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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인문학]‘한 사람에 대한 관심과 배려 그리고 존중
    박 양 규 《인문학은 성경을 어떻게 만나는가》 한국의 대형교회의 교육현장에 있던 그의 고민은 하나님의 말씀이 정작 필요한 갈급한 이들에게 성경은 왜 생동감 없이 격리된 언어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의 답이 이 책에 담겨 있다. 그의 해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모세와 함께 출애급한 200만명의 히브리인, 베드로가 전도한 3,000명의 결신자, 오병이어의 기적과 5,000명의 군중처럼 ‘영웅’만 기억하고, 그 뒤에 감춰져 숫자로만 기억되는 ‘아무개’들의 재발견이다. 이를 위하여 문학, 역사, 철학, 예술의 인문학을 끌어드린다. 인문학의 정신이 ‘영웅’이 아닌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관심과 배려, 그리고 존중이라 믿기 때문이다. 지적 과시가 아닌 밀레와 고흐의 시선처럼 아래로의 관심과 환대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때문이다. ◇ 저자소개 박 양 규∥ 총신대와 동 대학원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고려대학교 서양사학과에서 헬레니즘 분야로 석사과정을 마쳤다. 영국 에버딘대학교에서 중간사 분야로 박사 과정을 수료, 삼일교회에서 교회학교를 총괄했다. 목회자로서 저자의 오랜 고민은 목회와 교육현장에서 왜 성경이 현실에 와 닿지 않는가, 왜 성경은 격리된 언어로 존재하는가였다는 그는 현재 대형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성경과 인문학을 연결한 교회교육 콘텐츠를 제시하기 위하여 유튜브 채널 <교회교육연구소>와 <큐리랜드TV>를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유럽비전트립》, 《청소년들을 위한 하이델베르크》, 《중세교회의 뒷골목 풍경》 등이 있다. 샘솟는 기쁨 / 2021. 1. 21. / 16,5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인문학으로 읽는 성경》 김주철 / CLC / 《설교자는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김도인 / 글과 길 / ‘ 지식’이 아닌 ‘시선’ “한국의 기독교 집단이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이 인문학과 관련해서 대담하게 던지는 질문이다, 성경적이지 않다면 인문학으로 성경을 읽는 ‘태도’가 필요한 이유이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인간을 향한 ‘시선’이지 인문학 ‘지식’이 아니다.” 바르게 믿기 위하여 인문학 필요 김길구 우리 코너 이름이 기독교+인문학입니다. 서로 앙숙 같은 신본주의냐 인본주의냐를 가르는데 익숙한 우리 풍토에서 용어에 대한 오해가 꽤 있는 것 같아요? 김현호 그것은 오해지요. 중세는 물론 종교개혁을 선도한 이들의 학문적 배경에는 인본주의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보수적이라는 미국도 1980년대부터 기계문명의 발달로 인한 인간성 상실에 대한 반성으로 대부분의 기독교 학교들이 고전교육 등 인문학을 강화하는 추세입니다. 박영규 말씀하셨듯이 원래 인문학은 기독교 세계 속에서 성경을 뿌리에 두고 태어났어요. 하나님이 주신 이성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사고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함이었으니까요. 김길구 인문학 Humanities 은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런 인문학이 성경과 만나면 어떻게 될까? 오늘의 주제입니다. 김현호 ‘수십 년간 기독교인으로 살아오면서 안타까운 점은 여전히 한국 교회에는 질문과 토론이 없고 자구 하나에 집착하며 바벨탑 같은 성경 지식만 쌓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공허한 설교와 맹목적 아멘만 넘쳐나는 것도 여전하다. 이를 극복하려면 관성으로 굳어진 시각의 틀을 깨고 성경을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경향신문 기자인 저자의 누나가 쓴 추천사의 일부입니다. 우리 교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이지요. 박영규 저자는 학문과 일상, 성경과 삶이 분리되고, 교회 교육의 안팎이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습관과 관성의 틀을 깨는 인문학적 시각으로 성경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김길구 최근 출판계의 흐름 중에 하나는 인문학을 주제로 한 출간이 꾸준히 느는 현상이 아닌가 싶은데, 기독출판계 역시 이러한 흐름에 예외가 아니죠? 어때요? 김현호 그렇지요. 저희 모임에서도 이정일 교수의 〈문학은 어떻게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가〉란 책으로 독서 나눔을 가진 적이 있는데 참가자들이 성경을 인문학적 배경을 통해 다양한 시각으로 이해하려는 것을 보고 저도 놀랐습니다. 교인들의 수준이 높아졌다고 봐야 하나요? 박영규 성경도 잘 모르는데 인문학까지? 라는 부정적 시각도 있고요. 자칫 19세기의 ‘살롱문화’처럼 신분과 계급, 지적 허영을 과시하기 위한 일종의 ‘귀족적 문화’로 변질 될까 우려되기도 합니다. 김길구 책으로 들어가 보죠.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가들의 주제 의식과 명작이 된 시대적 배경에 대하여 예를 들고 있지요? 김현호 「데미안」에서 묘사된 인생의 고뇌, 「걸리버 여행기」에서 말하는 부조리한 현실, 밀레와 고흐의 작품이 전하는 ‘한 인간에 대한 연민’ 같은 투철한 주제 의식이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유로, 러시아 정교회의 극심한 타락과 프랑스 사회의 가득한 부조리가 톨스토이와 까뮈를, 영국사회의 부도덕과 스페인의 부패한 사회상이 톨스토이와 돈키호테라는 캐릭터를 창조한 시대적 배경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박영규 한마디로 시대를 꿰뚫어 보는 작가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을 얘기하고 있어요. 예를 든 작품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기독교가 지배했던 유럽의 얘기들이잖아요.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룬 우리 교계 기독교인의 삶도 점점 ‘살롱문화화’ 되고 있지 않은지 성찰해 봐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작품들은 우리에게 많은 통찰을 주고 있지요. 이것이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겠죠. 주인공이 아니 보통 사람들에 주목해야 김길구 이제 이 책의 주제로 들어왔어요. 먼저 성경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는데, 이 책의 또 하나의 주제는 성경에 나오는 ‘주인공’이 아닌 이 책에서 ‘아무개’라고 불려지는 이름 없는 작은 이들에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김현호 인문학이 신학을 전달하는 통로라면 그것을 잘 아우를 수 있는 장르가 문학 같아요. 서점에 있으면 신학책들이 많이 들어와요. 자칫 과잉교리와 신학의 전달로 성경 말씀이 실생활과 괴리된 공허한 설교가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박영규 저자는 성경의 주인공들의 스토리에 가려진 동시대의 ‘아무개’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 말씀을 적용할 때 말씀에 생명력이 생겨 아무개들이 살아갈 지혜와 영감을 얻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 아무개들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죠. 김길구 이 책은 270쪽에 어떤 믿음을 가졌는가?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등 흥미로운 12개의 주제로 나눠 각 주제마다 벤치마킹, 공감하기, 인문학적 성경읽기라는 3단계 과정을 두어 성경공부의 깊이를 더하는데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장면을 다룬 ‘떠날 것인가, 머물 것인가?’를 통하여 인문학과 성경이 어떻게 만나는가를 알아보죠. 김현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이해하려면 우선 「우르」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르는 세계사에 등장하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도시죠.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 서사시>나 성문법 함무라비 법전은 우르를 중심으로 꽃을 피웠던 이 메트로폴리스를 고려치 않으면 그의 ‘순종과 결단’의 의미가 빛이 바래죠. 당시 우르는 문명과 법 제도가 완비된 완벽한 주거공간이었습니다. 저자는 주인공의 아브라함의 결단에 주목합니다. 공감하기, 그리고 인문학적 성경읽기 박영규 1단계인 벤치마킹하기에서는 여기에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들어가 ‘영웅’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직접 듣지 못하고 전언을 듣고 그의 명령에 따라야 했던 그 많은 주변부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 말씀을 재해석하고, 고심 끝에 따라나서야 했던 이들의 처지를 되돌아보고 그들의 결단에 우리도 공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매일 매일을 크고 작은 선택을 해야 하는 수많은 ‘아무개’ 속에 한 명인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김현호 다음 단계인 공감하기 단계에 이르면 사걀의 <이삭의 희생>을 보면서 당시 사회적 약자였던 사라의 입장이 되어 보고, 고심 끝에 내린 그녀의 믿음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롯이 나그네를 환대하는 장면에 이르면 ‘선한 영향력’이란 고지를 점령해야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설정된 태도에서 나옴을 상기시킵니다. 3단계인 인문학적 성경읽기에서는 창세기 12장1절의 야웨께서 명령하셨다. ‘너 자신을 위해서’ 네 고향, 즉 네 친척, 네 아버지의 집을 떠나~(창12:1, 히브리어 원본)의 성경본문을 통해 번역본에 빠진 ‘너 자신을 위해서’란 부분을 통해 아브라함과 함께했던 아무개들을 살펴보면서 우르를 떠난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아무개들 자신을 위한 것인가?란 물음에 우리가 스스로 답하도록 인도합니다. 박영규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인문학이 하나님과 다른 길을 가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이성을 통하여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김길구 정리하자면 저자의 인문학적 성경읽기의 특징은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등장인물 중 몇 사람으로 기억되는 ‘영웅’들의 위인전이 아니라 주변부의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관심과 배려, 그리고 존중의 시선으로 잃지 않는 따뜻함이 있다는 점이고, 저자는 이것이 인문학의 정신이라고 합니다. 이를 위하여 시대를 넘나드는 해박한 문학, 역사, 예술을 아우르는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텍스트인 성경이 고대 중동의 케케묵은 박제화된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삶의 현장인 바로 지금 여기의 콘텍스트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다가오는 감동을 느꼈던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음 호인 7, 8월에는 여름휴가 관계로 연재를 쉽니다. 비정상이 정상이 되어버린 코로나19 시대 독자 여러분의 건강한 여름나기를 성원합니다. 감사합니다. 【 정리 : 김길구 】
