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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 교양 읽기37] 기독교문화의 풍성한 발전이 곧, 복음 전파의 지름길이다
    문화로 읽는 십계명 요즘 기독교인들은 십계명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구태의연한 옛날 이스라엘의 법규로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은 십계명을 현대적 의미로써 풀이한다. 문화의 옷을 입혀 보여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문화현상으로만 이야기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어차피 본질적인 부분에서는 신학적인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종교는 문화의 옷을 입고 나타나므로, 십계명을 기독교문화로 표현해낼 수 있다’고 전제한다. 그래서일까, 십계명을 문자 그대로가 아닌, 현재 우리의 삶과 환경에서 확장하여 해석한다. 또한 그의 그림에 관한 지식을 보여주듯, 곳곳에서 다양한 명화를 꺼내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괜찮은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신학적인 문제를 문화로 설명하려고 하니, 가끔 부대끼는 곳이 툭툭 튀어나와 앞뒤 맥락을 연결하며 읽어야 하는 부분도 있다. 그래도 십계명을 문화적으로 해석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설명하고자 한 시도만큼은 충분히 흥미를 끌만하다. 이 책은 저자가 2015년에 《월간고신 생명나무》에 연재했던 글을 정리하고 다듬어서 펴낸 것이다. 당시 《월간고신 생명나무》에서는 한 해 전체를 십계명 특집으로 배정하고, ‘원문으로 읽는 십계명’ ‘문화로 읽는 십계명’ 등 다섯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 《십계명, 문화를 입다》 || 저자 안재경 목사는 고려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경기도 남양주의 온생명교회 담임으로 시무하면서 웹진 〈개혁정론〉의 운영위원 및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고흐의 하나님》 《렘브란트의 하나님》 등이 있다. SFC, 2017. 10,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데칼로그-십계명,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김지찬 / 생명의말씀사 《삶의 목적과 의미》 / 마이클 호튼 / 부흥과개혁사 《오래된 새 길》 / 김기석 / 포이에마 기독교문화의 풍성한 발전이 곧, 복음 전파의 지름길이다 ▌좌담: 김길구, 김수성 경성대 초빙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 십계명은 오늘 우리의 무분별한 문화에 비춰 새롭게 인식해야 할 중요한 규범이라 할 수 있다. [그림은 마르크 샤갈이 그린 ‘Moses Beholds All the Work’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십계명을 케케묵은 옛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라, 하지 말라’는 요구 또는 명령들의 모음집이라고 생각합니다. … 사람이 이룬 모든 것을 문화라고 한다면, 사람은 어느 누구도 문화를 피하거나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세상 문화로 말미암는 십계명에 관한 왜곡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은 문화로 인해 왜곡된 십계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결국 믿음까지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서문’ 중에서] 독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십계명 김길구 오늘날 우리 한국 기독교계가 고민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로 기독교문화의 침체 또는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야기할 이 책은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문화를 다시 한 번 고민하게 하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현호 우리나라에도 다양한 기독교 예술단체가 설립되어 나름대로 열심히 활동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라는 카테고리를 넘어 일반인들에게까지 어필하거나 그들과 공유할 수 있는 작품 활동은 부족한 것도 사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수성 저자는 십계명 하나하나를 이야기하면서 대체로 독자에게 익숙한 그림을 먼저 끄집어내 소개합니다. 서문에서는 고갱의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누구며 어디로 가는가?〉를, 제1계명에서는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를, 제6계명에서는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제시하였습니다. 김길구 계명을 이야기하기 위한 예시로서 그림 등 유명한 작품을 먼저 소개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흔히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하는데, 현대인들에게 다소 멀게만 느껴지는 십계명의 의미를 우선 그림을 통해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 같습니다. 사실 저자는 그림과 관련된 책을 저술하기도 한 분이죠. 김현호 십계명을 현재 우리 사회의 현상과 비교하면서 설명한 것도 관심을 끄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단적인 예로 제3계명을 이야기하면서 오늘날 우리 교회에 제대로 된 ‘고백문화’를 만들어 가야함을 역설합니다. 그리고 제1계명에 ‘신들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제3계명에 ‘하나님의 이름을 찾아주세요’ 같이 친근한 제목을 붙인 것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타 종교에 비해 상당히 윤리적인 규범 김길구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볼까요. 사실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문화는 장르 간에 균형이 깨지게 됩니다. 특히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말씀을 내세움으로써 문자적인 면에서는 지속적으로 발전하였지만, 조각이나 회화 쪽은 상당히 침체일로를 걷습니다. 김현호 초대교회 이후 계속 논란은 있었지만,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성상을 일반화하였지요. 특히 문맹자가 많은 현실에서 그림이나 조각으로 이들에게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한다는 의도가 크게 작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이콘(icon)이 크게 발달하였죠. 김길구 루터와 츠빙글리,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은 성상을 강력하게 반대하였습니다. 루터는 이것이 ‘우상 숭배를 조장하는 행위’라며 ‘예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한다. 말씀은 우리에게 빛과 지침을 제공’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렇기에 기독교는 ‘책의 종교’로서 발전해 왔습니다. 이에 따라 기독교 미술은 상상력을 풍부하게 발휘하지 못하고, 성경 말씀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데 그칩니다. 김수성 기독교가 말씀 중심으로 발전해왔다면, 십계명 역시 과소평가할 수 없는 의미를 가진 규범으로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십계명은 당시 인근 지역의 다른 신들에 대한 예배 행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윤리적인 생활규범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처음에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고 선포한 것부터 그러합니다. 김길구 당시 다른 신들에 대한 예배에서는 인신공양이나 신전 창녀들과의 결혼예식 등이 횡행했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이스라엘민족에 대해서 ‘살인하지 못 한다’ ‘간음하지 못 한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인명존중사상을 고취하고, 예배를 빙자한 난혼(亂婚)을 경계하라고 한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앞선 윤리의식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현호 오늘날에도 십계명은 우리 믿음의 나침반으로 역할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항상 이리저리 흔들리지만, 십계명은 나침반과 같이 결국 우리가 나아갈 바를 바르게 가리켜줍니다. 광야에서 헤매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올바로 살아가는 방법을 보여주었던 것과 같이. 김수성 십계명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궁극적으로 해방과 평등공동체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규범이라고 지적하는 분도 있습니다. 김길구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들에게 하나님은 참인간다운 삶을 누리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은 이집트 종살이에서는 꿈도 꾸지 못했던 달콤한 휴식의 시간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족간의 유대를 돈독히 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김현호 그런데 주 5일 근무가 일반화된 오늘날의 현대인에게도 안식일은 찾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생산성 향상에 내몰린 현대인, 오로지 발전만을 추구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쉬는 것이 사치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조금 더 깊게 다뤘으면 하는 아쉬움도 김수성 디지털 네트워크가 우리의 안식을 빼앗아 가버렸죠. 쉴 사이 없이 울려대는 벨 소리와 문자 소리, 여기에 더하여 소셜 미디어(SNS)가 더해져 스스로 24시간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책에서도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언급하기는 했지만, 아주 가볍게 터치하고 지나쳐버렸습니다. 김길구 이 책이 철학적이고 사회적인 현상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다루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문화만 입힐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를 좀 더 깊이 있게 분석하면서 십계명 본래의 의미를 되새겼으면 참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입니다. 단적인 예로, 제8계명 ‘도둑 아닌 사람이 없다’에서 앤디 워홀의 〈마르린 먼로〉 작품을 인용하면서 천박한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가짜 복제에 대한 부분만 강조했습니다. 대중이 그에게 환호하는 이미지의 대중화, 과거 소수 특권층의 소유에 대한 표현의 보편화와 같은 의미는 간과하였습니다. 또한 미술사의 교과서라는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서론은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기독교문화를 논하기에 앞서 인용된 사진 11컷 전부가 저명한 서양예술인의 작품인데, 성경을 소재로 한 것은 3건에 불과합니다.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현호 신학적 의미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한계 때문이 아닐까요. 또한 잡지에 ‘문화로 읽는 십계명’이라는 타이틀로 연재해야 하는 한계도 작용했을 것이고요. 김수성 어쨌든 십계명에 문화의 옷을 입히는 시도는 바람직하다고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갈수록 빈약해져가는 기독교문화의 토양에 대해 우리 모두의 관심을 촉구한 저작이라 생각합니다. 김길구 저자가 지적했듯이 현대는 이미지라는 우상이 지배하는 사회로 급변하고 있습니다. 주체성이 부족한 사람은 아예 이미지를 숭배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회에서 기독교가 나가야 할 길은 기독교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발전시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음에는 김영봉 목사의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IVP, 2016)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정리: 김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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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4-23
  • [문화] 남자, 아내 그리고 아버지
