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11-25(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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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면서 화내는 법을 아는 영화

20세기가 저물고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하면서 유럽의 영화전문가들은 지난 한 세기를 빛낸 영화를 꼽기 시작했다. 영화의 역사가 1895년 12월에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인 만큼 이제 막 100년을 넘긴 영화의 여정에서 한 세기를 빛낸 영화를 뽑는 일은 곧 세상 최고의 영화를 뜻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최고의 영예는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Modern Times, 1936)에게 돌아갔다. 나중에 채플린의 세 번째 부인이 된 여배우 플레트 고다르(Paulette Goddard)와 함께 열연한 <모던 타임즈>는 채플린의 사회 비판적 시각과 인간애 그리고 예술성이 코미디라는 장르 안에서 적절한 조화를 이룬 완벽한 작품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커다란 톱니바퀴 속으로 들어가 나사를 조이는 주인공의 모습으로도 유명한 이 영화는 대공황기를 거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노동자와 기계의 부속품처럼 전락한 인간의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현대문명을 비판한 영화로 널리 알려졌다. 이 때문에 찰리 채플린은 사회주의자로 몰렸고 매카시즘( (McCarthyism)의 희생자가 되어 한동안 미국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인뿐만 아니라 당시 소련을 포함한 전세계인들은 그의 영화에 열광했고 현대 기계문명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어떠한 위기에 처할 수 있는지를 깨닫는 한편 주인공이 걷는 희망의 길에서 위로받을 수 있었다.

 우리가 찰리 채플린과 <모던 타임즈>에 주목하는 것은 그의 뛰어난 사회문제 제기 능력 때문이다. 이기적인 부자와 절망스러울 만큼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인간을 기계 부속품처럼 취급하는 심각한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전혀 거부감없이 스크린에 올려놓을 뿐만 아니라 유쾌하고 재미있는 코미디적 발상을 통해 관객들을 몰입시키고 영화가 끝난 후에는 문제를 성찰케 하는 그의 뛰어난 영화 제작 기술은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이종필 감독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오랜만에 만나는 사회비판 의식을 갖춘 코미디 영화로써 만일 찰리 채플린이 한국에 태어났다면 다뤘을 법한 내용과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여상 출신의 고졸 여사원에 대한 심각한 인사차별과 대기업 공장에서 독극물을 방류하는 바람에 피부병에 시달리는 마을 사람들, 그리고 한국기업을 헐값에 사들여 비싸게 되팔려는 다국적 투자회사의 횡포 등은 <모던 타임즈>에는 없지만 현대사회의 약소국 국민들이라면 경험했을 만한 심각한 내용들을 코믹하게 다루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웃으면서 화를 낼 줄도 아는 이중 커뮤니케이션의 화법을 구사할 줄 아는 능력을 말한다. 엄청 화를 낼 일임에도 불구하고 목청 높이고 핏대 울리면서 싸우지 않고 웃으면서 유쾌하게 관객에게 문제를 각인시키며 자신과 사회를 돌아보게 만들 수 있다면 채플린이 좋아할 만한 영화가 아닐까?

 

영어토익반 상고 졸업 여사원들의 빛나는 연대의식

IMF가 오기 전인 1995년, 대기업 삼진그룹에서 일하는 여상(女商) 출신의 입사 8년 차인 이자영(고아성)은 탁월한 업무 능력에도 불구하고 입사 동기인 정유나(이솜), 심보람(박혜수)과 함께 잔심부름과 인스턴트커피 타기의 달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고졸 사원이란 이유만으로 근무복을 입히고 승진에 차별을 두고 있는 회사는 마침내 여상 졸업 사원들에게 토익 600점을 넘기면 대리로 승진시킨다는 새로운 지침을 발표한다. 회사 내 여상 출신들이 강의실을 가득 채우며 토익 공부에 매진할 무렵 이자영은 회사 임원의 물건을 정리하러 간 공장에서 페놀을 방출하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회사에 보고를 하고 시정조치를 지켜보면서 지영은 페놀 방류가 사고가 아닌 회사의 의도적이란 사실에 심증을 굳히면서 유나와 보람과 함께 결정적 증거를 찾기 위한 탐색을 시작한다.

 이야기의 전개 상황을 보면 영화는 대기업의 환경오염 실태를 사회에 알리는 전형적인 내부 고발의 형식을 갖고 있다. 회사는 페놀을 무단 방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민에게는 마치 건강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적당히 보상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으려 한다.

 여기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할리우드 영화가 내부고발자를 다루는 방식과 다른 점이 발견할 수 있다. 미국 국방부 정보기관 NSA 직원 에드워드 스노든을 내세워 NSA가 각국 정상들에서 민간인에 이르기까지 통신 감청 시스템 프리즘(PRISM)을 사용해 감시하고 있음을 밝힌 사건을 그린 영화 <스노든>(2017)에서 주인공들은 매우 큰 갈등과 회유, 압박 등을 견디며 숨겨진 진실을 밝히는데 온 힘을 쏟는 모양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주인공들은 다르다. 자신이 속한 회사가 건강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하는 페놀을 유출했다는 사실을 언론에 알리기 위해 노심초사하거나 심각한 심리적 갈등을 스크린 위에 펼치기보다는 영어토익을 함께 공부하는 고졸 여직원들이 힘을 모아 진실을 밝히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즉 그것은 위기의 상황에 대처하는 한국인의 연대의식이 할리우드와는 다르게 이 영화를 가치 있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영어토익반의 고졸 여사원들은 페놀 방류사건의 뒤에 다국적 투자회사가 기업가치를 떨어트린 뒤에 헐값에 매수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밝히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영어를 못하는 바람에 영어를 배우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영어토익반 여사원들은 엄청난 분량의 영어 서류들을 나누어 번역하면서 기업매각의 증거들을 찾아낸다.