    • 문화
    • 기독교인문학
    2021-06-25
  • [영화] 올림픽이 기억하는 신앙의 영웅
    올림픽이 열리기 전에 꼭 봐야 하는 영화 도쿄올림픽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개최가 불투명한 가운데서도 올림픽을 준비하는 선수들의 심장은 뜨겁게 뛰고 있다. 만일 그 선수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영화 <불의 전차>는 자신의 심장이 요동치는 분명히 이유를 발견하게 해줄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뛰고 있다는 사실에서 금메달보다 더 높고 위대한 목표가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볼 수 있으리라. 영국이 낳은 위대한 육상선수 에릭 리델(Eric H. Liddell, 1902-1945)과 해롤드 아브라함(Harold Abrahams, 1899-1978)의 멋진 스포츠맨십이 빛나는 영화 <불의 전차>(Chariot of Fire)는 제작된 지 40년을 맞이하면서 스포츠영화로써 뿐만 아니라 기독교 영화로도 고전의 반열에 든 작품이다. 198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한 각본상, 의상상 그리고 음악상 등 무려 4개 부문을 획득했을 때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영화 <벤허>가 1960년 아카데미상 11개 부문을 휩쓴 이후로 가장 대중적인 기독교 영화가 탄생했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었다. 그러나 한국의 극장가는 할리우드에서 울려 퍼진 환호성을 35년 동안이나 외면했다. 한국전쟁 이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 가운데 한국의 극장에서 걸리지 않은 유일한 영화라는 꼬리표도 따라붙었다. <불의 전차>가 한국의 극장에서 공식적으로 개봉하기까지는 세기가 바뀐 2016년에서야 가능했다. 필름 원본을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을 거쳐서 디지털 영사 시스템에 맞춘 작업을 끝낸 직후였다. 그리고 지난해 가을 코로나로 인해 극장가에 신작들의 상영이 연기된 상황에서 관객의 호응도가 좋았던 영화들을 모아서 재상영하는 행사 가운데 다시 한번 극장에 걸릴 수 있었다. 이 위대한 명작을 극장에서 볼 수 없었던 것도 그리고 이제야 극장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그리스도인들 때문이었다. 기독교 영화를 외면했던 그리스도인들이 이제야 눈을 떠서 이 영화의 가치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불의 전차>는 기독교가 외면받는 이 시대에 더욱 기독교의 가치를 일깨워 주는 최고의 명작이다. 1924년 파리올림픽 육상 단거리 금메달리스트인 에릭 리델(이안 찰슨)과 해롤드 아브라함(벤 크로스)의 열정 넘치는 도전을 그린 영화 <불의 전차>가 특별한 이유는 신앙과 예술 그리고 재미라는 기독교 대중영화의 세 요소를 모두 갖췄기 때문이다. 신앙의 가치가 빛나는 영화일수록 예술성도 떨어지고 재미도 없을 것이라는 편견은 빨리 버리는 것이 좋다. 세상에서 가장 품위있는 영화 <불의 전차>는 스포츠맨들의 치열한 경쟁을 내면화시켜 품위 있는 스포츠영화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경기에 나서는 선수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시기와 질투 혹은 음모 등은 눈꼽만치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최선의 가치를 추구하는 주인공의 내면적 갈등과 극적인 결과가 매우 느리게 표현될 뿐이다. 연출은 영국 귀족의 자세처럼 기품이 있어 보인다. 대중들의 호기심을 끌만한 자극적인 장치도 촬영기법도 보이지 않는다. 기교를 부린 점이 있다면 선수들이 달리는 장면에서 느린 동작으로 표현하며 반젤리스의 주제가를 덧입힌 정도다. 지난 2012년 제30회 런던올림픽 개막식에서 사이먼 래틀경이 지휘하는 런던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영화의 장면과 함께 바로 <불의 전차>의 테마를 연주함으로써 이 영화가 영국의 현대사를 빛낸 사건임을 전세계에 알렸다. 특히 ‘미스터 빈’으로 알려진 영국의 코미디언 로완 앳킨슨이 코믹한 연주와 연기로 참여하는 바람에 <불의 전차>는 더욱 세계인의 머릿속에 잊을 수 없는 올림픽 영화로 남게 되었다. 이 영화의 품위는 명예를 중시하는 영국인의 고전적인 전통이 내용으로도 확인되고 있어서 주목받을 수 있었다. 1919년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신입생 환영회는 정오를 알리는 12번의 종소리가 멈추기 전까지 캠퍼스를 한 바퀴 도는 달리기 경주로 영화는 시작한다. 이 경기에 참여하고 또한 지켜보는 학생들은 도전과 패기와 열정으로 가득한 젊은이들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들은 단순히 젊다는 의미만을 지닌 학생들이 아니라 순수함과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국가와 세계를 위해 봉사하는 지도자가 될 사람들이란 점에서 세상사는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신입생 환영식에서 캠브리지 대학 학장은 강당 벽면 동판에 새겨진 이 대학 출신으로 1차세계 대전에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전사자 명단을 보며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약속된 미래를 향해 정열적으로 학문을 탐구하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그들은 한 시대의 꽃이었고 영국의 자랑이었습니다.” 이 영화 속에서 나타난 명예란 한 개인이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위해서 살지 않고 자신 보다 높은 뜻을 향해 헌신하고 노력하며 사는 사람의 모습임을 나타낸다. 국가대표 육상선수란 개인의 명예뿐만 아니라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명예를 짊어지는 사람인 것이다. 해롤드 아브라함과 에릭 리델은 모두 영국의 명예를 위해 뛰지만 아울러 이들은 각각 유대인 사회와 스코틀랜드의 기독교도라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명예를 짊어진 사람들인 것이다. 대조적인 두 주인공의 절묘한 성격묘사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교사인 에릭 리델과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의 아들인 해롤드 아브라함을 투 톱으로 내세운 이 영화의 캐릭터 설정은 역사적 실화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절묘한 대조를 이룬다. 두 사람이 육상선수로서 시합을 준비하고 경기에 임하는 자세는 완벽하게 다르다. 한마디로 세계관이 다른 까닭이다. 해롤드는 전형적인 유대인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에릭 리델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해롤드는 최고의 실력있는 코치인 무사비니를 찾아가 자신을 훈련시켜줄 것을 부탁한다. 선수가 코치를 선택하는 것은 마치 봉건시대에 여자가 남자에게 먼저 청혼하는 것과 같이 너무 이례적인 일로서 당시로서는 너무도 파격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은 어떻게든 열심히 노력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인정받고 최상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유대교의 율법주의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리델은 다르다. 그가 심장이 터질 듯 달리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일 뿐이다. 중국선교를 위해 육상을 포기하라는 누이의 권유에 대해 리델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중국을 위해서 날 만드셨어요. 그분은 또한 나를 빠르게 달릴 수 있도록 만드셨지요. 난 달릴 때 하나님의 기쁨을 느껴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남보다 잘 뛸 수 있는 달란트를 주신만큼 이 재능을 주님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신념이 그를 최고의 선수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리델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수용하고 사용할 줄 아는 ‘은혜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는 자는 표정도 남다르다. 아브라함은 항상 긴장된 표정으로 나타나는 반면에 리델의 얼굴에는 평안이 넘친다. 원칙있는 신앙생활에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 1924년 파리올림픽에 참가한 영국국가대표선수단은 에릭이 주일성수를 이유로 그의 주종목인 100m 경기에 나가지 않기로 하자 심각한 혼란에 빠진다. 영화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임원들과는 대조적으로 예배에 참석해서 성경을 읽으며 진중한 리델의 모습을 보여준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이사야40:30) 주일에 교회에 가지 않고 축구하던 어린이를 타일렀던 에릭 리델은 말과 행동이 신앙의 원칙에 기반을 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은근히 가르치고 있다. 리델의 원칙 중심의 신앙생활은 주일성수문제에 대한 논란을 떠나서 관객으로 하여금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돌이키게 만드는데 큰 의미가 있다. 에릭은 동료 선수의 제안으로 자신의 주종목이 아닌 400m 경기에 나가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된다. 100m 금메달 후보였던 만큼 400m에 나가 우승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100m와 400m는 뛰는 방법도 전략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주종목도 아닌데 어떻게 우승할 수 있었을까? 에릭 리델은 달랐다. 그가 예사롭이 않다는 사실은 함께 뛰는 다른 선수들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다. 리델과 함께 경기에 출전하는 옆의 다른 선수들이 리델을 보며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곧 그가 금메달을 딴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속엔 뭔가 있는 것 같아. 자네나 내가 갖지 못한 뭔가 특별한 것 말야.”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어야 하지 않을까? 리델은 모든 행동의 기반을 신앙 위에 두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잘 뛸 수 있는 달란트를 주신만큼 이 재능을 주님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신념이 그를 최고의 선수로 만들었고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신 것이다. 나는 올림픽이 열리기 전 연례행사처럼 학교에서 선교학을 배우는 학생들을 모아서 <불의 전차>를 보곤 한다. 세상의 금메달보다도 더욱 귀한 주님 주시는 면류관을 향해 열심히 공부하고 신아앙의 훈련을 받는 학생들에게 이 영화를 보는 것만큼 즐거운 교육이 없기 때문이다. 최고의 지성을 겸비한 영국 캠브리지의 학생들이 조국과 학교의 명예를 위해 달리는 모습을 보노라면 심장이 뛰지 않을 수 없다. 중국선교사 에릭 리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달리는 것을 보노라면 무신론이 지배하는 세속적 사회에서 우리는 은혜와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자신보다 큰 목표를 향해 달리는 젊은이들은 아름다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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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11
