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8-13(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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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범한 오늘이 영원을 향한 비범한 하루
    1세기 평범한 일상으로 본 그리스도인의 하루 로버트 뱅크스의 1편 《1세기 교회 예배이야기》에 이은 후속작으로 작년 8월 다른 나라에 앞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출간되어 관심을 끌었습니다. 1편에 이어 2편도 본문 60쪽 안팎의 정말 얇은 책으로 소설과 삽화로 1세기 로마의 일상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담아 생동감이 느껴진다. 분량이 적다고 얕봤다는 큰 코 다친다. 다루는 주제가 다양하며 주제도 만만치 않아 심도 있는 논의와 논쟁이 필요하다. 그래서 소그룹 모임의 교재로도 유용해 보인다. 이 책을 간증으로 읽었다는 역자는 저서의 “나의 새로운 신앙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할 최선의 방법은 가족과 일과사회생활이 뒤섞인 아주 전형적인 하루를 묘사하는 것“이라는 말에 필이 꽂혔단다. 그 일상이란 가족, 신분, 자녀, 학교, 옷, 목욕, 헤어스타일, 장식, 부적, 동성관계, 부부관계, 음담패설, 젠더, 직업, 신용, 가난과 부, 재난, 정치, 벤처, 금융업, 비즈니스협력, 직원 징계, QT, 구별과 어울림, 우상, 박해, 변화, 구제, 예배 등이다. 뱅크스가 안내하는 타임머신을 타고 따라가다 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일상도 있지만 낯선 1C 로마의 역사와 풍경, 그리고 문화를 만난다. 물론 문화탐방 하는 가벼운 기분만으론 안 된다. 그 시대적 배경이 폭군 네로가 기독교인 박해의 명분으로 써먹은 로마대화재를 전후한 살벌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을 덮을 즈음 매일의 일상에서 생각 없이 소비하는 하루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나는 과연 그리스도인으로 하루를 살고 있는가?’ ◈ 《1세기 그리스도인의 하루 이야기》 || 저자 로버트 뱅크스(Robert Banks)는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신약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신학자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저술과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1세기 교회예배 이야기》 《바울의 공동체 사상》 《일상생활 속의 그리스도》 등이 있다. IVP, 2018. 6,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1세기 교회예배 이야기》 / 로버트 뱅크스 / IVP《십자가와 부활을 사는 일상 영웅》 / 팀 체스터 / CUP 《일상, 하나님의 신비》 / 마이클 프로스트 / IVP《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불렸던 사람들》 / 래리 허타도 / 이와우《로마와 그리스도교》 / 김덕수 / 홍성사 기독교 교양 읽기 Ⅱ 〈1〉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현호 기쁨의집 대표, 김형기 팔복교회 목사 2015년 3월부터 총 45회 연재된 기독교교양읽기가 Ⅱ로 새롭게 출발합니다. 그동안 수고하셨던 김수성 교수께서 개인사정으로 하차하시고, 경주 팔복교회 김형기 목사가 함께 합니다. 목사님은 서울대에서 교육학을, 장로교신학대학원과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전공하셨으며 1970년 후반 부산에서 양서협동조합을 설립하여, 좋은 책읽기운동을 주도한 바 있습니다. 로마와 기독교 문화의 차이를 보여주는 책김길구 이 책은 본 코너 30회에 게재된 《1세기 교회예배 이야기》의 후속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출간된 따끈따끈한 책으로 1편이 초대교회로의 회귀는 가능한가를 물었다면 이 책은 초대교인들의 하루 일상으로 우리를 초대하여 지금은 어떤지를 묻고 있습니다. 김형기 한 두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작은 책입니다만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은 책입니다. 신약학자인 저자가 1세기 타임머신을 타고 신앙과 생활을 하나로 접목하는 life story를 소설형식을 빌어서 재현한 창의적인 시도가 돋보이는데 이를 통하여 성서에 기록된 말씀들이 생활과 동떨어진 말씀이 아닌 지금 이 시대의 말씀으로 되살아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김현호 소설의 배경인 네로의 기독교인 박해의 빌미가 된 로마대화재가 AD 64년에 일어났으니 이교도였던 주인공 푸블리우스가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시기로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네요.김길구 교세로 보면 12제자로 시작된 예수추종자들은 AD 40년경이 되면 1천 명이 되고 100년쯤 되면 1만 명 200년경에는 20만 명 300년에는 500~600만 명으로 증가합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궁극적으로 ‘세상을 뒤엎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매일의 삶 속에서 구별된 삶의 방식을 개발했기 때문이었다”. 고 합니다. 그럼 일상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김형기 우리가 직면한 개개인의 기호부터 가정생활과 자녀교육, 직장생활, 그리고 사소한 일거수일투족까지 기독교적 세계관과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그 믿음에 걸 맞는 행동으로 실천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김현호 갓 믿은 주인공은 그의 가정부터 변화시킵니다. 당시 수직적 문화의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아내와 자녀의 관계도 상호존중의 방식으로 바꾸고, 자녀들의 교육적 차별을 없애고 세상풍조를 따르지 않고 가정을 중심으로 신앙을 계승합니다. 특히 노예를 재산으로 여기며 육체적 언어적 폭력과 성적학대의 갑질문화에서 노예를 공정하고 정당하게 대해 함께 식사하고 별도의 숙소를 제공하는 등 의 파격적인 대우와 ‘여러해 전에 해방시킨 몇몇 노예를 확대가족’으로 묘사한 부분은 초대그리스도인들의 노예에 대한 전향적인 사고를 볼 수 있습니다.김형기 이 책은 철저한 고증을 통하여 당시의 사회상을 마치 드라마를 보듯 글과 삽화로 재현해 놓았는데‥당시의 의복, 목욕, 음식, 헤어스타일, 장식, 부적, 부부관계, 음담패설, 금융업 등의 깨알상식과 네로치세의 정치상황, 그리고 기독교인의 대처방법 등이 흥미롭네요. 특히 다신교 문화에서 가정 신단의 폐지와 로마인들의 남자 중심의 문란했던 성의식과 만연했던 동성애를 멀리한 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김현호 흥미로운 것은 만연했던 동성애의 원인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특이한 성향의 성적 친밀감에서 찾지 않고 여성차별적 시각에서 접근했네요. “여기에 난제가 하나 있다. 우리문화에서는 남자가 이성보다도 동성과 더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여긴다. (중략) 아내는 남자와 같은 지적 혹은 정서적 능력이 없으므로 완전한 우정이나 사랑을 발전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긴다.”는 대목입니다. 이런 불평등한 남녀관계를 수평적인 관계로 인식하고 권장한 초대교회는 분명 시대를 앞서 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바울은 로마에 있는 우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미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강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그것을 먹음으로써 믿음이 약화될 수도 있는 사람들을 배려해야 한다고 단호히 말한다. <1세기 그리스도인의 하루> 본문 50~51p 중 만찬회장의 모습 ‘세상을 뒤엎은 힘’은 믿음 안에서 구별된 삶김길구 ‘실천적 무신론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입으로는 그리스도인인데 행동은 그렇지 못한 교인을 일컫는 말이지요. 이 50쪽 분량의 얇은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그렇지 않은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 책의 장점 같습니다.김형기 ‘나의 새로운 신앙이 내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할 최선은 방법은 가족과 일과 사회생활이 뒤섞인 아주 전형적인 하루를 묘사하는 것이다’란 말이 가슴에 와 닿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실천적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리트머스시험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김현호 초대받은 만찬장에서 이루어지는 신격화된 황제에 대한 헌주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기독교인이나 유대인들에겐 지지도 부인도 할 수 없는 불편한 자리였을텐데 책속에서도 그 상황을 애매하게 묘사했더군요?김길구 동시대의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라고 했지만 성서 전체의 맥락으로 보면 불의한 권력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만을 말하지 않아요. 당시의 초대교회는 세계최강의 제국 로마의 지배아래 흩어져 있는 소규모의 가정공동체 집단에 불과했고, 이들이 직면한 과제는 적대적인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바꿀 수 없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 아닐까요?김형기 불의한 권력의 상징인 네로치세의 로마대화재와 기독교인들의 박해로 얘기를 옮겨 보지요. 우리가 흔히 얘기하듯 네로가 로마재개발을 위하여 일부로 방화를 하진 않았지만, 열흘간 계속된 화재로 제국의 수도인 인구 100만의 도시 중 절반이 연기로 사라졌습니다. 대참사로 흉흉해진 민심을 돌리기 위한 네로 황제의 선택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화재의 주범으로 조작하여 많은 기독교인들희생되었습니다.김현호 유세비어스의 《교회사》에는 네로의 ‘비이성적인 광기’로 수천 명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사도바울과 베드로가 순교했지요.김길구 반론도 있어요. 교회사가 출간 된 해가 312년으로 화재가 일어난 64년과 시차가 너무 커 다소 과장되었다는 설입니다. 당시의 로마지역의 기독교공동체는 3,000여명에 불과 했으며 교인들 중 10%선인 200~300명 정도의 신자들이 순교했다는 주장입니다.김현호 역사의 아이러니 중에 하나지만 이 박해 후에는 목표를 달성해서 그런지 네로의 박해도 시들해지고, 기독교인들의 누명도 벗겨지자 로마시민들 중에는 동정심도 생겨나면서 그리스도교가 더욱 왕성해 집니다. 순교의 피가 헛되지 않고 열매를 맺은 것이지요. 구제활동도 ‘예배’의 일환으로김길구 다시 돌아가서 참혹한 화재 현장에서 초대교인들이 박해 직전까지 구호활동을 펼치는 장면이 나옵니다.김현호 이 구제활동을 결의하기 위한 회의에서 구제사역을 ‘예배’의 일환으로 여기는 결의를 한 것입니다. 시편의 노래를 부르며 옷을 수집하여 나누어 주고, 음식을 주변 동네에 가서 나누어 주고… 김형기 선한사마리아인의 예처럼 이웃사랑 실천이라는 관점에서 봉사는 당연하게 받아드려졌을 것이고.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했겠지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에 의하면 로마인들은 인근에 있는 국가들, 지성(知性)은 그리스인보다, 체력은 게르만족보다, 기술력은 에트루리아인보다, 경제력은 카르타고인보다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나면 상류층들이 먼저 나서는 희생정신, 그리고 기부정신과 활발한 사회공헌활동으로 평민들의 신뢰를 얻는 노블리스 오블리제 사회적 분위기가 최강의 나라를 만들었다고 했으니까요. - 끝으로 이 책의 부족한 면과 느낀 점 한마디씩 김형기 양도 적고 읽기도 편해 좋았습니다. 한정된 지면의 부족 때문이겠지만 그리스도인끼리의 토론과 대화의 부족, 개종에 따른 내면적 갈등과 심층묘사가 미흡했지 않았나 싶어요. 신앙과 생활을 접목시켜 우리자신을 돌아보게 하다는 면과 신선한 구상으로 신학적, 신앙적 주요 이슈들을 요약해서 잘 다뤄 그룹 활동교재로 활용하면 좋겠습니다.김현호 다 읽고 나니 크리스천의 하루는 하나님나라를 지어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상에서 복음의 가치를 어떻게 담을 건가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성찰의 시간이었습니다. 김길구 장시간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믿고 보는 톰 켈러의 《내가 만든 하나님》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정리: 김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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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 교양 읽기
    2019-01-22
  • [영화] 죄와 어리석음으로 가득 찬 세상의 발견
