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9-23(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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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주막교회
    교회라는 단어인 Church를 우리말로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주막이다. 한국인들은 과거의 주막을 안다. 밥도 먹을 수 있고 잠을 잘 수도 있다. 대부분 국밥과 막걸리와 파전 그리고 지역의 전통음식을 파는 곳으로 보면 된다. 주막의 시초는 김유신이 자주 찾았던 경주의 천관이 운영한 술집이라 하고, 1097년 숙종 때 주막이 등장했다고 하는 설도 있다. 주막의 여러 역할과 기능은 첫째, 나그네가 목적지를 찾아 가는 중에 숙식을 해결하는 곳 둘째, 과거를 위해 한양으로 향하는 자들의 중간 쉼터 셋째, 관료들이 민심을 살필 때 귀동냥을 하던 곳 넷째, 말을 먹이고 급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정보가 있는 곳 다섯째, 여행 중 아픈 사람들이 출장 진료를 받았던 곳 여섯째, 대부분 여자들이 운영하며 주인을 주모라 부름 일곱째, 나룻배를 기다리거나 벗을 만나기 위한 장소 여덟째, 장이 서거나 교통의 요충지, 요즘의 고속도로 휴게소 기능 아홉째, 주막에 일하는 사람들 외에는 모두 쉬어 가는 곳 열째, 영어로는 INN이며 우리나라의 주막처럼 여행 중에 먹고 묵고 쉬는 기능을 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누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자인지 묻는다. 누가복음 10장에 등장하는 인물은 다양하다. 제사장과 서기관, 강도만난 자 그리고 INN의 주인과 선한 사마리아인이다. 이 비유를 들어 의료계는 선한 사마리아 법을 만들었다. 선한 사마리아 법의 핵심은 "자신에게 아무런 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려움에 처한 다른 사람을 도와주지 않아서 그 사람이 피해를 봤을 경우, 돕지 않은 사람을 처벌하는 법"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대로 한다면 의사는 주모가 되어야 하고 선한 사마리아인은 병원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병원이 돈 없는 환자를 내칠 수 없고 의사는 강도만난 자를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비유를 들었을 때 미리 제사장과 레위인을 등장 시킨 후 선한 사마리아인과 주막을 등장시킨 것을 보면 병원의 예라기보다는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체성을 말씀하고 있는 듯하다. 예수님은 주막을 선한 사마리아인과 주모가 함께 동역하는 곳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성전에 서 있는 멸망의 가증한 것들이 되지 말고 교회에서 먹이고 치료하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이가 되라 하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모와 사마리아 인이 동역하고, 이웃사랑이 넘쳐나는 주막이 되어야 함을 2천 년 전 예수께서 지금의 우리에게 미리 선포하고 계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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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0
  • [기고]코로나 환경에서의 국가와 교회
    이 글은 6월 10일 예장고신 악법저기대책위원회 주최로 세계로교회에서 개최된 '악법 동향 세미나'에서 이상규 교수(백석대 석좌교수)가 강연한 내용입니다. 코로나 환경에서의 국가와 교회 1. 시작하면서 2019년 11월 중국 우한(武汉)에서 발원한 바이러스(COVID19)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단지 질병의 문제이거나 집단감염 혹은 역병에 의한 치사(致死)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고 있다. 개인은 물론이지만 국가 경제에 어려움을 더해 주고 있고, 사회적 불안이 조장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함께 어울려 사는 집단 사회구조를 비대면사회로 만들어 가고, 비대면적 구조를 새로운 정상으로 받아드리는 이른바 뉴 노멀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다. 이런 비대면 구조는 종교생활에도 영향을 주고 있어 정기적인 집회나 종교 활동이 제약을 받고 있다. 특히 모이기를 힘썼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모범이나(행2:46), “모이기를 힘쓰라”(히10:25)는 권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모이기를 자제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코로나19가 가져온 보다 심각한 문제는, 방역 혹은 집단 감염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개인의 자유가 침해되고 있고 국가의 공권력이 과도하게 행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교회 집회에 대해서도 행정명령이라는 이름으로 집회를 제한하거나 금지하고 있다. 이런 오늘의 현실에서 국가권력 기관이 교회 집회에 대해 간섭하거나 집회를 제한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 되고 있다. 국가, 혹은 국가권력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는 현실이 되었다. 국가는 기원에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시민의 안녕과 복지를 해결해 주는 주체였는가 하면, 과도한 권력 행사를 통한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제한하거나 폭력의 주체이기도 했다. 일제하에서의 조선총독부나 지금의 북한 정권이 이에 해당한다. 이는 국가라는 권위에 의한 폭력이었다. 이런 현실에서, 이 글에서는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에 대하여 고찰하고 국가 권력은 종교활동을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 잇는가에 대해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적’이란 서구 기독교사회에서의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 정교분리 혹은 저항권 사상 등에 대해 교회사적인 고찰을 의미한다. 2. 문제점 제기(Problem stated): 정부기관의 집회 제한 및 대면예배 금지 조치 코로나가 확산되자 대한의사협회는 2020년 1월 26일, 중국으로부터의 감염원 차단 제안을 포함한 대정부 권고안을 발표한 바 있으나 중국인의 입국이 금지되지 않았고, 다른 요인들과 함께 확진자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2월 중순에는 이단집단인 신천지 신도들을 통해 확진자가 크게 증가되자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조되고 각종 집회에 대해서도 자제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특히 기독교회의 집회 자제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이재명 경기도 지사는 2020년 3월 17일, 일부교회에 대하여 주일예배 밀접집회 제한 행정명령을 발동했고, 또 행정명령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제80조 제7호에 따라 3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할 방침이라고 했다. 박원순 서울시장도 비슷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자 대통령은 종교집회에 대해 두 지방자치단체장이 취하고 있는 조치를 적극 지지한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정세균 총리는 3월 21일 대국민담회를 통해 집단감염 위험이 높은 종교시설 체육시설 유흥시설은 보름동안 운영을 중단해 줄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준수 사항을 지키지 않을 경우 행정 명령을 발동하여 집회를 금지시키겠다고 했다. 총리 담화 후 첫 주일인 3월 22일부터 경찰이 동원되었는데, 전국경찰서장 255명 전원을 출근시켜 경찰관과 지자체 공무원들이 교회를 해당지역 방문하고 권고 준수 여부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이런 조치에 대해 서울과 경기도 일부 교회는 4개 항의 응대 메뉴얼을 만들어 대처했다고 한다. 교회가 방역 지침을 준수하고 바이러스 확산에 대처하려는 정부의 노력에 대해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정부의 이런 조치는 국가권력 기구가 종교 집회에 강제권을 행사하는 것은 정당한 일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여러 밀착 집회 집단 시설 중 유독 기독교교회에 대해서만 선택적으로 강제한 일은 헌법이 보장한 종교자유에 대한 침해라는 지적이 제기되는 시작이 되었다. 코로나 환경이 지속되자 국가기고나의 교회에 대한 제제조치가 보다 심화되었다. 2020년 7월 8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 참석한 정세균 총리는 사찰이나 성당 등과는 달리 기독교회에 대해서만 핵심방역 수칙을 의무화한다고 발표하고, 7월 10일부터 “교회의 정규예배 이외의 각종 모임과 행사, 식사제공이 금지되고 출입명부 관리도 의무화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예배 시에 찬송가와 통성기도를 지양하라고 했다. 이를 위반할 경우 3백만 원 이하의 벌금과 집합금지 조치가 시행될 수 있다고 했다. 교회 밖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식사하고 담소를 나누는 현실에서 교회에서 교인끼리의 식사는 금지하는 것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형평성을 잃은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초치가 기독교회에 대한 탄압이라는 비난이 일자 2주 후인 7월 22일 모인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국무총리는 24일부터 교회 방역강화 조치를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지방자치단체별 행정조치가 가능하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기도 구리시는 7월 13일 시장 명의로 종교시설 관리자 및 이용자가 방역수칙을 위반할 시 신고자에게 포상금을 지급하겠다는 공문을 보낸 일이 있다. 또 14일에는 순천 울산 등 다른 지자체도 포상제도, 신고제도 도입을 발표했다. 그런가 하면 전국초중고 가정통신문에 ‘코로나 예방을 위한 방역 강화 안내’를 하면서 교회만 특칭하여 집단감염집단으로 오인하도록 만들고 잠재적 가해자로 간주했다. 이 당시의 한국의 전체 확진자 1만3천293명(7월 9일자) 가운데 교회 관련 확진자는 310명으로 2.3%에 지나지 않았고, 전체 기독교 인구 970만 명에 비하면 극히 소수에 불과했으나 교회만을 지목해 포상금까지 주겠다는 발상은 교회에 대한 불만과 불신을 야기하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2020년 8월 휴가철 이후 코로나 확진자가 증가하자 그 증가가 교회의 집회와의 관련성에 대한 과학적 검토도 없이 정부는 8월 19일 0시를 기해 서울과 수도권 모든 교회는 비대면 예배만 드리도록 하면서 각종 소모임을 전면 금지했다. 종교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를 제한한 것이다. 이에, ‘정부의 교회 정규예배 이외 행사 금지를 취소해 달라’는 취지의 국민청원을 올렸고, 총 42만 7470명이 서명했으나 청와대는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불가피하게 하는 것”이라며 철회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와중에서 8월 23일 주일, 경남 함양군 서상면의 두 교회에서는 주일 예배에서 기도하거나 설교하는 중에 공무원이 찾아와 교회 비대면 예배전환 행정명령서를 전달하고 서명을 요구하는 등 예배를 방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8월 27일에는 청와대에서 16인의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문재인 대통령과의 간담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장인 김태영 목사는 정부가 교회나 사찰, 성당 같은 종교단체를 영업장이나 사업장 취급을 하지 말아줄 것을 요청하고 종교의 자유를 너무 싶게 제한하거나 예배 중단을 명령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9월 1일에는 전 세계 57개국 266개 인권단체들이 “한국 정부가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교회를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며 문 대통령 앞으로 항의 서한을 보냈다. 이들 인권단체들은 성명에서 “최근 수개월 동안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 정부는 코로나19 확산의 원인에 대한 책임을 교회에만 돌리고 있다.”고 항의했다. 그 동안 교회당 크기와 상관없이 20명 미만만 예배당 입장이 허용되어 왔으나, 9월 20일부터 300석 이상 예배실을 보유한 경우 최대 50명까지 현장 예배참석이 가능하도록 완화되었다. 그러나 비대면 예배 해제 조치는 허락하지 않았다. 300명 미만 좌석 보유교회는 대면 예배 허용 인원은 여전히 20명 미만으로 제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은 9월 21일 발표한 논평에서, “정부는 코로나 방역 실패와 재 확산 (책임)을 방역에 협력하는 한국교회에 전가하지 말라”며 “비대면 예배를 강제한 정부의 조치는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교회에 대한 정부의 각종 규제는 코로나 바이러스 출현 1년 6개월이 지난 현제까지 계속되고 있고, 한국교회는 종교행위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현실이 국가권력의 신교행위에 대한 제한이 정당한가에 대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런 질문에 대해 답해보고자 한다. 3. 국가와 교회: 국가기관의 종교 집회 제한은 정당한가? 그렇다면 국가기관이 종교의 자유에 속하는 예배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 있는가? 