    “나는 언제나 성실한 사회인이자 친절한 동료, 착한 아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내 주변을 돌아보니 나는 지난 10여 년 동안 직장, 친구관계, 가족관계에서 실패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도 매번 같은 실수를. 어찌된 일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전인권,『남자의 탄생』(푸른숲, 2003) 1. 남자의 탄생 『남자의 탄생』은 5살부터 12살까지 자신의 유년기를 소재로 삼아 한국 남자의 인성 형성 과정을 심리적ㆍ정치적ㆍ사회적 맥락에서 분석하여, 이 시대 한국 남자들의 정체성을 결정지은 한국 특유의 가족문화와 한국사회의 구조적 특징들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전인권에 의하면 ‘한국식 남자는 동굴 속 황제’이다. 부모에 의해 철저하게 한국식 남자로 길러지는데, 동굴 속 황제는 모성의 공간에서 양육되고 부성적 질서에 의해 완성된 한국 특유의 가족문화가 낳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한국식 남자인 동굴 속 황제는 모든 인간관계를 진선미의 우열에 따라 상하관계로 설정하는 봉건적 인간이며 자신을 ‘진선미의 화신’이라고 여기며 자신의 우월함을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한다. 또 그러한 신분관계에서 생겨나는 심리적 영토를 끊임없이 넓히려는 행동원칙을 갖고 있다. 전인권의 말을 들어보자. “‘동굴 속 황제’의 허영심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두 가지의 특징적 증상이 있는 듯하다. 첫째는, 그저 ‘남보다 우월하다’는 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진선미(眞善美)의 화신’이라고 생각하며, 이 사실을 끊임없이 타인에게 주지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자신의 심리적 영토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넓히려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권위주의와 자기애의 동굴에 갇힌 황제의 성에 대한 인식도 신분관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성과 성을 물건처럼 다루는 성적 체험에서 ‘여성은 성녀 아니면 창녀’라는 이분법적 구도가 자리 잡혔던 것이다. 따라서 여성에 대한 관심의 범위도 단순했고 평화로운 사랑을 하기에는 너무 거칠었다. 전인권의 다음의 진솔한 고백은 비단 그만의 열등감이 아니라, 대한민국 모든 남자들의 모습이다. “(동굴 속 황제는) 일단 손을 대었다 하면 자신의 소유물처럼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고향도 내 것이고, 대한민국도 내 것이며, 출신 학교도 내 것이며, 가족도 내 것이고, 직장도 내 것이 된다. (…) 심지어 경제학자나 회사원인 내 친구가 플라톤 이야기를 하면, 굳이 틀린 이야기도 아닌데, 괜히 속이 뒤틀리고 이상한 느낌이 들곤 했다. 플라톤이나 막스 베버는 정치학을 전공한 나의 소유물인데, 엉뚱한 직업을 가진 의사나 경제학자가 뭐라고 하면, 다른 집 사람이 내 아파트 열쇠를 들고 있는 것처럼 이상했다는 말이다. 사정이 이 모양이나 나의 학문이 제대로 발전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스스로를 ‘동굴 속 황제’라고 부르는 전인권은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고 자신이 갇혀 지내온 동굴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동굴 속 황제의 습성을 버릴 때 가능하며, 그때 비로소 자신과 주변부터 행복해질 수 있다. 나아가 한국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권위주의, 아버지를 ‘신분의 감옥’에 가두고 어머니에게 세 얼굴(여자와 현모양처, 어머니)을 만들어준 그 권위주의의 그물도 걷어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2. 아내란 무엇인가? 메릴린 옐롬은 ‘아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서양 역사 속에서 아내의 지위 변화를 살펴보며 아내의 개념, 지위, 역할이 언제 형성되어 어떻게 변해왔으며, 역사 속에서 아내들은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보았고, 이를 바꾸려고 어떻게 싸워왔는지, 그 순종과 반항의 역사를 우리들에게 들려주며『아내』(시공사, 2007)에서 “부부 간에 지위, 역할, 성별 등 어떤 차이도 없는 결합이라면 아내라는 용어가 의미를 가질 것인가?”를 묻는다. 먼저, 아내라는 이름은 일반적으로 남과 여의 결합에서 파생된 것이다. 아내라 불리는 여성의 역사는 결혼과 이혼, 여성성, 모성, 임신, 성과 사랑에 관한 역사와 다를 바 없으며 더불어 아내의 역사는 남편의 역사이기도 하다. 사실 아내의 시작은 성서 속 하와이며, 이때 아내는 ‘아담의 갈비’, 곧 남자의 갈비뼈로 태어난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아내는 남편이 사용하는 ‘가재도구, 혹은 재산’이었다. 나아가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 아내는 ‘출산의 그릇’이었다. 이 시기 여성들 중 아내의 지위는 처녀, 과부, 그 다음이 아내였다. 왜냐하면 이 시기 섹스는 타락이었으므로 여성들 내부의 서열은 금욕을 기준으로 매겨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대에 와서 아내는 ‘일하는 기계’가 되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전통적인 아내상 혹은 아내 관념이 급격하게 변한다. 옐롬은 이렇게 말한다. “역사 이래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아내를 먹여 살리는 것은 남편의 의무였다. 아내는 그 대가로 섹스, 아이, 가사노동을 제공했다.” 그러나 맞벌이 아내들이 대거 등장함으로 이 관념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기는 질문 두 가지! 첫째 질문, ‘아내’와 ‘어머니’의 관계는 무엇인가? 옐롬은 이렇게 말한다. “아내와 어머니 사이의 경계는 분명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 아내인 동시에 어머니이지 않았던 여자들은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철저히 박해를 받고 죄인 취급 받았다(구약성서의 유다의 며느리 다말을 보라). 반대로 아내가 아니면서 어머니인 여자들은 독신모라는 낙인을 피하려고 갓난아이 살해를 자행하였다. 그러다 들켜 마녀로 오해받고 처형당했다. 아내는 ‘아내로서 어머니’가 되어야만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질문, ‘그렇다면 아내는 여성인가?’ 오늘날 캐나다, 덴마크, 스웨덴, 스위스, 벨기에, 프랑스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동성 간의 결혼이 합법화 되는 이때에 동성 결혼에서 아내는 누구인가? 현대에 들어 아내라는 이름이 멸종 위기에 직면한 것은 아닌가? 다시 돌고 돌아 아담과 하와 시대로 돌아가야 하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2:21-23) 코뼈도 다리뼈도 아닌 왜 하필 ‘갈비뼈’일까? 갈비뼈가 감싸고 있는 가슴은 사랑으로 콩닥거리는 감성의 진원지이며, 갈비뼈가 위치한 옆구리란 남녀의 동등한 지위를 암시하는 인체의 중심이 된다. 성서학자인 매튜 헨리는 이렇게 말한다. “여자는 남자를 지배할 머리 꼭대기도, 남자에게 짓밟힐 발도 아닌, 동등하게 옆구리로부터 만들어졌으니, 이는 남자의 팔로 보호받고 그 가슴으로 사랑받을 수 있게 함이다.” 이탈리아의 성서학자 움베르토 카수토도 “좋은 아내란 그의 옆에서 조력자로 서며 영적으로 남편과 단단히 매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3. 아버지란 무엇인가? 동굴 속 황제인 남자가 영적으로 맺어진 아내와 하나가 되어 이제 아버지가 된다. 그러나『아버지란 무엇인가』(르네상스, 2009)에서 융이 설립한 국제분석심리학회 회장을 지낸 분석심리학자 루이지 조야는 “서구 사회, 나아가 오늘날의 인류 전체가 아버지 상을 잃어버림으로써 거대한 공황 상태에 처했다.”고 분석한다. 조야는 역사적, 심리학적, 문화적 관점에서 아버지의 발생사적 연원을 추적하지만, 핵심은 ‘심리학적 관점’이다. ‘원형’, ‘집단무의식’ 같은 융의 심리학 개념을 근거로 서구 사회 집단무의식 안에서 발견되는 아버지 상의 원형을 찾아 서구 문화의 시원으로 들어간 뒤 거기서부터 역사를 밟아 내려온다. 1단계, ‘선사시대’에 아버지가 탄생했다. 여기서 조야는 아버지 곧, ‘부성’과 ‘남자’를 구분한다. 남자가 생물학적 속성이라면, 부성은 사회적·문화적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남자라고 해서 다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남자는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충동과 욕구에 직접적으로 지배받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충동과 욕구를 제어하고 인내, 의지, 지성으로써 삶을 계획하고 끌어가는 존재이다. 따라서 책임감이야말로 부성의 핵심 특징이 된다. 조야는 이렇게 말한다. “원시 인류가 진화의 어느 단계에 이르러 이런 특성을 지닌 아버지를 탄생시켰고, 그 탄생은 문명의 출발과 다르지 않았다.” 2단계, ‘고대’에서는 ‘문화적 형성물인 아버지’는 그 내부에서 ‘원시적 남성성’과 다툼을 벌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다툼을 신화적 장대함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고대 그리스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이다. 그리스의 트로이 정복을 그린 『일리아스』의 경우, 부성과 남성의 대결은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와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싸움으로 나타난다. 헥토르는 가족을 걱정하고 자식을 염려하는 전형적인 아버지의 모습이다. 반대로 아킬레우스는 남성적 힘의 분출 욕구만을 따르는 거친 전사이다.『일리아스』에서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에게 패배하는데, 남성이 부성을 이겼다는 사실은, 부성 내부의 남성이 지닌 힘의 파괴성을 잘 보여준다. ▲ 남성성의 상징인 영화 <트로이>의 아킬레우스 ▲ 아버지의 상징인 영화 <트로이>의 헥토르 트로이 함락 후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그린 『오디세이아』역시 부성과 남성 사이의 대결 드라마이다. 여기서는 ‘고향에 돌아가려는 오디세우스’와 ‘한없이 충동에 이끌리는 오디세우스’의 대비로 부성과 남성의 대결을 잘 살펴 볼 수 있다. 이러한 싸움은 거인-괴물 퀴클롭스와 오디세우스의 싸움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산 채로 잡아먹는 퀴클롭스가 원시적 남성성을 상징한다면, 지략을 발휘해 퀴클롭스를 제압하고 탈출하는 오디세우스는 부성적 존재를 가리킨다. 그리고 오디세우스는 기나긴 유혹과 충동의 항해를 끝내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아버지의 귀환이며 남성에 대한 부성의 승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야의 분석은 좀 더 나아간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 문화의 이런 아버지 승리는 동시에 어머니의 패배를 뜻하는 것”이다. 부성은 남성을 제압함으로써 여성도 함께 종속시켜 가부장제를 확립했던 것이다. 가부장제의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자비로운 여신들』이다.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이 트로이 원정을 떠난 틈을 타, 아이기스토스와 정을 나누고 아버지를 배신한 어머니 클뤼타임네스트라를 죽인 아들 오레스테스가 존속살해 혐의로 재판을 받는데(물론 이때 공범은 누나이자, ‘엘렉트라 콤플렉스로 유명한 엘렉트라이다), 판관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오레스테스의 손을 들어준다. 판관은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자식의 생산자가 아니라, 아버지 씨의 양육자일 뿐.” 이 판결은 서구 문명사에서 어머니의 패배를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이후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신화적 판결을 과학과 철학의 이름으로 합리화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이나 노예보다는 우월한 존재라고 보았던 것이다.『정치학』제12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노예에게는 생각하는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 여성은 그 요소는 갖고 있으나 권능이 결여되어 있다. 아이는 생각하는 요소를 갖고 있으나 불완전하다.” 그리고 그리스를 이어받은 로마는 법률로 가부장제를 확정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부성이 모성을 처단한 역사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3단계, ‘중세’에는 이렇게 확립된 아버지의 권위가 기독교라는 저항에 부딪혔다. 기독교는 천상의 신만을 아버지로 섬기고 지상의 아버지를 부정함으로써 부성적 권위를 뿌리부터 흔들었다. 지상의 아버지를 부정하고 남은 것은 ‘형제 관념’과 ‘평등 관념’이었다. 4단계, ‘근대’에는 18세기 계몽사상과 프랑스혁명을 통해 아버지는 숙청당했으며, 산업혁명은 아버지들을 공장으로 밀어 넣어 무력한 존재로 만들었다. 우울증 걸린 아버지들은 술에 찌든 불량한 아버지가 되어 남은 권위마저 잃어버렸다. 5단계, 아버지의 상실은 그 자리를 대신할 다른 것을 찾게 되는데, 이때 등장한 파시즘이 무력한 아버지들을 규합하고 국가주의를 외치며 텅 빈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했다. 조야는 이렇게 말한다. “파시즘이 겉보기에는 가부장적 권위의 발현 같지만, 실은 부성 상실의 반작용이었다.” 게다가 포스트모던의 부친살해는 현대의 질환을 더욱 그 극단으로 몰아가고 있다. 파시즘이 부성 상실을 폭력적으로 해결하려 했다면, 포스트모던은 해결이 아니라, 무덤까지 이장하여 삭제시켜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문명의 위기는 ‘모성의 부활’인가, 아니면 ‘부성의 새로운 자리 비워주기인가’가 되었다. 따라서 조야의 다음의 말은 현대 문명의 질환을 치유하기 위해 ‘아버지를 되찾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어머니를 되찾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부성 상실 문제는 오늘날 더욱 깊은 문화적 질병으로 산재해 있으며, 그 질병을 극복하려면 잃어버린 아버지를 되찾아야 한다. … 집단무의식 속의 아버지 향수는 사라지지 않는다.”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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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4-09
  • [영화]삼손, 신앙의 영웅이 가야할 길을 묻다
