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11-2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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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종교학계의 큰 별인 시카고 대학의 종교학자 조너선 스미스는 『자리 잡기: 의례 내의 이론을 찾아서』(이학사, 2009)에서 ‘위치지정적 세계관(locative worldview)’이라는 말을 소개합니다. 곧,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정해진 자기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경계를 넘거나, 권위에 도전하거나, 나아가 공동체에서 배제된 ‘이상한 존재’들이 ‘정상적인 사람들’의 세상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질서를 해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공동체 내의 질서는 ‘신적인 권위’에 의해 정해진 성스러운 것입니다. 만약 이 질서가 무너져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공동체가 무너지고, 나아가 온 세상이, 온 우주가 무너지기 때문에 모든 것은 정해진 자기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스미스는 자리에 대한 인간의 이해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사회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그리고 이 사회적인 의미는, 아주 중요한데 권력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종교적이지만 내적으로는 권력에 의해 구성된 자리의 이미지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이어서, 현실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령 스미스가 잘 분석하였듯이, 성경 에스겔서에 나오는 제사장 에스겔의 환상에서 묘사되는 도시와 사원(예루살렘 성전)은, 그 당시 제사장들이 추구한 권력의 공간 배치를 형상화한 꿈의 사원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바빌로니아 사원 텍스트, 위네바고족(북아메리카 인디언)의 부족 세계관 등은 종전의 연구에서라면(엘리아데의 ‘성스러움’의 관점) 우주의 질서를 보여주는 종교적이고 이상적인 세계관으로 언급되었겠지만, 스미스는 이들의 세계관이 보여주는 것은 통치자의 권력의 언어로 이루어진 것이지, 민중의 현실에서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따라서 스미스는 책의 부제와 같이 ‘의례 내의 이론’을 찾아냅니다. 그것은 곧 ‘의례 내의 자리들 간에는 구조주의적인 관계성’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의례 내에 존재하는 체계성’, ‘언어적인 구조’를 뜻합니다. 스미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리들 간에 맺어진 체계성은 옮겨질 수 있고, 다른 말로 번역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주의적인 논의를 바탕으로 스미스는 종교사에 대한 기발한 해석을 제시합니다. 예를 들어 유대교의 ‘예루살렘 성지의 체계’라는 공간적 구조가 기독교로 옮겨오면서 ‘전례의 교회력’이라는 시간적인 구조로 ‘번역’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이 현실적으로 예루살렘이라는 성스러운 공간에 접근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예루살렘 내에 존재하던 체계성을 ‘옮겨 오는’ 의례적 해결책을 모색한 것입니다. 그 결과 유대교는 ‘미슈나(Mishnah)’라는 규범의 체계가, 기독교에서는 ‘교회력’이라는 시간적 체계가 발달했다는 것이 스미스의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변화된 시대에 기독교의 교회력은 어떻게 어디로 옮겨져야 할까요? 유대교처럼 규범적 체계로 번역되고 옮겨져야 할까요? 제가 보기에는 ‘위드-코로나 시대’에 온-오프, All-라인 공간과 규범 체계로 번역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치지정적 세계관’에서 ‘위치지정’을 확장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늘/땅, 정상/비정상, 남/녀, 인간/동물, 어른/어린이, 나이든 세대/젊은 세대, 동/서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통일되어야 할 것입니다. 에베소에 보내는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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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학 목사]위치지정적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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