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이상규교수 copy.jpg
 
심익순(沈翊舜, Walter Everett Smith, 1874-1932) 선교사에 대해서는 앞에서 두 차례 소개한 바 있는데 여기서는 좀 더 보충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메릴랜드대학(1895)과 프린스톤대학교(1897), 프린스턴 신학교(1898)를 수료하고 1902년 11월 15일 아내 그레이스 퓨르넬(Grace Purnell, 1869-1945)과 함께 미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한 그는 부산선교부에 배속되어 영주동(현재의 초량교회)교회 출신 김주관(金周寬)에게 한국어를 배웠고, 그와 함께 경남 중부와 서부를 순회하며 수많은 교회들을 개척했다. 그러다가 1912년부터 평양선교부로 전임하였고, 7년간 전도와 교회개척, 문서선교, 그리고 숭실대학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숭실에서 1912-1913년 당시 심리학 윤리학 음악 성경을 가르쳤다. 1917년 8월에는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한국에서 17년간의 사역을 마감하고 1919년 10월 12일 귀국하여 미국에서 목회활동을 했고 1932년 7월 6일 과로로 델라웨어주 윌밍턴에서 58세의 나이로 소천했다. 그의 아내는 1945년까지 생존해 있었고, 슬하에 1남 2녀를 남겨두었다.
그런데 그가 부산에 체류하는 동안 부산부 영선현과 서남편 지역, 곧 지금의 부산의 영도, 서구, 사하구, 사상구 지역과 구포, 김해군 동편, 마산부 창원, 웅천군 동남편, 칠원군 서남편 지역 순회책임자로 활동했다. 그래서 심익순은 내한 후 부산을 떠날 때까지 구포지역 관할 순회 전도자로 활동했고, 구포교회의 설립과 형성기의 영적 책임자로 활동했다. 구포교회 외에도 제일영도교회, 항서교회, 엄궁교회, 하단교회, 김해교회, 대지교회, 웅천 하구교회, 창원 노현리교회 등은 그의 관할 하에 있었다.
여기서 구포교회와 관련한 사실을 소개하면, 구포교회가 시작된 것은 1905년이었다. 이 해 심익순은 그의 어학선생이자 통역관이었던 고학윤(高學崙) 조사와 함께 부산을 떠나 동래부 구포면 일대를 순회하던 중 구포동으로 가서 순회전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 때 김문익(金文益)이라는 중년의 사람과 접촉하게 되었다. 김문익은 구포동의 구 선창 근처에서 조끼, 의복 등을 제조 판매하는 상인이었다. 피복을 취급하는 상인에게는 재봉틀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심익순은 그 다음 순회시에 재봉틀을 소개했고, 김문익은 이를 월부로 구입했다. 이런 과정에서 심익순은 김문익과 계속 접촉하게 되었고,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들은 김문익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드리고 개종하게 되었다. 이것이 구포지역에서의 최초의 복음운동이었다.
심익순과 동행했던 고학윤은 항해도 장연(長淵) 출신으로서 서상륜, 서경조 형제를 통해 신앙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안리아(安利亞)와 결혼한 그는 1892년부터 부산지방에서 선교를 시작한 북장로 부산선교부의 요청을 받고 부산으로 내려와 초기 부산지방의 북장로교 선교사들인 브라운의사, 베어드목사, 후에는 어빈의사 등과 함께 일했던 이 지방 초기 전도자였다. 부산지방에서 일한 초기 선교사들이 남긴 문헌에는 고윤하(Koh Yoon Hah)로 명기되어 있다. 고학윤의 아들이 세브란스병원의 외과의사였던 고명우(高明宇, 1883 -1951?)박사였고, 그의 손녀가 서울여자대학교를 설립했던 고황경박사였다.
고학윤은 심익순 선교사의 조사 겸 어학선생으로 그를 안내하며 순회하던 중 구포지역을 방문하게 되었고, 김문익씨를 전도하게 된 것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159쪽에는 김문익의 귀도(歸道)로 구포교회가 설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창원 가음정교회도 김문익 등의 귀도로 설립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렇다면 구포의 김문익은 창원의 김문익과 동일인인가 아니면 동명이인인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 그러나 교회의 당회록 등 공식기록을 소장하고 있는 창원 가음정 교회 문서에서 김문익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창원 가음정 교회의 경우 김문익은 김순익의 오기일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김순익은 가음정교회의 초기 인물로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김상권 목사는 김순익의 아들이다.
심익순은 김문익 외에도 박도사(朴道士) 부자(父子)에게도 전도하여 이들 또한 기독교로 개종하여 구포지역 초기 신자가 되었다. 박도사가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 그러나 김문익, 박도사 부자 등 가족 중심의 신자들이 생겨나자 심익순의 인도로 이 지역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는데 이것이 구포교회의 시작이었다. 이들은 1905년 3월 1일 수요일 김문익씨 집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이날 저녁 김문익은 자신의 집에서 모이는 예배에 처가 식구들까지 오게 했고, 10여명이 둘러 않아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소개받게 된다. 처음에는 김문익의 사저(私邸)에서 모이기 시작했으나 믿는 이들이 점차 증가하게 되자 1906년에는 ‘연동’이라고 불리는 곳의 ‘한문 서재(書齋)’을 매입하게 된다. 이후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오늘의 구포교회로 발전하게 된다.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부산기독교이야기] 부산에서 일한 선교사들, 심익순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