    기름기를 뺀 영화 ‘삼손’ <십계>와 <벤허>를 기독교영화의 진수로 여기는 기성세대에게 구약성경에 나오는 삼손의 이미지들은 모두 세실 드밀(Cecil B. DeMille)감독의 영화 <삼손과 데릴라>(Samson And Delilah, 1949)로부터 나왔다. 드밀 감독은 근육질을 뽐내는 괴력의 사나이 삼손(빅터 마추어)을 히브리민족의 신앙과 전통을 어기고 이방인 블레셋족의 아름다운 처녀 데릴라(헤디 라마)와 사랑에 빠져 몰락하고 마는 영웅의 모습으로 그려냈다. 이 영화는 미국 개봉 연도 흥행순위 1위를 기록할 만큼 크게 성공했고 그 영향력은 온 세계로 퍼져나갔다. 사람들에게 익숙한 성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삼손이 그리는 사랑과 모험을 거대한 화면에 담았으니 관심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침대에서 이루어지는 신분을 초월한 남녀 간의 사랑과 사자를 찢어죽이고 블레셋 사람을 몰살하는 액션장면은 자칫 선정성과 폭력성 논쟁을 일으키기에 충분했지만 인간이 저지른 죄와 이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란 성경의 기본 배경덕분에 윤리적 비판을 면할 수 있었다. 세실 드밀 감독의 <삼손>은 한마디로 대중이 좋아하는 대중을 위한 대중영화로서 충실했다는 평을 받아왔다. 세실 드밀 감독의 <삼손과 데릴라>의 힘이 너무 큰 것인지 지금까지 그에 필적할 만한 ‘삼손 영화’들은 영화관에서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일부 교회 교육용으로 나온 DVD나 TV용 드라마로 연출된 작품들이 있었지만 1949년작 <삼손과 데릴라>에 필적할 만한 영화는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브루스 맥도널드 감독의 영화 <삼손>이 2018년 새로운 이미지로 탄생했다. 나름 그 이유가 있다. 최신 영화 <삼손>이 <삼손과 데릴라>와 다른 점은 제목을 통해 상징적으로 그러난다. 성경이 주목한 인물은 어디까지나 ‘삼손’이지 ‘데릴라’가 아니란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데 세실 드밀 감독 이후 삼손은 항상 데릴라와 짝지은 캐릭터로 인식되어 왔다. 물론 삼손의 타락과 비극적 인생에 데릴라는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 사사기에 언급된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삼손이다. 드밀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서 데릴라를 삼손과 대등한 비중을 부여하며 연출했다. 삼손의 고뇌만큼이나 데릴라의 유혹은 강하게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후에 나온 삼손 관련 영화들 가운데는 바로 데릴라의 유혹에 연출 역량을 치중한 나머지 성경의 내용을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소년관람불가 판정을 받은 영화들도 있었다. 브루스 맥도널드 감독의 새로운 영화 <삼손>은 데릴라의 선정적 유혹을 걷어내고 삼손에게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삼손이 놀라운 힘으로 벌이는 살육장면 역시 성경의 내용을 이해시키는 한도 내에서 폭력이 절제된 모양새를 이루고 있다. 한마디로 일반대중이 기대했던 화려하고 스펙터클하며 더 나아가 선정적인 장면은 쏙 빠진 기독교 신앙영화의 본래 모습을 찾으려는 의지를 확고하게 보여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 때문인지 <삼손>은 국내개봉을 앞두고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12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는데 전혀 무리가 없었다. 이는 <삼손>을 만든 제작사의 면모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삼손>을 제작한 퓨어 플릭스(Pure Flix Entertainment)는 미국에서 기독교영화를 잘 만들기로 소문난 기독교영화전문제작사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4년간 개봉된 퓨어 플릭스의 영화만 해도 <신은 죽지 않았다1,2>를 비롯해서 <예수는 역사다>, <신을 믿습니까> 등 이미 네 편에 달한다. 퓨어 플릭스가 미국에서 제작‧배급한 영화 타이틀이 수십편에 이른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퓨어 플릭스 영화들은 계속 대한민국에 수입 개봉될 가능성이 높다. 퓨어 플릭스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영화 사역(MOVIE MINISTRY)’에 대한 사명선언문을 붙여놓고 있다. ‘우리의 열정은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의 문화에 영향을 주는 영화를 창작하는 것입니다(Our passion is to create films that impact our culture for Christ)’ 할리우드가 지향하는 세속적이며 상업적인 성공과 달리 기독교 신앙영화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퓨어플릭스의 사명선언문은 <삼손>이 왜 <삼손과 데릴라>와 다른지를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삼손의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영화 <삼손>은 삼손과 데릴라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드밀 감독의 영화와는 다르게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나실인 삼손과 이스라엘 민족을 지배하고 있던 블레셋의 발렉왕(빌리 제인)과 그의 패역한 아들 랄라(잭슨 라스본)과의 대결 구도로 이끌어가고 있다. 이것은 삼손의 정체성을 데릴라와의 관계에 치중하지 않겠다는 감독의 성경적 충실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영화는 감독의 상상력이 개입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내용과 적어도 90% 정도는 일치하고 있다. 영화의 주된 갈등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삼손과 우상 다곤(Dagon)을 섬기는 블레셋과의 싸움으로 묘사되며, 그 내면에는 하나님이야말로 참된 신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점이다. 흥미롭게도 블레셋 왕 발렉이 우상 다곤을 정치적으로 활용한다는 언급을 통해 다곤신이 진정한 신이 아닌 단지 통치의 수단에 불과한 사실을 고백하는 장면이 영화에는 등장하고 있다. 블레셋의 발렉왕(빌리 제인)은 아들 랄라(잭슨 라스본)에게 이렇게 말한다. “신이 무엇인지 알아야 해. 저들에겐 상징이자 평민들에겐 숭배의 대상이지만 우리에겐 통제의 수단이야. 내가 다곤이고 너도 다곤이 될 수 있어.” 우상숭배를 통해 백성을 통제하는 한편으로 스스로가 우상이 되고자 하는 과거 권력자의 속성을 한순간에 알아챌 수 있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영화는 또한 삼손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나실인이라는 정체성을 강조하며 삼손에게 일어나는 문제들이 나실인으로 지켜야할 약속을 소홀히 여긴데서 비롯되었음을 분명히 한다. 나실인이란(민6:1-21) 구별된 자의 의미로 삼손은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야 하며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고 삭도를 머리에 대지 않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실인으로서 지켜야 할 이 약속들을 모두 어기는 죄에 빠져들고 말았다. 우리는 흔히 삼손이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가 머리카락이 잘렸기 때문이라고 속단하고 만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일로써 삼손이 힘을 쓰지 못하게 된 본질적인 이유가 되지 못한다. 삼손이 힘도 쓰지 못하고 블레셋에 붙잡혀간 이유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약속을 지키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살지 못한 채 죄의 구렁텅이 속으로 자신을 방치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삼손이 긴 머리카락을 가졌기 때문에 놀라운 힘을 썼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다.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감동되어 있을 때 그 힘이 나타났을 뿐이다. 즉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을 때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사자를 찢어 죽일 수 있었고(삿14:6), 수수께끼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기 위해 아스굴론에 내려가 그곳 사람 삼십 명을 쳐 죽일 수 있었다(삿14:19). 삼손의 힘의 근원은 단순히 머리카락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닐 수 없다. 영화 속 삼손은 말한다. “벌써 두 개를 어겼는데 머리마저 자르면 내 힘이 사라질까봐 두려워요.”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의미 2018년 영화 <삼손>은 예술적이거나 대중적 의미보다도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기독교인에게 신앙적 영웅의 삶이 무엇인지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근본적으로 사사기의 문화적 상황은 지금의 포스트모던 사회와 닮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기 보다는 개인의 선택과 취향을 중요하게 여기고 또한 이를 가치판단의 근거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17:6, 21:25) 이 보다 더 사사기의 주제를 압축할 수 있는 구절은 없다.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생활로부터 멀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 같은 이방 족속들에 의해 지배당하고, 고통을 겪으면서 비로소 하나님을 찾아 도움을 호소하며 울부짖으면 그 때 하나님은 사사를 보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이야기는 사사기에서 늘 반복되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 원인은 하나님 중심의 사고와 행동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바로 잡아주고 인도할 지도자가 부재했던 까닭이다. 예술과 패션에서 동성애에 이르기까지 현대인들은 자신의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맞으면 그것을 옳다고 여기는 문화적 상대주의에 익숙하다. 지나친 상대주의는 진리마저도 개인의 판단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만다. 즉 하나님 말씀으로 자신을 돌아보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재단해 버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신앙과 전통 그리고 도덕적 규범은 무시당하기 쉽다. 현대인들은 삼손의 힘이 넘치는 외모에는 눈길을 주지만 그 힘이 어디로부터 왔는지에 대해선 알지 못하며 관심조차 없다. 누군가 삼손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도 그것은 개인의 사소한 의견으로 치부해버릴 뿐이다. 영화 <삼손>의 한국어 포스터에는 ‘주여 당신의 힘을 주소서!’라는 문구가 인쇄되어 있다. 영화 속에서 삼손이 힘이 필요할 때 마다 하나님께 간구했던 표현이다. 어벤져스와 같은 만화적 영웅들이 자신의 능력을 뽐내는 영화들 속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제대로 된 영웅의 일갈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온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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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4-09
  • [기독교 교양 읽기36] 한 마리 벌레처럼 오래 걸으니 내 발이 비로소 이 땅에 닿는다
    ▲ 한마리 벌레처럼 DMZ를 홀로 걷다 이 책은 저자가 강원도 고성 명파초등학교에서 출발하여 인제-양구-화천-철원-연천을 거쳐 경기도 파주 임진각까지 DMZ를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는 약 380킬로미터의 길을 열하루 동안 오롯이 걸었던 기록이다. 그것도 유월 하순의 무더위 속에 햇빛 피할 곳도 제대로 없는 아스팔트길을 걸었다. 어떤 때는 생애 최악의 폭우 속에 온몸을 맡기고 걷기도 했다. 생각만으로도 지칠 것 같은 그 고통의 길을, 아름다움을 기도하면서 한발 한발 내디뎠다. 걷는 가운데 많은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길가를 걷는 사람은 생각지도 않고 내달리는 차량을 보면서 ‘무례한 것은 곧 난폭한 것’이라고 느꼈다. 인적 드문 길을 가면서 제 자리에 서 있는 조그마한 표지판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다. 한참을 산 뒤에 뒤돌아보아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도 있음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오래 걸으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체득했다. 내 발이 비로소 이 땅을 밟고 있다는 느낌과 제대로 된 삶의 속도이다. 내가 사랑해야 할 이 땅을 새롭게 느꼈고, 너무도 빨리 변하고 편한 것만 추구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속도는 걷는 속도와 닮아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왜 하필이면 DMZ를 걸었느냐고 묻는 분이 있을 것이다. 나도 그 길을 걷고 싶다는 분도 있으리라. 중요한 것은 그 길이 기도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먼저 깨닫는 것이다. ◈ 《한 마리 벌레처럼 DMZ를 홀로 걷다》 || 저자 한희철 목사는 현재 부천 성지감리교회를 섬기고 있다. 시인이며 동화작가이기도 하다. 지은 책으로는 《하나님은 머슴도 안 살아봤나》, 동화책 《네가 치는 거미줄은》 등이 있다. 꽃자리, 2018. 17,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작은교회 이야기》 / 한희철 / 포이에마 《어느날의 기도》 / 한희철 / 두리반 ▌좌담: 김길구, 김수성 경성대 초빙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특별손님: 한희철 목사 ▲ 한희철 목사는 DMZ 길을 순례하면서 많은 것을 얻었다고 한다. 특히, 두 발로 이땅을 밟으면서 현실을 느꼈고, 삶의 적절한 속도를 찾았다고 한다. <’기쁨의 집’에서 오른쪽부터 한희철 목사, 김길구, 김현호, 김수성> 하나님께 지고 싶어 순례길을 떠나다 김길구 오늘은 《한 마리 벌레처럼 DMZ를 홀로 걷다》를 쓴 한희철 목사님을 특별손님으로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먼저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왜 하필이면 DMZ 길을 걸었습니까?한희철 두어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오래 전부터 걷고자 다짐했던 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산티아고 순례길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만, 우리 산하에도 걸어야 할 순례길이 많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또한 평소 나라를 위해 기도를 한다고는 했지만, 허리 잘린 조국에 대해 항상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직접 현장을 걸으며 동강난 허리를 ‘호는’ 마음으로 걸었습니다. 이후 다른 분들이 좀 더 촘촘하게 꿰맬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호다’는 ‘헝겊을 겹쳐 바늘땀을 성기게 꿰매다’는 뜻].김현호 책에 보면, 목사님 스스로도 목회 중 일어난 일로 인한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순례의 길을 나섰다고 하는데….한희철 맞습니다. 교육관 건축과 관련하여 적지 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논어에 ‘군자는 의를 따르고, 소인은 이익을 따른다’는 구절이 있는데, 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돈과 관련된 문제는 소인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안타까웠습니다. 아팠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지요. 나 역시방향감각이 무뎌진 것은 아닌가 하고.김수성 아픔은 아픔으로써만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 거군요?한희철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책에, 그가 한 수도사와 나눈 대화가 나옵니다. 그 수도사는 하나님과 싸우고 있는데, 하나님을 이기려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지고 싶어서 싸우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도 하나님께 지고 싶어서 길을 나섰던 것입니다.