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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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사회는 법무장관 후보자를 두고 문자 그대로 ‘하마평(下馬評)’이 무성합니다. 그는 개혁지향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해맹산(誓海盟山)의 정신으로 개혁의 소명을 완수하겠다.” 자신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여러 가지 문제 제기 앞에서 그가 보여준 결기였습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그런 문제들을 안고 있는 자체가 개혁가를 운운할 자격이 없는 이유라고 강변합니다. 첨예한 논쟁 속에서 우리는 ‘개혁’이란 무엇이며, ‘개혁가’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합니다. 한 개인에 대한 가치 평가를 의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이 나라 이 민족 가운데 참된 개혁가들이 많이 나타나 참된 개혁을 주도하여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함 때문입니다.
첫째, 진정한 개혁가를 꿈꾸는 사람은 먼저 마음가짐부터 달라야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른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쓴 윤동주의 시구는 그런 의미에서 개혁가의 헌장이라 부를만합니다. 신자라면 하나님 앞에서, 비신자라면 자기 양심 앞에서 당당하고 떳떳해야 개혁을 부르짖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 그런 자가 외치는 개혁의 구호라야 힘이 있고 호소력이 있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어떨까요? 영화 <친절한 금자씨>(2005)에서 배우 이영애 씨가 남긴 대사 “너나 잘 하세요.”는 두고두고 한국 교회를 향한 비수가 되었습니다. 누구나 개혁을 논하고 누구나 개혁가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으로 탄생한 개신교는 근본 개혁의 본성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망각할 수 없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어야겠다는 각오로 신앙하고 살아가는 성도와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 진정한 개혁가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자기 관리는 필수입니다. 자기 스스로조차 관리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타자와 사회를 개혁하겠노라고 큰소리를 칠 수 있겠습니까? 자기 관리는 작고 사소한 일부터 시작합니다. 2014년 5월 윌리엄 맥레이븐(William McRaven) 당시 미국 사령관은 모교인 텍사스 오스틴 캠퍼스에서 열린 졸업식 축사에서 “세상을 바꾸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이불 정리부터 하십시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개혁의 소명을 확신하는 사람이라면 교통 법규도 준수하고 세금도 성실하게 납부하고 약속도 잘 지켜야 자기 소명을 완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동일한 원리는 종교 분야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말씀과 기도 생활조차 소홀하면서 교회 개혁을 부르짖고 사회 개혁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자기 관리는 결심이나 구호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성이 아니라 습관이 중요하다는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의 말은 옳습니다. 거룩한 습관이 곧 거룩한 개혁의 첩경입니다.
셋째, 진정한 개혁은 개혁의 열정만 가지고는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11세기 송나라가 배출한 불세출의 개혁가 왕안석(1021-1086)을 보십시오. 20세기의 레닌조차 그를 위대한 개혁가로 인정했지만 결국 왕안석의 개혁은 실패했습니다. 많은 사가(史家)들이 그 이유를 단 한 마디로 표현합니다. “나만 옳고 너는 그르다.” 진정한 개혁가는 진지한 경청자여야 하고 탁월한 협상가가 되어야 합니다. 나와 다른 의견을 묵살하고 배척하는 사람은 개혁을 외치는 자는 될 수 있어도 개혁을 달성하는 자는 될 수 없습니다. 나아가 진정한 개혁가는 민심을 독해하고 수용하는 능력이 뛰어나야 합니다.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의 강력한 개혁은 민심의 이반을 초래했고 결국 왕정이 복고되고 청교도들이 영국을 떠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교회의 개혁은 한 가지 조건이 부가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가중된 조건을 충족하면서 열정을 가지고 기필코 참된 개혁을 이루어내고 말 진정한 개혁가가 등장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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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누가 진정한 개혁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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