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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간] 둥근 별
    안유환 목사가 쓴 소설 <둥근 별> 신이건 장로(한국기독신문 사장) 왜 <둥근별>이라 이름 지었을까? 인간의 생사화복,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주먹을 불끈 쥐면 둥근 주먹밖에 없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우리는 누구나 부모, 형제들과 첫 만남으로 시작해서 돌아가는 귀착점도 천국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끝맺음하기 때문일까? 둥근 원으로 반짝거리는 하늘에 수놓은 무수한 이름 모를 별을 보며 붙인 것일까? 아쉬움이 남는 이 땅의 만남을 통해서 누구나 갖고 있는 향수, 마음의 고향을 두고 이름 지었을까? 매우 궁금해 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저자 안유환 목사와는 그가 젊은 집사였던, 지방지 부산일보 문화부 기자 시절부터 교계기자로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는 열심히 다니던 교회가 담임목사와 교인간의 갈등을 겪는 것을 보며 신앙의 회의를 느꼈다. 어느 날, 교회를 개척하는 동료들과 함께 새 둥지를 틀었다. 그때부터 그는 교계 영적 지도자는 어떻게 가야하고, 어떤 흔적을 남겨 놓아야 하는지에 고민했고, 고민 끝에 잘 다니던 일간신문 기자직을 내려놓고 광나루신학대학원에 입학을 했다. 3년간 수학한 끝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부산의 변두리에 위치한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때부터 그는 시를 썼고, 중년 목회시절에는 수필을 썼다. 조기은퇴를 한 이후 삶의 경험을 토대로 소설을 쓰게 됐다. 이번에 그가 출판한 둥근별을 읽으면서 ‘그랬구나. 출발지와 종착지가 같은, 결국 하나의 둥근 원에 지나지 않는 평범한 기독교적인 신앙으로 그가 결혼생활을 하면서, 목회를 하면서 또 은퇴 후의 삶을 소재로 삼고 그리운 현대인의 향수를 수북이 쌓아 묻어두었구나’라고 생각하며 이번 소설 <둥근별>의 핵심을 나름대로 정리했다. 그는 잘 나갈 때 직장을 그만뒀고, 목회에 성공할 때 조기은퇴를 했다. 텃밭을 가꾸고 귀향해 노을이 물드는 초저녁 오늘을 살게 해주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밀레의 ‘만종’을 연상시키듯 살아가고 있다. 조용히 천국의 만남을 향해 준비하는 여정에서 이런 소설집을 냈다는 생각에 부럽기도 하고 삶의 여유를 가진 안 목사의 행동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평화가 오고 삶의 여유와 함께 마치 고향을 찾아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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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서
    2016-06-03
  • [기독교교양읽기 ⑮] 교회가 ‘후반기 삶’의 안내자 역할 해야
    “천직은 하나의 명작이 아니라, 인생 전체라는 걸작이다!” 우리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직업 선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 새로운 고민이 하나 다가온다. ‘과연 내 직업이 천직인가’라는 고민이다. 우선 먹고살기 위해 하나의 직업을 택해 대충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뜬금없는 고민이다.일자리 부족으로 심각한 어려움에 처한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이 책을 권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천직을 찾기 위한 여정을 결코 마다하지 말라는 저자의 말을 들려주고 싶었다. 천직이란 단시간에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걸고 찾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그러기 위해서는 고통스런 연습기간을 견뎌내야만 하고, 전혀 엉뚱한 일을 하다가 돌아오기도 하며, 다른 사람의 도움도 받아야 하고, 다양한 일을 하면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그동안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자기계발서가 나타났다가 스러졌다. 그럼에도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적지 않다. 저자는 성공이란 평생에 걸쳐 무엇을 남기느냐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관계없는 일처럼 보이던 것이 의외로 나중에 도움이 되고, 그러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찾고, 비록 미완성으로 끝날지라도 하나의 족적을 남기는 것이 바로 천직의 길이라고 이야기한다. 여타 자기계발서가 살아가면서 무엇 하나라도 뚜렷이 이루어야 성공이라고 강조하는 것과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일의 기술》 || 저자인 제프 고인스(Jeff Goins)는 강연가이자 저자이며, 파워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웹사이트를 방문한 사람이 전세계에서 400만 명이 넘을 정도다. 저서로는 《난파》 등이 있다. CUP, 2016. 13,8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초빙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요즘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가 겪는 가장 큰 문제는 젊은이들은 물론 노후를 대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취업할 마땅한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천직’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치가 아닐까 하는 고민을 안고 좌담을 시작했음을 먼저 밝힌다. #천직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김길구 : 세대를 막론하고 취업과 관련된 환경이 급변하는 시대입니다. 한때는 아이들이 어른을 가르치는 세태라고 해서 관심을 끌었던 신인류[돈 탭스콧, 《N세대의 무서운 아이들》(1998)]가, 이제는 일자리를 두고 인공지능과 경쟁해야 하는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직업에 대한 고민이 한층 깊어져가는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김현호 : 이 책 표지에 나와 있는 카피를 의미 있게 읽었습니다. ‘일의 기술이라 쓰고 삶의 기술이라 읽는다.’ 단순한 자기계발서라고 하기에는 영성적 사명으로서의 일에 대해 강조하고, 영성적으로 땀의 평가, 보람을 느낄 수 있는가를 돌아보게 하는 책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김수성 : 천직이란 단숨에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평생의 여정으로 찾아가야 하는 것이라면서 결론을 맺는데 대해 공감했습니다.김길구 : 얼마 전 잡코리아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남녀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 중 47퍼센트 정도가 “두 번째 직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20대도 34퍼센트, 40대는 65퍼센트가 두 번째 직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할 만큼 현재 직업이 불안정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김수성 :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 책을 젊은이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실패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러한 실패 가운데서 천직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을 깊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부딪쳐보는 것이 중요합니다.김현호 : 소명을 정의하면서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직업을 구했으나, 자신이 계획한대로가 아니라 오히려 틀어졌을 때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럴 때 자기 정체성을 지켜가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확장해가는 것에서 천직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김길구 : 그동안 우리는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의존하여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 소명이라고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지금과 같이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끊임없이 찾아야 하고, 그 과정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가슴 뛰는 일을 찾아내고 부딪쳐야 한다는 것이죠.김수성 : 그래서 저자는 ‘미완의 작품’을 남길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평생 천직을 찾아 헤매고 결국에는 미완이겠지만, 그 과정에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포트폴리오’로 인생의 지평 넓혀야김현호 : 소명이 딱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라는 ‘포트폴리오 인생’에 대한 언급도 의미 있는 지적인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직업을 통해 자기 인생의 지평을 넓혀가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 상당히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직장생활 외에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김길구 : 몇 년 전 미국 LA에 갔을 때 일입니다. 공식 초청방문이었는데도, 주말에는 나를 초청한 분의 얼굴을 보기 어려웠습니다. 알고 보니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했는데 주말이면 무대에 서기 위해 연극에만 집중한다고 하더군요. 또 하나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부러웠습니다. 인식 전환이 필요한 시점입니다.김현호 : 요즘 우리 아이도 비슷한 생활을 한다고 합니다. 일을 마친 직장인들이 한데 모여 보컬 연습을 한대요. 그러다가 봉사를 가기도 하고, 초대를 받아 공연을 하면서 자기의 ‘끼’를 발휘한다는 거죠.김수성 : 문제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라는 것이죠. 살아가기에 급급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여유가 ‘사치’로 여겨질 것입니다. ‘투잡’을 하지만 소명이나 천직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한 또 하나의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김길구 : 흔히 ‘천직’이라 일컫는 학교 교사들도 유럽의 경우 평균 재직기간이 5년 정도에 불과하고, 미국에서는 ‘투잡’도 흔하다고 합니다. 다중 직업이 일반화되는 추세라고 할 수 있죠. 우리나라에도 서서히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데, 문제는 우리 사회가 이런 변화 추세에 아직 준비가 덜되었다는 것입니다.김현호 : 젊은이들의 경우 그런 상황을 ‘회전축’의 지혜로 활용하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현실의 어려움에만 매몰되지 말고, 약간 빗겨나서 다른 길을 모색하면 자기의 소명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기의 천직과 전혀 관계없다고 생각한 직업이 나중에 중요한 자산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 농구에서 크로스오버는 한쪽 발을 ‘회전축’으로 이용, 순간적으로 방향을 전환함으로써 상대 수비를 뚫는 기술을 가리킨다. 저자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뜻밖의 사태와 실패를 만났을 때, 이를 회전축으로 삼아 미래로 나아가라고 충고한다. [사진 출처: 유튜브 사진 캡처] #유료 자원봉사로 지역사회 활성화해야김길구 : 최근 우리나라의 경우, 인생 후반기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부산의 한 병원에서 주차관리요원을 정규직으로 채용한다는 공고가 나가자 지원자 중에는 시중은행 지점장과 증권사 간부, 중견 건설업체 임원, 공무원 출신도 있었답니다.[국제신문, 2016. 5. 16]김수성 : 우리가 직시하고 있듯이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파트 경비 등 계약직 업무가 대부분입니다. 앞으로 유료 자원봉사제도를 적극 도입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어느 정도의 보수를 보장함으로써 양질의 인력을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이들의 업무 만족도도 높아질 것이라 생각합니다.김현호 : 우리 교회가 이런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지역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일을, 유료 자원봉사 등을 통해 지역의 인력이 진행한다면 그 효과는 상당할 것입니다. 지원처와 필요처를 연결시키는, 그 다리 역할을 교회가 하는 것이죠.김길구 : 여태까지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 등을 주도적으로 추진해 왔지만 투자에 비해 효과는 미미합니다. 선진 외국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교회가 지역사회와 손잡고 이런 일에 적극 나선다면 바람직한 시스템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부는 낭비를 최소화하면서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김수성 : 인공지능 시대에,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을 서로 연결시키는 능력은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교회는 이런 역할을 감당하기에 가장 좋은 곳입니다.김현호 : 천직은 헌신과 함께, 즐거움 또는 만족도가 높은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선을 행하는 일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역할이 절실한 이유가 여기도 있습니다. 올바른 직업관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김길구 : 무기력, 무관심, 무의미. 소위 ‘3무’라고 합니다. 이 말을 결국 인간소외 현상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갈수록 자동화되어 가는 세상에서, 교회의 사명 중 하나가 인간소외 해소에 있다면, 여기에 더욱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습니다.다음에는 평화의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가 쓴 《기억의 종말》(IVP, 2016)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정리: 김수성] ◇ 같이 읽으면 좋은 책《노동, 직업 그리고 하나님 나라》 / 정병길 / 성약출판사《일의 신학》 / 폴 스티븐스 / CUP
    • 문화
    • 기독교인문학
    2016-06-02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⑮ : 말(씀)
