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11-2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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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10대 이슈 및 사회인식조사(종교분야)
    한국기독교언론포럼(이사장 김지철)은 지난 8일 ‘한국기독교 선정 2016 10대 이슈’를 발표했다. 포럼은 종교, 정치, 통일, 경영경제, 사회문화, 교육, 언론 등 7개 분야별로 전문가그룹에 의뢰해 10대 이슈를 선정, 발표했다. 종교분야는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대표회장 김경원 목사)에서 맡았다. 다음은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에서 선정한 종교분야 2016년 10대 이슈다. 2016 10대 이슈 및 사회인식조사 종교분야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이 상 화 목사 | 사무총장 1. 종교개혁 500주년 준비를 고뇌하다 2016년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2017년을 준비하기 위해 바쁜 한 해를 보냈다. 현재 루터회를 비롯하여 예장고신, 예장통합, 예장합동, 기장 교단에서 종교개혁500주년기념사업위원회가 설치되어 있고, REFO500 기관이 활동하고 있다. 또한, CBS와 국민일보가 공동으로 한국교회 24개 교단과 5개 연합기관, 기독교대학 및 신학교 등 주요 기관이 참여한 슬로건인 ‘나부터 □’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각 교단의 기념사업을 비교해 보면 거의 교단과 교회 내에 국한되어 있어서 종교개혁의 정신을 사회에까지 광범위하게 이어가기 위한 노력으로는 너무 제한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이를 극복하고자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대표회장 김경원 목사)는 다섯 차례의 ‘열린대화마당’과 전국수련회를 열면서 한국교회 주요 교단들의 종교개혁 500주년 준비상황을 점검하고, 깊이 있는 논의와 대안을 모색해 왔다. 그 결과로 10월 27일 중앙루터교회에서 가진 한목협 주최 종교개혁 499주년 기념예배를 통해 모인 각 교단 임원과 종교개혁 500주년 준비위원, 한목협 운영위원들은 2017년 한국교회가 공동으로 추진할 과제에 대해 마음을 모으고 구체적인 준비를 위한 논의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이번 한국기독교언론포럼(이하 한기언)의 조사결과는 한국교회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개혁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로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돌아가 복음의 본질 회복’을 가장 많이 꼽았고, 다음으로 ‘목회자들의 윤리 회복’이락 응답했다. 최순실 게이트로 촉발된 지금의 한국사회 분위기 속에서 내년 대선을 앞둔 한국사회에 불고 있는 거센 개혁의 바람이 도리어 한국교회에 회개와 변화의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은 대단히 역설적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이 시작되는 2017년을 맞은 한국교회의 실제적인 변화의 열매를 세상 사람들이 발견하게 될 때 종교개혁 500주년의 울림의 깊이와 영향력은 지속적인 반향을 일으킬 것이 틀림없다. 2. 이단사이비로 인해 자중지란이 일어나다 2016년 한국교회는 이단 문제로 자중지란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예장통합 교단은 올해 9월 12일 특별사면 형식으로 ‘이단 해제’를 결정했다가 총회 현장에서 거센 반발에 부딪혀 철회했지만,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공교단이 ‘이단 해제’를 결정했다는 것은 큰 논란을 일으켰다. 이 와중에 이단사이비들은 대규모의 집회와 시위를 통해 공개적으로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는 등 전략적으로 움직였다. 이에 맞서 대전 새로남교회(오정호 목사) 같은 경우에는 신천지를 상대로 집회금지가처분을 냈고, 지난 8월 8일 대전지방법원 제21민사부(재판장: 문보경 판사)는 이를 인용하는 결정을 내려 이단사이비 집단이 무기로 삼던 집회 및 시위의 자유를 막아내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도 했다. 가장 큰 사건은 역시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지면서 교계에서 중요한 담론으로 등장한 온갖 기독교 이단 관련 이슈들이다. 한국교회는 최순실 씨의 아버지 최태민의 ‘목사’라는 호칭에 대해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였지만, 최 씨가 예장종합총회에서 신학 교육 없이 목사 안수를 받았다는 보도 이후 힘을 잃고 있다. 이번 한국기독교언론포럼(이하 한기언)의 조사결과를 보면 이단사이비에 대응하기 위해 목회자들은 교계 연합의 대책기구와 입장발표에 방점을 둔 반면, 성도들은 이단사이비에 대한 교육이 절실하다고 응답했다. 이는 이단사이비들의 포교대상이 일반성도라는 점에서 맥락을 같이 한다. 한국교회가 여러 이단들에 대해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한 결과로 지금의 국가적 재앙을 초래하게 되었다. 2017년은 한국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논리로 공교회성을 회복하고 교파의 벽을 넘어 서로 협력해서 이단사이비의 침투를 막고 삶의 현장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을 양육하는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 3. 목회자 윤리문제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올해도 목회자의 성추행 소식은, 사람과 공간만 새로울 뿐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상적인 일이라는 사람들의 다소간의 편견에 확신을 심어주는 꼴이 되었다. 특히 청소년사역단체 대표 목사의 성추문뿐만이 아니라 선교사의 성적 비리, 그리고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든 재정 비리는 교회의 거룩성을 훼손하고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목회자의 윤리문제는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의 대사회적 이미지 추락, 그리고 사회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이번 한국기독교언론포럼(이하 한기언)의 조사결과에서 일반성도들은 목회자 윤리문제 발생시 해결 방안으로 ‘모든 직임을 내려놓고 교회의 처분을 기다려야 한다’(50.8%)를 가장 많이 꼽았다. 다음으로 ‘문제 발생 즉시 사과하고 교회를 떠나야 한다’(33.3%), ‘충분한 회개의 시간을 갖게 하고 용서해야 한다’(8.1%), ‘사실 관계가 확인될 때까지 사역을 지속해야 한다’(5.2%)고 응답했다. 이러한 결과는 교단, 연령, 성별, 지역, 경제수준, 교회 크기 등 응답자특성별 전 분야를 불문하고 지도자의 책임 있는 자세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교회가 보여준 일련의 문제 해결 과정들은 정치권이나 일반사회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아니 더욱 견고하다는 좌절감을 주고 있으며, 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영적 권위를 약화시키고 있다. 결국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목회자의 윤리의식 정립에서 찾아야 한다. 목회자들은 뼈를 깎는 자기갱신과 거룩성 회복을 통해 더욱 낮아진 자세로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바르게 수행해야만 비로서 이 세대와 복음으로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4. 이슬람의 거센 도전 앞에 서다 2017년의 한국교회는 교회 밖에서는 이단사이비와 싸우고 교회 안에서는 윤리 문제로 내홍을 겪으며 약점이 노출된 상태에서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이슬람과 맞닥뜨리고 있다. 교계 언론과 공교회의 대표자들은 하나같이 잘못하다 보면 유럽처럼 될 수 있기에 이슬람이 한국에 뿌리 내리지 못하도록 대처해야 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이슬람에 대한 전문성 있는 연구자를 미처 길러내지 못한 한국교회는 확인할 수 없는 괴담 수준의 정보들로 성도들에게 공포감만 조성하고 있다. 예측 불가능한 미지의 대상에 대한 정보 부족은 막연한 두려움을 낳는다. 이슬람이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는 이때에, 한국교회는 이슬람의 교리와 제도, 문화 전반에 걸친 정확한 정보를 성도들에게 제공하고, 설득력 있게 이슬람을 바라볼 수 있는 기독교인 전문가들을 길러내어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전략적으로 움직여야 할 것이다. 5. 인공지능(AI) 시대에 신학적 담론을 요구받다 2016년 3월, 알파고(AlphaGo)가 이세돌 9단과의 대국에서 승리하면서 한국사회에서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 보다 높았던 한 해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교회의 목회현장과 목회자들에게는 AI는 큰 관심의 주제가 되었다. AI와 관련한 논의의 초점은 AI에게 감성, 창조성, 예술성이 가능한가의 수준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가진 AI가 과연 자유의지나 양심이나 도덕성까지도 지닐 수 있는가에 대한 윤리적 담론으로 옮겨갔다. 특히 간과할 수 없는 것은 AI 프로젝트의 최종 지향점이 인공지능을 통한 영생하는 신으로서의 AI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담론을 형성시킬 수 있는 분야 중 하나는 분명 신학적 담론이기에 한국교회는 어떻게 응답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인가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한 해 였다. 6. 목회자 공급 과잉은 한국교회가 공동으로 풀어야 한다 금년 총회에서 각 교단의 교세 현황이 보고되었다. 교단마다 교회와 교인은 감소하는데 목회자는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수요와 공급이 엇갈리는 상황 속에서 신학교 구조조정은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뚜렷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 한국기독교언론포럼(이하 한기언)의 조사결과에서도 개신교인과 목회자들은 한국교회의 목회자 수급에 대해 ‘각 교단에서 구조적으로 조정하여 목회자 수를 줄여야 한다’를 각각 57.8%, 60.0%의 비율로 가장 많이 꼽았다. 예장통합 교단에서 장로회신학대학교 박상진, 이만식 교수에게 2015년 목회자 수급 문제 연구를 의뢰한 결과 교인은 감소하고 교회와 목사는 증가하는 것으로 예측되었다. 목회자 증가의 배경에는 신학교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문제는 한국교회가 공동으로 풀어야 한다고 보고서에서 지적하고 있다. 또한 ‘비인가 신학교’에서 자질과 역량이 검증되지 않은 수많은 목회자들이 배출되고 있는데, 이들로 인해 전체 기독교 명예가 훼손되고, 전도의 문이 막힌다고 보고서는 지적하고 있다. 반면에 신대원 지원자 수는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이는 신학교 운영에 어려움을 초래하고 교육의 질을 저하시켜 목회자 윤리 문제와 일탈 행위를 발생시킬 것이며, 한국교회 신뢰도는 계속해서 하락하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는 끊기 위해서는 한국교회 전체가 뼈를 깎는 아픔을 각오하고 먼저 수술대에 오르는 용기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7. 한국교회 연합, 실질적 방안을 고민하다 교단장회의는 올해 7월 26일 한기총과 한교연 대표회장을 배석시킨 가운데 ‘한기총과 한교연 통합협의회’를 출범시키기로 결의하고 ‘선 통합 선언, 후 추진’의 원칙을 세우고 통합절차를 밟기로 했다. “대외적으로 이단, 동성애, 이슬람, 종교인 과세 등 문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내적 일치와 연합이 강하게 요구된다”고 밝히면서 이후에 출범한 ‘한국교회연합추진위원회’는 각 교단 총회에 이를 상정하고, 10월과 11월에 통합 정관 등을 협의한 뒤 12월에 통합총회를 갖기로 결의한 바 있다. 했다. 하지만 이단 문제와 내부 반발로 통합 논의가 진통을 겪으면서 11월 30일 통합 선언의 시기를 넘겼다. 또 다시 12월 5일에 회의를 열고 금년 성탄절에 한국교회에 연합이라는 선물을 내 놓겠다고 약속한 상황인데 이후의 상황은 지켜 볼 일이다. 이번 한국기독교언론포럼(이하 한기언)에서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에서도 한국교회 연합을 위한 중심단체를 묻는 질문에 대해 ‘한기총’(23.0%)를 가장 많이 꼽았지만,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연합기구의 영향력은 점점 약화되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한국교회 연합의 당위성에 대해 많은 목회자들이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2017년으로 넘어가게 된 연합논의가 어느 정도의 탄력을 받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8. 노년세대 증가가 교회 사역에 새로운 방향성을 묻다 통계청에서 실시했던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를 2010년과 비교한 결과 유소년인구는 97만 명이 감소했고, 65세이상 고령인구는 121만 명이 증가했다. 1인 가구는 520만 가구(27.2%)로 대폭 증가했고, 모든 시도에서 고령인구 비율이 7%를 넘어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다고 한다.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다. 지난해에 60대에 진입한 6.25 전쟁 이후 태어난 베이비부머 세대들은 유년 시절 한국교회 부흥을 이끌었고, 중장년 시기에는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을 견인했던 이들이다. 이들이 중장년층이 되면서 경제적으로 부요하고 건강한 교회의 핵심활동 연령층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반면에 출산율의 저하로 인한 인구절벽 현상과 맞물린 전국적인 교회학교의 감소는 다음세대를 낙관할 수 없게 하고 있다. 다음세대를 살리기 위한 각 교단의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아직 해답을 찾지 못했지만, 다가오는 새해에도 교회의 미래를 위해 다음세대를 향한 집중력만큼은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동시에 가족에 대한 책임 못지않게 개인적 욕구에 충실한 역사상 첫 세대인 노년세대를 향한 이해와 목회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한국교회 전체적으로 더욱 중요한 과제로 남게 되었다. 9. 통일에 대한 관심 부족을 보이다 지난해 광복 70년을 맞아 그 어느 때보다 통일 논의가 활발했지만 올해 2월 충분한 절차와 합의 없이 감행된 개성공단의 폐쇄와 함께 남북 대화의 돌파구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게다가 동북아시아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 러시아의 견제와 대립의 틈바구니에서 생존과 번영을 고민해야 할 중대한 시점에 국정 농단의 혼돈에 놓인 국내 정치 상황은 통일 문제를 입에 담기에도 부족한 상황이다. 한반도평화연구원에서 2015년 11월에서 12월까지 일반인 300명, 목회자 300명을 대상으로 “한국교회 목회자 통일인식 조사”를 실시하고 올해 2월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 결과를 보면 남북한의 통일에 있어서 대한민국의 약점(Weakness)으로 일반인은 ‘젊은 세대의 무관심’(54.3%)을, 목회자는 ‘남남갈등’(60.7%)을 가장 많이 꼽았다.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 부족’도 일반인의 45%, 목회자의 59%가 ‘그렇다’고 응답해 통일 의지가 부족하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통일문제와 탈북자들에 대해 선교적인 마인드로 접근하는 목회자들에 비해 일반인은 남북간 단절로 인한 괴리와 일상의 삶과 ‘통일’ 담론에 거리감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다. 한국교회의 북한에 대한 입장은 무관심과 의지의 부족 가운데 정치 상황과 맞물려 냉온탕을 넘나들며 진행되어 왔다. 29,830명(2016년 9월 기준, 통일부)의 탈북민들도 제대로 품지 못하는 한국교회가 분단의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북한 동포를 위한 평화의 사도가 되어 통일의 최선봉에 나설 수 있을지는 곰곰이 생각해볼 문제다. 10. 한국교회의 정치 참여는 대개 헛발질이었다 과거 한국교회는 구국기도회나 집회, 조찬모임을 통해 사회적 안정과 질서 유지에는 도움을 주는 방식으로 정치참여를 했으나, 때로는 그런 정치적 행보가 보편적 가치와 인권이 유린된 관료적 권위주의 정권을 지속시킨 힘으로 작용해서 정치적 민주화를 지연시킨 과오를 범하기도 했다. (사)한국기독교언론포럼 이번 한국기독교언론포럼(이하 한기언) 조사에서 개신교인들은 한국교회의 정치 참여에 대해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 것이 좋다’(65.7%)를 가장 많이 꼽았다. 다음으로 ‘정치에 직접 참여하지는 말고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것이 좋다’(31.0%)를 꼽았다. 목회자의 정치 참여를 묻는 질문에서도 마찬가지로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 것이 좋다’(58.3%)를 가장 많이 꼽았고, ‘정치에 직접 참여하지는 말고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것이 좋다’(26.2%)를 꼽았다. 개신교인들은 교회나 목회자의 정치 참여에 대해 부정적이며 학생(48.8%)보다 기성세대(68.9%~72.6%)가 더욱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광장에 나타난 상처받은 민심을 위로하고 한국사회가 당면한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는 물론 평화 통일의 시대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관점에서 예언자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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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30
  • 다문화 사회, 한국사회의 위기인가 기회인가?
    ▲ 국제다문화사회연구소 소장 이병수 교수(고신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라”(신10:18-19). 국제 다문화 사회연구소는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국제 이주민 즉 외국인 근로자, 유학생, 국제결혼 부부, 다문화 가정 청소년 및 새터민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나그네’, ‘손님’, 그리고 ‘형제, 자매와 자녀’로 맞아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겨 ‘하나님의 가족’으로 초대하기 위한 성경적·신학적·철학적·정책적·선교적·실천적 연구소입니다. 1. 본 연구소는 하나님의 형상교리를 기초로 해서 신학적 및 선교학적 의미를 추구합니다. 성경적으로 본다면 국제 이주민들도 기독교인인 우리와 같이 창세기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형상(Immago Dei)’입니다. 본 연구소는 국제 이주자의 한 축을 이루는 무슬림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것이 성경적 가르침이라고 믿습니다. 만약 유교도, 불교도, 그리고 힌두교도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면 무슬림도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개혁주의 조직신학자인 앤서니 후크마는 그의 책 「개혁주의 인간론」에서 ‘하나님의 형상’ 교리로 인간론을 설명합니다. 후크마는 타락한 죄인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에 의하면 “성경은 인간이 죄에 빠진 사실이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향상을 심각하게 왜곡시켰다고 가르치지만 또한 타락한 인간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간주해야 한다고도 가르친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이므로 우리는 그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 되며(약3:9)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후크마는 이런 ‘하나님의 형상’의 교리를 칼빈에게서 배웠습니다. 후크마에 의하면 “어느 누구 못지않게 인간의 죄악성과 무가치함에 대해 깊이 알고 있었던 존 칼빈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죄인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 “놀랍게 표현했다”하면서 그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다음과 같이 인용합니다. “우리는 사람들 자신이 어떤 자격이 있는지 고려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보아야 하며 그 형상에 모든 영예와 사랑을 바쳐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그 사람을 돕기를 거절할 어떤 이유도 없다. 가령 ‘그 사람은 경멸받을 만하고 무가치 하다’고 하자. 그러나 주님은 곧 주님이 자신의 형상의 아름다움을 아끼지 않고 주신 자가 그 사람임을 알려주신다. 가령 그 사람이 당신의 최소한의 노력조차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자. 그러나 당신에게 그 사람을 천거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당신이 당신 자신과 당신의 모든 소유를 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설파합니다. 후크마는 이 하나님의 형상의 교리가 가지는 선교적 함의를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교회는 복음전파 내지 선교사역을 할 때 이 땅위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라는 확신을 고수해야”하고 “하나님의 형상교리는 교회의 복음전파의 사명에 있어서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조직신학의 장점은 조직신학과 선교학을 통섭(統攝)적으로 보려는 시도와 노력이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그는 칼빈의 신학에 기초한 여러 신앙고백서들을 선교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선교적 함의를 제안했습니다. 조직신학자 후크마의 책을 읽으면서 다른 화란의 교의학자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의 「개혁교의학」이 생각이 났습니다. 이 책은 최근 고려신학대학원 출신의 박태현 교수가 4권으로 한국어 번역본으로 완성했습니다. 미국에서도 이 책을 최근에 번역한 것으로 볼 때 이 번역이 한국 신학계에 끼친 공헌은 참으로 귀하고 큰 것입니다. 4권 분량이 약 3,500 쪽에 가깝습니다. 바빙크는 그의 책에서 교의학의 실천적 성격을 여러 곳에서 매우 강조합니다. 정말 귀하고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의 책 4권중에 신학의 실천적 성격이 가장 잘 나타야 할 선교에 대해서 책 전반과 관련하여 선교적 함의와 또는 4권에 포함되는 교회론의 부분에서도 교회의 선교적 역할을 언급한 것을 거의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칼빈의「기독교 강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강요 4권에 해당하는 교회론 에서도 칼빈의 선교에 대한 언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교회의 중요한 역할 중 예배, 교제, 봉사, 그리고 증거가 있습니다. 증거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아니라면 교회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조직신학자 에밀 부르너는 “불이 탐으로써 존재하듯이 교회는 선교함으로써 존재한다.”고했습니다. 독일의 조직신학자 마틴 켈러는 “선교는 신학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마틴 켈러의 주장은 교회와 신학이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은 교회가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였기 때문에 신학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이 교회의 증거하는 공동체의 요소, 증인의 공동체를 누구보다도 강조한 신학자가 보수신학에서 비판한 독일계 스위스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였습니다. 화란 선교학자 요하네스 베르카일은 그의「현대선교신학 개론」에서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특히 III:2권 과 IV: 3권은 선교학에 매우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이들 항목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선교를 논의 하면서 교회의 소명은 ‘하나님의 선교의 연속(missio Dei Continuata)’으로서 교회는 하나님의 지상 증거자라.”고 주장합니다. 바르트는 “교회의 선택, 화해, 영적 약속, 소명, 명령 그리고 봉사 등의 배경에 반하여 교회의 소명에 대한 그의 사상을 전개” 하면서 마침내 “만일 교회가 선교의 의무를 실패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혹자는 칼 바르트를 위대한 신학자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선교학자 심지어 “선교사”라고까지 평가했습니다. 내가 최근에 만난 화란 선교학자가 헤르만 바빙크의 이런 면을 지적하면서 그에 비하면 아브라함 카이퍼는 모든 부분에서 기여한 바가 지대하지만 그는 또한 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도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같은 신학의 전통에서 자란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차이들이 생기는가가? 참으로 궁금합니다. 복음전도의 연구의 영국의 대표적 신학자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은 그의 책 「초대교회의 전도」에서 “대부분의 전도자들은 신학에 관심이 거의 없는 반면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전도에 거의 관심이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후크마가 하나님의 형상의 교리를 단순히 조직신학적으로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 교리가 가지는 선교적 함의를 심도 있게 다룬 것을 통해서 모든 학문이 가지는 이론과 실천의 조화와 신학의 통합적 접근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유는 신학은 방법론적으로 이론적이지만 목적은 실천적이고 이것이 성경적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함이라.”(딤후3:16-7) 2. 모든 인류는 평등합니다. 성경에서 인간의 평등사상을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혹자는 모든 인류는 성경이 제시하는 세 가지 신학적 측면에서 평등하다고 주장합니다. 첫째, 우리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둘째,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이요 죄인입니다. 셋째, 따라서 모든 인류는 하나님에게 의존적이고 구원이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인간의 능력 여하에 따라 불평등하다고 주장하는 내용은 한 곳도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인간 평등사상을 구체적으로 찾기도 쉽지 않지만 또한 인간 불평등 사상을 찾기도 거의 불가능합니다. 인간 불평등 사상에 대한 성경의 언급은 단 한 곳도 없고 눈을 부릅뜨고 찾아보려고 해도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평등사상을 찾아본다면 사도행전 17:26 절일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곳에서 모든 인류가 “한 혈통으로” 만들어진 존재로 파악함으로 모든 인류가 같은 근원에서 나왔고 따라서 인류 모두가 평등하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바울이 이 주장을 할 그 당시의 문화적 상황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지성의 중심이요 헬라인을 모든 인류보다 가장 뛰어난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아덴에서 인간 평등사상을 강조했다는 점입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BC384-322)가 서구사상에 끼친 긍정적 영향이 지대하지만 그의 인간 평등사상은 매우 부정적이고 실망스럽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야만인들’(그리스인이 아닌 사람), 특히 아시아인은 ‘타고난 노예’라고 가르쳤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이 땅에 태어나기 수 백 년부터 이런 사상이 편만했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헬라인들은 유대인의 선민사상과 같이 자부심이 대단한 자민족 중심주의와 우월주의에 빠졌던 대표적 민족입니다. 신약학자 브루스(F. F. Bruce)는 이런 오만한 자부심을 사도행전 17장 26절 주석에서 이렇게 질타합니다. “그러나 이 자부심은 잘못된 근거에서 나온 것이었다. 모든 인류는 하나의 근원에서 나왔으니, 모두 하나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며, 모두 한사람의 공동시조에게서 흘러나왔다. 이 사실은 헬라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외국인들보다 우월하게 태어났다는 믿음을 정당화 시키려는 거짓된 모든 시도를 일소해 버리며, 이러한 점에 있어서는 그와 유사한 오늘날의 국수적 여러 가지 믿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자연 안에서도 은혜 안에서도, 즉 옛 창조 안에서도 새 창조 안에서도, 인종우월주의가 들어설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제자 알렉산더 대왕(BC 356-323)은 동서양의 결합을 통해 하나 된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동양과 서양을 하나 되게 하고자 시도했던 알렉산더 대왕의 위대성은 단 한 번도 전쟁에서 패배한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모든 인류는 평등”하다는 세계시민 정신 때문이었습니다. 알렉산더는 그리스인의 편견과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의 한계를 뛰어넘은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제자였습니다. 알렉산더는 전쟁터 등의 장소에서 ‘야만인’들과 직접 접촉할 기회를 가지면서 그리스인이 과연 그들보다 우월한지 시험해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그는 모든 사람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원전 329년 힌두쿠시를 가로질러 박트리아로 진군할 때는 대규모의 아시아인을 원정 주력군으로 충원했습니다. 그는 아시아 여성 록사나와 결혼했고, 1만 명의 병사들에게도 아시아 출신 아내를 얻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복지로 가는 곳마다 수많은 국제결혼을 시도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나타나는 인간 평등사상의 가르침이 성경신학·조직신학적 의미의 영역에서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선교의 대상이 되는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가르침에 근거한 선교적 함의를 생각해야합니다. 이 가르침은 선교사가 현지인보다 인종적·문화적으로 조금이라도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오히려 이 평등사상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은 이런 우월 사상을 ‘말살’할 것입니다. 이 평등사상에 근거한 본 연구소는 지배욕과 우월사상에 젖은 식민지 제국주의자들이 제 3세계에 저지른 오만과 교만을 처절하게 경험하고 이런 만행에 치를 떨었던 한 국가와 국민으로서 이런 만행이 한국에 살고 있는 제 3세계 사람들에게 자행되지 않도록 평등과 진리의 파수꾼이 되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프랑스 혁명의 3대정신은 자유·평등·박애입니다. 이 평등의 정신을 누구보다도 강조한 철학자가 영국의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입니다. 인간의 본질을 설명하는데 성경보다 더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토마스 홉스는 그의 책 「리바이어던 Leviathan 」에서 성경적 인간관과 가깝게 설명한 책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잘 아는 대로 인간의 자연 상태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관계”로 “인간은 서로에게 늑대와 늑대 같은 존재”로 보았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은 이러한 홉스의 주장을 “마키아벨리의 이론보다 더 근대적이다”라고 평했습니다. 러셀은 “리바이어던이 출간되었을 때, 좋아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평가의 이유는 홉스의 인간에 대한 진술이 너무 충격적일 정도로 인간의 죄악된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의 인간관 못지않게 그가 끼친 현대적 사상은 인간의 평등에 대한 사상이었습니다. 홉스에 의하면 “자연은 인간이 육체적·정신적 능력의 측면에서 평등하도록 창조했다. 간혹 육체적 능력이 남보다 더 강한 사람도 있고, 정신적 능력이 남보다 뛰어난 경우도 있지만, 양쪽을 합하여 평가한다면, 인간들 사이에 능력 차이는 거의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이익을 주장할 수 있을 만큼 크지는 않다. 왜냐하면 체력이 아무리 약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음모를 꾸미거나, 혹은 같은 처지에 있는 약자들끼리 공모하면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충분히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적 능력들의 경우에는 체력보다도 오히려 더 평등하다고 나는 생각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동양인이나 서양인이나 절대로 차이가 없습니다. 홉스는 이 “능력의 평등에서 희망의 평등이 생긴다.”고 주장했습니다. 본 연구소는 이 ‘희망의 평등’을 이루기 위해서 능력의 평등을 열심히 가르치고 확산해 나가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믿음 없이 단지 철학적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점만으로는 외국인과 내국인이 하나 된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그것은 사도바울이 아덴에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고 고백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인류 조상의 근원이 같다는 것이요 모든 인류는 평등하다는 것이며 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한 가족이라는 표현이 좋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요 가족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근거한 믿음 안에서 진정한 평등사상일 때만 하나 된 세상이 가능한 것입니다. 똑 같이 우리는 ‘인류 조상의 근원이 같고 ‘모든 인류는 평등하고 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이 평등사상은 그 어떤 인종차별도 허용하지도 않고 용납하지도 않습니다. 본 연구소는 그런 차별을 말살시키는데 앞장설 것입니다. 영국의 기독교 정치철학자 에드먼드 버크(Edmond Burke)는 “악이 승리하려면 선한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악에 대해서 맞서서 싸워야하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본연구소는 성경적 평등사상에 근거해서 외국인을 불평등하게 대하는 어떤 악과 제도와 조직과 싸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려움과 곤궁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선한 사마리아인도 필요하고 악의 세력과 제도와 조직과 맞서고 싸우고 무너뜨리는 정의의 사람도 필요합니다. 제도와 조직은 인간이 부패하고 타락한 죄인이기 때문에 언제나 부패할 수 있습니다. 마이클 왈츠(Michael Walzer)는 그의 책 「성도의 혁명 The Revolution of Saints: A Study in the Origins of Radical Politics」에서 인간의 모든 조직은 인간의지와 결정의 산물이기 때문에 언제든 잘못될 수 있고 따라서 잘못된 결정과 의지에 의한 잘못된 제도와 조직은 바뀌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책에서 주장한 내용입니다. 이 마이클 왈츠의 입장을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roff)는 그의 책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출 때 까지 Until Justice and Peace Embrace」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책 서문에서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어느 기도문을 인용합니다. “오 하나님, 굶주리는 자들에게는 빵을 주시고, 빵을 가진 우리에게는 정의에 대한 굶주림을 주소서.” 이 정의의 굶주림으로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빵을 제공하는 정책적 연구소가 되겠습니다. 3. 본 연구소는 인류학적 고찰을 배울 것입니다. 프랑스의 사상가요 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는 「야생의 사고 La Pansee Sauvage」라는 책에서 어떤 문명이나 민족도 다른 집단 보다 우월한 것이 없다고 주장함으로, ‘우수한’ 서구 문명이 ‘미개한’ 원시문화를 지배한다는 서구 우월주의의 편견을 깨뜨렸습니다. 그 책은 이런 서구의 오만한 ‘환상에 대한 해체’를 선언한 책입니다. 그는 이런 인류학적 연구의 결과로 문명의 우열을 뛰어 넘어 상대방의 문화를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며, 공존과 상생의 의식을 가지게 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습니다. 한국사회에서 국제이주자와 다문화가정이 겪는 어려움 중 가장 원초적인 것은 그들에 대한 내국인의 편견과 차별입니다. 국제다문화 사회연구소는 외국인과 “차별 없는 세상” “차별 없는 대한민국”을 꿈꿉니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단초는 톨레랑스의 가치와 한계를 직시하면서 ‘모든 인류는 평등하다’는 인간에 대한 진정성 있는 교육과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4.본연구소는 철학적 고찰을 배우고 사용할 것입니다. 철학적 단상 프랑스의 유태인 철학자 엠마뉴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서양철학을 모두 ‘존재론’이라 못 박고 그것을 한 마디로 ‘주체 중심’의 철학이고 주장했습니다. 이 철학은 자신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인식의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이’와 ‘다른 것’에 대한 관심과 배려 대신 그들을 자신의 욕망의 충족과 정복의 대상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레비나스는 이 철학을 ‘전체주의적 철학’, ‘전쟁의 철학,’ 그리고 ‘이기주의적 철학’이라고 단죄합니다. 이런 주체 중심적 철학은 서구의 오래된 전통 즉 그리스 철학의 영향 이후 서구의 철학 예를 들면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내가 곧 세계(소우주)다”라고 생각하는 구조에서 쉽게 발견될 수 있습니다. 레비나스가 이런 서양 철학을 비판하는 이유는 서구가 식민지 정복과 1, 2차 세계 대전이 ‘주체 중심’의 철학 즉 ‘전체주의’와 ‘전쟁의 철학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가 시도하고자 한 것은 “전체성의 철학, 또는 전쟁의 철학에 대항해서 어떤 무엇으로 환원될 수 없는 개인의 인격적 가치와 타자에 대한 책임을 보여주는 평화의 철학”이었습니다. 그에 의하면 ‘주체중심’의 철학에서 생겨나는 ‘전쟁의 철학’에서 ‘평화의 철학’으로 바꿀 수 있는 방안 중의 하나는 모든 사람과 사물을 자신이 중심인 ‘주체’ 중심이 아니라 ‘타자’에 초점을 둘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구심점을 ‘나’로부터 ‘다른 이’로 옮기려는 철학의 혁명적 변화의 시도이고 그의 철학에는 어떤 점에서 서구철학의 자아 중심적 인간 사상의 모습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레비나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진정한 인간의 주체성을 '타인을 받아들임(l'hospitalite)' 또는 '타인을 대신한 삶(la sustitution)' 등으로 정의하는 가운데 인간의 삶은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가지면서도 이 세계는 타인의 관계를 통해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대와 책임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이 타자를 ‘다른 이의 얼굴’로 묘사한다. 그는 주장하기를 모든 “다른 이”는 마치 데카르트(Descates)에 있어서 신(神)과 같이 ‘다른 이’가 ‘영원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때 나타나는 ‘다른 이의 얼굴’은 단지 생물학적 물체가 아니라 자기중심적 우리를 꾸짖고 우리에게 호소하는 ‘고와와 과부’의 얼굴이요 ‘나그네와 이주자’의 얼굴이요 그 안에서 ‘여호와의 얼굴’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Mother Terasa)가 고통 받고 있는 타인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처럼 말이다. 진정한 주체성은 타인의 존재를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고 이 타자에 중심을 두는 레비나스의 철학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강조하게 되는데 이것은 오늘날 소외된 ‘고아와 과부’ ‘장애인’ 뿐 만 아니라 ‘이주자’와 ‘다문화가정’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5. 본 연구소는 팔레스타인 출신 기독교 사상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의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의 책에 언급된 사상을 참고할 것입니다. 많은 학자의 서평에 의하면 이 책은 “서구인들이 말하는 동양의 이미지가 그들의 편견과 왜곡에서 비롯된 허상임을 체계적으로 비판한 명저”로 평가받습니다. 