    무책임함 부모를 고소한 12살 아들 레바논 빈민가에서 생활하는 자인(자인 알 라피아)은 자신의 출생일도 모른 채 일곱 식구와 살고 있다. 부모님이 멀쩡히 살아있지만 여동생 사하르(세드라 이잠)와 함께 길거리에서 주스도 팔고 상점에서 배달 일을 도우며 집안생계를 돕고 있다. 자인의 부모는 어린 아들이 약국을 돌며 사온 약품에서 항정신성 약물을 물에 녹이고는 옷가지에 묻혀 교도소 재소자들에게 몰래 넘기는 일을 할 뿐 정상적인 가족생계는 자인이 모두 떠맡고 있다. 심지어 생리를 시작한 여동생 사하르를 돌보는 일 조차 한 살 터울 오빠인 자인의 몫이다. 이쯤 되면 관객들은 이 집안이 단순히 가난한 정도가 아니라 자식을 돌보는 일에는 무책임한 부모에 대한 이해를 자연스레 갖게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주인공 자인은 부모가 여동생을 상인에게 돈을 받고 시집보낸 것에 대해 분노하고 집을 나와 거리를 떠돌기 시작한다. 일찍이 찰스 디킨스는 19세기 초 런던 슬럼가를 배경으로 한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를 통해 소매치기 범죄 집단에 끌려가는 바람에 고초를 겪어야 했던 고아 소년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일이 있었다. 그 이후 빈곤의 상황에 처한 어린 아이와 그를 둘러싼 사악한 어른들의 풍경은 영화에서 심심치 않게 다루는 소재가 되었다. 이러한 영화들은 대개 주인공 어린이가 처한 심각한 일탈과 위기의 상황을 부각시키는 한편으로 어린이를 이용해 먹은 악당에 대한 죄과를 드러내어 관객으로 하여금 정의의 편에서 심판하도록 마음을 부추기는 한편 어린이를 위기에서 구해내는 의인을 등장시킴으로써 어린이의 미래에 대한 소망을 보여주는 행복한 결말로 끝을 맺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영화 <가버나움>은 다르다. 자식을 낳을 줄만 알았지 키울 줄 모르는 무책임한 부모와 어떤 돌봄도 없이 거리에서 자란 어린이의 삶 속에서 우리는 되풀이 되는 죄와 어리석음을 발견하게 되는 까닭이다. 관객의 마음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대중영화에서 자식을 거리로 내몰며 앵벌이에 가까운 노동과 범죄행위를 부추기는 경우 그 부모는 대개 진짜 부모가 아닌 경우가 많았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보는 까닭이다. 적어도 영화 속에서 친부모라면 돈 때문에 자기 자식을 팔아넘기고 거리의 부랑아로 살도록 만들기는 보다는 빈곤의 현실을 안타가워하며 어떻게든 자식을 정상적으로 교육시키려는 열망을 드러내는 일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가버나움>의 부모는 자식에 대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으며 방관을 넘어서 생계를 유지하는데 이용하는 무책임한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아동학대에 해당하는 부모의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서 자인은 부모를 법정에 고소한다. 왜 부모를 고소하는지 묻는 판사를 향해 자인은 지금까지 어떤 영화에서도 들어본 일이 없는 말을 남긴다. “태어나게 했으니까요. 이 끔찍한 세상에 태어나게 한 그들이니까요.” 이 영화의 제목이 ‘가버나움’인 이유가 납득되는 순간이다. 책망 받은 도시 가버나움 영화 <가버나움>은 기독교영화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성경의 내용이나 가치관을 명확히 드러내기 보다는 오히려 성경이 비판하는 인간과 세상의 모습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알아야 한다. 특히 예수님의 공생애 주요 사역지였던 갈릴리 인근의 ‘가버나움’이란 도시에 대한 예수님의 언행을 알고 보았을 때 비로소 영화를 통해서 감독이 의도하는 바를 읽어낼 수 있다. 사복음서에 등장하는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마태 등 다섯 제자를 부르셨고(마4:13,18-22 9:9), 백부장의 종과 베드로의 장모, 그리고 네 사람이 메고 온 반신불수 병자 등에게 여러 이적을 행하셨다(마8:5,14, 9:1, 요6:55-59). 마태복음은 ‘본 동네’(his own town, 마9:1)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가버나움이 그 누구의 장소도 아닌 ‘예수님의 동네’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되고 가장 많은 이적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이 목격된 도시인만큼 ‘예수님의 동네’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뜻밖에도 가버나움은 예수님으로부터 저주스런 질책을 받은 도시였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마11:20-24) 영화 <가버나움>은 가장 기적을 많이 목격한 도시가 책망의 대상으로 변한 상황을 현대적인 은유로 묘사하고 있다. 영화가 제시하는 기적은 생명성이다. 집을 나간 자인은 거리를 떠돌다 이디오피아 출신의 불법 체류 여성 라힐(요다노스 쉬페로우)의 돌봄을 받지만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자인은 라힐이 사라진 집에서 라힐의 젖먹이를 돌봐야 하는 신세가 되버리고 만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관객이 가장 재미있게 느낄만한 장면이 바로 이 부분이다. 12살 집을 나간 어린이가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젖먹이 요나를 돌보는 모습은 기적에 가깝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존엄과 가치가 인간성 안에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생명으로 충만할 기적의 아이는 더 이상 어른들의 이기심과 무책임한 사회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그들의 행동을 모방하고 만다. 자인은 자신의 부모가 여동생을 결혼이란 명목으로 팔아넘겼듯이 아이의 아빠라고 추정되는 남자에게 젖먹이를 돈 받고 넘겨버리고 만다. 이 저주스런 행동의 결말은 법정에 서는 일이다. 자인은 시집간 여동생이 임신 끝에 죽은 사실을 알고 남편이 되는 남자를 칼로 찌르는 바람에 교도소에 가게 되고, 아동학대가 위법이란 사실을 알고 난 후에는 부모를 고소하는데 이른다. 나딘 라바키 감독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 레바논의 현실이 성경의 ‘가버나움’과 다를 바 없음을 그렇게 묘사했다. ‘가버나움’을 보고 무엇을 할 것인가? 어린 아이가 처한 빈곤과 불의의 현실을 담은 영화를 만든 감독 가운데는 유난히 여성 감독이 많다. <가버나움>의 나딘 라바키 뿐만 아니라 우간다의 빈곤한 현실 속에서 체스우승을 꿈꾸는 어린이를 묘사한 <체스의 여왕>(2016, Queen of Katwe)의 미라 네어(Mira Nair) 감독 또한 여성 감독이다. 이 두 여성 감독은 여성 특유의 모성애를 발휘하여 사회의 약자인 어린이에게 가해지는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는 사회성 높은 영화를 만드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상업영화의 세계에서 매우 선정성 높은 묘사가 이루어질 수 있는 장면들이 순화되어 있는 것은 여성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결과로 볼 수도 있다. 영화 <가버나움>을 본 기독교인은 두 가지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첫째는 회개에 대한 촉구다. 성경의 가버나움이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이유는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이적을 보고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결국 저주의 말을 들어야 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하신 첫 번째 말씀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였다. 회개하라는 말씀이 가버나움의 대중들에게 납득되고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예수님은 가르치시고 수많은 이적을 보여주셨던 것이다. 둘째는 가버나움을 향한 구원사역에 대한 의지를 갖도록 촉구 받는 일이다. 영화에서 우리가 본 장면들은 모두 사실이다. 아니 현실은 이 보다 더 참혹할 수 있다. 마음이 불편할 수 있는 장면들이 대거 들어있는 이러한 영화들이 기독교인 관객에게 갖는 의미는 오직 한 가지다. 가서 그 영혼을 구하는 일이다. 영화의 끝 부분에는 교도소를 방문한 가톨릭 수녀들이 보여주는 위로의 찬양이 있고, 이슬람 사람들이 기도하는 장면이 있다. 감독은 자인에게 종교가 위로가 되지 못한 현실을 말하고 싶은 듯하다. 형식적인 종교행위는 어느 곳에서도 삶의 위로가 되지 못한다.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말씀과 행동이 필요할 뿐이다. 이제 영화를 본 우리에게 남은 생각거리는 한기지 뿐이다. 현대사회에서 가버나움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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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07
  • 2019년, 모두에게 돼지꿈을!
    1. 기해년, 모두가 돼지꿈을 꿀 수 있을까? 올해 2019년은 기해년(己亥年)이다. 己(기)가 황금색을 의미하기에 황금돼지띠의 해라고도 한다. 돼지는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복(福)과 다산(多産)의 상징이었다. 인간 곁에서 살며 고기와 기름 등 귀중한 식량도 제공했다. 황금 역시 재물의 대명사여서, 기해년 2019년은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걸게 만드는 한 해가 될 것이다. 물론 과학적인 근거도 없고, 신앙적으로도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김난도 교수가 『트렌드코리아 2019』 (미래의창, 2018) 서문에서 밝히듯이, “한 집단이 공유하는 ‘마음의 버릇’은 소비에 큰 역할을 한다.” 서로서로 좋은 해라고 덕담을 나누고, 결혼을 서둘러 하고, 돼지해에 아이를 낳고, 이사를 하고 사업을 일으키면 결과적으로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물론 기업들도 황금돼지에 컨셉을 맞춘 마케팅을 활용할 것이다. 서울대 소비트렌드 분석 센터 김난도 교수팀은 2019년의 트렌드로 ‘PIGGY DREAM’을 선정했다. 또한 2019년의 흐름을 “원자화, 세분화하는 소비자들이 시대적 환경 변화에 적응하며 정체성과 자기 컨셉을 찾아가는 여정(9쪽)”으로 읽어내고 있다. 사실 우리 사회는 극도로 개인화된 SNS를 기반으로 소통하고 1인가구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시간이 갈수록 원자화하고 있다. 그 결과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소비자들이 이제는 자기만의 기준으로 소비하고 스스로를 지켜내려는 소비자가 되어 간다. 개성을 키우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부작용도 있다. 어릴 때부터 디지털 미디어에 의존해 소통해온 젊은 소비자들은 감정을 타인과 나누기 어려워하고 결국 감정대리인을 통해 자기 느낌을 표현한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관계의 종착지인 가족관계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가족 제도에서 당연하게 인식되고 있던 자기 역할을 부정하고 개체로서의 정체성을 재모색하는 새로운 가족 관계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시장 환경도 급변하고 있다. 취업은 어렵고 자영업은 고전하는 가운데 수많은 1인 사업자들이 SNS와 플랫폼을 기반으로 자신의 재능과 상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환경문제 역시 심각해져 가고 있다. 이제는 친환경이 아니라, ‘必(필)환경’ 시대에 진입한 것이다. 동시에 정보기술(IT)의 발전은 이제 인공지능(AI)을 넘어 ‘데이터지능(Data Intelligence)’을 요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충분한 데이터 없는 인공지능은 소프트웨어 없는 컴퓨터와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시적, 거시적 변화 속에서 우리 모두는 어떻게 스스로를 지키며, 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신앙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김난도 교수팀은 모든 것을 정체성의 문제로 본다.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가 변혁의 시대에 가장 필요한 ‘마음의 방패(11쪽)’라고 한다. 곧, 개념(컨셉)의 연출로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업도 마찬가지지만, 교회도 살아남기 위해 마케팅을 넘어 컨셉팅이 필요한 것이다. 기해년 돼지의 해에 모두가 돼지꿈을 꿀 수 있을까? 2. 돼지꿈(PIGGY DREAM) 김난도 교수팀은 2019년 소비트렌트를 ‘돼지꿈(PIGGY DREAM)’의 첫글자로 10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교회와 목회자 관련으로), 1) Play the Concept(컨셉을 연출하라) 지금 시대는 가성비나 품질보다 컨셉(concept, 광고가 내세우는 주장이나 의견을 말하며, 구매의욕을 불러일으킬만한 광고의 새로운 주장을 뜻한다)이 화두가 된 시대이다. 교회의 가성비나 목회자의 품질(인격)보다 소개된 이미지가 중요한 시대라는 말이다. 따라서 자신만의 개성 있는 컨셉을 연출하는 ‘컨셉러(concepter)’가 되어야 한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직관적인 미학’, ‘순간적인 느낌’, ‘가볍고 헐거운’ 컨셉에 빠르게 반응하기 때문에 목회자의 설교도 구구절절 설명하는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보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콘텐츠에 열광하는 소비자들의 기호에 맞춰,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컨셉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승전결로 이어지는 스토리 중심의 서사보다 순간적인 자극과 호기심 유발에 더 익숙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시 부흥회의 시대가 돌아올 것임을 보여준다. 너무도 기계적이고 이성적인 시대에 좋은 찬양을 통한 감성적 접근과 순간적인 성령의 역사가 필요한 시대라는 것이다. 2019년의 첫 번째 트렌드 키워드가 그냥 ‘컨셉’이 아니라 ‘컨셉의 연출’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재미있거나 희귀하거나 공감할 수 있는, ‘갬성(자기 연출에 푹 빠진 소비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단어로 ‘감성’이라는 단어를 굴려서 말하는 것)’터지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컨셉이 될 수 있다. 이미지에 열광하고 변화무쌍함을 원하는 소비자들은 기능이 아니라, 컨셉을 소비한다. 구구절절한 설명보다 컨셉이 우선인, ‘기승전­컨셉’의 시대이다. 마케팅은 컨셉팅으로 진화한다. 설교는 기승전-컨셉으로 승부해야 한다. 2) Invite to the ‘Cell Market’(세포마켓) 유통이 세포 단위로 분화하고 있다. 수많은 1인 사업자들이 SNS를 기반으로 자신의 재능을 바탕으로 한 정보와 상품을 팔고, 1인 크리에이터들은 자기만의 콘텐츠를 모바일 라이브로 방송한다. 이들은 기존의 대형 유통 기업이나 방송사들과 협업할 정도로 존재감이 커졌다. 이런 트렌드의 배경에는 세포마켓이 있다. 세포 단위의 시장이 만들어진다는 의미인데, 1인 미디어의 등장이 미디어 판을 뒤집었다면 이번에는 유통의 판이 흔들리고 있다. SNS를 기반으로 한 개별 크리에이터들은 이제 1인 미디어에서 ‘1인 마켓’으로 발전한다. 누구나 온라인에서 가게를 열고 물건과 서비스를 팔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거대 플랫폼과 각종 비대면 결제 서비스의 발달이 기폭제가 되면서 이른바 ‘셀슈머(판매자인 seller와 소비자인 consumer의 합성어인 sellsumer는 인터넷상에서 서로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을 말한다)’의 등장을 촉진시키고 있다. 