  • [기독교인문학]4차 산업혁명시대, 스마트 선교가 시작되다
    이동영의 《4차 산업혁명과 그리스도인의 삶》 - 교회, 플렛폼 경쟁에 놓이다 - 2016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이란 용어가 처음 사용된 이래 일반화된 이 말은 기존의 컴퓨터와 인터넷 기반 위에 오프라인과 온라인이 결합하여 IoT, CPS, 인공지능 등의 기술혁신의 쓰나미를 통해 만들어질 사회시스템 전반적인 대변혁을 일컫는 것으로 이에 대한 교회의 준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경영학자 출신으로 조직신학자가 된 저자는 가까운 미래 패러다임을 바꿀 혁명의 실체와 그리스도인의 대응을 풀어내고 있다. 총 11장 120 쪽의 이 책에는 각 장별로 토론을 위한 자료가 있어 스타디 그룹용으로 유용하다. 인간이 드디어 자신의 형상을 창조하는 호모데우스의 시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명을 준비하는 이에게 권하는 필독서 ◇ 저자소개 이 윤 석∥ KAIST에서 경영학 석, 박사 후 삼성SDS와 포스코 경영연구소에서 근무. 30대 중반에 목회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총신대에서 조직신학 전공으로 신학석, 박사 등을 마치고 충남 아산에서 아산시민교회를 개척 담임목회를 하였다. 현재는 독수리기독학교에서 연구소장으로 사역 중이다. 저서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관점으로 본 조나단 에드워드의 성화론》, 《성도의 삶에 나타나는 미덕의 특징에 대한 연구》, 《4차산업혁명 시대 코딩 기술과 교회교육》 등이 있다. CLC 간 / 2018.9. / 10,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기술의 불안한 미래》 에그버트스 휴르만 / 비아토르 / 2019 《기술체계》 자크엘륄 / 대장간 / 2013 4차 산업혁명의 문화적 사명 “ 저자는 교회라는 플랫폼에 스마트한 선교/목회/연합을 도입함으로써 기술을 축복으로 변혁시키는 문화적 소명을 신학과 경영학이라는 양날의 검으로 그 누구보다 탁월하게 열 어간다. ”(추천사에서 김준성) 성큼 다가온 4차 산업혁명 김길구 2016년 다보스포럼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이란 말이 처음 사용된 뒤 세계적으로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박영규 사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요. 그 실체에 대한 논쟁이죠. 기존의 컴퓨터와 인터넷 기반의 3차 산업혁명인 지식정보혁명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견해도 있으니까요. 김현호 세기의 대결이라는 이세돌과 딥 런닝으로 학습된 인공지능인 ‘알파고’와의 대결이 4대1로 인간이 일방적으로 패하자 멀게만 느껴졌던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을 전 세계인이 체감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김길구 제4차 산업혁명을 정리하면 IoT, CPS, 인공지능 기반의 만물초지능의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이에 대한 교계의 대처는 어떤가요? 김현호 우리교계도 활발치는 않지만 4차산업혁명에 대한 논의들이 꾸준히 있어 왔어요. 「Be Connected-4차산업혁명과 선교」 (FMnC선교회), 「4차 산업혁명과 기독교학문」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4차 산업혁명과 기독교 포럼」, 「4차 산업혁명 이해와 대응전략」 (새세대아카데미) 와 「4차 산업혁명과 교회」 (한국복음주의조직신학회) 등이 개최되었습니다. 박영규 사실 우리 교계 현실은 거창한 4차 산업혁명이란 이슈보다는 당면한 교인 감소와 대사회적 이미지의 실추, 코로나19로 인한 위기 등에 대한 현안이 더 시급한 실정이지만, 4차 산업혁명이 초래할 특징 중에 하나인 초연결, 비대면으로 인한 극단적 개인화 등이 코로나19 영향으로 더 빨리 촉진될 수 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비정상이 일상화 된 뉴노멀시대에 살고 있잖아요. 인간은 신이 된 동물 김길구 그럼 책의 본론으로 들어가 보죠? 이 책은 4차 산업혁명의 특징과 함께 베스트셀러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후속작 《호머 데우스》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김현호 그도 그럴 것이 사피엔스에서는 과거 인류의 조상이 영장류의 일원으로 유인원으로부터 진화되어 오던 여러 종 중에서 유일하게 사피엔스종이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 이 능력으로 세상의 지배자가 되었는데 이 ‘인지혁명’의 시기가 대략 약 7만 년 전부터 3만 년 전 사이라는 주장입니다. 박영규 그의 후속작인 호모 데우스는 미래 인류 진화에 대해 전망하면서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데우스’로 업 로드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즉 인간은 신이 된 동물로 단어의 뜻 그대로 호모 속에 속하지만 신과 같은 종의 출현을 예고합니다. 김길구 여기서 유발 하라리는 현재 인류가 추구할 핵심 의제로 ‘불멸’, ‘행복’, ‘신성’이라는 세가지를 제시하는데 이를 추구하는 방법이 종전의 종교나 철학의 영역이 아닌 고도로 발전된 현대의 첨단과학기술에 의존할 것으로 보고 있어요. 김현호 작년에 번역된 하버드의대 수명혁명 프로젝트팀의 싱클레이박사가 저술한 ‘노화의 종말’에서 엿볼 수 있듯이 노화는 질병으로 치료할 수 있으며 앞으로 생명과학의 발달로 생명연장을 넘어 ‘불멸’을 추구한다는 주장이지요. 2013년 구글의 벤처투자회사인 구글벤처스 같은 회사는 생명연장과 관련된 프로젝트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고 있어요. 박영규 두 번째 의제는 ‘행복’ 추구인데 종전의 명상이나 종교적 행위, 또는 철학적 숙고가 아닌 생명공학, 사이보그공학, 인간이 갖고 있는 유기체 부분이 아예 없는 비유기적 존재를 설계하고 이 존재에 인간의 의식과 지능을 이식하는 것으로 인공지능과 신경과학의 획기적 발달로 가능하다는 주장입니다. 미래 인류의 핵심의제 불멸, 행복, 신성 김길구 마지막 의제인 ‘신성’인데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데우스로 업그레이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은 아니어도 그리스 신들처럼 초능력을 가진 일종의 신성을 획득하는 존재의 출현이죠. 유발 하라리가 말한 데이터교의 출현 같은 것이죠. 김현호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인공지능의 발전과 사물인터넷으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결합으로 온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면 막강한 지능과 거대한 데이터를 가진 강력한 권력의 출현이 가능하니까요. 박영규 저자는 이런 입장에 대하여 4차 산업혁명의 주요기술들이 인간의 모습을 어떻게 변화시킬지에 대한 많은 시사점을 준 것은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창조질서을 거스리는 부분에 대해서는 분별이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김길구 교회도 일종의 플랫폼으로 플랫폼 경쟁에 놓여있다는 주장이 재미있네요. ‘플랫폼’(platform) 비즈니스는 어떤 형태의 비즈니스 모형을 구상하고 그 모형이 돌아갈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해 놓고 그 안에 많은 사용자를 끌어들이고 나가지 못하게 하면서 수익을 내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최근의 세계 10대 기업 안에 새로운 플랫폼을 제공하는 기업들이 대거 약진하고 있잖아요. 김현호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에이비엔비 등이 이에 속합니다. 박영규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다른 모든 신자는 그 몸의 지체가 되어 전체의 몸을 이루는 공동체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네트워크 에 속해 있는데, 이러한 영적 연합 외에도 4차 산업혁명의 주요 기술들을 도구로 활용할 수 있어야 플랫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교회와 문화와의 관계 김길구 로버트 베버의 문화를 보는 관점 3가지 구분에 중에 아미쉬처럼 분리모형의 입장을 취한다면 산업혁명의 기술 수용에 소극적이면서 선교 또는 전도를 위해서만 기술을 활용하게 될 것이고, 루터처럼 교회와 세상을 동일시 하는 모형이라면 각 기술분야에 그리스도인들은 탁월성을 추구해야 하며, 하나님나라와 세상의 나라가 중첩되면서도 구분되는 경우 어거스틴의 신국론처럼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세상 나라의 각 영역에 침투하여 문화전체를 변혁시켜야 하겠죠. 박영규 긍정과 부정의 양날의 검처럼 양면성을 가진 4차 산업혁명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의 발전으로 일자리를 잃고 저임금 아르바이트나 프리랜서로 내몰려 야기되는 부의 양극화와 불평등의 현상에 대한 균형된 문제의식이 필요하고, 로봇과 인공지능의 경우 기독교 윤리적 입장에서 숙고한 후 개발과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며, 사물인터넷의 경우 사람을 돈벌이 수단과 대상으로 전락시키지 않도록 엄격한 도덕적 기준이 필요하고, 의·생물학 분야 역시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치 않도록 신앙적 분별력이 있는 선한 창조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충고합고 있습니다. 김현호 4차 산업혁명이라는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회를 맞게 되는 기술혁명의 쓰나미 앞에 모두가 ‘두려움’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나 세상에 대해 두려워 말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되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김길구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음 호에는 멈출 듯 멈추지 않는 코로나19를 보면서 일상으로의 회귀를 생각해 보는 CLC에서 펴낸 박동식 저 《코로나 일상 속 신앙, 교회, 삶》을 주제로 얘기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정리 : 김길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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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인문학
    2021-05-21
  • 손상률 목사 회고록 [강 건너 언덕에 서서]
    손상률 지음/하야BOOK/444면/2021.04.28./13,500원 1965년 2월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해 2013년 10월 후암교회에서 원로목사로 추대되기까지 반세기 가까운 목회 여정을 걸어온 손상률 목사! 긴 목회 여정을 끝내고 강 건너 언덕에 서서 내가 살아 온 인생의 걸음걸음 마다 새겨져 있는 은혜의 자취들을 기록으로 정리한 내용을 책으로 엮었다. 총 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1부 “여호와 이레”는 성장과정에서 결혼까지의 내용이 담겨 있으며, 제2부 “임마누엘”은 전도사로 시작하여 원로목사로 마치기까지 시무했던 교회들과 목회현장의 사역들을, 제3부 “에벤에셀”은 목회자로 한 시대를 살아오는 동안 고비마다 흔들릴듯 바로 설 수 있도록 가늠추가 되어준 삶의 철학을 생각하게 하는 내용으로, 제4부 “해와 달과 별과 같이”는 사랑하는 자녀와 후손들에게 올바른 신앙적 가치관을 일깨워 주고 소중한 유산으로 발전해 나가기를 희망하는 내용을 담았다.