이 책의 저자 사이드에 의한 오리엔탈리즘의 정의는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이 동양에 관계하는 방식으로서, 유럽 서양인의 경험 속에 동양이 차지하는 특별한 지위에 근거하는 것이다. 동양은 단지 인접되어 있다는 점만이 아니라, 유럽의 식민지 중에서도 가장 광대하고 풍요하며 오래된 식민지였던 토지였고 유럽의 문명과 언어의 원천이었으며, 유럽문화의 호적수였고, 또 유럽인의 마음속에 가장 깊은 곳에서 반복되어 나타난 타자 이미지이기도 했다”고 묘사합니다. 이것은 서양이 가지는 동양에 대한 타자의 이미지를 지리적·문화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만으로는 서양이 동양에 대해 가지는 구체적 성격을 잘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이드의 다음의 오리엔탈리즘이란 정의를 보면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이 동양을 침략하면서 조작된 동양에 관한 모든 편견, 관념, 담론, 가치, 이미지 등을 말한다.” 오리엔탈리즘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이렇습니다. “요컨대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억압하기 위한 서양의 방식이다.” 이런 오리엔탈리즘의 구체적 예를 유명한 유럽인 두 사람 크로머와 벨푸어의 언어에서 찾습니다. “동양인은 마치 (법정에서처럼) 재판을 받는 존재로 (교육과정에서처럼)학습되고 묘사되는 존재로, (학교나 감옥 에서처럼) 훈련받고 규율되는 존재로 또(동물도감에서처럼) 도해되는 존재로 묘사되었다. 요컨대 동양인은 어떤 경우에도 지배의 틀 속에 포함되며 그 틀에 따라 표상되는 존재이다.” 우리는 이런 오리엔탈리즘의 가장 구체적 모습을 영국의 이집트 외교관 크로머 그의 책 「현대 이집트」에서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동양인이나 아랍인은 우둔하고, 활력과 자발성이 없으며 정도에 지나친 아부와 음모, 교활, 동물학대를 일삼는다. 동양인은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둔감하고 의심이 많으며 모든 점에서 앵글로 색슨 인종의 명석함, 솔직함, 고상함과 대조적이다.”「오리엔탈리즘」을 한국으로 번역한 박홍규 교수는 “이 책은 1911년 일본어로 번역되어 한국 침략을 위한 일본의 참고 문헌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본 연구소는 서양이 동양에 대한 우월 및 지배사상이 비성경적이며 역사적으로도 얼마나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비판하면서 이런 잘못된 오리엔탈리즘이 한국에 오는 제 3세계 국가의 국민들에게 반복하지 않도록 건강한 견제와 비판 기능을 수행할 것입니다. 6. 본 연구소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도울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이론과 실천으로 몸소 모범적으로 살아왔던 손봉호 고신대 석좌 교수는 특히 ‘난민’에 대한 한국사회와 교회의 입장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난민에 대해서 세상에서 가장 인색한 우리나라와 이에 대해서 아무 감각도 없는 한국교회.”라고 질타 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또 “만약 우리나라에 미국이나 영국처럼 노동자들과 난민들이 대거 몰려왔다면 아마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극렬하게 국수주의적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지적하였습니다. 필자는 손봉호 교수의 지적이 많은 부분에 옳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필자는 고신대학교에서 세계화와 다문화 이해라는 과목을 강의하는 가운데 매학기 200명씩 수강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이 밀려오는 외국인들에 대한 우리의 입장과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강의에 참석한 학생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놀라운 희망을 보았습니다. 국제이주자와 다문화 이해를 위한 관심과 그들을 돕고자 하는 열망을 보면서 한국의 희망을 보았습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실천하기 위하여 우리 눈에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지만 난민 및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실천하는 사람들도 곳곳에 있는 줄 압니다. 하지만 본 연구소는 이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여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이유로 고국을 떠난 난민들과 사회적 약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들을 섬기겠습니다. 우리는 이 나그네들을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었던 것처럼 강도만난 그 사람들을 진실로 도와주는 사마리아인이 진정한 이웃인 것처럼 또한 “이웃이란 우리가 잘 아는 주위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이니라.”(약2:26)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연구소가 되고자 합니다. 성경의 기록목적도 선한 일을 도모하기 위한 실천적 목적을 가진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7). 어거스틴에 의하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다. 타인을 돕는 손, 가난한 자에게 달려가는 발, 불행을 보는 눈, 한숨과 슬픔을 듣는 귀를 가진 것이야 말고 사랑의 참모습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이유 때문에 모든 이주민들에게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7. 국제 이주자 및 외국인 근로자, 그들은 ‘노동력’이 아니라 ‘사람’으로 왔습니다. 여러 통계들이 2018년을 정점으로 대한민국의 인구는 인구절벽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저 출산, 고령화 및 젊은이의 3D 직종 기피로 이민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한국사회가 외국인 근로자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급속한 다문화 사회로 나아 갈 것으로 예상합니다. 이런 시대적 흐름 가운데 혹자는 “다문화 사회, 득이냐 실이냐?”라는 실용적 질문을 제기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본 연구소는 이런 실용적 관점을 참고는 하되 인간을 단지 “효율”과 “기능”으로 보는 기능주의적 관점 등 어떤 비성경적 관점으로 접근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유는 스위스의 소설가, 극작가 및 건축가인 막스 프리슈(Max Rudolf Frish, 1911-1991)의 지적처럼 “우리는 노동력을 불렀다. 그런데 사람들이 왔기 때문”입니다. 8. 본 연구소는 모든 문화의 다양성을 무시한 채 우리의 것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동화 주의적 접근을 반대합니다. 동화 주의적 사고방식 근저에는 타자를 나와 같아야 하는 존재로 상정하는 동일성 논리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유럽의 역사·예술사·인류학·철학·소통 이론들을 연구하며, 그 속에서 유럽이 낯선 이들을 어떻게 만나왔는지를 유형화한 독일의 선교학자 순더마이어(Theo Sundermeier)는 동일성 원리의 극단적 원형을 식민주의적 타자관 에서 찾습니다. 유럽의 식민주의자들이 중남미 식민지 피지배인 들을 대하는 태도는 흔히 둘 중 하나였습니다. 그들을 가르치고 개화시켜 나처럼 인간이 되게 하든지 아니며, 인간이 아닌 사물로 분류하여, 사고 팔수 있는 노예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오직 A 만을 살아남게 하는 사회, A와 다른 것이 존재할 수 없는 사회는 다양성 아닌 획일성이 지배하는 사회이며, 주류의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입니다. 일제 식민지 정책으로서, 일본식 성명 강요, 조선어 금지 신사참배 강요 등이 이러한 동일성 논리에 입각한 것입니다. 이런 동일성 논리의 잘못을 역사를 통해 뼈저리게 경험하고 그것을 저주했던 우리가 한국에 있는 외국인에게 우리가 당한 방식을 그대로 외국인들에게 적용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죄악입니다. 9. 본 연구소는 이런 동화 주의적 접근 대신에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다원주의적 입장을 취할 것입니다. 문화 다양성을 꽃피우기 위해 동일성 논리에 입각한 사고방식을 청산하고 나와 다른 문화를 그것의 고유성 속에서 파악하고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고 인정할 것입니다. 유네스코도 ‘세계 문화 다양성 선언’ 뿐 아니라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와 증진협약’을 통해 “문화 다양성이 인류의 중요한 특성이며” “인류의 공동유산으로”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본 연구소는 이러한 입장을 지지합니다. 10. 본 연구소의 무슬림에 대한 이해 국내 모 대학의 교수처럼 무슬림에 대한 실체와 다르게 옹호하는 입장도 배격하고 이슬람에 대한 실체와 다른 왜곡된 생각도 교정하고자 합니다. 이슬람에 대한 실체적 접근을 하고자 합니다. 이슬람에 대한 지나친 호교론적 접근 보다는 객관적인 실체에 대한 진리적 접근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10.1. 최근 국내에서 다문화 선교 사역을 하는 선교사님이 저에게 보낸 문자에 “이슬람은 적그리스도이다.” “교회와 가정을 파괴시키는 사탄의 도구” 라는 내용이 왔습니다. 이와 유사한 입장의 학자도 있습니다. 그는「중동 짐승 (Mideast Beast)」이라는 책의 저자 조엘 리차드슨 입니다. 저자는 에스겔, 다니엘, 요한계시록을 토대로 성경을 꿰뚫어 보는 안목과 이슬람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를 토대로 이슬람이 적그리스도가 될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슬람국가(IS)의 출현과 같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발흥과 전 세계적으로 이슬람이 파급되고 있는 이때에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이슬람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줍니다. 하지만 조엘 리차드슨의 입장과 대척점의 위치에 있는 책이 조나단 E. 컬버의 「이스마엘」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마엘과 그의 후손들을 향한 선교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밝힙니다. 하나님께서 하갈과 이스마엘에 대한 언급 가운데 부정적 언급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주장에 대해 구약학자 월트 브루거만은 그의 「창세기」주석에서 이 점에 대해 분명하게 동의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6장을 보면 아직 이스마엘이 하갈의 복중에 있을 때를 묘사하고 있는데,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에게 나타나서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 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16:11)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 이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들으신다.’ 라는 의미를 가지며 그 이름은 여호와께서 하갈의 마음의 고통을 들으시고 그녀의 고통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보이신다는 것을 항구적으로 상기시켜 주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마엘 이 광야에서 갈증으로 죽어 갈 때에 창세기 21:17은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 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21:13).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창21:18). 이런 축복을 한마디로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이와 함께 하시니.” (창21:20b). 이 어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 곧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기드온, 다윗, 예레미야 등에게 사용되었습니다. 구약학자 김의원 박사는 이 책이 기여하는 바는 “기독교인인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다시 읽어 보게 하고 이스마엘 을 향한 약속을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보게 해준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개입으로 이스마엘 의 후손들 사이에 엄청난 규모의 영혼들을 추수하게 될 것이다.”고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이슬람 지역인 이란, 파키스탄과 이집트 등에서 일어나는 내부자 운동으로 수많은 무슬림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고 있다고 선교현장의 사역자들이 전하는 것에서 증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0.2.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종교개혁 당시 개혁자들에게는 오스만 투르크는 무시무시한 대상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 대다수는 그 당시의 교황과 오스만 투르크를 “적그리스도”로 보았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칼빈의 저작을 볼 때 오스만 투르크에 대한 언급을 거의 발견할 수 가 없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그의 저작 「탁상담화」에서 ‘터키인들에 관하여’ 라는 장에서 오스만 투르크 이슬람에 대한 언급이 나타납니다. 루터는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예리하게 지적하면서도 이슬람이 가지는 문화와 종교의 좋은 점을 긍정적으로 인정하였습니다. 루터는 이슬람의 행위에 의한 구원, 종교전쟁, 일부다처제에 대해서는 비판하는 한편 이슬람 예배의 진지함, 이슬람 교사들의 엄격한 생활, 그들이 본 그대로의 진리에 대한 사랑, 터키 군의 엄격한 규율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이슬람에 대한 태도도 루터와 같은 균형 있는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0.3. 본 연구소는 무슬림의 유입으로 발생할 수 있는 다문화 사회의 위험성을 직시하지만 그들 가운데 “옥석”과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면서 접근하고자 합니다. IS(Islamic State, 이슬람 국가)가 저지른 리비아 해안에서 21명의 콥트 교도들의 참수, 브뤼셀과 파리 테러는 천인공노할 행위입니다. 그것은 악마의 짓입니다. 그 사악함에 대해 우리는 치를 떨어야 하고 어떤 강력한 대응도 불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IS에 대한 생각과 분노 때문에 대다수의 선량한 외국인 유학생, 국제 결혼자 및 무슬림 외국인 근로자들을 IS와 같이 취급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더러운 물을 버리기 위해 목욕 물통 속에 있는 소중한 아이를 버리는 잘못과 같습니다. 제 수업을 듣는 대학원생 중 한명은 한국에 몰려오는 무슬림들이 마치 대한민국을 접수하러 오는 “침략군” 같이 여겨진다고 했습니다. IS의 만행과 이명박 정부의 수쿠크(Sukuk)법 통과 시도와 박근혜 정부의 익산의 할랄 식품단지 조성시도를 보면서 많은 대다수의 기독교인들과 일반인들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을 사랑하여 방문하는 대다수의 선량한 외국인 유학생, 국제결혼 가족들과 근로자들도 있다는 것도 현실입니다. 따라서 본 연구소는 이러한 사실을 많은 국민들에게 알리고 그들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을 개선하고 관점을 변화시켜 성경적 가르침에 따라 그들을 “나그네” 와 “손님”으로 섬기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이 학술대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1. 본 국제학술대회는 유럽의 경우처럼 다문화 사회가 가져올 수 있는 부정적·파괴적·혼돈적 측면을 간과하지 않되 다문화 사회가 가져다 줄 긍정적·창조적·역동적 측면도 보고자 합니다. 많은 문화 연구자들은 “한 사회 속에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며 상생할 때, 그 사회는 엄청난 창조적 역동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봅니다. 특히 “문화적 다양성은 그 사회의 문화적 자산을 풍부하게 해 줄 뿐더러 차이를 껴안고 함께 사는 것을 배우게 함으로써 사회를 성숙시키는 것으로 봅니다.”, “유네스코의 문화 다양성 선언에서도, “창조는 다른 문화와의 접촉을 통해서 풍성해 진다고 봅니다.” 많은 학자들은 문화의 다양성을 “창의성과 발전의 원천‘으로 봅니다. 따라서 “각각의 문화전통은 창의성의 원천으로서 보존되어 후대에 전달되어야함”을 강조합니다. 유네스코의 내용 중 “문화 다양성은 발전을 위한 원천의 하나로서, 발전이란 단지 경제 성장의 관점에서뿐 아니라, 지적·감성적·윤리적·정신적으로 좀 더 만족스러운 삶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영국의 선교학자 레슬리 뉴비긴(L. Newbigin)은 다원주의를 문화적 다원주의와 종교적 다원주의로 구분합니다. 우리는 종교적 다원주의를 수용할 수 없지만 문화적 다원주의는 인정하고 존중합니다. 그에 의하면 문화적 다원주의는 “한 사회 안에 있는 다양한 문화와 생활 방식을 환영하고 그것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이유는 문화적 다원주의는 우리의 삶을 다양하고 풍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름의 평화’와 ‘차이의 공존’을 강조할 것입니다. 올해 노벨상 수상자 절반도 이민자라고 합니다. 올해 노벨상 수상자 총 11명 중 6명(물리학상 3명·경제학상 2명·화학상 1명)은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미국 대학에 소속된 이민자 출신입니다. 1901-2015년 까지 미국인 노벨상 수상자의 31%는 미국이외 국가에서 태어난 이민자 출신이라고 합니다. 금년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인 노벨화학상 수상자 프레이저 스토더트는 “미국이 지금 같은 최강국이 된 이유는 미국의 국경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답니다. 12. 본 연구소는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불평등과 인권유린 같은 중요한 이슈에 대해 내부 고발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것입니다. 이 이슈로 세계적 관심을 유발시킨 「막스 하벨라르 Max Havelaar」(1860) 소설을 참고할 것입니다. 이 작품은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노예제 폐지에 끼친 영향에 비견될 만큼 그의 조국 네덜란드와 수많은 식민지 국가 정책에 많은 변화를 촉발시켰습니다. 「막스 하벨라르」는 많은 서평자 들에 의해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중의 한권으로 언급됩니다. 정신분석학을 개척한 프로이트는 ‘10권의 책을 추천해 달라’는 의뢰를 받고 주저 없이 이 책을 첫 번째로 올렸다고 합니다. 그는 네덜란드의 소설가입니다. 네덜란드의 식민지인 인도네시아에서 지방관과 부이사관을 지냈으며, 대표작 「막스 하벨라르」는 이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썼습니다. 내용은 본국의 식민지 통치의 기만성과 학정을 풍자하였으며, 그의 정열적 이상주의는 근대 네덜란드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본명은 데케르(Eduard Douwes Dekker) 필명은 물타툴리(Multatuli 많이 고생했다는 뜻의 라틴어)이며 암스테르담에서 출생했습니다. 18세 때 네덜란드 통치하의 인도네시아로 건너가 자바 ·수마트라 ·셀레베스 등지의 지방관을 거쳐 1855년 자바의 레박 지구 부이사관으로 부임하였습니다. 그러나 가혹한 식민지정책에 시달리는 원주민을 동정하여 상관과 충돌한 끝에 사직하고 1857년 귀국하였으며, 네덜란드 ·벨기에 · 독일 등의 각지를 방랑하면서 저작 ·강연 ·기부 등에서 얻은 수입으로 생활하였습니다. 그의 대표작 「막스 하벨라르 Max Havelaar」(1860)는 인도네시아 체류 시의 체험을 바탕으로, 원주민에 대한 착취 ·억압의 생생한 정경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여 본국의 식민지 통치의 기만성과 학정을 풍자적으로 폭로하고 탄핵한 것으로, 그의 정열적 이상주의는 근대 네덜란드 문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책 한권으로 19세기 네덜란드의 정책을 흔든 필명이 물타툴리 (Multatuli)를 가진 데케르는 스스로 고생의 삶을 살면서 그 책을 통해서 네덜란드의 풍족한 삶 뒤에 식민지 인도네시아 민중의 피와 눈물이 있음을 폭로하고 각성을 촉구했습니다. 오슬로 국립대 박노자 교수는 그를 “해적국가의 양심”으로 묘사했습니다. 이 필명으로 유럽 전역에서 문명(文名)을 얻은 에두아르드 데커(Eduard Douwes Dekker)는 정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즐길 것을 두루 즐기고 규율적이면서도 편한 생활을 보내는 선량한 소시민을 모범으로 내세우는 유럽의 가장 부르주아적 국가인 네덜란드 대다수 국민과는 달리 데커는 본인이 의식적으로 고생의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강물에 빠진 개를 위해서 주저 없이 강에 뛰어내리고 극장에서 배우를 험담하는 지체 높은 부르주아 손님의 뺨을 갈기기도 하는 괴짜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 책을 통해서 돈독한 신앙심과 빈틈없는 법질서, 합리적 사업정신을 자랑하는 네덜란드가 부유하게 된 것이 결코 근검절약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렸습니다. 박노자 교수에 의하면 네덜란드 사회의 깨끗함과 조용함, 예절과 매너 뒤에는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착취를 당하는 식민지 인도네시아 민중의 피와 눈물이 있었던 것입니다. 부르주아 사회의 자본축적 과정의 약탈성을 데커가 과감하게 누설한 것입니다. 데커는 어떻게 해서 네덜란드 식민지 착취 체제의 내부 고발자가 된 것일까. 유럽의 ‘모범 문명국’의 ‘모범 식민지’인 인도네시아에서 그가 본 것은 소위 ‘강제재배 체제’아래서 강제 노동수용소의 죄수처럼 당국의 지시대로 특정 작물만 파종했다가 수확이 좋지 않을 때는 아무런 구휼도 없이 그저 대량으로 굶어죽어야만 하는 원주민들과 ‘공식적’ 착취에다가 개인의 치부를 위해서 물불 가리지 않고 온갖 부정부패 가렴주구를 다 저지르고도 처벌되지 않는 네덜란드의 탐관오리들, 네덜란드 당국과의 유착 덕분에 살인을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는 토착지주들이었습니다. 네덜란드의 국고와 상인들의 주머니들을 해마다 살찌우는 인도네시아의 커피와 사탕에서는 말 그대로 피비린내가 났습니다. 처음에는 순진하게도 지역 관료들의 비리를 인도네시아 총독에게 고발했다가 결국 생트집 잡혀 정직·직위해제 처분을 몇 번씩 당해본 데커는 이 체제 안에서의 개선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았습니다. 결국 그는 퇴직을 자청하고 유럽으로 돌아와 벨기에 수도 브뤼셀의 한 호텔에서 인도네시아에서의 식민지배 체제라는 살인기구를 폭로·단죄하는 소설의 집필에 몰두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현재 네덜란드 19세기 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막스 하벨라르」였습니다. 그의 필명 ‘물타툴리(Multatuli)는 라틴어 이름 그대로, 혹자는 “모질었던 그의 삶을 빼닮았다.”고 합니다. 작품 때문에 조국으로부터 불온주의자로 찍혀 각국을 방랑하던 그는 1887년 2월 19일 67세의 나이로 타계했습니다. 불온주의자로 찍혀 직업을 얻지 못한 데커는 각국을 방랑하며 집필과 연설로 생계를 꾸리다 1887년 2월19일 67세로 가난하게 죽었지만 ‘해적국가의 양심’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혹자는「막스 하벨라르」를 “식민주의를 말살”한 작품으로 추앙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소설로 평가합니다. 우리는 그가 남긴 명언을 기억합니다. “이 세상에는 단 하나의 악, 범죄, 죄악만이 있다. 그것은 심장의 부재이다(There is only one evil, one crime, one sin: lack of heart).” 내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에 대한 이 심장의 부재가 있는 곳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진리와 사랑 안에서 일깨우는 연구소가 되겠습니다. 13. 하나 된 세상을 꿈꿉니다. 본 연구소는 거스를 수 없는 다문화 시대에 다문화 가족과 한국인이 차별 없는 하나 된 세상 대한민국을 꿈꾸어 봅니다. 서구사회가 이루지 못한 하나 된 세상을 복음 안에서 이루고자 합니다. 대한민국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저력과 경험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의 경계를 뛰어 넘어 하나 되는 세상이 대한민국에서 성취되어 오만하고 콧대 높은 유럽에 역수출 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습니다. 우리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복음 안에서 선진화를 이루는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교회가 앞장 서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선진화는 고아, 과부, 나그네와 장애인등 세상에서 가장 힘없고 소외받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관심을 우리가 대변 해 줄 때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일에 교회가 가장 앞장서서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땅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교회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희망입니다. 이 교회가 룻과 보아스의 다문화 가정의 결혼을 통해 사사시대의 칠흑과 같이 캄캄하고 어두운 시대에 빛처럼 밝은 가정을 이루는 모범을 보이는 것처럼 그런 가정을 만드는데 본 연구소와 교회가 협력하며 나아갈 것입니다. 이방 나라의 모압 여인이었던 룻이 유대 남자 보아스를 만나 다윗의 조상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복음 안에서 수많은 외국인 여성들이 시어머니 나오미의 신앙으로 룻이 신앙을 가지고 어머니의 하나님을 믿고 따랐던 것처럼 그들이 한국의 룻과 보아스와 같은 믿음의 가정이 될 수 있도록 저희 연구소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룻·보아스 프로젝트’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 본 연구소는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다문화 가정의 역할 모델로 캐나다 총리 트뤼도의 개혁을 참고하고자 합니다. 첫째,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과 청소년들을 위한 ‘오바마 프로젝트’입니다. 몇 해 전 매일경제신문에서 다문화 가정 청소년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서 오바마 프로젝트를 구상했습니다. 그 후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를 본 연구소는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Barak Obama)는 국제 결혼한 다문화가정의 자녀였습니다. 아프리카 케냐출신의 흑인 아버지와 미국 캔자스 출신 백인 어머니 가운데 출생했습니다.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그의 삶을 조명하는 가운데 미국 시사저널 뉴스위크지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흑인 아버지와 이혼 한 뒤 외롭고 힘들게 사는 가운데 기초생활수급 대상자로 전락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 급식권(Food Stamp)으로 어린 시절을 영위했다고 합니다. 그의 고생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의 어머니가 인도네시아 남자와 재혼함으로 의붓아버지를 따라 이슬람 국가 인도네시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버지가 다른 인도네시아 여동생은 중국계 캐나다인과 결혼했습니다. 그래서 오바마는 “우리 가족이 다 모이면 유엔 같을 것”이라 했습니다. 어머니가 또 이혼 한 뒤 오바마는 외조부모들이 살고 있는 하와이로 보내졌습니다. 거기서 그는 백인들의 인종차별 가운데 심지어 ‘깜둥이’라는 말도 여러 번 들으면서 상처 많은 청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런 아픔과 상처 가운데 그는 마약도 손에 대기도 해서 한때 ‘문제아’로 낙인찍히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외할머니의 교육의 힘으로 오늘의 그가 되었다고 합니다. 교육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교육의 힘으로 다문화 가정 자녀 중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교육의 힘으로 오늘날 수많은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을 교육기관, 중앙정부, 지방정부와 기업과 교회와 연대와 협력을 통해 그들이 우리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는 연구소가 되고자 합니다. 둘째, 얼마 전 취임한 캐나다 트뤼도 총리는 내각 장관 30명중 절반인 15명을 여성으로 임명했고, 청년, 난민 또는 이민자, 원주민, 장애인 출신을 두루 기용했습니다. 그 중 난민과 이민자를 각료로 영입했습니다. 이것은 획기적인 발상입니다. 우리는 이집트에서 이런 획기적 발상을 먼저 시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셉의 예입니다. 그의 탁월한 예지의 능력과 국가 경영능력을 인정함으로 그가 어느 나라의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를 사용하였습니다. 다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헤로도토스는 그의 책 「역사」에서 이스라엘 주변의 여러 국가들이 다양한 인재를 받아들이는 문호를 개방하는 장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애굽, 바벨론과 바사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집트와 바벨론에서 국제적 인재로 쓰임 받은 요셉과 다니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요셉은 남의 나라에 노예로 팔려왔지만 그 나라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이런 개방된 세상을 만드는데 본 연구소가 도움이 되도록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입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세계 경제규모가 전 세계에서 상위권에 해당되는 국가입니다. 세계에서 인구 5천 만 명 이상에 개인국민소득 2만 5천불이 넘는 국가가 미국·일본·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 그리고 우리나라 밖에 없다고 합니다. 한국은 자동차·선박·전자 등에서 세계최고의 기술력으로 인정받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미국·일본·독일에 이어 네 번째로 특허를 많이 받은 나라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경제규모의 선진국만 아니라 다른 문화와 민족에 대해서도 배려하는 명실상부한 선진국 수준에 이르는 품격 있는 국가가 되어야 합니다. 일본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의 위대성을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개방성’에 두었습니다. 그 개방성 때문에 로마가 가장 위대한 제국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한국이 일본보다 더 강점이 있습니다. 한국이 일본이 가지고 있는 기술력과 장인정신에서는 뒤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타민족과 타문화에 대한 개방성에 있어서는 한국이 일본보다 앞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개방성이 가장 잘 나타나야 하는 곳이 국제 이주자와 다문화 가정에 대한 태도입니다. 다문화 가정 문제를 다루는 이유를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부정적 요소로 다문화 가정이 직면한 문제들을 우리가 소홀히 할 때 서구사회가 오늘날 직면한 문제들을 동일하게 겪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브뤼셀 테러처럼 국내에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이 잘못될 경우 IS와 언제든지 연계될 수 있는 ‘자생적 늑대’들을 양산할 수 있습니다.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은 현재 피부색 편견, 빈곤과 교육 격차의 악순환으로 심각한 소외 계층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청년 연령에 도달해서 실업 및 그 동안 겪었던 인종 차별로 분노와 적개심 가운데 사회 불만이 고조될 경우 우리에게 걷잡을 수 없는 무서운 부메랑으로 우리에게 돌아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 (Ulrich Beck)의 지적처럼 우리 사회가 그렇게 방치될 때 대한민국이 ‘위험 사회'로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긍정적 측면으로 이들이 다양한 문화와 언어 그리고 인구 증가와 함께 가져다 줄 노동력은 한국여성의 출산율 저하로 치닫는 인구 감소와 노동력 부족을 해결 할 수 있고 나아가 다문화 가정의 부모 나라와 대한민국 그리고 국제사회의 가교역할을 담당하는 국제적 인재로 기여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국제이주자와 다문화 가정을 ‘그들’과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데는 ‘2%’가 부족합니다. 이유는 레비스트로스의 나라 프랑스에서 최근 이런 철학에 기초한 다문화 정책을 포기하는 가운데 그들이 주장한 톨레랑스(Tolerance, 관용)의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톨레랑스는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화두(話頭)입니다. 모더니즘이 강조하는 보편성과 획일성 대신 포스트모더니즘이 강조하는 ‘다름’과 ‘차이’를 포괄하는 가장 매력적인 용어입니다. 이 사상에 기초한 것이 유럽의 다문화정책입니다. 몇 해 전 노르웨이 사건은 독일의 메르켈 총리, 영국의 캐머런 총리와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의 다문화주의 정책 포기와 궤를 같이 하는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이들의 ‘다문화주의 포기’ 발언은 1970년대 그것을 처음 도입한 호주와 캐나다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런데 유럽의 다문화주의 포기를 한국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국제이주자와 다문화 가정에 대한 톨레랑스 및 다문화정책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지는 피상성은 철저하게 경계해야 합니다. 다문화주의 포기는 그들이 주장하는 톨레랑스의 사상적 피상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이 피상성은 캐머런과 사르코지의 우파정권이 인권 보다는 국익 때문에 다문화주의를 포기하는 것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다문화정책과 톨레랑스를 전유물로 삼고 있는 유럽 좌파는 우파의 다문화 정책 포기를 비판하지만 그것이 실천 없는 수사(修辭)에만 그친다면 그 피상성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한 달 전 한국을 방문한 유럽의 학자와 함께 여러 가지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대화중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유럽인들 ‘톨레랑스’라는 단어 너무 좋아한다. 하지만 ‘톨레랑스’를 그렇게 열심히 부르짖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결정적 순간에 가장 ‘톨레랑스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을 것을 들었습니다. 너무나 위선적입니다. 해결책은 진정성입니다. 한국사회에서 국제이주자와 다문화가정이 겪는 어려움 중 가장 원초적인 것은 그들에 대한 내국인의 편견과 차별입니다. 국제다문화 사회연구소는 외국인과 “차별 없는 세상” “차별 없는 대한민국”을 꿈꿉니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단초는 톨레랑스의 가치와 한계를 직시하면서 ‘모든 인류는 평등하다’는 인간에 대한 진정성 있는 교육과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이 교육과 실천에 앞장서는 연구소가 되겠습니다. 국제다문화 사회 연구소 소개 1. 시작 및 경과 국제 다문화 사회 연구소는 2015년 부산지역의 다문화 사역에 관심을 가진 몇 분의 기독인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2월 1일 창립총회를 가지고 3월 24일에 국내 학술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는 11월 11일 금요일 오전 9:00-오후 6:00까지 고신대 손양원 홀(4강의동 4401호)에서 국제학술 대회를 개최합니다. 2. 구성 한국에 이주해 살고 있는 외국인 근로자, 유학생, 국제결혼 가정 및 다문화 가정 자녀들을 돕는 학술 중심의 국제 연구소입니다. 국외 및 국내 전국 75개 대학에 171 명의 각 영역의 교수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국외 학자 6명, 수도권에 약 50명의 교수 그 중 서울대 8명, 고려대 5명, 연세대 2명, 이화여대 2명, 한국외대 2명, 서강대 2명, 부산대 7명, 동아대 6명, 한동대 7명 호남지역 3명 기타지역의 교수님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고문은 김형오 전국회의장, 손봉호 고신대 석좌교수, 정근두 목사, 허남식 전 부산시장, 신정택 전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선교현장과 다문화 사역의 현장에서 일하는 30여명의 사역자들과 협력을 하고 있습니다. 본 연구소는 전문분야와 실무분야 중 약 200명의 인원들로 구성되어있습니다. 3. 협력사역 학문적 이론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문화 청소년들을 위한 (사단법인) 다문화 청소년 협의회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청소년들 가운데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젊은이들도 많지만 다문화 청소년들 가운데는 도움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한 젊은이는 훨씬 더 많습니다. 또한 긍정적으로 본다면 그들이 앞으로 한국사회와 그들 어머니의 나라를 연결할 수 있는 국제적 가교의 역할을 할 수 있기에 이것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4. 저희 연구소는 정책적으로 건강한 성경적 다문화 가정을 세우는데 앞장서 나갈 것 입니다. 본 연구소는 “다문화 가정, 선교의 땅 끝”으로 생각합니다. 다문화 가정의 요셉 가정, 룻과 보아스와 같은 건강한 성경적 다문화 가정을 세우기 위해 성경적·신학적·선교적·실천적 노력들을 수행할 것입니다. 특히 다문화 시대에 직면한 한국사회와 교회가 다문화 선교사역을 위해 서로 돕고 협력할 것입니다. 교회, 전문가, 현장사역자 및 정책 기관을 함께 엮을 수 있는 겸손과 섬김의 협력체가 되고자 합니다. 우리 속담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연대와 협력의 고리 역할을 하겠습니다. 현대는 Network의 시대입니다. 첫째도 연대와 협력, 둘째도 연대와 협력, 셋째도 연대와 협력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 하느니라”(전4:12). 4.1. 입법기관 즉 국회, 행정기관 여성가족부, 보건복지부, 교육과학 기술부, 법무부에 정책 제안 및 입안을 하고자 합니다. 4.2. 광역지자체인 부산광역시, 부산시 교육청, 경상남도, 김해, 울산, 양산시와 부산지역의 16개 구군에 속한 다문화 가족을 정책적으로 돕고자 합니다. 국제다문화사회 연구소 소장 고신대이병수 교수(010-6566-7176) 사무처장 송태운 (010-9686-2262) 홈페이지 http:irim.or.kr/
    • 기고/강연
    • 강연/특강
    2016-11-18
  • 토마스 선교사의 입국, 활동 그리고 죽음