취업은 어렵고 자영업은 고전하는 상황에서 여러 직업을 수행하는 ‘N잡러(2개 이상 복수를 뜻하는 ‘N’과 직업을 뜻하는 ‘job’, 사람을 뜻하는 ‘~러(er)’가 합쳐진 신조어)’가 소비자를 직접 만날 수 있는 다양한 SNS 채널을 통해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세포마켓은 불법 거래의 온상으로 지목되기도 하며, 콘텐츠의 선정성과 폭력성 문제로 유해 콘텐츠와의 차별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 대형 교회 목사들이 독점한 방송 설교를 듣는 이들이 SNS상의 팟케스트, 유튜브를 통해 다양한 설교를 듣는 ‘말씀의 세포마켓’으로 나서고 있다. 3) Going New-tro(요즘옛날, 뉴트로) 최근 40대가 유년 시절에 신던 추억의 운동화가 10대들의 패션 ‘잇템(꼭 있어야 하거나, 갖고 싶어 하는 아이템)’이 되고, 촌스러워 보이는 빅로고 디자인의 티셔츠가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출시된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복고 음반과 과거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한 디자인의 가전제품들이 불티나게 팔린다. 복고의 열기가 뜨거운 것이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2018)의 그룹 ‘퀸’에 열광하는 90년대 이후에 출생한 젊은이들을 보라! 사람들이 TV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 열광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향수 때문이 아니다. 1020 세대에게 과거는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움’이다. 새로운 것이 넘쳐나는 시대에 소비자들은 서울 익선동 한옥 마을 골목길을 찾고, 이미 자취를 감춘 LP판을 꺼내 들며, 추억의 전자오락실 게임에 열중하는 것이다. 사실 복고는 수시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트렌드이지만, 지금의 복고는 중장년층이 아닌 1020 세대를 공략하는 새로운 복고라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이것을 김난도 교수팀은 ‘돌아온 복고(Retro)’가 아니라, 새로운 복고, ‘뉴트로(new-tro)’라고 말한다. 레트로가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지난날의 향수에 호소하는 것이라면, 뉴트로는 과거를 모르는 1020 세대들에게 옛것에서 찾은 신선함으로 승부한다. 뉴트로 감성을 찾는 밀레니얼 세대(Millennial Generation, 1980년대 초에서 2000년대 초 사이에 출생하여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사회생활을 시작한 세대로, 모바일 기기를 이용한 소통에 익숙한 사람들)는 ‘모자람이 주는 충족감’, ‘불완전함이 갖는 미학’에 매력을 느끼며 ‘낡고 보잘것없는 것’에서 정신적 충족감을 얻는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부흥회와 성경공부, 사경회가 다시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의 것 그대로는 안 된다. 레트로가 아닌 뉴트로가 되어야 한다. 철저한 인문학적, 신학적 기반 위의 부흥회, 사경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4) Green Survival(필환경) 미국의 한 환경운동가는 4년 동안 버린 쓰레기를 1리터도 안 되는 작은 병에 담았다. 이제 목표는 아예 쓰레기 배출량을 ‘제로’로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가능할까?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가능해야 하는 것이 ‘필(必)환경’이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먹고, 입고, 쓰는 모든 것에 들어가는 환경 부담을 제로로 만드는 것. 이는 우리와 같이 살아가는 지구의 전 생명체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닌 즐겁고 유쾌한 ‘필환경’의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소재 선정부터 제조 공정까지 친환경적인 과정을 통해 생산된 의류 제품을 소비하는 ‘의식 있는 의류소비’인 ‘컨셔스 패션(Conscious Fashion)’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폐기물을 재사용하는 리사이클링(recycling)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가치를 더해 친환경 제품으로 리디자인(redesign)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어린 시절부터 친환경 소비자교육인 에코 페어런팅(Eco Parenting)이 필요할 것이다. 5) You Are My Proxy Emotion(감정대리인 내 감정을 부탁해) 자기 감정을 스스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많은 소비자들이 “나 화났다”는 감정을 이모티콘으로 표현하고, 연애나 여행을 액자형 관찰예능 프로그램으로 대신 경험한다. ‘대신 욕해주는 페이지’에 들어가 차오른 스트레스를 푸는 방식으로 감정을 외주화(outsourcing) 해버린다. 최근 액자형 관찰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서 아기를 키우고, 연애를 하고, 반려견을 입양하고,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경험한다. 사람들은 이제 즐거운 것만 보고 좋은 감정만 느끼려고 한다. 이러한 감정대리인을 찾는 유형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감정대리인’을 통해 자기 감정을 대신 느끼는 사람들이다. 둘째, ‘감정대변인’에게 자기 감정을 대신 표현하도록 맡기는 사람들이다. 최근 액자형 관찰예능 프로그램을 즐기고 뉴스를 읽을 때도 기사보다 댓글을 먼저 읽으며 타인의 감정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바로 이런 유형이다. 마지막으로 ‘감정관리인’이 자기 감정을 대신 맞춰주기를 희망한다. 감정 코칭이나 감성 큐레이션 서비스가 자신의 기분을 맞춤형으로 조절해주기를 바란다. 노동의 외주화를 넘어 ‘감정의 외주화’, 곧 ‘감정의 맥도날드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신앙의 외주화도 가나안 성도들을 통해 펼쳐질 것인가? 6) Data Intelligence(데이터지능) “오늘 뭐 입을까? 내일 데이트 어디로 갈까? 점심은 뭘로 하지? 어디 입맛에 맞는 커피 없을까?” 이제 이에 대한 답은 엄마나 친구가 아니라, ‘데이터’가 알려준다. 의사결정의 패러다임이 인공지능(AI)에서 데이터 지능(DI)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시대는 데이터는 정보로, 정보는 지식으로, 지식은 지혜로 한 단계씩 업그레이드된 시대이다. 그러나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데이터 인텔리전스는 누가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정부가 국민의 일상생활을 감시하거나 국민 개개인의 성향을 파악하기 위한 정치적 용도로 사용한다면 인권 침해는 물론이고 엄청난 부정적인 파급 효과를 낳게 될 것이다. 또한 국경이 없는 온라인 데이터의 성격상, 그 수집 및 활용과 관련해 전 세계가 공동으로 법적, 제도적, 기술적 기반을 갖출 필요도 제기될 것이다. ‘데이터, 알고리즘, 인공지능’이 데이터 인텔리전스의 삼위일체이다. 교회는 이제 데이터지능을 통해 인류 역사상 종교성이 차지한 영성의 깊은 차원을 다시금 회복해야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종교와 교회, 신학의 역사라는 데이터, 이를 학문과 영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목회자의 능력(알고리즘), 그리고 이러한 내용을 성도들의 참된 신앙으로 이끌 지능인 신학적 인텔리전스가 필요하다. 7) Rebirth of Place(공간의 재탄생, 카멜레존) 최근 공간이 다시 태어나고 있다. 유통 공간이 카페로, 도서관으로, 책방으로, 강연장으로 전시회장으로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중이다. 현대의 소비 공간은 카멜레온이 주변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색깔을 바꾸듯 변신한다는 면에서 카멜레존(Chamelezone)이라 부를 수 있다. 특정 공간이 협업, 체험, 재생, 개방, 공유 등을 통해 본래 가지고 있던 하나의 고유 기능을 넘어서 새로운 정체성의 공간으로 변신하는 트렌드를 말한다. 은행과 카페, 호텔과 도서관, 자동차 전시장과 레스토랑 등 공간의 협업이 즐거움을 준다. 주변환경에 따라 피부색을 바꾸는 카멜레온처럼, 공간의 화려한 변신이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 ‘카멜레존’으로 이름 붙일 수 있는 명소들이 속속 생겨나는 중이다. 쇼핑몰은 물론이고 전시장과 공연장 등이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색다른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온라인에 밀리는 오프라인에게 카멜레존은 생존을 위한 필수 전략이 된 것이다. 교회에 카페가 생긴지는 좀 됐다. 이제 교회 건물은 도서관으로, 영화관으로, 동네 사랑방으로 바뀌어야 한다. 거룩한 성(聖)은 세속의 속(俗) 안에서 자리 잡는다. 교회는 산 속에 있는 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8) Emerging ‘Millennial Family(밀레니얼 가족)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 이어 ‘밥 잘 사주는 예쁜 엄마’가 등장했다. 엄마가 변한 것이다. 밥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사주고, 남는 시간은 자기계발에 투자하는 엄마들을 말한다. ‘3신가전’이라는 말도 있다. 밀레니얼 가족의 밥 잘 사주는 엄마에게 꼭 필요한, ‘로봇청소기와 식기세척기 그리고 빨래건조기’ 3총사를 말한다. 이제 집안일은 3신가전에 맡기고 엄마들은 자신을 가꾸는 데 시간을 투자한다. 밀레니얼 가족의 등장인 것이다. 사실 햇반을 비롯한 가정간편식의 주 구매층도 1인 가구에서 다인 가구로 빠르게 이동 중이다. 물론 이들 밀레니얼 세대에게도 가족은 소중한 존재다. 가정이 중요한 것도 안다. 하지만 먼저 ‘나’가 있고 그리고 ‘가족’이 있다. 이들에게 집은 ‘적정 행복’의 장소일 뿐이다. 따라서 탈며느리, 탈시부모를 선언한다. 부부 사이엔 동반자적 의식을 지니면서도, 개인의 취미와 성취를 중시해 자기계발에 열심이다. 밀레니얼 세대에게 이제 가정은 절대적인 희생을 해야 하는 곳이 아니라, 대충 만족할 수 있는 ‘적정행복’의 장소로 변화되었다. 앞으로 교회도 충성을 다하는 신앙의 장소에서 적정행복의 장소로 변화될 것이다. 가급적 교회는 건물을 이웃 주민들을 위해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고 교인들은 한 주에 한번 예배를 드리고 친교하며, 나머지 시간은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삶을 살아야할 것이다. 9) As Being Myself(그곳만이 내 세상, 나나랜드) 흔히 한국 소비자들은 타인지향성이 강하다고 알려져 왔지만, 이제 자기만의 기준으로 스스로를 사랑하고 지켜나가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따라서 남의 눈길은 중요하지 않다. 나만의 시선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것이다. 라라랜드(로스앤젤레스의 별명이자, ‘현실과 동떨어진 상태’를 의미)가 꿈꾸는 이들의 도시라면 ‘나나랜드’는 궁극의 자기애로 무장한 사람들의 땅이다. 나나랜더에게 타인의 시선은 중요치 않다. 오로지 나의 기준이 모든 것의 중심이다. 탈 규범화에 익숙한 이들은 기존 세대가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관에 반기를 든다. 넉넉한 체형의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최고의 모델로 등극하고, 40대 여성이 아이돌 팬으로 ‘입덕’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곳, 바로 나나랜드다. 나나랜드를 찾고 있는 이들은 ‘다름’에 대한 수용력과 타인에 대한 인정과 이해 또한 높다. 자연스레 개개인의 다양성을 중요시하며 시대에 뒤떨어진 관습이나 획일적인 규범을 거부한다. 나나랜드는 진정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이 정착한 기회의 땅인 것이다. 교회가 이제 라라랜드에서 나나랜드로 변하지 않으면 교회는 사라질 것이다. 10) Manner Maketh the Consumer(매너소비자) 최근 조사 결과, ‘노쇼(No-Show, 식당 등에서 예약하고 나타나지 않는 손님)’로 인한 사회적 피해비용이 연간 8조 원에 이른다고 한다. 소비자의 악의적인 갑질에 고통 받는 근로자들도 너무 많은 것이다. 유교적 전통에 기반한 뿌리 깊은 위계질서 문화가 갑질, 혹은 블랙컨슈머(Black Consumer, 이익을 얻기 위해 부당한 민원을 제기하는 악성 소비자로, 한국에서만 사용한다. 미국에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소비자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이처럼 소비자의 비매너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면서 근로자들의 ‘감정노동 보호’ 논란도 심화되고 있다. 고객 만족을 위한 서비스 경쟁의 과열로, 기업이 근로자에게 고객에 대한 무조건적 맹종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근로자들은 심리적 부조화를 겪는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Smile Mask Syndrome, 숨겨진 우울증)’에 시달리며 정신건강에 큰 위협을 받고 있다. 따라서 워라밸에 이어 근로자와 소비자 사이의 매너 균형을 도모하는 ‘워커밸(worker-customer-balance)’도 중요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신세대 직원들의 이직을 더 이상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라라랜드에 가고자하는 신세대 직원들은 더 이상 스마일 마스크를 쓰지 않을 것이다. 목사도 더 이상 감정노동에 혹사당하지 않아야 한다. 장로와 교인들이 사회생활에서의 스트레스를 목사에게 푼다면 잘못된 것이다. 갑질하지 않는 목사와 장로, 매너 있는 성도가 교회를 새롭게 만들 것이다. 3. 돼지에 관하여 2019년 돼지의 해에 돼지가 재발견되고 있다. 고기 생산과 의학, 산업 연구는 많았지만 정작돼지란 동물 자체는 잘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최근 동물행동학과 비교심리학 분야의 연구 성과는 우리가 몰랐던 돼지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돼지는 개나 어린아이와 비슷한 인지능력을 갖고 있으며 자의식이 있고 창조적 놀이를 즐기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 인간과 다를 게 없다는 공감대가 퍼지고 있는 것이다. 기해년 돼지의 해에 타자의 아픔에 공감한 컨셉을 통해 나나랜드만이 아니라, ‘우리우리랜드’를 꿈꾸는 것도 한번쯤 괜찮지 않을까? ▲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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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07
  • [기독교교양읽기 44] “연탄은 작은 자들을 위한 따뜻한 나눔!”
