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4-16(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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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싶지 않은 현실을 보여주는 영화

이승원 감독의 독립영화 <세자매>를 보면 대한민국이 영화를 잘 만드는 나라란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세 자매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 낸 개성있는 여성 연기자들을 보유하고 있고, 저예산의 독립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개봉 6일 만에 5만 명이 넘는 관객들이 이 영화를 찾을 만큼 다양한 영화를 소비하는 훌륭한 관객들도 있다. 코로나의 어려움 가운데서 일군 성과라서 그 가치는 높이 평가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화려하고 스케일이 큰 대형상업영화가 아닌 소소한 일상생활을 세밀히 묘사하며 삶의 성찰에 이르게 하는 작은 영화들을 제작할 수 있고 상영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점은 높이 평가를 받을 만한 일이다.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영화가 오락적 가치만을 존중받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제를 일깨우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다. <세자매>는 가족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폭력 아래서 성장한 성인이 겪어야 하는 트라우마가 일상생활 가운데 묘사되는 영화라서 끝까지 앉아서 보는 일 자체가 감독이나 배우의 뛰어난 역량 없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즉 고통의 시간을 의미 있게 만들지 않는다면 관객은 보고 싶지 않은 장면으로 가득 찬 영화를 보기 위해 돈과 시간을 쓰는 수고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영화 <세 자매>는 어른으로 성장하여 각각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세 여성에 대한 개별적 이야기의 조합으로 보이지만, 결말에 가서 문제의 근원이 된 아버지로부터 폭력을 겪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공통된 과거의 기억을 복원한다는 점에서 관객이 끝까지 볼 수밖에 없는 영리한 구성방식을 취하고 있다.

 관객들이 보고 싶지 않은 장면들은 세 자매가 각각 겪는 현실을 통해 나타난다. 첫째 희숙(김선영)은 고스족 차림의 기괴한 스타일에 몰입한 채 자신을 무시하고 반항적인 태도를 지닌 딸아이와 살고 있다. 남편은 가끔씩 나타나 돈만 뜯어 가는 채권자 같은 존재로서 영화에는 단 한 장면에만 등장할 뿐이다. 암진단을 받았지만 자기의 잘못인 것 같아서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못한 채 그저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갈 뿐이다.

 둘째 미연(문소리)은 교수 남편을 두고 있고 본인은 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활동하며 겉으로는 가장 번듯한 생활을 하고 있다. 교회 생활에 열심이지만 남편이 같은 교회, 그것도 본인이 지휘하는 성가대 솔리스트인 여대생과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격한 뒤로는 더욱 자신의 속마음과 감정이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단속하느라 심한 내적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셋째, 미옥(장윤주)은 대학로 연극 작가로 활동하며 재혼인 남성과 결혼하여 살고 있지만 집필 작업이나 가정일 모두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술에 찌들어 살고 있다. 주변 사람들과 걸핏하면 시비가 붙고 아내나 엄마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도무지 대책이 서지 않는 삶을 술에 의지해서 살아갈 뿐이다.

 이 세 자매가 보여주는 일상은 관객 누구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인물과 사건들로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그 원인을 따라가는 과거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진짜 해서도 안 되고 당해서도 안 되는 부정적 경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폭력적인 아버지를 지켜보는 절묘한 타이밍

 영화 <세자매>와 정인이 사건이 교차하게 된 시점은 참으로 절묘하다. 16개월 된 입양아 정인이를 가혹하게 학대해 숨지게 한 사건을 관객들은 기억하면서 영화를 봐야 했으니 말이다. 특히 정인이의 양부모가 모두 기독교인이란 사실이 밝혀지면서 개신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노골화되고 있는 가운데 관객들은 영화관 밖의 현실과 영화 속 장면들이 허구가 아닌 사실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정인이의 양부모는 유명 기독교 대학 출신의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양부의 직업 또한 기독교방송국 직원인데다 정인이의 조부와 외조부 모두가 교회 목사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기독교인이 일으킨 반사회적 행동에 세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랑을 말하는 기독교인이 남도 아닌 자식에게 어찌 그럴 수 있느냐라는 사회적 분노가 공감대를 형성할 만큼 확산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세 자매는 아버지의 생일잔치를 위해 자신들이 성장한 고향마을에 들어선다. 변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옛 건물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에 고통받았던 과거를 떠올리게 된다. 어머니를 때리고 밖에서 바람피워 데려온 큰 언니와 막내 남동생에 대한 매질이 유난히 심했던 아버지는 지금 교회의 장로가 되어 있었다.