 회사에서 가장 힘없고 급여도 적으며 남성 상사들의 편견에 시달려 온 고졸 여사원들이 궁극적으로 기업사냥꾼의 손에 회사가 넘어가지 못하도록 막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한국인들이 연대의식을 통해 나라를 구한 역사에 대한 은유처럼 보인다.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운 의병들이나 외세의 칩입에 항거한 동학농민들, 6.25 때의 학도병들과 4.19혁명 당시의 어린 학생들이 대거 참가한 일 등은 우리 민족이 약자의 연대를 통해 역사의 위기를 극복해왔음을 보여준다. 특히 약자의 연대는 강자의 일방적 횡포를 멈추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코로나 시대의 건강한 영화를 마주하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건강한 영화다. 약간의 욕설과 호프집 장면이 나오는 바람에 12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았지만 부조리한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성장을 위해 노력하며 불의한 일에 항거하는 용기있는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어서 나이 어린 사람에게조차 기독교의 선한 가치관을 제공해줄 수 있다.

 첫째, 약자와 병자를 향한 감정이입에 성공한 주인공의 모습에서 우리는 육체적 건강의 가치가 공유되어야 함을 느낄 수 있다. 공장에서 방류된 페놀로 인해 마을 주민들이 피부병과 괴질 그리고 흉작의 고통 속에 있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 이자영의 캐릭터는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성격의 원형과도 같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5)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마음을 얻는 비결이다. 갈등의 사회에서 고소와 고발, 폭력사태에 이르지 않는 비결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로마서 12장 5절을 실천하는 일이다. 감정의 공유는 마음을 하나로 만들고 문제의 원인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 해결점을 쉽게 찾을 수 있게 만든다.

 영화 속 이자영은 회사의 말단 사원으로 회사가 시키는 대로 오염에 따른 마을 주민들의 실태를 파악을 하고 보고하는 것으로 끝나면 되지만 주민들의 끝나지 않은 고통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주민의 고통이 자신의 마음에 와닿는 감정이입을 이루었던 까닭이다.

 둘째, 상고출신의 여사원이라는 신분에 따른 차별을 극복하려는 사회적 건강이 영화 속에 존재한다. 고졸 사원들은 남들보다 일찌감치 사무실에 출근하여 청소하는 것으로 하루 일을 시작한다. 담배꽁초가 가득한 재떨이를 비우거나 상사의 담배 심부름도 그들의 몫이다. 대졸사원과 구분하기 위해 그들만의 유니폼을 입고 10년을 일해도 대리 승진을 할 수 없는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토익공부에 나서기도 한다. 영화의 배경이 1995년이라서 가능한 일일까? 그렇지 않다. 2020년의 현실에서도 적용되는 사항이다.

 성경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신앙 안에서 인종 간의 차이도 남녀 성별의 차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교회는 현실에 존재하는 집단 가운데 사회적으로 가장 건강한 집단이 되어야 한다.

 셋째, 불의(不義) 앞에서 오래 고민하지 않고 용기를 갖고 도전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정신적 건강이 어떤 것인지 영화는 보여준다. 학력이 정신적 건강을 담보하지는 못한다. 사회생활에서 정신적으로 건강함 사람의 특징은 자기 분야에 전문적 지식을 갖고 도덕적 행동을 통해 남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다.

 영화 속에서 이자영은 커피만 잘 타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속한 생산관리 3부의 서류철을 꿰뚫고 있다. 정유나는 자존감 높은 달변가로서 마케팅에 필요한 문구를 만드는데 재능을 발휘한다. 그리고 영화 속 3총사의 마지막 심보람은 비록 가짜 영수증을 메꾸는 회계부에서 일하지만 수학 올림피아드 우승에 빛나는 실력을 갖고 아무도 회계부정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영수증 처리 자동화 시스템을 계획하고 있다.

 이 세 사람의 행동에 전문성이 돋보이는 한편으로 불의가 없고 도덕이 더 해질 때 사회적 두려움은 사라지고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에 이르게 됨을 볼 수 있다.

 넷째 영적인 건강은 관객의 몫이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세상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접촉점으로 훌륭하다. 그런데 영화 속 주인공들의 행동 속에는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공유하는 것들이 제법 많다. 그들과 함께 영화를 보며 영화의 배경에 나타난 사회의 문제들이 기독교 안에서 잘 해결되고 있음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교리공부는이해되기 어렵지만,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신분의 차별을 극복하는 일이나 연약한 자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지혜를 따라 연대활동을 하거나 불의한 권력자와 맞서는 일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강진구 교수.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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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약자의 연대가 만든 성장과 정의를 바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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