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가지 중요한 일은 그가 부산의 나병원 설립에 동참했다는 점이다. 1909년 그는 어을빈 사보담 선교사와 더불어 나병 환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시설을 설립했는데 1910년에는 호주선교부로 이관되어 매견시 목사가 병원을 관장하게 되는데, 1930년에는 이 병원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비를 제작했다. 화강암으로 만든 높이 113㎝ 폭 9(상단)~12㎝(하단)의 기념비는 1930년 제작되었다. 이 비석에는 비석 제작일·병원 설립일과 함께 부산나병원 설립자인 세 선교사의 이름, 곧 심익순 어을빈 사보담, 그리고 병원 운영자였던 호주의 맥켄지의 한자 이름(매견시) 등이 새겨져 있다. 상애원(相愛園)이라는 이름의 이 병원은 일본정부가 1941년 일방적으로 폐쇄하고 군부대로 전용되었지만 부산에 있었던 자애의 흔적이다.
1911년에 12월 6일 부산진예배당(현 부산진교회)에서 창립된 경상도예수교장로회는 공식적으로 선교사들의 관할지역을 배정했는데, 이 때 심익순 선교사에게 할당된 지역은 부산 영선현, 부산부 서남편, 김해군 동편, 마산부 창원, 웅천군 동남편, 그리고 칠원군 서남편이었다. 이런 순회 지역 분배는 심의 과정을 거쳐 분배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이전부터 시행해오던 순회지역을 공식적으로 추인한 성격이 강하다.
부산선교부에서 10여년을 봉사한 심익순은 북장로교회의 선교 정책에 따라 1912년 평양지부로 전임하였고, 교회 개척, 문서 활동, 숭실대학에서 강의 등의 사역을 감당하였다. 1912-1913년 당시 심익순은 숭실학교에서 심리학 윤리학 음악 성경 등을 가르쳤다. 그는 내한한 선교사 중에는 비교적 고학력에 속했으므로 문서 활동과 교수사역은 그가 할 수 있는 적절한 봉사였다. 약 7년간 평양에서 일했던 심익순 선교사는, 1919년 10월 12일 한국에서 은퇴하게 된다. 45세 때였다. 선교사역에서 은퇴하게 된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건강이 좋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사역한 기간은 17년이었다. 본국으로 돌아간 후에는 짧은 기간 휴양한 후 지역교회에서 목회자로 활동했으나 1932년 7월 6일 델라웨어주 윌밍턴(Willington)에서 하나님의 부름심을 받았다. 58세 때였다. 사인은 과로였다. 그의 부인 1945년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부산선교부에서 10여년을 봉사한 심익순은 북장로교회의 선교 정책에 따라 1912년 평양지부로 전임하였고, 교회 개척, 문서 활동, 숭실대학에서 강의 등의 사역을 감당하였다. 1912-1913년 당시 심익순은 숭실학교에서 심리학 윤리학 음악 성경 등을 가르쳤다. 그는 내한한 선교사 중에는 비교적 고학력에 속했으므로 문서 활동과 교수사역은 그가 할 수 있는 적절한 봉사였다. 약 7년간 평양에서 일했던 심익순 선교사는, 1919년 10월 12일 한국에서 은퇴하게 된다. 45세 때였다. 선교사역에서 은퇴하게 된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건강이 좋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사역한 기간은 17년이었다. 본국으로 돌아간 후에는 짧은 기간 휴양한 후 지역교회에서 목회자로 활동했으나 1932년 7월 6일 델라웨어주 윌밍턴(Willington)에서 하나님의 부름심을 받았다. 58세 때였다. 사인은 과로였다. 그의 부인 1945년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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