    이 글은 2016년 8월 31일 부산 부산진구 부전동에 위치한 부전교회에서 행한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 순교 150주년 기념 예배 및 심포지엄’에서 행한 강연을 요약한 것임, 이 글에서 고무송, 『토마스와 함께 떠나는 순례여행』(쿰란출판사, 2004),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1』(생명의 말씀사. 2004), 오문환, 『토마스 목사전』(평양, 1928), 프라이스 스텔라, 『조선에 부르심을 받다』(Korea. com. 2016)와 Hamilton, Moffett, Rhodes 등의 자료를 참고하였으나 각주로 처리 못한점에 대하여 양해를 구한다. 토마스 선교사의 입국, 활동 그리고 죽음 ▲ 이상규(고신대학교, 교회사학) 시작하면서 부산지역의 부전교회를 비롯하여 주변의 여러 교회가 연합하여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150주년을 기념하여 함께 이를 기념하게 된 것은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일을 추진하여 주신 한국기독교사연구소의 박용규 소장님과 이 뜻에 공감하여 기꺼이 이 자리를 마련해 주신 부전교회와 박성규 담임목사님, 그리고 당회와 성도들에게 감사한다. 부전교회는 부산지역을 대표하는 건강하고 건실한 교회이고 박성규 담임목사는 부산의 영적 갱신과 부흥을 위해 헌신하시는 영적 지도자라는 점에 이의가 없을 것이다. 오늘 모임에 토마스 선교사에 대해 깊이 연구하신 박용규 교수님이나 토마스 목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수득하신 고무송 목사님과 같은 학자가 강연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사양했으나 부산에 살고 있다는 이유에서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을 송구하게 생각한다. 오늘 필자는 토마스 선교사가 걸어갔던 26년의 삶의 여정을 뒤돌아보고 오늘 우리들과 우리 교회에 주는 가르침이 어떤 것인가를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 16세기 독일의 위대한 화가였던 알브레히트 뒬러(Albrecht Durer, 1471-1528)는 ‘그림’(painting)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는데, 첫째는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고, 둘째는 죽은 자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초상화를 그렸다. 오늘 우리의 ‘기림’(commemorate)도 두 가지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는 일이고, 둘째는 토마스 목사가 걸어갔던 믿음의 길을 기리는 일이다. 이 목적을 위해 우선 토마스 목사가 살아갔던 삶의 여정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들의 신앙과 삶, 그리고 오늘의 교회 현실을 성찰해 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1. 출생과 가정 배경, 학교교육 로버트 저마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는 로버트 토마스(Robert Thomas, 1810-1884)와 메리 윌리암스(Mary L. Williams, 1817-1895)의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로버트 토마스는 당시 웨일즈의 위대한 설교가이자 웨일즈 부흥을 주도한 윌리엄 윌리엄스의 제자인데, 중부 웨일즈에 있는 신학교에서 수학했다. 1837년 4월 18일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1839년 여름 라야더(Rhayader)의 터바나클 교회 부임했는데, 바로 이곳에서 둘째 아들 저마인 토마스가 출생했다.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이곳에서 사역하는 동안 강력한 성령의 역사 일어났고 교회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였다. 이곳에서 목회하면서 1795년에 창립된 런던선교회에 후원금을 보내기 시작하는데, 후에 그의 아들이 런던선교회의 파송으로 중국으로 향하게 된 것은 흥미로운 관련이 아닐 수 없다. 로버트 토마스 목사는 1848년에는 몬머스셔(Monmouthshire)의 하노버교회로 이동하게 된다. 이때 저마인 토마스는 8살이었다. 토마스는 이곳 하노버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게 된다. 토마스의 교육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최초의 공교육이 이루어 진 곳은 란도버리(Landovery) 칼리지에 3년간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그는 헬라어와 라틴어, 그리고 프랑스어를 공부했는데 이때부터 다른 아이들에 비해 언어능력이 탁월했다고 한다. 그가 언어에 재능이 있었다는 점은 그 이후의 다른 기록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후 토마스는 오스포드대학교 지저스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나 나이 어리다는 이유로 입학이 보류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토마스는 도제식 의학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스텔라 프라이스(Stella Price)에 의하며 토마스는 외과의사가 되는 교육을 받으라는 주변의 권고를 받고 워터만(Waterman) 의사 휘하에서 2년간 의학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왕실의사면허 시험 제도가 있어 공인된 의사 밑에서 훈련을 받고 시험에 합격하면 의사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2년여 이런 교육을 받았으나 적성에 맞지 않았고, 육신의 치료자보다는 영혼의 치유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든 중 잉글랜드 노스헴톤 지역 온들(Oundle)에 있는 알프레드 뉴스 학교(Alfred Newth’s school) 보조교사로 부름을 받고 약 1년간 일하게 된다. 이 학교 교장 알프레드 뉴스는 중국선교를 준비했던 사람으로 로버트 모리슨에게 중국어를 배운 인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토마스는 알프레드 뉴스를 통해 중국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토마스는 또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캐를라인 갓프리(Caroline Godfrey)였다. 토마스는 주일에는 온들 회중교회에 다녔는데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던 중 존 갓프리의 외동딸 캐를라인 갓프리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여성은 토마스보다 2살 연상으로 후일 아내가 된다. 일 년 간의 교사생활을 마감한 토마스는 고향 하노버로 돌아갔고, 이때 아버지 청으로 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그것이 히브리서 13장 8절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는 본문의 설교였다. 아마도 이것은 자신의 신앙고백이었을 것이다. 토마스는 1857년에는 런던대학교 뉴칼리지에 입학했다. 온들에 있을 때 교장이었던 알프레드 뉴스의 친형인 새무엘 뉴스가 당시 학장이었다. 이곳에서 2년만에 학사학위를 받았고, 이후 3년간 최고의 금액인 밀스장학금을 받았다. 이 시기가 웨일즈의 영적 부흥기였는데 토마스는 교수드르이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 년 간 휴학했는데, 휴학기간동안 지역교회에서 설교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복학한 그는 중국선교에 대한 조바심으로 학교에 조기 졸업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가 선교의 이상을 갖게 된 데는 귀츨라프의 영향 또한 없지 않았다. 토마스는 1832년 충청남도 보령시의 고대도와 조선 해안을 방문했던 귀츨라프의 항해기를 읽은 것으로 보이는데, 귀츨라프가 서해안을 따라 여행하면서 성경을 보급했듯이 후일 토마스도 동일한 방법을 선택했다. 1859년 10월 토마스는 런던선교회 소속의 록하르트(Lockhart) 선교사의 설교 듣고 큰 감명을 받는데, 그의 설교 또한 선교사의 길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록하르트는 1861년에는 영국공사관의 공의로 베이징에서 활동하게 된다. 2. 선교사로의 길 토마스는 1863년 5월 뉴칼리지 졸업했다, 휴학기간을 포함하여 6년이 소요되었다. 졸업 후인 5월 29일에는 런던의 회중교회에서 온들에서 만난 캐롤라인 갓프리와 결혼했다. 이때 토미스는 23세, 아내는 25세였다. 결혼 6일 후인 6월 4일에는 목사안수 및 선교사 파송식이 거행되었다. 이로부터 7주 후인 7월 21일 토마스 부부는 그레이브센드(Gravesend) 항구 떠나 상해로 출발했다. 그가 중국으로 가게 된 것은 몇 가지 연쇄적 영향도 없지 않았지만 당시 중궁은 인도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선교지였고, 가장 많은 선교사가 파송된 지역이었다. 토마스는 영국을 떠난지 4개월 만인 1863년 12월 첫주 상하이(上海)에 도착했다. 런던선교회 상하이 지부장 무어헤드(William Muirhead)의 충심의 영접을 받았으나 두 사람 간의 친밀한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상하이 도착 2개월 후인 1864년 2월 4일 자로 부모님께 보낸 편지가 남아 있는데 이 문서에는 당시 정황을 헤아리게 해 주는 중요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중국 도착 4개월 후인 1864년 3월 11일 런던선교회의 그리피스 존(Griffith John)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는 한커우(漢口)로 갔는데 그 기간동안 임신 중이던 부인은 유산하고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1864년 3월 24일 2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토마스는 타지에서 아내의 죽음을 맞게 되었고, 이 일로 큰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사별의 아픔이치유되기도 전에 토마스는 또 다른 고뇌에 빠졌는데, 상하이지부장 무어헤드와의 갈등이었다. 선교관의 차이에서 유래한 갈등은 토마스에게는 심각한 현실이었다. 상하이에 주제하는 영국인을 위해 목회했던 무어헤드는 상하이가 선교 중심이어야 한다고 보았으나 토마스는 자국민보다 중국인 선교가 우선해야 된다고 보았고, 한커우로 가고 싶어 했다. 토마스에게 신설되는 학교 교장직 요청을 받았으나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음으로 이 사역은 그에게 매력적이지 못했다. 결국 토마스는 런던선교회를 사임하게 된다. 1864년 12월 7일이었다. 곧 이 일을 경솔한 행동이었다고 후회하게 되지만 토마스에게는 성급함과 무모함이 없지 않았다. 고무송 박사는 토마스에게는 모험정신, 강한 의무감, 무모함, 성급함, 엘리트 의식 등 몇 가지 기질 혹은 특징이 있다고 보았는데, 적절한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런던 선교회를 사임한 그는 현제 엔타이(煙臺)라고 불리는 지푸(Chefoo)로 이동하여 이곳 세관의 통역 및 감독관으로 일했다. 이때부터 1865년 8월 31일까지 약 8, 9개월간 일했다. 3. 제1차 조선 방문 지푸는 산동성 북부의 해안도시로서 조선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당시로 볼 때 외국과의 무역을 허용한 유일한 항구였다. 이곳에서 토마스는 두 사람의 한국인을 만나게 된다. 이곳의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은 두 한국인을 만나게 되는데, 김양선에 의하며 그 두 조선사람 김자평(金子平)과 최선일이라고 한다. 윌리암슨은 이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는데, 토마스도 함께 초대되었고, 이들을 통해 한국의 상황을 듣게 뙨다. 즉 한국의 로마가톨릭 신자는 5만명이 이르고, 11명의 신부들이 비밀히 활동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이런 접촉을 통해 토마스는 조선 선교를 자원하게 되고, 스코틀랜드성서공회 대리인 자격으로 1865년 9월 4일 ‘허락되지 않는 땅’(terra incognito) 조선으로 향하게 된다. 이것이 제1차 조선방문인데, 윌리암슨으로부터 한문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보급 받았고 또 약간의 경비 지원도 받았다. 이대 김자평이 동행했고, 중국인 우웬타이가 항해를 맡았다. 그 달 13일에는 황해도 해안에 도착했는데, 이곳이 황해도 옹진 자라리(紫羅里) 근포(近浦)였다. 이곳에서 성경을 나누어 주며 전도했고 한양까지 가려했으나 배가 파선되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을 떠난 그는 만주의 피쯔워 항구를 거쳐 도보와 말을 타고 여행하여1866년 1월 4일 혹은 5일 베이징에 도착했다. 지푸를 떠난지 4개월 만이었다. 조선에 체류한 기간은 2달 반 정도였고, 체류한 곳은 서해안, 곧 황해도나 평안도에 속한 도서지방이었다. 김양선 교수의 지적처럼 토마스를 인도했던 김자평이 황해도의 ‘육도’였기 때문에 자기가 잘 아는 지역으로 안내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곳에서 성경책과 기독교 문서를 배포했다. 이점은 토마스가 두 번째 조선으로 향하기 일주일 전에 런던선교회 지부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베이징으로 돌아온 토마스는 런던선교회 선교사로 재가입 되었고 근무지는 베이징 지부로 결정되었음을 통보 받았다. 즉 재가입된 것은 1865년 9월에서 11월 사이로 판단되는데 이 점은 토마스가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조선을 방문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토마스가 런던 선교회 티드만 회장에게 보낸 조선방문 보고는 당시의 사정을 헤아릴 수 있는 소중한 정보를 제공한다(스텔라, 100). 4. 제2차 조선 방문 고종 3년인 1866년은 우리나라 최대의 천주교 박해인 병인박해가 있었던 해였고 이때 대원군은 천주교를 금압했을 뿐 아니라 약 8천명의 천주교인이 죽임을 당했다. 이 때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던 베르뇌(Berneux) 주교를 비롯하여 9명의 프랑스 주교들이 참수되었다. 천주교도를 색출하기 위해 오가작통법으로 감시했고 해안은 봉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토마스는 두 번째 조선을 방문하게 된다. 토마스는 조선에서의 천주교 박해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조선행을 시도했다. 그러든 중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으로부터 통역관으로 조선으로의 동행을 요청했다. 로즈 제독은 베이징의 프랑스 대사관을 방문했는데, 프랑스 대리공사 벨로네(Bellonet)에게 조선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 소식, 특히 프랑스인의 처형 소식 알려주었다. 벨로네는 로즈에게 조선 진격을 요구했고, 약간의 조선어를 알고 있는 토마스에게 로즈 제독의 통역관으로 조선 동행을 요청한 것이다. 주저되는 바가 없지 않았으나 토마스는 조선으로 갈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에서 텬진에서 로즈 제독과 합류하여 지푸를 거쳐 조선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로즈 제독은 베트남 사이공에서 일어난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그리로 가게 됨으로 원래 계획이 취소되었다. 토마스는 조선으로 갈 길을 찾기 위해 일단 지푸로 갔다. 여기서 필요한 경비도 마련할 계획이었다. 여기서 다시 윌리암슨과 한국인 김자평을 만났는데 이들을 통해 조선방문의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든 중 1884년 7월 29일 지푸에 커다란 선박이 나타났다. 그것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였다. 원래 이 배는 1861년 영국에서 건조한 범선으로 ‘프린세스 로얄’호로 불렸으나 1863년 1월 미국으로 넘겨져 미 해군에서 사용하였고, 1865년에는 경매에 넘겨져 상선으로 개조되었다. 남북전쟁 당시 위력을 떨친 남군의 장군 셔먼으로 이름을 따 제너럴 셔먼으로 개칭되었으나 더 이상 해군 함정이 아니라 영국의 메도우 사(Meadows Company) 소속 상선이었다. 이 배는 조선에서 팔릴만한 비단, 유리그릇, 천리경, 자명종 등을 싣고 텬진항을 거쳐 지푸로 온 선박이었다. 토마스가 어떻게 이 배에 승선하게 되었는가는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행을 의도했던 토마스에게는 조선행의 호기였다. 그 배가 어떤 성격의 배인지, 조선 방문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따질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토마스는 베이징을 떠난지 26일 만인 1866년 8월 9일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했고, 이날 셔먼호는 조선으로 향했다. 알렉산더 윌리엄슨으로부터 상당히 많은 양의 한문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공급받았다. 제너럴 셔먼 호는 무장한 상선으로 승선인은 선주 미국인 프레스턴(W. Preston)을 비롯하여 항해사 윌슨(Wilson), 선장 페이지(Page), 화물관리인 영국인 호가스(G. Hogarth), 토마스 선교사, 두 사람의 중국인 이팔행 등 항해안내원, 그리고 중국인과 말레시아인 선원 등 24명으로 파악된다. 후의 일이지만 고종실록에는 프레스톤을 보래돈(普來敦)으로, 페이지를 파사(巴使)로, 호가스를 하갈특(何噶特)으로, 토마스를 최란헌(崔蘭軒)으로 표기했다. 물론 최란헌이라는 표기가 토마스를 표기한 것이 맞느냐에 대한 논란이 없지 않다. 지푸를 떠난 제너럴 셔먼호의 첫 경유지는 백령도의 두무진 항이었다. 이곳에서 토마스는 성경을 나눠주었고, 이때 제너럴 셔먼호를 목격했던 한 조선인의 목격담이 스텔라 프라이스는 자신의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124쪽). 곧 백령도를 떠나 돛섬으로 향했는데, 여기서 중국인 선장 우웬타이(Yu-Wen-Tai) 만나게 된다. 그는 여러 차례 조선의 해안을 왕래하며 장사했던 중국인이었다. 다시 배는 대동강 안쪽으로 행진했다. 외국선박의 입항이나 접촉을 금지했던 조선의 사정을 알고 있던 선원들은 안전을 위해 더 이상 진출 우려했으나 선장과 선주는 우웬타이의 경고를 무시했다. 조선 사정이 밝은 우웬타이는 더 이상 안내할 수 없다며 지푸로 돌아갔다. 그러나 셔먼호는 자만했다. 5. 대치상황과 제너럴 셔먼호의 최후 8월 16일에는 용강면 다미면 주용포항에, 8월 17일 금요일에는 황주 송산에 정박했다. 예상되는 바이지만 강둑에는 이양선을 보기 위해 조선인들이 몰려들었고, 조선관리는 긴급 회합하여 선박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셔먼호는 입항을 고집했다. 고종 3년, 곧 1866년 음력 7월 15일자 고종실록에는 당시의 상황이 언급되어 있다. 배는 더 진행하여 8월 20일에는 평양 초리방 사포구에 이르렀다. 이곳에서도 서양 선막은 구경꺼리였다. 많은 이들이 구경하러 몰려왔다. 오문환에 의하면 홍신길이라는 소년도 작은 배로 셔먼호 근처로 접근했고, 토마스는 갑판에서 그를 맞이하여 방으로 데리고 기독교 문서를 주고 그에게 케이크를 맛보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처음으로 감자를 보았다고 한다. 또 그날 밤에는 인근 쑥개마을에서 장인국 지달수 지달체 지택구 지택붕 지택주 장용국 지달해 표명보 등 아홉 사람이 토마스를 찾아갔다고 한다. 이 들 중 장용국 외에는 천주교 신자들인데 천주교 신자들을 보호해 줄 프랑스 선박을 기다리고 있던 중 셔먼호로 찾아간 것이다. 토마스는 자기는 천주교 신자도 프랑스 함대도 아니라고 말하고 개신교 선교사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성경과 기독교 문서, 그리고 빅토링여왕 얼굴이 새겨진 동전까지 주었는데, 천주교신자들은 성모 마리아상으로로 오인했다고 한다. 오문환 장로 기록의 정확성은 확인할 수 없으나 조선인과의 접촉의 사례로 제시되고 있다. 얼마 후 지달수와 지달해는 서양인 접촉했다는 이유로 참수되었다고 한다. 다음날 조선관리가 선박의 철수를 요구했을 때 셔먼호는 교역을 원한다며 비단, 유리, 망원경, 자명종을 조선의 쌀, 인삼, 종이, 호랑이 가죽 등과 교환하자고 했다. 그러나 교역을 금하는 정책에 따라 이를 거절했다. 거듭된 경고를 무시한 것은 제너널 셔먼호의 오만이었고 신중치 못한 처신이었다. 대치상황은 약 2주일간 계속되었다. 조선 관리들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제너럴 셔먼호는 평양행을 고집하고 8월 21일에는 평양 신장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도 구경꾼들이 몰려오았고, 토마스는 성경책 나눠주었다. 토마스로서는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의무를 다한다면 된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성경 받은 김영섭은 후에 기독교신앙을 받아드렸고, 두 아들 김종권과 김성집은 후일 장로가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도 조선 관리 김낙수는 선박의 도래경위를 조사하고 철수를 요구했다. 8월 22일 셔먼호는 평양 만경대의 작은 선 두로도에 닻을 내렸다. 토마스 이곳에서 100권의 성경 배포했다고 한다. 평양감사 박규수는 셔먼호의 공격에 대비하여 만경대를 둘러싸는 방어선 구축 지시했다. 그럼에도 셔먼호 대동강으로 계속 진입했다. 8월 27일에는 보다 심각한 사건이 일어났다. 셔먼호 승무원들이 순시대장 중군(中軍) 이현익을 억류한 것이다. 조선에 무단 침입했을 뿐 아니라 퇴거를 거부하고 조선관리를 억류한 일은 심각한 일이었다. 셔먼호의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 혹은 물이나 식량, 연료를 공급받기 위한 것이라는 설이 없지 않으나 방자한 행동이었다. 선원 중 한 사람은 이현익의 관원 명찰을 빼앗은 일을 더욱 그러했다. 이현익의 억류소식을 접한 주민들은 셔먼호에 돌을 던졌고, 석방을 요구했다. 관군은 사격을 가했다. 셔먼호 측에서도 발포했다. 이런 와중에서 박춘권(朴春權)이 혼자 배를 저어 가 이현익을 구출했다고 한다. 오문환에 의하면 그가 후에 평양의 장로교회 첫 인물이 되었다고 하지만 이에 대한 반대 의견도 있다. 셔먼호가 수세에 몰리자 더욱 낙폭하게 대응했다. 8월 28일 발포를 시작했고, 8월 31일에는 조선인 7명 사살되고 5사람 중경상을 입었다. 사태는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고종의 허락에 따라 평양감사 박규수는 셔먼호 공격을 지시했다. 9월 3일이었다. 박규수는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로서 개방론자였으나 셔먼호의 무단접근은 용인될 수 없었다. 곧 강 수위는 낳아졌고 배는 좌초되었다. 9월 4일 달빛도 없는 그믐밤이었다. 결국 선원은 쑥섬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작은 거룻배에 나무를 싣고 불을 붙여 셔먼호로 접근시켜 셔먼 호 불태웠다. 선원들 불길을 피해 강밖으로 헤엄쳐 나왔으나 강변에 정렬해 있는 군인들에 의해 창에 찔려 주임을 당했다. 토마스 목사도 남은 성경책을 안고 배에서 띄어 내렸다. 강가로 끌려나온 그는 모래사장에 머리를 숙이고 기도했다. 그리고는 마지막 성경을 관군에게 내밀었다. 관군의 칼은 토마스의 가슴을 내리쳤고 토마스는 9월 5일 대동강 쑥섬 모래사장에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토마스의 시신은 대동강변에 묻혔다. 6. 토마스의 순교 이후 토마스의 최후에 대해서는 상이한 기록이 남아 있다. 배가 불타고 선원들이 죽임을 당할 때 토마스는 뱃머리에서 홀로 야소(耶蘇)를 외치고 남은 성경을 뿌렸다는 기록이 있는가하면, 한석진 목사는 토마수가 순교한지 26년이 지난 1892년 당시 목격자로부터 제널 셔먼호가 불탈 때 토마스가 성경을 던지며 ‘야소’를 외치는 것을 들었다는 증언을 남겨주고 있다. 그런가하면 백기를 흔들며 목숨을 외국인도 한 두명 있었다고 한다. 그 한 사람이 토마스였을 것으로 말하는 이도 있다. 기록의 정확성을 검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을 균형 있게 판단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토마스의 죽음과 관련한 흥미로운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제너럴 셔먼을 구경하라 갔던 소년 최치량(崔致良, 1854-1930)에 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는 12살 때 숙부와 함께 1866년 9월 3일 토마스 순교장면을 목격하였고, 토마스 목사가 뿌린 한문성경 3권을 주었다고 한다. 책 소지자에 체포 명령이 내려 대부분 성경을 소각하거나 강변에 버렸다. 최지량도 이 성경을 집으로 가져 오지 못하고 영문주사(營門主事) 박영식(朴永植)에게 주었다고 한다. 박영식은 이 성경을 가져와 찢어 벽지로 사용했다. 오랜 후 최치량은 사업에 성공하여 물상객주(物商客主)가 되어 평양 대동문 안에 집을 사 여관을 운영하게 되었는데, 그 여관의 전 주인이 박영식이었다. 최치량은 이 벽지로 사용된 성경을 읽고 또 한석진의 전도로 회심하였고, 평양에서 최초로 마펫에게 세례를 받고 평양지역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널다리골의 홍종대(洪鐘大)의 집을 사서 예배처소로 사용했는데, 이것이 평양장대현교회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서구와의 불행한 접촉이었으나 그 이후 역사는 흥미롭게 전개되었다. 이 사건은 조선과 미국간의 외교문제로 발전하였고, 널리 알려진 바처럼 이 일이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 6)의 원인이 되었다. 이런 대결과 접촉이 후일에는 조미 양국 간의 통상조약(1882)으로 발전하여 외국인의 조선 거주를 보장 받게 된다. 결국 1884년에는 알렌이 입국하게 되는데, 토마스 순교 18년 후의 일이었다. 이런 점에서 박용규 교수는 토마스의 순교는 한국교회의 보이지 않는 이정표가 되었다고 말한다. 오문환은, 토마스의 피가 뿌려진 대동강 물을 마신자마다 예수를 믿었고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만큼 한국교회의 거룩한 도성이 되었다고 했다. 7. 남은 문제: 토마스는 순교자인가 침략자인가? 토마스 목사는 오랫동안 잊혀진 인물로 남아 있었다. 그가 죽임을 당하고 60년이 지난 1926년 평양의 오문환 장로는 토마스 목사의 생애와 죽음에 대한 소책자를 발간했다. 그것이 토마스의 생애와 조선 기독교사의 분수령이 되는 양란(洋亂)에 대한 기록이었다. 1927년에는 토마스 기념회가 조직되었고, 1927년 5월 8일 토마스 목사가 묻힌 쑥섬에서 토마스 목사 순교 60주년 기념예배가 거행되었는데, 이때 1천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1932년 9월 14일에는 대동강변에 토마스기념예배당을 건립했는데, 1933년 10월 14일 봉헌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10여년 이래로 토마스를 순교자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그 의 죽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감리교의 존스(G. H. Jones) 이래로 초기 선교사들은 토마스 목사를 순교자로 이정해 왔고, 설사 게일의 경우처럼 순교자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복음을 위한 그의 숭고한 죽음을 기리고 있고, 그를 정치적 희생자라든가 침략자로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는 토마스를 순교자로 볼 수 없다거나 심지어는 침략자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토마스는 무장상선을 타고 입국했기 때문에 순교자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조선에 와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순교자로 칭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 그가 죽은 이유가 기독교 복음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제너럴 셔먼호의 부당한 처신과 횡포에 기인하는 정치적인 죽임이라고 주장하다. 일견 고려할 점이 전무한 것은 아니지만 1860년대 상황에서 해석하는 일이 필요하다. 토마스가 복음의 열정, 곧 조선 선교의 이상을 가진 점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당시로는 조선 입국 방법이나 경로를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설사 무장상선이라 할찌라도 셔먼호 승선이 조선으로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였다. 제너럴 셔먼호의 신중치 못한 점은 충분히 공감하지만 셔먼호로 입국했기 때문에 순교자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선교사가 내한 한 이후 무엇을 했는가가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토마스는 1863년 이래로 선교사 신분이었고, 이미 조선을 방문하바 있고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그가 내한 즉시 죽임을 당했다고 해서 순교자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그의 죽음이 복음전도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는 주장도 고려할 점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기독교가 금압된 당시 상황에서 서양인의 죽음, 특히 서양선교사의 죽음을 비종교적 행동으로만 취급할 수 없다. 1866년 병인양요 때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죽음은 정치적 성격이 강했고, 외세에 의한 침략세력으로 간주되었다. 그 누구도 프랑스 신부의 죽음을 순교가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금지된 상태에서 ‘선교사의 현존’ 자제가 정치적 행위일 수 있고, 정치적 침략세력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볼 수 없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토마스 목사가 제너럴셔먼호로 입국한 일이나 셔먼호의 부당한 혹은 불법적인 행위는 지탄받을 수 있지만 토마스 목사는 조선인에게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려는 선한 의지는 부정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토마스가 죽임을 당한 후 초기 선교사들을 시작으로 한국교회는 토마스를 순교자로 간주하고 그의 죽음의 의미를 기념해 왔다. 15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토마 목사의 삶과 죽음을 통해 오늘우리의 모습을 성찰해 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 기고/강연
    • 강연/특강
    2016-09-08
  • 이슬람(2)
    (이 글은 5월 25일(수) 거제교회에서 개최된 제1회 부산이단대책세미나 강의안입니다.) 이슬람(2) ▲ 이만석 목사 (현. 한국이란인교회 담임, 4HIM 대표) 그렇다면 우리가 그들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서 이슬람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첫째 : 이슬람의 타끼야(Taqiyya) 교리를 알아야 한다. 타끼야란 위장 즉 거짓말을 허용하는 교리다. 이를 이란어사전에서 찾아보니 “피하다, 삼가다, 절제하다”등의 뜻이 있는데 종교적인 의미로는 “금전적이나 생명의 손해가 예상될 경우 자신의 생각이나 종교를 숨기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슬람 외에 어떤 종교가 교리적으로 거짓말을 허용하는가?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무함마드의 말(부카리 하디스)을 인용하여 세 가지 경우에 거짓말을 허용하고 있다. 즉 1. 전쟁 상황에서 승리를 위해 적을 속이는 것 2. 다투고 있는 두 그룹을 화해시키기 위한 거짓말 3.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아내를 속일 필요가 있을 때 등 그런데 이슬람의 교리를 보면 “비무슬림들과는 항상 전쟁상태”라는 것이다. 이슬람의 관점에서 보면 세상을 둘로 구분하는데 하나는 무슬림들이 살고 있는 평화의 집(Dar al Salam)과 비무슬림들이 살고 있는 전쟁의 집(Dar al Harb)으로 나눈다. 그러므로 비무슬림들은 전쟁의 집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거짓말이 용인되며 특히 그들을 이슬람으로 복속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이슬람을 미화시키는 모든 거짓말은 허용될 뿐 아니라 장려된다. 심지어는 꾸란의 번역도 미화, 왜곡 번역이 허용된다. TV 강연에서도 이슬람의 교리에 대해서 미화시킨 거짓말로 강연할 수 있다. 한 번의 거짓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이슬람에 대한 호감을 갖게 할 수 있다면 알라께서 기뻐하실 것이라는 논리다. 예를 들면 “한 손에 칼을 한 손에 꾸란을”이라는 사상은 이슬람에 없으며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는 거짓말이다. 이슬람의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를 보면 이슬람의 신앙고백과 칼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이슬람의 대표적 사상이지만 타끼야 교리에 의해서 평화의 종교로 둔갑시켜 대한민국 교과서에서 이런 구절들을 모두 삭제하였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이라는 말은 꾸란 9장5절을 표어로 만든 것이다. 꾸란 번역도 거짓으로 미화시켜 놓았는데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3장 54절을 들 수 있겠다. 원래 3장 54절은 “그들도 알라를 속이려 했고 알라도 그들을 속이려 했는데 알라는 최고로 잘 속이는 분이시다.”라는 내용이며 영문번역은 이렇다. And they (the disbelievers) schemed, and Allah schemed (against them): and Allah is the best of schemers.(Pickthall역) 그런데 아랍어 꾸란 원문을 보면 이 문장에서 Makara라는 단어가 세 번 사용되었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보급된 아랍어 사전은 최영길, 이두선 씨가 엮은 것인데 거기서 찾아보면 Makara는 “속이다. 거짓말하다”라는 뜻 밖에 없는 단어다. 그렇다면 “알라는 가장 잘 속이는 분”이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사전을 만든 최영길씨가 번역한 한글 꾸란은 그 단어를 ’가장 훌륭한 계획자’라고 번역해 놓았다. 경전을 번역하는 태도가 이런 정도라면 나머지 문서들이나 교리와 율법의 왜곡과 미화는 얼마나 심할까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 우리가 가장 많이 속고 있는 것들 중 하나는 이슬람의 신 알라가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다는 생각이다. 그들은 이슬람은 알라(Allah)라는 신을 섬기고 있는데 이는 창조주 절대자 전능자 유일신을 의미하며 기독교나 유대교에서 믿는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철저히 타끼야(위장)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알라라는 신은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소속되었던 꾸라이시 족속의 종족신이었으며 라트(Lat) 우짜(Uzza) 마나트(Manat)라는 세 딸을 두었던 메카의 카아바 신전에 안에 있었던 360개 우상들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슬람 학자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꾸란에 이슬람의 신은 기독교의 신과 같은 분이라고 분명히 명시 되었다고 한다.(꾸란29:46) 꾸란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내용은 진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진실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누구도 그 권위를 부인할 수 없는 이슬람의 경전 꾸란과 기독교의 경전 성경을 비교해보면 확인할 수 있다. 성경: 예수를 주님으로 시인하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행16:31, 마16:16) 꾸란: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자는 믿음에서 떠난 불신자다.(꾸란5:17, 꾸란5:72) * 성경과 꾸란의 이 두 구절은 이를 계시한 영이 정반대의 영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하나가 성령의 계시라면 하나는 악령의 계시가 분명하다. 성경: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 사함과 구원을 위해 열어 놓으신 유일한 길이다. 꾸란: 십자가는 유대인들이 만든 상상의 산물이다.(꾸란4:157) *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은 인류를 지옥으로 보내기 위한 사단의 최대의 전략이다. 성경: 예수께서 그리스도(구세주)라는 것을 부인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다.(요일2:22) 꾸란: 예수는 장차 아흐마드(무함마드)가 온다는 소식을 미리 전해주러 왔다.(꾸란61:6) * 예수 그리스도를 무함마드의 발아래 두려는 간악한 거짓말이다. 성경: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다.(요일2:22) 꾸란: 신에게 아들이 있다고 하는 자들 때문에 큰 저주가 임할 것이다.(꾸란19:88-91) * 이 구절들을 비교해 보면 이슬람의 알라는 적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이 외에도 이슬람의 알라는 수시로 계시의 내용을 취소하고 다른 구절로 대체할 수 있는데(꾸란2:106), 하나님께서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응하리라(마5:18)고 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일부일처에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이혼절대불가를 말씀하셨는데 꾸란에서는 일부다처를 허용하고(꾸란4:3) 이혼은 두 번까지(꾸란2:229)라고 한다. 이 외에도 하나님은 소통이 가능한 인격적인 신이지만 알라는 인간과 직접 소통이 불가능하며(꾸란42:5) 하나님은 심판권을 인간에게 양도하지 않으셨는데(롬12:19) 알라는 인간들에게 심판을 집행하라며 어디서 발견하든지 살해하라(꾸란9:5, 꾸란4:89, 꾸란4:91)고 하는 등 모든 면이 다른 신이지만 같은 신이라고 주장하며 속이고 있다. 셋째 : 기독교와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같이 섬기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은 이것도 거짓이다. 우리가 이슬람의 주장들을 들어보면 그럴 듯하게 들리는 것은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나 꾸란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성경의 인물들과 같다는데서 혼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엄청난 금액의 홍보비를 투자한 덕분에 학계가 속아왔고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종교라는 말에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강력하게 주장한다고 다 믿을 수는 없다. 한 번 확인해 보자. 성경 : 아브라함의 아버지 이름은 ‘데라’였다.(창11:31) 꾸란 : 아브라함의 아버지 아름은 ‘아자르’였다.(꾸란6:74) * 아무리 이름이 똑 같다고 해도 아버지가 다르다면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성경 : 아브라함의 이름은 99세 때부터 바뀐 이름이다.(창17:5) 꾸란 : 아브라함은 어려서부터 그 이름이 바뀌지 않았다.(꾸란21:60) * 그 때는 수백세를 살았기 때문에 99세는 젊었다고 할 수 있다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지만 성경은 90세의 사라가 나이 많아 늙어서 낙이 없다고 했다.(창18:11-13) 성경: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예루살렘)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다.(창22:2) 꾸란: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서 이스마엘을 번제로 드리려 했다.(꾸란37:102-107) 성경: 아브라함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쪽으로 간 일이 없다. 꾸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 메카의 카아바 신전을 건축했다.(꾸란2:127) 이 외에도 이슬람의 가르침에 의하면 아브라함을 불 속에 던졌는데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고 알라께서 구해 주셨다고 하는가 하면(꾸란21:69) 아브라함이 책을 계시 받았다고 한다.(꾸란87:19) 이로 볼 때 꾸란의 아브라함은 성경의 아브라함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마찬가지로 꾸란의 예수도 성경의 예수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꾸란의 예수는 아랍어로 이싸(Isa)라고 하는데 성경의 예수는 아랍어로 야슈아(Yashua)라고 한다. 이것을 한글로 모두 예수라고 번역하여 속이고 있는데 꾸란의 예수는 알라(Allah)만을 섬기라고 전도하며 다녔던 무슬림이었으며(꾸란5:72) 삼위일체도 거짓이며(꾸란5:73) 십자가에 죽지도 않았고(꾸란4:157) (부활도 없이) 그대로 승천했으며(꾸란4:158)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며(꾸란19:88) 성자 하나님도 아니고(꾸란5:17)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도 아니고(꾸란5:72) 다만 무함마드가 올 것을 미리 알려 주기 위해서 왔던(꾸란61:6)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꾸란5:75) 한다. 꾸란에 등장하는 성경인물은 성경의 내용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들은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을 자신의 종교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성경에서 이름을 빌려다가 활용하며 계시를 빙자해 만들어낸 이야기들로서 역사적으로 입증할만한 근거 자료가 전혀 없는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고 속지 말아야 한다. 넷째 : 대한민국의 딸들을 구해야 한다. 며칠 전에 서울의 한 경찰서에서 관내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관리하시는 외사과 담당자를 만났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관내에 거주하는 이슬람국가에서 온 사람들 중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에서 오신 분들이 30명 정도 살고 있는데 100% 한국 여성들과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산다는 것이었다. 남녀평등 시대를 지나서 여성 상위시대에 살고 있는 한국 여성들이 무슬림들에게 속아서 결혼하고 무슬림이 되어서 평생을 이슬람 율법의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슬람에서 여성은 남성의 절반의 가치를 가지는 존재다. 상속도 남성의 절반을 받아야 하며(꾸란4:11) 여성의 증언은 남자의 증언의 절반의 가치가 있으며(꾸란2:282) 여성은 원할 때 씨를 뿌릴 수 있는 밭이라고 꾸란은 말한다.(꾸란2:223) 특히 알아야 할 점은 이슬람의 결혼 개념은 한 번 결혼하면 평생을 산다는 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아랍어로 결혼을 ‘니카’라고 하는데 이는 원래 ‘성관계’를 의미한다. 꾸란에는 성관계와 결혼을 ‘니카’라는 한 단어로 혼용하고 있다. 그래서 결혼계약서는 성관계 계약서이며 남편이 메흐르(Mehr:혼자금으로 번역됨)라는 금액을 주고 독점 성관계 계약을 한 것이다. 아내는 평생의 반려자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성관계의 도구로 계약을 통해서 매입한 것이며 따라서 원하면 구두로 3회만 통보를 하면 이혼할 수 있다.(꾸란2:230) 이혼이 이렇게 쉬운 이유는 이미 돈 주고 산 물건이기에 언제든지 더 좋은 물건이 보이면 하나 더 취하든지 혹은 바꾸거나 버리든지 할 수 있는 권리가 구매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한민국에서는 결혼 당시에 메흐르(혼자금)를 정하는 법이 없기에 원할 때 부담 없이 버리고 달아나는 경우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슬람권에서 온 불법체류자들이 한국여인과 결혼하여 합법 체류자격을 얻은 후에 한국 국적을 얻으면 이혼하고 조국의 본처를 초청해 와서 같이 사는 사례도 종종 있다. 이슬람의 결혼식에서는 신과 하객들 앞에서 평생을 이 사람만을 반려자로 사랑하며 동거하겠다는 서약을 하는 순서가 없다. 그러므로 무슬림과 결혼하고자 하는 자매가 주변에 혹시 있다면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질문을 통해서 그녀를 구해줄 수가 있을 것이다. ㉠ 남편이 당신 외에 다른 여인들을 또 얻는다고 해도 결혼하고 싶은가? 꾸란에는 무슬림들은 4명의 아내까지 얻을 수 있도록 허락한다.(꾸란4:3) 내 남편은 안 그럴 것이라고 속단하지 말라. 종교적으로 허락된 사항이며 자신의 권리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있다. ㉡ 언제든지 구두로 3회만 통보하면 간단하게 이혼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최근에는 휴대폰 문자 메시지로 혹은 e-mail로도 3회 통보하면 이혼이 성립된다고 한다. 이혼은 남편의 권리이며 반드시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이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원하면 언제든지 아내를 바꿀 수 있다.(꾸란4:20) ㉢ 아내가 불순종하면 구타할 수 있는 권리가 남편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꾸란4:34)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남편이 아내를 때릴 때 제3자는 왜 때리냐고 물어서는 안 된다.”(하디스)고 말했다는 것은 이슬람의 율법이다. 최근에는 영국에서도 샤리아 법정이 생겨서 이슬람 율법으로 재판을 받기에 아내를 구타하는 무슬림들을 처벌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그 결혼은 원천 무효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한국에서는 부부로 혼인신고해서 같이 살 수 있지만 남편이 귀국하면 아내는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는 한 부부자격으로 함께 살 수 없다.