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9-23(목)
 

 

 

 

이 기고문은 6월 6일 함안칠원교회에서 열린 손양원 목사 순교 70주년 기념예배에서 이상규 교수가 발표한 글입니다.


한국교회를 향한 손양원 목사의 경고

 

 

 

   

이상규 교수.jpg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 71주년을 기념하는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기념사업회 정주채 이사장님과 이성구 회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손양원 목사 순교 71주년을 기념하면서 그 분이 남긴 신앙정신과 정신적 유산을 기억하고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사회나 한국교회는 매우 혼란한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국가적으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고 안보가 불안한 상태에 있습니다. 공정과 정의가 무너지고, 거짓과 위선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건전한 도덕과 윤리가 무너지고 불법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또 지난 정부가 피땀 흘려 이룬 경제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념적 갈등이 심각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해방 공간과 같은 상황이고 그 때보다 더 심각한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 시대에 살았던 손양원 목사님의 눈이 비친 그 시대와 그 시대를 향한 경고는 오늘 우리 시대에도 동일한 경고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고자 합니다.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되어 있던 손양원 목사님은 해방과 함께 출옥하여 1950년 9월 순교할 때까지 만 5년간 활동하시면서 크게 3가지 경고를 하셨는데 이 점에 대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 경고: 회개하라

 손양원 목사님의 첫 번째 경고는 ‘회개하라’는 권고였습니다. 회개는 그의 설교의 가장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그는 회개하지 않음이 모든 화(禍)의 원인이라고 보았고 회개치 않음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1945년 해방을 맞았으나 좌우대립이 심각했고, 교회 지도자들은 기득권에 집착하여 회개와 자성을 거부하고 교회 쇄신운동을 거부했습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대립하였고, 1950년 4월 대구제일교회당에서 모인 제36회 총회는 한국교회사상 처음으로 경찰이 투입된 불명예로운 총회였고, 교권대립이 심각하여 결국 정회하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꼭 2달 후 6.25전쟁이 발발했습니다. 그날 한반도 전역에 내리던 비는 우리 민족의 장래에 대한 불길한 징조였습니다. 인민군은 6월 26일 임진강 일대와 의정부 및 춘천을 돌파했고, 개전 3일 만인 6월 28일에는 서울을 점령하고, 30일에는 한강 도하를 시작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서울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후퇴하여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됩니다. 7월 6일에는 인민군은 오산 부근에서 미국 제24사단과 첫 교전을 벌였고, 7월 19일부터는 대전 공략에 들어가 24일에는 대전을, 7월 말에는 목포와 진주를, 8월 초에는 김천과 포항을 점령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엔군은 8월 3일 낙동강 철교를 폭파하고,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워커라인이라 불리는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8월 말 북한군 주력부대는 낙동강까지 진출하면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전선은 교착상태로 들어갔습니다. 결국 부산과 경남 일부를 제외한 전 국토가 적의 수중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호남지방으로 말하면 인민군은 7월에 대전을 거쳐 익산 장성 광주를 거쳐 7월 27일에는 여수가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손양원 목사는 인민군이 손 목사를 그냥 두지 않을테니 피하라고 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합니다. 그리고 나병 환자들을 섬기며 지내던 중 9월 13일 수요일 인민군에게 체포되었고, 2주일 동안 끌려 다니면서 고초를 당하시고 9월 28일 목요일 순천으로 가는 미평 과수원에서 48년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9월 13일 수요일 저녁 설교를 준비하다가 잡혀서 원고를 완성하지 못했는데, 그 설교는 그의 마지막 설교이지만 선포되지 못한 설교가 된 것입니다. 그 설교가 바로 ‘한국에 미친 화벌(禍罰의 원인’이라는 설교입니다.

 이 설교에서 손양원 목사님은 6.25 동란을 4천년 역사상 초유의 신벌(神罰)로 규정하고 우리 민족에게 미친 이 화(禍)와 벌(罰)의 원인을 분석했는데, 범죄하고도 회개치 않음이 근본 원인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¹ 그는 우선 국가지도자들의 범죄, 둘째 백성들의 죄, 곧 민족적 범죄, 셋째, 미군정의 잘못된 영향을 들었고, 네 번째로는 한국교회와 신자들의 책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6.25 전쟁, 곧 “이 화벌의 책임은 기독교의 죄 값이다. 우리의 책임이다.”고 말합니다. 기독교인들이 기도가 부족했고, 전도가 부족했고, 정치권력을 추구하고, 미국이 보내준 구제품을 두고 추태를 보였고, 자유주의 신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했다고 지적하고, 특히 총회석상에서 목사 장로들이 난투극을 벌인 일이 화의 원인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설교의 요지이자 결론은 회개하지 않음이 화의 원인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요구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더 큰 화를 면치못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회개를 외친 그의 설교는 평온한 설교가 아니라 절규였습니다. 회개를 요구하는 마지막 호소였습니다. 그는 세례요한처럼 경고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민족은 망한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가 살길이라고 경고합니다.


