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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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혁명으로 촉발된 급속한 변화에 코비드의 비자발적 충격이 가해진 결과 현세에 거대한 격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신인류'가 생성되는 중입니다. 학술적으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상식적인 관찰을 통해서도 무언가 새로운 인간형이 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인지할 수 있습니다. 과연 현생 인류(호모 사피엔스)에게 어떤 일이 벌이지고 있을까요? 그렇게 해서 등장하게 될 궁극적인 인간형은 과연 무엇일까요?

 

 자율적 인간(homo autonomous)을 먼저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최배근). 칸트가 말한 자율적 주체 개념이 아닙니다. 급속한 자동화 세상에 적응하는 신인(新人)이라는 의미입니다. 요즘 입장할 때 큐알(Q. R.) 코드를 입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핸드폰으로 비교적 쉽게 할 수 있는 과정이지만 이마저도 버거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가게마다 늘어가는 키오스크(kiosk)는 어떻습니까? 커피 한 잔 아이스크림 하나 주문하려고 해도 기괴한 조형물 앞에서 겁부터 덜컥 나는 아날로그 세대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자동화에 익숙한 신인류들은 새로운 조류에 완벽하게 적응해서 온오프라인 공히 파도타기(surfing)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고 스트리밍(streaming) 라이프를 즐기며 소비에도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fanshumer) 날마다 스스로를 업데이트(update)하며 살아갑니다. 오죽하면 이들이 만들어가는 경제를 '미코노미(miconomy)'라고 부르겠습니까?

 

 유목민 인류(homo nomad)가 다음 차례입니다. 가축과는 무관한 신유목민을 뜻하는 이 말은 질 들뢰즈(Gille Deleuse)로부터 시작해서 최근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의 새로운 정의를 거쳐(L'homme Nomade) 이른바 '디지털 유목민'으로 수렴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과학기술문명의 발전으로 이전과 달리 시공의 제약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인류는 이제 컴퓨터와 인터넷의 엄청난 발전으로 인해 등장한 초연결사회(hyper connected society)에서 어느 시대 어느 장소든 마음대로 갈 수 있는 능력을 구비했습니다. 김난도 교수는 이렇게 등장한 신인류의 정체성은 더 이상 단수(myself)가 아니라 복수(myselves)로 존재하며 직장에 있을 때와 퇴근 후 그리고 일상에서와 SNS 상의 모습이 각각 다른 '멀티 페르소나(muli persona)'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늘 그러하듯 여기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공존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해묵은 질문이 공허와 불안과 함께 찾아오기 마련이니 말입니다.

 

 공감형 인간(homo emphaticus)을 강조하는 추세는 따라서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근대 이후 해체와 탈구조화 현상 속에서 점차 피상적이고 파편적으로 변해가는 인관관계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급증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율적 유목민이 되어갈수록 고립감과 소외감은 심화되기 마련입니다. 인간은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니, 어찌 인류만이겠습니까? 환경생태학자 라이히홀프(Josef Reichhof)는 '모든 고등생물의 기본 토대는 공생이다"라고 강변합니다(Symbiosen, 8). 그러나 정보화혁명은 공감혁명을 수반하고 있습니다. 최근 선한 치킨집 주인을 "돈쭐내자"는 바이콧(buycott) 운동, 배구 선수에서 시작해 사회전분야로 엄청나게 파급효과를 일으킨 "학폭" 문제, 그리고 인천국제공항 정규직 전환 문제를 놓고 특히 MZ 세대를 들끓게 했던 이른바 "인국공 사태" 등은 모두 공감과 공정이라는 가치가 빚어낸 신인류의 자화상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의 출현입니다! 2015년 3월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스마트폰의 행성"이라는 기사를 통해 '포노 사피엔스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스마트폰이 뇌이고 손인 사람들, 이들은 2007년 1월 9일 탄생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들고 나타난 바로 그 날입니다. 이들을 표현하는 말에서 마침내 무언가가 떨어져 나갔다는 사실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즉, 이들은 "호모"로 명명되어 왔던 구인류를 대체할 '포노'로 상징되는 신인류를 일컫습니다(최재붕). 미래학자 호세 코르데이로(Hosé Cordeiro) 역시 '포스트휴먼(posthuman)'과 '트랜스휴먼(transhuman)'이란 말을 선호합니다. 아, 그렇다면 이제 이들이 만들어 갈 세상은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요?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인류는 결코 진정한 창조주(Creator)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설령 창조하는 능력이 있더라도 창조의 근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하기야 <호모>든 <포노>든 인류의 존재 자체가 절대적 창조주로부터 기인했음을 어찌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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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신인류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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