    • 문화
    • 도서
    2021-05-21
  • [영화] 동성애를 향한 기독교 해법을 담은 영화
    기독교 영화도 스트리밍 서비스 시대 기독교 영화 사역을 하는 ‘필름 포럼’이 배급상영권을 가진 두 편의 수입 영화를 스트리밍 서비스로 내놓았다. 하나는 신림동 주사랑교회 이종락 목사의 베이비 박스 사역을 다룬 <드롭 박스>(Drop Box, 2014)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 동성애로부터 회복된 찬양 가수 데니스 저니건(Dennis Jernigan)의 고백을 담은 영화 <싱 오버 미>(Sing Over Me, 2014)다. 이 두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는 상영 당시 기독교 언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교회 성도들에게 제대로 홍보되지 못한 채 금방 잊혀지고 말았다. 특히 한국 교회가 동성애 반대 운동에 보인 관심과 열심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를 향한 하나님의 치유와 사랑의 손길을 보여주는 <싱 오버 미> 같은 화제작을 놓친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동안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교회에서 ‘필름 포럼’에 요청하여 교우들이 함께 보는 출장 상영밖에 없었다. 이 경우 교회 안에서의 단체 관람은 가능하지만 개인적으로 영화를 깊이 감상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네이버 영화관이나 케이블 TV의 VOD 서비스를 통해 이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동성애에 대해 기독교 교리적인 접근이나 설교식의 가르침에 부담을 느끼는 현대인들에게 안성맞춤인 <싱 오버 미>는 동성애는 선천적이며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동성애 옹호론자들의 주장을 완전히 뒤집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동성애에 대한 탁월한 기독교 관점을 감동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문제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본 관객 수가 영화진흥위원회 공식통계로는 불과 1,808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다시 한 번, 그것도 쉽고 편하게 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코로나19로 인해 극장을 찾기보다는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그리고 케이블TV로 영화를 보는 것을 선호하는 현대인들의 성향에 맞게 기독교 영화도 스트리밍 서비스나 VOD 서비스로 상영 플랫폼을 바꿨다. 이것은 언제 어디서든 기독교 영화를 손쉽게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까닭에 앞으로는 스트리밍 서비스 제공을 목표로 극장 상영이 이루어지는 변화가 기독교 영화계에도 일어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미국에서 외면한 탈동성애 기독교 영화 영화 <싱 오버 미>는 교회 안에서 동성애자로 살아왔던 데니스 저니건의 신앙적 갈등과 예수님의 사랑으로 회복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다. 마치 무용담처럼 어두운 과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다가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빛나는 행복을 이뤘다는 간증형식의 여느 다큐멘터리 영화와는 다르다. 특히 동성애에 대한 신학적 비판을 쏟아붓기보다는 주인공이 보여주는 진솔한 고백과 눈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은 기독교인이라면 동성애로부터 돌이킬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한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미처 커밍아웃하지 못한 채 숨어서 신앙생활하는 동성애 기독교인이거나 혹은 동성애에 대해 세상적 시각을 가진 기독교인이라도 감동받고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깊은 상처와 혼돈 속에서도 그것을 어루만지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유명 찬양사역자의 다큐멘터리답게 그가 부른 찬양을 배경음악 삼아 그의 과거를 비추며 현재의 고백을 담았다. 어린 시절의 사진을 배경으로 진행하는 부모님과의 인터뷰와 그의 절친 척(Chuck King)이 말하는 저니건에 대한 언급 사이사이로 부모와 친구가 몰랐던 저니건의 동성애에 대한 고백이 이어진다. 다섯 살 나이에 공중화장실에서 바지를 내리고 나타난 성인 남자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청소년 시절 여자아이 같다는 놀림을 피하려고 여자 친구에게 키스했지만 전혀 이성의 느낌을 받지 못한 이야기들은 일반적인 동성애자들의 과거와 비슷하다. 그러나 저니건은 하나님이 자신을 동성애자로 만드셨으니 난 어쩔 수 없다는 자포자기식의 동성애에 대한 자기합리화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갈등하고 변화를 모색해왔다는 점에서 동성애를 숙명으로 알고 사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강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지독한 갈등의 상황 가운데서 기독교의 신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동성애가 유전적 혹은 선천적인 까닭에 동성애에 대한 책임이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 돌리려는 동성애 숙명론자들의 의견이 틀렸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가 동성애에 대해 가지는 왜곡된 이해 가운데 하나는 동성애 숙명론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동성애는 후천적이며 사회적 학습에 따른 경향이 강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왜냐하면 일란성 쌍둥이의 경우 모든 유전자가 동일하기 때문에 만일 동성애가 선천적이라면 일란성 동성애자 쌍둥이는 함께 동성애자여야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싱 오버 미>는 데니스 저니건을 통해 동성애가 어렸을 때 경험했던 왜곡된 성적 경험으로부터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 최대의 장로교 교단에서조차 동성애 목사 안수를 인정할 만큼 동성애 문화에 대해 자유로운 미국사회에서 <싱 오버 미>는 극장에서 개봉조차 하지 못한 채 DVD로만 출시되었다. 영화에 대한 각종 통계와 정보를 보여주는 IMDb(Internet Movie Database) 조차 극장 개봉 및 수입에 대한 통계가 전혀 나와 있지 않다. DVD를 통해 이 영화를 본 미국 기독교인들의 의견은 완전히 극과 극이었다. 10점 만점에 10점을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00점을 쓴 사람도 있었다. 신앙은 물론 성적 취향에 대한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동성애 지지자들이 얼마나 부정적인 시각으로 탈동성애자를 바라보는지를 알 수 있다. 세속적이고 동성애 문화가 만연한 미국사회는 이 영화를 외면했다. 이를 역으로 해석하자면 아직까지도 대한민국은 동성애 문화에 지배받지 않으면서도 성경의 진리를 실현시킬 기회가 남아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싱 오버 미>를 보는데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기독교인은 아직 없지 않은가!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 변증영화 <싱 오버 미>는 동성애를 자연스러운 성적취향으로 인정하려는 현대사회를 향해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을 전하고 있다. 이것은 <싱 오버 미>가 기독교 동성애자들을 향한 멋진 기독교 변증의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현대의 세속적이며 상대주의적인 문화 속에서 프란시스 쉐퍼는 기독교 문화의 변증학적 성격을 강조한 바 있다. ‘변증학(Apologetics)’이란 일종의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는 것을 뜻한다. 특히 쉐퍼는 ‘변증학’의 목적을 방어(defense)와 전달(communication)이라고 말한바 있는데, 여기서 방어는 비기독교 혹은 반기독교적 메세지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보호하기 위한 논증적 방어를 뜻한다. 그러나 쉐퍼는 그의 다양한 저술과 강연, 그의 아들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이었던 프랭키 쉐퍼를 통한 영화 제작 활동이 의미하듯이 방어보다 전달에 관심이 많았다. 즉 그는 어떤 특정한 세대가 이해할 수 있는 형식으로 기독교를 전달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 때 영화 <싱 오버 미>야 말로 오늘날 영화세대에게 기독교가 동성애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 그리고 회복을 기대할 수 있음을 전달하는 훌륭한 문화변증의 실천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싱 오버 미>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기독교 동성애자들은 교회 누군가의 도움을 기대하고 산다는 점이다. 저니건 역시 성인이 된 이후 동성애자로서 살아가는 일에 대한 죄의식에 휩싸이는 한편으로 동성을 갈구하는 육체의 정욕 사이에서 방황하는 자신을 도와줄 누군가를 찾았음을 고백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는 성경말씀은 그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가 찾아간 교회의 도움은 없었고 오히려 교회 목회자는 자신을 탐하는 또 다른 동성애자였음을 알고 기겁할 수밖에 없는 과거 상황묘사에 관객들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동성애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찾아간 교회는 딱 두 부류로 나누어졌다. 동성애에 대한 신랄한 비판만으로 가득 차 있거나 아니면 그와 동성애를 나누기 원하는 목회자가 있었던 교회였다. 이때 크리스천 동성애자들이 취할 수 있는 자세란 교회에서는 이성애자인 척하며 입을 다물고 밖에서는 육체의 탐욕에 스스로를 맡겨버리는 일이다. 교회는 고민 끝에 예배당을 찾는 동성애자들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함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둘째, 예수님이야말로 동성애에 대한 갈등과 상처를 회복시키고 치유하시는 답이 된다는 사실을 영화는 보여준다. 어쩌면 이 영화 가운데 가장 명언이라 할 수 있는 대사가 저니건의 절친 척으로부터 나온다. 동성애로 살아온 친구의 고백을 들은 후 척은 매우 감동적인 말을 한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답은 안다. 답은 예수님이다. 내가 너와 함께 해줄게.” 시간은 걸릴 수 있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답이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롬5:8)이라면 가능하다. 어쩌면 당연하고 기독교의 평범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이보다 더 정확한 해답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을 데니스 저니건은 자신의 삶과 그가 만든 찬양곡을 통해 증거하고 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주 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우리의 귀에 익숙한 찬양곡 ‘약할 때 강함 되시네’는 언제 들어도 기독교인의 마음에 감동을 준다. 예수를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말한(요1:36) 세례 요한의 고백을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고백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나옴을 느낄 수 있다. 만일 <싱 오버 미>를 보고 난 후라면 이 찬양이 주는 감동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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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06