김길구 열하루 내내 걸으면서 기도했다, 그것도 태어나서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 모두를 위해 기도했다는 말이 감동적이었습니다.한희철 새해가 되면 전 교인들에게 기도카드를 적게 합니다. 그 카드를 강대상에 올려놓고 매일 새벽기도회를 마친 후 제단 앞에 꿇어앉아 기도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자세를 좋은 기도 자세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이번에 걸으면서 기도를 해보니 이 자세도 상당히 좋은 자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여태껏 나와 인연을 맺었던 분들을 떠올리며 기도하니 더욱 좋았습니다. “기도는 따뜻한 기억과 든든한 연대”김현호 열하루 동안 걸으면서 모든 분들이 다 생각나던가요? 시간이 모자랐을 것 같은데.한희철 내가 그렇게 많은 분들과 인연을 맺지 않아서 그런지, 열하루 동안 내 기억 속에 있던 모든 분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다 보니 얼굴이나 이름이 아니라, 먼저 그분들의 아픔과 만나게 되더군요. 즉, 모두가 무엇이든 아픔을 가지고 있었고, 세상에는 아픔 없는 분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기도는 따뜻한 기억과 든든한 연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나와 인연을 맺은 분을 위해서 기도를 쉬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깨달았습니다.김수성 걸으면서 기도하는 것 못지않게, 자연과 함께 드린 예배도 인상적이었습니다.한희철 예배는 내용과 함께 형식도 중요합니다. 얼마 전 미국에 갔을 때 한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마침 예배시간이었는데, 그레고리안 성가로 이어지는 수도자들의 예배 자세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진솔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걷는 중에 맞이한 주일, 새소리와 계곡 물소리가 찬송하고, 나무가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계곡을 따라 부는 시원한 바람이 축도를 한 예배는 결코 혼자 드린 예배가 아니었습니다.김길구 준비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는지요?한희철 사실 갑자기 떠나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준비가 소홀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걷는 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해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코스는 함광복 장로님께서 일일이 적어준 로드맵에 의존함으로써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함 장로님은 DMZ에 관한한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전문가입니다. 또한 중간 중간 교회 장로님을 비롯해 여러분들이 기꺼이 동행해주셔서 큰 힘을 얻었습니다.김현호 걷는 동안 날씨 때문에 상당히 많은 고생을 하였다고 하던데.한희철 유월 하순이었는데도 삼복더위 못지않았습니다. 걸핏하면 스마트폰에 무더위 주위보가 날아와 ‘바깥활동은 삼가라’는 메시지가 떴습니다. 뜨거운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복사열은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죠. 끝이 보이지 않는 오르막길을 걸을 때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특히 진부령을 오를 때는 뇌성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져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나중에는 우박까지 쏟아졌는데, 내가 여태껏 살아오면서 만났던 가장 심한 악천후였습니다. 걸으면서 ‘삶의 적절한 속도’ 깨달아김수성 저도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만, 길을 걸으면서 느끼는 것 중의 하나가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길, 사람보다 차를 중시하는 길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한희철 DMZ 길도 아찔한 곳이 많았습니다. 인도가 아예 없는 길도 여럿 있었고, 있다 하더라도 주행하는 차의 폭력적인 운전에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특히 탱크가 내 옆으로 지나갈 때는 머리털이 곤두설 정도로 무서웠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이를 피할 곳이 마땅찮아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문득 2002년 경기도 양주 마을도로에서 여중생 두 명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사건이 떠오르더군요.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길에 대해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김길구 오래 걸음으로써 삶의 적절한 속도를 찾으셨다고 했습니다.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우리 사회는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너무도 빠르게 변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한희철 삶의 속도가 빠르다고 해서 더 많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생에서 더 중요한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 저는 우리 인생은 평생 길을 걷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래 걸으면서 내 발이 비로소 이 땅에 딛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즉, 나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을 몸으로 깨닫게 된 것이지요. 참으로 중요한 경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김현호 순례길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무언가 변화가 있었나요? 교인들의 반응 같은….한희철 특별히 변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깨달은 것이 있지요. 더 이상 상황에 끌려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나비가 되기를 기도하며 한 마리 벌레 같이 걸었지만, 오히려 번데기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김수성 그래도 번데기가 되었으니 한 단계는 진전한 셈입니다. 번데기를 거쳐 때가 되어야 나비가 될 수 있으니까요[웃음].김길구 이 책을 처음에는 편하게 읽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와 북한의 관계 등 현실을 생각하면 결코 가볍게 읽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한사연 목사님의 순교 등과 관련된 ‘바이블루트’는 우리가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쁘신 가운데서도 이렇게 부산까지 오셔서 자리에 함께해주신 한희철 목사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다음에는 안재경 목사의 《십계명, 문화를 입다》(SFC, 2017)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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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26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36 : 양
    종말론과 어린양 신학, “미투” 1. 종말론2001년 9월 11일 ‘911 테러’ 사건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테러와 악의 존재에 대한 답과 그 의미를 성서에서 찾으려고 노력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부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힘을 빗대면서, 공식적으로 ‘악의 축’과 싸우는 미국인들의 힘을 성서에서 찾았다. 하지만 테러와 악에 대하여 성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오늘 이 세계를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서 성서는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많은 해답들을 기독교 성서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서 볼 수 있으며 오늘날 널리 퍼지고 있는 종말론(Eschatology)에서도 볼 수 가 있다.폭력과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이 지구촌에 요한계시록이나 다니엘서와 같은 묵시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 종말론과 같은 잘못된 종말론이 판을 치고 있는 이 때에 기독교 근본주의에 기초한 기독교 종말론 소설들, 영화, 그리고 어린이를 위한 게임 등의 ‘휴거산업’은 우리의 영성에 어떠한 해악을 끼치고 있는가? 더 나아가 잘못된 종말론의 영향으로 인한 미국의 중동정책은 국제 정치에서 어떠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가? 실제로 미국의 종교사회 학자들은 미국 기독교인의 45%가 휴거나 아마겟돈 전쟁과 같은 부류의 종말론을 믿고 있다고 하는데, 이들은 중동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강력히 지지하는 사람들이다. 가령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규정해 버린 트럼프의 정치적 행동을 무조건 찬성하는 것이다.사실 종말론에 관한 입장은 인류의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일어날 사건이나 우주의 마지막에 대한 신학적 이론이다. 그 근거는 마태복음 24장 예수께서 언급한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을 조직신학의 한 부분에서 ‘개인의 죽음’과 ‘인류의 최후의 심판’에 대한 내용으로 다루게 되었는데, 부활 승천한 예수 그리스도가 마지막 때에 다시 재림하는 것이 기독교 종말론의 핵심이다. 슈바이처 (A. Schweitzer)의 연속적 종말론(Konsequente Eschatologie), 도드(C. H. Dodd)의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 불트만(R.Bultmann)의 실존적 윤리적 종말론, 몰트만(J.Moltmann)의 혁명적 종말론, 오스카 쿨만(O.Cullmann)의 구속사적 종말론 등을 들 수 있다.이러한 현대신학자들의 종말론의 특징을 세 가지로 정리해 보면, 첫째 ‘유대교의 묵시문학적 종말론’으로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슈바이처와 바이스가 예수의 종말론을 연구한 결과 얻은 결론으로 미래 대망적 종말론이다. 이러한 종말론은 미국의 천년왕국 운동자들에 의해서 재강조 되었다. 둘째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견해로, 도드의 실현된 종말론에서 시작되어 여러 가지 실존주의적, 윤리적 종말론과, 최근에 이르러 정치신학과 결부되어 혁명적 행동의 이념으로 이해된 종말론이다. 마지막으로 종말론을 구속사적으로 보면서 ‘약속과 성취’라는 구조 안에서 그 나라의 양면성(‘이미’와 ‘아직 아니’)을 강조하는 경향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 측면과 차원에서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했으나, 아직도 종말론(하나님 나라)은 풀기 어려운 신비로 남아 있다. 2. 거짓된 휴거와 기획된 미래종말에 관한 소설들을 살펴보면 성서의 문자를 폭력적으로 해석하며 세상의 종말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설교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유엔의 평화 정책이 실패하였고, 지진과 같은 자연 재앙과 테러 등을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가르친다. 더구나 이들 중 몇몇은 신의 각본에 의한 우주적 종말인 피비린내 나는 ‘아마겟돈 전쟁(Armageddon)’ 속으로 이 세상은 초읽기에 들어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성서의 종말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은 그들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 한 소설이 성서의 이야기를 왜곡하며 꾸며낸다는데 있다.아마겟돈은 세대주의 종말론이 갈망하는 사건 중 하나이다. 사실 아마겟돈이라는 말은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단 한번 등장한다(계 16:16). 그러나 세대주의 종말론은 이 단어가 요한계시록의 가장 중심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아마겟돈이 단순히 단 한번 수행되는 전쟁이 아니라 적어도 네 번의 전쟁으로 팔레스타인 곳곳에서 수행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첫 번째 전쟁은 페트라(Petra) 또는 에돔(Edom) 지역(현재 요르단 지역)에서 일어나는데, 이곳은 ‘주님의 옷이 적들의 피로 얼룩지는 곳’이며 상상할 수 없는 두렵고 충격적인 군사적인 참상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은 자신들이 아마겟돈 전쟁을 갈망하는 이유가 예수의 재림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는 폭력과 전쟁을 일삼으면서 재림하지 않으신다. 그럼 무엇 때문에 이토록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은 재림에 열광하는가? 어떤 이유로 그들은 피와 죽음을 강조하는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성자들은 땅에서 하늘로 휴거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은 자신들이 하늘로 휴거 된 이후, 저 높은 하늘에서 이 땅에 남겨진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과 세상의 종말을 구경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과 위배되는 행위이다. 이웃이 고통 받을 때, 자신들은 폭력의 고통에서 탈출하여 휴거 된다는 아주 이기적인 신학이다. 마치 영화관 앞자리에서 총격전을 관람하듯 휴거된 이들은 하늘이라는 2층 특별석에서 지구에 남아 있는 자들의 종말을 구경하겠다는 것이다.사실 요한계시록은 근본주의자들이 익히 알듯이 선한 서구(미국과 이스라엘)가 악한 중동(구체적으로 아랍 이슬람)을 쳐부수는 아마겟돈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 한복판에서 평화를 외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우리로 하여금 양을 치는 목자와 같은 하나님의 마음으로(God’s Shepherding Lamb) 우리의 삶을 성찰하도록 이끌며 폭력과 힘의 구조를 성찰하도록 가르친다. 동시에 억압의 구조에 도전하고 새로운 희망을 꿈꾸도록 가르친다. 더 나아가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땅임을 이야기 한다. 