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11-2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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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유행하고 있는 “깐부”라는 말을 아십니까? 어릴 땐 구슬치기나 딱지치기를 참 많이 했는데, 그래도 실력이 꽤 좋은 편이어서 따는 날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몽땅 다 잃고서는 무척 속상했던 날이 하루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상대방 두 사람이 같은 편이었고, 서로를 뭐라고 부르면서 둘 사이에는 계산을 하지 않는 거였습니다. 그때 자기들끼리 부르던 명칭을 한참의 시간이 흐른 1986년에 또 듣게 되었습니다. 배우 박중훈과 김혜수의 데뷔작이기도 한 영화의 개봉 때문이었는데, 그 제목이 바로 “깜보”였습니다. 그 후로는 또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같은 뜻을 가졌다는 단어 하나가 21세기에 이토록 세계적으로 유행하다니 참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넷플릭스(Netflix)를 통해 전세계에 방영되어 모조리 시청률 1위를 휩쓸어버린 한국 드라마 ‘오징어게임’ 속에 등장해서 어쩌면 앞으로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도 등재될지 모르는 “깐부” 말입니다. 알고 보니 지역에 따라 “깜보(부)”나 “깐부(보)” 혹은 “가보(갑오)”라고도 불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말은 어디서 유래했을까요?

 일단 “깜보”에 대해서는 미8군 시절의 소규모 음악 밴드 ‘캄보(combo)’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지만(오종석, 국민일보), 늘 밖에서 같이 뛰어 놀아 가무잡잡해진 친구를 가리키는 우리말이라는 견해도 있는바(네이버 사전), 앞선 영화 속 주인공 장두이 배우의 극중 별명이 “깜보”였는데 이런 뜻으로 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깐부”와 관련해서는 일본어 ‘카부(株)’가 어원이라고 하는데, 에도시대 상인조합 ‘카부나카마(株仲間, かぶなかま)’ 또는 지분을 가리키는 말 ‘카부시키(株式, かぶしき)’의 “카부”가 일제강점기 때 들어왔다는 견해로(이무완, 오마이뉴스), 쓴 돈을 나누어 낼 때 ‘카부시키하다’라는 말을 썼다는 증언도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간 “깐부치킨”이라는 가게를 운영해 온 분은 요즘 상상도 못했던 엄청난 특수로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어원을 묻자 어릴 때 고향(평안도)에서 쓰던 말이라 했다고도 하고, 친구로 유명한 고사성어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중국어 발음 ‘꽌보’나 일본어 발음 ‘깐보(かんぽう)’가 변해서 생긴 말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안 그래도 한국을 시샘하기 바쁜 일본이나 중국에서 “깐부”도 자기네 것이라 주장할지도 모르게 생겼습니다.

 현대판 “깐부”는 드라마 속에서 이렇게 등장했습니다. “우리는 깐부잖아. 깐부끼리는 니꺼 내꺼가 없는 거야.” 내 것 네 것을 가리지 않고 함께 소유하고 사용하는 관계, 그런 의미라면 진정한 “깐부”는 성경 속에서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은 각자의 소유를 심지어 팔아가면서까지 함께 쓰고 함께 나누며 살았다고 사도행전은 두 차례나 기록하고 있으니 말입니다(행 2:44-45, 4:34-35).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재물이나 재산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동역자들을 어떻게 소개했던가요?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 대해서는 “나를 위해서 눈이라도 빼줄 것 같은 사람들”이라고 했고(갈 4:15),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에 관해서는 “자신을 위해 목이라도 내놓을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롬 16:4)? 아무리 서로를 끔찍하게 아끼는 동역자라 하더라도 어떻게 눈을, 목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성경 속 신자들만 그랬던 것도 아닙니다. 나환자 친구들을 위해 자신의 안위와 가족과 심지어 생명까지 아끼지 않았던 최흥종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답은 여기 있습니다. 사람들을 위해 목숨까지 아끼지 않으신 예수께서는 누군가를 위해 마찬가지로 자기 목숨까지 아끼지 않는 이들을 향해 “친구”라 부르셨습니다(요 15:4).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깐부”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곁에는 이와 같은 깐부가 있습니까? 아니, 지금 이 순간 나는 누군가에게 이와 같은 깐부가 되어 주고 계십니까? 만일 그렇지 못했다면,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누군가에게 진실한 깐부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너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깐부가 되어 준다면, 이 세상사람 모두에게 하나쯤은 주님 닮은 깐부가 하나씩 붙어있지 않겠습니까? 대선을 앞두고 최근 정치권에서도 깐부라는 말이 연일 등장해 화제입니다. 야당의 어느 예비주자는 “우리 깐부 아닌가요? 치열한 경쟁은 하되 품격 있게, 동지임을 잊지 맙시다”라 했고, 여당의 원내대표도 “오늘부터 우리 모두는.. 깐부, 네것내것 없고 네편내편도 없다, 우리만이 있을 뿐”이라 했다지요? 좋습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지금까지 격동의 세월을 용케 함께 헤쳐 온 사이들이 아니십니까? 그러니 앞으로는 부디, 더러운 이(利)나 부패한 사욕(私慾)이 아니라, 나라 사랑과 민주주의의 열정과 미래의 비전과 타자를 위한 희생과 헌신의 깐부들이 되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보다 우리부터 주 안에서 그런 깐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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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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