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해서 선교목적으로 결혼했어도 남편의 나라에서는 그의 개종은 합법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기독교인과의 결혼을 인정받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 ㉤ 이혼한다면 자녀는 무조건 남편의 소유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가? 이것은 이슬람의 율법의 규정이기 때문에 남편이 사망했을 경우에도 남편의 가족들이 원한다면 억울해도 아이를 빼앗기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 이슬람에서는 아내와 재산 공유를 해야 하는 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아내에게는 의식주를 제공하고 성관계를 갖는 것이 전부다. 모든 재산은 남편의 것이고 아내는 여러 명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남편과 재산을 공동 소유한다면 분배에 많은 어려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 이슬람에는 이혼 위자료라는 개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결혼 당시에 이미 메흐르(혼자금)를 몸값으로 치렀기 때문에 의식주 제공으로 충분하며 이혼 시에는 더 이상 아무런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여인의 몸을 평생 독점 사용할 수 있는데 해방시켜준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이혼은 아랍어로 딸락(Talaq)이라고 하는데 이는 해방시킨다는 의미이고 남성만 이혼한다(딸락을 준다)는 말을 사용할 수 있으며 여성은 이혼 당한다(딸락을 받는다)는 의미로만 사용할 수 있도록 용법이 한정된 단어다. ㉧ 여인이 이혼 당하면 숙정기를 거쳐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숙정기란 태중의 아이가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3번의 생리를 볼 때까지 남편의 집에 머물면서 기다려야 하는 기간을 말하며 그 기간 중에 남편은 원하면 이혼을 취소할 권리가 있으며(꾸란2:228) 기다리는 동안 의식주는 남편이 제공하며 임신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떠나야 하고 임신이었다면 출산과 동시에 떠나야 한다.(꾸란65:4) 이슬람의 결혼 문화를 들어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같은 문화권에서 살면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도 결혼을 한 후 함께 마음 맞춰 살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인데 언어도 문화도 제대로 모르고 이슬람 율법도 모르면서 어떻게 함부로 몸을 허락하고 평생의 운명을 맡길 수 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더구나 저들은 타끼야 교리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도 얼마든지 위장하고 속일 수 있다. 우리가 이슬람의 정체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특히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속히 알려 줘야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다문화 정책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무슬림들이 급격히 늘어나는 것을 방관하고 있다. 오히려 산유국 출신이라고 우대하고 있는 경향까지 보인다. 그러나 이슬람의 정체를 바로 알지 않으면 유럽처럼 우리나라에도 이슬람 때문에 큰 재앙이 올 수 있다. 유럽에서 일어나는 지하철 테러나 열차테러나 학교 테러 등의 소식은 이대로 가다보면 멀리 않아 우리 가족들이 그 희생자 명단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보장은 누구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꼭 알아야 하는 것은 무슬림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슬람은 악한 영이요 악한 가르침이지만 그 영에 속고 있는 무슬림들은 우리와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들이며 우리의 사랑의 대상들이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 하늘에 속한 악한 영들에 대한 싸움이다.(엡6:12) 그러므로 무슬림들을 미워하며 육적인 싸움으로 몰고 가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 주변에 와 있는 무슬림들은 악한 거짓 영에 속고 있는 불쌍한 피해자들이다. 그들을 위해서 사랑으로 섬기면서 주님께 기도해서 그들의 감겼던 눈이 떠지고 참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것이 이 시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라고 생각된다. 여러분들의 사람의 섬김과 기도를 통해서 수많은 무슬림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와 구원에 동참하는 귀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원한다. 4. 무슬림들은 왜 타문화에 적응이 힘들까? 한국 사람들은 오랫동안 홍익인간을 숭상하는 단군의 후손으로서 단일 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20세기 후반부에 필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가끔 길거리에서 눈과 머리카락 색깔이 다른 외국인을 만나면 깜짝 놀라서 그 외국인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곤 했다. 그런데 21세기 들어서면서 외국인들이 급증하더니 이제는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숫자가 150만을 넘어섰고, 한 해 동안 결혼한 부부들 중에서 외국인과 결혼한 사람이 10% 정도나 된다고 한다. 이제 대한민국은 더 이상 단일민족을 고집할 수 없게 되었으며 어쨌든 우리 주변으로 몰려든 외국인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장관급 인사 15명을 포함한 전문가들 50여명으로 구성된 국민 대통합위원회를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두고 다문화정책이 우리나라에 성공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독일의 안젤라 메르켈 총리나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프랑스의 사르코지 전 대통령 같은 유럽의 선진국 지도자들은 자기 나라의 다문화 정책이 이슬람 때문에 실패했다고 이미 공언했다. 그들도 쏟아져 들어오는 외국인들을 융화시켜 평화로운 복지국가를 유지하려고 최선을 다해 다문화 정책을 추진했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의 다문화주의자들은 유럽의 실패를 거울삼아 제도를 보완하고 풍성한 재정을 포함한 정책적 지원을 하면 우리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럴듯한 환상에 속고 있는 것 같다. 유럽의 정상들과 정치인들인들 왜 그런 생각을 안 해 봤겠는가? 재정지원 뿐 아니라 기존의 정책과 제도와 법을 바꿔가면서까지 무슬림들의 비위를 맞춰 평화롭게 공존하려고 노력해봤으나 안 되더라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다. 우리나라가 유럽에서 실패한 다문화정책을 억지로 추진한다면 우리는 그들보다 더 비참하게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이 그들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복지혜택이나 재정이나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유럽보다 결코 높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무슬림들은 유럽에서 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 문화에 동화될 수 없었을까? 그것은 특별히 문제가 많은 무슬림들만 유럽에 모여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몇 가지만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Sharia)의 기본 정신 때문이다. 샤리아의 기본정신은 “알왈라 왈바라(Al Walla, Wal Bara)”이다. “알왈라(Al Walla)”는 무슬림들끼리는 국적, 성별, 피부색, 인종, 언어, 신분에 관계없이 무조건 돕고 보호하고 사랑하고 존경해야 한다는 말이다. 반면 “왈바라(Wal Bara)”는 이슬람 외의 종교를 가진 자들과는 국적, 성별, 피부색, 인종, 언어, 신분에 관계없이 절대로 존경하거나 사랑하거나 친절을 베풀거나 돕거나 친구로 사귀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철저히 미워하며 대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정신 때문에 이슬람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열성적인 무슬림들은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과 평화롭게 공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며, 특정 지역에 무슬림들끼리 모여살기를 선호하고 자신들의 신앙과 문화를 지키는 게토를 형성해 그 영역을 넓혀 나가게 된다. 둘째 : 이슬람의 세계관 때문이다. 이슬람에서는 세계를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한 쪽은 무슬림들만 살 수 있는 “평화의 집(다르 알 쌀람:Dar al Salam)”이며, 또 한 쪽은 기독교와 유대교를 포함한 불교 힌두교 배화교 라마교 유교... 등 이슬람 이외의 모든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사는 “전쟁의 집(다르 알 하릅: Dar al Harb)”이다. 그래서 열성적인 무슬림들은 설교나 강연들을 통해서 이슬람 이외의 문화권의 사람들과는 항상 “지하드(알라를 위한 전쟁)”상태라는 것을 의식하며 살도록 교육 받는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이런 교육내용이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하지만, 종종 그들의 교과서에 실린 이런 내용들이 서방세계의 매스컴에 폭로되어 충격을 주기도 한다. 전쟁상태라면 그들의 모든 행동은 일반적인 윤리 기준으로 평가하면 안 되고 전시행동지침이 적용된다는 의미이다. 전시에는 적을 속이는 것은 훌륭한 전략이고 적의 요인들을 암살하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며 많은 적들을 죽인 사람은 영웅이 되고 다른 사람들이 본받아야할 모델이 되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면 온 세계가 혐오하는 오사마 빈라덴 같은 끔찍한 테러범이 이슬람권에서는 영웅으로 존경받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셋째 : 무함마드의 행동지침 때문이다. 무함마드가 보여주었던 행동은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무슬림들의 모델이며 율법의 근원이 되었다. 이를 아랍어로 우스와 하사나(uswa hasana)라고 한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힘이 없을 때는 “종교는 강제로 하지 말지니라(꾸란2:256)”라며 유화정책을 폈다. 그러다 주후 622년 메디나로 이주한 후 세력을 결집하여 힘이 생기자 주변의 족속들을 잔인하게 학살하였고, 주후 630년 고향인 메카(Mecca)까지 점령하고는 “이제부터는 두 개의 종교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특히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변질된 경전을 가지고 있는 타락한 무리이기 때문에 “가장 사악한 피조물”(꾸란98:6)이라며,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는 “이교도들은 어디서 발견하든지 살해하라”(꾸란9:5)고 명령했다. 그래서 이슬람은 초기부터 전쟁과 칼로 세력을 넓혀 나갔다. 어떤 이들은 “한 손엔 꾸란을! 한 손엔 칼을!” 이라는 사상은 이슬람에 없는 것이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이는 이슬람의 여러 교리 중의 하나가 아니라 이슬람의 핵심교리이다. 이슬람의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 도안을 보면 녹색바탕에 이슬람의 신앙고백을 중앙에 아랍어로 적어 놓고 그 밑에 전쟁용 칼을 그려놓았다. 이는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 사람을 죽이라고 하는 이슬람의 핵심교리를 확실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넷째 : 이슬람의 나지스(NaJis) 혹은 나제스(Najes)라는 사상 때문이다. 이는 비무슬림들은 더러운 존재들이라는 관념이다. 이슬람권에 가면 비무슬림들이 쓰던 잔으로는 마시지 않는 사람들이나, 아무리 배가 고파도 비무슬림들이 주는 음식은 안 먹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몇몇 유별난 사람들이 아니라 정상적인 이슬람 율법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취하는 행동이다. 이슬람에서 가장 거룩하다고 여기는 도시 메카를 향한 고속도로 수십 Km 전방에는 “여기서부터 비무슬림들은 통과할 수 없습니다”는 대형 간판을 볼 수 있다. 또한 죄수들을 고문실로 끌고 갈 때 눈을 가리는데, 죄수가 무슬림이 아니라면 수갑 채운 손을 잡아끄는 대신 짤막한 몽둥이 끝을 잡고 따라오게 한다고 한다. 이는 비무슬림들을 불결하게 여기는 꾸란에 기록된 나지스 사상(꾸란9:28) 때문이다. 다섯째 : 이슬람에서는 비무슬림들을 친구로 삼는 것을 죄악시한다.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이것은 꾸란에 기록되어 있는 명령이다.(꾸란3:28, 4:139, 4:144) 유럽에서 이슬람 율법을 제대로 지키려는 사람들을 위해 안내하며 질문에 답변해주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다. 거기에서 어떤 사람이 비무슬림 친구의 생일잔치에 가도 되는지를 문의하였다. 이슬람 성직자는 이렇게 답변했다. “그 초청에 응하는 것은 비무슬림들을 친구로 사귀지 말라는 알라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가면 안 된다.” 심지어 꾸란에는 “비무슬림들은 가장 사악한 짐승들”이라고 정의한다.(꾸란8:55) 짐승들 중에는 애완용으로 사랑받는 동물들도 있다. 그러나 사람만 보면 달려들어 공격하는 사악한 짐승은 보이는 대로 사살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이슬람 외의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사악한 짐승이라는 꾸란의 구절 때문에 이슬람권에서는 이를 적용한 잔인한 살인사건들이 종종 발생한다. 심지어는 유럽친구들과 사귄다는 이유로 자기의 친자식들을 명예 살인하여 알라에게 충성심을 증명하려는 헌신된 무슬림들의 기사가 가끔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여섯째 : 타크피르 문화 때문이다. 이슬람에서 카피르(Kafir)는 불신자라는 뜻이지만 배교자 혹은 이교도를 포괄적으로 칭하는 말로 “죽여도 좋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타크피르”는 카피르를 처형할 때 무슬림들이 외치는 구호 같은 것인데, 지금도 타크피르를 외치면 주변의 무슬림들이 돌과 몽둥이를 들고 달려들어 카피르에게 폭력을 행하여 죽이기까지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슬람에서는 자경단이라는 것이 있는데 배교자, 간음한 자, 살인자 등 주요 범죄를 한 자들은 법정에 끌고 가지 않고 직접 처형할 수 있다는 샤리아 율법에 근거를 둔다. 따라서 카피르에게 임의로 폭력을 가해도 처벌 받지 않는 것은 이슬람권에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무슬림들이 집단으로 몰려가서 기독교인들이 예배드리는데 불을 지르거나 결혼식장에 몰려가 테러를 저지르는 일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이슬람 학자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5인방 중의 하나이며 이슬람에 관한 책을 120권이나 쓴 유수프 가라다위는 “만일 배교자를 살해하라는 율법이 없었다면 이슬람은 오래 전에 없어졌을 것이다”고 말했다. 일곱째 : 딤미(Dhimmi) 사상 때문이다.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은 기독교인이나 유대교인들로부터 목을 자르지 않는 대가로 받는 인두세(지즈야-Jizya)라는 세금제도가 있었는데, 이런 세금을 내고 목숨을 부지하는 하층민들을 딤미(Dhimmi)라고 불렀다. 이 딤미 제도는 철저한 인권 유린, 폭력과 무거운 세금으로 타종교인들을 괴롭히던 제도였으나 영국과 프랑스가 중동을 통치할 때 없애버렸다. 그러나 그 정신은 아직도 무슬림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열성적인 무슬림들은 꾸란을 읽다가(꾸란9:29) 이 제도가 사라졌다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속히 샤리아로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어 21세기에도 이 제도를 실행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매주는 아닐지라도 모스크에서 설교를 통해 이런 가르침을 받고 있는 무슬림들은 타문화에 적응이 거의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는 이미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무슬림들도 많은데 왜 하필 극단주의자들의 견해를 들먹이며 혐오감을 조성하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극단주의 무슬림들이 깜짝 놀랄만한 테러를 저질렀을 때 그 많은 평화주의자 무슬림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 현상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그들도 이슬람의 율법인 샤리아로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이슬람의 궁극적인 목표에는 동의하지만 성취 방법에서만 약간의 차이를 보일 뿐인 것이다. 5.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종교인가? 우리는 이슬람을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종교 이야기를 종종 들을 수 있다. 즉 아브라함의 종교를 이삭을 통해서 전수받은 사람들이 기독교와 유대교인들이라고 한다면 이스마엘을 통해서 전달 받은 사람들이 바로 무슬림들이라고 하는 설명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슬람의 신 알라(Allah)와 기독교와 유대인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섬기던 바로 그 신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기독교와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종교를 타락시키고 경전으로 내려 준 성경을 변질시켰기 때문에 무함마드를 통해서 하늘에 있는 경전의 원본을 내려보내어 아브라함의 종교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것이 이슬람이라는 주장을 많이 들어왔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각없이 반복되는 이런 거짓말에 속아서 오늘날의 중동사태를 배다른 형제들의 싸움이니 이삭과 이스마엘의 싸움이니 하면서 무슬림들의 근거 없는 주장을 대신 홍보해 주고 있는지 모른다. 무함마드는 과연 이스마엘의 후손인가? 이 문제를 생각하자면 거슬러 올라가서 아브라함부터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성경의 아브라함(Abraham)과 꾸란의 이브라힘(Ibrahim)이 과연 같은 인물인가? 우선 성경의 아브라함은 아버지 이름이 데라(창11:31~32)라고 되어 있는데 꾸란의 이브라힘의 아버지 이름은 아자르(Azar)라고 한다.(꾸란6:74) 우선 아버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아브라함의 원래 이름은 아브람이었는데 99세 때부터 하나님께서 바꿔주신 이름이다.(창17:5) 그런데 꾸란의 이브라힘은 젊었을 때부터 이브라힘이라고 불리던 사람이었다.(꾸란 21:60) 또한 성경의 아브라함은 이방인들에 의해서 불속에 던져진 일이 없는데 꾸란의 이브라힘은 이방인들이 그를 불속에 던진 것을 알라께서 구해 주셨다고 한다.(꾸란21:68~69) 꾸란의 여러 주석에 보면 그를 태워 죽이려던 이방인들은 앗수르왕 니므롯의 백성들이라고 한다.(김용선 주석, 최영길 주석) 특별히 성경에 아브라함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에 간 일이 없는데 꾸란의 이브라힘은 메카에서 이스마엘과 함께 카바(Kaaba)신전을 건축한 사람이라고 한다.(꾸란2:125~127) 그리고 이슬람의 제 2경전이라고 불리는 부카리의 하디스(Sahih al Bukhari)에 보면 이브라힘은 이스마엘에게 이혼을 명령했다는 것이다.(Bukhari hadith volume4 book55 number584) 성경과 꾸란의 이러한 극심한 내용상의 차이는 성경의 아브라함과 꾸란의 이브라힘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아니라 이스마엘이라도 메카에 가서 살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스마엘이 메카로 간 것이 아니라 바란 광야에서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창21:21) 우리 성경은 ‘그가 바란 광야에 살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애굽 여인을 아내로 얻어 주었다’고 되어 있어서 애굽 여인과 결혼할 때는 그가 바란 광야에 살았지만 평생을 거기서 살았다는 말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히브리 원문에는 ‘때에’라는 말이 없다. ‘그는 바란 광야에 살았다. 그리고 그의 모친이 애굽 여인을 그에게 아내로 주었다’는 것이 올바른 번역이며 킹제임스 번역이나 굳뉴스 바이블도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성경에 의하면 이스마엘의 거처는 바란 광야 즉 이스라엘 남쪽이며 모세가 열두 정탐꾼을 보냈던 가데스바네아 북부의 바란 광야였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이 메카에 가서 살았다는 이슬람의 주장이 성경적으로 보면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그렇다면 이스마엘의 후손들 중 어떤 사람이라도 메카에 가서 살았고 그들의 후손 중에 무함마드가 태어나서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시작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친절하게도 이스마엘의 후손들의 거처까지 알려주고 있다. '이스마엘의 자손들은 하윌라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 편에 거주하였더라’(창25:18) 그런데 하윌라에서 술까지 통하는 지역이 어디인지 우리가 잘 모른다. 그러나 친절하게도 영어 성경에 보면 거기가 어딘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 Near the border of Egypt(이집트 국경 부근)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쉽게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이스마엘의 모친인 하갈은 애굽 여인이었다. 그리고 이스마엘의 아내도 애굽 여인이었다.(창21:21) 그렇다면 이스마엘과 그의 후손들이 애굽 근처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언어이자 할머니의 언어를 그 자식들과 손자들이 자연스럽게 배웠을 것이기 때문에 말이 통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살았을 것이라는 것이 자연스런 추측이며 성경도 애굽 국경 부근에서 살았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슬람 측의 주장을 합리화 하려면 이스마엘의 몇 대 후대의 자손들이 언젠가 메카로 이주해 와서 그 조상 이스마엘이 아브라함과 함께 섬기던 그 창조주 하나님을 섬겼었는데 그 후손 중에서 무함마드가 태어났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주장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인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훌륭한 학자가 주장한다고 할지라도 성경의 근거가 뒷받침 되지 않으면 우리가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들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시편 83편을 읽어 보면 3절에 ‘주님의 원수들이 떠들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 머리를 들었나이다’라고 호소하고 있다. 그렇다면 주님의 원수들이 누구란 말인가? 6절에 ‘에돔의 장막과 이스마엘인과 모압과 하갈인’... 이들이 주님의 원수들이라고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다. 마지막 18절에 보면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라고 기도를 마치고 있다. 즉 이스마엘 후손들과 하갈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원수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며 살았던 것이지 그 후손들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그대로 대대손손이 물려 주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마엘이 하갈의 복중에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그의 장래를 예언해 준 것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He will lie in hostility toward all his brothers.’(창16:12) 이스마엘은 태어나기 전부터 그의 형제들과 대적하며 살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으며 이스마엘의 후손들도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하였더라.’(창25:18)라고 번역되었지만 영어 성경에 보면 ‘they lived in hostility toward all their brothers.’라고 되어 있다. 이스마엘은 그의 형제들과 적대적 관계로 살 것이고 그의 후손들 역시 그 형제들 즉 이삭의 후손들과 적대관계를 가지고 살게 될 것이라고 예언되었고 또 그 예언대로 적대적 관계를 가지고 살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시편83편) 그러므로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전수받은 그 믿음을 충성스럽게 지키다가 무함마드 때에 그 믿음을 크게 확산시켰다는 주장은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원수로 살았다는 성경 말씀과는 정반대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부카리의 하디스에 보면 이브라힘이 이스마엘과 하갈을 데리고 메카에 와서 거기 버려두고 갔다고 한다. 그 때 메카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는데 천사가 파준 우물 잠잠(ZamZam)에서 물이 흘러나오자 주르훔(Jurhum) 족속의 사람들이 와서 함께 살기를 청하였고 그 때 이스마엘은 젖먹이 였으며 그들이 이스마엘에게 아랍어를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하갈은 주르훔 족속의 아랍 여인과 이스마엘을 결혼 시켰다는 것이다. (Sahih Bukhari volume4 book55 number584) 그래서 이스마엘은 아랍인들의 조상이 되었다고 하는데 성경에 의하면 이스마엘은 메카에 가지도 않았으며 이집트 여인과 결혼을 했다. 그러나 이 하디스를 기초로 하여 후대 사람들이 무함마드의 족보를 만들어 내었다. 이슬람의 제2의 경전인 부카리의 하디스에 이스마엘은 주르훔 족속에게서 아랍어를 배웠다는 것을 보면 아랍인들은 이스마엘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것이며 따라서 이스마엘이 모든 아랍인들의 조상이라는 말은 거짓이라는 것이 이슬람 내부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되는 것이다. 후대에 만들어진 무함마드의 족보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씨엗 유쑤프(Syed Yusuf) 등의 대부분의 이슬람 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무함마드는 이스마엘의 둘째 아들 까이달(Qaidar-게달)의 후손이라는 주장이다. 또 하나는 부카리의 하디스가 만들어지기 거의 100년 전에 무함마드의 전기 ‘씨라툴 라쑬알라’를 최초로 펴낸 이븐 이스학(Ibn Ishaq)같은 비중있는 학자들의 자료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이스마엘의 첫째 아들인 나빗(Nabit-느바욧)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자료는 모두 무함마드부터 이스마엘 까지를 25 세대로 그 족보를 소개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웹싸이트에는 30세대로 소개하는 곳도 있다) 무함마드는 주후 570년에 태어났으며 아브라함은 주전 2000년 전 사람이다. 그 두 사람 간을 연결하는 인물들이 본인들을 제외하면 23명이라는 족보는 누가 봐도 약 2570년간을 채우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하디스에 무함마드가 자신의 근본에 대해서 설명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자기(무함마드)는 무다르(Mudar)의 후손이며 그것은 지브리일(Gibriil) 천사가 자기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했다는 점이다. (Ibn Sa'd, Kitab al-Tabaqat al-Kabir, Volume I, p. 4) 무함마드 자신도 몰랐고 그 조상들에게 전해들은 것도 아니고 자신의 가문이 간직하고 있었던 족보에 근거한 것도 아니며 다만 천사가 말해주었다는 아무도 입증할 수 없고 증거도 찾을 수 없는, 계시를 빙자한 무함마드 개인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그것을 근거로 부카리의 하디스에 보면 무함마드가 키나나(Kinana)의 아들 나드르(Nadr)의 자손 무다르(Mudar)의 종족에 속하였다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Sahih al Bukhari, volume 4, Book 56, Number698) 물론 후대 사람들은 이들의 이름을 무함마드의 족보에 포함시켜서 명단을 만들어 낸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슬람 이전의 문헌에는 이스마엘과 무함마드가 혈통상으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자료가 없다. 이는 모두 이슬람 이후에 무함마드가 했다는 말을 수집하여 엮은 하디스에 근거를 두고 만들어진 것인데 그 하디스라는 것들이 무함마드가 죽은 지 약 200년 후부터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죽은 지가 200년이 넘은 사람이 살았을 때 했다는 말을 수집했다는 것의 신뢰도가 어느 정도나 될까를 상상해 보기 바란다. 그래도 무슬림들이 경전처럼 여기는 부카리의 하디스에서는 종종 황당한 기사들이 발견되는데 예를 들면 ‘지구 상의 최초의 성전은 메카의 카아바 신전(Masjid ul Haram)이고 두 번째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Masjid al Aqsa)인데 그 두 건축물 사이의 역사적인 간격은 40년 이라는 것이다.(Sahih al Bukhari Volume 4 Book 55 number 585) 카아바 신전이 자기들 말로는 이브라힘과 이스마엘이 건축했다면 주전 1950년 경에 건축했다는 말인데, 무함마드가 주후621년 어느 날 밤중에 천마(天馬)를 타고 방문했다는 예루살렘 성전(Masjid al Aqsa)과 역사적 차이가 40년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때 예루살렘 성전은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Titus)장군에 의해서 파괴되어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무함마드는 거기 가서 선지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고 주장하기에 예루살렘 성전은 오늘날 이슬람의 성지가 되어 있는 것이다.(꾸란17:1 참조) 이슬람의 제2경전이라고 하는 부카리의 하디스가 이 정도 수준이라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종교가 아니라 무함마드가 속했던 꾸라이시(Quraish) 종족의 신 알라(Allah)를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한 신으로 교묘하게 둔갑시키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이름을 메카로 끌어들여 그가 자신의 서자인 이스마엘과 함께 카아바 신전을 건축했다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 무함마드가 창시한 종교인 것이다. 그러기에 전에는 이슬람을 마호메트교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이 아브라함의 종교라는 근거 없는 비성경적 말을 함으로 본의 아니게 그들의 거짓말을 홍보해주는 어리석은 행위는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 기고/강연
    • 강연/특강
    2016-05-27
  • 이슬람(1)
    (이 글은 5월 25일(수) 거제교회에서 개최된 제1회 부산이단대책세미나 강의안입니다.) 이슬람 ▲ 이만석 목사 (현. 한국이란인교회 담임, 4HIM 대표) 1. IS는 가짜 이슬람인가? 최근에 이라크의 순니파 무장단체인 소위 이슬람국가(IS)의 잔혹한 만행으로 온 세상이 놀라고 있다. 한남동 이슬람 사원의 이주화 이맘은 IS 때문에 이슬람의 이미지가 나빠지자 서둘러 조선일보를 통해서 인터뷰 기사를 내면서 선긋기에 나섰다. 한마디로 IS는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 이슬람의 얼굴로 가장한 자들”이며 가짜 무슬림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견해는 매스컴을 통해서 대부분의 서방세계 정치인들의 입을 이용하여 대중에게 여과 없이 홍보되고 있다. 심지어 교황청 국무장관 안드레아 토르넬리 추기경은 이태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최근에 발생하고 있는 중동의 기독교인들 살해 현상은 이슬람과 기독교간의 충돌이 아니라 개인적인 폭력”이라고 말했다.(Vatican Insider 2014.8.26.)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만일 그들이 가짜 무슬림들이면서 이슬람의 이름을 사칭하여 명예를 실추시켰다면 왜 세계적인 집단 시위가 일어나지 않고 잠잠할까?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이슬람의 경전 꾸란을 한 권 태우겠다고 했을 때 온 세계의 무슬림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며칠간 쉬지 않고 시위를 벌였었고 이로 인한 진압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었다. 아프가니스탄의 바그람 공군기지의 꾸란 소각 사건이나, 미국에서 별로 인기가 없어 관람자가 거의 없었던 “순진한 무슬림”이라는 짧은 영화가 무함마드를 조롱하는 내용인 것이 발견되었을 때도 세계적인 무슬림들의 폭력시위가 일어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분노한 시위대가 리비아의 미국 대사 및 대사관 직원들까지 살해했었다. 꾸란 한 권 태우는 일이 이슬람의 명예를 얼마나 실추시켰을까? 만일 이슬람이 참으로 평화의 종교라면 IS처럼 이슬람의 이름으로 수천 명의 생명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것이 더 이슬람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국의 한 무슬림이 신문에 인터뷰 한 번 하는 것으로 그 모순을 뒤집으려 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행동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한편 세계적인 집단시위가 일어난다는 것은 몇몇 사람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각국에서 이슬람 성직자들의 선동과 동원이 없으면 세계적인 집단시위는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런던 시내에서 나이지리아계 영국 시민권자인 ‘아데볼라요’라는 무슬림 청년(28)이 영국 군인 릭비(25)를 차로 들이받은 후 칼로 난자하고 참수하면서 “알라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다)”를 외치며 자랑스러운 듯 행인들에게 사진을 찍으라고 포즈를 취했다는 것은 꾸란을 한 권 태우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이슬람의 이미지를 크게 실추시킨 너무 유명한 사건이지만, 이로 인해 세계적인 무슬림들의 폭력시위가 있었다는 것은 들어본 일이 없다. 이슬람의 율법에서는 이슬람을 보호하기 위한 폭력, 혹은 배교자를 대상으로 하는 폭력은 처벌받지 않는다. 이슬람의 명예를 위해서 혹은 무함마드를 모독하는 자를 살해하는 행위 등은 정당화 된다. 심지어는 국제사회의 눈치를 보느라 정부가 집행하지 못하고 있는 이런 행위를 감행한 담대한 무슬림들에게는 격려 차원에서 상금을 지급하기도 한다. 이것은 비단 이슬람 국가 혹은 샤리아(이슬람 율법)로 통치되는 지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무슬림들이 소수인 지역에서도 이슬람의 성직자에 의해서 “살해하라”는 파트와(종교적 명령)가 떨어지면 알라의 이름으로 그 명령을 집행하려는 철저히 헌신된 무슬림이 언제든지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시각에 대해서 분노하는 무슬림도 있을 것이고 이런 견해를 부인하는 온건하고 순진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 꼽틱 기독교 사제 ‘자카리아 보트로스’라는 사람의 예는 이것이 사실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방송을 통해 이슬람의 경전 꾸란의 허구와 모순을 정확한 이슬람 내부 자료를 근거로 밝히고 있기에 그 방송을 보는 많은 무슬림들이 타종교로 개종하거나 이슬람에 회의를 품게 되는 현상이 퍼지게 되었다. 이에 이슬람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알카에다는 그를 살해하는 사람에게 미화 6천만 불의 현상금을 지급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미국 정부가 이슬람 테러단체 알카에다의 수장 빈 라덴에게 걸었던 현상금 5천만 불보다 20%나 더 큰 금액이다. 또한 ‘악마의 시’라는 글로 이슬람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영국 작가 ‘살만 루시디’의 목에 걸린 현상금은 150만 불로 시작해서 300만 불까지 치솟았지만 자카리아 보트로스에 비하면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들은 언론 출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미국과 유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이슬람을 모독했다는 죄목을 붙여 살해를 명하면서 상금을 주겠다는 것은 누가 봐도 테러를 사주하는 행위다. 알카에다는 국제법을 무시하는 테러집단이기에 그럴 수도 있다고 치부하더라도, 살만 루시디를 살해하는 자에게 상금을 주겠다고 한 것은 호메이니의 명을 받들고 있는 이란 정부였다. 이란 뿐 아니라 이슬람권에서는 테러범들에게 자금을 지원하거나 영웅 대우를 함으로 테러를 부추기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온 세계를 경악시킨 9.11테러를 사주한 빈라덴은 이미 죽었지만 지금도 이슬람권의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고,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었다는 이유로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을 암살한 살해범 ‘칼레드 이슬람볼리’의 이름은 테헤란에 한 거리의 이름으로 명명되었으며, 그가 옥중에서 부르짖는 사진을 넣은 기념우표까지 발행되었다. 그러나 굳이 상금을 걸거나 영웅 칭호를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이슬람, 꾸란, 알라, 무함마드 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한 이슬람 성직자가 그를 살해하라는 파트와(종교적 명령)를 선포하면 충성된 무슬림에 의해서 언제 어디서나 살해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사실 세상에는 테러와는 상관이 없는 수많은 무슬림들이 평화스럽게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이므로 테러와 관련짓지 말라고 강변한다. 설사 무슬림들이 모두 테러범은 아니더라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테러는 무슬림들에 의해서 발생한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국이나 유럽처럼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권에 살면서도 이슬람의 경전 꾸란에 심취하게 되면 꾸란에 기록된 이교도들에 대한 증오 개념에 세뇌되면서 돌발적 테러범이 될 수 있다. 소위 말하는 ‘외로운 늑대’형 무슬림 테러를 수사하면서 벽에 부딪히는 이유는 그들이 현존하는 어떤 테러단체와의 연관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테러를 범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의 핵심은 정치인들이 전문가들의 조언을 통해서 테러의 원인은 바로 이슬람의 경전 꾸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세계 인구의 20~25%를 점하고 있는 무슬림들의 분노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별 수 없이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지만 꾸란의 평화적 가르침을 오해하고 있는 일부 몰지각한 테러범들이 문제다’는 견해를 고집하게 된다. 이것을 서양에서는 ‘정치적으로 수정된 견해(Politically corrected opinion)’라고 부른다. 종교에 관심이 없는 대부분의 순진한 대중은 계속해서 매스컴을 통해 귓전을 때리는 이런 왜곡된 견해를 보편적 정설로 이해하게 된다는 점이 답답하다. 소위 평화주의 무슬림들은 이런 순진한 정치인들이나 매스컴을 이용하여 이슬람을 계속 평화의 종교로 믿도록 강요하는 한편, 이슬람의 정체를 알고 그들이 숨기고 싶은 혐오스런 참모습을 밝히는 사람들은 소위 증오법 혹은 차별금지법 등으로 묶어서 처벌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이미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유럽에서 성공을 거두어 유럽인들은 이슬람에 대해서 부정적인 표현도 못하고 처벌이 무서워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슬람의 지상목표인 ‘샤리아로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원리주의자들의 폭력과 평화주의자들의 거짓은 무슬림들의 가장 강력하고도 효과적인 무기다. 이들은 공동의 지상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서로를 비난하는 척하며 적당히 역할분담을 한다. 즉 IS처럼 과격한 무슬림들은 무함마드가 보여준 행동모범과 꾸란의 명령을 솔직하게 표현하면서 감히 접근이나 간섭을 못하도록 가능한 한 잔인한 테러를 자행하고 대중매체를 통해서 동영상을 공개하여 대다수의 소심한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다. 이는 꾸란에도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다. 믿는 자들이여! 너희가 얼마나 잔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네 이웃의 불신자들과 싸우라. 알라는 항상 의로운 자들 편이시라는 것을 알라.