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11-24(화)
 

홍석진 목사.jpg

 최근 한 개그우먼의 마지막 모습이 우리를 안타깝게 했습니다. 고(故) 박지선 양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제대로 알 수 있다고 했던가요? 그녀가 몸담고 있던 영역을 넘어 각계각층이 진심으로 애도하는 장면들은 일면식도 없는 우리들까지 더 슬픔에 잠기게 만듭니다. 많은 이들의 증언이 이어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눈길이 가는 진술들이 있었습니다. 항상 모든 이들에게 깍듯했던 사람, 누군가를 비하하거나 심지어 자신마저도 깎아내리지 않으면서도 밝고 건강한 웃음을 선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람, 스텝들뿐만 아니라 경비 아저씨들에게도 90도로 허리 숙여 인사하던 심성 고운 사람, 명문대 출신이라는 사실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동료들과 책 나눔을 통해 기꺼이 자신이 가진 재능을 더불어 나누려고 노력했던 사람. 한 마디로 그녀는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좋은 사람을 품는 일이 이 세상에게는 너무 과분한 것 아닌가 하는.

 참 좋은 사람이었던 그녀는 햇볕 알레르기(allergy)라는 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피조물에게 힘이 되고 소망이 되는 빛이 어떻게 그녀에게만은 독이 되고 해가 될 수 있었을까요? 또한 항상 누군가를 즐겁게 하고 웃음을 안겨주는 일을 천직으로 삼았던 그녀에게 존재했던 그런 내밀한 애환을 다른 이들은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누구보다 극복의지를 가지고 무엇보다 낙천적인 마음가짐으로 대처하려 했던 그녀이기에, 결국 우리는 여러 가지 분석보다는 인간의 유한성을 절감하며 애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어떤 이유로도 설명할 길 없는 이런 일들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떠올리는 말이 있습니다. ‘피니툼 논 포시트 카파레 인피니툼(finitum non possit capare infinitum)’, 유한은 무한을 채울 수 없다(Augustine), 유한은 무한을 담을 수 없다(Calvin), 유한은 무한을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번역되는 라틴어 문장입니다.

 유한한 인생은 누구나 낙심할 수 있습니다. 낙심하는 이유는 천차만별이지만 모두가 인간의 유한성에서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구약성경 속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를 보십시오. 혁혁한 승리를 거두고서도 낙심한 엘리야는 남쪽으로 도피하다가 홀로 광야로 들어가 로뎀 나무 아래서 인생을 포기하기까지 이릅니다(왕상 19:4). 이후에 그는 동굴 속에 숨어서 그 이유를 묻는 신에게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제 자기 하나밖에 남지 않았는데 저들은 자신의 생명마저 빼앗으려 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가 깨달은 사실은 결코 사실이 아니었지요. 바로 뒤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자들을 칠천이나 남겨 두시리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어찌 자기 한 사람뿐이었겠으며,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보내시는 사명자인데 어찌 외인이 그 생명을 취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이 결코 엘리야의 무지나 경솔 때문만은 아닙니다. 도대체 유한한 인생이 어찌 무한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 때, 세미한 소리가 거듭해서 엘리야에게 들려왔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 19:9, 13) 범상한 물음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질문입니다. 히브리어로 ‘마레카’라는 앞부분은, 아담에게 처음으로 떨어졌던 질문 ‘아예카’(네가 어디 있느냐, 창 3:9)와 더불어 인생의 근원을 물어보는 신적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낙심한 인생은 엘리야만이 아닙니다. 욥도 예레미야도 심지어 자신의 태어남까지 저주하지 않았습니까?(욥 3장, 렘 20장) 우리가 때로 ‘유레카’를 외칠 때가 있습니다. 무언가를 발견하거나 획득했을 때의 외침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식과 능력을 초월한 무언가를 만날 때 인생은 낙심하고 절망하기 일쑤입니다. 그런 인생이 잊지 말아야 할 질문이 여기 있습니다. ‘아예카’ 그리고 ‘마레카’,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엘리야에게 아직 남은 일이 있었습니다. 가서 기름을 부어 시리아와 이스라엘 왕 그리고 후계자 엘리사를 세우는 위대한 사명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왜 거기 계십니까? 아직도 남은 사명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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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유레카, 아예카, 마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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