시대상을 보아 너무 교계가 혼탁하고 교단은 교단대로 분열하고 개혁의 대상이 되어 이제는 구제불능이라고 느낀 나머지 교계를 정화하자는 차원에서 시의적절하게 역설적으로 풍자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반대쪽은 한국교회와 합동교단과 부산중앙교회에 완전 먹칠을 한 것이라며 교계와 교회 앞에 사과를 하지 않으면 당회가 즉시 징계를 요구하고 나셨다. 반대쪽 100여명과 원로목사 고 노진현 목사, 시무장로 3명이 우리는 같이 신앙생활 할 수가 없다면서 김상권 집사 자택에서 첫 개척예배를 드리고 둘째 주일은 지금의 부산 중부경찰서 바로 옆 건물 2층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 당시 중앙교회 담임은 강귀봉 목사였고 분립당시 시무장로 3(정용수, 박현태, 신현덕 장로)였다. 김상권 집사는 장년회 임원회 결의로 김광일 집사를 권징할 것을 당회에 건의하도록 결의했지만 김광일 집사는 교계신문에 전면 해명광고를 게재했다.

그러나 여론은 사그라들지 못했다. 소문은 서울대 법대 출신 김광일과 경북대 법대 김상권 집사 대결이라고 회자되기도 했다. 교회를 분리해 나간 쪽은 새 담임목사를 청빙하기로 하여 김형대 목사를 선택하고 부산에서 처음으로 담임목사에게 자가용 승용차를 제공하고 47평 맨션아파트를 제공했다.

부산중앙교회는 그래도 분립해 나간 쪽에 개척 자금으로 3억 원과 묘지 대지 7만평을 줄 의사를 밝혔으나 반대측은 정중히 거절했다. 뜻밖에도 개척 소식을 들은 하단 반석교회 백준호 장로가 교회 성전 부지를 제공하겠다는 뜻을 밝혀 흔쾌히 받아 그 부지위에 새중앙교회로 교회 신축을 하게 됐다. 그 자리에 짓는 성전은 방주형식으로 서울에서 붉은 벽돌 한 트럭을 실고 와서 벽돌 하나하나를 설탕물을 담가서 벽돌이 희게 피지 않도록 정성을 들여쌓았다. 건축위원장은 담임목사가 맡고 총무를 김상권 집사에 맡겼다. 김상권 집사는 자기 재산 3분지 1을 교회 신축 헌금으로 헌납했다. 이후 헌당식과 더불어 김상권 장로 장립을 거창하게 거행했다. 김형대 목사는 새 성전 강당벽에 ‘7000명의 권솔들을 주옵소서라는 플래카드를 걸고 새벽기도를 했지만 일반 성도들은 기가 차다고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니 김 목사의 기도 제목이 오늘날의 호산나교회를 있게 한 것이라며 김상권 장로는 그 때를 회상했다.

성전건축이 완료되고 나서 반석교회 새중앙교회와 합병하자는 뜻에 동의하여 합병에 이르렀고 7년이 지난 후 김형대 목사를 내보내자는 측의 백준호 장로의 주장에 김상권 장로는 동의할 수는 없지만 또다시 백 장로와 싸울 수가 없어 교회를 조용히 떠나기로 했다. 한 달 간 시외 교회를 전전하다가 부산시내에서 제일 먼저 연락이 오는 교회에 간다고 부부가 뜻을 모았는데 남부산교회 염원식 목사가 제일 먼저 함께 교회를 섬기자는 요청에 남부산교회에 등록하고 정착했다. 그런데 남부산교회 역시 신축 중에서 건축위원장 유 모 장로가 사업 부도가 났다. 위원장은 담임이 맡고 김상권 장로가 권한 대행을 맡아 실무의 모든 완공까지 헌신했다. 한편 새중앙교회는 김형대 목사가 사임하고 새 담임목사에 서울 사랑의교회(옥한흠 목사)의 부목으로 있었던 최홍준 목사를 청빙하게 됐다. 최 목사의 새로운 원대한 목회 비전이 펼쳐진 것이 강서구 명지동 매립지이지만 약 2만평의 종교부지를 불하받아 그 곳에 새 성전을 짓게 된 것이 오늘날 호산나교회가 된 것이다.

한 가지 기억하고 넘어 갈 것은 호산나교회가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초창기 개척 당시에 어려운 곤란과 역경에 굴하지 않고 묵묵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견디어 온 역사의 발자취를 반드시 교회 요람에 기록해 두고 다음세대들에게 믿음의 유산으로 기억하도록 새겨 두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살아있는 산 증인은 91세의 교육가 출신 진도영 장로와 윤병양 장로(고인), 박현태 장로, 정용수 장로(고인), 신현덕 장로(고인) 그리고 김상권 장로(남부산교회 원로)1세대이다. 지금 살아남은 1세대 장로는 단 3명뿐이다.

고 김광일 장로의 부산중앙교회는 KBS 뒤 황령산 중턱에 크게 교회를 신축하여 교회를 부흥시켰다. 이미 하늘나라로 간 김광일 장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2대 비서실장을 지내 국가적 인물이 되고 나중에 지병으로 투병할 시절 양산 조그마한 거처에 있는 김 장로를 문안차 간 필자에게 내가 교회와 사회에 짓은 죄 값을 받고 있다고 고백한 김 장로를 보고 많이 울었다.

한편 김상권 장로는 고향 군위에 교회를 세우고 국내외 합쳐 14개 교회를 세웠다. ‘한국찬송가공회의 재단 실무 편집 책임자로, 지금의 21세기 찬송가로 만드는데 주도하며 한국교회 교회사에 길이 남을 족적을 남겼다.

부산중앙교회하면 고 노진현 원로 목사, 김광일 원로 장로(고인), 김상권 원로장로를 배출한 한국교회사에 길이 남을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편 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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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나교회 개척 당시의 비화 - 새중앙교회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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