(꾸란9:123) 이는 전쟁터에서 무장하고 대치하고 있는 적들과의 전쟁이 아니라 이웃에 살고 있는 불신자들, 즉 이슬람 이외의 종교를 믿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테러를 사주하고 있는 구절이다. IS는 바로 이런 꾸란의 명령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강대국들이나 알라의 법을 모르는 무지한 백성들의 눈치를 본다든지 체면이나 여론 때문에 망설일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명백하게 기록된 창조주의 말씀인 꾸란의 명령대로 실천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행위라는 종교적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소동이 사라지고 종교가 모두 알라의 이름으로 통일될 때까지 그들과 싸우라.(꾸란8:39) 여기서 소동이라고 번역된 아랍어 피트나(fitnah)는 최영길 교수가 한글로 꾸란을 번역하면서 “알라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각주를 달았다. 전체적으로 이 구절은 지구상에 무슬림 아닌 사람이 한 사람도 남지 않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죽여야 한다는 이론이 도출되고 이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현상이다. 어떤 죄를 짓거나 그들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았더라도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고 다른 종교를 고집한다는 것만으로도 핍박과 살해의 정당한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꾸란9:5, 꾸란5:33 등 참조) 소위 평화를 사랑하는 무슬림들도 이들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이슬람 학자들이라면 부인할 수 없는 만쑤크(Mansukh)교리에 의해서 이미 취소된 평화로운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라고 믿도록 많은 홍보비용을 투자하여 미화된 거짓을 퍼뜨리고 있다. 그러나 그 우두머리들은 같은 목적의 성취를 위해서 서로 역할만 분담할 뿐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고 배후에서 서로 돕고 있다. 이것도 정확하게 꾸란에 명시되어 있다. 꾸란은 무슬림들이 비무슬림들을 친구로 삼지 못하도록 명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보호와 유익을 위해서는 허락한다는 것이다.(꾸란3:28) 그 한 예를 들어보자. 압둘 라흐만 알 아무디는 클린턴 대통령의 자문 위원이기도 했으며 9.11 테러 후에도 워싱턴 국립 대성당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기도회 때 강사로 초청받을 정도로 평화를 사랑하는 무슬림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런데 그가 테러집단으로 알려진 하마스와 헤즈볼라를 후원한다는 것과 모금을 하여 불법 송금한 것이 발각되어 2004년 재판을 받고 미화 75만 불 벌금과 23년 형을 받고 수감되어 있다. 겉으로는 평화를 외치지만 뒤로는 서로 돕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표면상 미국과 공조하는 것처럼 보여도 테러범들에게 가장 많은 송금을 하고 있다는 것이 위키리크스를 통해서 이미 폭로되었다. 이슬람 국가 IS(Islamic State)는 이름 그대로 이슬람의 경전 꾸란과 무함마드의 행동모범을 근거로 만들어진 샤리아를 철저하게 지키는 무장 단체로서 이슬람의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선포한 가장 이슬람국가 다운 이슬람국가이며, 이것에 매력을 느낀 충성되고 헌신된 무슬림들이 세계 각국에서 모여들고 있다. 그들에 의해서 잔혹하게 고통 받으며 살해되고 있는 기독교인들과 비무슬림들을 지켜주고 보호하는 일을 위해서 물론 국제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힘을 모아야 하겠지만 우선 하나님의 보호를 간절히 구하는 일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2. 할랄 산업 육성 정책을 반대하는 열 가지 이유 우리는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애국 국민이라는 사실에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며 국민들에게 행복을 주는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대통령의 노력을 적극 지지하며 감사하게 생각한다. 정부 정책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반정부 세력과 동일시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리 가족들과 국가 안보를 위해서 그리고 후손들의 행복을 위해서 정부의 할랄 산업 지원 육성 정책을 폐기할 것을 촉구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래와 같은 심각한 문제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할랄이라는 것은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에 의해서 “허용한다”는 뜻이다. 즉 해도 좋다는 것이지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것을 “와집”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에 의하면 고의가 아니고 모르고 먹었거나 어쩔 수 없어서 먹었을 경우는 알라께서 용서하신다(꾸란6:145)고 한다. 그러므로 할랄 인증만 받으면 17억 무슬림들의 식료품을 공급하게 되어 일확천금을 할 것처럼 홍보하는 것은 국민을 속이는 행위다. 둘째, 할랄 고기는 몇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하는데 첫째는 무슬림이 도축해야 하며 둘째는 도축할 때 반드시 아랍어로 “비스밀라(알라의 이름으로)”라고 외쳐야 하며 셋째 짐승이 죽을 때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방향으로 머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그리고 부차적으로 죽은 고기, 피, 알코올 성분, 돼지고기 등을 먹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위생과 전혀 관계가 없고 건강이나 웰빙과도 전혀 관련이 없으며 다만 이슬람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만 중요하다. 오히려 할랄식 도축은 매우 비위생적이다. 왜냐하면 짐승의 목을 반쯤 잘라놓고 피가 쏟아지는 채로 공중에 매달아 놓아 고통스런 짐승이 버둥거리는 동안 피가 사방으로 튀기 때문이다. 아무리 위생적인 도축장을 건설했어도 비무슬림이 도축을 한 것은 할랄이 아니다. 이를 “청결하고 안전한 먹거리”라고 홍보해 주는 것은 국민을 속이는 것이다. 셋째, 일반 도축은 전기충격으로 기절시켜놓고 짐승을 잡기 때문에 짐승이 전혀 통증을 못 느끼면서 죽지만 할랄 도축 방식은 피를 먹지 말라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짐승의 모든 감각이 정상인 상태에서 목뼈를 건드리지 않고 혈관과 식도와 기도를 자르고 거꾸로 매달아 놓는다. 그래야 심장의 펌프 작용으로 피가 분출되기 때문이다. 짐승은 거꾸로 매달려서 피를 분출하면서 모든 감각과 의식이 정상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죽는 그 순간 까지 몇 분간 극도의 고통과 분노와 스트레스를 느끼면서 죽어간다. 이 때 짐승의 체내에서 인체에 해로운 독성이 생성될 가능성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숨기면 안 된다. 이는 동물을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면 안 된다는 현행 동물보호법에도 저촉되는 범법행위임에 분명하다. 주로 할랄 고기를 섭취하는 이슬람권의 평균 수명이 타문화권보다 짧다는 것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심지어는 1인당 국민소득 9만 불을 훌쩍 넘은 카타르도 평균 수명은 3만 불도 채 안 되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짧다는 것은 결코 기후 문제로만 돌려서는 안 되며 음식 문제도 분명 관련이 있다고 본다. 넷째, 할랄 도축장을 건설하는 것은 정부가 정책적으로 지원할 문제가 아니다. 현재 할랄 고기의 대부분은 호주에서 수입한다. 그런데 호주산 쇠고기와 한우의 가격은 가격 경쟁이 안 된다. 등심을 기준으로 볼 때 2015년 초 축산협회의 조사에 의하면 호주산은 Kg 당 21,000원 이지만 한우는 34,000원이다. 한우를 도축할 때 할랄 도축사를 고용하고 할랄 관리인을 고용하면 인건비가 추가 부담되어 할랄 한우 값은 추가 상승요인이 있는 반면 호주산 쇠고기는 한국:호주 FTA에 의해서 관세를 매년 2.6%씩 인하하여 앞으로 15년 후면 관세가 완전 철폐되므로 가격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질 것이다. 할랄 도축장을 건설하면 그 비싼 한우 할랄고기를 누가 사먹을 것인가? 무슬림들 대상이라면 현재 수입하고 있는 호주산으로 충분하며 무슬림 관광객들이 대거 유입된다 하더라도 비싼 할랄 한우를 먹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므로 이는 시장 조사와 수지 타산을 정밀 조사하여 개인과 업체가 결정할 일이지 정부가 국민의 세금으로 밀어붙일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재 30여 곳 있는 도축장도 20여 곳으로 통폐합하는 형편인데 할랄 도축장을 다시 만든다는 것은 결코 지혜로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섯째, 할랄 도축장에는 무슬림들만 근무해야 하기 때문에 잘 훈련된 할랄 도축사들을 수입해 와야 한다. 영국도 파키스탄 할랄 도축사들 5천명을 수입했다고 한다. 이들은 이슬람 율법에 철저한 원리주의자들일 가능성이 크므로 지역주민들과 필연코 마찰이 발생할 것이다. 이슬람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는 유럽의 경우를 반면교사로 삼아 철저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여섯째, 할랄 인증에 소요되는 비용을 정부가 지원한다는 것은 특정 종교의 율법을 준수하는 일을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종교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할 정부가 이를 지원하는 것은 위헌의 소지가 있으므로 금해야 한다. 일곱째, 이슬람 율법에 “나지스(Najis)” 개념이 있는데 이는 더럽다는 뜻이다. 비무슬림들은 더럽기 때문에 상종하면 안 된다는 이슬람의 율법이며 비무슬림들이 만진 물건도 더럽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할랄 도축장에서 5Km 반경 내에 돼지 도축장이 있으면 안 되고, 비할랄 식품과 함께 운반해도 안 되고, 비할랄 식품을 조리하던 도구를 사용하여 요리해도 안 된다는 개념이다. 이는 무슬림이 아니면 더러운 존재들이라는 이슬람의 배타적 교리 때문에 그렇다. 이는 비단 음식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람도 무슬림들은 할랄(허용된 것)이고 비무슬림들은 하람(금지된 것)이라고 한다. 무슬림들 여성들(할랄)이 비무슬림 남성(하람)과 결혼하는 것은 금하며 그를 이슬람으로 개종시켜야 결혼이 허용(할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무슬림들이 음식과 식자재만 할랄로 만들어 팔면 된다는 생각은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는 한 헛된 망상에 불과한 것이다. 여덟째, 할랄 인증에 소요되는 비용을 정부가 지원하는 것은 국민의 세금으로 이슬람을 확산시키기 위한 포교 자금 혹은 이슬람 테러 자금을 지원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2011년 1월 5일 미국 기독교방송인 CBN은 70억불 규모의 프랑스 할랄 산업의 60%가 테러 단체로 잘 알려진 무슬림 형제단에 속한 기관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방송했다. 아홉째, 이슬람의 할랄 규정은 세계적으로 통일된 것이 없다. 국가마다 그 기준이 다르고 한 국가에서도 인증기관마다 기준이 다르다. 어제 있었던 할랄 기준도 무프티(Mufti)급의 성직자가 파트와(Fatwa)를 선언하면 언제든지 없어질 수도 있고 새로 생길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가변적인 기준을 맞추기 위해서 돈을 투자하면서 동분서주하는 행위는 결코 지혜로운 일이 아니다. 열째, 일반적으로 무슬림들은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원리주의 무슬림들은 샤리아로 통치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투쟁하고 있다. 오일 달러를 이용하여 샤리아의 영향력을 키우려 하는 것이 이슬람 금융 및 쑤쿠크(이슬람 채권)라고 한다면 음식을 통해서 샤리아의 영향력을 키워나가는 것이 할랄 확산 전략이다. 할랄 인증을 받은 회사의 경영진은 많은 돈을 투자해서 어렵게 받은 할랄 인증인데 혹이라도 직원들 중의 한 사람이 이슬람 율법을 어기는 것이 할랄 관리자들에게 발각되어 인증이 취소될 것이 두려워 직원들에게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 준수를 강요하게 된다. 따라서 한국인들이 보편적으로 즐기는 소주와 삼겹살도 회사를 해롭게 하는 준범죄행위로 취급되므로 화기애애한 직장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할랄 장려 및 인증 비용 지원 정책은 식품산업 세계화를 통한 기업의 경쟁력을 키워주기 위한 경제 활성화의 일환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할랄 산업이란 이슬람의 율법인 샤리아를 지키게 하기 위해서 음식으로 그 영향력을 키워나가는 이슬람 포교 전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는 유럽의 경우를 보건대 국가적 불협화음의 불씨가 될 것이다. 무슬림들이 급증하고 있는 유럽에서는 자경단을 조직하여 샤리아로 통치하는 지역이 프랑스에만 750곳 있으며 샤리아로 재판하는 재판소가 영국에만도 85개소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스웨덴에도 무슬림들이 완전히 접수하여 샤리아로만 통치하는 지역이 55개소 있으며 이 지역에서는 무슬림 자경단이 정부경찰을 공격하고 접근을 금지시킨다고 한다. 이는 유럽의 무슬림들이 특히 악해서가 아니고 유럽인들이 무슬림들에게 복지혜택 제공을 소홀히 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다만 이슬람의 경전의 가르침이 배타적이고 폭력적이기 때문에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므로 할랄 전략을 통한 이슬람의 율법 샤리아의 영향력 확대는 한국의 보편적 미풍양속과 심각한 마찰을 일으키게 될 것이 확실하다. 이런 일에 정부가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하는 것은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국민으로서 결코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킬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유민주주의를 향유하며 후손들이 평안하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물려줘야할 사명이 있다고 믿는다. 이를 위해서 정부가 정책적으로 할랄 산업에 지원하는 것을 당장 포기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는 바이다. 3. 일년에 한 번은 이슬람에 대해서 설교하라 2015년 말 현재 한국에 이주 노동자들이 60만명을 넘어섰고 노동 외의 목적으로 거주하는 외국인들까지 합하면 170만명을 넘는 외국인들이 우리 주변에 들어와 함께 살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들을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큰 비용들이지 않고 선교할 수 있는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기회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문화충돌의 위기를 말하기도 한다. 굳이 어떤 예를 들지 않더라도 세상에는 다양한 문화가 있고 각 문화권마다 특색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아주 사소한 문제가 큰 피해를 불러올 수가 있다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그 중에도 이슬람권에서 온 근로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매우 특별한 문화적 습관이 있기 때문에 제대로 알고 접근하지 않으면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것이다. 유럽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즉 이슬람이라는 문화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제 와서 곤혹을 치르고 있으며 심지어 스위스에서는 모스크에 첨탑 시설을 금지하자는 안건을 국민들이 서명운동을 벌여 국민투표로 통과시켰고, 프랑스에서는 여인들의 몸 전체를 가리는 부르카 착용을 금하며 이를 어기는 사람에게는 벌금을 물리는 등 이슬람을 제재하는 법을 만들고는 있지만 이는 사후 약방문일 뿐 근본적인 대책은 미리 세웠어야 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유럽뿐만 아니라 이슬람이 들어가는 곳은 어디서든지 범죄가 증가하고 사회 분열이 일어나고 폭력과 테러 사건이 난무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사실 유럽은 기독교 문화가 오래 전부터 정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이 제도적으로 적용되고 있어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였다. 그래서 소위 “똘레랑스(관용)”정신이 사회 전반에 스며들어 있었기에 다른 문화에 대한 관용은 선진국 사람들로서의 성숙한 인격의 상징이라는 것이 사회적 통념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산업혁명과 기술과학 발달로 경제가 급성장하다보니 노동인구가 부족하게 되어 가장 가까운 북아프리카에서 값싼 노동력을 받아들이는 정책을 채택했다. 무슬림들은 본국에서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던 사람들이었기에 처음에는 유럽의 풍요를 체험하면서 그저 유럽에 거주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무슬림들의 숫자가 많아지자 태도가 달라지면서 무슬림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집단행동을 일삼아 사회적인 불협화음이 심화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1부4처를 인정해 달라든지, 학교식당에서 할랄 음식을 급식하라든지, 이슬람을 모독하는 자를 처벌하라는 법을 제정해 달라는 등 ... 이런 끈질긴 집단 시위를 통한 요구로 영국에서는 이미 각 도시에서 샤리아 법정이 85개나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이런 현상들을 연구 분석한 독일의 메르켈 총리, 영국의 캐머런 총리, 프랑스의 싸르코지 전 대통령은 이구동성으로 이슬람 때문에 다문화 정책이 실패했음을 선언했다. 그런데 사회복지가 발달된 선진국에서 이슬람 때문에 실패했다는 다문화 정책을 대한민국 정부가 맹목적으로 따라가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 기고/강연
    • 강연/특강
    2016-05-27
  • JMS의 포교전략과 대책(3)
    (이 글은 5월 25일(수) 거제교회에서 개최된 제1회 부산이단대책세미나 강의안 입니다.) JMS의 포교전략과 대책(3) ▲ 김경천 목사 (전. JMS 부총재) 예방과 대책 왜 젊은이들이 이단으로 몰려가는가? 이단에 빠지지 말라고 말만 하지 말고, 이단에 빠지지 않는 건강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전염병이 돌면 대책을 세우듯이, 이단들이 창궐하면 대책을 세워야 한다. 이단들의 흡인력은 무엇이고, 우리 일반교회의 장점은 무엇인가 제시해야 한다. 일반 정통교회에서 아무리 이단사이비가 나쁜 곳이라고 말하더라도 결국 선택은 개인들이 하는 것이다. 개인들이 소비자의 입장에서 취사선택하게 되어 있다. 교회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1. 바른 성경공부 1) 교리공부의 강화 이단들과 경쟁하여 이기기 위하여 교리 교육이 강화되어야 한다. 죄 사함과 중생의 문제, 구원의 확신, 부활문제, 휴거문제, 오병이어 기적을 비롯한 기적과 표적에 관한 문제들, 계시록 등에 대해 확신에 찬 설교와 강의, 교육 등을 보강해야 한다. 그리고 각론에 들어가서도 세밀한 교육이 필요하다. 구원받은 후에도 죄를 짓는가? 구원받고 죄 지으면 구원이 취소되는가? 어떤 때는 구원 받은 것 같고 어떤 때는 받지 못한 것 같고, 구원 받는데도 인간의 행위도 포함되어야 하는가? 믿기만 하면 되는가?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좀 약하지 않은가?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상급과 구원은 어떻게 다른가? 상급이 구원이고 구원이 상급인가? 내가 죄 사함 받았는가? 어떤 이는 다 받았다고 설교하고, 어떤 이는 일일이 다 회개해야 한다고 하고, 회개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세심한 가르침이 필요하다. 목사들은 예수님께서 피 흘리고 세운 단상에서 십자가 외에 다른 설교할 시간이 없다. 자기 집안 이야기, 자기 자랑, 교훈적이고 윤리선생과 같은 이야기, 다른 철학자 이야기, 신문 읽은 이야기로 장시간 설교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것들은 십자가 복음을 명료하게 하기 위해 잠깐 예화로 족하다. 그런 설교들은 세상 사람들이 더 잘한다. 그 짧은 설교 시간을 예수 십자가 복음 외에 달리 전할 말씀이 또 있는가? 오직 예수 피 복음을 정확하게 전해야 한다. 그래야 교인들이 이단에 빠지지 않는다. 2) 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 대개 일반교인들이 이단에 빠지는 것은 성경을 확실히 알고 싶어서 궁금해 하다가 빠지는 것이다. 구원 받고 싶고 죄 문제 해결하려고 고민하며 두리번거리다가 이단의 마수에 걸려드는 것이다. 이단의 신도수가 계속하여 많아지는 것은 대부분 일반교회에서 계속 이단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바울의 3대 정신으로 목사들은 무장하여야 한다. 1. 십자가 외에 알지 않겠다. 2. 십자가 외에 자랑하지 않겠다. 3. 십자가 외에 전하지 않겠다. 사실 바울처럼 3층천을 구경하고, 사람으로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체험을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바울은 천국 간증이나 자기의 영적 체험을 말하지 않았다. 바울은 결국은 십자가 외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과거의 모든 기득권을 배설물로 여기고 아낌없이 버릴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단의 교주들은 자기가 천국엘 갔다 왔네, 자기가 예수님과 황금 길을 걸었네 하면서 마치 자기와 친해지면 예수님과 친해질 수 있다는 듯이 신도들의 환심을 사고 물질을 탐낸다. 교회는 신비주의를 조심해야 한다. 어떤 사람의 천국 지옥 간증도 그로 인하여 십자가가 묻히지 않게 해야 한다. 십자가 외에 다른 방식으로 구원을 제시하는 말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천국지옥 이야기는 성경의 것으로 충분하다. 천국지옥 간증을 하더라도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증거 하면 안 된다. 교회에서 기적과 기사와 신유 그 어떤 것도 십자가 외에 자랑해서는 안 된다. 자랑하려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라고 하였다. 혹시 누가 기적과 이적을 행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으로 예수님과 이간질하고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은 마귀의 수족들이다. 교인들로 하여금 오직 말씀에 굳건하게 서게 해야 한다. 3) 교회 바깥에서의 성경공부 절대금지 지나치게 친절하게 다가오는 문화예술, 스포츠 행사, 설문지를 통한 접근 등도 조심해야 한다. 특히 교회 바깥에서의 성경공부는 철저하게 금지하고 조심해야 한다. 성경 공부한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이 아니다. 이단들이 성경공부를 통해서 어린 영혼들을 미혹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성경 공부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줄 알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이단의 성경공부를 하지 않으면 절대로 이단에 빠지지 않는다. 잘못된 성경공부는 어린 영혼들에게 독약이다. 2. 교회의 경쟁력 강화 1) 변화된 환경에 적절한 대응 지금은 사회학자 피터 버거(Peter L. Berger)가 말한 것처럼 “이단의 시대”다. 이단(heresy)이란 원래 다수의 의견에 대하여 어떤 이는 소신껏 다른 의견을 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단의 시대란, 이단들이 많아졌다는 의미 보다는, 시대풍조 자체가 이단적이라는 말이다. 신앙도 이제는 더 이상 운명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지금은 어떤 종교도 옛날에 가졌던 독점과 권위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예를 들면 천주교에서 파문을 하더라도 개신교에 와서 새 신자로 등록해 버리면 그만이다. 일반교회에서도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한 교회에서 문제가 있는 사람을 치리하면 그 사람은 근신하는 것이 아니라, 앙심을 품고 자기에게 동조하는 교인들과 작당(作黨)하고 나가서 바로 옆에다 교회를 세운다든지, 아니면 다른 교회에 등록하고 더 충성하여 자기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더 이상 파문과 출교가 교인들에게 견제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소비자들이 백화점에서 물건을 둘러보고 사듯이, 신앙생활에도 그런 현상이 도래한 것이다. 백화점과 대형마트들은 주변에 널려 있다. 지금은 고객이 왕이다. 교통이 발달하기 전, 과거에는 한 지역이나, 한 나라는 전부 한 종교였다. 운명적으로 지리적으로 한 지역의 사람들은 그 지역 종교만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종교도 교회도 신앙도 전부 선택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종교를 선택할 때 백화점에서 물건을 고르는 소비자처럼 종교와 교회를 골라서 택하게 되었다. 교회를 택할 때도 아파트의 한 건물에 교회가 7개나 들어서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새로 이사 온 교인은 7교회를 다 둘러보고 자기에게 제일 잘 맞는 교회를 택한다. 그와 같이 정통과 이단도 지금은 선택의 문제라는 것이다. 내가 속한 집단이 저 집단을 이단이라고 하면, 저 집단에서는 내 집단을 이단이라고 규정한다. CBS에서 “신천지에 빠진 사람들”이란 것을 방영해도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를 싸잡아서 욕하며 밥그릇 싸움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여야 한다. 상품을 많이 팔려면 물건자체가 품질이 좋아야 하고, 직원도 친절해야 하고, 포장도 좋아야 하고, 애프터서비스도 좋아야 한다. 물론 광고도 잘해야 한다. 목사의 설교가 광고나 홍보의 행위라면 문화선교는 고객을 우리 상점으로 오게 하는 판촉활동이 될 것이다. 지금은 짝퉁이 범람하고 유사상품이 넘쳐나는 시대이다. 내 고객을 충성스럽게 붙잡아 두고, 새 고객을 계속하여 끌어들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개혁주의는 계속하여 개혁해야 하는 것이다. 교역자들의 마인드가 교인들 위에 군림하려 한다면 그것은 시대착오다. 예수님도 나는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겨주려 하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다고 하셨다. 당연히 목사들은 왕으로서 군림이 아니라 종처럼 철저하게 낮아지고, 섬겨주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주님이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면 목사들은 종의 종이 되어야 마땅하다. 백화점의 직원처럼 친절해야한다. 텔레마케터들은 고객들이 아무리 모욕적인 언사를 써도 참는다. 매출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불친절하다고 보고되면 파면당하기 때문이다. 은행직원은 고객이 다가서면 벌떡 일어서서 맞는다. 목회자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이 비행기 스튜디어스처럼 90도 각도로 인사는 안할 지라도 적어도 웃는 얼굴과 친절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 가식으로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생명주고 산,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품은 세계 최고의 상품이다. 인류의 죄와 사망을 해결하는 예수님의 보혈보다 더 좋은 제품은 없다. 사실 진시황제가 찾았던 불로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인 것이다. 인류의 죄와 사망을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는 없다. 이 확실한 상품을 가지고서도 시장점유율이 자꾸 떨어진다면 대리점 문 닫고 지점장 바꿔야 한다. 짝퉁과 유사제품에 자꾸 고객을 빼앗긴다면 근무태만을 들어 파면당해야 옳지 않은가? 교역자가 바뀌면 교회는 바뀐다. 2) 문화선교 강화 교인들끼리 조기축구라도 결성하고, 그 교회축구팀에 일반인들을 가입시켜서 자꾸 접촉점들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야구선수가 있다면 야구팀을 만들어 교인들의 사회적 동물로서의 욕구를 해소시켜 줘야 한다. 그런 식으로 적극적으로 인적 네트워크를 가로, 세로로 형성해 나가야 한다. 낚시하려면 낚시 밥을 근처에 뿌려야 한다. 물고기를 잡으려면 어망을 던져야 한다. 교회에서 산악회등도 만들어서 건전하고 세련된 행사를 자주 제공해야하는 것이다. 성도들 가운데 재능이 있는 분들을 적극 활용하여 전도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예를 들면 성도 중에 왕년에 탁구 선수가 있었다면 그 탁구를 문화선교의 지렛대로 삼으면 된다. 붓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활용해야 한다. 교인들의 인력(人力)을 집대성하여 전도역량을 극대화해야 한다. 교회를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전도의 장(場)으로 삼아야 한다. 일주일에 두세 번 예배 시간을 위해 일주일 동안 내내 교회 문을 잠가 놓아야 할 것인가? 대 예배실이 곤란하다면 교육관이라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3) 군선교 강화 젊은이들이 있는 곳에는 다 가야 한다. 특히 군인들 전도를 위해서 훈련소에도 가야하고, 군부대도 가야 한다. 훈련소에서의 훈병들의 심리는 단순하다. 어디에 가면 더 맛있는 것을 주는가를 보고 종교를 결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떤 훈병은 한번은 절에 가고 그 다음에는 성당에 가고, 그 다음 주는 교회에 간다. 돌아가면서 각종 종교를 섭렵한다. 다 둘러보고 결정하려고 한다. 훈련소나 군부대처럼 좋은 선교의 장도 드물다. 4) 캠퍼스의 선교강화 채플이 있는 학교들은 채플을 강화하고 이단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연세대나 이화여대 등도 이단들의 주 활동무대이다. 이단들은 캠퍼스를 황금어장이라고 인식하여 혈안이 되어 달려드는데, 일반정통교회들이야 말로 더 적극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5) 청소년들에 대한 선교지원강화 장년부가 수천 명 되는 교회에 청소년이 200명밖에 없다고 한다. 지금 장년부 세대가 죽고 나면 교회가 텅텅 비게 될 것은 명약관화하다. 교회가 세상 학생들은 제외하고서라도 목사, 장로, 집사들의 자녀들까지 놓치면 정말 큰일 이다. 교회가 무너질 때 가장 먼저 유초등부와 청소년부가 사라진다고 한다. 청소년들이 교회를 자주 찾게 하는 프로그램을 많이 개발하여 적용해야 한다. 스포츠나 문화 활동, 장학금도 지원하고 방과 후 수업 등도 실시해야 한다. 물심양면의 지원이 필요하다. 3. 구령사업에 대한 최우선적 관심과 투자 해외 선교와 전도에 더 박차를 가해야 한다. 몽골 같은 곳은 밥만 먹여주면 얼마든지 전도할 수 있다는 몽골 대학생의 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교인들은 먹을 것 덜 먹고, 입을 것 덜 입고 피 같은 돈들을 주님의 몸 된 교회에 헌금한다. 그러면 그 돈이 주님의 지상명령(至上命令)인 선교와 구령사업에 우선 집중적으로 투자되어야 한다. 건물 보다 선교에 신경 써야 한다. 건물이 좀 낡았으면 어떠한가? 건물이 좀 좁으면 어떤가? 정 좁으면 한 번 더 예배드리면 된다. 무리하게 건축하다가 패가망신한 교회가 많다. 대개 그런 교회들은 이단들이 야금야금 사들이고 있다. 이단들에게 교회건물도 뺏기고, 교인들도 뺏기고... 이 일들을 어찌하면 좋은가? 예수님께서 피 값 주고 산 천하 보다 귀한 영혼들이 사탄의 손아귀로 넘어가고 있는데, 지금 교회가 건축이나 해서 목회자 이름이나 알리려 할 때인가? 꼭 필요하고 때가 무르익었으면 몰라도 무리하게 건축에 투자하지 않아야 한다. 대신 청년들을 양육하고 전도하는데 써야 한다. 교인자녀들 뿐만 아니라, 돈이 없어 공부 못하는 안 믿는 사람들의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힘이 닿는 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장학금도 주고, 소년소녀 가장들을 위해 쌀도 대주고, 사명감 있는 청년들은 신학교 보내서 공부도 시켜주고, 전도하는 학생들에게 선교비도 주고, 청년 사역하는 전문가를 양성하고... 이단 대책 하는 분들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후원도 하고... 어디다 물질을 써야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실까 기도하며 써야 할 것이다. 청년들 키워봤자 헌금도 안 나오고, 말만 많고, 돈만 많이 든다고 등한시 하면 안 된다. 청년들이 살아야 교회가 살고 이 나라가 산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차라리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한다. 교회 건축에 지나친 출혈경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유럽의 많은 교회 건물들이 지금 술집, 디스코텍, 회교 모스크로 바뀌었다. 영국교회는 지난 30년 동안 8000개 교회가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 영국은 더 이상 기독교 국가가 아니다. 어떤 한국교인은 자기가 다니는 한국교회를 지어준 영국의 모(母)교회를 찾았으나 그 감사방문을 맞이하는 영국교인이 한명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 것을 보고도 한국 교회는 정신 못 차리고 있는가? 오늘날 유럽교회들은 20-30년 후 한국교회의 미래상처럼 보인다. 건축에 돈 쓸 것이 아니라 젊은이들 구령사업에 헌금이 쓰여 져야 한다. 한 푼이라도 아껴 오직 전도와 선교 사업에 투자해야 한다. 4. 봉사와 구제활동 강화 이단들은 자기교주와 자기 단체의 이미지 고양(高揚)을 위해 목숨을 건다. 유학을 가는 이유도 선교를 위해서 간다. 사업을 하는 것도 전도자금을 대기 위해서 한다. JMS 같은 경우, 태안 기름 유출 사고 때, 가장 오래 동안 남아서 닦았다. 그것은 딱 한 마디 듣기 위해서이다. ‘당신들을 지도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분이 진짜 지도자요’ 라는 말 듣기 위해서이다. 우리 일반 정통교회들이야말로 의료봉사도 더 하고, 문화공연과 위로잔치도 베풀어 주고, 노숙자들이나 독거노인들을 위해 밥 주는 봉사도 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리스도의 덕을 널리 알려야한다. 사람이나 단체나 이미지가 좋아야 한다. 요즘 개신교가 개신교 천주교 불교, 3대 종교 중에서 국민들로부터 신뢰도가 가장 낮다고 한다. 신뢰도가 낮다는 것은 그만큼 영향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향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전도가 안 되고 있다는 말이다. 보여주기식 행정이 아니라 실제로 진정성 있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오셔서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어주기까지 하셨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믿고 그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봉사와 구제는 기본적인 일들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리는 것은 교회의 마땅한 도리이다.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5. 빛과 소금의 사명 매스컴에 종종 기독교 관련 악평뉴스가 보도된다. 예를 들면, 목사가 전철에서 여자의 신체를 촬영하다가 걸린다든지, 목사가 여신도와 간음을 했다든지, 목사가 사기 쳐서 피소되었다든지... 이와 같은 목사의 비행과 비리가 쏟아질 때마다 교인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간다. 교회의 비리는 언론에서 더 크게 다루기도 하지만, 그만큼 목사에게는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목사 한명이 무너지면 교회 하나가 무너진다. TV에서 대형 비리 사건이 터질 때마다 교회 지도자들이 연루되어 있다. 목사와 교인들은 각자가 예수님의 얼굴들이다. 이방 사람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을 통해 예수님의 얼굴을 본다. 요즘, 흔히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러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나쁘다 라는 말들을 많이 한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다고도 한다. 이게 웬 말인가? 인터넷 공간에서는 기독교가 개독교로 통용된 지 오래되었다. 교회 지도자들의 비행과 비리가 터질 때마다, 어린 신앙인들과 믿음 약한 영혼들에게는 치명적인 악재들이다. 교회 밖으로 사람들을 내 모는 역천행위들이기 때문이다. 이단들에게 교회의 비행과 비리에 대한 뉴스는 호재다. 그들은 교회에서 실망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을 향하여 양팔 벌리고 교회 문 앞에서 기다리고 서 있다. 아무리 택배 회사가 명성이 높고 신뢰를 많이 쌓은 회사라고 하더라도 결국 고객들이 만나는 것은 택배 직원이다. 고객들에게는 택배 직원이 그 택배회사의 얼굴인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택배 직원이 고객과 얼굴 붉히며 싸웠다고 치자. 그 고객은 그 택배 회사와 싸웠다고 생각하고 택배 회사를 바꿔 버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믿는 사람들을 통해 예수를 본다. 기독교인들은 예수택배회사의 택배 직원들이고, 예수의 얼굴들이다. 교회에서 실망한 교인들은 예수님에게서 이만희나 정명석, 문선명, 안상홍으로 교주를 바꾸는 것이다. 우리가 강도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우리에게 이웃이 되어 주셔서 우리를 살리셨다. 또한 우리도 안 믿는 사람들에게 선한 이웃이 되어 줘야 한다. 그들이 평소 오해하고 멀리하던 사람일지라도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주며 여관에 맡기고 경비가 더 들면 책임지고 갚아주고... 대개 이단들도 교주들의 비행과 방종한 삶으로 스스로 멸망하게 된다. 주의 종들은 섰다고 하는 자들은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셨으니 절대로 언행심사를 조심해야 한다. 성령 충만했던 다윗도 밧세바 라는 우리아의 아내의 벗은 몸을 보고 욕정을 참지 못하여 죽음보다 더 심한 고통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슬기로운 잠언을 쓴 솔로몬도 이방여인들로 인하여 우상숭배 하다가 나라가 두 동강 나는 징계를 받았다. 목사가 은밀하게 간음을 하더라도 언론을 통하여 백주 천하에 다 공개되고, 교회는 두 동강나서 쪼개지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한다는 것은 말로만 끝나지 않는다. 선행과 높은 도덕성으로 무장해야 한다. 6. 사랑의 실천 회사직원들이 회사를 떠나는 가장 큰 이유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봉급도 아니고, 교통도 아니고, 복지도 아니다. 회사 동료, 상사 혹은 부하 직원과의 불화 때문이다. 불협화음 때문에 힘들게 들어간 직장이라도 그 직장을 떠나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왜 교회를 떠나는가? 교인끼리 싸우고, 목사와 싸우면 그 교회가 싫어지는 것이다. 교회가면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워야지 누가 올까봐 가슴이 철렁 해진다면 교회는 경쟁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예수 피를 함께 나눈 형제들이다. 그러나 이권(利權)이 없으면 소가 닭 보듯이 무관심 한다. 그런 교회가 부흥할 리 없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의 공통적인 멘트 중의 하나는 외로웠었다는 것이다. 누구와 깊이 대화할 수도 없고, 외톨이 같았었다는 말들을 한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아무도 자기에게 다가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단에 갔을 때 그들은 친절했고, 자기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는 말을 한다. 부모가 들으면 가슴 치며 배신감을 느끼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말한다. 자식이 외로웠었다고 하면 외로웠던 것이다. 식당에서 손님이 ‘음식이 짜다’고 하면 짠 것이다. 주인이 국물 먹었을 때 안 짜더라도, 손님이 짜다고 하면 짠 것이다. “우리 교회는 사랑이 없어요” 라고 말하면 없었다고 받아들이면 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편협된 사고로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주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하고, 사랑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니까 고치면 되는 것이다. 교인도 소비자이고, 고객이다. 고객이 항의하는데 불편을 해소해 주지 않으면 고객은 다른 매장을 찾게 되는 것이다. 제품은 좋은데, 직원들의 불친절과 미숙함으로 짝퉁회사(이단들)에게 고객을 계속하여 뺏긴다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 받을 것이다. 기독교는 원래 사랑의 종교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5:12)”고 하셨다. 그리고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마25:40).”고 하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양을 치라 하신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가? 교회가 건강해야 한다. 그러면 이단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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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연/특강
    2016-05-27
  • JMS의 포교전략과 대책(2)