이렇듯 요한계시록의 오독(거짓된 휴거와 기획된 미래)은 파괴주의 종말론을 형성하고 종말론적 광신을 불러일으킨다. 3. 어린양의 신학예수는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이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묵시(1:1)’ 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가장 원초적인 목적은 ‘예수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지, 중동이나 유럽의 마지막 시대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예수는 누구인가? 이 책에서 예수의 이미지는 처음에는 검을 가진 위엄 당당한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나중에는 어린양의 모습으로 대체된다. 그리고 어린양은 요한계시록의 모든 부분을 지배하는 요소로, 144,000명의 거룩한 시온 산 전사를 소집하고(14:1), 악한 적과 싸우며(17:14), 전쟁이 끝난 후에 결혼을 하며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19:7, 22:3). 실제로 요한이 사용한 헬라어 ‘양’은 단순히 어린양이 아니라, 정말 작다는 것을 뜻하는 단어로 ‘어린 양’, ‘작은 양’(아르니온)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오직 예수가 자신의 제자들을 파송 할 때만 사용한 것이다. 가령,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눅10:3).” 그 어떤 묵시문학도 신적인 존재에 대해 어린양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유대교의 관점에서는 결코 어린양이 메시야가 될 수 없다. 예수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는 가장 연약한 모습의 예수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면서 역설적으로 가장 강력한 표현이 된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었지만 다시 살아 나셨다!”따라서 요한계시록의 어린양 이미지는 로마제국의 폭력을 무효화시키는 하나의 대안으로 1세기 초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로마의 군사적 승전 이데올로기(팍스 로마나)가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던 시기에 쓰여 졌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은 용감하게도 로마가 아니라, 하나님과 어린양이 이 세상을 다스린다고 선포한다. 세상은 그 어떤 제국이나 강대국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나 노예들이 다스린다는 것이다. 요한이 있었던 에베소는 노예무역의 중심적인 도시로서 초대기독교인들은 이 도시에서 노예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제국 전체 인구의 약 30% 이상이 노예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요한은 노예들도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아주 획기적인 선언을 한 것이다. 가장 힘없는 노예들에게 요한의 이러한 약속은 그들의 삶에 얼마나 큰 힘과 용기를 주었을까! 어린양은 식민지 노예들에게 제국주의 고통에서 구출하며 폭력, 욕심, 두려움, 그리고 불의에 중독된 그들을 자유롭게 하신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날마다 경험하는 출애굽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는 오늘날 가장 힘없고 나약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제공해주고 있다. 결국 요한계시록은 진정한 힘이 과연 무엇인지 보여준다. 곧. 우주의 가장 중심에 서 계시는 예수의 힘은 하나님의 희생양이라는 것이다. 구약성서 이사야 53장의 내용(유대교가 인정하지 않는)을 기억에 떠올리면, 예수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면서 침묵하는 어린양과 같은 이미지와 유사하지만, 요한계시록의 어린양은 결국 승리로서 장식한다. 그 승리는 군사와 전쟁을 통한 승리가 아니라, 자신을 죽이고 희생함으로써 승리를 장식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요한계시록의 시작부터 끝까지 바로 이러한 ‘십자가의 신학’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능력과 힘은 약함에서 드러난다는 놀라운 아이러니의 신학인 것이다. 이러한 신학은 바울의 서신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어린양 신학은 요한계시록의 전체 메시지를 대변한다. 악은 폭력과 군사적인 힘에 의해서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어린양의 사랑의 희생으로 정복된다는 놀라운 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신학은 희생자가 승리자가 되는 또 하나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어린양 신학은 진정한 승자(Nike), 곧 최후의 나이키가 누구인지를 잘 보여준다. 어린양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이들 역시 ‘승리자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가지고 있는 신학의 핵심이다. 사실 요한계시록의 많은 부분들은 폭력적인 장면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이러한 폭력의 이면에 있는 신학적 의미들을 파악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승리자와 정복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다. 바로 어린양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은 싸움이나 전쟁을 통해 얻어지는 승리가 아니라, 희생과 사랑으로서 얻어지는 승리인 것이다. 이러한 폭력에 대한 대안적인 면을 가진 ‘어린양 신학’은 세대주의 종말론이나 파괴주의 종말론에서는 도저히 찾아 볼 수 없는 귀중한 메시지이다. 4. 어린양, 미투이러한 어린양의 비전은 놀라운 이미지이자 동시에 적개심을 없애는 위대한 비전이다. 왜냐하면 로마제국의 승리 이데올로기에 비하면 요한계시록의 어린양 이미지는 너무나 나약하고 보잘것 없기 때문이다. 군사적 힘을 의지하는 관점에서 보면 어린양의 이미지는 비폭력을 상징하고 있다. 로마제국의 잔인한 살육에 대하여 요한계시록은 자기 자신을 살육의 희생 제물로 바치는 어린양의 이야기를 통해서 새로운 세상의 모습을 그려주는 것이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 역시 남성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잔인한 폭력의 희생양으로 고통받던 여성들이 어린양과 같은 비폭력적 고백운동을 통해 새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어린양과 같은 힘을 가지라고 요청한다. 우리로 하여금 어린양과 같은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기를 가르친다. 즉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어린양과 같은 삶을 살아갈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사실 어린양의 힘은 상처받기 쉬운 연약한 힘이지만, 동시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사랑의 힘이다. 어린양의 힘은 비폭력적의 힘이자, 불의에 저항하는 용기이다. 미투 운동이 그렇다. 어린양의 힘은 견고한 힘으로서 용서하는 힘이다. 미투 운동이 지향해야 할 목표이다.이 험난한 세상에 우리는 언제든지 ‘어린양의 힘’과 ‘짐승의 힘’ 둘 중 그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있다. 어린양의 힘을 선택한다는 것은 우리가 십자가 희생의 사랑의 정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사랑은 정의(혹은 하나님의 의)와 함께 하는 사랑이다. 따라서 어린양의 힘은 희망과 저항을 향한 우리들의 노력이며 실천이다. 또한 어린양의 힘은 짐승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우리의 노래이며 결속력이다.우리는 요한계시록 말씀을 통하여 비폭력적인 어린양의 힘과 증언으로 이 불의한 세상(짐승들, 즉 바벨론/로마제국)을 정복하였음을 듣는다. 그들은 신성한 하나님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초대하여 생명의 강과 나무를 상속하실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복된 소식은 이미 우리가 이 하나님의 비전을 맛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어린양이 가신 비폭력의 길과 정의의 길처럼 평화와 사랑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양, 미투!” 왜냐하면 이러한 새 세상으로 어린양은 우리 모두 오라고 초대하고 있기 때문이다.“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22:3-5).”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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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12
  • [영화] 막달라 마리아를 새롭게 조명하다
    영화 '막달라 마리아' 포스터 막달라 마리아를 왜곡시킨 역사와 영화 2018년 부활절을 앞두고 신약성경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막달라 마리아-부활 의 증 인 >(Mary Magdalene, 2017)이 개봉예정이다. 영화 <라이언>(Lion, 2016)을 통해 인도출신 입양아가 동생을 찾는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하여 미국감독조합상 감독상을 수상한 가스 데이비스 감독이 연출을 맡아 작품에 대한 완성도를 높였다. 거기다 주인공 막달라 마리아 역에 연기파 배우인 루니 마라, 예수 역에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코모두스 역을 맡아 유명해진 호아킨 피닉스를 등용시켜서 잔뜩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영화를 만들 줄 아는 감독과 연기를 할 줄 아는 배우의 조합이 성경의 인물과 사건을 어떤 방식으로 묘사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그러나 무엇보다도 TV가아닌 극장 개봉용으로 제작된 성서영화(Bible Cinema, 기독교신앙의 증진이나 전파로 제작된 영화뿐만 아니라 상업적인 목적으로 만든 영화 가운데 성경의 내용을 다룬 영화를 통칭하여 부르는 말) 가운데 막달라 마리아를 주인공으로 발탁한 영화가 없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최근 극장에서 개봉된 성서영화들은 모세의 출애굽사건(엑소더스:신들과 왕들, 2014)이나 노아의 홍수 사건(노아, 2014)과 같이 일반대중들에게 익숙한 성경의 사건들을 다루거나, 예수의 극적인 삶을(부활, 2016) 보여준 영화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것은 과거 성서영화의 전통에서도 그대로 확인되는 일로서 무성영화 시대에 할리우드를 주도했던 세신 데 밀(CecilB. DeMille) 감독의 영화들 또한 막달라 마리아가 주목받는 일은 없었다. 즉 성서영화의 세계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소외되어 있었던 것이다.지금까지 막달라 마리아를 등장시킨 영화들의 핵심문제는 사실 소외에 있지 않고 왜곡에 있다고 보아야한다. 성경과 다른 모습으로 막달라 마리아를 이해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영화는 잘 못 반영했거나, 교회가 잘못 가르친 내용을 영화는 그대로 실어 날랐다고 볼 수 있다.할리우드 영화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과는 다른 세 가지의 모습으로 비춰졌었다. 첫째는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로 등장시킨 잘못을 저질렀다. 멜 깁슨 감독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나 니코스 카잔차키스 원작을 마틴 스콜세지감독이 영화로 만든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1988)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 출신으로 윤리적으로 문제가 많은 여성이었으나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 어디에도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나 ‘죄인’으로 언급된 일은 없다. 누가복음 8장 2절과 마가복음 16장 9절에서 막달라 마리아는단지 ‘예수님이 일곱 귀신을 쫓아 내준여성’으로만 언급되었을 뿐이다.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로 인식되게 한결정적 원인은 교황 그레고리우스1세(540~604)의 실언 때문이다. 그는 591년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무명의 죄 많은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로 해석하고 동시에 그녀를 창녀로 설교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이후 가톨릭은 물론 종교개혁 이후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이르기 까지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로 인식하게 되었다. 1969년 가톨릭교회는 그레고리우스 1세의 설교에 실수가 있음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이를 철회했다. 둘째는 막달라 마리아를 베다니의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께 향유 옥합을 깨뜨려 부은 여성과(마26:6-7) 동일시하는 것 또한 오류이다. 그레고리우스1세는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귀신이 들린 것은 일곱 가지의 큰 죄를 지었다는 뜻이고 이를 참회하기 위해 값비싼 향유옥합을 깨뜨렸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그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현재 한국의 개신에서 사용하는 찬송가 211장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에서 조차 향유를 예수님께 드린 여성을 막달라 마리아라고 부르고 있다. 셋째는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가장 파격적인 표현으로 예수의 연인 혹은 예수의 부인으로 묘사한 영화들이다. 댄 브라운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론 하워드 감독의 <다빈치 코드>(2006)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다빈치의 명화 ‘최후의 만찬’ 속에서 예수님 우편에 앉아 있는 제자로 해석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와 결혼한 후 낳은 자녀의 후손이 프랑스로 건너가 메로빙거왕조를 이루었다는 허구적인 이야기를 서슴없이 쏟아냈었다.