이 점을 교회사를 참고하여 검토하되, 교회와 국가 간의 양자 관계를 통해서, 그리고 정교분리론의 관점에서, 마지막으로 저항권의 관점에서 검토해 보고자 한다. 1) 국가와 교회의 관계 교회와 국가, 혹은 국가와 교회 간의 문제는 오랜 역사를 지닌 난해한 문제였다. 지난 2천년간 세속권(Regnum)과 교황권(Sacerdotium)은 타협과 제휴, 갈등과 대립을 겪으면서 고심했고 결과적으로 네 가지 형태의 교회-국가 간의 관계를 보여주었다. 첫째는 국가와 교회의 통합론(unity)인데, 국가와 교회의 경계가 허물어진 속화된 크리스텐덤(christendom)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형태는 4세기 이후의 국가와 교회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교회가 국가의 상호 결합되어 있어 교회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못했다. 이런 형태를 강력하게 반대한 그룹이 16세기 재세례파였다. 이런 형태는 교회를 속화시키고 참된 교회가 되지 못하게 하는 형태인 동시에 국가도 본래의 신적 기원에서 이탈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둘째는 교회와 국가의 배타적 분리론(total separation)인데, 교회와 국가의 완전한 분리를 주장하는 입장이다. 첫 번째의 경우와 정반대 입장인데, 초기 기독교회 혹은 16세기 재세례파의 입장이었다. 세속정부와 교회는 별개의 기원을 가지며, 세속정부가 영적인 일에, 반대로 교회가 세속적인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국가 정치에 대한 교회의 무관심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국가가 교회 문제에 개입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것은 국가 정치에 대한 교회의 무관심을 의미하며, 정치적 문제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셋째는 교회우선주의 혹은 교회 지상주의(clericalism)인데, 이것은 국가를 교회의 일부로 보고 국가에 대한 교회의 우위를 주장한다. 즉 교회가 국가 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서 이를 교황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이 중세교회의 입장이었고, 로마 가톨릭의 견해였다. 예수께서 첫 교황이라고 간주하는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셨음으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은 영적인 영역만이 아니라 세속 영역에서도 통치권이 주어졌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교회가 시민사회에서도 권위(civil authority)를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넷째는 국가지상주의(erastianism)인데, 교회를 국가의 일부로 보고 국가가 교회를 지배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를 에라스티안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스위스의 철학자 에라스투스(Thomas Erastus, 1524-1583)의 견해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은 세속 황제가 기독교의 수장보다 상위의 권위를 가지므로 종교문제에 대해서도 국가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교황주의(皇帝敎皇主義, caesaropapism)와 같은 입장이다. 앞의 두 상반된 입장은 교회-국가 간의 거듭된 권력욕에 노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적인 제도가 아니라는 점이 인정되어 왔다. 이것은 교회에 대한 국가의 우위를 주장하며, 국가가 교회 문제에 개입하거나 간섭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영국교회(성공회)가 이런 입장을 따랐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4가지 유형은 국가와 교회 간의 이상적인 관계로 볼 수 없었음으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국가와 교회에 대한 바른 관계를 규정하려고 힘썼는데, 그것은 교회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지만 국가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라고 보았다. 그 결과 개혁자들은 각기 자신의 교회-국가관을 피력했는데, 루터나 츠빙글리 그리고 칼빈 간에 작은 차이가 있지만 다 같이 인정하는 바는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교회와 국가는 하나님이 내신 기관이지만 각기 다른 기능과 역할을 감당하는 신적 기관이라는 점이었다. 둘째, 국가도 하나님이 내신 선한 기관이며, 국가 기관의 위정자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대리자로 보아 하나님이 주신 직무를 수행해야 하고, 백성들은 순복해야 한다는 점, 셋째는 국가기관의 사명 혹은 역할을 규정했는데, 국가는 참된 종교와 종교생활을 공적으로 보존하게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 좀 더 부연하면, 루터는 두 왕국론을 말하면서 두 기관의 기능과 목적을 지나치게 구분하여 오른손 왕국은 오직 그리스도인들만 관련되고, 왼손 왕국은 오직 불신자들에게만 관련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두 왕국의 기능적 차이를 말한 것이다. 루터는 왼쪽 왕국, 곧 국가는 평화를 유지하고 죄를 벌하고 악인을 견제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보았다. 칼빈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두 왕국’(duplex... regimen) 개념에 근거하여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를 이해했는데, 영적인 정부인 교회는 물론이지만 세속적인 정부인 국가도 하나님이 세우셨다고 보았다. 하나님이 세우신 세속적 정부는 두 가지 기능을 지니는데, 첫째는 참된 종교를 보호하고 하나님의 의를 증진 시키는 일이며, 둘째는 백성의 복지를 도모하고 증진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시민정부의 목적은 우리가 사람들 가운데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께 드리는 외적인 예배를 지원하고 보호하며 경건에 대한 건전한 교리와 교회의 위치를 변호하며 우리의 삶을 사람들의 사회에 적응시키며, 우리의 시민적 관습을 시민적 의에 따라서 형성하며, 우리들 서로 간에 화목하게 하며, 공공의 화평과 평안을 육성하는 데 있다” 즉 정부는 하나님에 대한 외적인 예배를 소중히 여기고 보호해 주며 경건한 교리와 교회를 방어하고 ... 평화와 안정을 진작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정부의 기능은 “참된 종교를 공적으로 보존케 하며, 인간성이 유지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인식이 17세기 이후 근대적 의미의 국가-교회 간의 관계, 곧 국가의 교회 지배권을 인정하지 않는 근대 사회개념을 형성하게 되었고,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종교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폭넓게 법제화 되었다. 종교의 자유는 시민이 권리(Bürgerrecht)이기 전에 인간의 권리(Menschenrecht)로 간주되었고, 종교의 자유라고 말할 때 이 말은 두 가지를 포괄하는데, 신앙의 자유(Glaubensfreiheit)와 종교행위의 자유(Religionsausübungsfreiheit)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신앙의 자유’란 구체적으로 어떤 종교를 신봉하거나 그 종교를 변경하거나 모든 종교를 신봉하지 않을 자유를 포함하며, 자신의 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하거나 자기의 신앙에 대하여 침묵할 자유를 포함한다. 그리고 ‘종교행위의 자유’란 종교적 행사의 자유, 종교적 집회, 결사의 자유, 종교교육의 자유, 전도 혹은 선교의 자유 등으로 세분화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독일의 법학자 콘라드 헤세(Konrad Hesse, 1919-2005)는 신앙의 자유, 예배의 자유, 종교적 결사의 자유를 종교적 자유의 본질적 요소라고 말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개혁교회 전통과 서구사회의 역사에서 볼 때, 국가권력이 신교(信敎)의 자유나 신앙행위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것은 정당하다 할 수 없다. 교회의 예배나 집회는 교회의 권세에 속한 영역이고, 신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은 국가의 권세에 속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리는 원칙에 따라 예배 모임에 대한 국가의 명령에 대해서는 복종할 의무가 없다. 그런데 국가의 권세에 속한 국민의 생명, 건강 보호의 의무와 교회의 자율권이 충돌할 경우는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가 대두된다. 이런 경우 교회의 권세가 우선적으로 적용되어 원칙적으로 국가가 규제할 수 없다. 다만 사후적으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매우 제한적인 국가의 개입은 인정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국가와 가정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교육 제도를 수립하고 학교를 세우는 일은 국가의 의무라고 할 수 있지만, 국가는 부모의 자녀양육이나 가정사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가정이라는 영역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동 학대 등과 같은 특별한 사정이 발생한 경우에 한하여 국가가 개입할 수 있다. 개인 가정의 일이나 교회의 일에 대한 국가 권력의 과도한 개입은 사적 자유 혹은 종교자유에 대한 침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예배나 집회에 대해서는 국가는 규제할 수 없으며 교회가 자율적으로 결정할 문제이다. 다만 교회에서 공공의 이익이나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건이 발생한 경우에는 필요한 최소한도의 개입은 인정된다고 할 수 있다. 또 교회는 자신의 관할 영역인 예배 모임의 시행 여부를 국가의 판단에 맡겨서는 안 되며 스스로 합당하게 판단하여 이를 결정하고 실행하여야 한다. 현실적으로 국가권력기관은 현장 예배의 가치에 대한 신학적 판단을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예배 모임의 실행 여부를 결정할 자리에 있지 않다. 국가권력은 교회와 관련된 고유의 가치에 대해 결정할 권세를 위임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권력이 종교문제에 개입하거나 침해하는 사례가 있어 17세기 이후 근대적 의미의 국가-종교(교회) 관의 관계를 규정했는데, 그것이 정교분리론이었다. 2) 정교분리 유럽인의 이민으로 이루어진 미국이라는 나라는 처음부터 정교분리론을 받아드렸다. 정교분리(政敎分離)라는 말은 미국 헌법이 만들어질 때 ‘국교’를 부인하는데서 시작되었지만 이 개념의 연원은 17세기 잉글랜드의 청교도적 배경에서 시원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종교의 자유문제는 16세기 종교개혁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오늘 우리가 말하는 ‘정교분리’는 사실상 잉글랜드의 에라스티안적인 제도에 대한 반발,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의 언약도들(Covenanters)의 경험에서 기원하였다고 할 수 있다. 청교도 운동은 엘리자베스(Elizabeth I, 1533-1603) 치하에서 시작된 신앙 운동으로서, 영국 교회(Ecclesia Anglicana, 聖公會를 의미함)에 여전히 남아 있는 로마 가톨릭의 잔재를 제거하고 명실상부한 개혁을 추진했으나 심각한 탄압을 받았다. 교회에 대한 국가 권력의 우위를 인정하는 에라스티안적인 제도 하에서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 것이다. 특히 분리주의적 청교도들은 더욱 그러했다. 종교 혹은 신앙 문제에 대한 국가 권력의 과도한 침해를 경험했던 이들이 새로운 이주지 북미대륙에서 정교분리를 말하게 된 것이다. 17세기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언약도’ 운동 또한 잉글랜드의 청교도들과 동일하게 국가권력의 과도한 종교 자유의 침해를 경험했다.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가 1603년 사망하자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James VI)는 제임스 1세라는 이름으로 잉글랜드의 왕이 되는데, 장로교적 배경에서 지낸 그가 잉글랜드의 국교회 제도를 선호하여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를 국교회 제도로 전환하기 위해 장로교회를 탄압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신앙 운동이 언약도들이었다. 제임스 1세(1603-1625)에 이어 그의 아들 찰스 1세(1625-1649),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1660-1685), 찰스 2세의 동생 제임스 2세(1685-1688)로 이어지는 긴 기간 동안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유린당하고, 예배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탄압받았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새로운 대륙에서의 정교분리를 선언하게 된 것이다. 정교분리론은 역사적 추이에서 볼 때 근본적으로 국가 권력의 종교 혹은 신앙 문제 개입이나 간섭에 대한 거부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유럽인의 이민으로 이루어진 미국에서는 처음부터 정교분리를 중시했고, 새로운 정착지에서 정교분리를 통해 신교(信敎)의 자유를 누리고자 했다. 그 첫 사례가 1647년 5월 포츠머쓰에 모인 4개 처 정착지 대표들이 모여 합의한 헌법이었다. 이것이 로드아일랜드라는 단일 식민지의 기초를 놓게 되는데,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사항을 포함시켰다, 그 첫째가 양심의 자유였고, 둘째가 종교와 정치의 분리(the separation of religion and politics)였다. 