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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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기 한국과 부산에서 일한 중요한 선교사가 밥 피얼스였다. 앞에서 소개한 바 있지만 그는 1950년 10월 전란의 현장에 도착했는데 월드비전이라는 이름의 구호단체를 조직한지 한달 뒤였다. 그가 민간항공기를 타고 온 마지막 인물이었다. 이때부터 12월까지 한국에 머물면서 전도 집회를 열고 전란의 참화에서도 소망의 메시지를 전파했다. 그러면서 각종 구호사업을 펼쳐 나갔다. 특히 그는 6.25 전쟁에 대한 중요한 사진과 영화 등 영상기록을 남겼는데, 한국현대사의 생생한 기록물이 되었다. 이런 기록물은 전쟁의 참화를 보여주는 강력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사진과 영상 자료는 대부분 자신이 직접 찍었지만 이 일을 도와준 인물이 이번 글의 주인공인 레이몬드 프로보스트(傅禮文, Raymond C. Provost, 1919-1984) 선교사였다. 피어스가 1950년 10월 한국으로 와서 처음 만난 인물이 또한 그였다. 이들은 황무지로 변한 전재의 나라 구호의 최전선에서 만난 최초의 전우였다. 이들은 돈독한 동료로 함께 구호사업을 전개했기에 피어스는 프로보스트를 가리켜, “나의 가장 친근한 친구 중의 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프로보스트는 사진기술을 겸한 선교사로서 전쟁 중 구호사업을 전개한 인물인데, 부산을 여러 번 방문했지만 부산을 거점으로 일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란 중 부산지방 기독교를 해명하는데 있어서 그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그를 소개하고자 한다.

 레이 프로보스트는 제2차 대전 때 통신병으로 일본 오끼나와로 갔던 군인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하지 중장을 따라 한국으로 왔고, 한국에서 1년간 통신부서에서 일했다. 이때 전역 후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일단은 펜실베니아주의 화학연구소로 돌아가 일하던 중 자신의 장래사역을 위해 직장을 그만 두고 1946년 가을 프린스톤신학교에 입학했다. 공부를 다 마치지 못했으나 북장로교선교부의 선교사로 영입되어 1948년 4월 18일 내한했다. 그는 선박이 아닌 항공편으로 한국에 파송된 첫 번째 선교사였다.

 내한한 그는 연희전문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치게 되었지만 학생들이 영어를 잘 알지 못해 우선 영어부터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영어와 성경을 가르쳤고, 주말이 되면 전주로 갔다. 전주 예수병원의 홍보사진을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사진 기술자로도 명성을 얻고 있었고 남장로교 선교사들을 위한 사진 촬영을 해주어 북장로 선교사들로부터 빈축을 산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남장로교 선교사로 전주에 와 있던 마리엘라(Mariella, 1923-2014)를 만나게 되었고, 1952년에는 그와 결혼하게 된다. 마리엘라 탤메이지는 1923년 2월 광주에서 남장로교 선교사 존 탤메이지(John van Neste Talmage, 1884-1964)의 5남2녀 중 막내로 출생했는데, 평양 외국인학교를 거쳐 노스캐롤라니아의 퀸즈대학, 버지니아 의과대학에서 간호학을 공부하고 1948년 8월 내한하여 전주 예수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모든 선교사들은 한국을 떠났다. 본국으로 돌아가기도 했고, 잠정적으로 일본에 피신해 있기도 했다. 그러나 끝까지 한국을 떠나지 않았던 일곱 선교사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프로보스트였다. 그래서 그는 밥 피어스를 한국 땅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전화의 와중에서 프로보스트의 중요한 사역은 피난민을 선교부 트럭에 싣고 안전하게 피난시키는 일이었다. 그는 150km거리를 왕래하면 기독교인들을 서울에서 남쪽으로 피난하도록 도왔는데 기독교인들은 인민군의 제일의 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다시 교회를 일으킬 수 있을 만큼의 기독교인들, 특히 목사들이 남아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동설한의 강추위 속에서도 몇 주일 동안 거친 도로를 해쳐 가며 차를 몰면서 피난민 구제에 진력하였다. 또 함정 LST마련을 위해 노력하였다. 무엇을 먹고 어디서 자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남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가 서울을 떠난 마지막 날 밤에는 서울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파괴된 것으로 느꼈다. 실제로 물질적인 소유는 다 사라졌다. ... 그러나 그 참담한 어두움 속에서도 우리가 가진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희망이었다. 우리 가슴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불타는 사랑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가 이 폐허의 땅에서 일할 곳이 있다고 보아 나를 부르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나를 끝까지 지켜주실 것이라 고 믿는다. 이 겨레도 지켜주실 것이다.”

 프로보스트는 피어스와 동역하였고 피어스가 가지고 온 월드비전 구호금 1만 달러를 가지고 피난민 목사들을 도왔다. 이런 상황에서 프로보스트가 촬영한 사진은 한국에서의 참상을 알리는 생생한 정보가 되었고, 동시에 구호사업을 지원하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로보스트는 1951년 미국으로 돌아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수학하는 한편 1952년 성탄 직전에는 빌리 그래함 목사의 요청으로 자신의 한국에서의 첫 집회시 가이드 겸 사진작가로 동행해 줄 것을 요청받고 동행하게 되었다. 이것이 빌리 그래함과의 첫 만남이었다. 부산에서 감동적인 피난민촌 새벽기도회에 참석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프로보스트는 1953년 종전 후 부인과 함께 다시 내한하여 대구에 체류하면서 전후 복구사업, 교육과 사회복지사업에 관여하였다. 미군한국원조단(AFAK)의 협조를 얻어 교회와 학교의 재건을 도왔고, 성광고아원을 설립하고, 경주에 문화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또 경주에 최초의 종합병원인 경주기독병원을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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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선교사들: 레이 프로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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