    ▲ 다양한 예수상 1. 말(言)의 복수 우화 ‘양치는 소년’의 이야기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늑대가 온다는 거짓말을 즐기다가 진짜 늑대가 나타나서 그 밥이 되고 말았다는 비극적인 소년의 이야기인데, 흔히 ‘거짓말하면 벌 받는다’라는 도덕교훈을 위해 단골로 인용되는 우화이다. 인문학자인 이왕주 교수에 따르면 이 우화는 훨씬 더 심오한 언어철학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그 소년은 거짓말 때문에 천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말의 박해 때문에 복수를 당한 것이다. 소년의 입술에서 학대당한 ‘늑대가 온다’는 말이 복수의 칼을 휘두른 것이다. 그것은 두 가지 방식에 의해서다. 첫째는 말이 현실을 만들어내며 둘째는 그 현실 안에서 말이 스스로 무력해져버리는 것이다. 늑대가 나타난 것은 첫째의 증거고, 사람들이 소년의 외침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던 것은 둘째의 증거다.” 문제는 이 비극이 동화 속의 이야기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물론이고 인간이 살았던 모든 세상에서 조금씩은 다 이 양치는 소년의 운명에 몰려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 진(秦)나라 시황제를 섬기던 환관 조고(趙高)는 시황제가 죽자 황제의 유서를 위조하여 태자 부소(扶蘇)를 죽이고 어리고 어리석은 호해(胡亥)를 내세워 황제로 옹립했다. 이후 조고는 호해를 온갖 환락 속에 빠뜨려 정신을 못 차리게 한 다음 교묘한 술책으로 승상 이사(李斯)를 비롯한 원로 중신들을 제거하고 자기가 승상이 되어 조정을 완전히 한 손에 틀어쥐었다. 어느 날 조고는 입을 다물고 있는 중신들 가운데 자기를 좋지 않게 생각하는 자를 가리기 위해 술책을 썼는데, 사슴 한 마리를 어전에 끌어다 놓고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 저것은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폐하를 위해 구했습니다.” “승상은 농담도 심하시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니(指鹿爲馬)’ 무슨 소리요?” 조고는 완강하게 말한다. “아닙니다. 말이 틀림없습니다.” 그러자 호해는 중신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니, 제공들 보기에는 저게 뭐 같소? 말이오, 아니면 사슴이오?” 그러자 대부분 조고가 두려워 “말입니다.”라고 대답했지만, 그나마 의지가 남아 있는 사람은 “사슴입니다.”라고 바로 대답했다. 조고는 사슴이라고 대답한 사람을 똑똑히 기억해 두었다가 죄를 씌워 죽여 버렸다. 그러고 나니 누구도 감히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자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조고와 같은 환관의 마지막은 무엇인가? 나중에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유방의 군대가 서울인 함양으로 밀고 올라오는 가운데 조고는 호해를 죽이고 부소의 아들 자영을 3대 황제로 옹립했으나, 똑똑한 자영은 등극하자마자 조고를 주살해버렸다. ‘양치는 소년’과 같이 거짓된 현실을 창조한 거짓말은 지속되지 못하고 징벌의 칼날로 변하여 자신을 발화한 인간을 엄벌한 것이다. 논리적이고 감성적인 말에 의한, 냉철하고 비판적인 이성과 공감과 배려의 감성이 상실되고, 난폭한 감정과 편견의 말들이 휘몰아쳤던 세상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거기에는 말이 있었다. 2. ‘발화된 말’과 ‘수육된 말(씀)’의 자기희생 역사적 기독교는 역사적 인물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역사, 교훈과 행동 등 예수의 전 운명 때문에 생겨났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교회의 선포, 선교, 신앙 진리의 내용이고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 대상으로서 예수는 복잡한 인간 이해의 범주(해석학의 차원)에서 다양하게 해석된다. 이것이 바로 기독론인데, 다음과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예수가 기독교의 신앙과 실천의 궁극적 척도인가? 그는 쿠바의 게릴라 대장 체게바라인가,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빛나는 전태일인가, 억압받는 민중의 해방을 위한 투쟁가인가? 그렇다면 위대한 민중 항쟁사의 가장 큰 분수령을 이룬 전봉준은 예수인가. 민중신학자의 주장처럼 민중이 예수인가. 혹은 감상적 경건주의자와 낭만적 신비주의자가 그리는 것처럼 역사적인 현실과는 동떨어진 피안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예수인가. 그는 영적이고 내적인 세계에만 관여하는 골방 주인인가.” 따라서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말은 간단하게 표현되었지만, 기독론이라는 제목 아래, 신학에서 다양하게 논의되어온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믿고 따르느냐?”라고 제자들에게 던진 예수의 말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들려온다. 그림 <다양한 예수상>처럼 다양한 기독론과 예수상이 전통적으로 해석되어온 것이다. 따라서 ‘어떤(?)’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는 믿고 고백하며 증거 하는가? 기독교와 기독교인은 어디에서 왔는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며 그의 삶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과 그 답은 기독교의 존폐가 걸린 문제라 할 수 있다. 즉 신학은 이 질문에 대해 거듭 새롭게 대답을 해야 하며, 그 대답을 통해 창조적으로 세상을 변화시켜가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교회는 제 기능을 상실하고 도태될 것이다. 에밀 부룬너(E. Brunner)에 의하면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이 예수의 인격 안에서 인간이 되었다는 성육신 사건에 있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칼 바르트(K. Barth)의 기독론 진술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그에게서 절정을 이룬다. 그리고 그것은 요한복음에 기초한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있던 말씀(logos), 곧 이성과 법칙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이성과 법칙이 우리 가운데에 임하셨다고 한다. 죄 없고 흠 없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그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했다고 한다. ‘말의 씀’은 ‘말씀’으로 우리말에서는 공경어가 되기도 하지만, 해석학적인 작업을 거치면 이제까지 발화된 말을 귀로 듣고 실천했던 종교가 ‘말을 씀’으로 쓰여진 문서(말씀)를 해석하는 해석학적 종교가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저 찬란한 메시지로 인하여 우리는 신학적 상상력을 되찾을 수 있으며 해석학의 바다를 향하여 노를 저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향해의 목적은 쓰여진 말들의 파편을 찾는 것이다. 이제껏 진리를 찾아 헤맨 인류 역사를 김성곤 교수는 이렇게 평가한다. “태초부터 있었던 말씀(the Word)은 곧 발화(utterance)의 힘으로 천지창조를 가능케 했던 완벽한 언어/로고스이자, 절대적인 진리/신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인간은 원래 그 말씀과 직접 교류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인류의 타락으로 인해, 말씀 곧, 진리는 베일에 가려졌고, 신은 인간으로부터 떠나버렸다. 그 후 인간은 그 사라져버린 진리를 되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으며 그 결과로 스스로 진리를 발견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또는 자신이 신의 합법적인 후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람들은 권력을 쥐고 스스로의 신념을 절대적 진리로 선포했으며, 거기에 반대하거나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단과 적 그리스도라는 죄명으로 억압해왔다. 그러나 사실 이 세상의 종말(apocalypse)과 파멸(annihilation)을 재촉하는 진정한 적 그리스도(anti-Christ)는 바로 그들 자신이었다(파멸과 연관되는 이 모든 것은 A자로 시작된다. 사실 A자는 알파벳, 곧 모든 문자의 시작이자 동시에 모든 것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파멸은 다시 처음으로의 회귀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역사는 바로 이러한 두 계층 간의 싸움과 갈등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발화된 말’이 인류의 타락으로 인하여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말의 씀’으로 수육(육신을 입음)되었을 때, 그 말씀의 해석(기독론)은 다양해 졌으나, 다시금 말의 씀을 단 하나의 발화된 말로 왜곡하려는 적그리스도들 때문에 차이를 존중하지 못하고, 획일적인 교리, 배타적인 신앙이, 자기 부정이란 십자가의 종교인 기독교를 이상한 종교로 만든 것은 아닐까? 사실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알아낸 탓에 평생 모욕과 수난이 그칠 새 없었던 갈릴레이(G. Galilei)는 말년에 이르러 미쳐 돌아버렸다. 그러나 그는 옳았고, 당대의 배타적인 기독교인들은 잘못했다. ▲ 배타성의 희생자 갈릴레오, 세르베투스, 베잘리우스 진지한 성서주의와 전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세계관을 펼친 세르베투스(M. Servetus)는 법학과 의학을 전공하며 당시 과학 저서들을 번역하고 편집한 과학자였으며 개인적으로 신학을 연구한 신학자였다. 혈액 순환설을 제창했으며 ‘유대인의 땅에는 젖과 꿀이 흐른다’는 성서의 기록을 무시한 채 당시의 지리학설을 쫓은 죄로 종교 개혁자 칼뱅에 의해 불에 태워져 죽임을 당했다고 하는데, 사실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다.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견해를 담은『삼위일체론의 오류에 대하여』(1531)를 출판하여 ‘말씀’은 영원한 하나님의 자기표현 방식인 반면, 성령은 사람들 마음속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활동 또는 능력이라고 주장하며 성자는 인간 예수와 영원한 ‘말씀’의 결합이라고 말했으나, 가톨릭과 개신교인들은 그의 복잡한 책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그리스도교 회복」(1546)이라는 글에서 세르베투스는 성부와 그의 아들 그리스도가 니케아 신조 때문에 모욕을 당했으며, 교회가 타락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구속되었고 1553년 칼뱅에 의해 이단혐의로 재판 받아 화형 당했다(당시 칼뱅은 세르베투스를 이단으로 고소하기는 하였으나 화형은 반대했다). 세르베투스를 처형한 사건은 개신교도들 사이에 이단자에게 사형을 부과하는 문제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시대적 한계로 인한 장 칼뱅의 배타성’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되었다. 따라서 1903년 세르베투스가 죽은 그 장소에 장로교 교인들은 기념비를 세웠다. 그 내용은 이렇다. “우리는 칼뱅의 후예로써 감사한다. 우리는 시대의 오류에 대해서 회개한다.” 남녀의 갈비뼈 수가 같다는 상서롭지 못한 사실을 밝힌 근세 해부학의 대부 베잘리우스(A. Vesalius)는 교리 수호에 부심했던 교권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구태여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이 어육(魚肉)으로 변했던 여자와 흑인과 유대인의 박해사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차이와 주변을 보는 시선은 이처럼 한때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백명의 죄 없는 사람들을 고생시킬망정 한 명의 이단자를 놓치지 말라’는 중세 이단 심문소의 원칙처럼,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새롭고 낯선 것이란 그저 박해의 대상일 뿐이었다. 차이와 주변을 수용하는 성숙한 시대정신은 ‘발화된 말’이 ‘수육된 말씀’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삶의 지평에서 수육된 말씀을 발화된 말로 교리화, 획일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차이나는 수육된 말씀들을 배움의 조건으로 삼을 때 성숙한 깨침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수육된 말씀은 자기희생의 상징인 ‘유월절 어린양’이다. 사실 차이와 주변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은 과거의 지식인들에게는, 배타와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지금의 지식인들에게도 ‘앎의 새로운 지평’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종교인들에게는 ‘성숙과 깨침’을 위한 화두가 된다. 곧, 자신의 동질성을 타자에게 강조하지 않고 타자와 자아와의 차이를 박해가 아닌 배움의 조건으로, 나아가 자기희생의 태도로 접근하는 겸손이야말로 한국 개신교가 나갈 성숙의 징표가 될 것이다. 3. 아킬레우스의 분노와 그 다스림 서양 최고의 고전인 호메로스의『일리아스』첫 행은 이렇게 시작된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자신을 모욕하자 아킬레우스는 그의 목을 쳐버리겠다며 칼집에서 칼을 뺀다. 그때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나타나 아킬레우스의 금발을 등 뒤에서 잡아당긴다. 그 순간 아킬레우스는 노여움을 삼킨다. 이성과 지혜가 분노의 불길을 제압한 것이다. 따라서 ‘분노를 노래’하는 대서사시인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이러한 지혜로운 행동 때문에 역으로 ‘분노의 다스림’에 관한 시가 된다. 태초에 있었던 발화된 말, 곧 이성과 질서가 우리 가운데 죄 없고 흠 없는 ‘어린양’으로 임했다는 것은 ‘양의 희생과 이성의 제 역할’이 4?13 총선 이후 이 땅을 바로 세울 것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올바른 이성으로 지록위록(指鹿爲鹿)을 발화해야 할 것이며, 분노의 불길은 지혜의 손길로 다스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본은 바로 발화된 말이 말의 씀으로 어린양 예수가 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인 십자가 정신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따라서 인문학자의 다음의 외침은 참다운 말씀의 종교인 기독교인들의 외침도 되는 것이다. “누가 말에서 뜻을, 이름에서 실질을 박탈했는가. 누가 언어를 떠도는 유령으로 만들었는가. 바로 양치기 소년과 같은 거짓말쟁이들이다. 기억해두자. 우리가 해방되기 위해 진정 필요한 존재는 거짓말하는 똑똑한 지도자가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양치기 소년이라는 것을.”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문화
    2016-05-20
  • [기독교교양읽기 ⑭] ‘안식과 희망을 주는 문화운동’ 전개해야