    ‘연탄신학’은 생명신학이다 이 책은 연탄은행전국협의회에서 편집하였다. 한마디로 연탄은행에 관한 책이다. 그러나 연탄은행보다는 밥상공동체가 먼저였다. 즉, 1998년 4월 원주시 원동 쌍다리 아래서 외환위기로 갈 곳을 잃은 노숙자들을 위해 무료 급식을 하면서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2002년 12월부터 연탄 무료 나눔을 시작하면서 연탄은행도 시작하였고, ‘연탄신학’으로 성경적 해석을 덧붙였다.이들에게 있어 연탄신학은 먼저 ‘작은 자의 신학’이다. 작은 자는 연탄 한 장에 의지하여 한 겨울을 보내는 춥고 외로운 우리 이웃이며, 날마다 따뜻한 밥상을 그리워하는 배고픈 우리 이웃이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신학’이다. 밥상과 연탄이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돌보고, 생명을 지켜준다. ‘타자(他者)를 위한 신학’으로서, 연탄처럼 오직 타자의 생명과 행복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는 신학이다. 그렇기에 연탄신학은 ‘눈물과 고난의 신학’이다. 연탄 한 장이 어려운 이웃에게 가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눈물이 있다. 연탄은행의 연탄은 눈물로 만들어진다. 또한 ‘소통의 신학’이다. 연탄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혔던 벽을 허물고 소통하게 하는 힘을 지녔다.그리고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만약 예수께서 우리나라 이 땅에 오신다면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 아마도 밥상과 연탄을 통해 고난 받는 이들을 위로하는 모습으로 오셨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연탄신학 이야기》 || 저자 정해창 목사는 감리교신학대학원, 미국 리전트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했다. 현재 춘천제자교회 담임목사로서 오랫동안 춘천연탄은행과 밥상공동체를 사역하였다. 솔라피데, 2018. 18,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긍휼-예수님의 심장》 / 하재성 / SFC《여리고 가는 길》 / 팀 켈러 / 비아토르 “연탄은 작은 자들을 위한 따뜻한 나눔!” ▌좌담: 김길구, 김수성 경성대 초빙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예수는 아마 오늘 이 땅에 오신다면 밥상과 연탄 활동가가 되어, 골목을 누비며 연탄을 배달하고 굶주린 어르신들에게 따뜻한 밥상을 차려드리는 일을 몸소 행하셨을 것이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불쌍한 우리를 너무 사랑하신 예수는 밥상과 연탄을 통해서 고난 받는 이들을 위로하며 한없는 사랑을 보여주셨을 것이다.” [본문 227쪽에서] ‘연탄’이 친근한 느낌을 주는 이유는?김길구 오늘은 시기적으로 가장 적절한 주제를 가진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맞아 ‘연탄 나누기’를 이야기합니다. 최근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가 거론되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연탄을 때야만 겨울을 날 수 있는 가정이 너무도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김현호 우리가 아파트에 살면서 도시가스로 편안하게 난방을 하면서 살다보니, 우리 주위에 아직도 연탄에 의지하며 살고 있고, 그것마저도 넉넉하게 사놓지 못해 불안해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자꾸 잊고 산다는 부끄러운 고백을 하게 됩니다.김수성 이 자리에 앉은 우리 모두 연탄에 관한 추억이 제법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연탄’을 이야기하면 어렵고 힘든 생활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물론이지만, 한편으로는 ‘따뜻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김길구 아무래도 ‘나눔’을 떠올리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당시의 삶은 어렵고 궁핍했지만 이웃 간의 정은 아파트 생활과 비할 바가 아니죠. 연탄불에 고등어를 구우면 이웃집 아낙이 부르기도 전에 먼저 “이 집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네.”하면서 대문을 밀고 들어오곤 했습니다. 그렇기에 연탄에 관한 추억은 항상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김현호 거기에 더하여 지금도 연탄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활활 타오르는 연탄불과 겹치면서 더욱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 아닐까요? 겨울철에 연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연탄은행’인 것 같습니다.김수성 이 책을 읽으면서 연탄은행에 관해 좀 더 공부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연탄은행의 ‘4C 가치’라는 것이 있더군요. ‘1) Christ-예수님을 중심으로, 2) Community-공동체를, 3) Care-섬기고, 4) Common welfare-모두를 위한 복지의 가치를 실현한다’입니다. 첫 번째가 바로 ‘예수님을 중심으로’입니다. 그래서 연탄은행 섬김이는 대부분 목사님입니다. ▲ ‘연탄신학’은 밥상공동체와 연탄은행을 통해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살리는 신학이다. 그렇기에 행동하는 신앙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연탄은행뿐 아니라 다양한 봉사활동김길구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가 생각났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 너는 /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 시는 이기주의적 인간에 대해 이타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졌죠. 연탄은 이렇듯 나눔은 물론이고, 여타 다른 면에서도 우리에게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김현호 제가 다니는 교회에서도 겨울이 되면 연탄 나눔을 합니다. 그런데 그냥 물질적 후원에만 그치지 않고 실제로 현장에 가서 연탄배달 봉사활동을 하고 온 교인들과 이야기해보면 마음가짐이 달라진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 주위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김수성 부산에도 연탄은행이 있습니다. 2004년 12월에 개설했으니 벌써 14년이 되었습니다. 서구 감천2동에서 시작하여 아미동으로 확산되었고, 이어서 영도구, 동구, 남구 등으로 퍼져나갔습니다. 2008년에는 ‘사랑의 쌀’ 나눔과 함께 아궁이 교체작업을 하는 등 활동범위도 넓혔습니다. 지금은 연탄은행 외에도 무료 급식, 반찬 나눔, 집수리, 푸드 뱅크, 공부방 등을 운영하면서 1년 내내 어려운 이들과 함께하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김길구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과연 연탄 나눔에 신학을 붙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는지요?김현호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작은 자들을 위한 나눔신학’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도 캘커타에서 마더 데레사가 베풀었던 사랑의 손길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밥상공동체와 함께 운영하는 연탄은행에 대해 어느 누구도 단순한 베풂이라고 폄하하지는 못할 것입니다.김수성 그렇기는 해도 이 책으로만 이야기한다면 신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좀 더 체계화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민-관-교회’ 연대로 복지 향상시켜야김길구 이러한 논란을 의식한 듯, 필자는 신학은 곧 인간학이 될 수밖에 없다는 변명(?)을 합니다. 즉, 신학은 곤궁한 처지에 놓인 우리의 현실을 결코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의 현실은 연탄신학이 필요한 시점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갈수록 심화되는 사회적·경제적 불평등, ‘갑질’로 대표되는 가진 자들의 횡포는 물론, 밑바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는 현실 등을 볼 때, 작은 자를 돌아보고 그들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신학적 노력이 당연히 있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서툴고 부족하기는 하지만 필요한 노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김현호 이 책의 장점은 읽을 재미가 쏠쏠하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연탄의 역사에서부터 현장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열정을 확인할 수 있는 글을 중간 중간 배치해 놓았습니다. 실천적인 면을 강조한 신학답게 실천하는 사람들의 사례를 소개한 것입니다.김수성 저는 ‘철사로 묶은 연탄’을 보면서 감탄했습니다. 이러한 사례는 현장에서 발로 뛰는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것이거든요. 또한 신학적인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이 책에는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음을 잘 보여줍니다.김길구 이 사업을 처음에 시작한 허기복 목사님의 사례에서 이를 볼 수 있습니다. 교회를 담임하다가 결국에는 사임하고 나와서 밥상공동체와 연탄은행을 운영하였다고 합니다. 즉, 교회 안이 아니라, 밖으로 나와서 이러한 사업을 운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나라 현실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사업은 ‘운동’이 될 수밖에 없고, 교회나 교인은 후원자 또는 봉사자로서만 참여하게 됩니다.김현호 교회가 이제부터라도 나서야 할 것입니다. 직접 도와줄 형편이 안 된다면, 교회 주위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정을 파악하여 관청이나 지원단체와 연결해주는 일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이 결국에는 지역을 섬기는 교회로서의 모습 아닐까요?김길구 그동안 기독교회가 기득권에 속함으로써 상당히 거칠어졌다는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그래서 ‘무례한 기독교’라는 말이 회자한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민관(民官)에 더하여 교회가 연대하여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의 한계를 조금이라도 더 벗어날 수 있도록 노력하였으면 하는 바람 간절합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목회’ 아니겠습니까?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진정으로 기뻐하는 크리스마스 맞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수성]
    • 문화
    • 기독교 교양 읽기
    2018-12-26
  • [영화] 로마의 어둠을 밝힌 순교자를 마음에 담다
    새롭고 오래된 성서영화의 발견 영화 <바울>(Paul, Apostle of Christ, 2018)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지난 10월 31일 국내 개봉을 시작한 이후 12월 4일 현재 233,863명의 유료 관객을 동원하여 전통적인 형식의 성서영화(Bible Cinema)로서는 보기 드물게 꾸준히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추정 제작비가 5백만 달러에 불과한 작은 영화로서 과거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 서사적 특징을 배제한 가운데 이룬 성과로 의미가 매우 깊다. 한국 영화계의 비수기인 11월을 택해 개봉하는 바람에 대형 상업영화로부터 상영관을 뺐기지 않을 가능성을 높인 것도 흥행에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상영관수가 적은데다 여전히 한국극장가의 고질적인 병폐인 징검다리 식 개봉(1회, 3회, 5회 상영과 같이 띄엄띄엄 상영시간을 배정하는 것)에도 불고하고 이룬 성과여서 차후 한국의 기독교영화 관객의 기호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가치가 충분하다. 지금까지 제작된 성서영화는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영화로써 세실 드 밀 감독의 <왕중왕>(1927)에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까지 영화사 초기부터 현재까지 기독교영화를 대표해왔다. 둘째는 예수 외에 성경의 인물이나 사건을 다룬 영화로써 <십계>(1956)나 금년에 새롭게 제작 개봉된 <삼손>(2018)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셋째가 매우 흥미로운 성서영화의 부류인데 예수시대 혹은 초대교회를 배경으로 삼은 기독교영화들이 있다. <벤허>(1959, 2016)나 <부활>(2016)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들 영화들의 주인공은 예수가 아닌 가공의 인물들이다. <벤허>의 주인공은 유대인 귀족이었다가 노예로 전락한 유다 벤허이고, <부활>의 주인공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현장에 있었던 로마의 군인이다. 이 두 인물의 경우 예수님 시대에 살았을 가능성은 있지만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인물로서 성서영화가 단지 성경의 내용을 영상화하는 기능에만 머무르지 않고 상상력을 통해 외연이 얼마든지 확대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세 번째 부류의 성서영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간접적으로 묘사하거나 제한된 노출을 시도하면서도 주인공의 인생변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로서 예수를 등장시킴으로써 전통적 성서영화의 흐름으로부터 단절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중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영화 <바울>은 두 번째와 세 번째의 특징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작품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사도 바울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 회심할 뿐만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신앙 가운데서 순교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한다. 영화에서 이 부분은 바울의 회상 장면으로 처리되고 있으다. 즉 주인공은 바울이지만 바울을 주인공으로 만든 이는 예수 그리스도란 점에서 성서영화가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의 정통성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흥미로운 사실은 바울이 갇힌 로마 감옥의 새로운 소장으로 부임한 모리셔스 갈래스란 인물의 등장이다. 그는 물론 성경에 나오지 않는 인물이지만 이 영화가 역동적으로 진행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충실한 로마 군인 출신으로 처음에는 바울을 학대하며 그리스도인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도 바울과 그의 편지를 적어 나르는 누가와의 만남을 통해 내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관객은 갈래스 교도소장의 등장으로 인해 긴장감과 더불어 마침내 신앙의 감동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거룩한 상상력이 얼마나 관객들에게 재미를 부여하는 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고난 속에서 사랑과 은혜를 강조하다 앤드류 아이엇(Andrew Hyatt) 감독의 영화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의 현실과 회고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강조하는 작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표현하는 일은 성서 영화에서는 흔한 일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잔혹한 죽음이 이어지는 박해 속에서 사랑과 은혜를 관객에게 이해시키는 일은 매우 특별하다. 특히 복수가 스크린에 가득 찬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현대사회에서 힘으로 응징하지 않고 용서와 사랑 그리고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일은 매우 특별할 수밖에 없다. 서기 67년 로마는 예수를 믿는 추종자들이 로마의 불을 질렀다는 소문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거리에서 화형을 당하거나 몰래 숨어 살아야 하는 불안과 공포의 분위기에 휩싸인다. 신실한 믿음을 지닌 브리스길라(조앤 월리)와 아굴라(존 린치)는 예수 믿는 공동체를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지만 사람들은 극심한 박해 속에서 로마를 탈출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지고 만다.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지도자인 사도 바울(제임스 펄크너)의 의견을 구하고 그의 편지를 기대하고 있다. 이 때 의사 누가(제임스 카비젤)가 로마를 방문하여 로마에 숨어 지내는 그리스도인과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 사이를 왕래하며 서로의 뜻을 전달하는 한편으로 바울의 신앙여정에 대한 구술을 받아 적음으로 인해 ‘사도행전’이 탄생하게 되는 과정을 관객은 목격할 수 있다. 영화가 제공하는 세 가지 미덕 영화 <바울>에서 관객이 지켜 본 가장 큰 미덕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고난 받는 로마 그리스도인의 상황과 이에 대응하는 바울의 ‘성경적 방식’이며, 둘째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식이고, 셋째는 누가의 의료행위에 나타난 신앙과 지성의 통합적 이해 방식이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관객들은 역사의 기록에 남아있는 ‘인간 촛대’의 순교현장을 접하게 된다. 로마제국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타키투스(Tacitus, 56?