침례파가 다수였던 이곳에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동시에 다른 종파에 대해서도 관용해야 한다는 결정이었다. 또 세속 권력의 종교 문제에 대한 간섭을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런 사상은 로저 윌리암스(Roger Williams, 1603-1683)의 영향인데, 그는 교회와 국가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권위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엄격히 분리되어야 하며, 상호지배나 간섭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국가는 국민이 위임해 준 범위 안에서 지위, 명예, 위엄을 지니며 민간업무를 담당하지만, 종교와 관련된 업무에서는 교회가 국가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아 신교의 자유와 국가권력의 교회 간섭을 반대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유럽인의 뉴잉글랜드 이민과 정착으로부터 약 150여 년이 지난 1776년 7월, 13개주의 식민지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이때 독립선언문을 기초했던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은 정교분리를 3가지 측면에서 이해했다. 첫째, 세속 정부는 교회를 탄압할 수 없다. 둘째, 세속 정부는 교회에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 셋째, 세속 정부의 수장은 교회의 수장이 될 수 없다. 제퍼슨은 신앙의 완전한 자유와 함께 국가교회 형태를 거부한 것이다. 그동안 ‘국가연합’의 형태로 있었으나, 1789년에는 ‘연합헌장’(Articles of Confederation)을 수정한 헌법을 비준하고 연방 정부를 수립했다. 헌법 본문에서 미흡하게 반영된 사항은 수정조항으로 보충되었는데, 1791년 권리장전(Bill of Rights)이 헌법에 추가되었고, 또 10개의 수정 조항이 추가되었다. 그런데 1791년 12월 15일 비준된 미국의 수정헌법 제1조(First Amendment)가 정치와 종교에 대한 사항을 규정했다. “연방 의회는 어떤 종교를 국교로 정하거나 종교의 자유로운 시행을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으며 언론, 출판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국민들이 평화적으로 집회할 권리와 불만의 시정을 정부에 청원할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 우리가 말하는 ‘정교분리론’은 바로 여기서 출발했는데, 핵심은 두 가지이다. 국교를 정하거나 종교 활동의 자유를 금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법을 제정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못 박고 있다. 다시 말하면 국가 권력이 종교 문제, 곧 신교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런 법률을 제정하는 것 자체를 금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수정헌법 제1조의 정신이다. 미국에서 말하는 국교 금지는 어떤 특정 신앙이나 교파가 아니라, 여러 종교나 교파가 균등한 신앙의 자유를 향유하게 한다는 것이고, 성도나 교회는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 아니라, 국가 권력이 종교문제에 대해 간섭하거나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말한다. 이런 법률적 장치는 앞에서 지적했지만, 유럽에서 국가권력의 신앙 자유 제한이나 교회 간섭에 대한 경험적 폐해에서 나온 금지 규정이었다. 종교의 자유라고 할 때 여기에는 두 가지가 포함되는데, ‘신앙(信敎)의 자유’와 ‘종교 행위의 자유’가 그것이다. 종교 행위의 자유라고 할 때 그것이 집회의 자유, 예배의 자유, 종교 행사의 자유, 종교 교육의 자유, 소모임의 자유 등을 포함한다. 종교적 입장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는 원칙적으로 종교의 자유로 보장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점을 고려해 볼 때 국가권력이 집회를 금지하거나 예배를 제한하거나 제재하는 것은 17세기 이후 근대사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수용되어 왔던 정교분리의 원칙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종교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고 할 수 있다. 3) 저항권 사상 국가권력이 공권력을 동원하여 성경의 가르침에 명백하게 위반되는 요구나 강요에 대해서는 저항할 수 있다는 이른바 저항권(Right of resistance) 사상은 중세 유럽 사회의 법체계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사실상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을 통해 제시되어 근대적인 개념으로 전개되어 왔다. 이와 관련하여 3가지 성경 본문이 주로 인용되어 왔는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22:21)는 정치와 종교의 경계를,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순종하라.”(롬13:1)는 하나님이 세우신 위정자들에게 복종하라는 가르침으로,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9)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백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될 경우에는 저항할 수밖에 없다는 가르침으로 이해해 왔다. 루터는 하나님의 왼손 왕국인 세속권에 대한 복종의 의무를 강조했지만 무조건적인 복종을 가르친 것은 아니었다. 세속권은 영생의 법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부가 신앙에 반하는 요구를 할 경우 저항할 수 있다는 점을 말했고, 루터파의 아우구스부르크신앙고백서 16조의 말미에도 “사람에게 복종하기보다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기” 때문에 관헌에 대한 복종은 무조건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저항권 이론은 칼빈에게 와서 보다 선명하게 제시되었는데, 그의 저항권 이론은 『기독교강요』 Ⅳ권 20장 31-32항에 기술되어 있다. 여기서 칼빈은 국가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위탁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권력자가 하나님께 반역할 경우에 한하여 저항하는 것은 정당한 일일 뿐만 아니라 의무라고 지적한다. 위정자에 대한 복종보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저항, 그 자체가 권력화(權力化)되기 때문에, 저항 역시 하나님으로부터의 위탁에 근거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칼빈이 죽은 후 프랑스 개혁파 교회에서는 보다 적극적인 저항권 사상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논리를 주장하는 이들을 ‘모나르코마키’(monarchomachi), 곧 ‘군주와 싸우는 자’라고 불렀는데 모두가 프로테스탄트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대표적인 인물은 칼빈파 인물들이었다. 프랑스 개혁파의 정치적 견해가 당시 이러한 형태로 표출된 것이다. 이것은 칼빈의 저항권 사상이 변화된 정치적 상황 가운데서 새롭게 전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의 저항권 이론을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한 이가 칼빈의 후계자였던 베자(Theodor de Beze, 1519-1605)였다. 베자는 『위정자의 신민에 대한 권리와, 시민의 위정자에 대한 의무에 관하여』에서 부당한 국가 권력에 대한 저항은 정당한 것으로 주장했다. 이 책은 바돌로메 날의 대학살(1572)을 경험한 이후 저술된 책인데, 이 책이 가져 올 충격을 고려하여 익명으로 출판한 것이다. 베자는 이 책에서 어디까지 복종하고 어디서 저항할 것인가는 각자 그리스도인의 ‘양심’이란 저울에 달아 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후 프랑스에서 저항권 사상은 현저한 진전을 보이는데, 스코틀랜드인 조지 부케년(J. Bucanan), 칼빈의 문하생인 존 낙스(John Knox), 모나르코마키(Monarchomachi)들과 교섭이 있었던 스코틀랜드인으로 프랑스에서 교사로도 활동했던 존 메이져(John Major 1470-1550)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렇게 볼 때 칼빈은 저항권 사상의 원류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저항권 사상은 스코틀랜드를 거쳐 장로교 전통에서 수용되는데, 그것은 17세기 스코틀랜드의 언약도들(Covenanters)의 경험이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장로교 신앙을 지키려는 이들이 국가 권력으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고 신교(信敎)의 자유를 유린당했을 때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의 정당성을 숙고한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상에서 서구 교회에서 오랜 기간 동안 전개되어 온 저항권 이론을 소개했는데, 이는 근대사회에서 널리 수용되었다. 국가권력이 부당하게 종교의 자유, 신교의 자유, 혹은 예배의 자유를 침해할 경우 저항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한 한국교회의 인식이 매우 부족한 것으로 판단된다. 4) 한국에서의 정교분리론 미국연방헌법은 현행 성문법 중 가장 역사가 오랜 문서로, 정교분리 조항 등은 이후 세계적으로 일반화되어 갔다. 18세기 말부터 북미에서부터 유럽 국가들도 정교분리를 법제화하기 시작했고, 20세기에는 상당수 비서구 국가들도 이런 흐름에 동참했다. 우리나라도 1948년 7월 17일 공포된 제헌 헌법에서부터 정교분리가 명문화 되었다. 우리나라 헌법 제20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하여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제2항은 “국교는 인정되지 않으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 된다”라고 하여 국교의 부정과 정교분리를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정교분리론은 기독교 복음과 더불어 한국에 소개되었다. 북미 출신 선교사들은, 기독교를 외세에 의한 침략세력으로 규정하고 선교사들의 활동을 의심하던 조선 정부에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 선교의 자유를 누리고자 했다. 조선의 정치문제에는 관여하지 않고 오직 복음만 전하겠다는 점에서 정교분리를 제시한 것이다. 복음전파를 위한 전략이라고 좋게 해석할 수 있지만, 이것은 정교분리라는 의미를 국가의 입장에서 받아드려 정부에 순응하겠다고 자처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정교분리의 근본정신은 그 이후에도 곡해되었다. 일제치하에서 조선총독부는 정교분리론을 앞세워 선교사들의 활동을 제한하고자 했다. 정교분리의 근본정신은 국가권력의 교회 간섭을 금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정치참여를 금지한 것으로 호도하여 외국 선교사들이나 조선인들의 정치 관여를 금기시 한 것이다. 효과적인 식민지배를 위해 정교분리론을 이용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1운동과 같은 반일 만세 운동이 일어난 것은 국가 권력의 신교(信敎)의 자유 부정과 교회 탄압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1935년부터 시작된 신사참배 강요는 국가권력의 교회 탄압이자 정교분리 원칙의 심각한 위반이었다. 국가권력이 신앙의 자유를 억압할 뿐 아니라 우상숭배를 강요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점차 저항은 약화되었고 후에는 심각한 훼절에 이르게 되지만, 이 일로 2천여 명이 투옥되고 40여 명은 옥중에서 죽음을 맞기까지 국가권력에 저항했다. 이른바 일제가 말하는 정교분리론에 저항 한 것이며, 신교의 자유에 대한 투쟁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주기철 목사였다. 1939년 8월 일제경찰이 그에게 설교 금지령을 내렸을 때, “나의 설교권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경찰서에서 하지 말라 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설교를 그만 두지 않으면 체포한다.”고 협박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설교는 내가 할 일이고, 체포는 당신이 할 일이다.” 비록 짧은 응대였으나 국가권력의 한계를 분명하게 선언한 것이다. 국가권력은 신교의 자유, 곧 설교권을 박탈 할 권리가 없다는 점을 제시한 것이다. 국가 권력자들은 정교 분리를 교회의 정치 불관여로 간주하여 정부정책을 비판하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드리지만, 미국의 수정헌법 제1조에서 말한 정교분리의 의미는 국가권력의 종교자유 침해 금지를 규정한 것이다. 맺으면서 이상에서 코로나 환경에서의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에 대해 개혁교회 전통과 서구사회 역사에 비추어 살펴보았다. 특히 정부의 방역 지침과 기독교회에 대한 집회 제한 조치에 대한 경과, 그리고 교회의 집회에 대한 국가권력의 행정명령이 정당한가에 대하여, 교회와 국가, 정교분리, 저항권의 문제를 통해 검토해 보았다. 앞에서 지적했지만, 교회는 방역 수칙을 준수하고 국민건강과 역병으로부터의 안전을 위해 협력하고 협조해야 한다. 이런 기독교회의 적극적인 조치에도 불구하고, 국가기관이 사전 협의나 양해 없이 일방적으로 특정한 기간에 대한 언급 없이 전국교회에 대하여 행정명령을 하달하는 것은 코로나환경, 혹은 방역 지침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의 자유와 신교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교회를 통한 감염이 미미함에도 불구하고 전국 교회에 대하여 획일적인 지침을 강제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할 수 없다. 