  • [기독교인문학] 공동체의 정의는 하나님의 선을 통해서 온전해 진다
    ‘호통판사’ 천종호의 《선, 정의, 법》 - 정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완성된다 - 소년범의 대부로 호통판사의 애칭이 더 어울리는 저자가 그리스도인들이 도덕적으로 지탄받는 위기의 때에 《선, 정의, 법》이란 책으로 찾아와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작년에 출판한 이래 1년이 안 돼 6쇄를 넘어섰다. 각주만 봐도 12장에 달하는 공들인 책이다. 저자가 윤리학, 정치철학, 법철학은 물론 신학도 넘나들며 법문제에 천작했다. 우리의 생활과 떨래야 뗄 수 없는 법, 가깝고도 먼 법 이야기를 통하여 기독교적 시각에서 친절하게 그리고 꼼꼼하게 풀어놓았다. 법의 목적인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기 위하여 정의로운 공동체를 넘어 예수가 보여준 사랑의 공동체를 제안한다. 그의 결론은 ‘도덕성의 회복은 선의 회복이며, 선의 회복은 정의로운 신의 귀환’이라는 것. ◇ 저자소개 천 종 호∥ 부산에서 흙수저로 태어나 부산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석·박사를 마쳤다. 1994년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1997년 부산지법 판사를 시작으로 24년간 법조인의 길을 걷고 있고, 현재는 부산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재직 중이다. 가정의 문제로 비행을 저지른 청소년들에게 대안가정인 ‘청소년지원센터’를 제공하여 재비행을 줄이는데 기여한 공로로 2020년 ‘옥조근정훈장’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호통판사 천종호의 변명》, 《이 아이에게도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 등이 있다. 두란노 간 / 2020.5. / 16,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덕의 상실》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 / 문예출판사 /1997 《정의론》 존 롤스 / 서광사 / 2010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센델 / 김영사 / 2010 《회복적 정의는 무엇인가》 하워드 제어 / KAP / 2015 사랑은 정의의 최대화 “그리스도인들은 ‘정의의 공동체’에 발붙이고, ‘사랑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람들이다. 정의의 공동체를 무시한 채 사랑의 공동체를 지향할 수 없다. 정의는 사랑의 최소화이고, 사랑은 정의의 최대화이다.” 김길구 오늘은 ‘호통판사’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선, 정의, 법》의 저자 천종호 판사님을 모셨습니다. 작년에 펴낸 책이 이 불황 속에서도 6쇄를 거듭했어요. 내용이 쉬운 책도 아닌데… 박영규 대중적 인기도 한몫했을 거예요. 요즘처럼 도덕적으로 교계가 비난받던 때도 없었잖아요? 우리를 돌아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현호 이 책에서도 언급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이 당시 영미권에서는 10만부밖에 안 팔렸는데 우리나라에선 200만부가 넘게 팔렸습니다. 법조인으로서 마이클 샌델의 견해에 어떤 입장이신가요? 우리 국민들은 왜 이 ‘정의’ 문제에 그토록 예민할까요? 천종호 우리 사회는 선이 없는 정의론인 ‘자유주의적 정의론’에 크게 치우쳐 있어 ‘공동체주의’를 주장하는 마이클 샌델이 인기가 많다는 것이 저에겐 의외였어요. 우리 사회가 공정과 공평을 다루는 ‘정의’ 문제에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김현호 ‘사회가 불공정합니까?’란 물음에 미국인들은 30%, 한국인들은 70%가 그렇다고 답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조국 딸 입시 특혜, 인천공항 비정규직 전환, 의대생 국시 재응시 문제, LH 사태 등에서 보여준 공정성에 불신이 지지율뿐만 아니라 이번 선거의 결과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천종호 공정성 여부는 객관적 데이터보다 국민의 정서와 관련이 깊겠죠. 우리 사회 정의의 수준이 국민의 정서를 어루만져 주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이죠. 언급한 사례들은 이런 감정을 증폭시킨 예라고 봅니다. ’같은 것은 같게‘라는 공평과 ’다른 것을 다르게‘라는 공정이 우리 사회에 빨리 뿌리 내려야겠습니다. 정의와 공의 김현호 정의의 문제에 성서의 예를 드셨어요? 천종호 사회나 학계에서는 정의라는 단어 하나만 쓰는데 비해 성경에서는 공의(체다카)와 정의(미쉬파트)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사회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공의와 정의를 묶어 ‘정의’라는 한 단어를 활용하여 정의의 개념을 말해보죠. 정의는 동태적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근로를 제공하여 급여를 받았습니다. 이를 ‘분배적 정의’라고 합니다. 그 사람이 휴대폰을 사서 자녀에게 준다고 해도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습니다, 이를 ‘향유적 정의’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 자녀가 휴대폰을 이른바 일진에게 빼앗겼다면, 이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되고 돌려받아야겠지요. 이를 ‘시정적 정의’라고 합니다. 그리고 휴대폰을 빼앗은 아이에게는 형사법상의 조치(형벌 또는 소년보호처분)가 이루어집니다. 이것도 시정적 해당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그 아이의 딱한 사정이 밝혀졌는데, 주위에 아무도 휴대폰을 사 줄 사람이 없었던 거예요. 이런 경우 그 아이로 하여금 재범을 방지하려면 그 아이에게 휴대폰을 사 주어야 합니다. 이것을 ‘재분배적 정의’라고 합니다. 이 네 가지 정의를 다시 두 가지로 압축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배분적 정의(분배와 재분배)’와 ‘시정적 정의(향유와 시정)’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배분적 정의를 이루려면 사회제도가 구축되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개인이라도 선의(호의)를 베풀어야 합니다. 이렇게 국가나 사회가 하지 않는 일을 개인이 선의를 다해 정의를 이루는 것을 성경에서는 ‘공의(체다카)’라고 합니다. 이에 비해 정의(미쉬파트)는 주로 법정에서 어긋난 정의를 시정하는 것을 의미하죠. 김길구 우리가 눈여겨볼 대목은 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야 등의 예언서에는 정의와 공의라는 단어를 쌍으로 같이 쓰고 있다는 거예요. 이를 두고 어떤 분은 ‘정의의 무자비함과 정의 없는 사랑의 무력함을 극복하기 위함’이라고 했는데, 공감이 가더군요.. 박영규 판사님도 비행청소년들의 아버지로 명성이 높으신데 1900년 캐나다에서 비행청소년들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교정복지 프로그램으로 ‘회복적 정의운동’을 시작하여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하시는 사역과 비교해 보면? 천종호 회복적 정의는 크게 세 가지로 접근해야 합니다. 피해자와의 관계 회복, 재비행을 막기 위한 공동체(가정)의 회복, 전과자라는 낙인효과 방지를 위한 사회와의 회복입니다. 제가 주로 활동하고 있는 바는 두 번째로, 가정의 문제로 비행을 저지른 아이들에게 대안가정인 ‘청소년회복센터’를 제공한 다음 재비행을 막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있어서는 회복적 정의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첫 번째, 세 번째의 것은 저 혼자만으로는 벅차요. 사회가 함께 풀어야 할 과제이지요. 기독교공동체는 성품의 공동체 김현호 순서가 바꿨습니다만 정의의 실현을 위하여 이 책의 핵심이기도 한데 ‘선’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왔어요? 천종호 줄여 얘기 드리면 기독교에서 선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최고선이고, 본래적 선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선이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저는 로마서 8장 28-30에서 그 답을 찾았습니다. ‘선을 이루느니라’는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셨으니,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다’와 같은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최종적으로 영화롭게 되기까지의 단계{미리 아심, 미리 정하심, 부르심, (중생) (회심) 칭의, (성화) (견인) 영화}를 보여줍니다. 그 중 ‘미리 아심에서 칭의’까지의 단계는 잃었던 생명을 회복하는 구속(속량)의 성취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고, 성화에서 영화에까지 이르는 단계는 성품과 인격의 완성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을 이룬다는 것은, 생명을 구원하여 하나님과 예수님의 성품과 인격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선은 구속의 확신을 나날이 더해 가는 것과 하나님과 예수님의 성품과 인격을 닮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기독교 공동체를 ‘성품의 공동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품의 공동체가 이루어 내는 선을 ‘공동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이 없는 정의론’에서는 ‘공동선’이라는 개념보다는 ‘공익’이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정의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여러 제도적 장치도 필요하지만,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정의로운 성품이 필요합니다. 김길구 수고 많으셨습니다. 천판사님의 매력에 폭 빠진 시간이었습니다. 격무로 알려진 판사직을 수행하시면서 그 바쁜 와중에서도 전문가 못지않은 다방면의 독서와 그 해박한 식견, 그리고 무엇보다 뜨거운 열정이 돋보인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호에는 멈출 듯 멈추지 않는 코로나19를 보면서 일상으로의 회귀를 생각해 보는 CLC에서 펴낸 박동식 저 《코로나 일상 속 신앙, 교회, 삶》을 주제로 얘기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정리 : 김길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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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인문학
    2021-04-26
  • [영화] 유배 속에서도 빛나는 인생을 만드는 세계관