 영화는 과거의 전형적인 가부장주의적인 문화가 일반화된 상황에서 기독교인 가정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점은 영화에서 교회와 기독교 신앙생활의 적지 않은 부분이 배경으로 등장하지만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모습 또한 부조리함을 나타냄으로써 기독교를 비판하거나 폄훼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음을 확인시켜준다. 어린 시절 둘째와 셋째는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내복 바람으로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동네 가게로 피신하고 가게 안에 있던 손님들에게 경찰에 신고해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술 마시던 남자 손님으로부터 ‘아저씨가 쭈주바 사줄테니 그거 먹고 아버지한테 가서 잘못했다고 빌라’는 말을 들은 게 전부였다.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학대가 용인되고 상처 입은 아이들의 미래는 눈곱만치도 생각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가정폭력과 아동학대로부터 상처받은 인간이 성장 후에도 고통의 흔적을 갖고 살아가는 현실을 세밀히 묘사한 점과 그것이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사과와 용서 없이는 치유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은연중 드러낸 점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도록 나타나지 않던 막내아들은 끝 장면에 이르렀을 때 자신의 존재를 크게 부각시키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 아버지의 생일잔치 때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받은 학대의 곪은 상처가 결국 터지고 마는 것이다. 목사님이 초청되고 좋은 음식이 배열된 잔치 자리에서 막내아들은 아버지가 앉아 있는 식탁 위로 오줌을 싸는 바람에 난장판을 만들어 버리고 만다. 이쯤 되면 장로인 아버지는 문제의 심각성도 깨닫고 문제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도 깨달을 법도 하지만 아버지에게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목사를 초청한 자리에서 자식에게 망신당하고 체면이 구겼다는 당황한 표정만이 역력할 뿐이다.

 이제 이 영화의 명대사이자 성경적 관점에서 이 영화를 평가할 만한 가장 중요한 장면이 이어진다. 첫째 희숙의 골칫거리 딸의 입에서 터져 나온 한마디. “왜 어른들은 사과할 줄 모르는 거에요! 사과하세요!”

 

<세자매>는 기독교 영화가 될 뻔했다

어떤 영화들은 순간의 묘사만 잘했더라면 기독교 명작으로 남을 뻔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세자매>가 그렇다. 마지막 결정적 장면에서 성경적 관점이 드러난다면 이전의 모든 장면들은 새롭게 해석되는 가운데 기독교 영화라는 위치를 부여받을 수 있게 되었을 텐데 그렇지 못한 점이 너무 아쉽다.

 <세자매>에서 장로인 아버지는 사과하라는 외손녀의 말을 듣고 세 딸과 막내아들 앞에서 그동안 저지른 죄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면 어땠을까? 자신이 배움이 적고 신앙이 모자라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귀한 선물인 자식들을 때린 것에 대해 눈물로 회개했다면 이 영화의 판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담임목사가 지켜보고 있는 자리에서 생일잔치가 난장판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체면이 구겼다는 생각을 버리고 아버지로서 자식에 대한 사랑을 회복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면 너무 교화적이란 평가를 받았을까?

 어차피 <세자매>를 끌고 가는 힘의 중심에는 둘째 미연(문소리)이 있으며 영화는 미연의 신앙생활을 세밀히 묘사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교회 성가대 지휘자로서의 사회적인 생활에서부터 가정 일상사에서도 신앙의 권위를 결코 잃지 않는 모습은 상반된 평가를 받게 된다. 식사 기도를 하지 못하는 자녀에게 훈계하는 모습은 신앙의 권위를 내세운 폭언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밥상머리에서 신앙교육을 시키는 가정이 많지 않다는 점에서 꼭 부정적으로만 볼 수도 없다. 십일조 봉투를 챙기며 남편이 받은 특강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꼭 남편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여자로 볼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남편과 바람 핀 성가대원과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싸우기보다는 조용히 압박을 주어 일을 해결하려는 모습은 냉정한 태도일 뿐 위선적이라 말하기 어렵다. 다만 철야 기도회 자리에서 남편과 바람 핀 성가대원을 이불을 씌우고 발로 지긋이 밟는 행위는 부드러운 언행과 불일치를 이루며 이중적이란 평가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인의 이중적 행태는 폭력적인 아버지의 영향이라는 전제가 깔린다면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세자매>는 둘째 미연의 집들이 예배 상황과 아버지의 생일축하연을 영화의 앞과 뒤에 배치함으로써 기독교인이지만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둘째 딸에게서도 학습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난장판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생일파티에서 참고 참았던 아버지를 향한 분노를 쏟아내던 둘째 미연에게 셋째 미옥은 “언니 눈에서 아버지가 보인다”고 말한 것은 가부장적이며 권위주의적인 신앙인의 이중적인 태도가 자식에게까지 되물림 되어 나타날 수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남편의 내연녀를 대하는 미연의 모습은 개인의 특수한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보았을 때 결국 이 영화의 주제가 성경적 가치를 품고 있는 가의 여부가 이 영화의 성경적 가치를 판단하는데 핵심이 될 수 있다.

 장로인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용서를 비는 대신 유리창에 자신의 머리를 박고 피를 흘리는 것으로 마무리를 한다. 그것은 용서를 구하는 자의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자식을 잘못 키웠다는 자책에 가까운 행동일 수 있다.

 <세자매>는 단편적이나마 신앙인의 가정과 교회의 모습을 조명한다. 기독교 신앙인과 교회의 허물을 보여주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사실이 또한 그러하니 말이다. 그러나 문제의 해결방법은 달라야 한다. 단지 세 자매의 연대와 끈끈한 가족애가 문제해결 방법이 될수는 없다. 그것은 전형적인 휴머니즘 가족 드라마의 결말일 뿐이다. 기독교 영화의 상징적 특징은 완벽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죄와 문제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과 사랑 안에서 회개와 용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아버지가 세 자매에게 용서를 구하고 회개하는 가운데 가족의 연합을 도모했다면 우리는 훌륭한 기독교 영화의 탄생을 목격할 수 있었으리라.

 

강진구 교수.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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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리스도인 가정의 폭력과 내밀한 상처의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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