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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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소득’을 아시나요? 최근 정치권에서 여야 혹은 보수나 진보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뜨거운 개념입니다. 조짐은 사실 2012년 대선 당시 벌써 싹텄습니다. 한국 최초의 부분적 기본소득이라 할 수 있는 ‘노인기초연금’ 카드를 당시 진보 성향의 야당이 포퓰리즘 논쟁을 의식하여 만지작거리는 사이에 보수 정당을 자처하던 집권 여당에서 전격적으로 수용하면서 파문이 일었습니다. 사회 복지 영역에서 벌어지는 이와 같은 정치적 수렴(收斂)은 이미 20세기 중반 영국에서 일어났던 현상입니다. 1950년 노동당 정부의 게이츠켈 재무장관은 한국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무상을 원칙으로 하던 복지서비스 일부를 유상으로 전환하는 등 정책 변환을 주도하면서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고 결국 이듬해 총선에서 참패하는데, 이어서 들어선 보수당 정부의 재무장관 버틀러는 놀랍게도 노동당의 개혁 기조를 그대로 받아 발전시키는 정책을 취했습니다. 당시 언론은 둘의 이름을 합쳐서 ‘미스터 버츠켈’이라 불렀고 여기서 유래한 말이 ‘버츠켈리즘(Butskellism)’인데, 대처리즘이 등장하기까지 수십 년 동안 보수-진보의 타협과 합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보수와 진보는 양립불가능한 관계가 아닙니다. 일찍이 ‘보수당의 아버지’라 불리는 벤저민 디즈데일리(1804-1881)는 노동계급의 선거권 확대 등 일련의 사회개혁정책들을 주도했기에 ‘진보적 보수주의자(progressive conservative)’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보수주의자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정작 무엇을 의미하냐고 물어본다면 적절한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러셀 커크는 보수주의 사상의 핵심 기둥으로 첫째, 초월적 질서 또는 자연법 체계가 사회와 인간의 양심을 지배한다는 믿음, 둘째, 다양성의 확산과 인간 존재의 신비에 느끼는 애정, 셋째, 문명화된 사회는 계급 없는 사회가 아니라 질서와 위계를 요구한다는 확신, 넷째, 자유와 재산은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신념, 다섯째, 관습과 오래된 규범 및 일반화된 지혜를 향한 신뢰, 여섯째, 급진적인 개혁이 아니라 신중한 변화야말로 사회를 보존하는 수단이라고 여기는 정서, 이렇게 여섯을 들었습니다(『보수의 정신』, 65-66). 하지만 전술한 사례들은 이러한 보수주의 터전 위에서도 얼마든지 진보적인 사고 내지 정책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민주주의 역사가 오래된 영국에서는 ‘보수적 진보주의자(conservative progressive)’가 나타난 적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토니 블레어 전 총리입니다. 노동당 출신인 그는 전임자였던 보수당 정권 마거릿 대처의 노선을 결코 무시하지 않고 수용하면서 ‘제3의 길’을 모색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블레처리즘(Blacherism)’이라 비아냥거리기도 했습니다만, 거기에는 고질적인 영국병을 치료하고 안정 속에 성장이라는 중용과 포용의 가치를 추구한다는 선한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떨까요? 진보주의를 표방하는 경우 사전적이고 역사적인 의미의 진보를 여전히 주창하는 이들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진보를 부르짖고는 있지만 사실은 보수적 진보주의의 길을 자신도 모르는 채 걷고 있는 지도 모르고, 좌파라 비판 받는 많은 경우도 역시 기실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삼파(三波)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최근의 재난지원금, 출산지원대책, 공공의료에 관한 논의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적용 대상이나 지급 금액에 관해서만 의견이 갈릴 뿐, 그 자체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보수와 진보를 가릴 실익이 거의 없지 않습니까?

 

 신학(神學)에 입문하면 여러 가지 생경한 개념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보수개혁신앙’이라는 말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어떻게 신앙이 보수이면서 동시에 개혁일 수가 있을까요? 보수적 개혁이거나 혹은 개혁적 보수가 아니라 보수와 개혁이 동등가치로 존재할 수가 있습니까? 사람이나 과학이 아니라 신이나 신학의 영역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은 자신을 세계 속에 드러내지 않으며, 따라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Abhandlung, 6, 7). 오늘날 특히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괴델 역시 “증명할 수 없지만 참인 명제가 존재하며, 따라서 진리는 명제를 초월한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incompleteness theorem, 1). 그리스도야말로 말(증명)할 수 없는 존재이며, 명제를 넘어선 진리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 안에서 보수니 진보니 하는 구별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세상도 진보적 보수니 보수적 진보니 하는 판국에, 교회 안에서 보수니 진보니 편을 가르거나 교회가 세상과 등을 지고 진지한 대화가 아니라 무모한 독백만 일삼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나 세상이나 무슨 주의(主義)가 아니라 오직 주(主)만 드러나고 높아지기를, 폭풍 같은 현실을 잠잠하게 하실 오직 주님만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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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진보적 보수와 보수적 진보 그리고 개혁보수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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