    대중음악 속에서 찾은 기독교 영성 이야기 대중음악과 기독교. 쉽게 조합하기 어려운 만남이다. 그런데 저자는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대중음악을 얕보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 22곡의 음악을 펼쳐 보이며 “자, 이래도 내 말이 틀렸느냐?”고 반문한다. 영미 팝송이 14곡, 한국 가요가 8곡이다. 1960년대 음악에서부터 2009년 음악까지 다양하다. 머리말에서는 역사적인 증거까지 들이댄다.‘설마’하며 대충 읽었다. 설핏 지나치다가 ‘이런 신앙고백이 숨어 있었구나!’하며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나도 모르게 꼼꼼히 읽었다. 인터넷을 뒤져 음악을 들었다. 이들 음악이 내 마음속으로 성큼 새롭게 다가온다. 반전이다. 이 책의 묘미라 할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여기서도 적용된다. 아는 만큼 들린다.글을 쓰다말고 몇 시간째 음악만 들었다. 한 곡 한 곡 듣다보니 도저히 중간에 그칠 수가 없었다. 다양한 버전으로 듣기도 하고, 처음에 부른 것과 그 후의 것을 비교하며 들었다. 2003년에 U2의 보노(Bono)가 솔로로 부른 ‘원(One)’에 이어, 파바로티(Pavarotti)와 함께 부른 ‘아베마리아’를 듣고서야 겨우 음악을 껐다. 얼얼하다. 이 감동을 그대로 간직한 채 글을 써야 하는데, 나의 필력은 미진하기 짝이 없다. 아쉬움은 독자 여러분이 직접 음악을 들으며 풀기 바란다.◈ 《윤영훈의 명곡묵상》 || 저자인 윤영훈은 미국 얼라이언스 신학교와 드루 대학교에서 종교와 대중문화의 상관관계를 연구했다. 현재 명지대학교 객원교수, 빅퍼즐문화연구소를 설립하여 문화운동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문화시대의 창의적 그리스도인》 《현대인과 기독교》 《복음주의와 대중문화》 등이 있다. 이 책은 월간 잡지 〈워십리더〉에 2년여 연재했던 글을 묶은 것이다. IVP, 2016. 15,0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김현호 대표는 이 책을 읽는데 김기석 목사의 《흔들리며 걷는 길》이 자꾸 생각나더라고 했다. 이 책의 부제가 ‘길 위에서 자유롭게’이다. 대중가요와 기독교를 접합하여 기독교인에게 소개하는 길이 어쩌면 ‘흔들리며 걸어야 하는 길’일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문화가 대중문화로 확산되기도김길구 : “고등학생 때 신해철은 우리에게 우상이었어요.” 신해철 씨가 의료사고로 유명을 달리했을 때, 우리 아들이 한 말입니다. 문득 내가 아들 세대와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의 음악을 들었습니다. 그는 한 시대를 이끌어온 가수임을 알게 되었고, 덕분에 아들과의 세대차를 조금은 좁힐 수 있었습니다.김현호 : 인터넷에서 이들 음악을 찾아 들어가면서 이 책을 읽었습니다. 그동안 너무도 멀리했던 어릴 때의 감성이 물씬 살아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 소개된 음악은 대부분 시대정신을 잘 읽어낸 작품인 것 같습니다.김수성 : CCM이 무언가 하고 백과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의 약자로, ‘대중음악의 형식을 취하면서 기독교 정신을 담아내는 모든 장르의 기독교 음악’이라고 해놓았더군요.김길구 : 사실 대중음악과 교회음악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포크송을 퍼뜨린 ‘세시봉’ 멤버들은 거의 다 교회에서 노래하던 사람들이었죠. 교회 문화가 일반 대중문화로 확산된 경우라 할 수 있을 겁니다.김현호 : 이들뿐만 아니라, 대중가수들의 출신을 보면 어릴 때 교회생활을 한 이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찬양하고 보컬 활동 등을 하다가 자기의 ‘끼’나 음악적 재질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어떻게 보면 당시는 교회가 대중문화의 산실이 되기도 한 것 같습니다.김길구 : 최근 청소년들이 교회를 외면하는 것은 교회가 청소년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교회 교육이 한편으로는 청소년들의 문화와 예술의 길잡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너무 교조적으로만 인식, 현상을 성과 속으로만 구분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김수성 : 교회가 대중문화를 저급문화로 분류하는 경향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문화를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로 구분하는 것도 문제지만, 미디어의 대중화로 모든 것이 대중문화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교회문화도 마찬가지죠. 좋아하는 찬송을 파일로 변환시켜 스마트폰에 넣어 다니면서 어디서나 듣는 세상입니다. #수단을 선택할 때 목회적 판단도 중요김길구 : 이 책에 소개된 노래 가사를 보면 마치 옛 선지자들이 일갈하는듯한 느낌조차 듭니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적절한 음악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마빈 게이의 ‘What’s going on?’은 사랑으로 전쟁과 갈등에서 벗어나야 함을 강조하는가 하면,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는 하나님조차 들어올 자리가 없는 우리의 삶을 고백합니다.김현호 : 개인적으로 최근 심수봉의 ‘백만 송이 장미’를 많이 불렀는데, 라트비아의 민요에 가사를 붙인 번안곡이더군요. 한 러시아 가수가 이 민요를 ‘백만 송이 장미’라는 제목으로 발표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심수봉 씨가 인생의 의미와 기독교 신앙을 담은 자신만의 고백을 가사에 녹여냄으로써 감동이 더해진 것 같습니다.김길구 : 역사적으로 봐도 시대에 따라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노랫말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노랫말에서 복음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도록 하는 음악은 시대를 불문하고 오랫동안 인기를 얻었습니다. 복음의 메시지가 가지는 생명력과 절대적인 사랑이 힘든 생활에서 위안을 얻고 희망을 가지게 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 등이 그런 작품 같습니다.김수성 : 장기하와 얼굴들이 노래한 ‘싸구려 커피’를 들으면서 오늘날 취업을 비롯해 막연한 미래 때문에 힘들어 하는 청년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잖아’에서는 위정자들의 입에 발린 말에 절망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았고요. 암울한 시대에 노래하는 시인들이라는 생각이 듭디다.김현호 : 최근 한류로 대단한 인기를 누리는 걸그룹의 노래는 삶이 담보되지 않은 음악인 것 같습니다. 물론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다지만, 반짝하다가 사라지는 노래가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에 비해 삶의 무게와 그 가치가 깊숙이 담긴 노래는 오랫동안 사랑을 받죠.김수성 : 최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노랫말은 상당히 직설적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성세대에게는 선정적이기도 하고 퇴폐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힙합이나 랩에 빠져든 청소년도 많습니다. 교회가 청소년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수용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김길구 : 그런 문제는 리처드 니버가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언급했던 기독교 세계관적 입장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선교나 교육을 위한 다양한 수단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적 세계관에 적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상업주의, 배금주의 등에 물든 문화를 걸러내는 비판적 안목도 필요하지만, 목회적 판단에서 허용할 수 없는 수단도 있다는 것입니다. 니버는 이를 ‘변혁의 문화’라고 합니다.김수성 : 일리가 있는 지적이기는 하지만, 상당수 우리나라 교회의 경우 아직도 교조적인 면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청소년이나 청년들이 갈수록 교회에서 벗어나는 현실에서 대책은 무엇인가요? #인류애를 노래하는 분위기 조성해야김현호 : 상업 문화가 판치는 현실에서, 꼭 기독교적인 메시지가 아니더라도 인류애와 삶의 가치를 노래하는 분위기라도 조성해야겠죠. 교회의 문화운동이라고 할까요, 가치 존중 사상의 전파라고 할까요. 교회가 청년정신과 감성을 노래하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김길구 : 먼저 시민적 성숙과 교회의 포용적 자세가 우선되어야 하겠죠. 교회나 사회 모두 역사와 문화적 방향감각을 상실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화가 궁극적으로 ‘안식’을 의미한다는 스킬더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안식과 희망을 주는 문화운동’은 언제든 펼칠 수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니까요. 이렇게 인식을 조금만 바꾸면 될 것입니다.김수성 : 한편, 교회가 이들 대중가요를 터부시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김현호 : 그럴 수도 있겠지만,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배타적 크리스천이 아니라 변혁적 크리스천이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 책에 소개되었던 가수들 중에는 개인적으로 부정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 교회로 하여금 대중가요를 멀리하게 한 하나의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김길구 :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그 사람의 말뿐만 아니라 행위나 삶의 모습에서도 경건성을 요구합니다. 그렇기에 신앙적인 노래를 불렀지만, 몇몇 가수는 그들의 삶에서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에 배척한 요인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서 본질적인 규범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김현호 : 상업 문화가 판치는 현실에서, 꼭 기독교적인 메시지가 아니더라도 인류애와 삶의 가치를 노래하는 분위기라도 조성해야겠죠. 교회의 문화운동이라고 할까요, 가치 존중 사상의 전파라고 할까요. 교회가 청년정신과 감성을 노래하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김길구 : 먼저 시민적 성숙과 교회의 포용적 자세가 우선되어야 하겠죠. 교회나 사회 모두 역사와 문화적 방향감각을 상실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화가 궁극적으로 ‘안식’을 의미한다는 스킬더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안식과 희망을 주는 문화운동’은 언제든 펼칠 수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니까요. 이렇게 인식을 조금만 바꾸면 될 것입니다.김수성 : 한편, 교회가 이들 대중가요를 터부시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김현호 : 그럴 수도 있겠지만,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배타적 크리스천이 아니라 변혁적 크리스천이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 책에 소개되었던 가수들 중에는 개인적으로 부정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 교회로 하여금 대중가요를 멀리하게 한 하나의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김길구 :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그 사람의 말뿐만 아니라 행위나 삶의 모습에서도 경건성을 요구합니다. 그렇기에 신앙적인 노래를 불렀지만, 몇몇 가수는 그들의 삶에서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에 배척한 요인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서 본질적인 규범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다음에는 미국의 저명한 강연가인 제프 고인스(Jeff Goins)가 쓴 《일의 기술》(CUP, 2016)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긴 시간 동안 수고했습니다. [정리: 김수성] ◇ 같이 읽으면 좋은 책《신국원의 문화이야기》 / 신국원 / IVP《그리스도와 문화》 / 리처드 니버 / IVP
    • 문화
    • 기독교인문학
    2016-05-04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⑭
    “야훼 하느님께서는 ‘이제 이 사람이 우리들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니,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먹고 끝없이 살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시고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셨다. 그리고 땅에서 나왔으므로 땅을 갈아 농사를 짓게 하셨다. 이렇게 아담을 쫓아내신 다음 하느님은 동쪽에 거룹들을 세우시고 돌아가는 불칼을 장치하여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목을 지키게 하셨다.” (공동번역 창세기 3장 22-24절) “그때는 우리는 새로운 창조주가 되어 우리가 만든 기계인 아담과 하와가 우리 인간들이 금지시킨 선악과를 베어 물고, 기계들의 에덴동산인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그리 어색하지 않다. 왜냐하면 오래 전 우리 인간은 창조주에 그렇게 도전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최병학, 『현대사상과 영화이야기』 중에서) 1. 알파고의 승리 ▲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 대결에게 알파고가 가져간 승리는, 이제 우리 인간이 기계(와 더불어 인공지능)에 관하여 무시하거나 외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 할 이웃(이 될지 해치는 이리가 될지?)임을 가르쳐준 사건이었다. 카이스트 김대식 교수가 <인간vs기계>(동아시아, 2016)에서 한 말처럼 “알파고의 승리는 어쩌면 그동안 경쟁자 없이 지구를 지배하던 호모 사피엔스의 시대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지도 모른다.”“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라고 말했던 마셜 맥루언(M. McLuhan)의 의수 이론(義手 理論)은 세련된 기술결정론(technological determinism)의 결정판이었다. “기술은 자율적으로 변화 한다”라는 기술결정론은 끝없이 다양해지는 욕망을 채워 주는 것을 미끼로 사람에게 계속 새로운 기술개발을 요구하고 있다. 동시에 “자율적으로 변하는 기술이 사람과 사회의 변화를 주도 한다”라는 말은 매체가 인간 존재 방식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기계를 사랑하라”는 세련된 기술결정론과 맥루언의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라는 명제는 기계의 바다 속에서 살아남기란 이러한 기계의 파도에 거슬러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파도 타는 법을 익히고 즐기는 것임을 뜻한다. 이제 바야흐로 인간 정체성의 문제는 “어떤 미디어와 결합되느냐?”가 된 것이다. 2. 혼종의 길?