~120?)는 14년에서 68년 사이의 로마 역사를 다룬 〈연대기>(Annals〉)에서 네로가 광적인 잔학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인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다. <연대기> 속에 묘사된 그리스도인의 순교 장면 가운데는 십자가의 처형뿐만 아니라 짐승의 가죽으로 싸서 개들에 의해 찢겨 죽기도하고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해가 진 후 로마의 거리 곳곳 마다 화형에 처해져서 히브리서 11장 후반부에 나오는 믿음을 지키는 신앙인이 겪었을 시련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깨닫게 한다. 로마의 골목 곳곳 마다 나무에 매달려 산 채로 화형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고난의 현실을 대변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로마의 어둠을 밝힌 것은 그리스도인들 이었다’는 역사의 기록은 사실이며 또한 진실된 신앙의 결과였다. 가로등이 없던 시절 그리스도인들은 ‘인간 촛대’라는 순교방식을 통해 거리의 어둠을 밝혔고, 사랑과 봉사를 통해 부패하고 잔인한 로마인의 마음에서 어둠을 내쫓았다. 로마에 대한 복수와 저항의 의지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솟구쳐 올랐을 때 영화 속 사도 바울은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12:17)고 누가에게 전한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율법에 미쳐서 예수를 따르는 자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과거가 있었고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고 사랑으로 변화된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감옥에서 누가에게 구술한 바울의 회상장면은 사도 바울을 생애를 연대기로 처리한 과거의 영화와 달리 매우 생동감을 갖게 만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영화를 빛낸 공로는 누가가 바울이 갇힌 교도소 소장의 병든 딸을 고치는 장면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로마의 제3군단 사령관 출신으로 마멀틴 감옥의 소장으로 부임한 모리셔스 갈래스(올리비에 마르티네즈)는 제3자의 입장에서 바울과 누가를 지켜보는 사람이다. 바울이 결코 로마에 불을 지를 사람이 아니며 누가 또한 참된 신앙인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는 입장이다. 그는 자신의 병든 딸이 회복될 수 있도록 사도 바울에게 기적을 행해줄 것을 바라지만 바울은 누가를 존경받는 의사로 갈래스 교도소장에게 소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간직한 사람들이 생존해 있던 시절에 병 고침의 기적은 어쩌면 로마인의 마음을 순식간에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감독은 그 병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의사 누가를 등장시킨다. 사람들은 감독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도록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교도소장의 딸이 병중에서 회복되는 장면과 기독교인들이 로마인들의 구경꺼리가 되기 위해 순교의 현장으로 나아가는 정면을 교차 편집함으로써 신앙이 일으키는 기적이 무엇인지를 감동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즉 인간 촛대로 순교한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어둠을 밝혔듯이, 또 다른 순교자들의 믿음으로 인해 로마의 어린 아이는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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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12
  • [문화펼치기] ‘액괴’의 시대와 액체근대
    1. 액괴의 시대와 강한 것들의 전성시대 요즘 딸아이가 갖고 노는 장난감 중 단연 으뜸인 것은 ‘액괴’이다. ‘액체괴물’의 줄임말이다. 액괴를 주무르는 것이 그리도 재미있는가 보다. 액체는 형태가 없는 무정형의 물질이다. 물과 같은데, 쏟아지지는 않는다. 아이들은 이러한 부드러운 무정형의 물질을 갖고 노는데, 어른들의 세계는 지금 강한 것들의 전성시대로 국가, 자본, 군사력, 경제력이라는 견고한 정형(solid)의 힘이 맞대결하고 있다. 현재 미-중 경제 대결이 유예되기는 했지만, 끝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트럼프라는 기이한 인격의 소유자가 벌리는 일이 아닌, 그 이면의 다층적인 그룹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시사IN>의 이종태 기자는 그 세력들을 이렇게 분석한다. “오래전부터 중국 제품에 대한 고율 관세 부과를 주장해온 ‘보호무역파’, 관세 인상 자체엔 회의적이지만 중국의 무역 행위를 공정(fair)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유무역파’, 중국이 미국의 글로벌 패권과 안보를 위협한다고 보는 ‘군부와 정보기관’, 중국산 수입품 때문에 일자리 보전에 위협을 느끼는 ‘노동조합’, 중국공산당의 여론 탄압과 불법적 인신 구속에 분노하는 ‘인권 및 환경운동 진영’까지 느슨한 ‘반중 연합’에 발을 걸쳤다.” 그럼 중국은 어떤가? 지금 중국은 옛날의 중국이 아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 경제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미국을 따라잡겠다고 발 벗고 나섰다. 그러나 중국은 삼권분립과 법치주의, 인권 보장 등 미국이나 한국, 서구 유럽 등이 갖고 있는 민주적 가치가 없다. 특히 시진핑 시대 이후 중국은 ‘아시아 인프라 은행’,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 육·해상 신실크로드 경제권을 형성하고자하는 중국의 국가전략)’, ‘위안화 국제화’ 같은 초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미국을 꺾고 중국의 의지를 세계적 차원에서 관철시키고자 한다. 결국 미-중 대결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대결이 아닌, ‘시장’ 자본주의인 미국과 ‘국가’ 자본주의인 중국의 자본의 힘 대결이라는 것이다. 이 대결에서 미국이 이기면 ‘팍스 아메리카’는 좀 더 오래 갈 것이다. 그러나 미국도 타격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전쟁에서 중국이 버틴다면?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 체제가 유지될 것이다. 혹, 이 전쟁에서 중국이 이긴다면 이제 ‘팍스 차이나’가 다가 올 것이다. 강한 것들의 전성시대가 날개를 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유동하는(liquid)’ 액체의 이미지를 통해 성찰한 사회학자가 있다. 현대성 이론의 대가인 폴란드 출신의 영국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다. 그는 이론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고, 수많은 주제들을 횡단하며 끊임없이 ‘지금, 여기’를 묻는다. 2. 액체근대, 그 유동성에 관한 우려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의 삶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공포, 불안, 자유, 빈곤, 도시, 공동체, 진보, 유토피아 등에 관해 살펴보며 근대를 “유동적 근대(liquid modern age)”로 호명한다. 쉽게 말하면 ‘액체 근대’라는 말이다. 근대성이 가진 특성이 액체성, 곧 유동성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언제 어디에서나 출렁이는 위험 앞에서 우리가 겪는 불확실한 불안에 붙인 이름이며, 그 위협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우리의 인식 불능성에 붙인 이름이며, 그것에 대항해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판단할 수 없는 우리의 무력함에 붙인 이름’이라고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에 내포되어 있는 신비성을 액체근대라는 말로 제거해 버린 바우만은 『모두스 비벤디』(후마니타스, 2010)라는 책에서 액체근대의 5가지 특성을 잘 정리해 준다. 우선, 근대성이 ‘견고한(solid) 국면에서 ‘유동하는(liquid) 국면으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 개인의 선택을 제한하는 구조나, 일상적인 일들과 용인될 만한 행동 양식이 반복될 수 있도록 지켜주는 제도들과 같은 사회적 형태들이 더 이상은 제 모습을 오래 유지할 수 없는(또한 그럴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없는) 여건으로 변해 버렸다. 둘째, 근대국가의 등장 이후부터 아주 최근까지도 사람들은 권력과 정치가 한 쌍이 되어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국민국가라는 한 가정을 공유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이제 이들은 별거 상태로 이혼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다. 셋째, 과거에는 개인이 실패하거나 불행해지면 공동체가 보호해 주는 국가 공인 장치가 있었으나 이제는 이런 장치가 점점 일관되게 줄어들고 있다. 각자 도생의 시대로 전환된 것이다. 넷째, 장기적인 안목으로 생각하고 계획하고 행동하던 유형이 무너지고 오랫동안 이런 유형을 유지해 주던 틀인 사회구조들도 사라지거나 약해진다. 그리고 이처럼 파편화된 삶은 ‘종적인 사고방식(vertical orientation)’보다는 ‘횡적인 사고방식(lateral orientation)’을 조장한다. 사람들은 이제 각각의 단계를 넘어갈 때마다 다른 기회와 상이한 확률분포에 반응해야 하며, 그럴 때마다 다른 기술을 사용하고 자산을 새롭게 배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순식간에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당혹스러운 일들을 해결해야 하는 책임을 이제 개인이 떠맡게 된다. 오늘날 개인은 ‘선택하는 자유인’이 되어 자신의 선택에 따르는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 개인의 이해관계에 가장 도움이 된다고 선언되는 덕목은 규칙(여하튼 극히 드물고 종종 서로 모순적인)에 순응하는 태도(conformity)가 아니라, 그런 규칙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flexibility)이 되는 것이다. 인류가 고체처럼 견고한 사회를 지나 액체(유동적) 근대를 지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전자가 예측 가능한 사회였고, 공동체가 존속했던 시대였다면, 후자는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보호막이 모두 사라져버린 시대이다. 전자의 사회에서 개인은 노동하는 존재로 인식되었고, 따라서 노동 능력을 지니고 있는 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고체 사회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기준은 ‘노동’이었고, 설령 한 개인이 실직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노동능력을 상실하지 않는 한, 그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되어 국가 또는 사회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이 전 지구적으로 이동하는 유동적 근대 시대에 접어들어 상황은 변했다. 이제 한 개인에게 요구되는 조건은 노동력이 아니라 소비력이며, 소비능력이 없다고 간주되는 개인들은 더 이상 공동체의 일원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그들은 없어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 차라리 없어야 하는 존재, 즉 ‘쓰레기’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3. 레트로토피아, 실패한 낙원으로의 귀환? 위기의 때에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대안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실패한 낙원으로 귀환하는 것이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것보다 나은가? 최근 출간된 유작 『레트로토피아: 실패한 낙원의 귀환』(아르테, 2018)에서 바우만은 이렇게 말한다. “대안이 없다며 아늑한 과거에만 머문다면 같이 공동묘지에 들어가는 일만 남을 뿐이다.” 어쩌면 ‘심리상담’과 ‘떡볶이’로 마음을 달래는 역사상 가장 우울한 지금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또한 태극기와 성조기와 이스라엘기로 숨어드는 한 많은 태극기 부대 어르신들에게,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진리 탐구자들에게 주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레트로토피아는 과거(레트로)와 유토피아의 합성어이다. ‘국경 없는 자본’, ‘영토 없는 통치’를 통해 지구화와 개인화를 실천하고 있는 현실의 자본주의 체제를 통해 그 어느 때보다도 비참한 조건 아래 놓이게 된 이들이, 분노와 절망에 내몰린 이들이, 유토피아에 대한 ‘이차 부정’으로 ‘이미 실패한 과거’를 새로운 유토피아로 삼은 것을 지적하는 말이다. 사실 미래와 달리 과거의 기억은 친숙하다. 2016년 영국이 총선거로 유럽연합(EU)을 탈퇴하겠다고 결정할 때, ‘브렉시트’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던 극우 정치인 나이절 패라지(N. Farage)는 이렇게 외쳤다. “내 나라를 돌려 달라(My Country Back).” 2016년 말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캠프 구호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였다. 두 나라의 핵심은 “우리의 삶이 이렇게 망가지기 이전으로 돌아가자.”라는 것이다.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 지구의 경찰국가 미국으로, 디시 옛날로 돌아가자는 이야기이다. 바우만에 따르면 이렇게 과거로 회귀하려는 사유는 그 속에 4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홉스로의 회귀’, ‘부족으로의 회귀’, ‘불평등으로의 회귀’, ‘자궁으로의 회귀’ 등이다. 먼저 ‘홉스로의 회귀’는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으로 상징되는 ‘폭력을 독점하는 근대 주권국가’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미 실패한 것이었다. 둘째 ‘부족으로의 회귀’는 공동체와 개인 사이의 모순이 끝내 ‘나’와 ‘그들’을 나누고 ‘그들’을 배제하는 ‘부족주의’를 다시금 부추기고 있음을 알려준다. 사실 지금 들끓는 전쟁과 테러, 민족주의의 새로운 열풍은 이런 부족 회귀 현상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셋째 ‘불평등으로의 회귀’는 ‘복지국가’ 정책의 실패 이후, 좌파의 복지, 평등을 비판하고, 급격히 확대되는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며, 우파의 경제정책(경제적 불평등을 옹호하는) 복귀를 내포한다. 마지막 ‘자궁으로의 회귀’는 자본주의가 구축한 문화와 생활세계 속에서 갈수록 개인의 문제에만 침잠하는 나르시시즘의 문제를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들의 원천에는 변덕스럽고 불확실한 현재에 내재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레트로토피아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 이상 미래를 꿈꾸지 않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것이다. 4. 기본소득과 초대교회 공동체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과거로 회귀하지 않고, 미래로 가는 대안은 무엇일까? 바우만은 이렇게 말한다.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 결국 서로 다른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것만이 미래를 만들어가는 발판이 될 수 있다. 대화는 타인을 유효한 대화상대로 바라보고, 외국인, 이주자, 그리고 다양한 문화에서 온 사람들을 경청할 가치가 있는 존재로 존중하게 한다. 오늘날 우리는 ‘대화를 만남의 한 형태로 특별하게 생각하는 문화’를 형성하고, ‘공정하게 반응하는 포괄적인 사회라는 목표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합의와 동의를 구축하는 수단’을 창조하는 데 모든 사회 구성원들을 긴급히 동참시켜야 한다.” 그럼 대화만 하면 될까? 대화 이전에 대화가 가능할 전제 조건은 없을까? 바우만도 그것을 알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서로를 ‘유효한 대화 파트너’로 인식하고 대우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추가적인 조건들이 부합되어야 한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상호인정한 평등한 지위’의 보장, 곧 모두에게 적용되는 공정한 경제모델이다.” 쉽게 말하면 경제적 균등이 대화의 전제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적 균등은 어떻게 가능한가? 바우만은 ‘보편적 기본소득’ 프로젝트를 대안으로 제시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파국을 향하는 흐름을 뒤집으려는 투쟁에서 유례없이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곧, ‘보편적 기본소득’에 담긴 철학은 과거 지구화·개인화의 흐름 속에서 끝내 실패해버린 ‘복지국가’의 기반을 뒤집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것이다. 자, 이제 교회부터 시작해 보자. 교회의 모든 헌금을 ‘종교국(이름은 어떠하든 상관없다)’으로 모은다. 그리고 종교국은, 목회자의 사례는 가족 수에 비례해서 지급하고, 교회 운영비는 교회 규모에 맞추어 지급한다. 그 외 남는 모든 금액은 그 교회가 속한 마을의 사회적 약자를 위한 기본 소득으로 쓴다. 그러면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구원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더할 것이다. 거짓말 말라고? 사도행전에 이미 시행되었고, 나와 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 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2-47).” ▲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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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12
  • [기독교 교양 읽기 43] “소란 없이 성평등으로 가는 길은 없다!”
