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11-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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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대표하는 목회자로 널리 알려진 한경직(1902-2000) 목사는 목회와 구제 혹은 목회와 사회사업, 두 가지 영역에서 헌신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02년 평안남도 평원(平原) 출신인 그는 오산학교(1919), 평양 숭실(1925)을 거쳐 미국으로 가 엠포리아 대학(1926)을 거쳐 프린스톤신학교(1929)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1932년 평양숭인학교 교사 겸 숭실전문에서 강사로 일하던 중 1933년 신의주 제2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이듬해 의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런데 1939년에는 고아나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시설인 보린원(保隣園)이라는 사회복지시설을 설립하였다. 처음부터 이런 시설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으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김복순 이라는 8살의 장애 아이를 돌봐야 했기에 고아원을 설립하게 되었는데, 보린이란 이름 그대로 이웃(隣)을 보살핀다(保)는 뜻이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사회 복지 사업이었다. 해방 후 북한에서 기독교 정당을 창당하는 등 건국운동에 참여하려 했으나 공산정권의 탄압에서 신앙생활조차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1945년 10월 월남하여 서울에 정착했다. 12월 2일에는 베다니교회를 설립했는데 지금의 영락교회의 시작이었다. 곧 그는 신의주에 두고 온 보린원을 잊지 못해 서울 충무로에서 10여명의 고아들을 모아 다시 보린원을 시작하였다. 한경직 목사는 학교를 설립하거나 북한의 숭실대학을 서울에 재건하는 등 여러 선한 사업에 관여하였으나 그는 두 가지 일, 곧 복음전도와 구제에 온 힘을 쏟았다. 그래서 그는 복음과 빵을 동시에 제공하고자 했다.

해방 당시 서울에서 대표적인 목회자는 한경직과 김치선이었는데, 한경직은 한손에는 복음을 다른 손에는 빵을 들고 일했으나, 김치선은 그렇지 않았다. 오직 복음만을 외치며 300만구령운동을 시작했다. 이것이 해방 후 첫 민족복음화 운동이었다. 해방 후 1949년 밥 피어스(Bob Pierce, 1914-1978) 목사가 내한하여 한경직과 김치선 두 사람과 접촉하고, 9월에는 김치선의 남대문교회에서 집회하기도 했으나 피어스 목사가 한경직과 협력하게 된 것은 한경직은 두 가지 일에 관심을 표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경직과 피어스는 앞에서 소개한 바처럼 공동으로 한국선명회라는 단체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한경직은 피어스와 협력하면서 여러 사회 복지기관 설립에 관여하였는데, 그 중 중 하나가 ‘다비다 모자원’의 설립이었다. 이 모자원이 서울에서 시작된 것으로 아는 데 사실은 이 모자원은 전란 중인 1951년 부산에서 시작되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을 사수하고자 했던 한경직 목사는 피란길에 올라 수원을 거쳐 대전으로 그리고 대구로 갔고 다시 부산으로 왔다. 9월에는 부산 중앙교회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다. 이 때 피어스 목사를 다시 만났고 이런 연유로 피어스는 피난민과 전재민들에게 많은 도움을 베풀었다. 그런데 한경직은 1951년 부산에서 피난해 온 영락교회 교인들을 주심으로 1월 7일 광복동의 고려신학교 강당에서 30여명이 모여 부산영락교회를 설립했다. 14일 주일에는 대청동의 고아원인 ‘새들원’ 강당에서 모이면서 교인수는 점점 증가해 갔다. 이런 와중에서 서울의 보린원도 부산으로 옮겨 부산을 본원으로 하고 제주도에는 분원을 두기로 했고, 특히 새로운 사회복지 시설을 설립했는데 그것이 ‘다비다 모자원’이었다. 전란을 피해 부산으로 온 살길이 막막한 전쟁미망인과 그 자녀들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이를 위해 이사회를 구성했는데, 한경직 목사를 이사장으로, 이사로는 고한규 백영엽 원석화 이경화 이순경 이응화 정용태 최중해였고, 감사는 김행경 윤치호였다. 이 다비다 모자원이 시작된 곳이 지금의 서대신동인 구덕교회에서 구덕산쪽으로 약간 올라가 비탈진 곳에서 시작되었다. 이 모자원은 22명의 전쟁 미망인과 82명의 고아들을 데리고 시작되었는데, 이 사역을 지원해 준 이가 피어스 목사였다. 모자원의 대지는 부산시에서 제공하고, 천막은 군대에서 제공해 주었다. 그 외의 필요한 경비는 피어스 목사가 제공했는데, 미화 700백 달러를 제공해 주었다. ‘다비다 모자원’의 다비다는 사도행전 9장 36절에서 언급된 “선행과 구제하는 일에 힘썼던” 인물의 이름이다. 다비다는 아람어식 이름인데 이를 히브리어로 말하면 도르가인데, 이름의 뜻은 ‘눈이 아름다운 양(羊)’이란 뜻이다. 이 모자원에서 처음으로 보호받은 여성인 30세의 백옥현과 어린 4딸이었다. 백옥현의 남편 김창화(1915-1950) 집사는 평북 의주출신으로 선천의 신성중학교, 평양사법에서 수학하고 교사로 일하던 중 1946년 3월 월남했고, 서울사도부속중학교 수학교사로 일하던 중 6.25 전쟁 발발 후 서울에서 인인재판 끝에 총살된 진실된 믿음의 사람이었다. 29세에 남편을 잃은 부인은 부산으로 피난 와 다비다 모자원에서 보호받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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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한경직과 다비다 모자원 부산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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