탈육신(disembodiment)의 시대에 전통적인 존재는 더 이상 그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동물과 결합하거나, 기계, 나아가 네트워크와 결합하게 되는데, 이러한 혼종(hybrid)을 통해 존재를 확장하며, 존재의 새로운 터전으로 사이버스페이스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혼종의 운명은 1998년과 2002년 두 차례에 걸쳐 스스로 사이보그(Cyborg)가 되는 수술을 감행하여, 인류 최초로 사이보그가 된 케빈 워릭(K. Warwick)을 통해서 구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이보그(cyborg)는 1950년대 말 미국의 맨프레드 클라인즈(M. E. Clynes)가 만든 용어로, 인간과 기계간의 통신을 뜻하는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생물(organism)의 합성어이다. 아무튼 <나는 왜 사이보그가 되었는가>(김영사, 2004)에서 워릭은 미래사회에서는 기계가 인간보다 지능이 뛰어날 것이라고 주장하며 인간은 이러한 사회를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더 진보적으로 미래사회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한바 있다. “날짜: 2050년 1월 1일. 지능적인 기계(intelligent machine), 아니면 로봇이 인간에게 지구를 물려받을 것이라 예견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그다지 정확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의 예측이 빗나갔음은 분명히 입증되어왔다. 지구는 사이보그가 지배하고 있다. 사이보그는 새롭게 개발된 컴퓨터 네트워크 제어장치의 슈퍼 지능을 가동한다. 인간과 기계가 결합되어 업그레이드된 형태의 그것은 그 자체의 목적을 위해 지능을 사용할 수 있다. 사이보그는 강력한 팔다리와 같이 직접적인 신체 조건의 개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정신적 연계 방식 체계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들의 두뇌는 무선장치를 이용해 직접 중앙 컴퓨터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생각만으로 네트워크에 접속되고 지적 능력과 기억을 불러낼 수 있다. 반대로 중앙 네트워크는 정보를 얻거나 임무를 수행시키기 위해 개별 사이보그를 불러들인다. 이렇게 네트워크는 하나의 통합된 체계로 가동된다. 하나의 개별적인 사이보그가 네트워크의 무선 접속 없이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고, 개개의 사이보그가 없는 네트워크 또한 상대적으로 무력한 것이 된다.”영화 <로보캅>이나 <아이언맨> 등에서처럼, 인간의 정체성이 기계와 결합되는 혼종을 통하여 새로운 인간이 탄생하고, 역으로 영화 <공각기동대, 攻殼機動隊>에서처럼, 정보가 신체성을 입어 인간 혹은 생물체가 되는 존재의 확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사실 로봇 공학 전문가인 미국의 한스 모라벡(H. Moravec)은 <마음의 자식들>(Mind Children, 1990)에서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는 이미 완료되었으며, 미래사회는 사람보다 수백 배 뛰어난 인공두뇌를 가진 로봇에 의하여 지배되는 후기 생물사회(post-biological)가 될 것이므로, 인류의 문화는 사람의 혈육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모두 넘겨받는 기계, 곧 ‘마음의 자식들’에 의하여 승계되고 발전될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바 있다. 역시 화제작 <로봇>(Robot, 2000)에서는 2050년 이후 지구의 주인이 인류에서 로봇으로 바뀐다는 대담한 논리를 전개한바 있다. ▲ 영화 <터미네이터>의 한 장면 3. 21세기 초인과 사이버 주체1990년대 말 이후 유럽의 인문학 논쟁을 이끌고 있는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는 배아복제를 비롯한 유전공학의 기술적 성취를 철학적 사유의 반석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그는 니체(F. W. Nietzsche)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하버마스(J?rgen Habermas)와 대립하면서 독일 철학계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는가 하면, 나치즘(Nazism)과 잇닿은 궤변론자라는 악평도 받고 있다. 여러 면에서 ‘독일적’인 배경을 지닌 그의 사유는 21세기판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의 기획’이라 불린다. 그는 근대적 휴머니즘의 패러다임을 비판하며 ‘포스트 휴머니즘’(post-humanism)을 주창한다. 그에게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하기 위해 야만성과 투쟁해온 과정이다. 전통적 휴머니즘은 이를 위해 문자를 매개로 한 ‘길들이기’ 전략을 택했지만, ‘문자의 시대’가 끝나면서 이 방식은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다. 이른바, 새로운 미디어 사회의 도래와 함께 인간의 공존이 새로운 토대 위에 서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인류는 ‘새로운 종류의 야만화’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는데, 그것은 “전쟁과 제국주의, 그리고 미디어를 통한 인간의 일상적 야수화”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슬로터다이크는 유전공학에 주목한다. 그에게 인문학적 교육이나 유전공학은 모두 ‘사육(길들임)’의 한 방식이며, 인간에 대한 인간의 간섭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제 새로운 존재의 탄생, 혹은 인간성 창조는 현대 과학기술의 총아인 유전공학을 활용해야하며 바람직한 인간성의 기준을 설정하기 위해 철학자와 과학자의 연합이라는 ‘21세기판 초인’이 필요하게 된다.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한길사, 2004)은 말 그대로 ‘차라투스트라의 기획’으로, 자연의 과정인 선택적 탄생을 기술로 가속화하는 것이다. 영화 <가타카>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그 일례이다. 따라서 나치즘을 기억하는 현대인들은 슬로터다이크의 말을 단순히 시대착오적인 니체주의자의 궤변으로 간단히 일축하였지만, 그의 문제의식은 미국이 주도하는 21세기적 지구화에 대한 강력한 비판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그냥 넘길 수만도 없을 것이다.동시에 생물학적 주체(Bio-I)에서 사이버 주체(Cyber-I)로 전환되어 가는 존재의 확장은 이제 디지털이 중심이 되는 존재인 ‘디지털 생물학’으로 넘어간다. 가령, 피터 벤틀리(P. Bentley)는『디지털 생물학』(김영사, 2003)에서 미래 디지털 기술이 생명의 특성을 모방함으로 기존의 모든 차원을 뛰어 넘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가령, 생물처럼 번식하고 다양하게 ‘개체변이’를 일으키는 소프트웨어가 가능할 것이다. 부여된 임무를 완수할 경우에는 생존하고 후손을 남기며, 실패할 경우에는 도태되게 함으로 소프트웨어 스스로 진화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벤틀리는 미래에 디지털 공학과 생물학이, 컴퓨터와 생물체가 매우 유사한 형태를 갖는 단계에 도달할 것으로 예측한다. 디지털 형태의 의미소(meme)가 자체 복제를 넘어 진화하기 시작할 경우, 궁극적으로 자연계에서 생명체가 거듭해온 진화의 형태와 흡사하게 될 것이라 보는 것이다. 4. 영혼 불멸? 인간 멸망? “크리스(주인공 로빈 윌리엄스) : 이게 진짜 나요? 앨버트 교수 : 나란게 뭔데? 자네 신체? 크리스 : 어쩌면… 교수 : 그럼 신체가 없으면? 크리스 : 그래도 나죠. 교수 : 어째서? 크리스 : 생각은 할 수 있으니까. 교수 : 생각 역시 우리 몸의 일부인 뇌를 통해서 하는데? 크리스 : 하지만… 생각이란 무형의 것으로 나를 존재하게 해 주죠. 교수 : 바로 그거야. 존재에 대한 믿음. 그게 해답이야. 크리스 : 세상에… 진짜야. 교수 :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 없어. 생각만 하면 돼. 생각이 현실이고, 몸이란 환상이야…. 아이러니컬하지 않아?”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영화 <천국보다 아름다운>(1998)에 나오는 위 인용 대사는 플라톤의 관념론에 기초한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인간 존재란 몸은 삭제되고 정신만 있는 관념적 존재가 된다(물론 영화에서 이곳은 천국이지만). 몸의 구속을 받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를 확장해 나갈 수 있고, 현실의 불안과 한계를 극복하여 사멸하지 않는 세계를 찾아 나선 인간의 탐구 열정은 천국이 아닌 현실에서 천국의 모습을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고대 플라톤의 이데아(idea)로부터 그 발생사적 연원을 찾을 수 있겠지만, 오늘날 사이버스페이스와 인공지능은 이러한 상황을 가능하게 하였다. 2012년부터 본격화한 딥러닝(deep learning) 이후의 인공지능은 전혀 차원이 달라졌다. 방대한 데이터(=빅데이터)를 그냥 집어넣어 주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축적된 자료를 분류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알파고와 같은 기계에 지능이 생긴 것이다. 김대식은 인공지능을 ‘약한 인공지능’과 ‘강한 인공지능’으로 구분하는데, 알파고나 무인 자동차(우리는 이 무인 자동차의 아담을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서 맛보았다)를 같은 인공지능이 약한 인공지능이라면, 영화 <터미네이터>의 터미네이터와 같은 독립성이 있고 자아가 있고 정신이 있고 자유의지가 있는 인공지능을 강한 인공지능으로 구분하며, “강한 인공지능은 인류를 파멸로 이끌 ‘재앙’이 될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인류보다 지적, 물적으로 우위를 점하게 될 강한 인공지능이 판단하기에 인간이란 종이 지구에 불필요하거나 해롭다면 인류의 멸종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대식의 경고이자, 대안이다.“강한 인공지능이 어느 한 순간 인간을 놓고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인간은 지구에 왜 있어야 되나? … 만약에 제가 강한 인공지능이라면 ‘지구-인간’이 더 좋으냐, ‘지구+인간’이 더 좋으냐 하고 물어볼 거예요. 강한 인공지능 입장에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구-인간’이 더 좋다는 논리적인 결론을 충분히 낼 수가 있다라는 거예요. … 약한 인공지능은 100% 실현됩니다. 다시 말해, 내가 하는 일이 이미 기계 같다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가진 유일한 희망은 ‘우리는 기계와 다르다’입니다.”영혼 불멸을 추구하는 인간이 그 ‘추구’의 욕심으로 인해 ‘멸망’당하는 것이다. 처음 창세기의 신은 우리를 추방했지만, 이제 우리가 만든 제2의 아담과 하와는 두 번째 창세기에서는 창세기의 이름을 던지고 요한계시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멸망시킬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가 아니라) 확신하거나!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담임)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문화
    2016-04-21
  • [기독교교양읽기⑬] 현대 도시인들에게는 ‘단순함’이 필요하다
    “아직도 길을 찾기 위해 멈추지 않을 뿐” 이 책은 한 교회에서 30년 동안 사역한 저자가 안식의 기간 동안 이탈리아, 터키, 조지아(그루지야), 아르메니아 등에 있는 교회와 수도원 등을 순례하며 영성의 시간을 가진 기록이다. 단순히 40여 일의 유럽 여행기라 하기에는 지그시 무게감이 느껴지고, 그렇다고 철학서나 비평서라 하기에는 에세이 같이 큰 부담없이 읽히는 미묘함으로 다가온다.그는 1980년대 초 양성우 시인이 낭송한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다. 피를 토하듯 울부짖는 “모래야 나는 얼마나 작으냐 / 바람아 먼지야 풀아 / 나는 얼만큼 작으냐”라는 대목에서 허를 찔린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날 많이 아팠다고 고백한다. 아직도 그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며, 저자는 길을 찾기 위해 멈추지 않을 뿐이라고 스스로 위안한다.책을 읽는 내내 그의 예술적 안목과 문학적 감수성에 빠져들게 한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적절하게 사용하고 담백한 문장으로 문학적 향기도 맡을 수 있다. 그러나 순례길 곳곳에서 우리나라 교회의 현실을 아파하고, 문제점을 지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영성의 끈을 놓치지 않는 신앙인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오랜만에 참으로 ‘괜찮은’ 책 한권을 읽었다는 만족감을 느끼게 한다. ◈ 《흔들리며 걷는 길》 || 저자인 김기석 목사는 청파교회 담임목사이면서 문학평론가이다. 깊이가 있는 글쓰기로 기독교문학의 새로운 층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은 책으로 《삶이 메시지다》 《오래된 새 길》 《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 등이 있다. 포이에마, 2014. 13,8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이해한다.” 한때 유홍준 교수가 그의 책에 인용해 널리 알려졌던 말이다. 정조 때 문장가인 유한준의 글에서 따온 말이다. 김기석 목사의 이 책을 읽으면서 먼저 이 말이 떠올랐다. 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기독교의 뿌리에 대해서 관심 가져야김길구 정말 이 책 한권을 읽고 나서 서너 권의 책을 읽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중세의 예술 작품 감상에 이어 인문학적 소양을 과시하는가 하면, 기독교 역사와 사상, 그리고 우리 교회의 현실까지를 놓치지 않고 연결시켜 이야기합니다. 최근 부각되고 있는 ‘통섭’을 보여주는 책인 것 같습니다.김수성 저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부터 시작해서 함석헌의 ‘얼굴’까지 10여 편의 시를 곳곳에서 읊조리며 순례를 계속한 것입니다. 그 시에는 저자가 하고 싶은 말들이 당연히 포함되어 있겠죠.김현호 저자와는 10년 가까이 알아왔는데, 그분의 서재에 꽂힌 책을 보면 마치 박물관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저도 책을 취급하지만 희귀한 책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분은 문학을 통해서 먼저 하나님을 만났고, 그 이후 신학을 했다고 밝힐 정도로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것 같습니다.김길구 저자는 로마에서부터 순례를 시작합니다.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도 가톨릭의 교회와 교부들, 수도원 등을 살펴보면서 기독교 신앙의 뿌리를 재조명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요?김현호 가톨릭교회의 부패로 인해 종교개혁이 일어났지만, 궁극적으로 가톨릭교회는 초대 기독교의 역사를 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라는 전체적인 시각으로 오늘의 현실을 보기 위해 로마를 먼저 방문한 것 같습니다.