    교회청년들의 ‘미투’ 그리고 페미니즘 ‘우리나라 교인들은 페미니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은 질문이었다. 후반부에 게재된 설문조사 내용과 분석한 글을 보면서는 또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이 수치를 그대로 믿어도 될까?’ 현실과의 괴리감 때문이었다.이 책을 읽는 동안, 최근 인천의 한 교회에서 일어난 그루밍 성폭행 피해자들의 ‘미투(Me Too)’ 폭로 뉴스화면을 보면서, ‘저게 사실이라면 한국 교회에서의 페미니즘은 더 이상 미루거나 방치할 것이 결코 아니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살면서, 얼마 전 여성 장로가 장립 받는 것을 보고서는 ‘세상 참 많이 변했다’는 안일한 생각을 하던 ‘남자 교인’이기에, 교회 청년들의 ‘미투’ 폭로는 너무도 아프게 다가왔다.이 책은 모두 6명의 글이 게재되었다. 송인규(한국교회탐구센터 소장)는 보수주의 측면에서의 기독교회 페미니즘을 살펴보았고, 양혜원(일본 난잔종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자 담론과 연계하여 한국 교회의 페미니즘을 분석했다. 백소영(이화여대 기독교학과 외래교수)은 기독교를 뛰어넘어 사회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페미니즘을 소개하면서 교회도 이에 동참해야 하는 당위성을 이야기했다. 이어서 센터에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분석과 리뷰, 한국의 페미니즘을 시대적으로 요약한 내용이 실렸다. ◈ 《페미니즘 시대의 그리스도인》 || 이 책은 한국교회탐구센터에서 편집한 것으로, 이 센터는 2011년 ‘하나님나라를 위한 교회, 한국 교회를 위한 탐구’를 모토로 설립되었다. IVP, 2018. 18,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페미니즘과기독교윤리》 / 구미정 외 공저 / 예영커뮤니케이션《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 백소영 / 뉴스앤조이 ▌좌담: 김길구, 김수성 경성대 초빙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이것은 우리만 해방되는 사건이 아니다. 답을 가졌다고 생각하면서 가장 ‘비성경적’으로 살고 있는 가부장적 그리스도인들도 해방하는 사건이다. 그러니 이제 시작하자. 교회 안에서 ‘다름’이 들리도록, 보이도록 만드는 사건들을.” [백소영, ‘페미니스트 성서 해석으로 제안하는 교회 제도 개혁’ 끝말 중에서] 진정한 남녀평등 교회공동체 이뤄야김길구 최근 미투(Me Too)운동이 우리 사회의 부도덕성에 신랄한 경종을 울렸습니다. 이와 함께 페미니즘에 대한 교회의 관심도 높아졌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기독교인들도 페미니즘에 대해 좀 더 올바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김현호 이 책에는 복음주의 입장에서 바라본 페미니즘부터 진보적 입장까지 다양한 시각을 한데 모아놓았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입장을 신학적으로 갈무리한 책은 그동안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김수성 그러나 복음주의 입장에서는 ‘평등론’까지는 성경 해석에 따라 어느 정도 인정할 수도 있지만, 페미니즘의 경우는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우려를 나타냅니다. 즉, 인정하기 어렵다는 뉘앙스입니다. 이에 비해 진보적 여성학자는 기독교가 페미니즘을 거부하면 페미니스트들은 결국 교회를 떠나게 된다며, 교회가 가부장제에서 벗어나 진정한 남녀평등 공동체를 이루어야 함을 강조합니다.김길구 필자 중 한 분은 ‘라브리’ 활동을 통해 페미니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교회 사역자 사모가 되자 자기가 생각했던 ‘제자론’의 허실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현실은 복음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문제로 인식하였고,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여성학과로 진학해서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김수성 아무래도 출산과 육아 문제, 여기에 더하여 가사까지 겹치게 되면 아무래도 활동 영역이 좁아질 수밖에 없겠죠.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가부장제를 바탕으로 하는 문화가 오래 전부터 자리 잡았고, 이러한 문화 바탕 위에 기독교가 전래됨으로써 다른 나라에 비해 더욱 가부장 중심의 교회 공동체로 성장한 것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김현호 그렇다고 할지라도 ‘라브리’는 가부장적 분위기가 가장 약한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자훈련을 통해 남녀 구분 없이 사역하는 단체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부분적으로 한계를 드러내는 면이 있기도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 교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비하면 그래도 사역자 부부가 함께 협동간사로서 활동하는 기관입니다. 여성입장 대변할 자리 배정조차 안돼김길구 우리나라의 경우, 가정적으로 본다면 유교적인 가부장제가 상당 부분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단적으로 비혼(非婚)이라 할 정도로 독신자가 늘어나고, 결혼을 해도 출산율은 세계 최저라는 뉴스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와 더불어 교회에서의 가부장적 인식은 아직도 더디게 변화하고 있습니다.김현호 교회에서의 인식도 많이 바뀌었지요. 몇몇 보수적인 교단을 제외하고는 여성들도 목사와 장로 안수를 받을 수 있도록 제도화하였습니다. 물론 교회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내가 출석하는 교회에서는 남녀 구분 없이 직분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여성 목회자들이 강대상에서 설교하는 것에 대해서도 거부감이 없고요.김수성 물론 인식이 바뀐 것은 사실이지만, 어떻게 보면 온정주의라는 생각도 듭니다. 담임목사로 시무하는 여성 목회자는 과연 얼마나 될까요? 여성 장로는요? 이 책에서도 지적했듯이, 현재 교회 교인들의 상당수가 여성인데 여성 목사와 장로의 비율은 턱없이 부족하죠. 뿐만 아니라 이들이 맡고 있는 업무는 전도사와 하등 다를 바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김길구 교단 총회에 참석하는 여성 대의원 역시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즉, 가장 상위에 있는 의사결정기구에 참석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습니다. 개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회에 참석할 수 있는 여성의 숫자는 극히 적습니다. 여성의 입장을 대변할 자리조차 마련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김수성 1970년대부터 미국과 영국에서 전개된 ‘정치적 올바름(폴리티컬 코렉트니스)’ 운동이 있었습니다. 이 운동은 여성주의자들이 남성 중심이 성차별적 단어를 중립적인 단어로 바꿔 쓰자는 것으로, 단적인 예로 의장을 뜻하는 ‘chairman’을 ‘chairperson’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그 이전부터 인종차별적인 용어를 비롯해 장애와 관련된 용어를 순화하였는데, 이제는 남성 중심의 단어를 중립적인 낱말로 바꾸자는 운동을 전개한 것입니다. 위원회 중심의 운영시스템 확산해야김길구 오늘 우리가 개념을 정확히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여성’이라는 접두어를 사용했습니다만, 직분이나 직업 앞에 ‘여’ 또는 ‘여성’을 붙이는 것도 사실은 가부장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여성목사, 여성장로, 여전도사, 여집사, 여교사, 여신자 등 성차별적인 용어를 일반적으로 사용합니다. 경우에 따라 남전도사, 남집사라고는 하지만 남성목사, 남성장로라고는 하지 않죠. 근본적인 인식부터 바뀌어야 합니다.김현호 그래서 페미니스트들은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부터 ‘하나님 어버이’ 등으로 바꾸자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호칭 자체가 하나님의 속성을 남성으로만 편향되게 인식하게 한다는 것이죠. 이에 대해 복음주의자들은 상당한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김수성 마셜 맥루안이란 언론학자가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말을 했습니다. 즉, 같은 뉴스라도 어떤 매체를 통해 접하는가에 따라 다르게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종이신문으로 뉴스를 보는 사람과 같은 뉴스를 스마트폰으로 보는 사람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도 달라진다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어떤 낱말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인식도 달라지는 것입니다.김길구 교회가 사회의 변화에 앞장서지는 못하더라도, 그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면 결국 폐쇄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몇몇 교회에서도 미투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부장제를 유지하면서 다만 여성들에게 시혜적으로 뭔가를 베풀려하지 말고, 근본적이고도 적극적으로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김현호 최근 당회를 구성하기 어려운 작은 교회들의 경우, 위원회를 중심으로 교회 공동체를 꾸려가는 곳이 하나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렇잖아도 교인 수가 얼마 되지 않는 교회여서 위원회 구성은 남성 여성 구분이 없는 것은 물론, 대부분의 경우 여성이 더 많습니다. 즉, 여성들이 앞장서서 교회의 중요 정책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이죠. 큰 교회에서도 이런 위원회를 구성하여 운영하는 방안을 모색하면 좋겠습니다.김수성 사실 페미니즘이 본격화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50년, 우리나라의 경우 30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수천 년을 이어온 가부장제에 맞서기에는 아직도 역부족인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여성들이 자체적으로 성차별을 해소할 수 있는 모임을 갖고, 문제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능동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김길구 이 책에 이런 말이 있더군요. “실제로 문제를 제기하는 교인은 ‘평화를 깨는 이단아’로 취급받는다.” 그러나 “아쉽게도 소란하지 않게 성 평등으로 가는 길은 없다.” 맞습니다. 공동체를 바로세우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다음에는 성탄절을 맞아 춘천제자교회 정해창 목사의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연탄 신학 이야기》(솔라피데, 2018)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정리: 김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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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26
  • [문화펼치기] ‘외로운 늑대’의 분노와 악의 발생사
    1. 영화 <암수살인>과 외로운 늑대 영화 <신과 함께>에서 저승사자 역을 완벽하게 소화한 배우 주지훈이 영화 <암수살인>(2018)에서 삭발투혼까지 감행하며 살인범의 연기를 완벽하게 재현했다. 피해자는 존재하지만, 신고도, 시체도, 수사도 없기 때문에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살인사건을 암수살인이라고 하는데, 2010년 부산에서 있었던 실화를 영화로 제작하였다고 한다. 영화의 첫 장면, 자갈치 한 식당에서 살인범 강태오(주지훈 분)는 형사 김형민(김윤석 분)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일곱, 총 일곱 명입니다. 제가 죽인 사람들예.” 태오가 적어준 7개의 살인 리스트를 보고 직감적으로 사실임을 감지한 김형사는 “이거 못 믿으면 수사 못한다. 일단 무조건 믿고, 끝까지 의심하자.”라고 말하며 수사를 진행한다. 사실 태오가 추가 살인한 것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살인사건이고, 김형사는 태오가 거짓말과 진실을 교묘하게 뒤섞으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수사를 포기 하지 않는다. 부족한 증거로, 또한 공소시효가 끝나버리면 18년 형을 살고 나와도 50세가 되어 또 다시 살인을 할 태오를 잡고자 김형사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마침내 김형사는 증거와 증인으로 태오의 범죄를 밝히고 태오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지만, 융악하고 교활한 살인범 태오는 감옥에서 자살함으로 생을 마감한다. 태오는 왜 그랬을까? 왜 사람을 죽이고 반성하지 않고, 끝까지 악의 화신으로 남았을까? 어릴 때 50세 남성을 죽였다는 첫 번째 태오의 자백 리스트에 답이 있다. 아버지의 폭력에 고통당하는 남매, 그리고 중 3때 그 아버지를 죽인 태오와 그것을 모른 채 하는 고 2인 누나. 아버지의 폭력은 아들에게 유전되어 마침내 어른이 된 태오는 아버지와 같이 폭력을 휘두른다.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애인을 살해하고, 이어지는 행인과의 조그마한 마찰에도 살인을 계속한다. 그리고 풀려나고자 김형사에게 자신의 범죄를 말하며 증거불충분으로 감형, 혹은 무죄를 선고받고자 한다. 사실 분노는 인간이 가진 보편적 정서이지만,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해 타인의 목숨을 빼앗은 행위는 통상적인 행위는 아니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에 이런 일이 잇따르고 있다. 2012년 서울 여의도 흉기 난동사건, 2014년 울산 버스정류장 살인사건, 2016년 서울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 올 2018년 10월에 발생한 서울 강서구 PC방 살인사건, 부산 일가족 피살사건, 경남 거제의 폐지 줍는 여성을 젊은 청년이 살해한 사건 등은 분노에 의한 우발적 살인이었다. 그리고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이 사건의 가해자 대부분은 대인관계가 원만치 않은 ‘외로운 늑대(lone wolf)’유형이라고 한다. 이들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담아둔 화를 적절히 해소하지 못해 범죄를 저질렀다고 한다. 폭력과 살인의 발생사, 곧 죄라는 것이 그저 악한 행위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라면, 교육과 도덕적인 갱신(나아가 약물을 통한 치료와 뇌구조 변경까지)을 통해서 교양을 증진시키고, 사회전체를 잘 정비된 법률로 통제하며 관리한다면 될 것이다. 그러나 태오는 감옥에서 종교적으로는 반야심경을 암송하고, 교육적으로는 법률을 공부하며, 역설적으로 법에 의해 무죄를 선고 받고자 한다. 법과 교육(종교까지)의 무용성을 잘 보여준다. 주변을 둘러보라. 지금 우리의 삶, 사회 환경, 그리고 국제 정치와 인류의 역사는 폭력과 이기심, 살인과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다. 죄는 마르지 않고 폭포수처럼 확산되고 있다. 따라서 비약은 있겠지만 영화 <암수살인>은 기독교 시각으로 보면 악의 실체와 발생사, 곧 원죄에 관한 영화이다. 2. 악의 실체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의 문제를 네 가지 관점에서 논하고 있다. 그것은 존재론적, 도덕적, 심미적, 그리고 종말론적 관점이다. 먼저, 존재론적 관점에서 악은 비존재요, 선의 결핍(privatio boni)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악은 그 자체로 실체가 아니라, 다만 존재와 선의 결핍 상태이다.” 곧, 악이란 스스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 자기완성에 도달하지 못한 실패(결핍)의 상태로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것이다. 