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7-10(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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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편지 한통을 받았다. “목사님과 함께 한 세월이 26년이 되어갑니다. 내가 포항중앙교회에 가족이 된 것이 행복했고, 아팠고, 다시금 축복이라는 꿈을 키우면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략) 26년 동안 저는 하나님이 목사님과 함께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목사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심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세월도 26년이 되어 갑니다.” 잠간 눈을 감고 돌아보니 뚜렷하게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사람인데 빛바랜 교회요람을 펼쳐놓고 사진을 찾아보면서 어렴풋 누군지 생각이 났다. 포항에서 생활한 20년은 항상 행복했다. 포항을 떠나서 생활하는 지금도 나는 여전히 행복한 하루를 열고 닫는다. 그러면서도 늘 포항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속일 수 없다.

 은퇴한 지금도 전국 방방곡곡 52주일 말씀 사역을 하면서 변함없는 메시지이지만 담임목사로 시무할 때 언제나 53만 시민들이 포항중앙교회를 어떻게 볼까? 그것을 강조했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포항중앙교회를 어떻게 볼까? 그것을 강조했다. 그러기에 내면에는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라는 복음의 생활이 연주되었고 그래서 교회는 사도행전 2:47절 말씀처럼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면서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하는 교회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을 떨쳐버리지 못한 것 하나가 요한복음 13:2절이었다. 그래서 늘 다윗이 고백한 시편 51:10~11절을 강조했던 것이고, 주님이 말씀하신 ‘교회는 산위의 동네요 등경위의 등불’이라는 말씀을 거울처럼 역사에 세워놓는 목회를 했던 것이다.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주님이 피를 흘려 세우신 교회를 어둡게 하는 일이 지상교회에서는 종종 보아왔기 때문이리라.

 어버이 날, 스승의 날을 보내던 5월 어느 날, 지금은 담임목회를 하지만 부목사로 함께 동역하던 목사가 문안을 왔다. 커피 한 잔 앞에 놓고 눈시울을 붉히면서 건넨 추억담 한마디가 내 가슴을 적셨다. “언젠가 교역자 주례모임에서 교훈하신 말씀을 평생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 때 그 신선한 충격과 감동 때문에 지금도 최선을 다하여 凩會가 아닌 牧會를 위한 牧者의 걸음을 걷고자 합니다.” 아들 같은 목사의 손을 잡고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지만 수천만 마디 대화가 오갔다. 공감이란, 말은 쉽지만 느낌은 쉽지 않다. 공감할 수 있는 관계는 숱한 미사여구가 필요 없는 사랑이며 행복이다. 삯 값도 못하는 목사 이야기를 종종 듣는 이 시대에 목자가 되려고 몸부림하는 그 마음을 보고 모습을 보면서 고마웠다.

 ‘본다’는 말은 많은 의미를 갖고 있다. 무엇을 보느냐? 어떻게 보느냐? 에 따라서 상황은 180도 다르게 전개된다.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한 여인을 보는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보는 각도는 달랐다. 요한복음 12장의 마리아의 향유 사건을 보는 가룟 유다와 예수님의 각도는 달랐다. 창녀와 세리와 나병환자를 보는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보는 각도는 달랐다. 사도 바울의 목회 현장에서 바울을 보는 뵈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에바브로디도와 구리장색 알렉산더와 부겔로가 보는 각도는 달랐다.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는 그 사람의 관점이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 생각이 은혜로 충만하고, 생각하는 대로 보게 되고, 보는 대로 말하게 되고, 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실체는 하나인데 보는 각도는 천양지차가 된다.

 일본 교토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할 때 ‘산주산겐도’(三十三間堂)의 천불상을 보고 이야기를 들었었다. 김천 직지사에도 비로전에 천불상이 있고, 해남의 두륜산 아래 대흥사, 지리산 화엄사, 강화도의 보문사 천불전이 대체적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교토의 천불상은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다. 불자들은 이 천불 가운데 자기와 인연을 가진 부처님이 딱 한 분 계시는데 그 부처님을 찾는 비결은 먼저 예불을 올리고 눈을 들어 수많은 부처님 중에 나와 첫눈에 딱 마주치는 분이라고 한다. 이 내용의 중심이 무엇인가? 자기 마음에 드는 불상이 진짜 자기와 관계있는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중요한 것이 있다. 내가 어떻게 보느냐도 중요하고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귀히 보시면 그 때부터 사람들이 나를 귀히 보게 되는 이치를 창세기 39장을 통해 깨닫게 된다.

 나는 여러 교회를 방문하면서 오늘의 요셉을 본다. 그리고 목회일기장에 오늘의 요셉이야기를 써간다. 그 요셉 곁에는 형들이 있고, 미디안 장사꾼이 있고, 보디발의 아내가 있고, 바로가 있는 것도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교회생활을 하는 오늘의 요셉을 하나님이 형통케 하시는 것을 나는 본다. 중요한 것은 요셉의 삶의 과정은 간과하고 요셉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결과만 생각하는 사람은 오늘의 요셉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형통한 자가 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있는 곳, 그 사람이 함께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그 사람이 함께 하는 그 주위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가 누구인가? 창세기 39장에서는 요셉이다. 그런데 오늘의 요셉은 누구인가?

 보디발은 보았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았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복을 내리심을 보았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서 복을 내리시는 요셉을 본 보디발은 그 요셉과 함께 함이 자기에게도 복이 됨을 보았다. 하나님을 믿는,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그리스도인, ‘우리’가 오늘의 요셉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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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 나는 보았습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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