김길구 맞는 것 같습니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 교회의 지나친 물질주의와 성장주의에 대해 사람들이 돌을 던지는 것은 마치 종교개혁 이전과 비슷한 양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자가 로마 가톨릭교회의 아름다움과 초기 교부들을 이야기하면서 그 속에 숨겨진 신앙의 본질을 이야기한 것은,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고자 하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김수성 최근 우리나라에도 중세에 관한 서적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에게는 뭉뚱그려 ‘암흑의 시대’라고만 알려졌지만, 실상 중세에는 뛰어난 기독교 사상가와 예술가를 배출한 시대라는 겁니다. ‘기독교’라는 그늘에 가려 우리 사회에서는 이에 관한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언제까지나 흔들리며 길을 걷는 순례자일지 모른다. 하지만 정답 없는 삶이라 해도 묻고 또 묻지 않으면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사진은 프랑스 떼제공동체에 있는 예배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출처: http://dowym.com). 지금부터라도 본질로 돌아가야 김현호 저자가 머리말에서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올 때 부하들이 ‘로터스’ 열매에 빠져 그 섬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는 이야기를 했듯이, 우리 교회도 이제는 본질의 문제로 돌아가야 합니다. 특히 프란체스코의 ‘청빈’ 이야기는, 우리 교회의 현실에서, 언제 들어도 가슴이 울울해집니다.김길구 평생 ‘벌거벗은 몸’으로 살았던 프란체스코가 묻힌 조그마한 교회를 방문한 후 저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길이 9미터, 폭 4미터에 불과한 작은 예배당이지만 이곳은 결코 작지 않다.” 그리고는 “문제는 건물이 아니라 정신이다”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그 정신을 간직하고 있는가 반문하게 합니다.김현호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읽을수록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책입니다. 여행에 관한 정보보다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정보들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읽다보면 자꾸만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그러면서 부끄러워지기 때문입니다.김수성 그래서 책 제목에 ‘흔들리며’라는 말을 넣은 것 아닐까요? ‘흔들리면서도 결국 제자리 찾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겠죠.김현호 현대인들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믿음의 길로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익숙함이야말로 편한 것이지만 둔감해지는 것’이고, ‘길들여지다는 것은 곧 영혼의 타락’이라는 말을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김길구 두드러진 사람들만이 아니라, 소외되었던 사람들을 부각시키려한 노력도 곳곳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거대 교회 권력에 억눌려 역사에 묻힌 사람들, 지금도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고난받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잊지 않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볼로냐 협동조합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주거, 노동, 식생활 해결을 위해 조직한 협동조합이 지금은 4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김수성 2001년 아씨시에서 열렸던 ‘평화를 위한 기도 모임’에서 채택되었던 ‘평화를 위한 십계명’을 읽었습니다. 이것을 아직 몰랐다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했는데, 이에 대한 제대로 된 자료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김현호 ‘한가함’에 대한 언급도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분주함에 길들여져 한가함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어떤 철학자는 이런 분주함은 ‘폭력적’이고 ‘자기 착취’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안식일의 의미를 되새겨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김수성 기도원을 소개하는 글을 보다보니 몇 년 전에 봤던 ‘위대한 침묵’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생각납디다. 기도와 침묵, 예배와 노동으로 이어지는 수도사들의 일상이 보는 내내 얼마나 무겁게 짓누르는지 몇 번에 걸쳐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책을 읽으면서 그 다큐를 다시 봤는데, 여전히 힘겹더군요. 분주함에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단순성과 청빈의 생활화 떼제공동체 김길구 저자는 순례를 떼제(Taize)공동체에서의 생활로 마무리합니다. 떼제의 생활은 한마디로 ‘단순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떼제 찬양의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생명의 물을 찾아 어둠 속에서 방황합니다. 목마름만이 우리를 앞으로 나가게 합니다. 목마름만이 우리를 앞으로 나가게 합니다.”김현호 떼제공동체는 기업이나 독지가의 후원, 가족의 유산마저도 일절 받지 않고 오직 노동으로 벌어들인 것만 가지고 생활하고 봉사한다고 합니다. 이 정신은 프란체스코의 ‘청빈’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김수성 개인적으로 부산 인근에 이런 공동체가 하나 있으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종교를 초월하여 지극히 단순한 생활, 적당한 노동을 하면서 지친 영혼을 달래고, 영성을 회복할 수 있는 곳이 될 것입니다.김현호 떼제공동체는 예수님께서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사랑을 베풀었다는 믿음에서 출발했지요. 저도 기회가 된다면 이 책을 들고 유럽을 기웃거리고, 떼제공동체에 들어가 한동안 머무르고 싶습니다.김길구 우리에게 절실한 모범을 보여주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템플스테이가 인기를 끄는 가장 큰 이유는 목마름과 단순한 휴식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참가하는 기독교 신자들도 제법 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가 앞으로 어떤 길로 나가야 할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다음에는 조금 특별한 책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대중음악 속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찾고자 노력한 《윤영훈의 명곡묵상》(IVP, 2016)입니다. 긴 시간 동안 수고했습니다. [정리: 김수성] ◇ 같이 읽으면 좋은 책《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1, 2》 / 공지영 / 분도출판사《일상순례자》 / 김기석 /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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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4-07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⑬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3-14).” 1.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어도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 세상에서 전쟁 이야기만큼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는 없다. 인간의 희로애락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현장이 바로 전쟁이다. 인간 내면에 숨겨져 있던 폭력성과 욕망의 표출, 그리고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생존하려는 인간 의지의 분출, 전쟁은 바로 이러한 욕망과 의지의 실험장이자 대결장이다. 기본적으로 전쟁은 국가가 하는 일이고, 전쟁은 살인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발생에는 언제나 전쟁과 함께 폭력이, 폭력과 함께 변절자들이, 변절자들과 함께 꼭 희생이 따른다. 동시에 전쟁은 사회적 약자인 어린아이와 여성들에게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온다. 일본군이 ‘군대의 효율성 때문에 군위안부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한홍구 교수는 군위안부는 사기 진작도 진작이지만, 병사들이 성병에 걸리는 걸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가령, 병사 하나가 성병에 걸리면 그 한 병사만 기동을 못 하는 게 아니라, 그이를 들쳐 엎고 가야 할 여럿이 있어야하기에 성병에 걸려 걷지 못하는 병사가 한 명만 있어도 네댓 명의 전투력 손실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한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성병을 방지하면 몇 십만 명을 더 징병하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보는 거죠. 그런데 남자 몇 십만을 징병하는 대신에 총 들고 싸울 일 없는 여자 몇 십만을 들여보내면 군대를 100만 명, 200만 명 더 징병한 셈이나 마찬가지겠죠. 인간을 생각하지 않고 효율성을 따지다가 보니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특강: 한홍구의 한국현대사 이야기』, 한겨레출판, 2009) 성서에 나오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눅15:3-6)에서 효율성으로 따지자면 우리의 99마리 양이 더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지 않았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전쟁은 효율성 면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이기면(지면 정반대이겠지만) ‘땅과 재물은 물론이고, 노예를 획득할 수 있는 고대 전쟁’으로부터 현대의 ‘정의로운 전쟁’에 이르기까지 전쟁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변화를 인류의 삶에 그 흔적을 남겼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물론이고 종교와 철학에 있어서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곧, 인류의 문명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역사인 것이다. 성서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구약성서의 출애굽에서 가나안 정착사, 이후 왕조시대에 이르기까지, 아니 예수 당시까지도 끊임없이 전쟁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도 전쟁은 그 자체로 끔찍한 폭력이다. 따라서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의 다음의 말은 타당하다.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어도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 2. 68,452,000명 대 134,756,000명: 입다의 딸과 레위인의 첩 이야기 “여성에게 조국은 없다”라고 말한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는 옳았다. 전쟁은 여성을 무국적자로 만들며 희생을 요구한다. 구약 사사기의 ‘입다의 딸’과 ‘레위인의 첩’이 이에 해당 된다. 사사기는 이스라엘 12부족이 국가로 발전해가는 단계인 가나안 정착과정에서 벌어지는 전쟁 이야기이다. 그런데 성서는 이러한 전쟁으로 인해 희생당하는 여성들을 감추지 않고 보여주고 있다. 입다는 아버지 길르앗이 기생에게서 낳은 아들로 나중에 본처의 아들들에게 쫓겨나 돕 땅에 거주하며 잡류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 그러나 암몬이 이스라엘을 칠 때 입다는 이스라엘 장로들의 요청으로 이스라엘의 장관이 되어 전쟁에 나서게 된다.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전쟁에서 입다는 서원을 하게 된다.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사사기 11:30-31).” 그러나 전쟁에 이기고 미스바로 돌아왔을 때 입다의 무남독녀가 소고를 잡고 춤추며 영접하였다. 그 결과 딸은 죽임을 당한다. 입다의 전쟁은 자신의 승리(장관이 되기 위해)를 위해 타인의 목숨을 놓고 하나님과 거래를 한 것이었으나, 여성인 그 딸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렇듯 전쟁은 여성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사실 전쟁법은 가급적 적의 군인만을 죽이고 무장하지 않은 일반 시민을 죽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반 병사보다는 시민들이, 죄 없는 백성들이, 힘없는 여성과 아이들이 더 많이 살해당한다. 국가에 의해 살해된 외국인의 수는 68,452,000명이고, 자국민의 수는 134,756,000명(20세기에 한해서)이다. 이것은 군대가 국민을 외국의 적으로부터 지킨다는 명분을 의심하게 만든다. ‘테러방지법’의 속뜻이 국민을 감찰하여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것이듯, 전쟁은 지배자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누리기 위한 최초이자, 최후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아무튼 입다의 딸은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그녀는 입다의 ‘부당 거래’를 폭로한다.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11:36)” 전쟁의 극단적인 폭력의 한가운데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또한 사사기 19장에는 이스라엘 동족간의 전쟁인 ‘베냐민 전쟁’의 기원에 관해 설명해주고 있다. 에브라임 산지의 어떤 레위인이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았으나,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레위인은 첩을 찾아 베들레헴으로 가서 데리고 돌아오다 베냐민 지파의 땅인 기브아에서 한 노인(에브라임 사람으로 기브아에 거주하는)의 집에 기거하게 된다. 그날 밤 그 성의 불량배들이 노인의 집에 찾아와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22절)’고 한다. 그러나 노인은 그들에게로 나와서 말한다.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이 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19:23-24)”고 했으나, 무리가 듣지 않았다. 남성들의 폭력과 음행에 여성은 한낱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레위인은 자기 첩을 그들에게 끌어낸다. 그리고 벤야민 지파 사람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고 밤새도록 능욕하다가 새벽에 놓아주었다고 한다. 그녀는 죽었다! ▲ 죽임을 당한 레위인의 첩 이렇게 죽임을 당한 첩을 레위인은 나귀에 싣고 집에 돌아온다. 그리고 시신을 열두 조각 내고 이스라엘 각지파마다 보낸다. 