    절망 속에서 낭비하지 않은 인생을 말하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는 항상 유머를 동반한 교육적 가치가 빛난다. 피교육자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흥미진진한 교육방법을 추구하는 교육자라면 그리고 목회자라면 그의 영화만큼 좋은 시청각 교육자료는 없다. 영화 <사도>에서는 영조의 강압적인 교육열이 가져온 부정적 결과를 보며 가정교육의 현실을 되돌아볼 수 있었고, 백제(전라도)와 신라(경상도)의 결전을 보여준 <황산벌>에서는 사투리를 해석하지 못하는 바람에 백제를 공격하지 못하는 신라군의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지켜보며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었다. <라디오 스타>(2006)와 <즐거운 인생>(2007)에서 <변산>(2018)에 이르는 현대물 또한 사회의 주변부에 머무르는 인물을 통해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를 이준익 감독은 유머 감각을 곁들이며 관객을 감동적인 교육의 현장으로 인도했다. 이 감독의 영화를 통한 의미의 전달 양식은 1959년생인 그의 나이가 말해주듯 자칫 ‘꼰대 이야기’로 들릴 듯하지만, 현대인이 잃어버린 혹은 필요로 하는 시대상의 가치와 맞물려 매우 품격있는 영화로 인식되곤 한다. 그의 최신작 <자산어보> 또한 마찬가지다.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이 흑산도에서 16년간 귀양을 살면서 쓴 <자산어보>가 기록된 배경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당시 국가적 지탄의 대상이었던 사학죄인의 남다른 행보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절망과 고독의 순간에도 빛날 수 있는 세계관의 결과이기도 하다. 절망적일 것 같은 흑산도의 유배 생활에서 정약전(설경구)은 사람과 바다를 발견한다. 영화에서 그는 주변을 돌아보고 이웃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야말로 절망과 고독을 이기는 비결임을 깨닫는다. 정약전은 서자출신의 젊은 어부인 창대(변요한)와 깊은 교류를 나누며 마을 사람들과 어울릴 뿐만 아니라 상것들이나 관심을 보일 물고기에 대한 호기심을 감추지 않는다. 아무리 죄인이라고는 하지만 유교 사회에서 중앙관직에 올랐던 양반이 비린내 나는 생선을 주무르고 갯벌을 헤집고 다닌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괴상한 행동에 의문을 품은 창대를 향해 약전은 이렇게 말한다. “학처럼 사는 것도 좋으나 구정물, 흙탕물 다 묻어도 마다 않는 자산 같은 검은색 무명천으로 사는 것도 뜻이 있지 않겠느냐” 약전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물고기에 대한 호기심이 충만해서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을 바라보는 세계관이 유교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즉 바다와 물고기에 대한 관찰과 경험을 바탕으로 지식을 기록하려는 자세는 서학과 가톨릭의 영향을 받은 세계관의 결과이다. <자산어보>는 일종의 어류도감이다. 유교가 중심인 당시 상황에서 생물학자도 아닌 그가 나름대로의 분류법을 만들어 어류도감을 쓰는 이유는 서학으로부터 실용적인 지식의 가치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세계에 대해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장약전과 동생 정약용은 가톨릭 신앙을 가졌었지만 후에 가톨릭과 결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약전 연구가들은 그가 가톨릭 신앙을 떠난 이후에도 예수의 십자가구속과 같은 핵심 교리를 믿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지만 인격적이며 만물을 주재자인 하나님으로서의 천(天) 개념을 유지하였을 것으로 여기고 있다. 특히 천(天)이 만물을 짓고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평등적 인간성(仁)을 부여하였다는 생각을 여전히 갖고서 이를 유배 생활 가운데서도 적용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왜 정약용이 아닌 정약전일까? 정약전의 동생 정약용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비견될 만큼 조선 후기에 다양한 분야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르네상스적인 인물이었다. 철학에서부터 유학과 법학, 의학, 건축 등 조선 후기에 살았던 실학자로서 일반적인 학자가 관심을 가졌을 분야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영역에도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여 탁월한 저서들을 남기기도 했다. 그가 남긴 500 여권의 저서들은 워낙 분야가 다양하고 방대한 내용을 가지고 있어서 아예 정약용을 학문의 중심에 놓고 그의 사상을 연구하는 다산학(茶山學)이 탄생할 정도다. 그렇다면 정약전(丁若銓)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어떨까?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정약용의 형이며 <자산어보>(玆山魚譜)의 저자라는 정도는 알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정약용에 비하면 생소하기만 하다. 특히 정약용의 유배지인 강진에 비하면 정약전이 16년간 유배 시절을 보낸 흑산도는 지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대중들에게는 거리감을 느끼게 만든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993) 시리즈의 첫권인 ‘남도답사 일번지’에서 첫 번째로 꼽은 장소가 전남 강진이었고, 강진의 문화와 역사의 중심에는 정약용과 다산초당이 있었다. 그런데 흑산도는 목포에서 쾌속선을 타고도 2시간을 가야 하는 섬이고, 강진만큼 인기 관광지도 아니며 흑산도 홍어가 생각날 뿐 그 누구도 정약전을 흑산도와 연결지어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다. 그런데 한국에서 대중적이며 의미있는 역사 영화를 잘 만들기로 소문난 이준익 감독은 강진의 정약용이 아니라 흑상도의 정약전을 택했다. 당연히 할 얘기도 많고 무엇보다도 관객들이 익히 잘 알고 있어서 정약용을 다루는 영화를 만든다면 흥행에도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그는 정약용이 아닌 정약전을 취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감독의 민초 중심의 역사관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전에 만든 역사 영화의 면모를 훑어보면 답은 금방 찾을 수 있다. <왕의 남자>(2005)로 시작하여 <황산벌>(2003)과 <평양성>(2011), <사도>(2015), 그리고 <동주>(2016)와 <박열>(2017) 등의 역사물을 만든 이준익 감독은 <자산어보>의 정약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가 역사를 보는 시각 가운데 하나는 전면에 드러나지 않은 숨은 역사를 통해 현시대를 잘 들여다 돌아보는 일이다. 이준익 감독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과거 역사와 현재와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역사는, 현재를 투영하거나 반영하는 것이다. 현재를 반영하지 않을 거면 사극을 왜 찍어야 하나? 과거의 이야기가 현재와 맞닿는지가 중요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기록된 역사와 흥미진진한 왕과 권력 중심부에 있었던 인물을 통한 역사 외에도 기록되지 않았지만 혹은 표면에 드러나지 않지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중요한 의미를 전해주는 역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이준익 감독은 카메라의 앵글을 맞춘다. 그로 인해 관객은 천편일률적인 역사가 아닌 새로운 역사를 이해하고 앞으로의 역사를 창출해나갈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대 차이 극복의 비결, 젊은 벗을 두었는가? 이준익 감독은 <자산어보>에 등장하는 정약전의 명대사로 “벗을 깊이 알면 내가 더 깊어진다”를 들었다. 이것은 약전이 창대의 스승 역할을 하면서 벗으로 살아갔던 유배 생활의 묘미를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외울 줄밖에 모르는 공부가 나라를 망쳤다”라고 생각하는 약전과 어떻게든 유교 경전을 공부해서 출세를 원하는 창대는 가치관의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거기다 양반과 서얼이라는 신분의 차이는 물로 나이도 확연히 구분된다. 평생을 공부만 하던 선비와 물고기만을 잡아 온 어부 사이에서 공통점은 하나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벗이 되었으며 깊은 교감을 나누는 사이로 변했을까? 영화는 서로를 인정하며 자신의 필요를 채워줄 상대를 발견했기 때문임을 보여준다. 약전은 바다와 물고기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창대를 인정하며 자신이 가진 실학 정신을 구현해간다. 창대는 약전이 비록 나라의 벌을 받는 사학죄인이지만 그의 학문의 깊이를 인정하고 자신이 필요로 하는 글공부를 도와줄 사람임을 알게 된다. 사대부는 어부와 함께 하지 않고 왕을 따르는 백성은 사학죄인을 가까이 해서는 안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의 공부를 돕는 관계로 나아가면서 서로의 인생의 발전을 꾀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에도 이준익 감독의 영화를 통해 교육자료를 얻게 되었다.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교회를 성장시키데 <자산어보>는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한국사회와 교회가 당면한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세대 간의 갈등이다. MZ세대(밀리니얼 세대와 1995년 이후에 태어난 Z세대)는 기성세대를 불신하고 기성세대는 이들이 자신의 가치관과 다르고 이해할 수 없는 세대라며 혀끝을 차고 있을 뿐이다. 교회는 특히 최첨단 기술 문명의 혜택을 받고 자란 MZ세대를 수용하는데 그 어려움이 더욱 심하다. 해결방안은 <자산어보>가 보여주었다. 세대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른 두 사람이 어떻게 인생의 발전을 이루어가는가를 말이다. 영화에 초반부에 등장하는 약전과 창대 사이의 관계는 전혀 화합할 수 없는 갈등 덩어리였지만, 어느새 서로에게 벗과 스승의 관계로 새롭게 변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입신양명의 꿈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온 창대가 약전이 쓴 <자산어보>를 붙잡고 우는 장면에서 결국 그들은 하나의 가치관으로 통일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2:4). 내 안에 하나님의 진리가 있다면 진리 안에서 새로운 세대와 하나 되는 기쁨을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문화가 다르고 외계인처럼 사는 것 같지만 MZ세대에게도 배울 것이 있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교회는 가지고 있지 않은가! 약전이 유배 생활 중의 시선을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했다면 그는 결코 행복하지도 않았고 <자산어보> 같은 위대한 자연과학서는 탄생하지 않았으리라. 흑산도에서 그의 눈길은 자신이 아닌 자신을 둘러싼 어부들과 바다를 향해 돌렸고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사상을 실천하고 그를 따르는 제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일이다. 이제 돌아보자. 벗을 삼고 스승을 삼을 만한 사람이 누구인지 호기심을 가득 머금은 눈길을 가지고 주변을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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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9
  • [기독교인문학] 예수의 영성은 예언자의 영성