기독교 역사와 현대문화 할 것 없이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호기심은 교회 안팎으로 늘 있어왔지만 성경의 시각에서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던 인물이 막달라 마리아였던 것이다. 제자의 위치로 복권시킨 영화<막달라 마리아:부활의 증인>은 성경에언급된 막달라 마리아를 중심으로 세 가지의 구조로 진행되고 있다.첫째는 막달라 마리아의 생활 배경과 예수님이 미쳤다고 소문이 난 막달라 마리아를 고쳐주는 장면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갈릴리 호수에 인접한 지역에서 생활하는 일반적인 미혼의 여성으로 등장한다. 성경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귀신이 들린 것(눅8:2)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영화에서는 아버지의 정혼을 거부한 가운데 미친 상태에 놓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성경에는 일곱 귀신이 무엇이고 어떻게 들렸는가에 대한 얘기는 빠져있다. 일곱 귀신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그런데 가부장적인 당시 사회 정황으로 봤을 때 딸이 부모의 정혼을 거부하는 일은 마치 귀신 들린 것처럼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로 인식될 가능성은 없지 않다는 점에서 감독의 묘사는 성경의 어휘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전혀 근거없는 연출이라고 볼 수는 없다.둘째는 막달라 마리아는 복음을 전파하는 예수님 및 열두 제자들과 동행하며 말씀과 기적의 현장을 경험한다. 누가복음에서 말한 것처럼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따르던 유일한 여성이 아니라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했고 또한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을 섬기는(눅8:3) 역할을 수행했다. 영화는 이 부분에서 남성 제자들과 대비시키기 시작한다. 베드로는 막달라 마리아를 견제하며, 남성 제자들은 자신들과 동행하는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탐탁지 않게 여긴다. 몇몇 제자들은 예수님을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줄 혁명가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인간의 죄를 구하러 오신 메시아임을 가장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막달라 마리아를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있고,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 곁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거듭한다. 막달라 마리아가 비록 여성이지만 예수님을 부인한 수제자 베드로와 달리 진정한 제자로서의 면모를 보일 것을 예고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셋째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목격자이며 증언자로서의 역할을 보여준다. 영화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 본 인물로 막달라 마리아를 등장 시켰을 뿐만 아니라 무덤 앞을 떠나지 않고 지킨 끝에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발견되는 인물로 그리고 있다. 영화가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의 친밀성이다.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함께 무덤에 온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된 반면에 부활한 예수님이 제일 처음에 단독으로 만난 여성제자로서의 면모는 매우 강조된다. 그것은 주변에 발각될 경우 큰 화를 입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고 그 곁을 떠나지 않는 사랑하는 제자만이 할 수 있는 행동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제자를 강조하다 일으킨 실수 복음주의 기독교권에서 성서영화는 두 가지의 접근을 통해 그 가치를 인정받곤했다. 하나는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는 지를 보았고 다른 하나는 거룩한 상상력의 개입여부이다. 성경의 내용을 다루면서 비성경적이거나 반성경적인 묘사나 언급은 아무리 뛰어난 주제의식과 연출력을 보여주더라도 교회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그렇다고 성경의 문구를 단지 시각적으로만 펼치는 태도 역시 기독교문화가 지니는 예술적 가치를 무시한다는 점에서 칭찬받을 만한 일은 아니다. 기독교 영화 제작의 어려움은 여기서 드러난다. 성경과도 부합하면서 이 시대를 사는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시각적 연출력을 함께 발휘해야 한다는 점에서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가스 데이비스 감독의 연출은 마치 한편의 시를 쓰듯 축약과 상징을 쓰는 절제의 미학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행적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고 핵심적인 대사와 장면을 통해 참사랑의 하나님이며 동시에 고통 앞에 선 인간의 면모를 잘 묘사하고 있다.문제를 삼을 수 있는 것은 유월절 제자들과 나눈 마지막 만찬 장면이다. 이 성만찬은 12명의 제자와 예수님이 함께 한 자리로서(마26:20) 그 인원이 분명히 성경에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성찬식 장면에 막달라 마리아가 등장한다. 최후의 만찬의 그림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 수 있는 인원구성을 감독이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구태여 막달라 마리아를 성찬식 장면에 집어넣은 것은 결국 한 가지 이유 밖에는 없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참 제자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감독의 의도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 여성을 바라보는 이 시대의 시각에 달려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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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12
  • [기독교 교양 읽기 35] 정서와 영성은 아날로그 영역에 있다!
    ▲ 아날로그의 반격 아날로그는 살아 있다 이 책을 읽으면 온통 디지털로 뒤덮인 이 세상에 아직도 아날로그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아날로그가 건재하고 있는 이유를 꼼꼼하게 하나씩 제시한다.저자는 새로 이사한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준레코드’라는 상점이 문을 연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CD와 인터넷 다운로드로 시작한 디지털 음악은 차츰 파일로만 유통되다가, 특히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스트리밍으로 언제 어디서나 즐길 수 있게끔 변신했다. 그런데 사라진 줄 알았던 LP 레코드점이라니, 뿐만 아니라 디지털 세대인 젊은이들이 오히려 LP 레코드를 찾는 기현상(?)까지 나타나다니….이 책에는 이외에도 아날로그로서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종이 수첩과 책, 보드게임, 학교, 오프라인 매장 등을 죽 소개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심의 일격을 날린다. 디지털의 본거지 실리콘밸리에서 살아 움직이는 아날로그의 현상을 하나씩 적시한다. 내로라하는 IT 기업에서 명상이나 선(禪)을 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허락하고, 종이와 펜을 사용하여 먼저 디자인하는 교육을 시키고, 갈수록 대인 커뮤니케이션을 장려하는 등 아날로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 기업의 직원들도 아이들은 손으로 직접 무언가를 만들도록 교육하고 컴퓨터조차도 없는 대안학교에 보낸다. ◈ 《아날로그의 반격》 || 저자 데이비드 색스(David Sax)는 캐나다의 문화 전문 저널리스트이자 논픽션 작가이다. 뉴욕타임스, 뉴요커 등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이 책은 2016년 뉴욕타임스 선정 ‘올해의 책’으로 뽑혔다. 어크로스, 2016. 16,8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신국원의 문화이야기》 / 신국원 / IVP《과학의 영혼》 / 낸시 피어시 / SFC ▲ 느리고 불편하지만 아날로그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실리콘밸리의 디지털 업계는 누구보다 아날로그를 중시한다고 한다. 아날로그의 가치에 충실할 때 디지털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림출처: www.nmgncp.com] 이번 시간에는 지난번에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인공지능과 기독교 신앙》과 관련, 디지털 세상에서 우리 기독교회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을 주제로 삼았다. 그래서 택한 것이 ‘아날로그’였다. 아날로그, 디지털 만능 속에 살아남다김길구 먼저 지난 시간에 우리가 나누었던 이야기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시작하도록 합시다. 인공지능이 앞으로 일상화되면 일자리 문제는 물론이고, 우리의 신앙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부정적인 전망이 우세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이런 흐름 속에서 우리 교회가 나아갈 길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김현호 아날로그가 하나의 답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은 디지털 세상에서 아날로그가 틈새시장으로서 버티고 있는 다양한 품목과 현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 교회가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적절하게 활용하면 좋은 대안의 하나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수성 사실 디지털 세상에 대한 반응에 있어서, 우리나라와 서구 사회는 분명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대체로 디지털을 산업적 측면에서만 소개하고 홍보하는 측면이 강합니다. 그래서 뒤떨어지면 죽는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이에 비해 서구 사회는 문제점도 직시하면서 대안을 모색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이런 부분을 우리도 충분히 살펴봐야 합니다.김길구 LP레코드판의 보급을 보면, 분명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LP 판매량이 2007년 99만 장이던 것이 2015년에는 1200만 장 이상으로 늘었고, 연간 성장률도 20%를 웃돈다고 합니다. 세계적으로는 2015년에 새로 생산된 레코드판이 3000만 장 정도 될 것으로 추산합니다. 더구나 이 LP판을 사는 소비자층이 20대를 주축으로 10대까지 가세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아직 미미한 실정이죠.김수성 LP판의 경우 가격 문제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음악을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또는 염가로 다운로드하든지 스트리밍하여 듣는데 익숙해진 젊은 층이 기기를 구입하려면 적지 않은 돈이 들기 때문이죠. 외국에서는 요즘 디지털로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저가의 턴테이블이 많이 보급되고 있는데, 이런 것이 우리나라에도 조금씩 소개되고 있습니다.김현호 저는 서점을 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 종이와 관련된 내용이 더 눈에 들어옵디다. 종이 수첩이 아직 건재하고 있고, 종이책은 전자책에 전혀 밀리지 않고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사실 몇 년 전 전자책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학자들은 곧 종이책이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자료에 따르면 전자책 리더 판매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고 합니다. ‘관계는 아날로그’라는 의미 되새겨야김길구 아날로그가 아직도 건재하는 이유에 대해 ‘실재감’ 때문이라는 말에 동감합니다. 스트리밍한 음악은 듣고 나면 사라지죠. 전자책도 내용만 스크린을 통해 글을 읽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날로그는 불편하고 더디더라도 ‘내’가 그것을 직접 만지고 조작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오감을 통해 ‘내것’이라는 실재감을 느끼는 것이죠.김현호 디지털의 가장 큰 특징은 빠르고 간편하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효과라는 측면에서는 뒤떨어질 수도 있다고 합니다. 뇌 과학자들에 따르면, 특히 전자책을 볼 때와 종이책을 볼 때 뇌의 활동에 차이가 많다고 합니다. 즉, 종이책을 볼 때 뇌가 더욱 활발하게 움직이고 이로 인해 더 오래 내용을 기억하게 된다는 것이죠.김수성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내용만 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이책은 그 책을 드는 순간부터 오감이 작동하죠. 책의 크기와 두께, 종이의 질감, 표지 그림과 제목의 서체 등 모든 것이 독서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읽으면서 줄을 긋는다든지 간단하게 메모를 하는 등, 이 모든 것이 책을 읽는 것에 속하는 동작입니다.김길구 이 책에 의미심장한 말이 나옵니다. “관계는 아날로그입니다”라는 말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디지털 시대에 사람들이 가상공간에서 SNS 등으로 많은 관계를 맺고 있지만, 정작 필요할 때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게 현실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일상생활은 물론, 교회 공동체에서도 되새겨야 할 말인 것 같습니다. 김현호 우리 교회와 예배가 디지털화되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 교회 공동체가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본성에 심어준 독특성은 모두가 아날로그일 것입니다. 