1)태풍이나 지진, 역병과 같은 자연 제해나 전쟁과 같은 국제적 대립으로 인한 대량학살 등 인적 제해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는 입장은 서구교회에서도 널리 주창 되어 왔다. 1653-652년의 유럽에서의 페스트, 16629월의 런던 대 화재가 발생했을 때 청교도인 토마스 빈센트(Thomas Vincent)는 이런 제앙은 아모스3:7-8, 시편 65:5절에 근고하여 하나님의 경고라고 보았고, 런던의 의사였던 기드온 하비(Gideon Harvey) 1655년의 런던의 대역병, 1656년의 런던 대화제, 1703년의 대폭풍을 경험 한 후 다니엘4:2을 인용하면서 이는 하나님의 경고이자 하나님의 심판라고 말했다. 런던의 목회자였던 윌리엄 구지(William Gouge)sms 하나님의 세 화살, 역경 기근 칼이라는 책에서, 민수기16:41-50에 근거하여 역병의 원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보았고, 영국국교회 목사였던 윌리엄 핸들리(William Hendley)는 역병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주장했다.

  

두 번째 경고: 공산주의에 대한 경고

 손양원 목사님의 두 번째 경고는 공산주의를 멀리하라는 경고였습니다. 그는 공산주의가 기초하고 있는 무신론, 유물론과 거짓, 위선, 이중성, 선동 등 공산주의의 실상과 실체를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공산주의는 기독교 신앙에 반하는 불신앙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산주의를 반대한 것입니다. 그가 강력한 반공주의자이자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신사참배 거부로 1940년 9월 25일 투옥되어 5년 간 감옥에서 보내고 1945년 8월 17일 석방된 그는 이념적 싸움이 한창이던 해방정국에서 자신의 견해를 분명하게 피력했습니다. 해방 당시만 해도 국민 대중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혼란한 해방 정국에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적절한 제도인 것처럼 인식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세계적 조류를 알지 못하는 설익은 소위 지식인들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무지했고, 박헌영 같은 선동가의 말을 듣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선호했을 정도였습니다. 1946년 8월 미군정이 조사한 여론조사를 보면, 8,453명의 응답자 중 70%에 해당하는 6,037명이 ‘사회주의를, 7%에 해당하는 574명이 공산주의를 지지했다고 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손양원 목사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해 가르치고 설교한 것입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 세상에 나온 것은 1848년 2월이었고, 그로부터 69년 뒤인 1917년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했습니다. 이때부터 공산주의 실상이 서서히 노출되기 시작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조선공산당이 창당된 것은 1925년 4월이었습니다. 조선공산당은 독립운동을 하기위한 방편이었다는 측면도 있습니다만 공산당의 실상을 재대로 아는 이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첫 사회주의 정당은 1918년 4월, 이동휘(1873-1935) 등이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결성한 한인사회당이었습니다. 이동휘는 3·1운동 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이승만 휘하의 국무총리가 되었으나 임시정부 국무총리직을 이용하여 사회주의운동 확산하고자 했습니다. 사실상 그는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공주의자인 이승만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임정개혁안을 둘러싸고 이승만은 격한 논쟁을 벌였던 그는 결국 임정을 탈퇴하고는 1921년 5월 ‘고려공산당’을 창당합니다. 김철훈이라는 이는 1921년 5월 또 다른 ‘고려공산당’을 창당했습니다. 이후, 이동휘의 상하이 고려공산당은 ‘상해파’로, 김철훈의 공산당은 ‘이르쿠츠크파’로 불리게 되면서 당 창립의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공산주의 운동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런 공산주의의 문제를 간파하고 비판했던 첫 인물이 이승만인데, 그 때가 1923년이었습니다. 이승만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발간되던 「태평양 잡지」 1923년 3월호에 “공산당의 당 부당(當不當)”이란 제목의 논설을 게재했는데, 이것이 공산주의에 대한 최초의 비판이었습니다. 제목이 암시하는 바처럼 이 논설에서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합당한 점과 부당한 점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입니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거짓된 유토피아 사상에 열광하고 있었으나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본질과 모순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국내에서 이런 점을 간파하는 이들은 그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도리어 공산주의가 이상적인 제도인양 흠모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해방당시의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때에 손양원은 집회를 다니면서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설교했고, 공산주의는 위험한 사상이자 기독교 신앙과 반하는 무신론 사상이라는 점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가 반공주의를 말할 때는 6.25 전쟁 이전이었고 공산주의를 체험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때였습니다. 그는 함안 칠원 출신으로 북한 공산주의 체제를 경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국하고 그가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민주주의를 신봉하게 된 것은 기독교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공산주의는 무신론이기 때문에 받아드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중은 이 점을 잘 모르고 있었기에 손양원 목사는 공산주의에 대해 경고했던 것입니다.