이후 이스라엘 자손은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미스바에서 모여 벤야민 지파에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동족 상잔은 참혹했고(“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은 모두 다 불살랐더라”, 20:28), 베냐민 지파는 멸절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한 지파의 멸망을 두고 볼 수 없어 ‘야베스 길르앗 여자들’과 ‘실로의 여자들’을 빼앗고 납치하여 베냐민 지파의 후손을 잇게 하였다. 베냐민 전쟁의 시작부터 끝까지 여성은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죽임을 당하고 납치를 당하고, 짓밟히는 존재인 것이다. 3. 거룩한 전쟁?: “3차 세계대전에는 어떤 무기가 사용될지 몰라도, 4차 세계대전에서는 돌과 방망이로 싸울 것이다” 구약성서의 “야훼는 전쟁의 용사(출15:3)”라는 말에 대한 잘못된 반응이 세 가지 있는데, 첫째 회피하거나, 아니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반응이 있고(대부분 진보적인 평화주의자가 이에 해당될 것), 둘째 이러한 전쟁신 관념을 근거로 군사행동 내지는, 혁명과 테러의 정당성을 찾거나(극단적인 근본주의자나 보수주의자, 그리고 편향적인 진보주의자가 이에 해당된다) 마지막으로 신약의 ‘사랑의 하나님’ 이미지와 대조하여 구약의 하나님의 이미지를 ‘전쟁 용사’로 비하시키며 대립시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초대교회의 이단인 마르시온(Marcion, 85~160)을 들 수 있는데, 그는 복음서 중에서 구약의 하나님과 관련된 부분들을 삭제하여 누가복음과 바울의 10서신만을 정경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의 용사로서 야훼의 ‘거룩한 전쟁’ 이데올로기를 김이곤 교수는『출애굽기의 신학』(한국신학연구소, 2003)에서 ‘눌림 받는 자를 변호하고, 억압자로부터 피억압자를 해방시키는 해방 이데올로기’로 본다. 곧,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사를 ‘정복설’에 따라 이해하고, 구약의 거룩한 전쟁 이데올로기를 지배 이데올로기적 전쟁 이념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은 성서의 현실을 근본적으로 오해한 관점이며, 오히려 알트·노트학파(The Alt-Noth School)의 평화적 ‘이주 가설’과 멘덴홀(George E. Menderhall)과 갓월드(Norman Golttwald)의 소외된 계층의 반란 및 ‘혁명 가설’¹에 근거하여, 지배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해방 이데올로기로 이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약자(히브리인)를 강자(애굽)로부터 해방시키는 이러한 야훼의 해방 의지는 ‘고난의 떡을 먹고 희생의 피를 마시는’ 신약의 십자가 사건과도 연결이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야훼의 해방 역사는 ‘인간의 전쟁 참여(신인협력사상)’와 폭력수단의 사용을 거부한다. 서두에 인용한 출애굽기 14장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대신 싸우시니 인간은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신인협력을 부정하는 것은 세속 왕권을 부정하며 ‘야훼의 유일한 왕권 이념’과 ‘야훼에 대한 절대 배타적인 신뢰’로 이어진다(이렇듯 성서의 배타성은 ‘다른 종교 자체’에 대한 배타성이기 보다는 ‘세속 왕권과 지배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에 복종하는 종교’에 대한 배타성이다). 기원전 8세기 시리아와 에브라임이 반 아시리아 군사 동맹을 체결하고 유다를 치러 온다는 소식을 들은 유대 땅과 아하스 왕의 마음이 바람에 휩쓸린 수풀처럼 흔들려 두려워 떨고 있을 때, 이사야는 야훼의 말을 이렇게 전한다.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사7:4-9).” 오직 야훼, 오직 예수만인 것이다. 바울 사도도 전쟁을 이용하는 권력자와 그 지배 이데올로기의 핵심을 잘 간파하였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세상에 약자를 위해 강한 자를 무너뜨리시는 야훼의 거룩한 전쟁은 이렇게 지금의 전쟁과는 달랐던 것이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의 말이 귓가에 선하다. “3차 세계대전에는 어떤 무기가 사용될지 몰라도, 4차 세계대전에서는 돌과 방망이로 싸울 것이다.” 4.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고, 군주는 가장 가벼운 것이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죄의 문제: 시민의 정치적 책임』 (엘피, 2014)에서 “죄에는 4가지가 있는데, 첫째, 법률가의 관심사인 법적인 죄, 둘째, 인간의 운명에 공명하고 예술가적 인간에게 영감을 주는 형이상학적 죄, 셋째, 윤리학자나 정치철학자들의 사유를 진작시키는 도덕적 죄와 정치적인 죄”라고 한다. 적용을 해보자. 가령, ‘법적인 죄’는 소수의 독일인 전범들, ‘정치적인 죄’는 독일 국적자 시민 전체, ‘도덕적 죄’는 나치의 만행을 방관한 독일인들을 포함한 유럽인들, 그리고 ‘형이상학적 죄’는 수용소 생존 유대인을 포함한 인류 전체로 넓어진다는 것이다. 권력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숙명 때문에 우리 인간은 ‘피할 수 없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정의와 인권을 실현하는 권력을 지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서는 이것을 야훼의 거룩한 전쟁이라고 본다. 따라서 야스퍼스에 의하면 정의에 봉사하는 의미에서 권력투쟁에 함께 나서지 않는 것도 ‘정치적인 근본 죄이자 도덕적 죄’가 된다. 야스퍼스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이비 교리와 ‘나만 무죄’라는 속물적 윤리 모두를 배격한다. (…) 침묵하는 태도 또한 ‘가면’이다. (…) (죄와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는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회피적인 태도에서 자라난 마음은 은밀하고 무해한 욕설로 해소되고, 냉혹한 불감증, 광적인 격앙, 표현의 왜곡을 통해 무익한 자기소모에 이른다”고 말했다. 맹자도 이렇게 말한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고, 군주는 가장 가벼운 것(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이다.” 불의한 권력을 따를 것인가? 오직 예수를 따를 것인가? 믿음은 결단에서 시작된다! 각주)-----------------1) 멘덴홀은 히브리인의 가나안 정복을 농민혁명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였다. “이스라엘에서 열두 지파 조직이 시작되던 초기에는 통계적으로 중요하게 기록할 만한 팔레스타인 정복은 없었다. 거주민들의 급격한 대치가 일어났던 것도 아니고, 대량학살이 벌어졌던 것도 아니며, 왕정 행정지도자들에 대한 불가피한 축출을 제외하고는 본토 거주민들에 대한 대규모의 축출도 없었다. 요컨대 그 동안 일반적으로 알려져 왔던 그런 뜻의 팔레스타인 정복은 실제로 없었다. 그 대신에 다만 사회-정치적 과정에만 관심을 갖는 일반 역사가들의 견지에서 본다면, 실제로 일어났던 것은 농민들이 가나안 도시국가들의 결속된 조직망에 대항하여 일어났던 일종의 농민혁명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George E. Menderhall, “The Hebrew Conquest of Palestine,” The Biblical Archaeologist Reader, vol.3(1970), p.107. 여기에 동의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정복 가설’, ‘이주 가설’, ‘혁명 가설’ 가운데 어느 것을 받아들이고 어느 것을 거부하느냐는 것보다, 이 세 가설들이 저마다 고대 이스라엘의 기원과 관련한 다양한 모습들 가운데 하나씩 그 배경을 밝혀주는 구실을 하고 있으므로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될 것이다. 최병학 목사 경성대 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 문화
    2016-03-11
  • [기독교 교양 읽기 ⑫] “그들을 죽인 후에도 바다는 더욱 침묵 지켜"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예수회 창설 회원 중 한 사람인 프란시스코 사비에르는 1549년 일본에 도착해 2년 동안 교회를 개척하였다. 채 한 세대가 지나가기도 전에 기독교인의 수는 30만 명으로 급격하게 불어났다. 그러나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臣秀吉)에 의해 포교가 금지되었고, 17세기 들어서는 일본 막부(幕府)와 지방 관리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기독교인을 색출하였다. 이때 사용한 방법이 예수나 성모 초상을 새긴 동판을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후미에(踏繪)’다. 기꺼이 밟거나 침을 뱉고 지나감으로써 배교(背敎)한 사람은 살려주었으나, 그렇지 않은 자는 갖가지 악랄한 고문과 함께 처형하였다. 특히 체포된 선교사들의 경우에는 처형하기보다는 신도들의 고문이나 처형을 옆에서 지켜보게 함으로써, 배교하도록 만드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즉, 배교하면 고문 받는 신도들을 살려주겠다는 조건을 내거는 것이다. 그들을 살리기 위해 ‘후미에판’ 앞에 선 선교사에게 주의 음성이 들린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소설은 한 가톨릭 선교사가 배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침묵》 | 저자인 엔도 슈사쿠(遠藤周作)는 일본의 대표적인 현대 소설가로서, 여러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다. 이 소설은 그의 대표작으로서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 상황을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원제 沈默. 홍성사, 2003(개정판). 13,0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올해는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 서거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침묵》은 영화로 제작된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이 소설은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日, 총포에 더 관심있어 가톨릭 허용김길구 : 이 소설은 17세기 일본에서 일어났던 가톨릭 신자와 선교사들의 순교와 배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이야기가 오늘에도 현재진행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세계 60여 개국의 2억 명이 넘는 크리스천들이 아직도 국가의 압제 밑에서 순교를 각오하고 그리스도를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김현호 : 저번에 읽었던 《제자도》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었죠. 존 스토트 목사는 타문화권 선교사들은 선교지의 특성으로 인해 순교를 각오하고 선교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시대든지 복음은 그 사회에 변화를 던지므로 도전에 직면합니다.김수성 :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갑자기 가톨릭을 박해한 배경이 무엇인지가 우선 궁금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선봉장이었던 고시니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십자가가 그려진 군기(軍旗)를 사용할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김길구 : 우리 천주교가 아래로부터의 선교(전교)였다면, 일본은 ‘위로부터’였습니다. 포르투갈로 부터 전래된 두 정의 철포(화승총으로 개량)와 화약제조법이 전투의 양상을 바꿔 일본 전국 통일의 초석이 되었듯이 앞선 문물 교류로 인한 막대한 이익, 강력한 불교 세력의 견제, 규슈지방 다이묘들의 가톨릭 포용정책, 본문에도 나와 있듯이 역사의 아이러니인 하나님 호칭의 오역으로 불교의 한 종파로 오해한 점 등이 초기 선교의 물꼬를 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통일 후 그런 요인이 해소된 것이죠.김현호 : 소설에서도 잠시 언급되었듯이, 당시 일본에서는 가톨릭과 신교 간의 선교 대립, 포르투갈과 스페인 간의 무역 갈등 등 기독교인 간의 분열이 심각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분열상으로 인해 일본 권부의 신뢰감을 잃게 된 것도 기독교 박해의 한 원인 아닐까요?김수성 : 당시 일본 학자들 사이에서는 유럽 국가들이 선교를 앞세워 식민지를 개척한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치하에 박해가 본격화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김길구 : 한편으로 보면 에도시대를 연 도쿠가와가 교토시대와 결별하는 의미도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시 기독교의 급격한 성장에 대해 기존 불교 세력의 불만도 대단했다고 합니다. 특히 가톨릭 신자였던 고시니는 도쿠가와의 집권에 맞서 끝까지 싸우다 죽음을 맞이한 장수이기도 합니다. ▲ 일본 막부는 기독교인을 색출하기 위해 동네사람 모두가 관리들이 보는 앞에서 성화가 새겨진 동판이나 목판을 밟고 지나가게 하였다. 이를 ‘후미에’라고 하는데, 이로 인해 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를 당했다.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 보여줘김현호 : 17세기 들어서는 정말 갖가지 고문이 자행된 것 같습니다. 특히 이 소설에서는 선교사를 배교시키기 위해 옆에서 신자들을 고문하고 죽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들 가운데는 기꺼이 ‘후미에’를 한 신자들도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관념이 아니라, 자기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는 신자들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는 현장에서.김길구 : 작가가 소설에서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이런 고난과 죽음에도 ‘침묵’을 지키는 하나님. 그러나 후기에 나와 있듯이, 소설과 달리 실제로는 선교사들이 고문에 못 이겨 배교했다고 합니다만, 하나님의 ‘현존’은 나치 치하의 본회퍼 같은 현대 신학자들의 고민이기도 했지요.김수성 : 작가는 일본에서 가톨릭이 급속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로, 농민들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간으로 취급해 주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평생 굶주리고 비참하게 살아왔던 그들에게 선교사들이 따뜻하게 대해주었기 때문에, 어떤 고난이나 죽음마저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본 것입니다.김현호 : 그런데도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었죠. 선교사가 숨어서 지켜보는 가운데 두 사람의 신도가 바다에서 순교합니다. “지금 일본 신도의 순교는 이렇게 비참하고 이렇게 쓰라린 것입니다. 아아, 바다에는 비가 쉴 새 없이 계속 내립니다. 그리고 바다는 그들을 죽인 다음 더욱 무서우리만치 굳게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세월호 침몰과 아직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 고민했습니다.