지난 3월 27일 기준으로 볼 때 국내 감염자 중 교회를 통한 감염은 1.5% 불과하다고 한다. 98.5% 확진자는 교회와 무관한 감염경로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예배에 대해 밀접 집회 제한 행정명령을 발동하는 것은, 한국교회 언론회의 지적처럼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며 교회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고조하려는 의도”로 의심을 살 수 있다. 교회가 정부의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한 지침을 준수하고 협조하는 일은 당연한 의미이지만, 종교 집회의 자유를 제한 할 수 있는 예배금지, 교회당 폐쇄, 구상권 청구 같은 조치는 기독교에 대한 탄압일 수 있다는 점이다. 유독 기독교회의 집회에 대해서만 제한을 강제하는 것은 공정한 처사라고 할 수 없다. 또 특정 교회를 지칭하여 집회 금지를 명령하는 것은 의도적인 정치방역으로 오해될 수 있는 소지가 있다. 정부는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교회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면 교회 지도자들에게 그 필요성을 고지하고 협조를 요청할 수 있고, 교회는 자율적으로 일정 기간 집회를 제한하거나 축소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기독교계가 국가기관의 행정명령을 통한 대면예배 제한이나 금지 조치에 대해 성명서를 발표하거나 보건복지부장관과 서울시장을 상대로 ‘행정명령 집행정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한 일은 소극적 저항권의 행사라고 할 수 있으나, 전교회적인 특별한 저항 없이 이를 받아들인 것은 방역 지침에 순응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 종교의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는 안이한 대응이자 교회의 자율권에 대한 포기라고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의 경우, 주 정부가 코로나 방역을 위해 예배를 제한하는 행정명령을 내린 바 있으나, 해당 교회는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예컨대, 2020년 5월 18일 노스캐롤라이나의 로이 쿠퍼(Roy Cooper) 주지사는 야외에서 10명 이상의 모임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교회 집회에 대해서도 예외 없이 이를 적용했다. 이에 대해 윈스턴 살렘의 베리안침례교회와 그린빌의 침례교회는 기독교 단체인 리턴 아메리카와 더불어 미국연방법원에 노스캐롤라이나주를 상대롤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제임스 데버 판사는 “미국 헌법이나 수정헌법 제1항의 종교의 자유권 보장은 전염병에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한 공공보건의 이유보다 종교자유 침해를 더 심각하게 여긴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저명한 법률가인 켄 스타(Ken Starr) 박사가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병이 수정헌법 제1조에서 보장한 종교의 자유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말하면서 종교자유의 위기(Religious Liberty in Crisis: Exercising your faith in an age of uncertainty)라고 말한 것을 보면 국가권력에 의한 종교자유 침해는 국제적인 문제로 제기되고 있고, 우리의 성찰이 요구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 기고/강연
    • 기고
    2021-06-14
  • [기고] 한국교회를 향한 손양원 목사의 경고
    이 기고문은 6월 6일 함안칠원교회에서 열린 손양원 목사 순교 70주년 기념예배에서 이상규 교수가 발표한 글입니다. 한국교회를 향한 손양원 목사의 경고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 71주년을 기념하는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기념사업회 정주채 이사장님과 이성구 회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손양원 목사 순교 71주년을 기념하면서 그 분이 남긴 신앙정신과 정신적 유산을 기억하고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사회나 한국교회는 매우 혼란한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국가적으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고 안보가 불안한 상태에 있습니다. 공정과 정의가 무너지고, 거짓과 위선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건전한 도덕과 윤리가 무너지고 불법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또 지난 정부가 피땀 흘려 이룬 경제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념적 갈등이 심각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해방 공간과 같은 상황이고 그 때보다 더 심각한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 시대에 살았던 손양원 목사님의 눈이 비친 그 시대와 그 시대를 향한 경고는 오늘 우리 시대에도 동일한 경고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고자 합니다.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되어 있던 손양원 목사님은 해방과 함께 출옥하여 1950년 9월 순교할 때까지 만 5년간 활동하시면서 크게 3가지 경고를 하셨는데 이 점에 대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 경고: 회개하라 손양원 목사님의 첫 번째 경고는 ‘회개하라’는 권고였습니다. 회개는 그의 설교의 가장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그는 회개하지 않음이 모든 화(禍)의 원인이라고 보았고 회개치 않음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1945년 해방을 맞았으나 좌우대립이 심각했고, 교회 지도자들은 기득권에 집착하여 회개와 자성을 거부하고 교회 쇄신운동을 거부했습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대립하였고, 1950년 4월 대구제일교회당에서 모인 제36회 총회는 한국교회사상 처음으로 경찰이 투입된 불명예로운 총회였고, 교권대립이 심각하여 결국 정회하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꼭 2달 후 6.25전쟁이 발발했습니다. 그날 한반도 전역에 내리던 비는 우리 민족의 장래에 대한 불길한 징조였습니다. 인민군은 6월 26일 임진강 일대와 의정부 및 춘천을 돌파했고, 개전 3일 만인 6월 28일에는 서울을 점령하고, 30일에는 한강 도하를 시작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서울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후퇴하여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됩니다. 7월 6일에는 인민군은 오산 부근에서 미국 제24사단과 첫 교전을 벌였고, 7월 19일부터는 대전 공략에 들어가 24일에는 대전을, 7월 말에는 목포와 진주를, 8월 초에는 김천과 포항을 점령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엔군은 8월 3일 낙동강 철교를 폭파하고,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워커라인이라 불리는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8월 말 북한군 주력부대는 낙동강까지 진출하면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전선은 교착상태로 들어갔습니다. 결국 부산과 경남 일부를 제외한 전 국토가 적의 수중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호남지방으로 말하면 인민군은 7월에 대전을 거쳐 익산 장성 광주를 거쳐 7월 27일에는 여수가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손양원 목사는 인민군이 손 목사를 그냥 두지 않을테니 피하라고 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합니다. 그리고 나병 환자들을 섬기며 지내던 중 9월 13일 수요일 인민군에게 체포되었고, 2주일 동안 끌려 다니면서 고초를 당하시고 9월 28일 목요일 순천으로 가는 미평 과수원에서 48년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9월 13일 수요일 저녁 설교를 준비하다가 잡혀서 원고를 완성하지 못했는데, 그 설교는 그의 마지막 설교이지만 선포되지 못한 설교가 된 것입니다. 그 설교가 바로 ‘한국에 미친 화벌(禍罰의 원인’이라는 설교입니다. 이 설교에서 손양원 목사님은 6.25 동란을 4천년 역사상 초유의 신벌(神罰)로 규정하고 우리 민족에게 미친 이 화(禍)와 벌(罰)의 원인을 분석했는데, 범죄하고도 회개치 않음이 근본 원인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¹ 그는 우선 국가지도자들의 범죄, 둘째 백성들의 죄, 곧 민족적 범죄, 셋째, 미군정의 잘못된 영향을 들었고, 네 번째로는 한국교회와 신자들의 책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6.25 전쟁, 곧 “이 화벌의 책임은 기독교의 죄 값이다. 우리의 책임이다.”고 말합니다. 기독교인들이 기도가 부족했고, 전도가 부족했고, 정치권력을 추구하고, 미국이 보내준 구제품을 두고 추태를 보였고, 자유주의 신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했다고 지적하고, 특히 총회석상에서 목사 장로들이 난투극을 벌인 일이 화의 원인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설교의 요지이자 결론은 회개하지 않음이 화의 원인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요구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더 큰 화를 면치못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회개를 외친 그의 설교는 평온한 설교가 아니라 절규였습니다. 회개를 요구하는 마지막 호소였습니다. 그는 세례요한처럼 경고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민족은 망한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가 살길이라고 경고합니다. 1)태풍이나 지진, 역병과 같은 자연 제해나 전쟁과 같은 국제적 대립으로 인한 대량학살 등 인적 제해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는 입장은 서구교회에서도 널리 주창 되어 왔다. 1653-652년의 유럽에서의 페스트, 1662년 9월의 런던 대 화재가 발생했을 때 청교도인 토마스 빈센트(Thomas Vincent)는 이런 제앙은 아모스3:7-8, 시편 65:5절에 근고하여 하나님의 경고라고 보았고, 런던의 의사였던 기드온 하비(Gideon Harvey) 1655년의 런던의 대역병, 1656년의 런던 대화제, 1703년의 대폭풍을 경험 한 후 다니엘4:2을 인용하면서 이는 하나님의 경고이자 하나님의 심판라고 말했다. 런던의 목회자였던 윌리엄 구지(William Gouge)sms 『하나님의 세 화살, 역경 기근 칼』이라는 책에서, 민수기16:41-50에 근거하여 역병의 원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보았고, 영국국교회 목사였던 윌리엄 핸들리(William Hendley)는 역병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주장했다. 두 번째 경고: 공산주의에 대한 경고 손양원 목사님의 두 번째 경고는 공산주의를 멀리하라는 경고였습니다. 그는 공산주의가 기초하고 있는 무신론, 유물론과 거짓, 위선, 이중성, 선동 등 공산주의의 실상과 실체를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공산주의는 기독교 신앙에 반하는 불신앙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산주의를 반대한 것입니다. 그가 강력한 반공주의자이자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신사참배 거부로 1940년 9월 25일 투옥되어 5년 간 감옥에서 보내고 1945년 8월 17일 석방된 그는 이념적 싸움이 한창이던 해방정국에서 자신의 견해를 분명하게 피력했습니다. 해방 당시만 해도 국민 대중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혼란한 해방 정국에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적절한 제도인 것처럼 인식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세계적 조류를 알지 못하는 설익은 소위 지식인들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무지했고, 박헌영 같은 선동가의 말을 듣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선호했을 정도였습니다. 1946년 8월 미군정이 조사한 여론조사를 보면, 8,453명의 응답자 중 70%에 해당하는 6,037명이 ‘사회주의를, 7%에 해당하는 574명이 공산주의를 지지했다고 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손양원 목사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해 가르치고 설교한 것입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 세상에 나온 것은 1848년 2월이었고, 그로부터 69년 뒤인 1917년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했습니다. 이때부터 공산주의 실상이 서서히 노출되기 시작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조선공산당이 창당된 것은 1925년 4월이었습니다. 조선공산당은 독립운동을 하기위한 방편이었다는 측면도 있습니다만 공산당의 실상을 재대로 아는 이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첫 사회주의 정당은 1918년 4월, 이동휘(1873-1935) 등이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결성한 한인사회당이었습니다. 이동휘는 3·1운동 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이승만 휘하의 국무총리가 되었으나 임시정부 국무총리직을 이용하여 사회주의운동 확산하고자 했습니다. 