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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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봉(梁聖奉, 1900-1963) 장로는 6.25 전쟁기 부산과 경남지방 행정관료였다. 1949년 12월 제4대 경남도지사로 임명된 그는 1953년 10월까지 3년 11개월 동안 경남도지사로 활동했다. 말하자면 양성봉은 6.25 전쟁기 피난수도 부산의 지도자였고 전쟁기 부산경남지방 행정의 중심에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역할이 어떠했는가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양성봉은 1900년 2월 8일 부산시 좌천동 224번지에서 양덕유(梁德有)와 한모악(韓母岳, 후일 한영일 韓永日, 혹은 남편의 성을 따라 양영일로 불리기도 함)의 10녀 1남 중 여섯 번째로 태어난 외동아들이었다. 위로 누나 다섯(수혜, 한라)과 아래로 여동생 다섯(봉옥, 순옥)이 있었다. 양성봉의 부모는 부산진교회 초기 신자로 1901년 2월 10일 왕길지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모태신앙인으로 출생한 양성봉은 부모를 따라 부산진교회에서 성장했으나 4살 때인 1904년 11월 30일 부모를 따라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가 2년 뒤인 1906년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그후 부산진공립보통학교에서 공부한 후 부산상업학교(현 개성고등학교)에 진학하여 1917년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부산철도국 서무과에 취직하여 일하기도 했고, 울주군 서생면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부산으로 돌아 온 후에는 어을빈(Charles Irvin, 魚乙彬)의 제약회사에서 일하게 된다. 그러든 중 해방을 맞았고, 1945년 8월 17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상남도지부 발기 총회에 참여하고, 문화 외교부장을 맡았다. 미군정이 실시되자 1945년 10월 10일에는 부산부 총무과장(주사)으로 발탁되었다. 45일 만인 그해 11월 26일에는 부산시 부윤(府尹), 곧 부시장에 취임했다. 그의 영어 실력도 고려되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2개월 후인 1946년 1월 24일에는 제1대 부산시장에 취임하여 미군정이 끝난 후인 1948년 11월 6일까지 2년 10개월간 재임했다. 시장 재임기에 중립국 감시단의 인도인 메논 단장과 중국의 유어만(劉御萬) 사무총장 등 20여명을 부산으로 초청하여 동래별장에서 극진하게 대접하는 등 외교수완을 발휘하여 남한만의 총선거를 유도하는 등의 업적으로 이승만의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기독교 신자로서 성실하고 정직한 시정을 이끌었던 그는 1949년 6월 17 관선 제2대 강원도지사로 임명되어 5개월간 일하고 그해 11월 15일 물러났으나 12월에는 제4대 경남도지사가 되었다. 그로부터 7개월 후 6.25전쟁이 일어났다. 약 두 달이 지난 1950년 8월 18일부터 부산은 임시수도가 되는데 이때부터 휴전 협정 체결로 환도할 때까지 2년 10개월7일간 임시수도였다.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자 경남도지사인 양성봉 장로는 도지사 관사를 대통령 관저로 내어주고 자신은 부산 초량의 본가로 돌아와 대통령을 보위하였고, 그가 장로로 있던 초량교회는 피난민 구호에 앞장섰다. 이런 일로 초량교회는 전국적으로 이름을 높였고, 1951년 4월 29일 주일에는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초량교회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양성봉 지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고, 환도 직후인 1953년 10월에는 농림부장관에 취임하였다.

 

그런데, 전쟁기 양성봉 지사는 민생과 민심 수숩을 제일의 과제로 여기고 피난민 구호를 위해 크게 헌신했다고 한다. 전쟁 전 부산시 인구는 47만여 명이었는데, 개전 50여일이 지난 8월 10일에는 68만3천명으로, 1951년 2월 10일 실시된 부산시 인구는 89만명이었다. 피난민이 40만 명에 달했고, 부산에 포로수용소까지 설치되어 인구 포화상태였다. 급격한 인구 증가에 따른 주택 식량 전기 식수문제만이 아니라 공중위생 문제, 쓰레기 처리문제와 교통문제가 발생했다. 주택 상황이 심각했는데, 수용시설 외에도 1953년 7월 4일 현재 판자집이 28,619호에 달했는데, 영주동 산기슭에 1,000호, 영도대교 인근에 약 700호, 보수동에 약 600호, 송도에 약 300호, 국제시장에 약 1,200호였다고 한다.

 

이런 상태에서 양성봉 지사는 피난민 대책에 행정력을 집중했고, 생존의 문제가 시급했으므로 특히 구호사업에 큰 관심을 가지고 외원 기관의 협조를 얻었다. 이 과정에서 부인 문복숙과 누이 양한라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그는 재임 중에도 검소하게 살고 청렴하고 결백한 도백이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그는 청계(淸溪)라는 아호처럼 계곡의 푸른 물처럼 살았는데, 이것은 자신이 교회 장로라는 자각이 컸기 때문이라고 한다. 임시정부가 환도한 후 1953년 10월 농림부 장관이 되어 서울로 올라갔고, 1954년 6월 장관직을 물러난 뒤에는 정원과 온실을 갖춘 초량의 옛집에 살며 부산YMCA, 향토문화연구회, 부산로타리클럽 등에 관여하며 지내 던 중 1963년 6월 3일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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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경남도지시 양성봉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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