    (이 글은 5월 25일(수) 거제교회에서 개최된 제1회 부산이단대책세미나 강의안 입니다.) JMS의 포교전략과 대책(2) ▲ 김경천 목사 (전. JMS 부총재) 4. 포교전략과 활동, 특징들 1) 청년대학생 중심의 포교 처음에는 주로 대학생들이 주로 포교대상이었다. 청년대학생 때는 진리에 대한 갈망과 도전의식이 가장 활발한 기간이다. 청년대학생들이 성경 공부하다가 정명석을 재림예수로 깨닫게만 되면 학업이고 가족이고 취직이고 전부 뒷전이다. 청년대학생들은 재림예수를 만났다는 감격에, 바울이 기득권을 배설물처럼 여긴 것처럼, 그리고 베드로가 그물과 배를 집어던지고 예수님을 따랐듯이, 그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대학생은 학과 친구를 어떻게 하면 전도할까만 생각한다. 학점은 중요하지 않다. 취직은 B급이나 하는 것이다. 학과 친구는 전도의 대상일 뿐이다. 가족도 가족의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전도할까 포교의 대상일 뿐이다. 반대하면 부모라도 그냥 사탄의 하수인으로 보이고, 심지어 원수가 된다. 어떤 대학생이 30개론을 듣고 정명석의 사명을 깨닫게 되면, 그 학생은 한명, 한명 전도하여 동아리를 만든다. 그 학생은 전도하기 위해 대학을 다닌다. 동아리에서 30개론을 가르치고, 계속하여 재생산이 일어난다. 전도된 학생이 다른 대학의 친구를 전도한다. 그 학생도 자기 대학에 가서 역시 동아리를 세운다. 그렇게 해서 전국적으로 대학마다 동아리가 들어가게 된다. 청년대학생들은 부모들이 주는 돈을 가지고, 학업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땅 끝까지 이르러 다시 오신 재림주님의 증거자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건다. 2) 청소년들과 문화선교 최근에 JMS는 7만 선교 목표를 발표 한 바 있다. 정명석이 출옥하기 전까지 7만 명 정도 만들어서 선생을 기쁘게 해야 한다고 한층 열을 올리고 있다. 이전에는 대학가에서 주로 포교하였으나, 지금은 중고등학생들에게로 포커스가 맞춰지고 있다. 청년대학생들은 이미 JMS에 대해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갖고 있어 포교가 쉽지 않다. 힘들게 포섭하여 교리공부 시키다가도 ‘여기가 JMS다!’라고 깨닫는다면 중도포기하기 때문에 대학생 이상의 성인들에게는 포교의 한계를 느끼고 있다. 자연히 어린 중고등학생들에게 관심을 돌릴 수밖에 없다. 그들은 악평도 듣지 않았고, 그게 무슨 상관이냐 하는 단순함 때문이다. 그들은 그냥 재미있으면 된다. 누가 친절하게 대해주고 운동도 가르쳐 주고, 밥도 사주고 관심 가져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최고다. 교리는 상관없다. 특별히 예수님에 대한 충성도도 없거나 낮다. 누가 자기에게 재미있게 해주고, 잘해주는가가 관심사일 뿐이다. 오늘 자기에게 자장면이라도 사주는 사람이 더 좋다. 그렇지만 중고등 학생이라고 하더라도 처음부터 성경공부로 연결시키는 일은 드물다. JMS는 문화선교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남자들의 경우에는 운동을 통해 끌어들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야구나 축구를 통해서다. JMS 회원 중 국가대표나 프로구단 출신의 야구선수가 전국대회규모의 야구대회를 열어 청소년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야구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주말마다 훈련시킨다. 그리고 같이 샤워하고 같이 밥 먹으면서 친해진다. 친해지면 인성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30개론을 조금씩 가르치는 것이다. 학생들은 평소 야구를 너무 하고 싶어 하지만 혼자서는 할 수 없었다. 그런데 JMS는 그런 청소년들의 욕구를 채워주고 필요를 채워주며 전도하는 것이다. 야구 유니폼도 다 맞춰 입고 제법 규모 있게 행사를 진행하는 것이다. 학생들은 자기가 그런 자리에 선수로 참가하여 뛴다는 사실만으로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이단이고 사이비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재미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그렇게 신경써주는 JMS단체가 너무 고맙게 생각된다. 게다가 교리공부를 통하여 정명석은 예수님처럼 죄가 없지만 악평자들의 모함으로 누명을 쓴 것으로 배우게 된다. 청소년들은 눈물을 흘리며 JMS를 힘들게 하는 기성교회에 대하여 적개심을 품게 된다. 축구는 더 세밀하게 조직되어 있다. 초등부부터 전국대회규모의 축구시합이 있다. 꿈나무 축구교실을 운영하기도 한다. 어려서부터 합숙훈련도 하며 그 조직에 녹아들게 한다. 그리고 축구대회도 지역마다 있고, 전국단위의 축구대회도 있다. 그리고 JMS의 전국체전 때는 세계에서 자신들의 국기를 들고 입장하여 올림픽을 방불케 하는 행사를 치르기도 한다. 평소 때는 조기축구나 일요예배 후 교인들끼리 모여 축구를 많이 한다. 축구에 한번 맛 들인 사람들은 축구하자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된다. 그들은 축구가 좋고, 사람들이 너무 좋고, JMS라는 단체가 너무 좋다. 그곳을 떠나서는 죽을 것 같다. 떠나봤자 할 것도 없고 그동안 재미있게 지냈던 인맥과 결별하는 것도 싫다. 이탈하면 자기혼자만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생긴다. 오히려 JMS에서 잘릴까봐 두려움이 생기고 소속감은 더욱 공고해지는 것이다. 여자들은 치어나, 모델, 째즈, 무용 등 예술을 통하여 전도한다. 정명석이 1980년대 초반, 고려대와 연세대 정기전을 참관하면서 양교의 화려한 치어 쇼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그 뒤로 JMS내에 남녀 치어 팀 들이 수십 개가 생겨났다. 치어리더가 되려면 여자들은 키 170, 남자들은 180은 되어야 한다. 해마다 전국 치어대회를 열기도 한다. 자체에서 우승하기도 쉽지 않다. 치어도 본부 치어가 있고, 지방 치어가 다 따로 있다. 정명석이 축구할 때면 본부 치어들이 나선다. 그 깊은 월명동 산골짝에서 밤이건 낮이건 정명석이 축구하면 치어복장을 한 치어걸들이 쭉 선다. 여자 회원들은 치어리더가 되고 싶어도 키가 작으면 될 수가 없다. 치어리더들은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 정명석이 축구할 때마다 수십 명의 미녀치어리더들이 열심히 응원을 하니, 동네 축구지만 마치 프로축구나 국가대표 경기하듯 재미있게 바라보는 것이다. 모델은 슈퍼모델 대회가 따로 있다. 여자들 키가 178이상 되어야 한다. JMS의 수퍼모델 대회에 가보면 우리나라에 저렇게 키 크고 예쁜 여자들이 많이 있었나 하고 놀랄 정도이다. 정명석은 욥의 딸들이 동방 사람들 가운데 가장 예뻤다고 했듯이, JMS의 회원들이 모든 종교 가운데 제일 예쁘다고 자랑하였다. 정명석은 이와 같이 성경을 통해 자기자랑을 한다. 그러나 참된 목사라면 성경 가지고 예수님을 자랑한다. 일반교회에서 야한 옷 입고 슈퍼모델 대회 같은 것 개최하기는 좀 부적절해 보이지만, 젊은 아가씨들이나 십대소녀들의 ‘예술성’과 ‘끼’를 발산케 해주어야 한다는 것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아이돌 그룹에 광란하며 반응하는 십대들의 끼를 교회는 어떻게 포용할 것인가? 금식기도 해서 파김치 만들어 버리는 것이 답일까? 아니면 신나는 찬양을 통해서 발산해야할 것인가? 교회도 재미있어야 하지 않은가? 청소년들을 교회로 가게 하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든가? 마치 시동 꺼진 차를 뒤에서 밀고 가듯이 힘들다. 그러나 그렇게 밀지 않아도 시동 걸린 비행기처럼 일반교회로 날아가게 할 수는 없을까? 이단들은 하나같이 예술성이 발달했다. 통일교의 리틀엔젤스는 말할 것도 없고, 신천지의 마스게임이나 카드섹션 등도 볼만한 광경을 연출하는 것은 틀림없다. 이단들은 행사 때마다 식전행사로서 올림픽의 식전 행사를 방불케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기들의 예술제를 보면서 ‘역사가 시작 되었구나’ 하면서 감격한다. 그 외에도 연극부가 있어서 정명석의 설교를 연극으로 재현해 보이기도 한다. 만화부도 정명석의 설교를 만화로 표현하기도 하고, 설교 때마다 삽화를 넣어 이해를 돕는다. 그 외에도 뮤지컬부 등 다양한 부서들이 있다. 3) 해외 선교 (1) 미국 미국은 총신대 졸업한 전도사가 미국으로 이민가면서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특별한 지원은 없었다. 미국선교사가 카펫트 청소하며 힘들게 한명 두명 가르쳐 수료시켰다. 수료하면 한국으로 무조건 다녀가게 한다. 외국인들에게 한국 방문은 성지순례와 같은 일이다. 외국인들이 정명석에 대해 어느 정도 믿음이 생기면 한국의 선교사들은 뒷전으로 물러난다. 정명석은 철저하게 그 나라는 그 나라 사람들에게 맡기는 전략을 쓴다. 처음에 한국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은 토사구팽 당하는 경우가 많다. 처음부터 선교사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속셈도 깔려 있다. 초대 미국 선교사는 JMS를 이탈하였다. 미국은 현재 200명 내외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2) 일본 일본은 고려대를 졸업한 한 학생이 일본 쯔꾸바 대학으로 유학하면서 시작되었다.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공부는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주로 포교활동에 전념하였다. 곧 바로 일본대학생 10명 정도를 전도하여 한국에 데리고 왔다. 그들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 후 일본은 몇 백 명으로 불어났고, 선교사의 영향력은 너무 컸다. 통일교의 초대 일본 선교사가 일본을 개척한 다음에 배신하고 나갔다는 것을 염두에 둔 정명석은 JMS초대 선교사도 그럴 것이 염려되었는지 선교사의 영향력을 줄이려고 하였다. 그 일본선교사는 정명석이 자기를 일본회원들과 이간질하는 말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는 사업을 한다는 미명하에 JMS를 이탈하여 나갔다. 일본은 현재 3000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JMS는 밖으로는 전혀 교회 같지 않다. 그냥 사회단체처럼 보인다. 예배가 끝나면 배구나 각종 스포츠를 통해 문화선교를 많이 한다. 그들은 자국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끈끈한 정을 JMS를 통해 맛보고 있다. 그들은 방송에서 JMS의 비리가 아무리 많이 폭로되어도 별로 흔들림이 없다. 일본은 유난히 엘리트 계층이 많다. 처음부터 대학생들을 포교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20-3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중견간부들로 성장했다. (3)대만 대만도 JMS에게는 특별한 나라이다. 천수이벤 전 총통이 유명해지기 전에 젊은 시절에 월명동을 방문한 바 있다. 그는 그 후에 국회의원이 되고, 타이페이 시장이 되고, 대만 총통이 되었다. 천수이벤 총통은 JMS의 대만 행사에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 주었다. 정명석은 천수이벤 총통도 자기 제자라고 적극 홍보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나중에 정명석이 중국에서 체포되었을 때 불리하게 작용되기도 하였다. 천수이벤은 그 후 부정부패로 20년 형을 선고 받고 현재 옥살이를 하고 있다. 그를 JMS로 전도했던 비서관도 질병으로 요절하였다. JMS에서는 그가 총통일 때는 그를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홍보하였으나, 지금은 전혀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대만은 JMS내에서 일본과 쌍벽을 이루고 있다. 대만과 일본 지도자들은 서로 경쟁하며 라이벌 의식이 강하다. 대만도 2000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4) 동남아, 기타 홍콩, 말레이시아, 싱가폴 등 JMS는 동남아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 홍콩은 정명석이 일찍부터 공들인 나라이다. 이화여대를 졸업한 장년부가 홍콩으로 이민 가면서 선교가 시작되었다. 나중에 정명석은 홍콩별장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고, 조사 받던 중 중국으로 밀항하게 된다. 말레이시아도 JMS의 국제 행사를 개최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모델이나 치어 등의 문화선교로 3000명을 동원한 바도 있다. 그 외에 전 세계 50개국에 걸쳐 뻗어 있다. (5) 해외선교의 특징 JMS의 해외선교는 철저하게 현지인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일반교회는 주로 교회에서 선교후원금을 보내주지만, JMS는 한국본부에서 대주는 일이 거의 없다. 이민을 가면 그 사람이 바로 선교사로 임명 받는다. 혹은 학생들이 유학을 가면 그 학생이 바로 선교사다. 그 유학생들은 부모들이 대주는 돈으로 공부는 소홀히 하면서 선교를 열심히 한다. 유학생이 선교사이고, 이민자가 바로 선교사이다. 장년부들도 이민 가서는 아르바이트 하면서 선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단의 부담 없이도 선교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현지인이 몇 명만 되면 한국에서 간 사람들은 뒤에서 관리만 하고, 담임 교역자는 전부 현지인들로 바뀌는 것이다. 그리고 몽골 같은 곳을 예로 들어보면, 일본의 한 여학생이 부모에게 몽골로 유학가고 싶다고 말하여 부모의 돈으로 몽골에 유학 갔다. 처음부터 그녀는 유학보다는 선교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그녀는 혼자 30-40명을 전도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몽골은 밥만 먹여주면 얼마든지 더 많이 전도할 수 있다고 하였다. 몽골의 대표자 몇 명이 한국으로 성지순례를 왔다. 경비는 몽골에서 사업하던 한국 회원이 대줘서 왔다고 했다. 그들은 한국에 성지순례를 와서 크게 감동받고 돌아갔다. JMS 선교는 구체적인 계획과 전략에 의하기 보다는 자발적 성격이 강하다. 일본 여학생이 몽골에 가서 선교하는 것이나, 한 캐나다 학생이 남아프리카로 가서 그곳에서 선교를 하여 몇 십 명을 만들어놓기도 하였다. 한국 교단에서 특별한 지원은 없었다. 자발적인 선교가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자발적인 선교가 성장의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정명석의 사명을 깨달은 사람들은 이제 땅 끝까지 가서 전도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것이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30개론을 새 복음이라고 하면서 가르치고 있다. 4) JMS의 구원관 JMS의 구원관은 카톨릭의 연옥사상과 비슷하다. 구약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은 선영계, 구원받지 못한 영들은 음부로 간다. 타종교나 선한 양심으로 산 사람들도 선영계로 간다. 거기서 죽어서라도 예수 믿으면 낙원으로 올라간다. 심지어 음부에 가서도 예수 믿고 낙원으로 올라갈 수 있다. 정명석에 의하면, 선영계에 간 영혼들은 그들이 살아생전에 땅에서 메시야를 기다렸듯이, 선영계에 가서도 계속하여 메시야를 기다린다. 거기에서라도 예수 믿으면 낙원에 올라가게 된다. 불교인도 천국이나 낙원은 못 가더라도 선영계는 간다. 석가모니도 다 하나님이 보낸 사람들이다. 기독교가 전깃불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촛불이나 호롱불 정도는 된다. 그러므로 불교라고 해서 지옥 가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JMS의 구원론은 상당히 포용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다원주의이고 예수님의 절대성과 유일성을 부정하게 한다. 마귀는 이와 같이 그럴싸한 교리로 다가온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죽은 다음에는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16:26)”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죽은 다음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죽어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누가 살아서부터 믿겠는가? 죽어봐서 거기서 믿으면 될 일이다. 그러므로 죽은 다음에 기회가 있다는 말은 거짓이다. 살아서 믿고 구원받아야 한다. 천하인간에 예수 외는 구원자가 없다. 시대별로 구원자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행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5) JMS의 율법주의 JMS의 율법주의는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선악과를 여자의 성기로 풀기 때문에, 성교하는 것은 원죄를 짓는 것으로 본다. 그들은 성교하지 않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갖게 된다. 성적으로 타락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게 된다. 성교는 오직 정명석의 허락받고 결혼해야 가능하다. 정명석의 허락 없이는 7년이고 10년이고 기다려야 한다. 성적으로 깨끗해지기 위하여 점점 성욕자체를 금기시하게 된다. 누구를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면 억눌러야 하고, 그런 감정이 생긴 것 자체를 회개기도 해야 한다. 당연히 이성교제도 하지 못한다. 심지어 유치원 때 남학생의 손잡은 것 까지 회개하라고 다그친다. 그러다가 약간의 신체접촉이나 자기도 모르게 로맨틱한 상상만 했어도 엄청난 죄책감과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된다. 너무 높은 수준의 실천과 성윤리를 강조하다 보니,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는, 죄책감과 죄의식이 너무 심해 정신분열이나 정신질환에 시달린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심지어 자살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JMS 사람들은 검은 옷을 입지 않는다. 천국에는 검은 색깔이 없기 때문에 지상에서부터 천국 생활해야 한다며 검은 옷을 입지 말라고 정명석이 말하였기 때문이다. 만약에 교역자가 검은 옷을 입고 있으면 불경죄로 인식될 수 있다. 그들은 밝고 환하고 깨끗한 옷을 입는다. 교회 올 때는 당연히 하나님 뵈러 오는데 최고로 신경 써서 잘 입고 가야한다. 청와대에 대통령 만나러 간다면 그렇게 옷 입겠느냐? 그런 율법적인 가르침을 사람들은 더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 철저한 율법주의에 단련된 JMS회원들은 일반교인들을 볼 때 자유분방한 민병대처럼 우습게 보는 것이다. JMS사람들은 커피도 마시지 않는다. 일반교회에서 목사가 교인들에게 커피 마시지 말라고 하면 아마 다른 교회로 떠나든지 아예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도 속출할 것이다. 그러나 JMS 회원들은 정명석의 먹지 말라는 한 마디에 마시지 않는다. 아마도 몰래 혼자 집에서 마시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게 했다면 그는 ‘이래도 되나?’ 하는 마음에 꺼림하게 되고, 회개 기도해야 할 것이다. 마시지 말라는 이유는 건강 때문에 시작했지만, 정명석이 말했기 때문에 구원받기위한 교리처럼 받아들여진다. 이단들은 이와 같이 회원들의 생활의 세미한 부분까지 관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특징이다. 그 외에 라면, 과자, 탄산음료 등 건강에 좋지 않은 것들은 먹지 않는다. 술 담배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다가 술 한번 마시면 지옥 가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목숨 걸고 술을 마시지 않게 된다. 그러면서 그들은 만족감을 느끼고 교만과 자랑이 싹트는 것이다. JMS의 율법주의는 사람들을 조이면 조일수록 사람들로 하여금 역시 우리 선생님은 진짜 하늘 사람이야 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런데 오늘날 일반 정통교회에서도 어떤 공로나 행위가 있어야 구원받는다는 신율법주의가 판치는 것을 보니 안타깝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엡2:8). 6) JMS의 윤리의식과 거짓말 정명석은 회원들에게 철저한 율법주의를 요구하지만 정작 자기는 무법 방종주의나 상황 윤리자처럼 행동한다. 정명석에게 절대적이란 것은 없다. 그러나 나름대로 절대적 기준을 설정하고 지키기도 한다. 예를 들면, 새벽에 일어났을 때 기도하기 전에 절대로 다른 사람과 먼저 대화하지 않는다. 대변 보고 오른 손으로 뒤처리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른 손은 사람들에게 안수기도해주는 손이기 때문에 거룩하게 구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껌 같은 것도 한번 안 씹기로 한 후로 절대로 씹지 않는 것 등이다. 정명석의 그런 겉모습에 사람들은 ‘역시 하나님의 사람이구나!’ 하고 감동 받는 것이다. 그렇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그는 무법 방종주의자나 상황 윤리주의자처럼 행동한다. 예를 들면 상사병 걸린 아들을 위해 어머니가 그 아들의 연인의 모습으로 분장하고 아들의 이불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들이 죽는 꼴을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정명석은 아들을 살리려면 들어가야 한다고 강의한 바도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죽어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러나 그는 사는 것이 우선이다. 그의 그런 윤리의식이 성 스캔들을 양산하게 되었던 것이다. 자기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서라면 여자회원들과 간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간음이 아니라 구원행위이고 은총을 베푸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짓말도 할 수 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으니 세상 사람들이 모르게 거짓말해도 좋다는 것이다. 거짓말은 모사(謀事)라는 미명하에 선한 행위로 포장된다. 그러나 거짓말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JMS 회원들도 점점 거짓말과 모사를 많이 쓰다 보니 서로 불신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정명석이 어떤 진실을 말해도 사람들 속에는 ‘선생님이 지금 무슨 모사 쓰고 있는 것 아닌가’ 하고 의구심을 갖는다. 어떤 때는 정명석이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회원들이 믿지 않자, 정명석은 “이것은 모사 아녀!” 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다. JMS회원들은 테러도 할 수 있다. 테러도 주님을 증거 하는 일이니 선한 일이다. 오히려 나간 사람들이 정명석의 비리를 폭로해도 가만히 있으면 정명석은 ‘너희는 내 제자도 아니다’ ‘지금 가만히 앉아서 뭣들 하느냐?’ ‘내 심정 맞춰서 행동하는 놈 하나 없느냐’ 며 테러를 부추긴다. 그것이 바로 테러를 명령하는 사인인 것이다. 그런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강한 충동감을 느껴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가 직접적으로 시키면 테러 사주로 걸리니까 회원들로 하여금 자발적인 형식을 띠어 테러하도록 충동질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탈자들에 대한 테러가 여러 번 발생하였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우상숭배도 엄격하게 규제하지 않는다. 가족을 전도하기 위해서라면 명절에 조상들에게 넙죽넙죽 절하라고 허용하기도 했다. 마음만 우상숭배 안하면 되지, 겉으로는 절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잘못이냐? 정명석은 자기의 그런 무법방종주의적인 행동을 이치(理致)라고 하였다. 그 말은 자기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반응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통일교를 줄기와 같은 원리라고 한다면 자기는 가지와 같은 이치라고 하였다. 정명석은 거짓말의 달인이다. 그의 거짓말은 법정에서도 발생했다. 검사가 당신이 메시아입니까? 라는 질문에 “아니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당신이 중심인물이오? 라고 묻자 그것도 “아니오”라고 했다. 그것은 평소 자기의 가르침과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JMS 사람들은 선생님께서 지금 모사 쓰고 계시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예수님은 “네가 왕이냐?” 하는 빌라도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셨다(요18:37). 그리고 예수님은 도망가지도 않으셨다. 그러나 정명석은 도망 다니다가 잡혔다. 정명석은 방송이 처음 터졌을 때 부리나케 해외로 도주하였다. 그러나 회원들에게는 해외 선교하러 나갔다고 말하였다. 검사가 “당신이 그렇게 무죄하다면 들어와서 의혹을 풀었어야 하지 않느냐”고 묻자 정명석은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들어왔지요”라고 대답하였다. 안 잡힐 줄 알고 도망 다녔다는 말인가? 자기가 죄가 없는데 누명을 썼다면, 그리고 순수하게 해외선교 나간 것이라면, 이렇게 강제송환되기 전에 진작 들어와서 의혹을 풀었어야한다. 정명석은 자기가 재림예수니까 무슨 짓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재림예수라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 상황윤리는 선한 일을 위해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정명석의 거짓말은 그냥 성범죄를 숨기기 위한 악한 거짓말일 뿐이다. 7) JMS의 사업 JMS는 월명관광(버스임대업), 보험, 화장품, 생활필수품 등 다양한 사업들을 하고 있으나, 통일교나 다른 이단들에 비해서 사업성은 크게 떨어진다. 휴대폰 사업이나 부동산 사업 등 여러 가지로 투자했으나 다 망했다. 사기도 여러 번 당하였다. 정명석은 하나님께서 일부러 물질주면 타락할까봐 사랑해서 주시지 않는다고 변명한다. 돈 많은 사장이 본부인과 둘째 부인에게는 물질을 주지만 마지막에 얻은 부인에게는 사랑만 주듯이, 하나님께서는 유대교(본부인)와 기독교(둘째 부인)에게는 물질 주셨지만 JMS(마지막 젊은 부인)에게는 사랑만 퍼부어 주신다는 것이다. 8) JMS의 봉사활동 JMS는 태안기름유출 사건이 났을 때 어떤 단체들 보다 최장수 봉사를 하였다. 다른 단체들은 휙 왔다 가고 휙 왔다 가고 하였지만, JMS 회원들은 끝까지 남아 현지인들로부터 최고라는 찬사를 들었다. JMS 의료팀은 대민 봉사활동을 자주 한다. 그리고 월명동에서 지역주민을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한다든가, 문화공연을 통해서 지역 어르신들을 위해 봉사를 많이 하는 편이다. 전부 JMS의 이미지 향상을 위해 열심히 뛰는 것이다. 시골 사람들은 누가 되었든지 간에 맛있는 밥 주고 관광시켜 주고, 공연 보여주고, 의료서비스 제공해주는 사람이 최고로 생각 들게 마련이다. (사)밝은 미소운동이라든지 (사)빛사랑청소년회 등의 법인 등을 소유하고 있다. 이들 단체들은 2002년 대통령 표창장도 받은 바 있다. 이단들은, 비단 JMS 뿐만 아니라, 대민 봉사활동에 적극적인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9) JMS의 기적과 표적 예수님께서는 말세에 “많은 거짓 그리스도들이 나타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한 백성이라도 미혹하리라”(마24:24)고 하셨다. 모세 앞의 애굽 술객들도 모세와 똑 같이 지팡이를 던져 뱀을 만들었다. 정명석도 그런 것이 있었다. 정명석이 눈이 오라고 기도했는데 눈이 온 사건이 있었다. 정명석이 서울에 올라와 성향원이라는 허름한 집에서 무상거주하고 있었는데 집주인이 나가라고 하자, 겨울에 눈이 오면 차마 내쫓지는 못할 것이라며 눈이 오게 기도하자고 한 것이었다. 겨울이라서 우연히 눈이 온 것이었을까? 두 번째로 나가라고 한 날에도 눈이 오라고 기도했는데 눈이 왔다. 그리고 한번은 여름 태풍이 북상 중에 있었는데, 정명석이 설교 중에 “내가 태풍 눈을 빼 버릴꺼여!” 하며 눈 빼는 액션을 취하면서 설교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날 뉴스를 보는데, 아나운서가 “북상하던 태풍의 눈이 빠졌습니다.”라고 멘트를 하였다. 정명석이 서해안 백사장에서 청년회원들과 배구를 하는데 그날 밀물 시간이 되었는데도 물이 올라오지 않았다고 한다. 월명동에서 행사를 하다보면 구름이 떠서 독수리 모양도 만들고, 사람얼굴도 만든다. JMS회원들은 항상 오늘은 독수리 구름이 뜨지 않을까 하고 이미 기대 심리가 높다. 독수리가 뜨면 JMS의 상징이 독수리니까 좋아한다. 정명석을 동방의 독수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사람의 얼굴 구름이 뜨면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감격한다. 사람들은 그런 현상을 보면 금방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기적과 표적이 실제로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예수님 외는 아니라는 강한 믿음과 신앙의 정조가 있어야 한다. 10) JMS의 신비주의와 영적 현상들 JMS는 신비주의적 성향이 강한 단체다. 정명석의 설교의 대부분은 자기의 꿈 이야기이다. 그가 받았다는 30개론 도표가 환상으로 계시 받은 것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라고 한다. JMS 사람들도 “너 왜 자냐?”고 물으면 “꿈꾸려고요” 라고 대답할 정도로 계시받기를 갈구한다. 요즘은 계시자들이 우후죽순처럼 많이 나타났다. 토마스 주남의 “천국은 반드시 있습니다”는 책을 읽고 그대로 따라 하는 사람들이 여러 명 나타났다. 그리고 캐더린 백스터의 지옥간증, 천국 간증과 천주교 안나 수녀의 책을 읽고 그대로 따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들이 정명석의 홍위병들이 되어 “천국 가니까 예수님과 선생님이 나란히 보좌에 앉아 있더라”, “생명책을 보았는데 누구누구의 이름이 있더라”, “이번에 새롭게 JMS신부들을 위해서 황금성을 만들었더라” “나가서 선생님을 악평하는 자들의 영혼들이 지옥에서 혀가 난도질 하는 광경을 보고 왔노라“ 고 간증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JMS 회원들 가운데 예수님을 못 보았다고 하거나, 천국지옥을 견학하지 못하는 사람은 명함도 못 내민다. 자연을 보더라도 그냥 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하여 무엇을 계시하는가 생각하며 의미를 찾는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중심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떨어지는 정명석의 계시와 자기들이 받는 환청이나 환상, 꿈에 더 의미를 둔다. 사탄도 광명한 천사로 분장하고 나타나(고후11:4), 사람들에게 천국지옥을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다. 40일 금식하신 예수님께도 사탄이 천하만국을 보여주며 자기에게 절하면 다 준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이단의 교주들이 계시 받았다는 주장들은 천편일률적으로 비슷하다. 성경은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계시이다. 성경 떠나서 어떤 개인의 영적체험이나 신비경험이 우리의 신앙규범이 될 수 없다. 오직 성경으로만!(Sola Scriptura!)이다. 11) 월명동 개발과 약수 정명석은 10년 이상 월명동 개발에 온통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앞산 돌 조경이 다섯 번이나 무너졌다. 원래는 시멘트 콘크리트로 계단을 만들려고 했으나 환상이 보이면서 하나님께서 지금과 같은 돌로 쌓으라고 하셨단다. 땅을 파다가 보니 낙타 모양의 바위도 나왔다. 그것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러 찾아왔던 동방박사들이 낙타타고 왔듯 재림예수인 자기의 출현을 그와 같은 상징물로서 보여준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돌 조경은 천국의 하나님 보좌의 형상이고, 앞에 있는 돌들은 네 생물이 보좌 앞에 있듯이, 네 가지 형상의 돌들이라고 하였다. 참으로 가관이다. 어찌 정명석의 생가가 하나님의 보좌가 될 수 있으며 4돌이 4생물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성경적 근거가 없다. 하나님 보좌와 정명석의 생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솔로몬은 그 멋진 금성전을 짓고도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모시기에 부족하거늘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왕상8:27)” 하였다. 그런데 정명석은 자기가 쌓은 돌 조경을 하나님의 보좌라고 하는가? 가당치 않다. 월명동 잔디밭 밑에는 샘물이 있다. 어떤 권사가 기도하다가 예수님이 그 물이 약수라고 가르쳐줬다고 한다. 정명석은 어떻게 자기에게 먼저 안 가르쳐주고 권사에게 먼저 계시해 줄 수 있느냐며 말하기도 하였다. 독일 청년은 그 물을 마시고 불치병이 나았다고 청중 앞에 간증하기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나았다고 하였다. 정명석은 하나님께서 월명동을 유명하게 하시려고 약수를 주셨다고 좋아했다. 정명석은 자기도 이가 아플 때 그 물을 머금고 있으니까 마치 마취주사를 맞듯이 통증이 가라앉더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정명석은 물의 효능을 너무 신봉한 나머지, 한번은 눈이 아프자 그 물을 발랐는데 오히려 눈이 충혈되기도 하였다. JMS 사람들은 그 물을 쉴 세 없이 떠 날라서 마신다. 박태선이 기도한 물을 마시면 병이 낫는다고 하였고, 할렐루야 기도원에서 능력의 생수라고 장사하여 팔더니만, JMS에서도 치유의 약수터가 있다고 자랑하고 있다. 복음이 없는 곳에서는 이와 같이 비본질(非本質)로 본질(本質)을 가려서 복음을 못 보게 한다. 월명동 수련원에는 그리스의 판테논(만신전)을 닮은 본부건물이 들어서 있다. 월명동은 본래 달밝골인데 정명석이 월명동이라고 개명하였다. 월명동은 정명석의 생가가 있던 곳으로 그곳은 그들에게 성지이자 마음의 고향이다. 교주들은 공통적으로 생가를 개발하여 성지화 작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JMS는 최근에 분당에 38억 자리 건물도 샀다. 원래 일반교회로 쓰던 장소인데 헐값에 샀다. 그리고 지역마다 교회를 짓거나 일반교회 건물을 매입하는 추세이다. 일반교회 가운데 무리한 건축으로 말미암아 은행이자를 못 낸 교회 건물들이 그들에게 좋은 먹잇감이다. 성전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일반 정통교회에서는 외적 예배당의 건축보다는 내적 성전건축에 더 주력하여야 할 것이다. 12) JMS의 자기 증거 (1) 유별난 자기 사랑 정명석은 자기 증거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 그는 축구를 하더라도 혼자 50골, 60골씩 넣어야 직성이 풀린다. 어떤 때는 골키퍼를 30명씩 세운 뒤 골인시켜놓고 즐거워한다. 물론 제대로 막고 제대로 수비하면 정명석은 한골도 넣기 힘들다. 정명석의 팀은 A급 선수출신들이고, 상대팀은 B급의 아마추어들이다. 실력대로 붙어도 B팀이 질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B팀 선수들은 정명석이 볼 잡으면 막는 시늉만 한다. A팀 선수들은 슈팅할 수 있는 노마크 찬스가 와도 정명석에게 패스하여 정명석으로 하여금 슛하게 한다. 게다가 골키퍼는 반대방향으로 넘어지고, 들어간 다음에 슬라이딩한다. 치어들은 팔짝팔짝 뛰면서 골인을 축하한다. 빵빠레가 울려 퍼진다. 사람마다 이것은 김일성축구라고 한마디씩 한다. 그는 축구 유니폼을 입어도 혼자만 다른 색깔의 옷을 입는다. 야곱의 12아들 가운데 요셉만 채색 옷을 입었듯이, 자기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2) 시인 정명석 시를 쓰더라도 자기를 직접 증거하는 시들이 많다. 책을 쓰더라도 주로 독자들은 JMS회원 들이다. 정명석의 <인물났네>라는 다음의 시를 보자. 자신을 인물(人物)이라고 직접 찬양하고 있다. 그의 시는 주로 자기를 찬양하는 시이다. <인물(人物)났네> 인물(人物) 났네 인물났어. 백년이나 묵은 토담집에서 저 기와 요처(要處) 고대광실(高臺廣室) 그 높은 집도 하고 많은데 하필이면 첩첩산중 두메산골 토담집에서 인물이 났다니! 하기야 저 아브라함 링컨은 통나무 집에서 났고 예수는 베들레헴 촌락 움막집 말 마구간에서 났다지. 아! 고금역사 이후 그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세상의 영웅열사 성현성자들이 다들 그랬었지 움막이면 어떠하고 토담이면 어떠하고 통나무 집이면 어떠하랴 그저 천품 좋고 재질 능하고 제 때 나면 그만이지 지자(知者)는 강을 좋아하여 강가에서 낳고 인자는 산을 좋아하여 산에서 난다지 그렇고 그렇고 말고 그래서 그런 곳에서 난거지 아! 전설에 얽힌 대둔산 영산준령 인대산 노령산맥 쭉뻗어내 맞닿은 저 두메산골 월명동 백년이나 묵은 토담집에서 인물났네 인물났어 작고도 작은 마을에서 지구촌의 큰 인물이 났네 (1989년 1월 16일 영감의 시-선생님의 과거와 미래를 회상하며) (3) 수십 번의 죽을 고비 월남전에서 수십 번의 죽을 고비에서 살아난 것도 자기를 오늘날처럼 쓰기 위하여 특별히 살려주셨다는 것이다. 정명석이 연못에서 목욕하고 있었는데, 그곳이 베트콩들의 식수원이었다고 한다. 그런 줄도 모르고 목욕하고 있었는데, 베트콩 3명이 따발총의 방아쇠를 당겼는데 총알이 안 나와 베트콩들이 한국군에 자수하여 그 사실을 말함으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번은 베트콩이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았는데 터지지 않았다고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막대기인 줄 알고 집었는데, 막대 수류탄이었다고 한다. 누가 갑자기 뒤통수를 때리는 것 같아 자기도 모르게 던졌는데 바위 구멍 속에 들어가 터져서 살게 되었다는 식이다. (4) 30개론 도표제작 30개론 도표를 금산에 있는 도표 화가에게 부탁하여 그리게 하였으나 자기에게 품삯 줄 돈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돈 대신 도표 하나하나를 설명하여 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사람이 “당신 이 도표 가지고 나가서 성공 못하면 나한테 몽둥이로 맞아 죽을 줄 알아!”라고 하더란다. 그 말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처럼 들렸다고 한다. (5) 21년 수도생활 자기가 21년 동안 수도 생활한 것이 처음부터 21년 동안 하라고 했다면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조금만 더하면 군(郡)에서는 큰 소리 치겠다.” 그리고 “또 다시 조금만 더하면 도(道)에서는 큰 소리 치겠다.”고 하고, 그 기간이 끝나자, 또 다시 “조금만 더 하면 네 나라에서는 큰 소리 치겠다.”.... 또 다시 “세계에서는 큰 소리 치겠다.”고 했단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 보니 21년을 수도생활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고도 다 못 배웠으나 앞으로 계속 배워가면서 사명 감당하라고 하셨다고 한다. (6) 수많은 귀신들 한번은 정명석이 영안으로 보니까 대둔산부터 인대산까지 귀신들이 가득했다.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귀신들이었다. 그 귀신들이 하는 말이 ‘저 놈을 죽여야 한다. 저 놈이 세상 나가면 우리들은 끝장이다’고 하면서 죽이는 시늉을 하더란다. 그러나 그 귀신들이 막상 몇 미터(m)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정명석의 이런 비슷한 간증들은 참으로 많다. (7) 영계 학교에서 1등하다 정명석이 영계학교에 처음 가보니 세상의 날고 기는 도사, 신령한 사람들은 다 와 있었다고 한다. 처음 수업을 듣는데 거의 한 글자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두 번째 세 번째 가면서 조금씩 글자가 보이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다 알겠더란다. 영계학교에 올라갈 때마다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고, 결국은 정명석 자기 혼자 남게 되었고, 그래서 1등 하여 재림 사명 받아왔다고 한다. (8) 붓 받은 사건 한번은 정명석이 예수님께서 그림을 그리는 대로 따라 그리고 있었다. 동그라미 그리면 동그라미 그리고, 세모 그리면 세모... 그러다 보니 예수님이 갑자기 사라졌다. 얼굴을 들어보니 저기 앞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려고 하더란다. 그래서 가시려면 가신다고 말이라도 하고 가야할 것 아니냐?고 했단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제 너에게 더 이상 줄 것이 없다. 이것이 마지막 붓이다”고 하면서 여러 개의 붓 가운데 가장 큰 붓을 뽑아서 던져주셨다고 한다. 그래서 정명석이 그 붓을 받았다고 한다. 정명석은 그 붓이 무엇일까 고민하였고, 화가가 되라는 말씀인가 생각하다가 누가복음1장 2절에 데오빌로 각하에게 말씀을 적으려고 붓을 들었다는 글을 읽고 아하 말씀의 붓이로구나 하고 깨달았다고 한다. 정명석은 그 뒤로 입만 열면 말씀이 술술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자기가 예수님께 받은 붓은 가장 큰 붓으로서, 더 이상 해석할 것이 없는 마지막 나팔과 같은 큰 말씀의 붓이라고 하였다. (9) 꿈에 구직 여행을 떠나다. 정명석이 하루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느냐고 기도하다가 잠들었다고 한다. 그러자 예수님이 나타나서 밤새토록 수십 군데를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이 장로님이 경작하고 있던 제주도 감귤 밭이었다고 한다. 그 장로님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싱글벙글하며 어찌 이런 누추한 곳에 오셨습니까 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는 사람 하나 네 농장에 맡기려고 데리고 왔다고 하더란다. 그러자 그 장로는 예수님의 부탁인데 자기가 어떻게 거절하겠느냐며 얼마든지 맡기라고 하더란다. 그러나 정명석이 가만히 보니까 귤 따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평생토록은 못하겠더란다. 그래서 싫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아무 부담 갖지 말고 네가 싫다면 싫다고 하라시며 다른 곳으로 가셨다고 한다. 그러기를 40-50군데 했는데도 결국은 다 못 마땅하더란다. 그래서 정명석이 저는 평생 예수님만 따라 다닐래요 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 따라 다녀도 좋으나 배고플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도 예수님만 따라가겠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이 사명하게 되었노라고. (10) 골키퍼 하다가 군화 발에 채인 사건 정명석이 월남 다녀온 후 동네에서 축구시합이 있었다. 그때 정명석이 골키퍼를 하고 있었다. 정명석이 하도 날렵하게 볼을 잡아내곤 하자 상대방 선수가 일부러 정명석의 머리를 군화발로 있는 힘껏 찼다고 한다. 정명석은 떼굴떼굴 굴러서 쓰러졌다. 주변에서 죽었다는 소리가 들렸다. 병원에서 누워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단다. 그 사람이 너를 찬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찼다고 하시더란다. 왜 차셨느냐고 물으니까, 배신해서 그랬다고 한다. 그냥 죽여야 하는데 죽는 이유라도 알고 죽이려고 왔다는 것이다. 무엇이 배신입니까? 고 묻자 왜 네가 아나운서 되려고 하였느냐고 물으시더란다. 정명석은 아나운서가 되어 방송을 통해서 복음을 증거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였다고 한다. 자기가 예수님 안 믿는 것도 아니고, 더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려고 한 것인데, 그게 어찌 배신이란 말입니까? 아니다. 배신이란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는 것도 배신이다. 나는 너를 세계적인 사명을 주어 쓰려고 했는데 무슨 난데없는 아나운서냐 라는 것이다. 정명석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한번만 살려주십시오. 한번만 살려주면 세상사람 다 전도하여 드릴 테니 살려달라고 간구했다는 것이다. 그때서야 예수님의 화난 얼굴이 살짝 돌아오면서 어떻게 전도하려느냐? 고 묻더란다. 그래서 한명을 제대로 가르쳐서 구원시키고 그가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해서... 나중에는 전도할 사람이 없습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가 지금 이와 같이 전도해서 지금 JMS단체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 때 형들은 자기가 죽을 줄로 알고 죽어도 한이나 없게 수술하자고 하더란다. 그래서 자기는 저 수술대 들어가면 죽는다고 하여 수술 받지 않고, 예수님이 고쳐줘서 살았다고 한다. 형들이 발로 찬 사람을 살인미수죄를 적용하여 벌하려고 하였으나 자기는 예수님의 뜻을 깨닫고 그 사람을 용서해 주었다는 것이다. 자기는 지금 세상 방송국의 아나운서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아나운서가 되어 이렇게 새 시대 새 말씀을 전하게 되었노라고 간증하였다. 다른 교주들도 이와 유사한 간증들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름대로 다 하고 있다. 정명석의 형들은 자기 동생이 축구하다가 발에 채인 뒤로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모친은 그 외에도 정명석이 옛날에 미친 행동을 했었다고 말하였다. (11) 정도령과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정명석은 자기야 말로 정도령이라고 주장한다. 우선 정(鄭)씨가 같고, 도령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도령은 진리를 전하는 사람인데 자기는 진리를 전하고 있지 않느냐? 자기야 말로 결혼하지 않았고, 진리를 전하는 정도령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대산 밑에 옛날부터 큰 사람이 난다는 전설이 있는데, 자기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대둔산에서 두 문을 통과하여 도를 닦는 사람이 도인이 되어 나타난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원효가 문(門) 하나를 통과하여 도를 닦았는데 그곳이 대둔산의 태고사 절이라면, 자기가 기도한 곳이 바로 독수리 봉인데 그곳은 돌 문(門) 두 개를 통과해서 들어가는 장소라고 하였다. 자기가 그곳에서 기도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였다. 자기가 깨달은 도는 마치 “설한풍(雪寒風) 속의 생화(生花) 한 송이”와 같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여 주셨다고 한다. 1999년 8월 초 정명석은 프랑스 파리의 상공에 떠 있었다. 상공에서 바라본 파리는 너무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때 음성이 들리기를 “겉은 천국이나 속은 지옥이로다”는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때는 바야흐로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해였다는 것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거의 다 바캉스를 떠나고 도시 전체가 텅텅 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 정명석은 그곳에서 체전을 열었다. 그리고 자기가 이렇게 와서 이런 평화의 체전을 열고 있으니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의 주인공이 아니겠느냐고 말하였다. 정명석은 자기를 성경의 재림예수로 믿었기 때문에 한국의 정도령도 자기이고,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의 주인공도 자기라고 믿었던 것이다. 정명석은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그 지역의 전설이나 예언이 있다면 그것은 전부 자기를 두고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 기고/강연