사실상 그는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공주의자인 이승만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임정개혁안을 둘러싸고 이승만은 격한 논쟁을 벌였던 그는 결국 임정을 탈퇴하고는 1921년 5월 ‘고려공산당’을 창당합니다. 김철훈이라는 이는 1921년 5월 또 다른 ‘고려공산당’을 창당했습니다. 이후, 이동휘의 상하이 고려공산당은 ‘상해파’로, 김철훈의 공산당은 ‘이르쿠츠크파’로 불리게 되면서 당 창립의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공산주의 운동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런 공산주의의 문제를 간파하고 비판했던 첫 인물이 이승만인데, 그 때가 1923년이었습니다. 이승만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발간되던 「태평양 잡지」 1923년 3월호에 “공산당의 당 부당(當不當)”이란 제목의 논설을 게재했는데, 이것이 공산주의에 대한 최초의 비판이었습니다. 제목이 암시하는 바처럼 이 논설에서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합당한 점과 부당한 점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입니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거짓된 유토피아 사상에 열광하고 있었으나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본질과 모순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국내에서 이런 점을 간파하는 이들은 그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도리어 공산주의가 이상적인 제도인양 흠모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해방당시의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때에 손양원은 집회를 다니면서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설교했고, 공산주의는 위험한 사상이자 기독교 신앙과 반하는 무신론 사상이라는 점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가 반공주의를 말할 때는 6.25 전쟁 이전이었고 공산주의를 체험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때였습니다. 그는 함안 칠원 출신으로 북한 공산주의 체제를 경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국하고 그가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민주주의를 신봉하게 된 것은 기독교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공산주의는 무신론이기 때문에 받아드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중은 이 점을 잘 모르고 있었기에 손양원 목사는 공산주의에 대해 경고했던 것입니다. 한 가지 사례를 소개하겠습니다. 1947년 봄 그가 영도교회(지금의 제일영도교회)에서 집회할 때도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여러분 공산주의가 무엇입니까? 공산주의는 남의 것 빼앗아 먹자는 주의입니다. 같이 공평하게 나누어 먹자가 아닙니다. 남의 것을 빼앗는 강제입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성경의 정신입니다. 민주주의는 이것 맛보시오 하면서 나눠먹는 주의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랑으로 나누어 먹는 주의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정신 바짝 차리십시오. 어느 주의가 좋습니까?” 혼란한 해방 정국에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적절한 제도인 것처럼 인식하는 무지한 교인들을 위한 경고였습니다. 그러기에 손양원은 “여러분, 정신 바짝 차리시오”라고 설교 한 것입니다. 이 집회에 참석했던 한 사람이 후일 서울음대 교수가 되는 이인영 학생이었는데, 그 조차도 ’민주주의‘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고 회상했습니다. 성가대원으로 풍금 뒤편에서 손양원 목사의 설교를 들었던 이인영 학생은 70여년이 지났지만 손양원 목사의 확신에 찬 설교가 잊혀지지 않는다고 수년 전 저에게 증언한 바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말한 민주주의는 인민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 민주주의였습니다. 그가 말한 것은 신민주주의도 아니었습니다. 백남운, 안재홍, 조소앙 등이 말한 신민주주의는 통합과 합작을 중시하는 일종의 중도적 민주주의였습니다. 미국적 민주주의나 소련식 민주주의 중 어느 하나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손양원은 철저한 미국식 민주주의의 신봉자였습니다. 아마도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연유였을 것입니다. 좌익들이 볼 때 손양원은 친미주의자였습니다. 그의 두 아들의 죽음도 따지고 보면 보수 친미주의자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김득중의 연구에 따르면, 손동인과 동신의 죽음은 종교적 이유라기보다는 우익의 반탁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 곧 반공주의 우익청년단원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였던 손양원은 결국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목숨을 빼앗겼고 그의 죽음을 통해 공산주의의 거짓과 만행을 폭로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자유민주주의의 ‘자유’가 사라지고, 거짓 위장 선동이 난무하고, 친공주의가 백주에 서울도심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손양원의 경고는 오늘 우리를 향한 경고가 되고 있습니다. 손양원의 경고가 의미 있는 경고였다는 점은 6.25 전쟁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인민군 치하에서 3개월 간의 서울 생활에서 공산주의를 경험했습니다. 그때서야 공산주의가 무엇인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6.25전쟁을 경험하면서 신학교에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했고, 그것이 정규 교과과정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예컨대, 전쟁 중 1951년 대구에서 개교한 총회신학교의 1953년 교과과정에는 성경, 조직신학, 교회사와 같은 신학관련 과목 외에도 ‘기독교와 민주주의,’ ‘기독교와 공산주의’ 같은 과목이 있었습니다.² 적당한 교제가 없었기에 1953년에는 찰스 브레이든의 『전쟁 공산주의 종교』가 역간되었고, 프란시스 킨슬러(권찬영 선교사)가 쓴 『기독교와 민주주의』가 1957년에 출판된 것입니다. 공산주의를 멀리하라는 경고는 지금 우리 시대를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2) 김득렬 편, 『씨를 뿌리려 나왔더니』 (서울: 카이로스, 2007), 177. 세 번째 경고: 재림의 때를 준비하라는 경고 손양원 목사님이 외친 세 번째 경고는 우리의 믿음 없음, 곧 불신앙을 경고하고, 사랑이 식어지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다시 뜨거운 가슴으로 재림의 때를 준비하라는 경고였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믿음으로 행하며, 믿음을 따라 행하지 않는 것은 다 죄(롬14:23)라고 확신했습니다. 그가 나환자들의 목회자가 된 것도,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도 믿음을 따라 행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옥중 생활 4년이 많은 날들이지만(獄苦四年多多日) 주와 함께 즐거워하니 그 모든 날이 하루 같다(與主同樂如一日)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감옥 생활에서도 주와 동행하니 한상 기쁨이 충만하다(與主同居恒喜滿)고 고백한 것입니다. 해방과 함께 출옥한 그는 혼란한 정국에서 그리고 교계의 무질서한 처신을 보면서 믿음으로 행할 것을 설교하면서 서로 자기 이(利)를 구하면 사랑이 식어지는 현실을 개탄한 것입니다, 이런 삶의 자세가 원수된 자를 양자로 입적시키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특히 재림의 때를 준비하라고 경고합니다. 해방 이전 특이 1930년대 말의 설교에서도 말세에 대한 종말론적 주제 설교를 했지만 해방 이후 그는 재림을 기대하고 고대하며 살았습니다. 1938년 당시 그의 설교에서 가장 빈번한 주제가 벧전4:7절을 본문으로 하는 “말세를 준비하라”, “말세 준비,” “말세 경영” 등이었는데, 재림신앙은 그 이후의 설교에서도 중시되거나 강조되었습니다. 만물은 마지막이 있다(物有本末)는 신념이었습니다. 이런 점은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되어 조사 받은 신문 기록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1940년 4월 중순 경 행한 그의 설교 “주의 재림과 우리의 고대”는 일경에 의해 문제시되어 주목을 받았던 설교였습니다. 이런 재림에 대한 설교가 신사불참배와 국체변혁을 선동했다고 하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기도 했던 설교였습니다. 해방 후 혼란한 상황에서 손양원 목사는 재림을 고대하고 이를 설교하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연유에서 ‘주님 고대가’가 널리 불려졌고 손양원의 작시라고 잘 못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이 노래를 즐겨 부르며 애창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이 노래의 가사는 애양원교회의 후신인 성산교회 김수남 권사, 혹은 황순덕 전도사가 증언한 바처럼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된 바 있는 전점용 전도사가 하동지역에서 개척 전도자로 일하면서 작시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는 손양원 목사의 재림신앙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지 못합니다. 1.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먹음고/ 내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때 다시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2. 고적하고 쓸쓸한 빈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여놓고/ 다시오마 하신주님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3.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떠도/ 행여나 우리주님 오시는가해/ 머리들고 멀리멀리 바라보는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4. 내주님 자비하신 손을 붙잡고/ 면류관 벗어들고 찬송부르며/ 주님계신 그나라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해방 후 순교하기 까지 손양원 목사님은 재림에 대한 준비, 재림의 때를 준비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순교 신앙은 이 재림 신앙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분명하기 때문에 순교적 삶이 가능하고 순교신앙을 파지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주 예수의 강림(降臨)이 불원(不遠)하니 저 천국을 얻을 자 회개하라”고 외친 것입니다. 해방후 혼탁한 사회와 교계를 보면서 깨어 회개하고 재림을 준비하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그 경고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마무리 뒤돌아 보면 손양원 목사님의 3가지 경고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위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회개하라’는 경고는 우리의 지난날의 행실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고, 두 번째 경고는 오늘의 현실에서 ‘무신론과 유물론에 대한 경고’라고 할 수 있고, 3번째 경고는 내일의 우리의 영생과 소망을 위한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해방 전후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사회적 혼란과 이데올로기의 대립, 교계의 무질서, 그리고 코로나 상황이라는 이름하에 당연시되는 우리의 나태함은 우리의 실상을 노출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현실은 우리는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세상 연락(宴樂)을 구하는 오늘 우리에게 손양원 목사는 다시 경고하고 있습니다. 깨어 기도하고 마음을 돌이켜 거짓된 세상 풍조를 따르지 말고 주의 재림을 사모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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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07
  • [기고]종교단체의 재산도 보호 받아야 한다