김수성 : 필립 얀시(Philip Yancey)는 《그들이 나를 살렸네》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일본에 유독 기독교가 뿌리내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서구 기독교가 하나님의 부성(父性)만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엔도 슈사쿠는 일본인들에게 모성(母性)도 가진 하나님을 보여주고자 했다. 일본의 어떤 속담에 따르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네 가지는 불, 지진, 벼락, 그리고 아버지이다.’김현호 : 결국 이 책은 인간애를 통한 이웃사랑이 궁극적인 신의 모습임을 보여주고자 한 것 같습니다. 참사랑은 타자를 위해 배교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타적인 사랑에 대한 깊은 성찰지점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김길구 : 한편, 이 소설과 달리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의 순교는 훌륭한 신앙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순절을 앞두고 이 책을 보면서 양화진에 안치된 초기 선교사들의 삶과 죽음이 더욱 고결하게 다가왔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들에게 복음의 빚을 지고 있는 셈이지요. 일본화한 그리스도인 지금도 존재해김현호 : 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순교자가 이름이 전해지는 사람만 해도 3,792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아직 일본에는 기독교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순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라는 말대로 복음화가 상당히 많이 이루어져 있는데, 일본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나타내고 있습니다.김수성 : 작가도 배교한 선교사들의 입을 빌려 강조하듯이, 일본은 다른 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는 특수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소설에서는 ‘늪’이라고 표현하고 있죠. 종교는 물론이고 모든 문화를 ‘일본화시키는 늪’이라고 할까요.김길구 : 신앙의 토착화와 관련된 내용입니다만, 필립 얀시에 따르면, 19세기 일본 정부가 나가사키에 가톨릭성당 한 곳을 허용했을 때 숨어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상당수 나타났다고 합니다. 240년 동안 비밀리에 모여왔던 ‘가쿠레 기리시탄(隱れ 切支丹)’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나 전례서 없이 존속해온 결과, 그들의 신앙은 가톨릭, 불교, 애니미즘, 신도(神道)의 기괴한 혼합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 신앙을 그대로 유지하는 결사체가 있다고 합니다.김현호 : 작가는 이에 대해서도 관리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죠. 일본 권부가 선교사를 배교시키는데 힘을 쏟는 이유는 뿌리를 잘라내는 것이라고, 이미 일부 지역의 농민들이 몰래 받들고 있는 하나님은 가톨릭교의 하나님과 비슷해도 사실은 전혀 다른 것으로 변질되었다고.김길구 : 이 소설은 신학교 다닐 때 필독서 중의 하나였습니다. 시종 팽팽한 긴장감이 이어지면서 몰입하도록 하는 묘미가 있습니다. 이런 문학적 성취가 세월과 종파를 초월해 꾸준히 읽게 하는 요인인 것 같습니다.김현호 : ‘내가 죽으면 관 속에 《침묵》과 《깊은 강》 두 권의 소설책을 넣어 달라’고 유언할 정도로 작가가 애착을 가진 작품이라고 합니다.김길구 : 다음에는 김기석 목사가 쓴 《흔들리며 걷는 길》(포이에마, 2014)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정리: 김수성] ◇ 같이 읽으면 좋은 책《깊은 강》 / 엔도 슈사쿠 / 민음사《예수양 주기철》 / 김인수 / 홍성사《십자가》 / 김응국 / 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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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25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⑫ 기억과 망각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신명기6:4-9) 1. 추억의 소환과 기억의 귀환: ‘잃어버린 시간들을 찾아서’ TV드라마 <응답하라 1988>과 같은 ‘응답하라 시리즈’의 핵심은 추억의 소환이자, 기억의 귀환이다. 지난 2015년 말 개봉된 영화 <히말라야> 역시 죽은 후배와의 추억을 소환하여 그의 시신을 가지러 히말라야의 그 험준한 산을 오른 것이며, 영화 <대호>도 기억의 귀환에 다름 아니다. 호랑이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새끼시절 자기를 살려주었던 포수를 기억하고, 포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소환에 그 모든 기억을 끝내기 위해 망각의 길로 호랑이와 함께 떠난다. 철학자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는 지각할 수 있기 때문에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우리가 나무를 나무로, 꽃을 꽃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나무와 꽃에 대한 원초적 기억인 산과 바다의 이데아(idea)에 대한 기억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인간이 지식을 얻는 학습 과정은 영혼 깊숙이 숨겨져 있는 이데아가 밝혀지기 때문이고 지식은 순수한 영혼이 과거에 보았던 것을 우리 몸이 기억해내는 것이며,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플라톤의 기억 이론인 상기론(anamnesis)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 특성이 추억을 소환하며 기억의 귀환을 당연시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진리 개념인 알레테이아(a-letheia) 역시 마찬가지이다. 망각(lethe)하지 않는 것,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진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게 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 마르셀의 어머니는 어느 겨울날 추위에 떨고 있는 마르셀에게 따뜻한 차와 ‘마들렌’이라는 조그만 케이크 하나를 권한다. 마르셀은 마들렌 한 조각을 차에 담갔다가 차를 마셨는데, 마들렌 부스러기가 섞인 차 한 모금이 입천장에 닿는 순간 일찍이 느껴 보지 못한 ‘매혹적인 쾌감’을 경험하게 된다. 차에 섞인 마들렌 부스러기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느꼈던 감각이, 어린 시절 아침 인사를 하러 레오니 숙모에게 갔을 때 숙모가 따뜻한 보리수꽃차에 마들렌 한 조각을 담가 준 일과 그 당시 콩브레(Combray; 소설의 공간적 배경)에서의 기억들을 연이어 떠올려 주었기 때문이다. 마르셀의 고백이다. “이윽고, 침울했던 그 날 하루와 내일도 서글플 것이라는 예측으로 심란해있던 나는 기계적으로 마들렌 한 조각이 녹아들고 있던 차를 한 숟가락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부스러기가 섞여 있던 그 한 모금의 차가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내 몸 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곤 소스라쳐 놀랐다.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미로운 쾌감이 나를 휘감았다. 그 매혹적인 쾌감은 사랑이 작용할 때처럼 귀중한 정수로 나를 채우면서, 즉시 나를 인생의 변전 따위에 무관심하도록 만들었고, 인생의 재난을 무해한 것으로 여기게 했으며, 인생의 짧음을 착각으로 느끼게 했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초라하고 우발적이며 죽어야만 할 존재라고는 느끼지 않게 되었다.” 프루스트는 이러한 회상을 ‘무의지적 기억(memoire involontaire)’이라고 불렀다. 마르셀을 매혹적인 쾌감에 빠뜨린 것은 무엇일까? 프루스트는 그 답을 3,000쪽이나 되는 방대한 장편소설(7부작)로 제시하고 있다. 곧, 소설이 진행되면서 부단히 반복되는 이러한 회상들을 통해 마르셀은 결국 잃었던 정체성을 회복하고 허무에 빠졌던 자기 자신을 구하게 된다. 자신을 열등한 존재, 우발적이고 죽게 마련인 존재라고 느끼고 결코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그가 다시 소설을 쓰려고 마음먹게 된다. 희망이 생긴 것이고, 결국 그의 삶이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 위안부 소녀상 따라서 기억은 이 시대의 화두인 동시에 영원한 실존적 화두가 된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기억의 귀환(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것)이 이러할진대 사회적 기억은 어떨까? 우리는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해 기념비(전직 대통령들의 기념관 등)¹를 세우고, 기록보관소를 만들고(세월호 관련 저 엄청난 SNS상의 담론들을 보라) 기억의 조형물(위안부 소녀상처럼)들을 세운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볼 때 이러한 기억의 연구(사회적 기억)는 1980년대에 시작되었고(나치 치하 아래에서 유대인들의 경험을 중심으로 전개된 홀로코스트의 영향과 제3세계 권위주의 국가들의 민주화 영향, 그리고 1990년 전후 세계적 탈냉전이 1945년 이전 식민주의나 1945년 이후 냉전하의 사회적 기억을 재구성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 초반 치열한 ‘과거청산’ 논쟁과 함께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기억 연구는 5·18민주화 운동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여성운동이다. 여기에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동학농민혁명 등도 포함될 것이다. 이러한 기억담론(나아가 기억혁명)은 공식적인 역사가 민중의 경험을 다루지 못할수록 강력하게 요청되며, 이후 체계화된 기억은 다시 역사 영역으로 편입이 된다.² 2. “망각은 추방으로 이끌고, 기억은 구원의 비밀로 인도한다” ▲ 야드바셈 나치 정권에 학살당한 600만 명의 유대인들을 기억하는 예루살렘의 야드 바셈(Yad Vashem, 이름을 기억하라) 홀로코스트 기념비에는 ‘망각은 추방으로 이끌고, 기억은 구원의 비밀로 인도한다(Forgetfulness leads to exile, while remembrance is the secret of Redemption)’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야드 바셈은 “나의 집, 나의 울 안에 그들의 송덕비를 세워주리라. 어떤 아들 딸이 그보다 나은 이름을 남기랴! 나 그들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이름을 주리라”는 이사야 56:5절 말씀에서 인용되었다. 이스라엘 안의 이방인들(특히 이사야 본문에 의하면 ‘고자’로 배척받는 이들로 이 세상에서 쫓겨난 사람들, 추방당한 사람들, 배제당한 사람들, 분배의 몫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슬픔과 고통의 원인을 국가적 횡포가 막아 더 큰 아픔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부르시어 이스라엘의 아들과 딸들보다 더 나은 이름을 주며 ‘기억’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명이자 하나님의 기억의 귀환이다. 나아가 그리스도교 예배의 모든 절차는 기억의 귀환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반복적 상기는 공통된 기억의 반복이며 이를 통해 신앙적 전통이 연결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억의 귀환은 신앙의 본질적 토대가 된다. 또한 대표적인 그리스도교의 성례인 성찬에서 포도주와 떡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는 것은 그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을 기억하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일진대, 그렇다면 기억은 단순히 의지적인 머릿속 작용만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기억은 기억하는 사람과 기억되는 대상 사이를 연결시킨다. ‘참여적 행동’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바쳐 사랑했던 이들의 고통과 고난을 외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기억해야하는 것이다. 용산 참사, 밀양과 강정 마을, 세월호, 메르스 사태, 백남기 농민에 대한 공권력의 과도한 물대포 살수 등 최근의 사건들도 잊혀져가는 것들이 너무 많다. 기억의 길이는 가슴으로 느낀 아픔의 길이와 비례하건만, 아직도 아픔은 기억으로 소환되어 망각의 강으로 떠날 줄을 모르는 것이다. 3. 애도와 우울증: 망각의 강으로 사람은 아픈 상처를 잊지 못하면 삶을 새롭게 시작하지 못한다(그러나 망각과 동시에 ‘앞서의 이야기와 같이’ 기억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하지도 못한다). 오직 인권과 민주화 운동, 통일 운동을 하다 갖은 고초를 겪고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만이 계속되는 삶을 위해 망각을 불러내야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트라우마(外傷, trauma, 전쟁, 성폭력, 재난, 사고와 같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외적인 사건의 영향으로 이 사건을 통제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정신적 충격) 증후는 사건에 대한 기억이 너무나 강렬해 다른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의식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몸이 기억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기억을 통제하려면 망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망각은 단순히 잊는 것이 아니라 잊을 것은 잊고 기억할 것은 기억함으로 기억을 통제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국가가 일괄적으로 집행할 아무런 권한도 의무도 없다. 오늘 한국 사회의 문제는 역사적 외상에 있어 국가의 과도한 망각 집착에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튼 상처와 고통에 대한 망각은 어떻게 가능할까? 「애도와 우울증」이라는 논문에서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증 모두 사랑하는 대상을 잃어버렸을 때 나타나는 증상들이지만 몇 가지의 차이가 발견하며 이렇게 말한다. “애도의 경우 빈곤해지는 것은 세상이지만, 우울증의 경우 자아가 빈곤해진다.” 애도(Trauer, 슬픔)의 감정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데 따른 자연스러운 반응이어서 아무리 격심하다 해도 치료를 요하진 않는다. 충분히 슬퍼하고 나면 아픔은 가라앉고 다시 일상이 열린다. 그러나 우울증에 빠지면 상실로 인한 극한의 고통 속에서 외부 세계에 대한 반응 능력을 잃어버린다. 왜냐하면 우울증은 자애심, 곧 자신을 사랑하는 감정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슬픔은 세상을 텅 비게 하고, 우울증은 내 안을 텅비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슬픔과 우울증의 원인을 밝혀, 자신이든 타자든 합당한 결과를 수용하거나 그 지난한 과정을 거쳐 지나갈 때, 슬픔은 위로받고, 우울증은 사라질 것이다. 