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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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부산에 거주하게 되고 주일에는 보통 미8군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안전을 위한 조치였다. 그런데 그가 부산 초량교회를 방문한 일과 그 때의 사진은 널리 회자된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피난하여 부산에 도착한 날은 1950년 7월 2일 새벽이었다. 일행은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비롯하여 공보처장 이철원(李哲源), 비서 황규면(黃圭冕), 경무대 서장(지금의 경호실장) 김장흥(金長興)등 5명이었다. 사실은 이때부터 부산은 임시수도였고, 경남도지사 관사가 대통령의 관저가 된다. 부산 천도가 공식화된 것은 이 대통령이 부산에 온지 50여일이 지난 8월 18일이었다.

여기서 이 대통령의 서울 철수 이후의 이동에 대해 좀 더 부기해 두고자 한다. 이 대통령이 서울을 떠난 날은 6월 27일이었다. 전세가 악화되자 신성모 국방장관, 이기붕 서울시장, 조병옥 박사 등의 간곡한 건의에 따라 이날 새벽 3시 용산역에 대기 중인 특별열차로 남쪽으로 향했다. 사실 이대통령은 국방장관의 건의를 받고도 서울 사수를 고집하며 떠날 수 없다고 외쳤으나 적의 탱크가 청량리까지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고(이 보고는 사실이 아니었다) 참모의 뜻을 따랐다. 참모들의 입장에서 볼 때 대통령이 서울을 사수하다가 북한군에 생포되거나 사망하여 유고가 된다면 최악의 사태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에 탈출을 건의한 것이다. 서울을 떠난 대통령은 대구에 도착했는데, 전황을 보고받고 보니 너무 일찍 서울을 떠난 것 같아 다시 서울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수행원들의 반대로 대전까지 북상하여 그날 5시에 도청에 자리 잡았다. 그런데 전세가 불리하게 전개되자 무쵸 미국 대사는 대통령에게 대전 탈출을 건의했다. 이때에도 대통령은 물론 부인까지도 ‘도망치기 보다는 대전에서 죽겠다’고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미군이 대전 북방에서 북한군을 저지해야 한다는 의사의 표시였다. 그러나 경북가도는 미군보급로로 사용될 예정이므로 전라도를 거쳐 목포에서 해로로 부산으로 가야 한다는 충고를 받고 7월 1일 새벽에 대전을 떠났고, 이리(익산)에서 특별열차 편으로 목포를 거쳐 그 다음날 진해에 도착했다. 곧 부산으로 이동했고, 일정기간 부산에 체류하게 된다.

그가 부산에 체류하는 기간 주로 미8군 교회당으로 가 예배를 드렸으나, 전화에 지친 피난민들을 만나고 격려해 주는 것이 좋겠다는 양성봉 경남지사의 건의에 따라 1951년 4월 29일 주일 낮예배 때는 부산시 동구 초량동의 초량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양성봉 장로는 이 교회 시무 장로였기에 초량교회로 모시고 온 것이다. 이 때의 담임목사는 한상동 목사였는데, 대통령의 예배 참석을 사전 통보 받은 한상동 목사는 신명기 11장 서두를 본문으로 설교했다.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가 주신 책무와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 너희의 자녀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였으나 너희가 오늘날 기억할 것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교훈과 그의 위엄과 그의 강한 손과 펴신 팔과 애굽에서 그 왕 바로와 그 전국에 행하신 이적과 기사와 또 여호와께서 애굽 군대와 그 말과 그 병거에 행하신 일 곧 그들이 너희르 ㄹ뒤쫓을 때에 홍해 물로 그들을 덮어 멸하사 오늘까지 이른 것과 또 너희가 이 곳에 이르기까지 광야에서 너희에게 행하신 일과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에게 하신 일 곧 땅이 입을 벌려서 그들과 그들의 가족과 그들의 장막과 그들을 따르는 온 이스라엘의 한가운데에서 모든 것을 삼키게 하신 일이라. 너희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이 모든 큰일을 너희의 눈으로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할 것이며,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이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한상동 목사가 즐겨 봉독하던 본문이었다. 이 본문을 읽은 후 하나님 여호와의 법도와 규례를 지킬 때 축복을 받고 나라가 강성해지며 전쟁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내용으로 설교했다. 이날의 기도는 더욱 간절했다. 이날 예배를 폐한 후 이 대통령은 담임목사의 안내를 따라 인사하게 되었는데 강단으로 올라가려 하자 한상동 목사는 ‘아래 강단에서 인사하십시오.’ 라는 말을 듣고 아래 강단에서 인사했다고 한다. 이날 목격자의 증언에 따라면 대통령은 한상동 목사를 힐끗 쳐다보고 아래 강단에서 짧은 인사를 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그 이후 한 번 더 초량교회 예배에 참석했는데 이때는 1953년 6월 7일이었다. 대통령의 출석 소문을 들은 피난민들이 몰려와 의자를 정리하고 예배당에 입장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확성기를 설치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약 10일 후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했다. 큰일을 앞두고 초량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자신의 결의를 다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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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이승만 대통령과 초량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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