    모든 일이 원칙의 기준에서 시작되어야 하고, 공정하고 평등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순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도 누구나 다 같이 공정함과 평등의 혜택을 맛 보아야 하구요. 지금 여러 대형 도시 공간속에서 도시균형발전 미명 아래 도시재개발, 재건축사업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보다 더 좋은 환경을 추구하고, 도시의 미를 새롭게 단장하여 미래의 도시로 나아가는 개발사업은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재개발, 재건축 사업은 내용과 절차가 중요합니다. 지구 사업조합이란 사업단체를 지자체에서 승인하는 절차 중 지구속에 포함되어있는 종교단체(교회) 시설을 배제한 후 사업을 진행하는 상황이 현실적으로 다 반사입니다. 정당한 보상과 재정착 할 수 없도록 강제적으로 진행하다 보니 재산보호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떠나는 실정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속에서 종교(기독교)가 국가나 사회발전에 기여한 내용은 수다하며,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구국적으로 사명을 다 한 일들이 한 두번이 아닌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국가나 지방단체 에서는 기존 지구(지역)속에 있는 종교시설(교회)을 정당한 보상을 해야하고, 개발 사업 계획 수립시 종교부지를 재배치할 수 있는 법령 또는 지방조례를 제정하여 종교단체 재산도 함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많은 도시 재개발사업으로 인해 사회적인 갈등과 많은 피해를 주는 모습은 국민이 주인인 국정과제에 이반되는 부분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부터라도 창조적으로 준비되는 도시속에서 행복하고 안정된 주거환경과 함께 인성적으로 유익함을 주는 종교시설(교회)이 서로 공유하면서 더 밝고 나은 도시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시민의 삶의 질을 보다 폭넓게 넓혀가는 진정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사성결교회 장로 전)부산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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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29
  • [기고]미얀마 사태와 선한사마리아인
    최근 박사 과정 학생 수업 중 한 학생이 우리 기독교인은 미얀마 사태를 보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 글을 작성하게 되었다. 지난 2월 1일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지 80여 일이 된 현재 누적 사망자 738명, 언론인 영화배우 시위 지도자 등 대거 체포로 3152명이 구금되었다고 한다. 체포영장이 발부된 717명은 도피 중이며 그중 일부는 사형선고를 받은 상태다. 심지어 이들의 무차별 총격으로 40명 넘는 어린이와 여성, 임신부 등 수많은 고귀한 여성들이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다. 성경은 한 생명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고 했는데 이런 고귀한 수많은 생명이 총탄에 사라졌다고 하니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들을 우리의 가족으로 생각한다면 도저히 참을 수 없다. 필자도 그 곳에 당장 가서 그들의 아픔을 싸매고 보듬고 싶고 그들과 같이 군부들에게 저항하고 싶은 마음이다. 죽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군부들은 이런 고귀한 생명들이 수없이 잃는다 하더라고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일들을 자행할지 모를 악마적 세력이다. 지옥에서 출장 나온 악마들!!! 언론과 방송에 나타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1980년대의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의 모습이 생각났고 미얀마의 사태가 바로 우리의 모습이요 우리의 아픔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필자는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 영화와 음악과 한류를 사랑하고 태권도 사범이었던 19세 여성이 군경이 발사한 총알에 머리에 맞아 사망하는 순간에도 다른 동료들의 안전을 고려하면서 소리쳤다는 기사를 보고 참 많이 울었다. 그의 희생이 헛되지 않고 미얀마의 민주화의 할 알의 밀알이 되기를 기도하면서 그 날 이후 필자의 모든 수업시간마다 마칠 때 미얀마의 민주화와 복음화를 위해서 기도하게 되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아무것도 없지만 가장 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하는 일이다. 기도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필자는 대한민국의 민주화의 성취는 수많은 민주화를 위해 희생한 분들의 피와 땀도 있었지만 그것을 위해서 기도한 교회와 개인들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기도가 더 절실히 필요한 것은 이런 참극에 유엔과 국제사회는 별다른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이 중국의 외교정책을 봉쇄하기 위해 쿼드(Quad)의 네 나라(미국 일본 호주 인도)의 동맹으로 중국의 남방정책을 가로 막는 가운데 중국이 남방으로 나아가는데 주요한 국가가 미얀마이기 때문에 중국은 미얀마의 군부를 지지하고 미얀마는 중국의 보호를 유지하는 가운데 있기 때문에 국제관계가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국제적 제제조치를 취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남북통일이 인간의 노력으로 최선을 다하지만 우리의 어떤 노력들도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처럼 미얀마의 민주화도 인간의 노력을 최대한 기울여야 하지만 불가능한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유일한 대안이다. 또한 전문가에 의하면 미얀마의 군부가 약 5만에 이르고 무장한 군인들이 시민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때문에 내전으로 치닫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을 바라 볼 수 밖 에 없는 것이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스가랴 4:6). 성령의 능력으로 기도하는 것이 우리가 미얀마를 도울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효과적 대안이다. 특히 주기도문의 기도 내용처럼 악의 세력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도록 더욱이 미얀마에 수 백 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있는데 그들을 악의 세력으로부터 보호받도록 기도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정의의 하나님께서 하박국에서 나오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폭력을 자행하는 군부들에게 임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마을을 짓밟고 성읍마다 쳐들어가 주민들을 무찌른 탓이다. 화를 입으리라”(공동번역 하박국 2장 8~9절). 지금 미얀마 시민들은 누가복음 10장에 나타나는 강도만난 사람들이다. 군사 반군 세력의 강도 떼 들에게 피해를 본 사람들이다. 거의 죽게 된 상황이다.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다. 예수님의 비유처럼 도움을 줄 이웃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웃은 공간적으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도움이 필요하고 그 도움을 채우는 사람이 이웃이다. 그런데 그 비유에 보면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가는 두 부류가 있다. 바로 제사장과 레위인 이다. 왜 피하여 지나갔을까? 너무 바빠서? 일에 중독이 되어서? 나는 그 구절을 볼 때 마다 예수님께서 제사장과 레위인 등 가장 종교적인 사람이 가장 자비와 긍휼이 많아야 할 사람인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의도적 보여주는 예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오늘날 자비와 긍휼을 상실한 교회를 지적하기 위한 예로 볼 수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회자되는 경구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어려움과 고통 속에 거의 죽어가고 있는데 그들에 대해 지연된 자비와 긍휼은 자비와 긍휼이 아닌 것처럼. 주님께서는 형식적인 경건과 종교를 가장 미워하시고 싫어하신다. 회칠한 무덤이라고 비판하시고 책망하신다. 대신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을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약 1:27)는 것으로 여기셨다. 최근 저가 봉사했던 교회 청년회 회장이 이 멜로 연락이 왔다. 내용은 청년들이 선한 곳에 사용하기 위해서 헌금을 모았는데 어디에 사용하면 좋겠는지 자문을 구한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미얀마 사태로 수많은 미얀마 시민들이 목숨을 잃고 희생되던 시기라 그 돈을 미얀마 민주화를 위해서 사용하면 좋겠다고 제안했더니 청년회 회장이 회원들과 의논한 뒤 답을 주겠다고 하면서 답이 왔는데 그 재정을 미얀마 민주화를 위해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고 해서 그 재정을 미얀마 민주화 시위 단체에게 전달하게 되었다. 정말 이 시대에 멋진 쿨 한 젊은 그리스도인들이다. 저가 몸담고 있는 기독교 윤리실천운동본부도 성명서를 발표하고 재정을 모아서 미얀마 민주화 시위에 재정을 보냈고 많은 회원들이 참여하였는데 참여회원들이 더 많이 발생하여 2차 까지 재정을 모아 보내기도 했다. 부산 YMCA도 함께 참여하고 수많은 기독교회들이 참여하고 재정을 보내고 성명서를 발표하고 있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부산 CBS가 주최하여 양문교회(사상구 소재 강동현 담임목사)에서 미얀마를 위한 기도회를 가졌다. 그 기도회에 필자와 함께 참석한 고신대 재학 중 미얀마 학생에 의하면 한국 젊은이들과 시민사회와 교회의 성도들이 미얀마를 위해 기도하고 성금을 보내주고 응원해 주는데 미얀마 사람들이 감격해하고 힘과 용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바로 이런 분들이 오늘의 미얀마에서 강도만난 사람들을 돕는 선한 사마리아 인들이다. 대한민국은 일제의 참혹한 지배와 군사독재의 엄혹한 시련을 극복하고 복음화와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나라이다. 이제는 명실상부한 도덕성에서 탁월한 선진화와 세계화의 가장 모범적인 국가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복음화 산업화 민주화 선진화의 수출국가가 되기를 바란다. 특히 아시아와 중동과 아프리카와 제 삼 세계를 위해. 1980년 학살을 겪은 광주시민들은 쿠데타에 반대하고 미얀마 인들의 민주주의 시위를 지지하는 ‘미얀마 광주연대’를 만들어 주말마다 집회를 열고 시인들은 시를 써 읊고 있다고 한다. 우리 부산도 미얀마의 복음화와 민주화를 위해 공존과 연대의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서 정기적으로 모여서 기도하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삶을 실천하자.
    • 기고/강연
    • 기고
    2021-04-26
  • (기고)고신 드디어 기준을 세우다! (2)
    열두번 세 번 사건이 발생한지 1년도 넘었습니다. 기독교보에 이를 언급한 시론도 썼습니다. 정근두목사님의 반론을 읽고 그에 대해 재반론도 썼습니다. 총회장에게 드리는 질의서에 동참도 했습니다. 이제 두 번째 관전평으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1편에 이어) 결론은 버킹돈 이번 열두번 세 번 사건의 결론은 25억원입니다!! 이로써 그동안 교계에 알려진 자조적인 불문율이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사고치고 버틸수록 돈 많이 받는다!” 이번에는 회수 작은 것 열두 번, 큰 것 세 번, 기간 1년, 금액 25억입니다. 여기에 교세도 고려되었습니다. 교세, 기간, 횟수 등을 가지고 금액이 산정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수치화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를 토대로 앞으로 기준표를 만들어야 합니다. 유사한 문제가 발생하면 이 기준표를 활용해서 화해조정도 빨리 진행할 수 있습니다. 총회 산하 교회들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가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목사 살리기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을 겁니다. 참 합의안에는 경지에 달한 유머 스킬도 보이더군요. 딱딱한 일을 하면서 그런 부분까지 신경을 쓰다니 과연 대단하다 싶었습니다. “합의안은 총회재판국의 선고와 같은 법적인 효력이 있음을 상호 인정한다.” 이 부분 읽다가 저 혼자서 빵 터져버렸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번에 재판국은 재판 하나마나한 기관으로 전락했습니다. 재판 다시 해라고 하면 다시 하는 기관이 되었습니다. 요즘 세상 정치권이 간절히 원하는 그런 재판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위치에 위원회를 갖다 놓았습니다. 그런 힘없는 재판국과 동급으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위원회! 절묘하지 않습니까? 그 정도의 실력과 유머를 갖추고 있으니 면직을 역전시켜 25억으로 만든 거죠. 그리고 역시 결론은 버킹돈입니다! 고신 드디어 기준을 세우다 드디어 고신이 새로운 역사를 썼습니다. 글의 제목처럼 되었습니다. “고신 드디어 기준을 세우다!” 제목을 조금 바꿔도 말이 될 것 같습니다. “고신 드디어 기록을 세우다!” 뉴노멀의 시대에 뉴노멀을 만든 겁니다. 이제 고신 목사들의 행동반경은 파격적으로 자유로워졌습니다. 뉴노멀에 의하면 예닐곱번 정도의 목사와 여성의 밀회는 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독신 여성의 집에 혼자 들어가는 것도 한 두번까지는 봐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현직 총회장들과 교단의 지도자들이 교단 목사님들에게 드리는 코로나 시대의 선물입니다. 와우, 후배들이 그 덕을 톡톡히 보겠습니다! 그래도 위험은 있습니다. 과정의 공정을 외치면서 감동을 준 대통령도 부도내는 세상이니 고신도 부도의 우려는 있지 않겠습니까. 교회의 생명은 거룩이라면서 방침을 갑자기 휙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눈치껏 자유를 누려야 할 겁니다. 자기가 성골이나 진골 등에 속해 있는지도 미리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게 타 교단 목사로 있는 친구가 있습니다. 가끔 만나면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그 교단만 회개하면 한국교회는 깨끗해져.” 이제는 우리가 그 교단을 추월해버렸습니다. 그 친구 만나면 이렇게 말해줄 참입니다. “김목사, 미안하다. 너그한테 배웠는데 우리가 너그 추월했다! 이해해라. 청출어람 청어람 아이가.” 빈이형 교회가 왜 이래? 권력자들은 사법부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법관 탄핵을 외칩니다. 그들이 이번에 고신을 보았다면 부러워하고 존경할 겁니다. 앞으로 정치는 목사들에게 배워야겠다고 고개 숙일 겁니다. 총회장이 판결 선고 보류하는 것도 배웠고 시간 끌어서 재판부원 바꿔서 재판 다시 시키는 것도 보면서 탄복했을 겁니다. 후임 총회장들에게도 좋은 모본이 생겼습니다. 이러는 동안 세상 정치와 공통적인 원칙도 보여줬습니다. “우리 편이 정의”라는 것 말입니다. 고신 신앙의 핵심은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이라고 합니다. 뭐, 말이 그렇다는 거니까 의미는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이번에 그 허구성이 드러났으니까요. 나훈아씨의 질문이 자꾸 떠오릅니다.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저는 칼빈 선생님께 묻고 싶습니다. “빈이 형, 교회가 왜 이래?” 고신의 설립자이신 한상동목사님은 초량교회에서 빈손으로 훌쩍 떠나셨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그 배짱은 어디서 나온 건지 궁금합니다. 그래서 질문을 드려봅니다. “동이 형님, 고신이 왜 이래요?” 신학생들을 형님이라고 부르시던 한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하실 것 같습니다. “아이고, 형님들, 다 알면서 왜 그래?” 네, 다 알기에 마음이 서글픕니다. (完)