 한 가지 사례를 소개하겠습니다. 1947년 봄 그가 영도교회(지금의 제일영도교회)에서 집회할 때도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여러분 공산주의가 무엇입니까? 공산주의는 남의 것 빼앗아 먹자는 주의입니다. 같이 공평하게 나누어 먹자가 아닙니다. 남의 것을 빼앗는 강제입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성경의 정신입니다. 민주주의는 이것 맛보시오 하면서 나눠먹는 주의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랑으로 나누어 먹는 주의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정신 바짝 차리십시오. 어느 주의가 좋습니까?”

 혼란한 해방 정국에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적절한 제도인 것처럼 인식하는 무지한 교인들을 위한 경고였습니다. 그러기에 손양원은 “여러분, 정신 바짝 차리시오”라고 설교 한 것입니다. 이 집회에 참석했던 한 사람이 후일 서울음대 교수가 되는 이인영 학생이었는데, 그 조차도 ’민주주의‘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고 회상했습니다. 성가대원으로 풍금 뒤편에서 손양원 목사의 설교를 들었던 이인영 학생은 70여년이 지났지만 손양원 목사의 확신에 찬 설교가 잊혀지지 않는다고 수년 전 저에게 증언한 바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말한 민주주의는 인민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 민주주의였습니다. 그가 말한 것은 신민주주의도 아니었습니다. 백남운, 안재홍, 조소앙 등이 말한 신민주주의는 통합과 합작을 중시하는 일종의 중도적 민주주의였습니다. 미국적 민주주의나 소련식 민주주의 중 어느 하나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손양원은 철저한 미국식 민주주의의 신봉자였습니다. 아마도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연유였을 것입니다. 좌익들이 볼 때 손양원은 친미주의자였습니다. 그의 두 아들의 죽음도 따지고 보면 보수 친미주의자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김득중의 연구에 따르면, 손동인과 동신의 죽음은 종교적 이유라기보다는 우익의 반탁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 곧 반공주의 우익청년단원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였던 손양원은 결국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목숨을 빼앗겼고 그의 죽음을 통해 공산주의의 거짓과 만행을 폭로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자유민주주의의 ‘자유’가 사라지고, 거짓 위장 선동이 난무하고, 친공주의가 백주에 서울도심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손양원의 경고는 오늘 우리를 향한 경고가 되고 있습니다.

 손양원의 경고가 의미 있는 경고였다는 점은 6.25 전쟁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인민군 치하에서 3개월 간의 서울 생활에서 공산주의를 경험했습니다. 그때서야 공산주의가 무엇인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6.25전쟁을 경험하면서 신학교에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했고, 그것이 정규 교과과정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예컨대, 전쟁 중 1951년 대구에서 개교한 총회신학교의 1953년 교과과정에는 성경, 조직신학, 교회사와 같은 신학관련 과목 외에도 ‘기독교와 민주주의,’ ‘기독교와 공산주의’ 같은 과목이 있었습니다.² 적당한 교제가 없었기에 1953년에는 찰스 브레이든의 『전쟁 공산주의 종교』가 역간되었고, 프란시스 킨슬러(권찬영 선교사)가 쓴 『기독교와 민주주의』가 1957년에 출판된 것입니다. 공산주의를 멀리하라는 경고는 지금 우리 시대를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2) 김득렬 편, 씨를 뿌리려 나왔더니(서울: 카이로스, 2007), 177.