    • 강연/특강
    2016-05-27
  • JMS의 포교전략과 대책(1)
    (이 글은 5월 25일(수) 거제교회에서 개최된 제1회 부산이단대책세미나 강의안입니다.) JMS의 포교전략과 대책 ▲ 김경천 목사 (전. JMS 부총재) 1. JMS란 무엇인가? JMS란 원래 정명석의 영어이니셜이다. 그래서 초창기의 회원들은 가슴에 "JMS"라는 뱃지를 달고 다녔었다. JMS는 정명석의 이니셜이 분명하지만, JMS측 사람들은 예수님을 의미하는 새벽별(Jesus' Morning Star)의 이니셜이라고 항변한다. 그리고 JMS측에서는 계2:28에서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이긴 자에게 새벽 별(morning star)을 주리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자기들이야말로 바로 새벽별을 받은 이긴 자들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공식명칭도 "세계청년대학생MS연맹"이라고 하였다. 정명석은 JMS단체의 이름을 여러 번 바꾸었다. 방송이나 언론에 부정적으로 비칠 때마다 바꾸곤 하였다. 처음에는 애천 교회로 시작하여, 세계청년대학생MS연맹, 국제크리스찬연합, 기독교복음선교회로 이어지고 있다. 법인으로는 동서선교회가 있다. 동서선교회 이름으로 월명동 수련원 땅을 관리하고 있다. 월명동(정명석의 출생지)은 외부명칭은 수련원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성지 땅’으로 부른다. JMS교회들은 예수교 감리회로 간판을 걸기도 하고, 장로교라고 달기도 한다. 그리고 JMS교회는 간판이나 십자가 없이 창문에 교회 이름만 썬팅으로 마무리하고, 자기들만 알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신입생들은 처음부터 예배에 참석시키지 않는다. 되도록 30개론 다 듣고 수료해야 참석하게 한다. 2. 정명석은 누구인가? 1945년 3월 16일 충남 금산군 진산면에서 정팔성과 황길례 사이에서 6남 1녀 중 3남으로 출생하였다. 위로 장남 정oo목사(성결교)와 차남 정oo목사(통합) 등이 일반교회 목사인 기독교집안에서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 집이 신앙생활을 시작한 것은 장남이 어려서 동네에서 어린이들끼리 ‘춘향이 놀이’(무당놀이)를 하다가 갑자기 쥐고 있던 대가 흔들리며 ‘나는 베드로다. 예수를 믿어라’는 음성을 들으면서부터라고 한다. 정명석이 태어난 그 동네는 일제 때 금 광산으로 인해 제법 북적거리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화전민들만 남아 살던 지역으로 집이라고는 3채 밖에 없던 두메산골이었다. 형들은 공부하러 도시로 떠나고, 동생들도 돈 벌러 다 떠나고, 홀로 늦게까지 남았던 정명석은 나무하러 가서 기도하고, 굴에서 기도하고, 대둔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였다고 한다. 한번은 “나는 못 배웠습니다. 나는 가난합니다... 나는 못 생겼습니다”라고 신세한탄하며 기도하고 있었을 때, “누가 아니래?! 그렇지만 이제부터 내가 너를 가르쳐 주마”라고 하더란다. 그러면서 “너는 처음에는 창피하지만 배우고 나중에는 선생의 선생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굴속에서 주로 기도를 하였는데, 가을에 굴에 들어갔다가 그 이듬해 나오기도 하면서 초인적인 수도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틈틈이 성경을 많이 읽었는데, 한번은 너무 어려워 땅에 묻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집에 읽을 것이라고는 만화책도 없었고, 다만 초등학교 교과서와 성경 책 밖에 없어 성경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로 성경책을 2000번 가량 읽었다고 자랑하였다. 정명석은 두 번씩이나 파월장병으로 월남 전쟁을 경험하였다. 월남전에서 수 십 번 죽을 고비에서 살아났는데,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구해주셨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월남 전쟁은 메시야인 자기를 연단시키기 위해서 발생했다고 말할 정도로 자기에 대한 확신이 강한 사람이다. 바깥에서 보면 미치광이겠지만, 그를 재림예수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엉터리 주장도 진리처럼 통한다. 마치 기독교인들이 역사(歷史)를 구속사(救贖史)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 한 예를 들자면, 정명석은 주장하기를, 2002년 한국의 월드컵 4강은 자기가 재림예수라는 표적이라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의 부활하심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적이 되듯이, 정명석이 ‘이 시대의 사명자’라는 표적이라는 것이다. 그 증거로 다시는 한국에서 월드컵도 열리지 않고, 한국이 4강까지 가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2012년 영국올림픽에서 홍명보호가 3위 성적으로 동메달을 땄다. 그리고 한국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도 개최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한국의 월드컵 4강은 비교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한국이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것과 정명석이 무슨 관련성이 있는가?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강력한 표적이지만, 한국이 월드컵 4강을 하고, 심지어 우승할지라도 그것이 정명석이 재림예수라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정명석은 자기에게 하나님의 신이 들어왔다고 하였다. 마치 예수님께 하나님의 신이 강림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자기에게 하나님의 신이 들어왔다고 주장하며 재림예수니, 보혜사 성령이니 주장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만 40명도 넘는다. 전부 자기네 교주만이 진짜 재림예수라고 믿고 있으나, 예수님 말고는 전부 가짜 들이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마24:5)”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그대로 성취된 것뿐이다. 정명석은 자기를 기도 많이 한 사람이라고 자랑한다. 대둔산에서 기도할 때는 너무 추워서 옆에 있던 소나무는 얼어 죽었는데, 자기는 살았다고 한다. 그 증거로 까맣게 된 손톱을 보여주며 그때 동상 걸린 흔적이라고 하였다. 모든 교주들이 하나같이 고생 많이 하고, 기도 많이 하여 마침내 계시 받았다고 하는 것은 일맥상통, 대동소이하다. 그리고 자기가 한참 기도할 때는 번뜩하면 이산, 번뜩하면 저산, 자기가 어느 산을 생각하면 어느 순간 자기 몸이 그 산에 가 있더라는 것이다. 소위 축지법까지 썼다고 자랑하였다. 자기가 전주에서 전도하다가 밤에 출발하여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려 진산까지 와서 새벽기도에 참석했다고 한다. 참고로 전주에서 진산까지는 자동차로 달려도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이다. 그러나 나는 30년 가까이 그의 옆에 있었으나 그가 축지법 쓰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하였다. 다만 이해하려 하다 보니, 지름길로 가서 좀 빨리 이동한 것을 두고 말하는가, 아니면 축구를 남보다 오랫동안 하는 것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이해하였을 뿐이다. 정명석은 그 외에도 거짓말(모사)과 과대포장이 심한 사람이다. 항상 부풀려 말하는 경향이 있다. 따르는 회원이 2만 명쯤이면 외부 사람들에게는 15만 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정명석은 자기증거와 자기자랑에 목메는 사람이다. 항상 자기가 ‘이거 했다’, ‘저거 했다’ 하며 자기 증거 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늘 자기를 증거 하라고 독려하였다. 예수님도 세례요한이 증거 잘못 해서 죽었다고 하면서...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이었다. 정명석은 결코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사람이 아니다. 간혹 증거 한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잠깐 이용하는 것뿐이다. 심지어 악을 행할 때도 "예수님도 그랬다"고 물 타기 하거나, "예수님께서 시켜서 하는 일이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악용하였다. 3. 30개론의 특징 1) 성경을 비유로 읽는다. (1) 오병이어 기적 실제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인 것이 아니라, 그날 생명의 떡 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오천 명이라는 것이다. 열두 광주리는 열두 사도를 의미한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그날 어린 아기가 내미는 도시락을 바라보시고, 떡을 떼고 또 떼서 사람들을 먹이신 것이 아니라, 도시락은 한쪽에 놓고, 그 대신 말씀을 전하여 그들로 생명의 떡으로 배불리 먹였다는 것이다. 만약에 사람들이 실제 떡을 먹고 배불렀다면 예수님을 떡집 아들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들었기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정명석의 비유론 해석은 질량보존의 법칙을 배운 사람들에게는 매혹적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시다. 오병이어로 5천명이 아니라 5만 명의 사람이라도 먹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에 말씀의 떡만 먹고 끝난 사건이라면 표적이라고 하면서 굳이 성경에 기록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오병이어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는 실제 표적의 사건이었다. 이와 같이 성경을 비유로 풀거나 가현설(假現說)적으로 푸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고, 사탄의 미혹이다. (2) 베드로와 물고기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셔야 했을 때, 성경의 문자대로 베드로가 물고기 한 마리 잡아 아가미에서 돈을 빼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다는 세상을 비유한 것이고, 물고기는 사람을 비유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나가서 누구 돈 좀 없냐고 물었을 때 먼저 대답하여 돈을 꺼낸 준 사람이 물고기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도 돈이 필요할 때 사람들에게 말하여 그 필요를 해결해주는 사람이 물고기라는 것이다. 베드로가 바다에 나가 물고기 잡아서 돈을 꺼내 어떻게 바쳤을까? 하고 고민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이런 가르침이야말로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성경의 기적들이 억지로 믿을 필요도 없이 술술 풀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어려워서 못하실 일이 있겠는가(창18:14). 하나님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만약 정명석의 말대로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서 돈 꿔서 낸 것이라면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에는 실제적으로 기적과 같은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평소 설교자는 확신을 가지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증거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정명석의 이와 같은 비유적인 해석방법은 성경의 기록을 실제역사로 보지 못하게 한다. 결국 재림에 대한 예언도 비유로 읽게 되는 바, 사람을 재림예수로 믿고 따르게 된다. 성경은 이와 같이 억지로 푸는 자들에게는 멸망만이 기다리고 있다고 경고한다(벧후3:16). (3) 공중휴거 정명석의 공중휴거는 전반기와 후반기가 다르다. 전반기에는 공중은 하늘공중이 아니라 지구를 공중이라고 본다. 들림 받는다는 것은 새 역사로 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구약사람이 신약 사람 되는 것이고, 신약사람이 성약사람 되는 것이야말로 들림 받는 것이다. 구름은 깨끗해진 많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신약사람들(기독교인들)이 정명석을 재림주로 믿고 따르는 성약사람들(JMS)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휴거라고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애굽에서 모세를 따라 나선 것이 휴거이고, 광야에서 여호수아를 따라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휴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후반기에는 휴거가 두 번 일어난다고 수정하였다. 육적 휴거(1차 휴거)와 영적 휴거(2차 휴거)가 있다는 것이다. 육적 휴거는 살아 있는 사람들 중에 정명석을 믿고 따르는 것이 육적 휴거요, 영적 휴거는 육적휴거를 이룬 사람들 중에 말씀 듣고 실천하여 빛나게 된 영혼들이, 성자본체가 하늘에서 영으로 내려올 때 올라가는 것이라고 한다. 평소 휴거에 자신이 없거나 거부감을 가졌던 사람들이라면 이런 가르침이 더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고 생각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휴거는 두 번에 걸쳐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몇 년 걸려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단번에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고전15:51). 성경의 예언은 반드시 성취된다. 그 예언이 하나님께서 약속한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하나님께는 사람들처럼 그 일이 어려운 일이냐 쉬운 일이냐가 중요하지 않다. 약속하신 일이라면 아무리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도 전부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고, 없는 것도 불러 세우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롬4:17). (4) 선악과 정명석은 선악과를 비유로 본다. 하나님께서 따먹으면 죽는다고 했는데, 인간들의 입장에서 죽는다고 해도 따 먹을 것은 무엇인가? 남녀 성관계 아니겠는가? 하와가 따먹고 잉태하는 고통을 얻었는데 무슨 과일을 먹어야 잉태하는가? 입으로 따먹었다면 마스크를 하고, 손으로 따먹었다면 장갑을 꼈어야지 왜 하체를 가렸는가? 하체로 따 먹었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은 따먹으면 죽을 과일을 만들어놓고 시험하는가? 왜 인간은 따먹으면 죽는다고 했는데 기어코 따먹었는가? 생식기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만들 수밖에 없었고, 인간들은 따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 하와가 어린 나이에 성교하여 원죄를 지었듯이, 오늘날도 눈을 들어보라. 전부 온 세상이 성적인 문제로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가? 정명석은 선악과는 여자의 성기를 비유한 것으로 푼다. 정명석은 이와 같은 성경해석을 바탕으로 하여 따르는 사람들에게 영육이 온전히 성장하기 전에는 절대로 성교하면 안 된다고 통제한다. 자기의 허락 없이 성교하는 사람들은 원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타락론으로 인하여 JMS 회원들은 자유롭게 이성교제를 하지 못한다. 이성교제 하다 보면 타락하게 되니까 아예 원천봉쇄 하는 것이다. 예배시간에도 남녀 따로 따로 앉는다. 심지어 눈도 마주치지 말라고 강요한다. 10년이고 20년이고 정명석의 허락 없이는 결혼할 수 없다. 세상에 이런 통제는 북한 공산주의에도 없다. 그래서 허락받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결혼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합동결혼식이다. 간혹 부모의 강요에 못 이겨 스스로 결혼한 사람들은 JMS를 떠나야 하고(그것이 에덴동산에서 추방이다), 떠나지 않고 JMS에 남아 있더라도 낮은 급 구원을 받게 되고, 옆의 회원들로부터도 갖은 눈총을 받으며 평생 죄지은 자의 심정으로 살아야 한다. 정명석은 타락론을 강의할 때, “기독교 목사들은 밤마다 선악과 따먹으며 원죄 짓고 있으면서도 모른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JMS 회원들은 자기들만이 원죄를 해결하고 가장 깨끗한 주님의 신부라며 자긍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JMS 회원들은 엘리트의식과 영적 교만이 하늘을 찌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정명석은 성관계 하지 말라고 푸니 번성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양립할 수 없다. 정명석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악과는 영원히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성장하면 따먹게 하려고 하셨다고 변명한다. 그런 가르침은 통일교와 똑같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 선악과가 익은 다음에 따먹으라는 말씀이 있는가? 이와 같이 이단들은 성경에 없는 말을 지어내서 사람들을 종으로 삼고 이득(利得)을 취하는 것이 특징이다. 벧후2:3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利)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성경에는 비유도 있지만 핵심은 전부 하나님의 약속을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문자 그대로 읽어야 한다. 만약 성경을 정명석처럼 비유로 읽는다면 해괴한 일이 발생하게 된다.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트린 사건은 마리아가 향유옥합을 문자 그대로 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정명석의 비유론 식으로 해석한다면 신부가 첫날밤을 위해 향유옥합을 준비하였듯이, 처녀가 남편을 위해 평생 간직한 것이 무엇이냐? 바로 처녀의 순결이 아니더냐? 그러므로 ‘향유옥합을 깨트려라’ 라는 것은 ‘처녀의 순결을 내게 바쳐라’가 된다. 정명석에 의하면 자기는 완성한 아담이다. 그렇다면 익은 선악과는 따먹어도 괜찮다. 자기는 따먹어도 원죄에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정명석의 타락론은 그를 희대의 성범죄자가 되게 한 것이다. 선악과는 따먹으면 죽는 실제 과일이었다. 절대 여자의 성기가 아니다. (5) 불 심판 정명석은 불 심판을 말씀심판이라고 푼다. 자기가 전하는 말씀 들으면 구원, 안 들으면 심판받고 지옥 간다. 그러므로 자기가 지금 불 심판을 감행하고 있으니 재림예수라는 것이다. 꿩 잡는 것이 매라는 논리다. 물론 성경에는 말씀을 불로 비유한 것도 있다. 렘23:29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그러나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라. 소돔과 고모라 성이 유황불로 멸망 받았듯이,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그러하다 하셨다. 눅17:29-30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러므로 재림 때의 불도 실제 불이다. 그리고 베드로후서 3장의 7절 말씀을 보자. 벧후 3: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개역한글> 이단들은 여기서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른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불 심판은 말씀심판이라고 우긴다. 그러나 앞뒤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자. 동일한 말씀이란 무슨 말씀인가?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벧후3:5). 노아 홍수 심판 때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물로 심판하셨다(벧후3:6). 그와 같이 종말에는 불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신대로 그대로 불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결국 동일한 말씀이란 말씀으로 천지 창조하시고, 말씀대로 노아홍수 심판하셨던 하나님의 그 말씀. 그 동일한 말씀이 종말에도 말씀하신대로 불 심판 하실 것이다. 결코 비유가 아니다. 벧후3:7 사실 하늘과 땅은 지금도 하느님의 같은 말씀에 의해서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은 하느님을 배반하는 자들이 멸망당할 심판의 날까지만 보존되었다가 불에 타 버리고 말 것입니다. <공동번역> (6) 구름 정명석은 구름을 사람으로 푼다. 예수님께서 영으로 자기 몸에 들어오셔서 자기를 타고 나타나셨으니,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오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구름이라고 한다. 그래서 구름떼와 같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믿고 따르니 그것이 바로 구름 타고 오신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 육신을 타고 나타나셨고, 자기는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떼같이 따르니, 자기가 바로 구름타고 오신다는 재림예수라는 것이다. 거짓말이다. 제자들이 승천하시는 예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구름이 가리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천사들이 “하늘로 올려 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신다”(행1:11)고 하셨다. 그러므로 실제 구름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장 7절에도 “보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라고 하였다. 혹자가 나타나 ‘예수께서 구름타고 오시리라’는 명백한 역사적 예언을 불신하고, 비유로 해석하여 자기가 바로 구름타고 온 재림예수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적그리스도이다. 정명석도 예외는 아니다. 이단들은 엘리야가 온다고 하더니 세례요한으로 왔듯이,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하셨으나 전혀 다른 사람으로 올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것도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부활하셔서 구름타고 승천하셨던 예수님, 그 예수님이 다시 하늘 구름을 타시고 영광중에 오시기 때문이다. 초림 예수와 재림 예수는 동일한 분이시다. 결코 다른 사람으로 바뀌지 않으신다. 히7: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2) 시대성(時代性)으로 읽는다. 정명석은 성경을 시대성으로 읽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시대성으로 읽는다는 것은, 성경을 읽을 때, 예수님은 정명석으로, 마리아는 정명석의 모친으로, 베들레헴은 월명동으로 자동 번역하여 읽으라는 말이다. “너희가 구원을 얻을까 하여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성경은 곧 나를 증언하느니라(요5:39)”는 말씀을 읽는다고 치자. 그 성경을 읽을 때마다 신구약 성경이 정명석을 증언하고 있다고 읽는다. ‘새벽별을 주리라’는 정명석을 재림주로 맞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흰 돌을 주고 그 위에 나의 새 이름을 쓴 것이 있나니 받는 자 외는 모르더라(계2:17)”는 계시록의 말씀도 흰 돌은 정명석, 예수님의 새 이름은 정명석, 이렇게 읽으라는 것이다. 마치 신약성도들이 구약성경 읽을 때 선지자들의 예언을 예수님으로 해석하면서 읽듯이 말이다. JMS회원들은 “받는 자 외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계2:17)”는 말씀도, 자기들만 선생님을 알아보았기에 예언이 성취되었다며 감격감사 한다. 동방의 독수리도 답을 정명석이라고 믿기 때문에 당연히 동방은 한국, 독수리는 정명석으로 읽혀진다. 정명석은 항상 자기를 예수님과 빗대서 설교하기 때문에, 정명석을 배신하는 것은 예수님을 배신하는 행위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정명석의 어떤 약점이 들어나도 정명석과 등 돌리기는 쉽지 않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오늘날 기성교회 목사들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몰라서 십자가에 못 박았듯이 오늘날도 기성교회 목사들이 “선생님”을 몰라보아 심정의 십자가를 지게 했다는 것이다. 십자가도 시대마다 다르다고 한다. 모세는 구리 뱀 십자가, 예수님은 나무 십자가, 재림주는 심정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다. 거짓말이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 밖에 없다. 모세의 구리 뱀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표한 것으로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았듯이,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요3:14-15). 모세가 만든 장대 위의 구리 뱀은 모형(模型), 예수님의 십자가는 원형(原型). 다른 말로 하면 그림자와 실체. 그리고 끝이다. 더 이상 다른 십자가는 없다. 성경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책이고, 십자가의 복음은 영원한 복음이다(벧후1:25). 재림예수는 심판 주로 영광중에 오시기 때문에 초림 때와 같이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는 일이 없다(히9:28). 교주들이 실정법을 어겨 감옥에 가게된 것은 자기 죄 값으로 간 것이다. 그러하기에 자기는 지금 ‘세상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졌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십자가는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완전한 구원이다(히10:14).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모형으로 삼는 또 다른 십자가는 없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은 시대성으로 읽으면 절대 안 된다. 예수님은 문자 그대로 베들레헴에 태어나셨고, 그 예언은 단일회적으로 성취되었다. 그것을 월명동으로 시대성으로 재해석하면 안 된다. 그리고 나귀새끼 타고 오신다(슥9:9)는 예언도 그대로 다 이뤄졌다. 베들레헴을 자기가 태어난 동네라고 읽고, 구름을 비유로 푼다면 세상 누구라도 다 재림예수라고 주장할 수 있다. 시대성을 두고 읽으라는 것은 초림주는 예수, 재림주는 정명석 자기라고 말하고 싶은 내용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시대성으로 읽어야 한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히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3) 영적으로 읽는다. - 부활문제 정명석은 예수님께서 육신이 부활한 것이 아니라 영이 부활하셨다고 가르친다. 육신이 살아나셨다면 왜 낙향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몰라봤겠는가? 육신이 살아나셨다면 왜 제자들과 함께 역사를 더 펼치시지 않고 사랑하는 제자를 떼놓고 승천하셨는가? 무덤이 비었다고 그것이 육신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히틀러 시체가 없다고 히틀러가 부활했다는 말인가? 6.25때 죽은 시체를 찾지 못했다고 해서 그 육신이 부활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영이 부활했기 때문에 잠긴 문으로도 들어오실 수 있었고, 동시에 여러 군데 나타나실 수도 있었다. 고기 잡수시던 모습도 영적 현상이다. 조상 영들도 제사상에 나타나 음식먹지 않느냐?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도 육신이 부활한 것이 아니라 영이 부활한 것이다. 육이 부활했다면 왜 예수님의 12제자의 명단에도 없고, 그 뒤에 특별히 뭘 했다는 말이 없느냐? 엘리야도 육신이 부활했다면, 변화산상에 나타난 엘리야는 무엇이냐? 기독교인들은 승천한 엘리야는 육이라고 하면서, 변화산상의 엘리야는 왜 영이라고 하느냐? 육으로 승천해서 영으로 재림했다는 말이냐? 아니다. 승천한 엘리야도 영이고 변화산상의 엘리야도 영이다. 그와 같이 예수님의 재림도 영으로 부활하셨으니 영으로 재림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육신도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영만 부활하여 구약시대는 선영계, 신약시대는 낙원, 성약시대는 천국으로 시대급의 구원대로 가는 것이다. 물이 포도주가 된 사건도 물과 같은 밋밋한 율법 말씀이 달콤한 신약말씀의 포도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날 포도주가 떨어진 그들에게 질펀하게 포도주를 마시게 한 것이 아니라, 그날 설교를 통하여 말씀의 포도주를 마시게 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나중 포도주가 더 좋았다고 말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으신 것도 실제로 걸으신 것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세상 바다를 유대교인들처럼 율법의 노(櫓)로 저어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말씀으로 걸어가니 사람들이 귀신(이단)이라고 하였다. 그 바다에서는 귀신 출현설이 있었고, 세상 바다에서는 이단출현설이 있기로 예수님을 보자마자 귀신(이단)이라고 했던 것이다. 자기에 대해서도 이 시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역시 성경의 역사를 전부 거짓말로 만드는 것으로 절대로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이다. 성경에 기록된 실제적 역사를 영적인 사건으로 치부하는 것은, 초대교회 때 예수님의 육체를 환상이라고 해석하여 이단으로 정죄된 영지주의의 가현설과 똑 같은 주장이다. 성경의 기적은 실제역사이다. 4) 축소 확대로 읽는다. 한 가지 설명하고 그와 같이 그러하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그런 교육을 천재적 교육이라고 자랑한다. 하나를 깨닫게 해주면 열 가지 백가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주 앞에 두 감람나무와 두 증인을, 하나님 앞에 모세와 엘리야라고 푼 후 어느 시대나 다 그러하다고 말한다. 모세와 여호수아,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루터와 칼빈, 남자와 여자... 축소하면 왼팔과 오른팔, 왼쪽 귀와 오른 쪽 귀, 왼 눈과 오른 눈, 정맥과 동맥, 자전과 공전, 암술과 수술... 확대하면 초림주와 재림주. 초림주는 예수 재림주는 정명석. 결국 예수님과 자기는 하나님 앞에 두 감람나무라고 한다. 자기를 재림주라고 말하기 위해서 두 감람나무와 두 증인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계11:4)는 증인되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지 어떤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해석되어 있다(계1:20). 둘은 증거의 숫자이다. 그러므로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는 주님을 증거 하는 교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두 감람나무란 이단들의 주장처럼 문선명과 정명석, 혹은 박태선과 문선명, 이만희와 홍종효... 이와 같은 어떤 특정인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더 확대하여, 가장 큰 두 감람나무는 성부 아버지와 성령 어머니라고 주장한다. 즉 그 말은 하나님도 부인이 있다는 말이다. 성경을 축소 확대하면 그와 같이 황당무계한 해석을 하게 된다. 그러하기에 성경은 더하거나 빼지도 말라고 경고하였다(계22:18-19). 하나님께 무슨 부인이 있다는 말인가? 부부신론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나 나오는 이방신론이다. 동방의 독수리 예언도 페르샤의 고레스로 성취되었다. 그것을 고무줄처럼 늘려 시대성이니 축소 확대니 하면서 한국의 정명석으로 풀면 안 된다. 이미 성취된 예언이다. 정명석처럼 성경을 읽으면 본문의 해석이 고무줄처럼 늘어났다가 줄었다가 하게 되고, 성경을 맘대로 더하고 빼서 읽게 된다. 성경은 더하거나 빼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였다(계22:18-19) 바울도 기록된 것 외에 넘어가지 말라고 교육하였다(Do not go beyond what is written.) 고전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5) 영적체험을 바탕으로 해석한다. (1) 예정론을 뗄 때 한번은 정명석이 인삼 지주목을 사기 위해 쌀 40가마 값되는 돈을 아는 사람에게 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람이 사기치고 나무를 갖다 주지 않았다. 게다가 그 사람은 정명석이 보는 앞에서 차용증서를 불태우고, 등잔대로 때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정명석은 하도 기가 막혀서 망연자실 하고 있다가, 주일날 청주서문교회에 갔는데 그날 설교제목이 예정론이더란다. 정명석은 그렇다면 내가 사기 당한 것도 하나님의 예정이란 말인가? 그러면 하나님께 따져야겠다고 생각하고 어느 농가에서 그대로 엎어져서 기도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앞에 8등신의 예쁜 아가씨가 서 있더란다. 그런데 손은 조금 덜 예쁘게 보였다고 한다. 그 때 음성이 들려서 “네가 이 아가씨와 결혼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이 여자 전부와 결혼하는 것이지, 손이 안 예쁘다고 손만 자르고 데려 가겠느냐? 눈이 예쁘다고 눈만 뽑아서 데려가겠느냐?” 하더란다. 그러면서 그 아가씨가 지구로 확대되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때는 전체 인간을 예정한 것이지, 어찌 일부만 예정 하였겠느냐?고 하시더란다. 그리고 사람의 구원도 자기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어찌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구별하여 놓았겠느냐? 라고 하시더란다. 구원도 조건대가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으심도 안 죽으실 수도 있었는데 사람들의 무지로, 그리고 세례요한의 증거부족으로 돌아가시게 되었다고 한다. 정명석은 그런 식으로 도표 하나하나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2) 타락론의 인봉을 뗄 때 정명석은 새벽에 기도 굴에서 나오면서 선악과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 맞아 이거야 하면서 주먹으로 돌을 쳐서 피까지 나왔다고 한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너 그거 아니야, 너 그거 잘못 깨달았어!”라고 하시더란다. 그래서 자기는 “아니기는 뭐가 아녜요? 선악과가 여자 성기 맞다”고 하면서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였다고 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메시야인 내가 아니라고 해도 너는 끝까지 맞다고 주장했지? 잘했다. 그와 같이 네가 이 진리 갖고 나가면 세상 사람들이 다 들고 일어나서 네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너는 메시야인 내가 아니라고 해도 맞다고 하면서 밀어붙였듯이, 너는 앞으로도 계속 하여 포기치 말고 밀고 나가라”고 하시더란다. “주님 제가 보는 것이 태양 맞지요? 그와 같이 선악과도 여자 성기 맞습니다.” 주님은 “그래 맞다. 너는 내가 아니라고 해도 맞다고 주장했듯이, 세상에 나가 이 진리를 전할 때 그 누구가 아니라고 해도 맞다고 하며 하나하나 이해시키며 가르쳐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엉터리 해석을 하여준 주님이라는 영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성경을 이렇게 엉터리로 가르쳐 준 영이 절대로 예수님일 리가 없다. (3) 한때 두때 반때 한때 두때 반때는 JMS회원들이 최고로 자랑하는 교리이다. 정명석은 다니엘서를 읽을 때마다 한때 두때 반때가 늘 궁금했었다. 1972년 남한산성 부근 어느 교회의 사찰집사를 하고 있을 때, 눈이 허벅지까지 온 새벽이었다. 정명석은 눈을 쓸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머리가 총명해지며, 미국 돈을 한국 돈으로 환산하듯이, 한때 두때 반때는 환산해야 하느니라. 그러면서 한 때는 1년, 두 때는 2년, 반 때는 6개월로 풀어야 한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한때 두 때 반 때는 날짜로 고치면 1260일이다. 1일을 1년으로 환산하면, 1260일은 1260년이 된다. 그리고 성경의 미운 물건은 오마르 사원이고 그것은 688년에 세워졌다. 미운 물건을 세울 때 688년부터 1260년을 더하면 1948년이 나온다. 1948년은 육적 이스라엘의 육적해방, 그 다음 688년에 1290년을 더하면 1978년, 19789년은 영적 이스라엘인 기독교의 영적 해방, 자기가 1978년부터 말씀 전하여 기독교를 신약 주관권에서 해방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1978년 6월 이전에 서울에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6월부터 사명을 펼치기 시작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정명석은 1948년이 맞았음으로 1978년도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688년에 1335년을 더하니 2023년이 나온다. 그때가 정명석의 사명이 끝나는 해라는 것이다. 그러나 1일을 1년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1일은 1일이다. 예수님께서 3일 만에 부활하신다고 하시고 그대로 3일 만에 부활하셨다. 노아 홍수 심판 때 40일 동안 비가 온다고 하셨는데, 문자 그대로 40일 동안 비가 왔다. 1일 예언이 1년으로 풀린 적이 없다. 그리고 미운 물건은 오마르 사원이 아니다. 마24: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병행구절을 보자. 눅21:20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예수님께서 다니엘서의 멸망의 가증한 것을 (로마) 군대라고 해석하여 주셨다. 그러므로 정명석의 미운 물건에 대한 해석은 틀렸다. 그리고 오마르 사원이 688년에 세워진 것도 아니다. 브리테니커 사전에 의하면 685년부터 691년도 까지다. 시작년도 틀리고 준공년도 틀렸다. 더구나 한때 두때 반때는 정명석이 태어나기도 전에 발간된 한에녹의 ‘영원한 복음’에 나온 도표와 똑같다. 표절을 한 것이다. 정명석은 1978년부터 21년 전반기를 뛰면 1999년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같은 일이 자기에게 벌어질 것이라고 했다. 검찰에 고소되고 방송에 나고 제자들은 다 도망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1999년 1월에 실제로 방송에 나오고 검찰에 고소되고, 제자들은 많이 흩어졌다. 정명석의 예언이 맞은 것이다. 그러나 메시야 선포를 여의도 광장에서 멋들어지게 하려고 했는데 방송을 통해서 원치 않는 방향대로 되었다고 했다. 정명석은 자기 사건을 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우측 강도요, 자기를 조롱하고 비아양 거리는 사람을 좌측 강도와 같다고 하였다. 자기는 죄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도둑같이 심판해 버리셨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는 한일 월드컵의 해인 2002년 모든 법적 문제가 끝나고 부활하여 후반기 21년을 뛴다고 하였다. 그러나 끝내 법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그는 홍콩에서 중국으로 밀항한 후 숨어 지내다가 급기야 체포되어 10년형을 받고 수감 중이다. 지금은 부활이 2002년이 아니라 2012년이라고 역사론을 수정한 상태이다. 예수님은 천지가 없어져도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그러나 정명석은 법적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고, 2002년 부활한다는 예언도 맞지 않았다.