    • 기고/강연
    • 기고
    2021-04-20
  • (기고)고신 드디어 기준을 세우다! (1)
    열두번 세 번 사건이 발생한지 1년도 넘었습니다. 저는 기독교보에 이를 언급한 시론도 썼습니다. 정근두목사님의 반론을 읽고 거기 대한 재반론도 썼습니다. 총회장에게 드리는 질의서에 동참도 했습니다. 이제 간단한 관전평과 함께 파일을 닫으려 합니다. 목사 면직과 목사 구하기 이 글을 쓰면서 약간은 슬프고 약간은 좌절감도 느낍니다. 하지만 크게 실망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전적타락을 믿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본성에서 비껴날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열두번 세 번 사건도 그렇습니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전개된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크게 충격받을 건 없습니다. 그래도 이 사건을 깊이 아는 어느 장로님께 생각을 물었더니 즉시 대답했습니다. “당연히 목사 면직이지요. 지금 하는 건 목사 구하기 아닙니까.” 참고로 제가 보기에 그 장로님은 법 없어도 살 분입니다. 남에 대해 나쁜 소리 할 줄도 모르는 분입니다. 그런 분의 입에서 그런 매정한 말이 툭 튀어나왔습니다. 맞습니다. 면직이 정답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어디 정답대로 되던가요. 오답을 정답이라고 우기는 게 세상사 아닌가요. 말만 잘하면 진실도 가짜로 둔갑되고 가짜도 진실로 바뀌는 세상 아닌가요. 줄만 잘 서면, 아니 줄만 잘 잡으면 되는 세상 아닌가요. 그런 세상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교회도 그 속에 놓여 있습니다. 고신도 힘을 다해 세상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뭐 특별한 기대를 가지지 않는 게 속 편합니다. 이 사건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습니다. 원로목사가 어떻게 개입을 했고, 부목사는 어떤 일을 했고, 장로들은 어떻게 나누어졌고, 교단의 누구누구는 이렇게 말하고, 재판 절차에 이런 문제가 있고.. 다들 일가견 있는 말들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주변 사안들이 열두번 세 번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원로목사가 그런 짓 하라고 부추겼는지. 아니면 방치를 했으니 잘못한 건지. 부목사가 좋지 않은 자료 폭로했으니 나쁜 건지. 장로들이 비협조적이라서 그런 짓을 한 건지.. 어쨌든 다른 문제들을 전면에 배치시키려고 무던 애를 썼습니다. 초점을 다른 데로 돌려서 열두번 세 번 사건이 묻히게 하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본질 흐리기 그걸 보면서 떠오르는 일이 있습니다. 옛날 살기 힘겨웠던 시절, 어머니들 간에 빌린 돈 때문에 많이들 싸우셨습니다. 돈 내놓으라. 언제 안 준다 하더냐? 왜 약속한 날 주지 않냐?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곧 준다고 하지 않느냐? 준다 해놓고 안 주니까 이러지. 그러다가 언성이 올라갑니다. 채권자의 입에서 험한 소리라도 한 마디 나오면 채무자는 왜 욕하냐고 소리 지릅니다. 내가 언제 욕했냐고 대답합니다. 채무자는 계속해서 욕을 왜 하느냐고 소리 지릅니다. 빚을 욕으로 바꿔치기합니다. 초점을 바꾸는데 성공합니다. 본질 흐리기에 성공합니다. 빚진 어머니는 힘든 순간을 그렇게 넘어갑니다. 그건 안타까운 시대에 생존을 위한 기본 전술이었습니다. 지금 세상의 본질 흐리기는 사악한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상대방을 매장시키는데 활용됩니다. 특히 선거철에 많이 등장합니다. 유권자들이 자주 속아 넘어가는 효과적인 전략입니다. 예를 들어 SNS를 활용해서 상대방의 약점을 과대하게 비비 꼬아서 뿌려댑니다. 계속 약을 올리다 보면 상대방이 미끼를 덥석 뭅니다. 그러면 대어가 낚이기도 합니다. 물론 요즘은 상대방도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선수는 선수끼리 어울리니까요. 그래도 상대방의 “손님 실수”를 바라면서 줄기차게 물고 늘어집니다. 본질 아닌 것을 중심으로 열심히 싸워댑니다. TV 토론에서 무슨 고상한 정책을 말했는지는 기억에 남지도 않습니다. 생태탕인지 생떼탕인지에 대한 비웃음만 남습니다. 이번에는 서울 부산 유권자들이 속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매번 속기만 하는 건 아닌 모양입니다. 그래도 다음 선거 때도 똑같은 방식으로 서로 싸우겠죠. 그게 칼빈주의 전적타락 교리와도 맞아떨어지는 거겠죠. 어쨌든 정치가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그 장로님 말씀처럼 목사 구하기에 성공했습니다. 기본 전술인 본질 흐리기가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사소한 문제를 큰일처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게 한몫 단단히 했습니다. 치우친 법리 지식도 효과적으로 보탬이 되었습니다. 이제 내친김에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화해조정에서 과거사위원회로 열두 번 세 번 사건의 본질은 담임목사와 여전도사의 새벽 인적이 뜸한 시간에 지하주차장의 승용차안에서 은밀한 만남 열두 번, 부인이 집을 비운 주간에 미혼인 여전도사집 안에서 일대일의 만남 세 번입니다. 아 물론 그게 정확한 숫자는 아닙니다. 들킨 게 그 숫자입니다. 어쨌든 이 은밀한 만남 외의 모든 사안들은 곁가지일 뿐입니다. 열두번 세 번 사건이 터지지 않았으면 언급도 되지 않았을 일들입니다. 그러나 곁가지를 열심히 흔들어서 화해조정위원회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위원회를 만들어서 재판국 결정을 무력화시키고, 다시 재판하게 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이것은 고신의 신기원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이런 류의 사건이 일어나면 담임목사는 즉시 사임 또는 면직 처리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총회장을 비롯해서 교단 지도자들이 대거 활약함으로써 지금까지와는 다른 선례를 창조해내었습니다. 다른 어떤 교단보다 탁월한 모습을 선보였습니다. 이제 과제가 한 가지 생겼습니다. 열두번 세 번보다는 훨씬 미미한데 돈은커녕 시벌만 받은 목사들도 상당수 있습니다. 그분들은 이번의 진취적인 전개와 결정들을 보면서 내심 부러워할 겁니다. 재심도 별로 어렵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의 권리를 되찾아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분들도 돈을 받아서 교회를 개척할 기회를 드려야 공정합니다. 그래야 열두번 세 번에 못 미치는데 사임한 분들의 억울함도 사라질 겁니다. 그런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그분들은 자기들의 정치 능력 부재와 뒷배경 없음을 한탄하면서 땅을 치지 않겠습니까? 고신이 그렇게 불공평하면 안 되겠죠. 이번에 교단의 발전적 조치를 이루어내신 분들이라면 그 정도는 고려해주셔야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를 위해 과거사위원회를 만드시라고 요청드립니다. 과거사위원회와 화해조정위원회가 앞장서서 “목사 구하기”에 지속적인 결실을 맺으면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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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14
  • [기고] 교회사 이야기 - 은성교회
    한양교회와 남부민교회가 하나의 교회, 은성교회로 통합이 되었고 이 교회에 저 유명한 최상식(崔相湜) 목사가 새 담임목사로 부임을 해온 것은 1974년 8월 11일이었다. 그가 교회의 조원경 장로를 통해 청빙을 받아 담임목사로 부산 은성교회로 부임을 해왔던 당시의 나이는 48세였다. 당시 최상식 목사는 삼각산에서 100일 금식 기도를 한 후여서 그랬는지 영적으로 성령이 충만하였고 변화된 사람으로 말씀에 은혜와 능력이 넘쳐 있었다. 최상식 목사가 부임을 하자 교회에는 새로운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새 당회장의 부임과 함께 교회는 각부 부장의 개편이 있었고 그해 말에는 당회원의 책임분담도 새롭게 되었다. 재정부장에 이건호 장로, 관리부장에 조원경 장로, 교육부장에 박근성 장로, 전도부장에 도환호 장로를 임명했다. 그러나 최상식 목사가 하나의 교회로 통합이 되었다는 은성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을 했으나 교회는 진정으로 하나가 되지 못한 못한 것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에서 새롭게 출발을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거듭하게 되었다. 최상식 목사가 은성교회로 부임을 한 후의 첫 번째의 기도 제목은 우선 교회건축이었다. 낡은 것은 지나갔고 새롭게 되는 일 만이 그의 가슴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옛 남부민교회의 건물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현재의 교회당이 비좁기는 했지만 진정으로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그 자리에서라도 새롭게 성전을 건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새 성전 건축과 함께 은성교회의 힘은 하나의 교회로 집약이 될 것이고 아름다운 성전의 완성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전할 수가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해가 바뀐 1975년 1월, 최상식 목사는 새해의 표어를 전도하는 해, 교육하는 교회, 봉사하는 성도로 정하고 열심히 가르쳤다. 당회에서는 새 성전 건축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하여 이미 동의를 얻었다. 마침내 1월 26일에는 건축 기성회를 조직하고 2월 2일에 교회 앞에 발표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최상식 목사가 부임을 하자말자 새 성전을 짓게 된 배경에는 모든 성도들의 단합된 힘이 그 원동력이 되었다. 그것은 최상식 목사의 목회가그냥 형식적이며 말로만 하는 목회가 아닌 뜨거운 가슴으로 하는 목회가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교인들을 사랑하되 진정 그 영혼을 사랑하였고 인간을 사랑하였다. 그렇다면 그가 얼마나 교인들을 사랑하였는지 그 실례를 들어보기로 한다. 어느 날 이건호 장로의 부인 김순옥 권사가 어깨 쪽에 난 종기가 덧나서 심한 고통을 겪고 있을 때였다. 구역 식구들과 함께 심장을 간 최상식 목사는 그 종기를 직접 손으로 짜주었는가 하면 급기야는 입으로 고름을 다 빨아내어 그 상처를 낫게 해주었던 것이다. 이 소문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뿐 만 아니었다. 청년들과 함께 야유회를 갔을 때의 일이었다. 청년 가운데 장원삼 집사가 그만 뱁에 물려서 위급한 지경에 처하였을 때 그 현장에 있었던 최상식 목사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직접 입으로 그 독을 빨아내어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병원에 입원 치료를 하게 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교인이든 교인이 아니든 이웃에 초상이 나면 언제나 제일 먼저 달려가서 시신에 염을 하는 등 어려운 이웃과 함께 했던 것이다. 언제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교인들을 사랑했던 최상식 목사는 교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목회를 했던 참으로 보기 드문 목회를 한 참으로 보기 드문 목회자였다. 최상식 목사가 주도했던 성전건축이 완성이 된 것은 1979년 8월 31일이었다. 이렇게 새 성전을 건축하고 부흥과 발전을 거듭했던 교회에서 최상식 목사가 돌연 사의를 표명했던 것이다. 그가 교회에 사의를 표한 것은 잘못된 호적 때문에 나이가 정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목사 정년 70세가 원래의 나이보다 6년이나 앞당겨졌기 때문이다. 최목사가 떠나는 김해공항에는 믿지 않는 동네 사람들이 전송을 나왔던 것을 보면 그는 과연 이 시대에 보기 드문 목회자였음을 알 수가 있다. 교회가 합동이 된 후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산적한 교회에서 오직 겸손과 섬기는 자세로 일관되게 목회를 해왔던 그는 1991년 18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남은 여생을 다른 사역지에서 그 사명을 더하기 위해 은성교회를 떠났던 것이다.