    차준희교수의 《열두 예언자의 영성》 -정의, 긍휼, 신실에 대한 치유 메시지- 구약학자인 차준희 한세대학교 교수의 역작이다. 「목회와 신학」에 12회에 걸쳐 호세아부터 말라기까지 12명의 소예언자들에 관한 글을 모아 2014년에 출간했다. 서로 다른 배경과 메시지의 다영성이 현재 6쇄를 거듭하며 꾸준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비결이다. 저자는 출간한 그 해에 일어난 세월호 사태를 빗대 한국교회의 침몰을 논하며, 정의와 긍휼, 신실의 회복을 통하여 치유의 해법을 찾고 있다. 교인들의 외면으로 오래전에 우리의 강대상에서 쫓겨난 예언자들의 거친 숨소리를 저자는 현대의 감성에 맞게 되살렸다. ‘상식이 예배보다 우선이다’(호세아), ‘성령을 받으면 목소리가 아니라 지갑이 열린다’(요엘), ‘무능이 전능을 이긴다.’(스가랴) 등 제목부터 이채로워 눈길을 끈다. ◇ 저자소개 차 준 희∥ 서울신학대학교, 연세대학교 대학원, 독일 본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는 한세대학교 구약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7년에는 한국구약학연구소를 설립해 한국교회 강단을 섬기며, 목회자들의 구약설교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새물결플러스 간 / 2019. 2. / 13,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예언자들》 아브라함 J 해셀 / 삼인 / 2004 《예언자적 상상력》 월터 브루그만 / 복 있는 사람 / 2015 (개정판)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김근주 / 한국성서유니온 / 2015. 《키워드로 읽는 예언서》 성기문 / 세움북스 / 2015 예언자 영성=예수의 영성 “예수는 구약의 핵심으로 예언자의 영성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의 영성은 다름 아닌 예언자의 영성이다. 한국교회는 예수의 영성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김길구 오늘은 차춘희 교수의 《열두예언자의 영성》 입니다. 보궐선거를 앞두고 LH공사 직원의 내부정보를 이용한 부동산투기가 여권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집권 내내 부동산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여권으로서는 큰 위기를 맞아 철옹성 같던 콘크리트 지지가 흔들릴 지경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는 것 같아요. 박영규 우리만 아니라 전 세계가 불평등의 문제로 야단입니다. 국제구호개발기구 옥스팜이 작년에 발표한 2019년도 불평등보고서에 따르면 세계수퍼리치 2,153명 46억명보다 더 부유하다는 통계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더욱 부의 쏠림현상이 심화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지요. 김현호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의 수평이동이 일상화된 요즘도 대형교회들은 그동안 의 교회성장론을 바탕으로 더욱 대형화되고 작은교회들은 유지가 어려워 문을 닫는 일들이 속출하고 있잖아요. 김길구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계에서 이러한 사회부정의의 문제를 얘기하는 분들이 별로 없어요. 오늘 열두예언자의 영성은 구약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사회정의의 문제와 약자의 돌봄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박영규 예언자들의 높은 도덕성과 윤리성이 변방 중동의 종교를 세계의 종교로 발돋음 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분명합니다. 저자는 한국교회가 직면한 위기를 구약 예언자 정신의 실종에서 찾고 있어요. 김현호 히브리 예언자의 사회정의는 서양문명을 이루고 있는 그리스의 이성과 철학, 로마의 법과 질서와 함께 3대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러한 기독교적 정의의 정신이 우리사회 저변까지 미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워요. 사회정의가 서구의 3대 주류 이뤄 김길구 원래 이 책의 편집이 월간지의 연재 형식이어서 서론 없이 열두 명의 독립된 얘기들로 구성되었어요. 다행히 유튜브에 서론격인 강의도 있어 참조하시면 좋겠네요. 그럼 예언자는 누구죠? 김현호 히브리의 예언자는 단순히 미래만을 점치는 점장이나 마술사와는 다르죠. 미래의 예언도 하지만 하나님께 받은 지금 필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해석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언자의 ‘예’자가 과거 한자로 미리 예(豫)를 썼는데, 요즘은 ‘미리’라는 의미도 포함된 ‘맡길’ 예(預)를 쓰고 있더군요. 역할에 있어서도 제사장은 토라 즉 말씀을 가르치고 제사를 집례하는 일을 주로 하는데,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대신 기도해 주는 중보자의 일은 제사장이 아닌 예언자의 몫입니다. 물론 사회비판은 기본이고요. 박영규 책을 흥미롭게 봤는데요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단지 확성기로만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각기 다른 기질과 성격과 개성들도 함께 사용하신 것 같아요. 같은 듯 조금씩 결이 다른 그들만의 색깔이 성서를 더욱 다양하고 풍요롭게 한다고 느꼈습니다. 예수, 히브리 예언자 전통따라 김길구 저자의 주장은 예수의 영성은 예언자의 영성이니 그를 따르는 우리도 예수처럼 예언자의 삶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볼까요? 박영규 그 논리의 출발점은 대표적인 성구인 마 23:23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 말씀에 언급된 정의, 긍휼, 믿음이 구약 예언자들의 핵심 키워드입니다. 김현호 아시다시피 이러한 예언자 정신이 가장 잘 드러난 것 곳이 ‘정의’는 아모스, ‘긍휼’은 호세아, ‘믿음’은 이사야서들인데, 예수도 이러한 구약신앙의 핵심 사상인 예언자들의 전통을 따라 압축한 것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나타난다고 봐요. 현재 위기의 한국교회를 구하는 길은 예수처럼 예언자 정신을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김길구 그러면 지면관계상 다할 수 는 없겠고 12인 12색 중 세 분의 본문 속으로 들어가 책의 매력에 빠져봅시다. 박영규 순서대로 호세아는 문서예언자 중에 유일한 분단시대 북왕국 이스라엘 출신 예언자입니다. BC 8세기 대제국 앗시리아의 부상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시기에 활동했어요. 신실하지 못한 믿음과 하나님과 바알신을 겸하여 섬긴 혼합주의를 부부관계의 불륜인 간음행위로 질타합니다. 김현호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고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 는 것이 핵심 메시지입니다. 소제목이 ‘상식이 예배보다 우선이다’로 단 것은 교인들은 이중생활, 예배 당 밖의 일상에서 인간도리를 잘하라는 것입니다. 상식적인 행동과 처신으로 신뢰를 회복하라는 이 메시지는 요즘 신뢰를 잃어 교계에 싸늘한 시민들의 시선 앞에서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게 하는 말씀입니다.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강같이 박영규 아모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최근 국제적 문제로 떠오른 미얀마 사태를 보면서 과거 광주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경찰의 차단벽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한 수녀의 사진이 전 세계인에게 큰 울림을 주었죠. 부정의 앞에 저항하지 않고 그 이익을 누린 자들을 비판한 아모스의 소제목이 “공동체 의식이 없는 자들의 예배는 하나님과 무관하다”였는데, 우리가 분개하는 LH사태나 부동산 폭등 사태 등에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나?를 자문하게 됩니다. 김현호 아모스가 활약한 시대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잘 나가던 때였어요.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곪아가고 있었지요. 양극화가 심화 되고 약자들의 삶은 사회적 불의와 도덕적 타락으로 피폐해가기만 했어요. 게다가 예배도 변질되어서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을 섬기는 예배로 전락하는 지경에 이르자, 하나님은 이런 제사를 단호히 거부하면서 그 유명한 말씀 ’오직 정의(미쉬파트)를 물같이, 공의(체다카)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공동체 혹은 공공의식 없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지 않나요? 김길구 하나님의 영이 특별한 이들에게만 독점되지 않고 중재자 없이 이스라엘 백성 모든 사람에게 물처럼 부어질 날을 노래한 요엘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자는 이를 ’하나님 영의 민주화‘라고 했어요. 차별 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근대를 연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만인제사장설’을 너머 이미 오래전에 ‘만인예언자설’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성령공동체 안에서는 어떠한 종류의 소외도 없다는 선언은 교회 안에서 직분이 계급이 된 지 이미 오래고, 그 어느 곳보다도 돈이 위세를 떨치는 오늘날 우리 교회의 현실과 너무 다르죠. 문제는 이것이 교회 안에서는 안 보여요. 이미 체질화되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예언자의 영성으로 거듭나 교회가 새로워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다음 호에는 하나님의 선은 어떻게 인간 공동체에 구현되는가를 생각해 보는 두란노 刊 《선, 정의, 법》의 저자 천종호 판사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정리 : 김길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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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인문학
    2021-03-26
  • 최현범,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가라]
    최현범 지음 / 도서출판 대장간 펴냄 부산중앙교회 최현범 목사가 연구한 것들을 상아탑 안에서만 논하기보다, 목회현장에서 접목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펴낸 책이다. 이 책은 십자가 복음이 무엇인가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이 그 복음 안에서 어떤 의미인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해야 할 역할과 책임이 무엇인가를 설교와 교육 그리고 목회전반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가 아니라, 그러한 것들은 어떤 신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것인지를 다루고 있다. 저자인 최현범 목사는 서울대학교와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하고, 서울 사랑의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던 중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도르트문트제일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겼고, 보쿰대학교에서 조직신학과 기독윤리로 신학박사(Th.D.)학위를 취득한 뒤, 故 옥한흠 목사의 추천으로 부산중앙교회에 부임하여 현재까지 목양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교회 울타리를 넘어서라], [믿음으로 세상을 도전하라], [믿음의 터를 견고히 하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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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12
  • [기독교인문학] 코로나 시대, 집에서도 나는 신자인가요?
