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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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종교가 고행을 장려합니다. 종교학 사전은 고행을 <넓은 의미로는 자기통일과 정신성의 개발을 목적으로 하는 자기 수련을 가리키는데, 엄밀한 고행은 육체를 정신적 지복에 대립하는 악으로 보고, 정신적 지복을 얻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신체에 고통을 주는 종교적 수단>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고행에는 소극적 측면과 적극적 측면에 있습니다. 소극적 측면은 <행하지 않음>입니다. 적극적 측면은 <행함>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행함>이 <행하지 않음>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삼국유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자 걸인이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에 길에서 아기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때 옆을 지나던 불교의 승려가 자신의 가사를 벗어 산모와 아기를 덮어주고 자신은 알몸으로 절에 갔습니다. 후에 승려의 미덕이 알려져서 왕의 스승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산모와 아기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에 승려의 옷을 덮었다고 해서 추위를 이길 수 있었을까요? 혹시 동사하지 않았을까요? 그 상황에서는 옷을 벗어 덮어주는 것보다는 여인과 아기를 데리고 가서 돌봐 주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승려를 높이 평가한 것은 여성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승려로서 여성에게 손을 대는 것은 계율을 깨뜨리는 것이니, 옷만 덮어주고 끝낸 것이고, 오히려 그것을 높게 평가했다는 것입니다. 고행은 대단히 훌륭해 보이지만 그 자체에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성경은 고행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고행은 다분히 인본주의적 노력입니다. 고행은 자신을 지키고, 자신의 성취를 위한 이기적 동기가 강합니다. 성경은 고행이 아닌 고난을 가르칩니다. 고난은 자신은 죽고, 남을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행하신 것이 아니라, 고난 받으셨습니다. 고행이 자신을 위한 이기적 동기가 강한 반면, 고난은 자신은 죽고 남을 살리는 이타적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죽어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기준으로 하면 앞의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될까요? 예수님께서는 산모와 아기에게 옷만 덮어주고 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산모를 엎고, 아기를 안고 따스한 온기가 있는 집으로 달려가셨을 것입니다. 후에 누군가 여인의 몸에 손을 댄 것으로 비난한다면, 기꺼이 비난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앞의 승려는 자신의 정결을 지키려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다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승려는 옷을 줄 수 있었을 뿐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생명까지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사회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힌 세리와 창기들 곁에 머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면서도 기꺼이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본문에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약을 발라주고 떠난 것이 아니라, 그를 데리고 가서 주막에 맡겨 지속적 치료를 받게 해 주었습니다. 그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고행을 하는 수련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해야 합니다. 이사야 40장 1-2절에 보면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위로하되 <마음에 닿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많은 섬김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조금 더 하길 원합니다. 무엇보다 마음을 더 쏟길 원합니다.

 목회자에게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목회 활동의 기준이 정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장례식에는 발인예배까지, 심방은 특정 상황인 경우에만, 상담인 경우엔 한 시간 이내로....이런 것들입니다. 그것보다 조금 더 하는 것은 여건상, 혹은 다른 성도와의 형평성 등의 이유로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저도 종종 <그때 조금 더 했어야 하는데....> 하는 후회가 많습니다. 모든 순간에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것 때문에 힘든 일을 당한다면, 그게 곧 우리에게서 말라가고 있는 고난이 될 것이고, 그것은 참 기쁨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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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조금 더 해야 할 이유(누가복음 10장 30-3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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