느리고 불편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영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단 뒤편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은 자칫 성도들을 예배를 ‘보는’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김수성 스크린을 통해 성경말씀과 찬송가 가사를 보여주고 교인들은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게 현실이죠. 성경봉독할 때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전 교인이 성경 구절을 찾고, 마찬가지로 찬송가도 함께 찾는 과정이 예배에 있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두의 마음을 모으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디지털안식일 운동 전개하길김길구 “정서와 관련된 모든 단어가 아날로그 영역에 있었어요”라는 말도 의미심장합니다. 디지털의 특징은 무미건조합니다. 우리 교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속성입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이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해 아날로그는 따뜻합니다. 웹진과 종이로 만든 소식지가 신자들에게 훨씬 더 감동을 줍니다.김현호 디지털 시대를 맞아 일반적으로 종이잡지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도 언급했고, 얼마 전 〈중앙일보〉에서도 보도했듯이, 오히려 소수의 마니아들을 위한 독립잡지는 훨씬 활성화되고 있다고 합니다. 즉, 잡지가 다양화되고 전문화되고 고품질화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종이잡지가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기 때문이지요.김수성 몇 년 전 서구사회에서 일어난 ‘디지털안식일’ 운동을 우리나라 교회에서도 적극적으로 전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즉,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아예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지 않든지, 최대한 절제하는 운동입니다. 비슷하게 ‘디지털 다이어트’ ‘디지털 금식’이란 말도 사용합니다. 이 책의 저자도 신자는 아니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디지털안식일을 만들어 지키고 있다고 고백합니다.김현호 주일에 교회에 올 때 아예 스마트폰 등을 집에 놔두고 오는 운동을 하면 어떨까요? 처음에는 불편하겠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에 따른 준비를 미리 하게 되고, 부수적인 효과도 극대화될 것입니다. 단적인 예로 예배시간에 폰을 쳐다보는 일은 사라지겠죠. 또한 교인들 간에 대화가 늘어남으로써 신앙이 ‘이야기’로 계속 전수될 수 있을 것입니다.김길구 디지털은 우리가 멈출 수 없는 흐름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유발 하라리가 언급했듯이, 디지털 사회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때까지 중시해온 ‘가치’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 교회가 이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앞으로도 이 사회에서 굳건히 설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에는 한희철 목사가 쓴 《한 마리 벌레처럼 DMZ를 홀로 걷다》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정리: 김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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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26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35 : 젊은 세대
    만약 영화 <택시운전사>와 <1987>에 열광하는 40-50대가, 지금의 20-30세대가 열광하는 암호화폐, 가령 비트코인(BTC)으로 대표되는 가상화폐의 발생사적 기원에 관한 인문학적 통찰이 없다면, 또한 전 세계 젊은이들이 방탄소년단(BTS)에 신앙을 고백하는 이 현실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바로 그들이 <1987> 속 전두환이며, 박처장(김윤석 분), 나아가 오늘날의 적폐세력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젊은 세대(10-30대)의 분노는 그들 자신의 문제(가령, 게으름이나 불성실 같은)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지속적인 구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구조는 <택시운전사>의 광주, <1987>의 함성 이후, 지금의 50-70세대가 만든 것이다. ▲ 비트코인 1. 20-30세대: 비트코인에 열광하는 청춘 ‘88만원 세대’로 젊은 층을 지칭했던 우석훈은 최근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던 비트코인 열풍을 통해 20-30세대의 욕망을 잘 포착하고 있다. “암호화폐 투자 광풍은 젊은 세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한국 사회의 실패이다.” 사실 욕망은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법과 제도, 정확히 말하면 권력구조의 산물이다. 따라서 각자 도생에 익숙한 생존주의 세대인 2030세대가 <택시운전사>와 <1987>을 보고 감동받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아직도 청춘들의 욕망을 읽어내지 못하는 기성세대의 무지라고 할 수 있다. 20-30세대가 성공할 희망이 없어 불로소득을 노리는 암호화폐 투기에 빠져들었다고 생각하는 60-70세대, 계층이동 사다리가 사라진 탓에 젊은층이 ‘투기세대’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40-50세대 때문에 지금 청춘들의 세상은 우리와 다른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사실 419혁명을 20대에 겪은 세대(현재 70대)는 여의도와 강남 개발로 재산을 형성했다. 유신을 20대에 겪은 세대(60대)는 경기 과천과 서울 개포동, 목동, 상계동개발 수혜자이다. 6월 항쟁의 주역인 386세대(50대)는 강남과 신시가지 아파트 값이 3-4년만에 두세 배씩 뛰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분당, 일산, 평촌 등의 신도시를 기반으로 중산층이 됐다(물론, 이들은 그 세대의 극소수이며, 대다수 사람들은 피해자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20-30세대는 어떤가? 투기공화국의 역사 속에 이들에게 비트코인 투기를 중단하라고 할 수 있을까?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정치의 민주화는 경제의 민주화를 완성하지 못했으며 도덕성의 이름은 처음부터 정치민주화에 없었다. 암호화폐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단하기 쉽지 않지만, 적어도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암호화폐의 원천기술인 블록체인을 지배하는 자가 마지막 승자가 될 것이라는 것. 주식과 달리 24시간 거래되는 가상화폐의 특성상 실시간으로 등락하는 주가에 투자자들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투자자들끼리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전용 커뮤니티에서 사용하는 그들의 은어가 일상생활에서도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데, 지난해 말 최고의 유행어 중 하나인 ‘가즈아’는 토토나 주식 투자자들이 사용하던 언어였지만, 가상화폐 투자자들이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급격히 유행을 타게 된 신조어이다. 이 유행어 하나가 20-30세대를 이해하는 인문학적 통찰이 된다. 그렇다면 왜 20-30세대는 암호화폐, 비트코인에 열광하는 걸까? 그들의 말을 옮겨보자. “한탕주의, 도박 등이 만연해 있고 집값, 결혼비용, 육아비용 등의 부담을 사회가 줄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성세대의 부동산 신화처럼 사두면 무조건 이익을 볼 수 있다는 믿음 아래 자산이 없는 세대가 단돈 몇 만원을 투자해 수십, 수백 배까지 돈을 불릴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매달 넣는 적금 이자에 비해 ‘한방에 많은 돈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니 눈이 뒤집혀졌다.” “부모세대가 부동산, 주식에 열광했듯 비트코인에 열광한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분석해보면, 현재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와 더불어 정부와 중앙시스템에 관한 의구심이 그 중심에 놓여있다. 사실 화폐제도는 회계시스템이다. 인터넷 기술의 발달로 개인간(P2P)의 ‘정직한’ 회계시스템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이 기술로 새화폐시스템을 만든 것이 바로 암호화폐이다. 이 암호화폐가 활동을 본격화한 것은 2008년 월가 파동이 터진 후, 다시 말하면 국가와 중앙은행 간의 부적절한 관계가 만천하에 드러난 시점이었다. 이러한 가상통화의 혁신성은 은행과 국가라는 ‘제3자’의 개입 없이 지급결제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제3자들에게 뜯기던 중개 수수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은행 VIP가 아니면 늘 출금과 계좌이체에 몇 백원이 뜯기지 않는가? 따라서 비트코인과 그 기반 기술인 블록체인은 언젠가 국가 혹은 중앙은행(제3자)의 법정화폐를 대체하게 될 것이다. 시민들 사이를 중재한다는 명목으로 착취와 간섭을 일삼았던 제3자를 축출할 것이다. 이것이 만약 정치와 산업(용역 대행업체), 선거와 민주주의(가령, 대의가 아닌 직접민주주의)에도 가능하게 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바뀔까? 지금 20-30세대는 그런 세상을 꿈꾸고 있고, 비트코인의 P2P라는 정직한 회계시스템과 블록체인의 보완 기술은 그 시대를 여는 세례 요한이 될 것이다. 2. 10대들의 신앙의 대상, 방탄소년단 ▲ 방탄소년단 “우릴 공부하는 기계로 만든 건 누구일등이 아니면 낙오로 구분 짓게 만든 건 틀에 가둔 어른이란 걸 쉽게 수긍할 수밖에 단순하게 생각해도 약육강식 아래 친한 친구도 밟고 올라서게 만든 게 누구라 생각해” (BTS, 가사 중 일부) ‘연애, 결혼, 출산, 내집마련, 취업, 취미, 인간관계’ 등을 포기한 ‘7포 세대’. 지금 이 시대의 청춘들의 미래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이 포기한 희망의 단어들로 쌓여가고 있다. 왜 포기할까? 의지가 약해서? 신앙이 없어서? 그렇지 않다. 포기의 중심에는 경제적 문제가 있다.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살고 대학까지 졸업했는데 두 손에 남은 건 갚아야 할 학자금 대출과 취업걱정이다. 눈이 높아서 취업을 못한다고 기성세대는 말하지만, 매월 학자금 대출을 갚으려면 편의점 시급수준의 월급으로는 어림없다(더 기가 막히는 것은 최저 임금 인상으로 경제가 무너진다는 보수언론과 보수정치인들이다). 부모님의 재산이 넉넉하지 못하면 빚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지금의 청춘들이다. 따라서 황새(금수저)들은 금수저보다 좋은 길로, 뱁새(흙수저)들은 흙수저보다 못한 길로 가는데, 그건 시간문제다. 경제에 성서적 희년(Year of Jubilee)은 없고, 희망은 사라지고, 고통은 친근한 친구로 바로 옆에 자리 잡는다. “3포 세대 5포 세대 / 그럼 난 육포가 좋으니까 6포 세대 / 언론과 어른들은 의지가 없다며 우릴 싹 주식처럼 매도해 / 왜 해 보기도 전에 죽여 걔넨 enemy enemy enemy / 왜 벌써부터 고개를 숙여 받아 energy energy energy / 절대 마 포기 you know you not lonely / 너와 내 새벽은 낮보다 예뻐 / So can I get a little bit of hope yeah / 잠든 청춘을 깨워 go” ‘BTS, <쩔어>가사 중 일부) BTS는 “이런 세상에 살게 된 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한다. “비난은 무시하고 죄책감을 벗어나 너의 담론을 만들어 내라.”고도 말한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BTS가 옆에 있어준다.”고 희망을 준다. “노력만으로 쉽게 극복되는 것도 아니니 네 탓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불평등과 불의를 평등과 옳음으로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가? BTS는 황새들만을 위한 룰을 바꿔야 한다고 노래한다. “룰 바꿔 change change 황새들은 원해 원해 maintain 그렇게는 안 되지 BANG BANG 이건 정상이 아냐” (BTS, <뱁새>가사 중 일부) 그리고 이러한 룰을 바꾸는데, BTS는 ‘디지털’과 ‘부드러움’을 내세운다. 그리고 우리는 지난 겨울 촛불의 따스한 혁명이 세상을 바꾼 것을 기억한다. 따라서 우리나라 10대, 아니 세계의 청춘들은 BTS의 음악을 듣고 이렇게 말한다. “BTS가 내 인생을 바꿨어요.” “절망의 밑바닥에서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을 때 BTS의 음악 하나로 버텼어요.” “차마 마주보기 힘들었던 제 모습을 똑바로 보게 되었고 이제는 사랑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져도 괜찮다고 말해줘서 고마웠어요.” “노래가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BTS를 알고 위로받았으면 좋겠어요.” “절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해주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꿈을 포기하지 말라는 가사는 많이 들어봤지만 마음에 와 닿은 적은 처음이었어요.” 이것은 간증이다. 복음송가가 아니라, 찬송가가 아니라, BTS의 음악을 듣고 청춘들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얻는 것이다. 대중음악이라고 폄하한다면, 세속음악이라고 무시한다면 교회는 영영 기성세대의 무덤이 될 것이며 그 무덤에 꽃을 갖다 줄 청춘들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자세히 들어보면, 가사를 살펴보면 BTS의 음악은 한 사람의 인생을 빛나게 바꾸려는 선한 의도,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우주를 찾아낼 수 있게 도와주는 힘을 가진 메시지와 철학이 깃들어 있다. 더욱이 이러한 가사가 일반적인 단련의 한계를 뛰어넘는 퍼포먼스와 음악에 실려 가장 파워풀한 미디어들을 통해 청춘들의 삶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차민주, 『BTS를 철학하다』, 비밀신서, 2017 참조). 목하 BTS는 10대들의 신앙의 대상이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언을! “창의성은 지그재그(zigzag)로 온다.”라고 워싱턴대학교 심리학과 키스 소여(Keith Sawyer)교수는 말한다. 어떤 유형의 창의성을 연구해도 창의성이 발생하는 과정은 똑같다. 창의성은 단한 번 번쩍하고 눈부신 섬광으로 세상을 밝히는 번갯불처럼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조치들, 약간의 통찰력, 점진적 변화를 통해 왔다는 것이다. 