    C. S. 루이스 《신자의 자리로》 -일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20세기 교회를 움직인 100권의 책에 3권이나 선정된 저명한 작가 C. S. 루이스의 작품 중 믿음의 실천과 관련된 글들을 발췌하여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편저자는 하퍼원 출판사 편집장인 마이클 G. 모들린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이 책 《신자의 자리로》는 루이스의 책과 에세이와 편지와 강연 등 폭넓은 저작에서, 어떻게 믿을 것인가만 아니라 어떻게 믿음을 잘 실천한 것인가와 관계되는 부분을 엄선하여 모은 것이다” 인용한 작품은 《순전한 기독교》, 《영광의 무게》, 《피고석의 하나님》, 《세상의 마지막 밤》, 《기독교적 숙고》 등이다. 그리스도인 살아가면서 일상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그의 해박한 지식과 번쩍이는 재치로 풀어준다. 그가 왜 20C 최고의 변증가인지를 엿볼 수 있는 실용지침서. ◇ 저자소개 C. S. 루이스∥영국의 옥스포드대학에서 영문학을,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에서 중세문학과 르네상스 문학을 가르치며 소설, 평론, 동화 등을 썼다. 지성적이며 논리적인 신학자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순전한 기독교》, 등이 있으며, 전세계 1억 부 이상을 판매한 판타지 소설의 바이블 《나니아 연대기》 등이 있다. 두란노 간 / 2020. 11.18. / 11,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기도의 자리로》 / C. S, 루이스 / 두란노 《루이스의 서재》 제임스 스튜어트벨 / 홍성사 / 코로나 시대, 집에서도 나는 신자인가요? 기독교란? “기독교는 그저 자연적 삶을 새로운 삶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소재를 초자연적 목적을 위해 활용하는 새로운 질서다.” 김길구 그동안 수고하셨던 경주의 김형기 목사님이 개인사정으로 그만 두시고, 산정현교회 장로인 박영규 모라복지관 관장께서 함께합니다. 대학 졸업 후 장기려 박사님의 부름을 받고 청십자병원의 근무를 시작으로 현재 사회복지법인 청십자 이사장을 겸임하고 계신 청십자맨 입니다. 부산대 대학원(기술사업정책학 박사)을 졸업했습니다. 박영규 평소 이 코너의 팬이었는데,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좋은 프로그램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김현호 부산광역시 사회복지협의회 회장으로 사회복지운동에 헌신하셨는데 이 코너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옥스퍼드의 명사, 루이스에 대하여 김길구 김대표께서 루이스의 광팬이신 모양인지 얼마 전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이어 또 추천을 하셨어요? 루이스의 매력이 어디에 있나요? 김현호 케임브리지 교수이자. 옥스퍼드의 명사인 루이스는 두 세대가 지난 지금까지도 기독교 신앙의 탁월한 길벗이자 위기의 시대에 저희들에게 멘토 역할을 톡톡히 해주죠. 빛나는 그의 작품들을 통해 인문학의 지평을 한껏 넓힐 수 있어 제가 존경하는 작가입니다. 박영규 C. S. 루이스하면 떠오르는 것은 지난 반세기가 넘도록 세계의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나니아연대기》를 떠올리실 겁니다. 판타지 소설 J.R.톨킨의 《반지의 제왕》, 《호빗》과 더불어 판타지 동화 나니아연대기는 우리 안방 TV에서 자주 재방영하는 영화이기도 한데, 상상력과 유머,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깊은 이해와 간결하고 품위 있는 아름다운 문장은 동화작가와 종교사상가로서의 그를 유감없이 보여 준다는 평입니다. 20C 교회를 움직인 명저 100선에 《순전한기독교》,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와 같이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김길구 작년에 우리나라에도 《루이스와 톨킨의 판타지문학클럽》이란 책이 번역돼서 나왔어요. 영국판타지문학의 황금기를 이끈 두 거인이 포함된 「잉클리스클럽」의 얘기인데, 멤버들이 쟁쟁해요. 작가들인 이들은 서로의 글쓰기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문학클럽이었는데, 루이스는 이 모임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합니다. 일종의 관계전도라고 할까요? 여담이지만 거장은 거장을 알아본다고 할까? 여기에 큰 영향을 준 이가 가톨릭 신자인 《반지의 제왕》 톨킨인데 소통이 너무 나갔나요? 나중에 나니아연대기가 출간되자 톨킨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루이스가 표절했다며 둘의 관계가 틀어지기도 해요. 박영규 재미있는 것은 톨킨의 판타지는 은유가 많아 나니아연대기 처럼 기독교적 메시지를 들어내지 않는데 비해 루이스는 노골적으로 들어내죠. 이 점을 톨킨은 못마땅하게 생각했는데, 아마 나니아연대기가 어린이를 위한 동화라서 더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순전한 기독교〉〈영광의 무게〉〈피고석의 하나님〉 김현호 너무 몰입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그럼 본분으로 들어가 볼까요? 책의 성격이 그의 명저 중 엑기스만 뽑아 놓은 북 다이제스트 형식이라 작가 특유의 재치와 유머을 곁들인 모든 글들이 좋기는 한데, 주제도 광범위해 요약해서 정리하기가 어려웠어요. 김길구 책 선정을 한 뒤 저도 후회를 했어요. 글들은 다 좋은데 어떻게 마무리할까? 만만치 않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발췌한 글 중에 복수로 인용된 글이 〈순전한 기독교〉 3편, 〈영광의 무게〉 4편, 〈피고석의 하나님〉 4편이더군요. 우선 이 세 권을 한 분이 한 작품씩 간략히 소개해 주시고, 발췌본 중 은혜로웠던 대목들을 추려보면 어떨까요? 비 표준어 입니다만, 엑기스 중에 엑기스라고 해야 하나요? 김현호 루이스를 20C 가장 영향력 있는 변증가로 만든 작품이라면 단연 《순전한 기독교》라고 해야겠지요. 이 책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BBC 라디오에서 전한 메시지 시리즈물을 1952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단행본으로 출간한 책입니다. 당시 미국과 영국 기독교의 주된 적은 ‘현대성의 결여’ 였는데 옥스퍼드의 학감으로 설득력 있게 기독교가 더 합리적임을 주장함으로써 많은 지성인들을 돌아오게 한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입니다. 박영규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류되어 수감된 닉슨의 특별보좌관이었던 찰스 콜슨의 마음을 돌이키게 한 책으로 알려졌지요. 《영광의 무게》는 조사해 보니 1941년 6월 8일에 세인트메리 교회에서 행한 설교로 교부들의 글에 비견된다는 찬사를 받은 설교의 백미로 이 설교문 외에 8편의 설교와 강연을 묶은 책입니다. 김길구 제목부터 도발적입니다. 《피고석의 하나님》 이 책은 신학적, 윤리적 주제 48편의 에세이 중의 한편을 책 제목으로 했는데. 고대의 피고인이 재판을 받으려면 우리가 재판장에게 가듯 하나님이나 신께 갔는데 지금은 거꾸로 인간이 재판장이 되어 하나님을 피고석에 앉혀버린 현대인들을 향한 ‘지적 공략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잠언들 김길구 엮은이가 인용한 루이스의 고백처럼 들리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기나긴 여정이며, 나와 가장 가깝기에 내 부족한 모습에 가장 큰 영향을 입을 사람들이 곧 정화의 과정에서 하나님이 주로 쓰실 교실임을 일깨워 주었다. 김현호 이 책 첫 꼭지에서 신자들이 천국에 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 혹은 선행 때문일까?에 대해 루이스는 이 질문은 가위의 어느 쪽 날이 더 요긴하냐 라는 질문과 같은 것이어서 그분을 믿으면 선행은 반드시 따른다고 말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빌립보서 말씀으로 양쪽을 묶어 매조집니다. 박영규 C.S.루이스는 하나님의 통치안에 있는 모든 질서를 성속으로 구분짓는 것을 무척 경계합니다. 영어단어 스피리추얼 (Spiritual)을 독일어 단어 가이스트리히(geistlich)처럼 좁은 의미의 “영적”이란 뜻으로 사용하는 것을 기독교의 오류라고 지적하면서, 베토벤 같은 작곡가의 일도 파출부의 일도 정확히 똑같은 조건에서만 영적이라는 것이지요. 주께 하듯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서 ...재미있는 표현도 사용하는데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두더지는 땅을 파고 수탉은 울어야 한다.’ 소명에 분업은 있지만 더 영적인가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김길구 용서에 대하여, ‘우리가 믿거니와 하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시지만 그 용서에는 남이 우리에게 지은 죄를 우리도 용서한다는 전제가 달려있다.’ 우리가 알고 있으면서 까먹고 싶어하는 것. 김현호 제2차 세계대전에 출전했던 경험을 가진 루이스는 종교와 전쟁은 유사점이 많다고 지적합니다. 늘 긴장 속의 현장이지만 그곳에서도 인생살이가 존재하는 일상이므로 24시간 군사연습만 할 수 없듯이 24시간 종교적인 일에만 몰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것은 목숨을 버릴만한 의무는 되지만 삶의 목적으로 삼을 정도는 아니며 사람이 조국을 위해 죽을 수는 있으나 배타적 의미로 조국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 국가나 정당이나 이념을 위해 한시적으로 헌신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소유인 자신을 가이사에게 바치는 행동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충고는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박영규 ‘진정한 용서란 모든 정상이 참작되고도 변명의 여지없이 남아있는 죄를 그 속의 모든 섬뜩함과 더러움과 비열함과 악의까지 똑바로 응시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와 온전히 화해한다는 뜻’ 김현호 재밌는 주제가 있어요. ‘아직 사랑하지 않는데도 사랑하듯 행동하면 위선인가? 자연스런 호감이나 정이 있으면 상대를 사랑하기가 더 쉬워지지요. 그래서 평소에 정을 가꾸는 것이 중요하지만 호감 자체가 사랑은 아니지요. 루이스는 자신이 이웃을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신경쓰느라 시간을 허비할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랑하듯 행동하라. 마치 사랑하듯 행동하면 금새 사랑하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싫어하는 대상에게 상처를 입히면 그 사람이 더 싫어 지지만 친절하게 대하면 어느새 그가 덜 싫어진다는 일반적 법칙을 따라 선과 악은 둘 다 복리로 불어나는 법이니 선과 악 둘 다 날마다 내가 내리는 결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조언해 주네요. 김길구 장시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음 호에는 한국교회가 직면한 현 위기는 예언자 영성이 없어서라며, 이를 회복하려면 예언자의 영성을 수혈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구약학자 차준희 교수의 뜨거운 외침, 《열두 예언자의 영성》 새물결플러스 刊 입니다. 감사합니다. 【 정리 : 김길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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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인문학
    2021-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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