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9-25(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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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에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운동장에서 전교생이 모여 조회를 했습니다. 애국가와 교가를 불렀고, 교장선생님의 훈시를 들었습니다. 조회를 위해서는 줄을 서야 했는데, 가장 가운데, 혹은 오른쪽 끝 맨 앞 학생이 손을 들고 <기준!>이라고 외치면, 그 학생을 기준으로 일정 간격을 벌려 줄을 섭니다.

 인생에도 기준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소설 <성의>의 작가인 <로이드 C. 더글라스, 1877-1951>가 학생 기숙사에 살 때, 아래층에 은퇴한 음악교수가 살았습니다. 그 교수는 휠체어를 의지하고 살았는데, 아침에 인사를 나눌 때마다 휠체어를 두드리면서 <기본음은 도야!>라고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기본음은 도야. 위층 테너는 소리가 쳐지고, 건너편 피아니스트의 피아노는 조율도 제대로 안 되어 있어. 어제도 기본음은 도고, 오늘도 그렇고, 천 년 후에도 기본음은 도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성도에게 기본음 도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기본음을 잘 알고 살았던 모델을 시편 1편에서 만납니다. 그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 사람 저 사람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본문 1절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그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미 그에게는 확고한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그는 <노!, No!>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의 기준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율법, 말씀입니다. 2절을 보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2절의 <오직>, <주야로> 등의 표현은 그에게는 이미 다른 타협의 여지가 없음을 보여 줍니다. 이미 그는 뜻을 정했습니다. 그가 갈 길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길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다른 유혹들에 대하여 거부를 선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기준 없이 흔들렸던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르호보암은 왕이 될 무렵 원로대신들의 충고와 젊은 동료들의 충고 사이에서 번민했습니다. 그에게 기준이 없었으므로, 그는 결국 젊은 동료들의 충고를 따랐고, 그 결과 열 지파를 여로보암에게 내 주는 비극적 결과를 가져왔고, 나라가 분열되었습니다. 르호보암에게는 그런 말씀의 기본이 없었기에 동료들의 말에 흔들린 것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온 세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교회는 공공성 논쟁에 휘말리고 있습니다. 절대다수의 교회가 당국의 방침에 따라 방역을 하고, 온라인 예배로 전환했음에도 비난이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자 교계에서는 비난을 줄이고,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방역 물품을 후원하거나, 수련원 등을 격리 내지 치료 시설로 제공하고, 생필품 세트를 준비하여 어려운 이웃에게 전달하고, 교회 주변의 시장이나 상가를 대상으로 물건 사주기 운동을 벌이는 등의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아쉽게 여기는 점은 이 모든 것이 소위 공공성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현 정부는 ‘공공’이란 개념을 정책의 여러 분야에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공공의 목적, 공공의 이익을 위해 정책을 수립합니다. 부동산 정책, 의료 정책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사회를 섬기는 일은 마땅하지만, 공공성 때문에 섬긴다면 문제입니다. 교회는 공공성 때문에 억지로 섬겨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공공성이라는 이념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서야 합니다. 행동의 근거를 세상 논리가 아닌 말씀에서 찾아야 합니다. 교회는 단순한 사회 구성원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공동체이므로, 우리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말씀에 입각해야 합니다. 이데올로기를 위해 봉사하는 교회가 아니라, 말씀에 수종드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직 말씀만이 기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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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우리의 기준, 하나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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