 

세 번째 경고: 재림의 때를 준비하라는 경고

 손양원 목사님이 외친 세 번째 경고는 우리의 믿음 없음, 곧 불신앙을 경고하고, 사랑이 식어지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다시 뜨거운 가슴으로 재림의 때를 준비하라는 경고였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믿음으로 행하며, 믿음을 따라 행하지 않는 것은 다 죄(롬14:23)라고 확신했습니다. 그가 나환자들의 목회자가 된 것도,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도 믿음을 따라 행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옥중 생활 4년이 많은 날들이지만(獄苦四年多多日) 주와 함께 즐거워하니 그 모든 날이 하루 같다(與主同樂如一日)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감옥 생활에서도 주와 동행하니 한상 기쁨이 충만하다(與主同居恒喜滿)고 고백한 것입니다. 해방과 함께 출옥한 그는 혼란한 정국에서 그리고 교계의 무질서한 처신을 보면서 믿음으로 행할 것을 설교하면서 서로 자기 이(利)를 구하면 사랑이 식어지는 현실을 개탄한 것입니다, 이런 삶의 자세가 원수된 자를 양자로 입적시키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특히 재림의 때를 준비하라고 경고합니다. 해방 이전 특이 1930년대 말의 설교에서도 말세에 대한 종말론적 주제 설교를 했지만 해방 이후 그는 재림을 기대하고 고대하며 살았습니다. 1938년 당시 그의 설교에서 가장 빈번한 주제가 벧전4:7절을 본문으로 하는 “말세를 준비하라”, “말세 준비,” “말세 경영” 등이었는데, 재림신앙은 그 이후의 설교에서도 중시되거나 강조되었습니다. 만물은 마지막이 있다(物有本末)는 신념이었습니다. 이런 점은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되어 조사 받은 신문 기록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1940년 4월 중순 경 행한 그의 설교 “주의 재림과 우리의 고대”는 일경에 의해 문제시되어 주목을 받았던 설교였습니다. 이런 재림에 대한 설교가 신사불참배와 국체변혁을 선동했다고 하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기도 했던 설교였습니다.

 해방 후 혼란한 상황에서 손양원 목사는 재림을 고대하고 이를 설교하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연유에서 ‘주님 고대가’가 널리 불려졌고 손양원의 작시라고 잘 못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이 노래를 즐겨 부르며 애창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이 노래의 가사는 애양원교회의 후신인 성산교회 김수남 권사, 혹은 황순덕 전도사가 증언한 바처럼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된 바 있는 전점용 전도사가 하동지역에서 개척 전도자로 일하면서 작시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는 손양원 목사의 재림신앙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지 못합니다.

 

1.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먹음고/ 내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때 다시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2. 고적하고 쓸쓸한 빈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여놓고/ 다시오마 하신주님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3.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떠도/ 행여나 우리주님 오시는가해/ 머리들고 멀리멀리 바라보는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4. 내주님 자비하신 손을 붙잡고/ 면류관 벗어들고 찬송부르며/ 주님계신 그나라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해방 후 순교하기 까지 손양원 목사님은 재림에 대한 준비, 재림의 때를 준비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순교 신앙은 이 재림 신앙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분명하기 때문에 순교적 삶이 가능하고 순교신앙을 파지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주 예수의 강림(降臨)이 불원(不遠)하니 저 천국을 얻을 자 회개하라”고 외친 것입니다. 해방후 혼탁한 사회와 교계를 보면서 깨어 회개하고 재림을 준비하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그 경고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마무리

 뒤돌아 보면 손양원 목사님의 3가지 경고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위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회개하라’는 경고는 우리의 지난날의 행실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고, 두 번째 경고는 오늘의 현실에서 ‘무신론과 유물론에 대한 경고’라고 할 수 있고, 3번째 경고는 내일의 우리의 영생과 소망을 위한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해방 전후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사회적 혼란과 이데올로기의 대립, 교계의 무질서, 그리고 코로나 상황이라는 이름하에 당연시되는 우리의 나태함은 우리의 실상을 노출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현실은 우리는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세상 연락(宴樂)을 구하는 오늘 우리에게 손양원 목사는 다시 경고하고 있습니다. 깨어 기도하고 마음을 돌이켜 거짓된 세상 풍조를 따르지 말고 주의 재림을 사모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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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한국교회를 향한 손양원 목사의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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