그때 망각은 자연스레 따라와 지나가버린다. 4. 망각 인간의 내면적인 삶과 관련된 트라우마와는 달리 인간의 외면적인 삶과 관련되어 국가 혹은 정치 권력이 개입해서 망각하는 행위가 있다. 역사적 사면(赦免, Amnesty)이 바로 그것이다. 1946년 9월 19일 처칠 영국 수상의 취리히 연설은 이제까지 적대적이었던 국가들 사이의 과거를 잊고 새로운 평화의 역사를 쓰자는 ‘망각의 신성한 행위’를 호소한다. 하나님은 역사적 사면을 우리 인간 전체를 향하여 펼쳐 보이셨다. ‘기억의 귀환인 동시에 죄에 대한 망각 대선언’인 것이다. 성경을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할지라도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용서하시는 긍휼하신 하나님이시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이사야43:25)”,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49:14-15).”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는 기억의 회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온 이들이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쓴 나물을 먹으며 선조들의 출애굽과 광야에서의 고난을 후손이 기억하고자 한다. 따라서 유월절 식탁에서 자녀들은 쓴나물을 먹으며 부모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왜 우리가 이 쓴 나물을 먹어야 합니까?” 부모는 이렇게 답한다. “조상들의 고난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억하기 위해서!” 각주)-----------------1) 문자적인 의미로는 기억(記憶)은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내는 것’이며 기념(紀念)은 ‘어떤 뜻깊은 일이나 훌륭한 인물 등을 오래도록 잊지 아니하고 마음에 간직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념은 과거의 사건을 반복적으로 재현하지만 그 속에 기억이라는 의식적이고 능동적인 행위가 없으면 그것은 단지 형식적 제의와 축제에 불과할 것이다. 2) 그러나 이러한 기억혁명이 항상 인권을 중시하는 패러다임을 가지고 국가주의적 기억을 해체하는 것만은 아니다. 한국에서 사회적 기억의 전환은 주로 민주화 국면(또는 ‘민주정부 10년’ 기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보수적인 사람들은 ‘반기억 혁명’의 맥락에서 국가주의적 기억을 새롭게 부활시키려는 새로운 기억의 터를 조성하려고 한다(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이나 박정희 기념도서관 등).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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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3
  • [기독교교양읽기⑪] ‘제자도’는 교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다
    돌밭에 떨어진 씨가 말라죽은 이유는? “88세의 나이에 마지막으로 펜을 내려놓으면서, 나는 독자들에게 조심스럽게 이 고별 메시지를 보낸다.”저자는 이 책이 ‘마지막 인사’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어떤 심경으로 이 책을 썼는지를 알만하다. 그러면서 독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제자, 그것도 ‘급진적 제자’가 되라고 이야기한다. 왜 급진적 제자인가?‘급진적’이라는 말은 ‘뿌리’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에서 왔다. 예수님은 돌밭에 떨어진 씨가 말라죽은데 대해 “뿌리가 없으므로”라고 말씀하셨다. 급진적 제자는 좋은 땅에 떨어져 뿌리를 깊게 내림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 씨앗이다.급진적 제자는 여덟 가지 자질을 가져야 한다. 첫째는 불순응으로, 세상에 대해 도피주의와 순응주의 모두를 피해야 한다. 둘째는 닮음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셋째는 성숙으로, 그리스도와 성숙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넷째는 창조 세계를 돌봄으로, 자연에 대해 책임 있는 청지기가 되는 것이다. 다섯째는 단순한 삶으로, 돈과 소유에 있어 단순함을 제안한다. 여섯째는 균형으로, 예배와 일 등에 있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일곱째는 의존으로, 자립 못지않게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여덟째는 죽음으로, 그리스도인이란 정확히 말하자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이들”이다.◈ 《제자도》 | 저자인 존 스토트(John R. W. Stott)는 현대 기독교 지성을 대표하는 복음주의자이자 신약학자이다. 1974년 ‘로잔 언약’ 입안자로 참여했고, 랭햄 파트너십 인터넷을 설립하여 전 세계적으로 문서·교육 사역을 하고 있다. 원제 The Radical Disciple. IVP, 2010. 8,0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2016년 새해가 밝았다. 많은 사람들은 묵은해를 보내면서 크든 작든 새해 소망을 하나쯤 품는다. 물론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제자도》를 읽은 우리에게 새해 소망은 무엇일까? 모든 기독교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이 세상에 주님의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는 것 아닐까? ▲ 왜 ‘제자도’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날로 더 성숙해지고,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으로서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바라며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림 출처: jrforasteros.com] 보수와 진보의 간격 줄인 복음주의자김길구 존 스토트 목사는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개최된 제1회 세계복음화국제대회에서 채택한 ‘로잔 언약(The Lausanne Covenant)’을 기초한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이 책은 스토트 목사의 유언이라고 할 정도로 비장함을 가지면서도 평이한 내용이어서 모든 분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김현호 스토트 목사는 랭햄(Lanham)재단을 설립하여 세계적인 학자를 많이 키운 분으로도 유명합니다. 한국 교회 지도자 중에도 이 재단의 도움을 받아 공부한 분들도 있습니다. 이 책이 결국 그분의 마지막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스토트 목사는 2011년 7월 27일 런던 바나바칼리지 은퇴자 숙소에서 지인들이 읽어주는 성경 말씀과 헨델의 〈메시아〉를 들으며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김길구 로잔 언약은 그의 주도로, 하나님이 온 우주의 절대권자라면 그 창조세계에서 정의로운 제도나 문화 창조에 그리스도인이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이렇듯 스토트 목사는 소위 ‘복음주의’ 진영에 큰 울림을 주었던 중재자였습니다.김수성 이 책의 본래 제목에는 ‘래디컬(radical)’이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읽기 전에는 상당히 급진적인 내용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정작 읽으면서는 오히려 지극히 복음주의적이라고 느꼈습니다.김현호 개인적으로는 한국어판 제목에 ‘래디컬’을 뺀 데 대해 불만입니다. 그가 쓴 책이 50권이 넘습니다만, 그중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현대사회 문제와 기독교적 책임》을 가장 공들인 책이라고 스스로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은 현재 만연한 서방세계 교회의 문제점, 즉 반지성주의와 현대 사회에 대한 무관심 등에 던지는 메시지 아닐까요?김수성 우리나라에서는 ‘급진적’이라는 말을 제목에 사용하는 것 자체에 부담을 느낀 것 아닐까요? 사실 내용을 보면 ‘철저한 제자도’ 또는 ‘온전한 제자도’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구신학에 한계가 왔음을 지적한 책김길구 이 책에서는 제자도의 자질을 여덟 가지 들고 있습니다만, 첫 번째로 언급한 현대의 잘못된 풍조에 휩쓸리거나 순응하지 않는 것이 제자도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다원주의의 도전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김수성 다원주의에 대해서 참으로 묘하게 대응하라고 합니다. “지극히 겸손해야 하고, 개인적인 우월감은 조금도 비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최종성은 계속해서 주장해야 한다.” 외유내강이라고 할까요, 스스로 조심함으로써 상대를 자극하지 않되, 우리가 주장할 바는 양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죠.김길구 이 역시 균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저자의 경향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다원주의에 대해 진보주의자들이 대체로 관대하다는 지적에 대해 분명하게 선을 그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윤리적 상대주의 풍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서구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문제가 불거지고 있습니다만, 혼전 동거와 동성애 등 성 윤리에 관해 저자는 성경을 인용하며 엄격한 잣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김현호 저는 이 책 5장 ‘단순한 삶’에서 깊은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돈과 소유에 대해 청지기적 단순함을 제안한 ‘로잔 언약’을, 오늘날 제자라고 자처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실천하는지에 관한 문제입니다. 바로 물질주의 풍조에 관한 지적이죠.김길구 저자는 물질주의에 대해 “영적 삶이 질식당할 정도로 물질적인 것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라고 지적합니다. 참된 제자가 되려면 한국 교회는 가진 것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김현호 “우리는 모두 더 단순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 우리는 낭비하지 않고, 개인적인 의식주와 여행과 교회 건축을 위해 사치하지 않기로 결단한다.” ‘단순한 삶에 대한 복음주의의 언약’에 나와 있는 이 말이 아프게 다가옵니다.김수성 또 하나의 문제점인 나르시시즘 풍조에 대해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저자는 자신도 사랑해야 한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어야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김길구 ‘자기애(自己愛)’와 ‘자존감(自尊感)’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나르시시즘이 다른 사람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자기애’라고 한다면, 김 교수가 이야기하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남에게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는 먼저 ‘자존감’을 가져야 한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균형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죠.김현호 이 문제는 창조 세계를 돌보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이 나르시시즘에 빠져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자기 자신에게만 충실하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청지기 역할은 소홀히 하면서 살아왔습니다.김길구 앞서 이야기한 네 가지 풍조에 빠지지 말라는 말은 미국 교회처럼 성장주의에 한계가 왔음을 지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 신학은 서구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 교회의 변화는 아직도 굼뜨기만 한 것 같습니다. 이 책으로 ‘업’시켜 제자 훈련했으면김수성 저는 개인적으로 마지막에 언급한 죽음에 관한 내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몇 달 전에 이야기했던 ‘순례’와 관련해서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온전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죽음밖에 없는데, 그것은 철저하게 버리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김현호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고통 받고 신음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고난이나 박해를 각오하고서라도 우리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저자는 도피주의와 순응주의 둘 다를 피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세상에서 도피하여 거룩함을 보존하려 해서도 안 되고, 세상에 순응하여 거룩함을 희생시켜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자기만을 위해서 허덕이지 않도록 항상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김길구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정도의 마인드만 가져도 한국 교회의 당면한 위기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김현호 1980년대 한국 교회가 제자 훈련으로 성장했다면, 이제는 이 책을 중심으로 업그레이드하여 리더십 훈련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김수성 저는 목사님들이 이 책의 주제를 하나씩 나누어 설교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김길구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끝으로 이 책도 궁극적으로는 공동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네 가지 잘못된 풍조에서 벗어나 진리의 공동체, 검소한 순례자의 공동체, 순종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엔도 슈사쿠가 쓴 소설, 《침묵》(홍성사, 2003 개정판)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수성] ◇ 같이 읽으면 좋은 책《급진적 제자도》 / 존 하워드 요더 / 죠이선교회《제자 제곱》 / 프랭시스 챈 / 두란노 《공동체 제자도》 / 요한 하인리히 아놀드 / 홍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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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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