태오의 환경이 그를 악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반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선하다(Omnis natura bona est)”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는 본래 좋았다는 것, 본래 악을 창조하지 않으신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기는 하나, 이러한 악의 존재론적 이해는 역사 안에서 체험한 악의 실체를 설명하기에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태오의 잔인성과 교활함은 단지 선의 결핍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 안에서 체험하는 악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는 두 번째로 악의 도덕적 관점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선한 의지의 결핍, 즉 악한 의지(voluntas mala) 또는 ‘탐욕(cupiditas)’이다. 곧, 악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성에서 찾아 악을 도덕적, 경험적으로 선한 의지의 결핍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도덕적이지 않은 행위로써의 악이 있다면 그것과 상관없는 자연악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악은 인간의지의 왜곡이요, 자연악은 그 결과이다. 전자는 죄요, 후자는 죄에 대한 벌이다. 그러므로 모든 악은 죄이든지 혹은 죄에 대한 벌이든지 그 하나이다.”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과 ‘역사관’이 나오게 되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역사는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이야기처럼 줄거리나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전 세계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지혜에 의하여 ‘공간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인간 역사의 사건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시간적 조화’를 이루어 나가면서 최후의 완성을 향해 진행해 나간다.” 따라서 공간적인 조화의 측면에서 악의 문제는 세 번째 ‘심미적인 접근’이, 시간적인 조화의 측면에서는 네 번째 ‘종말론적인 접근’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세 번째 심미적인 접근은 무엇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를 밑에서 부분적으로 보지 않고 위에서, 곧 창조자의 견지에서 전체적으로 보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세계를 부분적으로 보지 않고 전체적으로 보게 될 때 악으로 보였던 부분도 결국 전체적인 조화와 미에 공헌하는 요소들이 되고 만다.” 놀라운 통찰이다. 다시 말하면 이런 것이다. 스테인드글라스의 ‘검정색(만약 이것을 악이라고 한다면!)’을 부분적으로 보지 않고 전체적으로 보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다는 것이다. 『고백록』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에겐 악이 정말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당신에게만 아니라 당신이 창조한 것을 전체적으로 볼 때 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창조한 이 세계 밖에서 어떤 것이 침입하여 당신이 창조하신 이 질서를 파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창조한 일부분이 다른 것들과 조화되지 않아서 악인 듯이 보여도 또 다른 것들과는 조화되어 좋게 되고 또한 그 자체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관점은 때로는 ‘전체를 위한 부분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전체주의를 암시하듯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의도는 하나님의 섭리와 절대 주권을 우주(공간의 차원)에 적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곧, 시간과 역사 안에서 행해지는 인간의 악도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섭리로 인도되어 결국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악에 대한 종말론적 접근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 강해』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네가 무엇을 선택하든지 전능하신 자는 그것 때문에 자기의 뜻을 성취해 나가시는데 고난을 느끼지 않으신다.” 사실 인간이 아무리 악하게 행동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능력 밖에 있을 수는 없다. 우리 인간의 의식적, 무의식적 행동과 생각까지도 이용하여 자기의 뜻을 수행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악용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악도 선용하신다.” 태오에게 면죄부를 주어 희생자의 울음이 그치지 않게 하는 것일까? 더 나아가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리요강』에서 이렇게도 말한다. “하나님은 악이 존재하지 않도록 하기 보다는 악에서 선을 이루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하셨다.” 이것은 역사에 있어서 선과 악의 대립을 통해서 역사의 미와 조화를 이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내려는 것이다. 이것이 『신국론』의 핵심이 된다. 이 세상에는 ‘신의 나라(Civitas Dei)’와 ‘세상나라(Civitas mundi)’가 서로 얽혀 있지만 결국 신의 나라가 승리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의 나라는 이 세상나라에 참여하여 세상나라를 끊임없이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림의 아름다움이 그 그림 속에 잘 표현된 그림자에 의하여 더 미화되는 것처럼 그것을 식별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자에겐 이 우주의 미는 악을 행하는 죄인들에 의하여서도 더 증진된다.” 결국 『신국론』에 따르면 하나님은 종국에 가서는 인간이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악을 제어하시고 시간적이고 유한한 악으로부터 영원하고 무한한 선을 이룩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악의 문제에 대한 종말론적인 해결이다. 태오가 자살함으로 악이 제어된 것인가? 아니면 무기징역을 선언함으로 정의는 구현된 것인가?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 피해자의 사체를 찾기 위해 낙동강 생태공원의 아름다운 갈대밭을 수첩을 들고 걸어다니는 김형사의 모습은 어쩐지 씁쓸하다. “오지희, 어디있노? 니!?” 3. 악의 발생사: 원죄 따라서 김형사의 씁쓸한 모습의 원인은 악의 발생사로 ‘원죄(原罪)’를 논할 때 이해 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자신의 저작 『고백록』에서 해석하면서 그리스도교 교리의 근간이 된 원죄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원죄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죄인인 아담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에게 자신의 성품을 유전시켰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류를 아담과 동일시하기에, 아담과 인류의 관계는 유대관계(또는 연대관계)이다. 따라서 아담의 범죄로 인류는 출생시 ‘죄의 총체(messa peccati)’에 가담한 실제적 죄인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구원받는 ‘구속된 총체(messa redmata)’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죄의 보편성의 원인을 ‘육체의 유혹’으로 보지 않고, ‘의지의 전도(the pervision of will)’로 본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치유의 방법도 ‘은총의 절대성’뿐이라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원죄는 단순한 죄책이 아니라 실제적인 죄이고, ‘모방(imitation)’이 아니라, 출산에 의해 생성되며, 원죄의 결과로 개인들에게는 무지, 육욕, 죽음이 초래되었다고 한다. 반면,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유아는 타락 이전의 아담과 같은 상태로 태어나며 원죄는 아담의 행위에 대한 ‘모방’이며 이러한 죄는 그리스도에 대한 모방, 곧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으로 제거될 수 있다고 한다. 아무튼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자유란 선을 선택하고 완수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결코 이 능력을 소유할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자유의지는 포로가 될 것이므로 죄짓는 용도 외에는 쓸모가 없다. 만일 하나님의 도우시는 조치로 해방되지 않는다면, 의를 행하는데도 쓸모가 없다.” 사실 죄로 인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이탈은 인간의 의지를 왜곡시켰고, 진리에 대하여 눈이 멀었으며 육체에 굴복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은총을 부어 주시어 믿음으로 무지를 정복하고, 사랑으로 자기중심을 대체하고, 소망을 통하여 죽음에 대하여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영화로 시작했기에 영화로 결론을 내려 보자. 태오는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이탈했으며 왜곡된 의지로 진리에 눈멀고, 육체에 굴복당한 것이다. 그가 자살하지 않고 ‘구속된 총체’로 가기엔 선의 결핍이 너무 심했던 것인가? 아니면 멸망할 바벨론 성이었기 때문일까? 답은 태오가 김형사에게 그토록 사주기를 바랬던 변색안경(선글라스)에 있다. 실내에서는 그냥 도수 없는 안경이지만, 실외에서는 빛을 차단하는 선글라스가 되는, 그 안경 말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태오가 안경을 갖고 싶었던 이유를 이렇게 말해준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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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12
  • [영화] 북한을 다룬 영화들이 달라졌다
    남북화해의 시대에 영화 속 북한을 보다 남과 북의 대통령이 벌써 두 번의 정상회담을 가졌다. 북미간의 핵협상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남북은 9·19 군사합의에 따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의 비무장화를 진행 중에 있다. 공동경비구역 안에 있는 화기와 초소를 모두 철수하고 나면 다음 달 중에는 민간인 관광객들의 자유로운 왕래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가 제작된 지 꼭 18년 만의 일이다. 남북의 군인들이 만나서 초코파이를 나누어 먹고 닭싸움을 하는 장면은 진짜 현실이 될 것인가! 지금까지 북한을 다룬 영화의 원형적 요소는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2000)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것은 이영진 영화평론가가 말한 대로 ‘역사의 비극을 불러와 희극으로 치장하고, 결국엔 다시 비극으로 마무리하며 현재의 비극을 환기하는 플롯’의 반복이다. 군사분계선을 넘나들며 우정을 쌓아가던 남북의 네 명의 젊은 군인들이 등장하고, 제대를 앞두고 인사차 찾아간 북한 초소에 갑자기 들이닥친 북한군 간부로 인해 이 우정 어린 상황이 총격전으로 이어지며, 조사 중 주인공은 자살로 끝을 맺는 줄거리는 역사의 비극이 회상되고 다시 비극으로 마무리 짓는 구조를 보여준다. 그러나 남북화해 무드가 한창인 오늘날 우리가 북한을 다룬 영화들에서 가장 주목하는 것은 비극의 중간에 자리한 익살과 유머 그리고 이념을 넘어서는 인간애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군 오경필 중사(송강호)를 필두로 중간 중간 코미디 영화에나 나올 법한 대사와 주인공의 익살스런 연기는 긴장감으로 일관된 상황을 이완시키는 청량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 만일 이 영화를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는데 치중한 추리물로 갔었더라면 틀림없이 지금과 같은 좋은 반응은 얻지 못했으리라. 왜냐하면 <공동경비구역 JSA>의 포장방법은 휴머니즘인데 인간미의 결정적 요소는 분노나 복수에 있지 않고 웃음과 울음에 있는 까닭이다. 주인공 이병헌이 지뢰를 밟았을 때 이를 북한군 오경필이 제거해주는 상황은 웃음과 울음이 교차되는 이 영화의 상징적 장면이다. 이것은 마치 20세기 온 인류를 웃기는 한편 내적으로 울렸던 찰리 채플린의 휴머니즘이 주는 희비극의 가치를 재현한 것이다. 웃음만이 줄 수 있는 가벼움을 극복하면서도 울음이 던져주는 무거운 상황을 이 영화는 아슬아슬하게 교차시킴으로서 탈이데올로기의 시대를 맞아 젊은이들의 가벼움을 추구하는 감각적 성향과 의미를 추구하는 기성세대의 성향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남북의 갈등에서 부패와의 전쟁으로 지난 해 까지만 해도 남북의 상황은 최악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북한의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 실험은 계속됐고 미국은 북한의 핵시설 공격에 대한 의도를 공공연하게 밝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영화는 달랐다. 반공을 앞세운 영화가 나올법한 상황이지만 한국영화는 북한 내부의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아울러 남북 간의 협력모드를 전개시키고 있다. 그 중심에는 영화 <공조>와 <브아이피> 그리고 <공작>이 있다. 김성훈 감독의 <공조>는 위조지폐 동판을 훔쳐서 남한으로 잠적한 북한의 전직 특수부대 장교 차기성(김주혁)을 잡기 위해 남한에 온 북한 형사 림철령(현빈)과 그의 파트너가 되어 북한이 감추고 있는 수사의 진실을 캐내려는 남한의 어리바리한 형사 강진태(유해진)가 벌이는 공조수사를 다루고 있다. 영화는 남북 갈등이 아닌 공조 수사를 통한 남북의 믿음을 강조한다. 상대방의 비밀을 알아내고 감시하기 위해 서로의 휴대폰에 도청장치를 심어놓고 심지어 남한사정을 잘 모르는 림철영에게 수사관의 명패인양 성폭력전과자에게 채우는 전자발찌를 채우는 불신의 상황은 관객에게 웃음을 주는 코미디적 요소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을 잃어버린 남북의 상황에 대한 은유로도 읽혀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코미디와 액션 장르를 오가며 진행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만 한 점은 불신의 관계가 어떻게 믿음으로 발전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남한 형사의 집에서 가족들과 밥을 먹고 시간을 보내는 림철령은 남쪽 파트너에 대한 이해와 믿음의 높이를 쌓아간다. 마치 평양냉면이 남북의 공조에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가를 예측이라도 한 듯 함께 숙식을 같이 하는 가운데 신뢰가 형성이 되고 마침내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영화의 백미는 북한 요원으로 잘 생긴 현빈을 기용하고 남한 수사관으로 개성 있는 유해진을 앞세운 점이다. 이 같은 캐릭터의 반전을 이룬 영화를 즐기게 된 것은 분명 남한이 북한에 대해 갖는 높은 자신감 때문일 것이다. 박훈정 감독의 <브이아이피>(V,I.P.) 또한 남북의 갈등이 아닌 부패한 북한 권력자를 향한 정의를 묻고 국제관계의 복잡한 속내를 드러낸 새로운 유형의 북한관련 영화다. 북한 권력자의 외아들 김광일(이종석)을 기획탈북 시켜서 북한의 중국내 비밀계좌정보를 얻고자하는 국정원 요원 박재혁(장동건)이 한 축을 이루고 있고,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김광일이 한국과 홍콩에서 저지른 여성연쇄살인사건을 추적하는 남한 경찰 채이도(김명민)와 북한 보안성 요원 리대범(박희순)의 집요한 추적이 또 하나의 축을 이루면서 암흑가의 정서와 액션을 화면 가득 담고 있다. 이 영화의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는 두 축이 대립적 구도를 형성하며 갈등을 양산해내는 가운데 전개된다. 