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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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한국과 일본은 칼과 총이 아니라 낫과 보습의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일본의 수출과 관련된 일련의 조치들로 말미암아 본격화된 일종의 비무장전쟁은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구한말을 소환하고 뜬금없이 죽창을 되살려내기도 했습니다. 한쪽에서는 현 정부를 100년 전 미·일·중·러 4강대국들에 휘둘리다 결국 주권을 상실하게 만든 무능했던 구한말 정권에 비유했습니다. 그러자 또 한쪽에서는 죽창 운운하며 역시 100년 전 동학운동을 환기하고서 임전무퇴의 각오를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우리 가슴에 뚜렷하게 각인되는 형상은 따로 있습니다.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입니다. 특히나 그 마지막 전투는 죽음으로 이긴 비장한 승리였기 때문에 더욱 우리네 가슴에 사무치도록 새겨져 있습니다.  
죽음으로 이룬 승리는 이순신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중국의 삼국시대 위나라의 중달(仲達)은 오장원(五丈原)에 진을 치고 농성하던 군사들을 지켜보며 수십 차례 소규모 전투만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인내심 강한 중달은 촉나라 제갈공명의 죽음을 예견하고 때를 기다립니다. 어느 날 밤 마침내 긴 꼬리를 달고 공명의 별이 떨어지자 중달은 외쳤습니다. “이제 때가 되었다. 공명이 죽었으니 포위된 촉나라 군사를 궤멸시킬 절호의 기회다.” 그런데 공격을 시작하자 죽은 줄 알았던 공명이 태연히 마차에 타고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까? 깜짝 놀란 중달은 걸음아 날 살리라며 꽁무니를 뺐다고 합니다. 사실 공명은 자기와 꼭 닮은 인형을 마차에 준비해 두었을 뿐이었지만, 이 일화는 결국 '죽은 공명이 살아있는 사마의를 도망치게 하다(死諸葛走生仲達)'라는 고사로 오래토록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1598년 정유재란 중 벌어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적의 탄환을 가슴에 맞았습니다. 그러나 숨을 거두며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비장한 유언을 남기고 지금의 남해 앞바다 관음포(이락파)에서 순국하셨습니다. 평소 장군이 강조했던 ‘생즉사사즉생(生則死死則生)’을 유훈으로 삼고 군사들은 끝까지 퇴각하는 왜구들을 추격하며 대승리를 거두었고, 마침내 두 차례에 걸친 왜란이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당시 노량해전의 일본 측 지휘관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였는데, 이미 수년 간 보고 들었던 장군의 신출귀몰한 전술과 능력에 전의를 상실하고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쳤는데, 사실 그의 주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또한 늘 ‘이순신을 만나면 무조건 도망치라’고 했다 합니다. 그렇다면 ‘죽은 순신이 살아있는 풍신을 꺾었습니다(死舜臣誅生豊臣)’라 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제갈공명과 이순신 장군의 일화는 죽어서도 승리를 얻은 귀한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위대한 인물들이지만 여전히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얻은 승리는 실로 대단하다고 아니할 수 없지만 그들도 죽음 앞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존재임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롬 3:23) 죄의 결말은 사망이므로(약 1:15), 인생은 모두 결국은 죽음 앞에 서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롬 6:9). 이 구절은 그리스도가 죽음을 도망치게 하고, 사망의 권세마저도 꺾어버리셨음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으로 이루신 이 놀라운 승리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살고자 하는 자는 목숨을 잃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 말씀하신 선구자이십니다(마 10:39).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삽니다(롬 6:8).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으로 이기는 법을 깨우칩니다. 그리고 항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고전 15:57)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주고 또한 허락하신 위대한 승리입니다. 장차 한·일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전쟁은 더욱 격화될지 모릅니다. 일본뿐이겠습니까? 우리는 어쩌면 미국과 중국과 러시아 3강과도 낫과 보습을 들고 치러지는 각축전을 벌여야할지도 모릅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우리 역사 속에서 이순신의 멸사봉공(滅私奉公) 정신을 소환해야 합니다. 또한 인류 역사 속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고 죽음으로 사망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소환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우리 역시 선으로 악을 이기고 죽을 각오로 기필코 승리하는, 불의한 자들의 머리 위로 숯불을 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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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다시 이순신, 다시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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