곧, 창의성은 ‘지그재그’로 온다는 것이다(키스 소요, 『지그재그, 창의력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청림출판, 2014 참조). 이러한 지그재그의 발생사적 기원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기원전 5000년으로 돌아가야 한다. 신석기 인간이 만든 빗살무늬토기가 바로 그것이다. 토기 위에 새겨놓은 ‘∧∨∧∨∧∨’ 이러한 빗살무늬가 바로 지그재그 패턴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지그재그가 산업디자인에서 본격적으로 활용된 것은 두 차례 세계대전 후이다. 악몽 같은 전쟁을 목격한 인류는 신줏단지처럼 모시던 ‘인간 이성’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고, 이성으로 쌓아올린 반듯한 세상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지그재그로 상징되는 비정형적 디자인의 탄생이다. 인간 이성에 대한 반작용이 불러온 것이 지그재그라는 것은 지그재그가 이성이 아닌 인간의 본성과 본질에 가깝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휘돌아 나가는 강이나 긴 세월 쌓인 퇴적층 등 자연은 지그재그와 가깝다. 10대로부터 20-30세대들이여! 삶은 한 방향을 향해 일직선상으로 뻗어 나가는 인생이 아니다. 이런저런 시련을 겪는, 굴곡 있는 삶, 탄탄대로가 아닌 인생. 우리의 삶은 바로 지그재그의 삶과 인생, 그 자체인 것이다. 2018년의 마지막 날을 위해서 2018년 새해 첫날부터 직선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고, 뒤로 가기도 하고, 옆으로 가기도 하며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삶인 것이다. 따라서 BTC이 주는 ‘한방의 매력’도, BTS이 주는 ‘저항의 매력’도 한 템포 쉬어가며 돌아가는 여유도 필요할 것이다. 비트코인 투자자들은 이렇게 항변한다. “언제국가가 헛된 희망이나마 품게 해줬냐” 그렇다. 맞는 말이다. 신분 상승의 사다리가 밑 칸부터 없어진 세상, 능력주의가 비집고 들어가야 할 좁은 입구에 배경과 연줄, 학연이 독사처럼 똬리를 틀고 앉은 세상에 대한 그들의 절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의 이익이 궁극적으로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방식으로는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극소수의 대박을 위해 대다수가 눈물흘리는 것은 MB의 다스로도 족하고, 최순실-박근혜의 야합으로 족하다. ‘분노’에 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분노할 수 있으며, 그러기 쉽다.” 그러나 이렇게도 말한다. “적절한 상대에 대해, 적절한 정도로,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목적으로, 적절한 방식으로 분노하기는 어려우며, 모두가 그런 능력을 지니지는 못한다.” 자, 지금부터 청춘들이여, 다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적절한 분노를 표출해 보자. 10대들이여, 포기하지 말고 돌아돌아 “가즈아!” 20-30세대여, 힘들고 어렵더라도 “존버!” 그때 마침내 ‘떡락’이 아니라, ‘떡상’의 세상이 올 것이다. 우리의 스승 예수도 그렇게 살았고, 우리더러 그렇게 살라 한단다.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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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05
  • [영화] 디즈니, 내세를 탐하다
    ▲ 영화 '코코' 포스터 디즈니가 말하는 ‘좋은 죽음’ 디즈니가 죽은 자들의 세계에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디즈니의 자회사인 픽사(Pixar Animation Studio)가 만든 애니메이션 <코코>(Coco)는 뮤지션을 꿈꾸는 어린 소년 미구엘이 죽음의 세계에서 조상(고조할아버지)을 만나 음악을 금지한 가족의 내력을 파헤치는 낭만적 모험을 그리고 있다. 온 가족이 즐겨보는 애니메이션을 만든 디즈니의 역사가 다시 한 번 증명되기라도 하듯 <코코>는 죽은 자들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미지는 밝고 부드러우며 노래와 춤이 있는 흥겨운 축제의 공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코코>가 묘사하는 죽음의 세계에 대한 배경은 멕시코의 ‘망자의 날’(Dia de los Muertos)로부터 가져왔다. 200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된 ‘망자의 날’은 매년 10월 31일에서 11월 2일 까지 벌어지는 멕시코의 국민축제의 날로써 죽은 조상을 기억하고 그들의 묘소를 방문하는 행사를 벌인다. ‘망자의 날’은 고대 아즈텍문명으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보이지만 가톨릭의 죽은 자를 위한 기도의식과 결합되어 지금에 이른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무엇보다도 ‘망자의 날’이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으로 나올 만큼 대중화된 데에는 죽은 자들이 ‘망자의 날’에는 저승으로부터 내려와 자신의 무덤을 방문한다는 생각과 할로윈 데이를 즐기는 대중들의 욕구가 맞아 떨어진 결과로 볼 수 있다. 10월 31일 할로윈 데이는 가톨릭이 지키는 모든 성인 대축일(Sollemnitas Omnium Sanctorum) 전날로 가톨릭의 중요한 기념일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며, 11월 2일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로 지켜지고 있다. 따라서 죽은 사람의 영혼이 이승으로 돌아오는 할로윈 데이와 ‘망자의 날’이 연계되면서 국가적 축제일로 변화한 것은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신자인 멕시코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죽음과 죽음의 세계를 묘사한 <코코>의 장점은 죽음을 가족의 사랑과 연계시킴으로써 ‘좋은 죽음’을 생각하게 만드는데 있다. 한국죽음학회 회장을 지낸 최준식 교수가 언급했듯이 한국에서 죽음은 외면되고 있고 부정적이며 회피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죽음이 삶의 일부분이며 그것도 가장 중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다. 죽음에 대해 준비하고 공부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매우 드문 형편이다. 놀라운 것은 부활과 천국 신앙을 갖고 있는 기독교인조차도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한다는 사실이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회피하는 현실에서 <코코>는 가족의 사랑을 연계시키면서 죽음을 삶 가까이 끌어들인다. 특히 가족이 죽은 이를 기억할 수 있어야 저승으로부터 죽은 영혼이 이승으로 내려올 수 있다는 영화의 설정은 가족의 가치가 점점 퇴색해가는 한국의 현실에서 매우 의미있게 다가올 수 있다. 이것은 <코코>가 가톨릭 신앙을 갖고 있는 멕시코인들의 전통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교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는 한국인들의 정서에도 부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죽은 조상과 현실 세계의 가족과의 관계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연결시킴으로 말미암아 제사를 통해 부모자식간의 관계를 기억하는 한국의 유교전통과도 쉽게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애들 보는 만화영화 치고는 달리 죽음과 내세를 묘사하는 심도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코코>는 한국에서 277만 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들이고 있는 중이다. <코코>를 의미있게 바라보는 관객이 발견한 것은 ‘좋은 죽음’이다. ‘좋은 죽음’은 살아있을 때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일차적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영화는 보여준다. 가족을 사랑하고 가족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사람의 죽음이야말로 ‘행복한 죽음’, ‘좋은 죽음’일 수 있음을 영화는 말하고 있다. 디즈니의 내세관에 딴지를 걸다 가족과의 사랑이란 보편적 주제를 죽음을 통해 언급한 <코코>의 놀라운 발상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보여주는 내세관은 심각한 오류를 보여주고 있다. 판타지 오락영화인 까닭에 굳이 기독교의 세계관을 대입하는 일이 필요한가라고 물을 수 있지만, 어린이를 포함한 온 가족이 함께 보는 만큼 허구와 진실을 분별하지 않은 채 영화관 밖을 나선다면 영화가 끼칠 수 있는 부정적 영향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코코>는 기독교의 내세관이 갖고 있는 핵심 사항인 심판과 지옥에 대한 묘사를 회피하고 있다. <코코>가 보여주는 죽음의 세계는 해골 모양을 한 영혼들이 세상에서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공간일 뿐이다. 주인공 소년의 아버지를 독살한 음악가조차도 자신의 죄가 발각되지 않도록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곳이다. 하나님의 존재도 그리고 최소한 인간의 잘못된 행위에 따른 심판도 형벌도 존재하지 않는다. 죽은 이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히9:27)은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연약한 인간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심판과 형벌에 따른 지옥에 대한 언급은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살아있는 자들의 세상 보다 즐겁고 화려한 축제만이 있는 곳으로 묘사될 뿐이다. 이 책임을 일차적으로는 영화 제작에게 물을 수 있지만, 아울러 교회에도 그 책임의 일부를 물을 수 있다. 현대 교회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에 대한 설교를 듣기 쉽지 않은 까닭이다.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고 부드러우며 교양이 넘치는 설교는 현대 설교자의 덕목처럼 인식되고 있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에 대한 설교는 오히려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만 인식시키기 쉬울 뿐이며 전도가 중요한 현대교회의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죽음과 내세에 대해 올바로 말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현대인들은 <코코>가 보여주는 내세를 죽은 자들의 세계로 이해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미국의 제1차 대각성운동(1740-1742) 기간 중 신명기 32장 35절을 가지고 엔필드지역에서 행한 설교에서 지옥의 끔찍한 모습을 묘사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언급함으로써 회개운동을 활활 타오르게 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이란 제목의 이 설교로 인해 당시 청중들은 내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울부짖으며 회개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오늘날 미국인들이 지옥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가 그리는 지옥에 대한 이미지의 원형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는 지옥의 고통을 묘사하기 위해 마가복음 9장 44-45절에서 사용된 지옥의 표현을 사용하기를 꺼려하지 않았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이것은 멸망으로 가는 위태로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그의 성경적 열심히 낳은 모습이었다. 디즈니의 위력을 경계하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상황이 한창이었던 1959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소련의 흐루시초프 당제1서기장을 미국으로 초청했다. 흐루시초프가 이 초청을 받아들이 이유 가운데 하나는 디즈니랜드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미국 측 인사에게 디즈니랜드 관광을 시켜줄 것을 제안했지만 미국 국무성은 경호상의 문제를 들어 거절했다. 흐루시초프가 미국을 떠나면서 무엇을 가져가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서슴없이 디즈니랜드라고 말할 만큼 그의 마음은 미국 방문 내내 디즈니랜드에 꽂혀 있었다. 흐루시초프가 디즈니랜드에 마음을 둔 것은 디즈니의 만화 때문이었다. 레닌에 이은 스탈린의 강권통치 시절 소련은 자국 내에서 자본주의 문화의 상징인 할리우드의 영화 상영을 금지시켰다. 미국의 어떤 문화들도 소련에 유입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막았었다. 그런데 단 예외가 한가지 있었다. 그것이 바로 디즈니의 만화영화였다. 코흘리개 애들이나 보는 만화에는 미국 자본의주의 이념적 내용이나 색깔 같은 것은 들어있지 않고, 단지 애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일반적인 내용이 전부일 것이라고 믿은 것이었다. 디즈니는 지난 해 12월, 524억 달러(약 57조원)를 들여서 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사 가운데 하나인 21세기폭스사의 핵심 사업을 인수하는 매머드급 ‘빅딜’을 체결했다. 1996년 ABC 방송을 2백억 달러에 인수한데 이어서 2006년에는 픽사 스튜디오를 그리고 2009년에는 미국의 양대 만화제작사 가운데 하나인 마블을 합병했다. 2012년에 할리우드 최고의 특수효과 제작사인 루카스 필름을 인수한 일은 이미 예상된 바였다. 디즈니가 세상의 문화를 지배할 날이 다가온 듯하다. 만화영화 <코코>를 재미있게 볼 수 있지만 기독교인이 분별력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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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05
  • [신간안내] 잃어버린 장갑
    잃러버린 장갑 김지수 지음 / 12,000원 / 2017년 12월 22일 발행 미미라는 어린 고양이를 통하여 세상을 향한 아이들의 끊임없는 호기심을 드러내며 아이들이 불안해하며 살아가지 않도록 변함없는 가족과 이웃의 사랑과 그리움과 기다림을 묘사함으로써, 아이들이 따뜻한 어른들의 보살핌 속에서 축복받으며 성장하고 발전해 나가며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따뜻한 색감과 일러스트가 잘 어우러져있는 창작 동화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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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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