    • 기고/강연
    • 강연/특강
    2016-05-27
  • 종말을 기다리는 하나님의교회
    (이 글은 5월 25일(수) 거제교회에서 개최된 제1회 부산이단대책세미나 강의안 전문입니다.) 종말을 기다리는 하나님의교회 ▲ 탁지일 교수(현. 부산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과 교수) 1. 성령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은 한국사람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하나님의교회)는 한국인 남녀를 각각 “성령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으로 신격화한다. 설립자인 안상홍(安商洪)을 “재림 예수” “재림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으로, 그리고 1985년 안상홍 사후 후계자로 등장한 장길자(張吉子)를 “어머니 하나님” “새 예루살렘 하늘 어머니” “성령의 신부” “어린양의 아내”로 믿고 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찬송을 “안상홍님 지으신 모든 세계”로 바꿔 부르고, “안상홍 하나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고 포교하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안상홍님”에게 기도하고 “아버지 안상홍님 이름”으로 기도를 마무리 한다. 어린이들에게는 “십자가를 세우지 마세요. 일요일도 거짓말예요. 우리는 이 세상 교회 없는 어머니도 있죠. 우리의 구원자 안상홍님도 계신답니다. 안상홍님 믿어야 하늘나라에 가죠”라는 노래를 가르친다. 안상홍과 장길자 두 사람이 하나님으로 등장한 이유에 대해, 하나님의교회는 창세기 1장 26절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에 나오는 “우리”라는 복수형 단어를 성경적 근거로 들고 있다. 즉 여기서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히브리어 “엘로힘”은 복수 명사이며, 또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으니, 따라서 하나님은 복수인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엘로힘(אֱלֹהִים)”은, “엘로아”(אֱל֫וֹהַּ)의 복수(gods)로서가 아니라, 전능하신 한분 하나님(the supreme God)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이다. 하나님의교회는, 부정확한 성경원어 해석을 근거로, 한국인 남녀를 하나님으로 신격화하고 합리화하는데 이르게 된 것이다. 주목할 점은, 표면적으로는 안상홍과 장길자에 대한 신격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교회 실세는 김주철(金湊哲) 총회장이다. 하나님의교회 정관 제28조에 따르면, “총회장은 성령 안상홍 하나님께서 세우신 김주철님이시며, 영구직이다.”라고 명시하고, 총회장의 직무에 대해, “모든 회의의 의장이고, 진리를 전수하여 반포하는 책임자이며, 자산에 대한 최고 책임자로 총회 재정을 감독하고, 정관 및 규정의 최종 해석권자이며, 권징의 최고결정권자이고, 총회 운영부서 및 지역 교회를 통괄하는 책임자”라고 정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안상홍과 장길자는 겉으로만 신격화된 인물들일뿐, 막강한 절대 권력을 가진 김주철 총회장이 바로 하나님의교회 실세라고 할 수 있다. 2. 반복되는 시한부 종말 주장 하나님의교회 설립자 안상홍의 교리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곳은, 장길자와 김주철의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www.watv.org)가 아니라, 안상홍의 아들이 이끌고 있는 새언약 유월절 하나님의교회(www.ncpcog.co.kr)이다. 새언약 유월절 하나님의교회는,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가 안상홍의 교리를 계속 변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새언약 유월절 하나님의교회는 공식홈페이지에서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와의 차이점에 대해 언급하면서, “근본뿌리와 진리가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세계선교복음협회(증인회)는 1985년도 이후에 안상홍님의 가르침에도 없고 성경에 모든 선지자들이 증거하신 적도 없는 어머니하나님을 세우고 또한 시대별 구원자와 새이름이라는 교리의 바탕으로 예수님의 이름이 아닌 안상홍님의 함자로 기도를 올리고.... 현재는 살아생전 안상홍님의 책자와 육성말씀의 가르침보다는 그 곳에서 만든 교리를 바탕으로 책자를 만들어 어머니하나님을 증거하는데 큰 힘을 쏟고 있습니다.”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한다. 새언약 유월절 하나님의교회는 자신들이 안상홍의 가르침을 그대로 준수하고 있는 정통 후계자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홈페이지에는 안상홍의 모든 저서, 친필로 기록된 설교문과 교회연혁, 육성설교, 유품, 사진 등을 전자책 및 그림파일 형태로 게시하고 있어, 가장 정확한 안상홍의 원래 교리 연구를 가능하게 해준다. 이들 자료들에 따르면, 하나님의교회 교리는 시한부 종말론에 기초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교회는 “1988년은 세상종말”이라고 주장하는 전단지를 배포했다. 또한 안상홍은 그의 저서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에서, 1988년뿐만 아니라 2012년도 종말의 때라고 주장했다. 안상홍은 이 책에서 “서기 1844년에서 168년을 합하면 서기 2012년이 마지막 끝 날이 되겠습니다.”라고 주장했는데, 1844년은 하나님의교회가 뿌리를 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안식교)가 주장했던 종말의 연도이고, 168년은 모세가 성막을 세우는데 걸린 168일을 의미하며, 그리고 1844에 168을 더하면 2012년이 종말의 해라는 주장인 것이다. 하지만 1988년과 2012년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하나님의교회는 시한부 종말론 주장을 줄곧 부인해왔지만, 최근 수원지방법원의 판결문에 따르면, “안상홍 사망 이후 1988년 종말이 온다는 취지의 전도서를 만든 바 있고, 1999년에는 신도들에게 Y2K나 1999년 지구멸망예언에 관한 설문조사를 벌였으며, 하나님의교회 내에서 2012년 지구의 종말이 올 것이라는 주장 또한 제기되었던 점”을 이유로 들어 하나님의교회 시한부 종말론이 허위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한편, 어머니 하나님의 존재와 관련하여, 안상홍은 교회 내에서 여성을 신격화하거나, 지도력을 갖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983년 측근 엄모 여전도사로 인한 분란에 대해, “예루살렘을 한 여자로 해석하다는 것은 정신환자 아니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설교를 통해 경고하고, 신부는 한 여성이 아니라, 144,000 성도들이라고 단언했다. 1985년 안상홍 사후, 서울과 부산 세력으로 교회가 분열되는 과정에서 김주철 총회장이 직접 작성한 글에 따르면, “장길자 전도사 본인 자신도 우상화 하는 것을 원치 않고 우리도 우상화 할 수 없다.... 144,000 성도들이 신부이다.”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약속은 결코 지켜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는, 설립자 안상홍의 교리 중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만을 취사선택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키워 나아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이, 필자가 방문했던 양산 통도사 인근 공원묘지에 있는 안상홍의 무덤은, 하나님의교회가 주장하는 내용과는 격이 맞지 않는 규모로, 벌초조차 되지 않고 방치된 모습이었다. 3. 종말은 실패해도 교세는 오히려 성장 하나님의교회 시한부 종말 주장에는 종말이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교회 시한부 종말 주장은 계속 실패했지만, 교세는 오히려 지속적으로 성장해왔다. 신격화된 안상홍이 사망하고 시한부 종말 주장이 실패하면, 신도들이 하나님의교회를 떠날 것이라고 우리는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이는 국내외 이단들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상식의 눈’이 아니라, ‘신도들의 눈’을 통해서 바라볼 때 이해할 수 있다. 즉 신격화된 교주의 죽음을 받아드리고, 시한부 종말 주장의 실패를 받아드리는 순간, 신도 자신은 정체성의 심각한 혼란을 겪게 된다. 게다가 그 단체에 몸담고 헌신했던 지난날들을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은 이 혼란을 더욱 가중시킨다. 이러한 현실은 교주의 죽음과 시한부 종말 주장의 실패를 받아드리는 것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순간이다. 그 이유는, 자신의 선택을 반대했던 가족들과 주변 지인들에게 받을 비난과 동정이 두렵기 때문이다. 결국 신도들은 스스로를 위해 교주의 죽음을 미화하거나 업그레이드된 신격화 과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또한 새로운 교리 변개를 통해, 새롭게 설정된 또 다른 종말의 때를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변개된 교리를 근거로 배수진을 치고 재무장한 신도들은, 외부적으로는 공격적인 포교활동을 통해 새로운 신도들을 영입하고, 내부적으로는 2세대 자녀들을 교육하면서 교세의 확장을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 하나님의교회는 자신들의 신도수가 수백만에 이른다고 주장하지만, 대략 20~30만 정도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단연 국내 최대 이단조직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들의 주력 연령층이 30~40대라는 사실이다. 특히 해외에도 다수의 외국인 신도들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해외선교사들 및 현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교회는 이미 복음전도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 하나님의교회 해외교회 설립현황을 분석하면, 세계 곳곳에 수많은 모임처들이 세워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지구 반대편 페루에도, 힌두교의 나라 인도에도 수십 개의 하나님의교회가 짧은 시간 내에 세워져 운영 중이다. 현지 선교사들에 따르면, 하나님의교회가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건물을 세우고, 신도들을 미혹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하나님의교회 피해자들이 반대운동(www.examiningthewmscog.com, encountering-ahnsahnghong.blogspot.kr)을 펼치고 있다. 하나님의교회에 대한 국제적 차원의 공동대책 마련이 시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하나님의교회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에 따르면, 하나님의교회 재산이 3~4조에 이른다고 한다. 통일교처럼 사업을 하지 않는 하나님의교회가 어떻게 이런 거대한 자산을 가지게 되었는지 자못 궁금하다. 하지만 종말의 때로 주장했던 2012년에 하나님의교회가 했던 일을 보면, 그 궁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된다. 종말의 때라고 주자했던 2012년 한 해 동안, 하나님의교회는 국내 29곳에 대형 교회를 건축하거나 매입했다. 과연 종말의 순간에 대규모 부동산을 매입하는 비합리적인 행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종말의 때를 대비한 방공호 용도로 매입했을까? 과연 하나님의교회 지도자들은 정말 2012년을 종말의 때로 믿었을까? 분명한 점은, 하나님의교회 시한부 종말론이 실패와 재설정을 거듭하는 동안, 하나님의교회 교세는 성장하고 재산을 지속적으로 증식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4. 오른손이 하는 일은 반드시 왼손이 알게 하는 홍보전략 하나님의교회의 홍보 방식이 특이하다. 한편으로는 가가호호 방문과 거리포교 등의 직접적인 포교전략을 구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적 성격을 감춘 채 지역사회 봉사활동을 통해 긍정적인 노출을 시도하는 양면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장길자가 대표로 있는 국제위러브유운동본부(www.weloveu.or.kr)와 새생명복지회(www.newlifewf.org) 가 그 전위조직들이다. 성경은 “너희는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마태 6:3)라고 가르치며,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봉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하나님의교회의 경우는 정반대이다. 오히려 오른손이 하는 일은 ‘반드시’ 왼손이 알게 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하나님의교회 홍보 패턴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지역사회 봉사활동을 한 후, 그 내용을 상대적으로 통제가 용이한 지역 언론을 통해 기사화 한다. 둘째, 해당 기사를 가지고 지역 공공기관을 찾아가 상장 수여를 요청한다. 주민선거로 구성되는 지방자치단체들이 이를 거절할 명분을 갖기 어렵다는 것을 하나님의교회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수상 내용을 보도자료로 배포하여 다시 기사화하거나, 자신들의 인터넷 홈페이지나 신도들의 블로그에 올려 선전한다. 넷째, 이를 밖으로는 포교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안으로는 반대하는 신도들의 가족들을 안심시키고 설득하는데 사용한다. 이 과정을 국내외에서 반복하며, 주변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신흥종교단체의 사회적 노출 정도와 효과는 그 성패에 깊이 영향을 미친다. 통일교를 비롯한 1세대 이단들이 네거티브홍보(negative promotion)를 통해 자신들의 이름을 사회에 알렸다면, 최근 신세대 이단들은 포지티브홍보(positive promotion)를 통해 자신들의 존재감을 사회에 각인시킨다. 즉 자신들이 사회적 역기능을 수행하는 위험한 사이비종교가 아니라, 친사회적인 평범한 종교단체인 것을 알리는 전략이다. 물론 이들의 최종 목적은 명백히 반기독교적이다. 즉 안상홍과 장길자를 하나님으로 세상에 알리며, 하나님의교회가 기독교의 대안세력으로 사회에 자리 잡기 위함인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교회 홍보전략은 일면 성공적으로 보인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러한 성공이 기독교를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시선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만약 사회봉사에 열심인 하나님의교회 신도와 비윤리적인 범죄를 저지른 기독교인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면, 과연 비기독교인들은 누구를 선택할까? 기독교가 아무리 이단을 교리적으로 정죄한다고 하더라고, 요즘 분위기를 볼 때 한국사회는 사회적 순기능을 하는 이단을 더 선호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나님의교회는 사회적 비판에 직면하고 있는 기독교를 비판하며, 자신들을 타락한 기독교의 대안세력으로 세상에 내세우는 전략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개혁은 이단대처에 필수적이다. 개혁된 교회만이 날로 업그레이드되는 이단들의 도전에 응전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교회의 이단대처 현장에, 사리사욕과 정적제거의 목적을 가지고 이단문제를 악용하는 교회정치세력들이 들어와서는 안 된다. 기득권을 위해 이합집산 하는 이들 정치세력들이 바로, 이단활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거나, 이단대처를 위한 연합활동을 방해하는 반교회적 세력들이기 때문이다. 한편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의 비판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릴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비판은,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우리 민족을 위해 헌신한 기독교를 향한 엄격하고 높은 사회적 기대치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산업화와 민주화의 불확실한 세상에서 민족을 위해 신실한 삶을 살았던 한국교회의 모습을 기억하는 한국사회는, 근래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에 대해 날카롭고 냉정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단과 주변 사회로부터 주어지는 영적 신호를 읽을 줄 아는 교회만이, 스스로를 개혁할 수 있는 동력을 가질 수 있다. 5. 복면이단 하나님의교회 대처 가이드라인 시한부 종말 주장으로 사회와 가정에 혼란을 야기하는 하나님의교회는 사회봉사단체라는 복면을 쓰고 활발하게 친사회적 활동을 벌이고 있다. 또한 이들의 포교전략은 조직적이고 집요하다. 청소년들과 청년대학생들은 물론이고 어린 자녀들의 교육을 책임지는 젊은 가정주부들에게 집중적으로 다가서고 있다. 거리에서 하나님의교회 포교자들에게 미혹된 청소년들이 하나님의교회로 자의반 타의반 이끌려 들어가 교리교육과 침례까지 받는 피해사례들이 발생하는가 하면, 집요한 가가호호 방문포교를 통해 미혹된 주부들로 인해 가정불화가 발생하기도 한다. 사회봉사라는 복면을 쓰고 정체를 감춘 채, 친근하게 접근하는 하나님의교회에 대한 예방과 대처 없이 한국교회의 복음전도와 이단대처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하나님의교회에 대처하기 위한 합법적 가이드라인 마련이 필요하다. 첫째, 접근을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의교회 포교자들은 길거리 혹은 집을 방문해 집요한 포교를 진행한다. 거절에 익숙하지 않은 청소년들을 길에서 미혹해, 교리교육을 시킨 후 침례를 주기도 하고, 집을 방문해 교리교육을 시키고 집안 화장실에서 샤워기로 침례를 준 사례도 있다. 성경은, 이단에 속한 사람은 한두 번 훈계하고 멀리하고(딛 3:10),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요이 1:10) 권면한다. 하나님의교회 포교자들의 접근을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 특히 중고등학생들에게 집요하게 접근하는 하나님의교회 포교자들을 만나게 되면, 주변 사람들이나 공권력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요청하도록 자녀들에게 경계예방 교육을 해야 한다. 둘째, 교회 밖 봉사활동에 신중해야 한다. 다양하게 진행되는 하나님의교회 봉사활동에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 자녀들이 사회봉사학점 이수를 위해 봉사활동을 해야 될 경우, 혹시라도 하나님의교회에서 주관하는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아닌지 확인해봐야 한다. (물론 다른 이단들도 최근 사회봉사활동에 집중하고 있어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무엇보다도 각 지역 자원봉사단체에도 하나님의교회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고 있기 때문에, 봉사활동을 주관하는 단체에 대해 미리 확인한 후 사회봉사활동에 참여해야 한다. 셋째, 가면을 벗겨야 한다. 대통령표창 등을 수상했다고 선전하는 하나님의교회 정체를 주변 이웃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즉 하나님의교회는 한국인 남자와 여자를 하나님으로 신격화하는 단체이며, 반복적으로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해 왔고, 이로 인해 재산 갈취와 가출과 이혼을 조장한다는 사실이 재판을 통해 받아드려졌다는 점을 널리 알려야 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교회를 경계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새로워져야 한다. 하나님의교회의 도전에 효과적으로 응전하기 위해서, 한국교회가 다시 사회봉사의 아이콘으로 거듭나야 한다. 정결한 그리스도의 신부로 살아가는 교회만이, 시한부 종말의 위기를 조장하며 ‘참된 하나님의 교회’를 오염시키는 ‘이단 하나님의교회’에 당당하게 대처할 수 있다. (「목회와 신학」(2016년 2월호) [부록] 이단 동향 분석 및 향후 전망 이단은 동시대 교회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자신을 타락한 교회의 대안으로 내세운다. 그렇기에 이단현상에 대한 세밀한 연구는, 교회의 시대적 사명을 재확인하고, 잃어버린 정체성을 회복하고 재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최근 이단사이비단체들의 활동을 분석하고, 향후 전망과 대처 방안을 제시해 보았다. 1. 사리사욕(私利私慾) 단 한 차례도 시한부종말론이 성공한 적이 없다. 성서는, 종말의 날과 때는 아무도 모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분명히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하나님의교회)의 멈추지 않는 시한부종말론과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성전(신천지)의 144,000명 육체영생 교리를 내세운 조건부종말론에 수많은 사람들이 미혹되어, 소중한 가족과 꿈을 포기하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은, 2012년 종말을 주장하던 하나님의교회가, 2012년 한 해 동안만 전국 29개 지역의 땅을 사고, 건물을 마련하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했다는 점이다. 종말의 순간에 부동산을 매입하는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현재도 앞으로도 이들의 시한부 종말 주장은 계속될 전망이다. 또한 신도수가 144,000명에 이르면 육체영생하고 왕과 같은 제사장이 된다던 신천지는, 144,000명이 거의 찼다는 2015년에 부동산 매입과 건축에 혈안이 되었다. 144,000명이 넘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세상의 땅과 건물에 집착하는 신천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결국 시한부종말론과 144,000 교리를 내세운 조건부종말론은 거짓 명분일 뿐, 재산증식을 위한 사리사욕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거짓이 밝혀지기 전에 돈을 벌어야 한다는 계산, 돈이 있어야 신도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계산, 신도들이 통제되어야 교주의 신상에 문제가 생겨도 조직이 건재할 수 있다는 계산, 종말론적 이단들의 이런 얄팍한 계산에서 산출된 사리사욕(私利私慾)이 두드러진 2015년이었다. 2. 세대교체(世代交替) 주요 이단들의 세대교체가 진행 중이다. 성공적인 세대교체를 이룬 이단은 하나님의교회가 거의 유일하다. 소위 “아버지 하나님” 안상홍씨에서 “어머니 하나님” 장길자씨로의 세대교체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종교사회학적으로는 신흥종교로의 정착이 이루어졌다고 평가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교회에 대한 한국교회의 적극적인 대처가 시급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과 신천지 등, 대다수 이단들의 세대교체는 현재 진행 중이다. 참가정을 표방하는 통일교의 세대교체는 부모자식 그리고 자식들 간의 진흙탕 싸움으로 진행되고 있다. 자식이 어머니를 “사탄의 핏줄”이라고 부르고, 자식들도 서로를 격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참가정도, 참부모도, 참자녀도 없는, 명분 없는 재산과 권력 다툼의 모습만 노출되고 있다. 신천지는 지난 해 설립자 이만희씨의 후계자로 김남희씨를 지명했다. 그들의 주장대로 이씨가 영생불사한다면, 후계자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 결국 이만희씨의 사후를 대비하는 수순을 밟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상한 교리와 명분으로 포장되더라도, 이단들의 세대교체는, 첫째, 교주의 사후를 대비한 보험 차원의 사전 포석이며, 둘째, 교주 사후에 일어날 수 있는 신도들의 혼란과 이탈을 막기 위한 사전 통제장치의 마련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단들의 세대교체 성공이 어려운 만큼, 조직 분열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다. 예를 들면, 통일교 문선명씨의 부인 한학자씨, 그리고 아들들인 문현진, 문국진, 문형진의 권력투쟁이 진행 중이며, 신천지 내부에서도 영향력 있는 지파장들이 분리 독립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 주목할 점은, 최근 주요 이단 세대교체(世代交替)의 혼란기가 한국교회 이단대처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3. 여성시대(女性時代) 이단들의 여성시대가 열렸다. 주요 이단들의 후계자들이 대부분 여성들이다. 통일교의 한학자씨, 기독교복음선교회(JMS)의 정조은씨, 하나님의교회의 장길자씨, 신천지의 김남희씨, 중국이단인 전능하신하나님교회(동방번개)의 양상빈씨 등의 여성들은 6천년 만에 태어난 재림주 독생녀, 어머니 하나님, 이긴자의 영적 배필, 혹은 재림 그리스도 등으로 신격화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가부장적인 한국사회에서, 그것도 가장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영역에서 여성지도력이 급부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여성대통령의 등장과 함께, 사회 핵심 지도력으로 여성들이 부상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관계가 있다. 이단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생존전략상 시대 트렌드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 남성을 후계자로 정할 경우, 현 지도자를 배신할 우려도 있고, 후계자를 꿈꾸는 여러 남성 2인자들 사이의 분란과 조직 분열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 김백문, 문선명, 박태선으로부터 시작된, 한국이단교리의 성(sexuality)적 특징과도 관련되어 있다. 한국이단들은 교리적으로 음양의 결합을 온전함의 상징으로 보는 경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이들 여성 후계자들의 배후에는 일반적으로 전권을 가진 실세 남성(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여성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뒤에서는 남성 중심의 조직이 가동된다. 통일교 한학자씨의 측근들, 하나님의교회 총회장 김주철씨 등을 비롯해, 카리스마적인 남성 창교자의 뒤를 잇는 여성 후계자 뒤에는, 남성 중심의 조직이 도사리고 있다. 이단 후계자들의 여성시대(女性時代)가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단 조직 내 남성중심의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성격은 지속될 전망이다. 4. 사회봉사(社會奉仕) 사회봉사가 이단들의 특징이 되었다. 최근 성장하는 이단들은 앞 다투어 사회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하나님의교회는 대통령상 수상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신천지는 낙후지역 벽화그리기와 이주민지원 등의 봉사활동에 힘을 쓰고 있다. 다른 이단들도 국내외 봉사활동을 전면에 내걸고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성격변화는, 현재 한국교회의 모습과 무관하지 않다. ‘사회봉사에 헌신적인 이단’과 ‘개교회주의에 집착하는 교회’가 있다면, 비개신교인들은 누구를 더 선호할까? 사회적 순기능을 하며 ‘표창장을 받는 이단’과 사회적 역기능을 노출하며 ‘비판의 대상으로 떠오른 교회’ 중에서, 한국사회는 누구를 더 선호할까? 사회의 동의와 공감을 결여한 이단규정은 마녀사냥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이단이 문제가 아니라, 이단을 규정하는 주체가 문제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을 수 있다. 우리는 고심하며 이단과 정통을 분별하는데, 한국사회는 이러한 이단논쟁을 교회의 밥그릇 싸움 정도로 보고 외면할 수 있다. 최근 성장하는 이단들은, 소수의 기독교인들에게 교리적인 인정을 받는 것보다, 다수의 비기독교인들에게 사회적인 공신력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한편으로는 사회봉사(社會奉仕) 활동에 헌신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악을 저지르는데 망설임 없는 이들 이단들에 교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건강한 교회만이, 이단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한국교회가 건강성과 사회의 신뢰를 다시 회복하지 못한다면, 이단 대처를 위한 영적 힘을 갖기 어렵다. 앞으로도 이단대처를 위한, 한국교회의 체질개선 지속되어야 한다. 5. 해외진출(海外進出) 한국이단들이 한류바람을 타고, 성공적으로 세계화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교파 간, 교회 간 경쟁을 통한 비효율적인 선교를 진행하는 동안, 이단들은 조직력과 경제력을 앞세워, 선교 오지를 효과적으로 파고들고 있다. 이단 대처가 결여된 선교는, 밑 빠진 독에 물붓기가 되었다. 신천지처럼, 해외 교민사회에 침투하는 이단들도 있고, 하나님의교회와 기쁜소식선교회 국제청소년연합(IYF)처럼 현지인들을 주로 미혹하는 이단들이 있다. 신천지는 해외에 있는 친인척과 지인들에 관한 정보를 신도들로부터 수집하여, 그들만의 모략포교, 즉 거짓말 포교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교회는 국내에 방문한 외국인들에 대한 자원봉사활동을 매개로 관계를 형성한 후, 현지 침투를 시도하고 있다. 최근 해외에 설립되는 하나님의교회 숫자가 급증하고 있다. 선교사들로부터 이단들의 정체와 대처방안에 대한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이제는 국내차원의 이단대처를 넘어, 해외진출(海外進出)을 시도하는 한국이단들을 예방하고 대처할 글로벌이단대처네트워크의 구축이 필요하다. 이 네트워크는 교파주의의 틀 속에 갇혀있는 국내보다는, 현지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초교파 조직으로 구성될 때 효과적일 수 있다. 한국선교사들이 현지에서 사용할 수 있는 공신력 있는 영문 자료들의 제작 및 배포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6. 허망지설(虛妄之說) ‘거짓되고 망령된 말’로 미혹하는 신천지가, 동료 이단들의 추종을 불허하며 활동하고 있다. “모략”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 된, 반사회적이고 비성경적인 신천지의 거짓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며, 가정과 교회 안에 불신을 초래하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신천지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신천지로 인한 분열과 불신이 두려운 것이다. 초대교회부터, 이단은 거짓말을 앞세워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분열시켜왔다. 거짓 형제들이 우리 안에 가만히 들어와, 예수 안에서 자유 한 우리들을 그들의 종으로 삼으려고 미혹을 멈추지 않았다(갈 2:4). 144,000을 명분으로, 부모자식 간에, 부부 간에, 형제자매 간에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인 거짓말이 난무하도록 신천지가 만들었다. 거짓말이 합리화된 기독교 종파는 없다. 기독교는 어떤 시대와 상황을 만나도,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님만을 그리스도로 고백해왔다. 설령 이 믿음으로 인해 박해와 순교를 당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신앙을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선포해 왔다. 결코 나의 믿음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인하거나, 숨기지 않았다. 기독교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것이 기독교이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인 것이다. 허망지설(虛妄之說)의 신천지가 결코 기독교공동체에 속할 수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7. 지피지기(知彼知己) 효과적인 이단대처에 있어서, 신속하고 공신력 있는 정보의 제공이 가장 중요하다. 부정확한 정보의 제공은 ‘흑색선전’과 다르지 않으며, 부정확한 정보의 활용은 ‘마녀사냥’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사회와 교회가 공감할 수 있는,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이단정보의 수집과 제공이 필요하다. 이단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이단의 정체를 간파하게 해주는 동시에, 이단의 활동을 통재할 수 있는 합법적인 여건을 조성해 준다. 이러한 정보는 이단들마저도 공감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 부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이단을 비판할 경우, 오히려 이단들에게 반박할 수 있는 명분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지피지기(知彼知己)하면 어떤 이단들이든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공신력 있는 정보를 통해 이단의 정체를 파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단 현상을 통해 교회의 모습을 돌아보며, 이단의 영향력이 기성교회와 교인들에게 폭넓게 자리 잡는 이유를 고민해야 한다. 이단대처와 교회개혁은 동전의 양면이다. 건강한 교회가 이단 바이러스를 잡는 항생제 역할을 한다. 8. 필승불패(必勝不敗) 교회는 반드시 이긴다! 이단은 예외 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지만, 참된 교회는 단 한 차례도 패배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기독교역사는 증언한다.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사회적 순기능을 감당해왔던 기독교에 대한, 한국사회의 높은 기대치가 날카로운 비판으로 표출되는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다. 교회가 이러한 뼈아픈 시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교회는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단이 문제라면, 교회가 답이다! 공권력과 언론은, 사건 발생 이후에야 개입하여 문제해결과 공론화를 위해 애쓴다. 오직 교회만이 이단의 본질을 간파하고, 사건을 예방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영적 건강성을 회복하고, 사회적 순기능의 전통을 잇는 교회가 이단을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이단의 발흥은 주님 다시 오실 때, 세상 마지막 때의 표징이다. 이단은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미혹하며 어지럽힌다. 하지만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가 쟁취하실 최후의 승리에 대한 필승불패(必勝不敗)의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목회와 신학」(2015년 12월호)
    • 기고/강연
    • 강연/특강
    2016-05-27
  • [기고]최근 사이비 종교집단 ‘신천지’, 왜 이러나?
    ▲한때 신천지 교육장을 지내다 2006년 말 신천지를 탈퇴하고 현재 한국기독교이단상담소협회 구리상담소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현욱 소장 약 한 달 전쯤부터 거리 곳곳에서 ‘한기총 해체와 CBS 폐쇄’를 외치며 서명운동을 벌여오던 사이비 종교집단 신천지가 지난 주 금요일에는 기독교연합회관과 목동 본사를 비롯해 전국 13개 CBS 지역본부 앞에서 수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집회와 시위를 가졌다. 근래 보기 드문 전국 동시 대규모 군중집회였던 터라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많은 국민들이 놀라워했다. 그렇다면 신천지 집단은 왜 이런 무리수를 두는 것일까? 이에 대한 원인을 몇 가지 측면에서 분석해보고, 나아가 한국교회의 대응과 대처 방안에 대해 제언하고자 한다. Ⅰ. 신천지 집단이 CBS를 표적으로 삼아 집중 공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동안 CBS가 ‘신천지 OUT!’을 선언한 후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신천지와 이만희 교주의 치부를 드러냄으로 그 여파가 신천지 내부로는 신도들의 갈등과 동요로 나타나고 있고, 외부로는 포교활동과 이미지 개선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에서다. 이러한 신천지의 반응은 오히려 CBS의 ‘신천지 OUT!’ 활동이 신천지에 미친 타격과 충격의 정도를 반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CBS의 신천지 관련 보도 내용 가운데서도 이만희 교주와 교주 사후 후계자를 꿈꾸는 내연녀 김남희와의 동거 사실 폭로와 김남희의 권력 승계관련 보도와 신천지의 폐해를 전 국민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던 다큐 ‘신천지에 빠진 사람들’은 수만 명의 신천지 신도들을 CBS 앞으로 모으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천지로서는 더 이상 CBS의 ‘신천지 OUT!’ 활동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CBS를 압박해서 앞으로 신천지 관련 보도 시 부담을 주고자하는 측면이 있고, 나아가서는 다른 언론 매체들에게도 신천지를 함부로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말라고 이번 대규모 집회와 시위를 통해서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Ⅱ. 신천지 집단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를 공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신천지 이만희 교주 눈의 가시 같은 CBS가 신천지의 공격 대상이 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한기총을 공격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의아해하며 묻는 이들이 많다. 이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만희 교주가 한기총이라는 단체의 성격을 모르고 있다는데 기인한다. 한마디로 무식이 원인이다. 일인독재 절대 권력의 신천지 집단은 총회가 있어 총회장이라는 교주가 대표성을 갖듯이 한기총이 정통교회 모두를 아우르는 한 교단같이, 한기총 대표를 신천지 총회장 격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의 주장에서 ‘신천지 교리와 한기총 교리 비교’, ‘신천지 총회장과 한기총 대표간의 공개 토론 요구’ 등의 표현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 한국교계에서 한기총의 이미지가 많이 훼손되었다는 판단 하에 한기총을 공격함으로 한기총에 대해 실망하고 비판적인 기독교인들의 동의와 관심을 이끌어내려는 포교 차원의 전략적인 측면이 있다. 셋째, 신천지 집단에 가장 위협이 되고 있는 안산상담소, 구리상담소 등 ‘한국기독교이단상담소협회’ 소속 상담소들을 한기총 소속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신천지 집단에 속아서 미혹된 신도들을 상담과 교육을 통해 해마다 수백 명씩 회심시키고 있는 상담소에 대해 강제개종 운운하며 온갖 거짓말로 비판하면서 그 화살을 상담소와 무관한 한기총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Ⅲ. 최근 신천지 집단의 전국적인 서명 운동과 대규모 집회의 원인과 배경은 무엇인가? 첫째, 신천지 집단의 체제 결속과 내부 문제 봉합을 위한 자구책의 일환이다. 신천지대책전국연합과 CBS, 현대종교 등을 통해 신천지 내부 비리 그 중에서도 교주와 내연녀(마니와 나미의 만남)와의 관계가 폭로되면서 신천지 내부에 적지 않은 파장과 함께 탈퇴자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마치 불안한 체제 안정과 내부 단속을 위해 전쟁 분위기를 조장하고 밖으로 미사일을 쏘아대는 북한 정권을 떠올리게 한다. 이 외에도 곧, 곧, 올 해, 올 해, 이제 5분 전, 5분 전이라는 이만희 교주의 말만 굳게 믿고 144,000명을 채우는데 혈안이 되었던 신도들이 144,000명이 다 차고 넘치는데도 별다른 기미가 보이지 않자 오래된 신도들 사이에서 실망감과 함께 맹신에 균열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자 한눈 팔 겨를이 없도록 신도들을 노상 홍보와 포교의 장으로 내 몰고 있으며, 분위기에 취약한 청년들이 주로 동원된 이번 대규모 군중집회도 집단 최면을 통해 신도들을 통제하려는 저의가 엿보인다. 둘째, 신천지 집단의 교세와 위세를 드러내 보이고 싶은 이만희 교주의 성격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현재의 신천지 교세는 이만희 교주조차 상상도 못했던 만큼 커진 것이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이비 교주들이 그러하듯 이만희 교주 또한 자기도취에 빠져있고 허세 부리기를 좋아하며 자랑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이 때문에 사이비 교주들이 대부분 마스게임, 포퍼먼스, 카드섹션 등을 포함한 대규모의 군중집회, 체육대회를 통해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려는 성향이 있는데 이만희 교주도 예외가 아니다. Ⅳ. 이러한 신천지 집단에 맞서 한국교회의 대응과 대처 방안은 무엇인가? 첫째, 범 교단, 초교파적 정통교회의 연합과 연대를 통한 공동 대처가 절실하다. 신천지 집단이 아무리 조직적으로 공세를 편다 해도 여러모로 우리 정통교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럼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피해가 수그러들지 않는 이유는 지나친 개교회주의와 극단적 이기주의에 기인한다. 더 이상 각개전투로는 안 된다. 지금이라도 교단과 교파를 초월한 신천지대책기구를 발족하여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대응전략이 마련되어야 한다. 최근 신천지의 파상적인 공세가 오히려 정통교회 연합과 연대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둘째, 신천지에 빠져드는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비밀 교육센터(일명 복음방, 센터) 폐쇄에 전력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센터가 신천지인줄 모르고 속아서 거짓교리를 배워 세뇌된 사기 피해자들이 최근 해마다 2만 명씩 증가하고 있다. 이제는 사기 피해자들을 대량으로 양산해내는 근원지인 신천지 센터를 현행 학원법에 의거 처벌, 폐쇄 조치할 수 있도록 힘을 기울여야 한다. 셋째, 신천지 비밀 교육장소 앞에서의 1인 시위를 통해 그곳이 신천지임을 알리는 일이다. 교회연합회, 기독교연합회, 성시화운동본부 등 지역별 연합회 주관으로 각 지역 내의 복음방, 센터, 위장교회 등 신천지가 비밀리에 운영하는 교육장소 앞에서 그곳이 신천지 비밀 교육장임을 알리는 집회나 시위가 중요하다. 물론 철저한 준비가운데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신천지의 불법 센터 폐쇄를 제외한 대응 방안 중 가장 공격적인 방법으로 신천지에 직격탄을 날릴 수 있는 치명적이고도 강력한 대응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복음방, 센터, 위장교회, 신천지교회 등 전국 신천지 비밀 교육장소 위치 현황은 구리상담소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함. www.antiscj.or.kr) 넷째,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체계적인 교리교육과 이단 예방교육이 강화되어야 한다. 미혹의 원인이 먼저는 자신이 배우는 성경공부가 신천지라는 사실을 모르는 데서 시작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신천지 교리의 오류를 스스로 분별하지 못하는 영적 분별력의 부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 밖에서 목회자 모르게 하는 성경공부를 엄금하고, 혹 속아서 성경공부를 하더라도 신천지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도록 신천지 성경공부의 특징을 알리고, 설령 신천지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더라도 배운 내용이 비성경적, 반복음적임을 분별할 수 있도록 바른 교리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 정답을 알아야 오답을 고르지 않듯, 바른 복음‧ 바른 예수를 알면 다른 복음‧ 다른 예수에 빠질 리가 없다. 다섯째, 최근 신천지의 전국적인 대규모 집회와 시위로 말미암아 조성된 한국교계의 신천지 에 대한 강력한 대응과 대처 분위기가 용두사미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성명서 발표하고, 회의로 결의하고 결의를 다지고, 입장을 표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면 안 된다. 신천지 붕괴와 해체를 위한 장단기 계획을 세워 현실 가능한 일부터 차근차근 진행해나가야 한다. 신천지 집단과의 싸움은 이제 더 이상 몇몇 피해자들과 이단상담소만의 몫이 아니다. ‘관군은 없고 의병만 있다!’ ‘우리는 하는 일이 다 이래!’ 이러한 자조 섞인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이제는 한국교회 모두가 깨어 일어나 힘써 싸워야 한다. 올해 이만희 교주의 나이 86세, 그리 오래갈 싸움이 아니다. 그리고 승리는 이미 우리의 것이다. 할렐루야! 한국기독교이단상담소협회 구리상담소장 신현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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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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