    • 기고/강연
    • 기고
    2021-03-05
  • [독자투고] 교회사 이야기-봉화제일교회
    1919년에 창립된 경북 봉화의 봉화제일교회는 2년 전인 2019년에 100년을 맞아 역사적인 봉화제일교회100년사를 발행하게 되었다. 이 교회의 담임 권정호(權正鎬) 목사가 제26대 담임목사로 교회에 부임을 한 것은 1993년 3월 28일이었다. 역사의 교회에 담임으로 부임을 한 그는 앞으로 26년 후인 2019년이 되면 100년이 된다는 사실을 미리부터 인식하고 부임을 한 그때부터 100년사를 발행할 꿈을 품은 채 목회를 시작했다고 한다. 교회가 걸어온 100년의 역사 가운데 크고 작은 일들이 허다하게 많았지만 해방 후였던 1948년 9월에 있었던 제13대 박기환 목사의 죽음에서 비롯 되었던 그 사건은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가슴에 긴 여운으로 남아 있기에 ‘교회사 이야기’에 가장 먼저 소개를 하게 된 것이다. 박기환 목사의 그 사건은 1948년 9월에 있었던 일이었다. 제45회 경안노회가 경북 영덕군 영덕읍교회에서 열렸을 때였다. 노회에 참석을 했던 목사와 장로 총대들이 노회를 끝낸 이튿 날은 영덕에서 20여리 떨어져 있는 강구 바다에서 뱃놀이를 하기로 했던 것이다. 40여명의 노회원들이 큰 어선을 빌려 타고 강구 포구를 벗어나 강구의 등대 밖으로 나갈 때 까지는 꽤 기분이 좋았으나 뱃놀이를 하던 중에 갑자기 풍랑이 일어나 그만 노회원들이 타고 있었던 어선이 전복이 되고 말았다. 그들 중에 헤엄을 잘 쳤던 몇 사람은 등대까지 헤엄을 쳐가서 겨우 목숨은 건졌으나 대부분의 노회원들은 모두 익사를 하고 말았으니 강구 앞바다에서의 노회원들 익사 사건은 참으로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참 이상한 일이었다. 봉화제일교회100년사를 집필한 집필자는 당시 강구 국민학교 3학년으로 강구교회 주일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여서 교회의 전도사님을 따라다니며 그 현장을 모두 목격할 수가 있었다. 강구 부두가에 즐비하게 누어있던 그 시신들은 보는 일은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강구교회 김전도사님은 수레에다 밥과 국, 그리고 주전자에 식수를 싣고 가서 몰려 온 유가족들에게 일일이 대접을 하였는데 필자는 친구들과 함께 전도사님을 따라 다니며 심부름을 했던 것이다. 강구 부둣가에 몰려온 구경꾼들은 불행하게 죽은 이들을 향해 이런저런 말로 비방을 하고 있었다. “예수쟁이들이 죽으면 천당에 가야 하는데 이 사람들은 모두 용궁에 갔구먼.” 그 말을 들은 우리는 전도사님에게 그 말뜻이 무어냐고 물었지만 전도사님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나중에 알려 줄게 하면서 그런 말은 잊어버리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 강구 앞바다에서 희생되었던 사람들 중에 봉화제일교회 제13대 담임 박기환 목사와 그해 3월에 봉화제일교회를 사임하고 떠나갔던 제12대 장재석 목사도 함께 시신이 되어 부둣가에 누어 있었으니 당시의 심오했던 역사의 감추어진 뜻이 무엇인지 우리는 일 수가 없다. 그 박기환 목사의 불우한 소식이 본시 성내교회라고 불렸던 봉화제일교회로 들려왔던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 후였다. 이 소식을 들은 교회는 약간의 돈을 준비해서 당시 남선교회 회장이었던 박영식 집사를 먼저 강구로 내려 보냈던 것이다. 교회를 대표해서 박 집사가 강구로 왔으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박기환 목사의 아들이 서울에 있는 모 대학의 의과대학에 다니고 있었으나 연락을 할 길이 없었다. 이튿 날은 강구에 장이 서는 날이니 하룻밤을 자고 장에 가서 우선 광목 한필과 관(棺)을 구입을 해서 시신부터 수습을 하였다. 그 때가 6,25 전이었으니 트럭을 대절하려고 했지만 엄청난 돈이 있어야 했으니 박집사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박집사는 지게를 하나 구입을 하여 지게로 그 관을 나르기로 했던 것이다. 그 때가 9월 중순, 아직 여름의 더위가 가시지 않은 때여서 시신을 넣은 관에서는 역한 냄새가 났다. 그해 4월에 교회로 부임을 해와서 불과 5개월 남짓 담임목사로 교회에 시무를 했던 박기환 목사의 시신을 그대로 외지에다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강구면 사무소를 통해 봉화군청에 전화를 해서 교회의 청년 한사람을 강구로 와 달라는 부탁을 하자 시외버스를 타고 청년 회장이 강구로 와서 이튿날 두 사람이 번갈아서 지게에다 관을 지고 박 목사의 시신을 옮겼다. 강구에서 금호들을 거쳐 영덕과 지품, 영해, 창수를 거쳐 안동으로 갔고 해가 지면 남은 광목을 몸에 두르고 노숙을 하며 영주를 지나 봉화에 도착을 해서 삼일 되는 날 봉화제일교회당에 우선 시신을 안장하고 장례식을 거행했다. 이 갸륵한 소문이 좁은 동네 봉화군 일대에 두루퍼지자 동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교회를 향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의 정성이 저렇게 지극할 수가 있는가? 자기 교회의 담임목사를 외지에 묻어버리지 아니하고 지게에 짊어지고 280여리의 길을 걸어 지극정성으로 교회로 모셔왔으니 그 정성이 정말 대단해!” 박기환 목사의 유해는 봉화군의 석평 2리 유록골에 안장시켰으며 그 박영식 집사는 평생동안 그의 무덤에 벌초를 했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교회는 전에 없었던 부흥을 이루게 되었다. 교회의 남선교회와 여전도회, 그리고 청년회는 깨어서 기도하며 새벽에도 모이고 저녁에도 모이며 열심히 기도하기를 게을리 않더니 얼마 안되어 교인의 수가 일시에 배나 늘어나게 되었다. 그 때 교회의 모든 교우들은 하나가 되었고 함께 뭉쳐 서로 도우면서 그 어려운 때를 믿음으로 승리했다.
    • 기고/강연
    • 기고
    2021-03-05
  • [기고] 현장 점검 공무원을 VIP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지 않을까?
    코로나 19를 보도하는 세상 언론의 편향된 모습에 마음이 너무 불편하다. 이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신경 끄려 했는데 요즘은 더욱더 심해지는 것 같다. 코로나 19에 조금이라도 교회가 관계있으면 ‘교회발 확진자’라 해서 자극적인 기사를 마구 쏟아낸다. 이로 인해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와 교회를 향해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비난을 배설하다시피 한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어떤가? 교회는 말할 것 없고, 국가 역시 하나님이 위임하신 통치권이 있는 곳이다. 특별히 그들에게는 공권력이라는 칼이 있고, 그래서 기독교인은 정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세상 정부에 복종해야 한다(롬 13:1-7). 그런데,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교회와 국가가 크게 갈등하고 있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닌 것 같다. 그러다보니 교회 점검인지 단속인지 주일마다 많은 공무원들이 교회로 온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끊임없이 문자가 날라 오고, 전화로 방역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이 온다. 지자체에 따라서는 아주 우호적으로 이 문제를 대처하기도 하지만, 어떤 지자체에서는 아주 강압적인 방법까지 사용된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이로 인해 평소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관과 교회의 관계가 악화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교회에 온 공무원들은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와 교회의 법을 존중해야 한다. 법의 집행자이지만 그렇다고 점령군은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를 방문할 때 존중하는 자세로 와서 교회의 협조를 구해야 한다. 그런데, 이들 중 일부의 경우이겠지만 무례하고 위협적인 말로 안 그래도 울고 싶은 교회의 분노를 자아낸다. 공권력은 힘을 가졌다고 함부로 쓰는 칼이 아니다. 그렇다고 요즘 일부 교회와 기독교 기관들의 일탈 행위 역시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 방역을 무시하여 대규모 확진자가 나온 일부 교회들, BTJ 열방센터, 대전 IEM국제학교, 광주 TCS국제학교로 인해 기독교 전체가 욕을 먹고 있다. 물론 이들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기관의 비상식적 운영과 지도자들이 내뱉은 말들은 교회 내에서 사용하는 ‘기독교 용어’였고, 이로 인해 한국 기독교 전체가 욕을 먹고 있다. 이렇게 해서는 코로나 19 이후 어떻게 이 민족 가운데 복음을 전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최근 교회 사무간사가 구청에서 전화가 왔다고 말했다. 코로나 사태 중 우리 교회가 정부의 방역에 잘 협조해줘서 고맙다고 하면서 계속 정부의 방역지침을 잘 지켜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시청의 담당 국장이 교회를 방문하여 협조를 구했다. 이번 주 혹시 우리 교회에도 점검이 나올지 모르겠다. 솔직히 이런 일을 당하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나의 불편한 생각을 잠시 접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전도가 정말 안 되는데, 이렇게라도 찾아오는 공무원들이 혹시 하나님이 보내시는 VIP가 아닌가?’, ‘비어 있는 자리에 한 명이라도 더 앉게 해서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기회로 삼으면 안 될까?’ 너무 발칙하고 허황된 생각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새벽 시간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 중 이런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든다. 교회에 오는 공무원들이야 위에서 명령을 받아 온 것이고, 이 분들로서는 지난 1년 동안 주일에도 쉬지 못하고 교회에 일하러(?) 온다면 결코 기분이 좋을 리 없지 않는가? 이들 중에는 분명 기독교인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공무원들은 이런 일이 아니었으면 교회를 한 번도 방문해보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분들이야 말로 VIP가 아닌가? 매년 교회가 VIP초청잔치를 위해 많은 예산을 들이는데, 찾아온 조금은 ‘불편한 VIP’를 주님의 마음으로 영접하면 어떨까? 상냥하게 맞이하고, 친절하게 안내하며, 음료를 제공하고, 갈 때는 교회가 준비한 선물을 안겨주면 안 될까? 혹시 적대적인 마음으로 온 사람이라도 교회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간다면 결국 이들이 다음에 VIP로 교회에 오지 않을까? 우리 주님께서는 수가 성의 사마리아 여자를 구원하기 위해 당시 모든 유대인들이 배척하고, 피한 사마리아 땅으로 가셨다(요 4장). 사마리아 여자라는, 이미 5명의 남편이 있었고 지금 또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여인까지도 우리 주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 복음이다. 이것이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품는 것이 바로 생명의 도라 불리는 기독교의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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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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