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11-26(금)
 

송길원 목사.JPG

서기 26년 로마 제국, 예루살렘의 명문가 귀족 ‘유다 벤허(찰턴 헤스턴)’는 한 순간에 노예로 전락한다. 어린 시절의 절친 ‘메살라(스티븐 보이드)’의 배신이었다. 무너진 지위와 가족을 되찾기 위한 목숨 건 대결이 시작된다. 중추절, 다시 ‘벤허’를 보았다.

해상 전투에 이은 전차경주의 장엄한 모습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스펙터클하다. 지축을 흔드는 요란한 말밥굽 소리, 거품을 뿜어내는 말의 거친 호흡,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들, 그리고는 끝내 월계관을 머리에 쓰는 역전의 장면들은 말 그대로 서스펜스다. 가슴이 뻥 뚫릴 만큼 시원하다.

나는 영화의 또 다른 장면을 주목했다.

# 장면 하나.

‘둥 둥 둥 둥’

유대 청년 벤허도 북소리에 맞추어 노를 저었다. 한 순간 사령관과 벤허의 눈길이 마주친다.

사령관이 묻는다.

“여기에 온지 얼마나 되었느냐?”

이글거리는 벤허의 눈, 답한다.

“네 놈의 달력으론 2년 내 달력으론 20년이다”

바로 그 순간, 사령관이 말한다.

“저놈은 노예가 아니라 자유혼을 가진 놈이다. 놓아주라”

가슴 찡한 장면이다.

 

# 장면 둘.

벤허는 갤리선에서 발이 묶인 채 노를 젓는다. 실제 노잡이는 노예가 아닌 자유민을 썼다. 노 젓기는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다. 노예에게 강제로 맡길 일이 아니었다. 노가 엉켰다가는 큰 일이었다. 갤리선은 평소엔 바람으로 움직이는 범선이다. 하지만 전투가 닥치면 돛을 접는다. 지중해의 변덕스러운 바람이 싸움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노잡이들의 실력은 이때 드러난다.

숙련된 노잡이는 돛을 접을 때와 펼 때를 안다.

 

# 장면 셋.

메살라와 로마에 ‘복수’에 성공한다. 하지만 여전히 괴로워한다. 갈등하는 벤허에게 던지는 에스더의 말을 추적해 보라.

“개가 개를 낳고, 피는 피를 낳는다. 죽음은 죽음을 가져온다. 탐욕은 탐욕을 낳는다.”

“당신이 마치 메살라가 된 것 같다.”

주인공 벤허는 메살라와 싸우는 것이 아니다. 자신 속에 있는 괴물과의 싸움이었다. 타오르는 보복과 증오, 원망이 있다. 영화의 앵글을 바꾸어 보라. 보복과 용서의 처절한 싸움은 더 흥미진진하다.

끝내 벤허는 그리스도가 보여준 용서를 따른다. 고백한다.

“(그 분이) 내 손에 칼을 빼앗아 갔다.”

그 분은 로마 황제가 아닌 그리스도였다. 영화는 남북전쟁의 영웅인 루 월리스 장군이 쓴 소설 ‘벤허: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다.

내 속에도 자리 잡고 있는 ‘보복’이란 무서운 괴물이 있다. 나는 종종 복수에 몸을 떤다. 잠에서도 싸운다. 난 그런 내가 무섭다.

엔딩 자막이 흐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은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And forgive us our debts, as we forgive our debtors.)

추석에 가족들과 만남에서 입은 상처가 있다면 벤허를 시청하며 ‘용서’를 구해볼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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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원 목사]다시 벤허(Ben-Hur)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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