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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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은 전문화(專門化)를 동반합니다. 우리 사회가 지난 반세기 동안 발전을 거듭해 온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사실입니다. 동시에 사회 각 분야도 함께 전문화되어 왔습니다. 이는 ‘직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69년 직업 사전을 발간하면서 조사한 대한민국 직업의 숫자는 총 3,260이었는데 비해 현재 직업의 개수는 16,000여 개로(2016년 15,715) 50년 동안 500% 이상 증가했습니다. 단순히 숫자만 불어난 것이 아닙니다. 질적으로도 발전과 전문화가 동시에 이루어졌습니다. 2,000년 이른바 ‘의약분업’이 실시되었을 때 누군가의 천재적인 발상으로 등장한 문구,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이 말은 많은 패러디를 양산했는데, ‘요리는 셰프(chef)에게’도 그 중 하나입니다.
올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사망 500주년입니다. 월터 아이작슨(Walter Isaacson)이 쓴 평전을 보면 다빈치는 사생아로 태어나 라틴어나 나눗셈조차 하지 못했던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화가로서 전성기를 구가하면서도 밤마다 병원에서 환자를 관찰하고 시신을 해부하는데 열중할 정도의 호기심과 관찰력과 집중력이 그를 전(全)방위적 지식인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는 또 한 명의 ‘다빈치’가 가능할까요? 어렵다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그 동안 축적된 기술과 지식의 폭과 깊이가 한 인간이 섭렵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자기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는 일만 해도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과 열정이 필요합니까? 신학만 해도 얼마나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었습니까?
요즘 우리 사회의 현안들 특히 정치적인 문제들에 깊숙이 관여하거나 깊은 관심과 함께 소신 있는 발언을 하는 목회자들이 많습니다. 물론 교회는 공공(公共)의 영역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ecclesia est in republica). 그러나 정치적 발언이나 활동은 주의해야 할 측면도 존재합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공공신학(Public Theology)의 부재입니다. 점차 공공신학에 대한 관심이 늘고 전문가들도 부각되고 있지만(성석환, 최현범 등) 한국 교계는 아직은 공적 논쟁을 다루거나 비기독교계와 비판적 대화를 시도하는(Max L. Stackhouse) 일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사회를 성경과 신학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 뒷받침 없는 구호나 운동은 자칫 셰프의 진료처럼 비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둘째, 정보의 부재입니다. 2010년대 들어오면서 정치 영역에서도 빅데이터(Big Data) 분석 기법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습니다(김유신). 그만큼 정치적 정보가 많아지고 복잡해졌다는 증거입니다. 동시에 정치에 관해 비전문가들은 이제 정치적 정보를 접하고 분석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목회자들은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성경과 신학을 연구하고 목양하고 목회하는 일만 해도 만만치 않은데 어떻게 목회자들이 정치적 정보까지 제대로 파악하고 분석할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어느 정도는 공신력이 담보되었던 지난날의 매스미디어(Mass Media)와 달리 일인매체를 비롯한 새로운 미니미디어(Mini Media)에는 ‘가짜뉴스’도 기승을 부립니다. 정확하게 분별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셋째, 균형의 부재입니다. 현대 민주주의 꽃이라는 ‘정당’은 ‘후보자 추천 또는 정책 제시를 통해 정권 획득 혹은 정치적 영향 행사를 목적으로 하는 정치결사’입니다(허 영). 즉, 각 정당은 나름대로의 정책을 견지하고 그를 관철하기 위한 전략을 구사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정당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자뿐만 아니라 진보주의자도 공존합니다. 성장론자뿐만 아니라 분배론자 또한 공존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어느 한편의 견해를 일방적으로 추종하거나 공식적으로 선포할 수 없습니다. 성경과 신앙에 관해서라면 일치를 추구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영역에서는 관용이야말로 교회가 가져야 할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균형감각을 학습하고 회복하는 목회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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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병은 의사에게 요리는 셰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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