윤종빈 감독의 <공작>은 남북관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남한권력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담긴 영화다. 1990년대 활동했던 대북 공작원 흑금성의 간첩사건 실화를 다룬 이 영화는 남북경협에 대한 북한의 관심과 호의를 드러내는 한편으로 정권교체를 막기 위해 북한에 도발을 요청하는 남한 정부의 어이없는 행동을 폭로하고 있다. 이것은 반공영화나 부패한 북한 정권을 문제를 소재로 삼는 지금까지의 영화는 장르를 달리하는 일이다. 그동안 숨겨 온 대북공작의 비화를 서슴없이 드러낼 만큼 남한은 선이고 북한은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어 이상 영화에는 통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북한 주민이 아닌 권력을 문제 삼다 <공조>나 <브아이피>를 본 관객들은 영화의 이야기를 형성하는 여러 구조들 사이에서 뜻밖에도 공통된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모든 북한 문제의 핵심은 권력 중심부의 문제란 사실이다. “북한이 나쁘다 혹은 북한이 문제다” 라고 말 할 때 ‘북한’이란 핵미사일을 개발하고 세계를 위협하는 북한의 핵심 권력집단을 의미할 뿐 북한 주민 대부분은 이와 관계없음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브아이피>에서 봤듯이 일반 주민들은 권력집단의 희생자이거나 생존하기 위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사람들에 불과하다. 둘째, 남북은 공통의 목표 안에서 협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리대범(박희순)의 원래 소속은 35호실 해외사업팀이다. 북한의 35호실은 북한의 대남공작기관으로 리대범은 간첩교육을 받고 공작원 임무를 수행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김광일 사건을 조사하다 함경북도 비료공장으로 좌천된 이후 남한에 와서 채이도 경감과 협력하는 관계로 변화하게 된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매우 까칠하게 대하지만 중요한 정보들이 오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셋째, 남북의 문제에는 항상 미국이 깊이 개입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대부분 한국의 공권력은 미국 정보요원 앞에서 무기력하며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한다. 남북관계 개선이 북미정상회담에 달려있음이 자명한 현실에서 영화는 솔직함을 잃지 않는다. 영화는 관객이 보고 싶은 환상을 담아내며 인간 내면에 잠재된 욕망을 발현하는 도구이다. 남북이 힘을 합쳐 악당을 물리치고 공동의 선을 위해 남북이 손을 잡는 영화 속 장면은 비록 당장의 현실은 아니지만 간절히 원하는 미래의 모습일 수 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며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않는’(사2:4) 장면은 얼마든지 영화에 등장해도 좋다. SF영화가 보여주듯 영화는 미래를 내다보는 기능이 있지 아니한가? 영화를 통해서라도 좋은 꿈을 계속 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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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12
  • [기독교 교양 읽기 42] 초기 선교사들, 부산항으로 입국했다!
    부산 시각으로 본 한국 기독교 역사 이 책은 ‘부산에서 바라본 한국 기독교회사’라는 점을 내세운다. 그동안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회사가 서울을 중심으로 씌어졌지만, 초기 선교사들이 이 땅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 부산임을 새삼 일깨운다. 여러 가지 이유로 발자국이 너무도 희미하여 찾기조차 어렵지만, 그들의 흔적을 하나씩 좇아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한다.여기에 더하여 저자는 일제하 신사참배를 둘러싸고 배교와 순교의 갈림길에서 벌어졌던 목회자들의 ‘민낯’을 드러내 보이고, 이로 인해 해방 후 분열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아픔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역사적 질곡도 부산이 주요 무대가 되어 일어났다. 그럼에도 저자는 이 역사적 사실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고, 이로 인해 오히려 ‘불교 도시’ 부산에 복음의 씨앗을 더욱더 흩뿌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며, 역사적 아이러니를 따듯한 시각으로 해석한다.또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부산지역 기독교계에 나타난 두 가지 상반된 현상도 담담하게 풀어낸다. 북한지역에서 피란 내려온 교인들로 인해 부산경남지역의 교회가 오히려 더 발전할 기틀을 마련하게 된 점과,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시대적 사회 분위기와 환경으로 인해 부산이 다양한 이단이 발붙이고 발흥할 수 있는 요람이 된 점이다. ◈ 《다르게 다가서는 역사》 || 저자 탁지일은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세인트마이클칼리지에서 교회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부산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로 재직하면서 월간 《현대종교》 이사장 겸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교회와 이단》 《찬송으로 듣는 교회사 이야기》 등이 있다. 예영커뮤니케이션, 2018. 13,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호주선교사 맥켄지의 발자취》 / 헬렌 맥켄지 / 대한기독교서회《부산경남지방 기독교회의 선구자들》 / 이상규 / 고신대학교출판부 초기 선교사들, 부산항으로 입국했다!기존의 교회사는 객관적인 사실마저 소홀히 취급해 ▌좌담: 김길구, 김수성 경성대 초빙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특별손님: 탁지일 부산장신대 신학과 교수 “대부분의 한국교회사 서술에는 첫 상주 선교사 알렌이 조선으로 가기 위해 1884년 9월 14일 상해를 떠났다고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알렌의 일기와 보고서에 따르면, 알렌은 9월 14일에 이미 조선 부산항에 도착해 있었다. 백낙준에서 시작된 이러한 오류는 … 1차 자료에 대한 재확인 없이 정설로 굳어져 왔다.” [본문 34쪽에서] ▲ 《다르게 다가서는 역사》는 부산에서 바라보면 한국의 교회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음을 지적하는 책이다(왼쪽으로부터 김수성, 김현호, 탁지일 교수, 김길구). 초기선교사들의 부산항 입국은 팩트!김길구 오늘은 이 책의 저자 탁지일 교수님을 모시고 진행하겠습니다. 복잡한 퇴근시간에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신 교수님께 먼저 감사드립니다(환영). 이 책 제목에 ‘다르게’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다른 교회사와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는지요?탁지일 한마디로 부산과 경남의 시각으로 바라본 기독교회사라는 점입니다. 여태까지 나온 교회사 대부분은 서울 중심 시각이었습니다. 각 교단에서 펴낸 역사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초기 선교사들은 거의 예외 없이 부산항을 통해 입국, 며칠 후 제물포항으로, 그리고 거기서 서울이나 평양 등으로 갔습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교회사 책에는 이 객관적인 사실조차도 소홀히 취급하고 있습니다.김현호 부산에서 특별히 한 일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탁지일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초기 선교사들이 부산항으로 들어온 후 부산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혀 만나지 못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김수성 이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알렌의 일기를 보면 부산의 왜색 도시, 일본인들의 도시로 표현했습니다. 선교사들의 그런 인식이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요?탁지일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초기 선교사들이 부산항을 통해 이 땅에 발을 내디딘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즉 팩트(fact)입니다. 이것은 사관(史觀)의 문제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교회사에는 선교사가 제물포항에 도착한 날짜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칫, 본국이나 일본 등에서 바로 제물포항으로 입항해 서울로 간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김길구 제물포가 서울의 관문이었다면, 부산항은 조선의 관문이었죠. 그런데도 서울의 학자들은 제물포만 언급하고 있군요. 그런데 이 사실이 중요한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탁지일 제가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부산은 다른 지역에 비해 기독교세가 상당히 약한 곳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초기 선교를 공부할 수 있는 역사적 유적이나 유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부산의 신학생들은 물론, 기독교인들이 비빌 언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몇 년 전에 광복동 입구에 선교사들의 ‘입국 표지석’을 세운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하디, 부산서의 고난이 부흥운동 촉발김현호 저는 캐나다 선교사인 로버트 하디가 원산부흥운동을 촉발하게 된 계기가, 부산 영도에서의 고난과 좌절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를 관심 있게 보았습니다.탁지일 하디는 토론토대학교 의대를 졸업한 엘리트 의사로서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영도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본국의 지원마저 끊기자 선교는커녕 직접 가족들의 생계비를 벌어야 했고, 영도의 거주지도 오가는 선교사들의 임시거처(road house)였습니다. 콜레라 등 전염병에 걸린 외국인 환자가 있으면 이곳에 격리 수용하기도 했고요.김수성 그렇더라도 부산에서의 어려움을 원산부흥운동과 연결하기에는 사실 관계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탁지일 한마디로 행간을 읽고 싶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원산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다가 갑자기 공개적인 회개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연결고리를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어느 구절이 그를 자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성경구절에서 그는 부산에서의 고난과 역경을 떠올렸고, 그동안 남 탓만 하였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자신의 문제임을 고백한 것이지요.김길구 초기에 각 교단의 선교사들은 지역을 나눠 선교했습니다. 이러한 것이 신앙의 형태에 영향을 미쳤는가요? 탁지일 북쪽에서 선교했던 캐나다의 경우, 지역에 한정해서 선교한 것이 아니라 조선 사람들이 가는 곳이면 시베리아, 만주, 일본까지 따라갔고, 거기서 민족교육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에 비해 북장로교는 주로 서울과 평양, 경북 지역의 관료층이나 양반층을 대상으로 선교했습니다. 이렇듯 선교부에 따라 신앙 형태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이보다 더 관심을 끄는 것은 각 선교 교단과 담당한 지역이 서로 관련성이 있었던 점입니다. 남장로교의 경우 호남을 담당했는데 농업지역이라는 점, 북장로교와 북감리교가 담당한 서북지역은 상공업지역이라는 관련성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전래사를 상징하는 센터 필요김현호 부산경남지역은 호주 선교부가 담당했죠.탁지일 호주선교본부를 부산을 콕 집어 선교하기로 작정한 것은 헨리 데이비스의 순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선교를 위해 부산에 왔다가 다음날 죽음을 맞이한 그의 열정을 호주선교본부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복병산 기슭에 있던 데이비스의 묘가 사라진 것입니다.김현호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데이비스의 묘비가 있었던 것으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일대가 개발되면서 아예 사라졌다고 하더군요.탁지일 안타까운 일이죠. 이 일대를 중심으로 호주선교부의 기독교 전래사를 기념할 수 있는 센터를 교계에서 하나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합니다. 이런 센터는 역사성, 접근성, 연계성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데, 데이비스의 묘가 있던 지역은 이 모두를 만족하는 입지라 할 수 있습니다.김길구 신사참배와 관련해 부산경남지역 교회가 전국적으로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가요?탁지일 지역마다 조금 차이는 있었습니다. 단적인 예로 평양 등 교회가 융성했던 곳은 신사참배 반대 분위기가 강했습니다. 이에 비해 서울과 같이 학교나 병원을 중심으로 선교하던 곳은 폐쇄를 피하기 위해 소극적으로나마 신사참배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산경남은 적극적인 친일과 함께 이에 강력하게 저항하던 인물을 배출한 곳이기도 합니다.김수성 그래서 부산경남을 ‘배교와 순교의 땅’이라고 불렀군요.김현호 당시 호주선교부는 절대 반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부산경남지역의 교회 확산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요?탁지일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당시 거창, 진주, 마산, 통영 등지에 산재해 있던 재산이 호주선교부가 일제에 의해 철수한 후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들 센터가 사라진 것은 분명히 선교에 마이너스 역할을 했을 겁니다. 부산, 이단 발흥에 좋은 조건 갖춘 곳김현호 신사참배 문제가 한편으로는 교단 분열이라는 결과를 낳기도 했죠. 그럼에도 이에 대한 참회의 모습은 찾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김길구 부산이 이단의 요람이라고 했는데 왜 그렇게 되었죠?탁지일 몇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먼저 부산은 본래부터 불교세가 강한데 비해, 기독교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유입된 교인으로 인해 갑자기 확산되는 등 기독교의 뿌리가 약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단이 생겨나더라도 일반시민들의 눈에는 차이가 없었고, 교세도 약하기 때문에 이를 통제할 힘도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이단이 발흥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김길구 상당히 의미 있는 지적인 것 같습니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한정된 지면으로 인해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이 책을 읽음으로써 신(新)사도행전을 써내려가길 간절히 바랍니다. 다음에는 한국교회탐구센터에서 펴낸 《페미니즘 시대의 그리스도인》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얼마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미투’운동과 관련하여 관심을 가질만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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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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