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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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일정을 마친 빌리 그래함은 12월 19일, 금요일 대구로 갔고, 선교부가 운영하는 병원과 고아원을 둘러보고 저녁에는 전도집회를 열었다. 그 때 포장되지 않는 진흙길, 눈이 녹은 후 질퍽한 길을 돌아 한 고아원에 갔을 때 한 눈먼 아이가 “예수사랑하심”을 불렀는데, 빌리 그래함은 그 때의 감격을 잊을 수 없었다고 후일 회고했다. 20일 서울로 이동한 그는 25일까지 바쁜 일정을 보냈다. 12월 21일 주일에는 영락교회에서 설교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난방 장치가 없던 그 교회는 아이스박스만큼이나 추웠으나 집회 인원은 1,400명에 달했다고 한다. 빌리 그래함은 군용 헬리콥터를 타고 서부전선 중부전선 동부전선에 있는 부대장병을 위한 집회를 인도했는데 장병 7천명이 참석했고, 1천여 명의 장병들이 예수를 영접했다고 한다. 서울 충무로에서의 대중 집회도 했고, 미8군 사령과 밴 플리트(van Fleet, 1892-1992) 장군과도 면담했다. 맥아더 장군이 해임됨에 따라 미 8군 사령관이었던 릿지웨이 장군이 UN군 총사령관이 되자, 밴 프리트는 릿지웨이의 후임으로 미 8군 사령관이 된 것이다. 그는 위대한 장군이었다. 12월 25일에는 군 장병들에게 두 차례의 설교를 했고 그들과 같이 식사했다. 그 후에는 경무대로 찾아가 이승만 대통령과 면담했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이 때의 대담 내용과 전도집회 설교가 담긴 음반(Record)이 1953년 초 발매되었다. 그의 설교가 담긴 음반의 제목이 ‘자유가 울리게 하라 Let Freedom Ring’였다.

빌리 그래함이 한국에 체류한 두 주간 동안 통역한 이가 한경직 목사였다. 이 일로 한경직 목사는 그래함 목사와 깊이 교류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이듬해 5월 18일 미국을 방문하고 40여 일 간 체류하며 각지를 순회하며 한국의 실상을 소개하고 도움을 청했다. 이를 주선한 이가 빌리 그래함이었다. 한국에서 보낸 두 주간은 그에게 소중한 기간이었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너무도 많은 비참한 전쟁의 참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지난 30년 동안 흘린 눈물 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 나 자신이 어린아이로 한국에 왔다가 성인이 되어 돌아가는 기분”이라고 했다. 전쟁의 아픔을 더 깊이 알게 되었고, 한국에서의 집회 경험이 자신을 더욱 성숙한 목사로 키워주었다고 회상한 것이다.

여기서 한국에 6.25 전후 한국과 관련하여 그리고 한국에 체류하면서 선포했던 빌리 그래함의 설교가 어떠했던가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한마디로 빌리 그래함의 설교는 강력한 반공설교였다. 제2차 대전 후 냉전체제에서 미국은 민주주의, 자본주의, 기독교를 전 세계로 수출하는 반면,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통제경제, 공산혁명을 수출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미국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소련 공산주의를 사탄적인 악의 세력으로 간주하여 영적 전쟁을 선포했는데 이 일에 앞장 선 인물이 빌리 그래함이었다. 이런 그의 입장이 6.25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에 대한 설교에서 분명히 나타났다. 그는 정기적인 '결단의 시간'(Hour of Decision)이라는 방송 설교를 했는데, 1951년 9월 결단의 시간 설교에서 한국전쟁은 미국과 영국이 포츠담과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에게 너무 많이 양보한 결과라고 비판했다. 소련군의 북한 지주를 허용한 결과가 전쟁으로 발전했다고 본 것이다. 즉 소련은 불과 5일간 참전하여 일본과 싸우고 북한에 진주하여 공산정권을 수립한 결과로 전쟁이 일어났다고 본 것이다.

빌리 그래함은 동서 냉전을 아메리칸 메시아니즘(American Messianism)과 소련 메시아니즘(Soviet Messianism)의 대결로 인식했다. 아메리칸 메시아니즘이란 청교도 목사 존 윈드롭(John Winthrop)의 ‘산 위의 도시’ 이념에 근거하여 미국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고, 선민으로서 미국은 세계를 구원할 사명이 있다는 미국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반면, 소련 메시아니즘은 세계를 자본주의의 악과 모순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공산혁명을 전파하려는 이념이었다. 이런 소련 메시아니즘, 곧 공산주의를 반기독교, 반자본주의, 반미주의(anti-Christianity, anti-Capitalism, anti-Americanism)라고 보았다. 그래서 빌리 그래함의 설교는 처음부터 반공주의적이었다. 그는 6.25 전쟁은 이데올로기 전쟁인 동시에 공산주의에 대한 영적 전쟁으로 보았다. 그는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을 지지했고, 소련의 휴전 제의를 공산주의자들의 노림수로 이해했다. 빌리 그래함의 반공주의 메시지가 미국 지도자들의 대한 정책에도 영향을 주었고, 그것이 결국 한국의 공산주의를 막는데 일조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빌리 그래함의 두 번째 한국 집회가 1956년 2월이었고, 세 번째 집회는 1973년 5월에 있었던 여의도 집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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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빌리그래함 목사의 부산에서의 집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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