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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와 사랑 사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찾다
    새로운 기독교영화의 탄생 이보람 감독의 영화 <콜링>은 디지털 세대에게 어울리는 새로운 기독교영화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익숙한 디지털 세대들에게는 비싼 관람료와 극장까지 가야하는 번거로움 대신에 와이파이가 되는 곳이면 어디서든 공짜로 볼 수 있는 영화가 우선 선택을 받게 마련이다. 이것은 그동안 기독교영화란 극장에서 상영되는 대형 성서영화라는 선입견을 가진 기독교인을 놀라게 하는 일인 동시에 문화의 변화에 크게 개의치 않았던 한국기독교영화계에 가히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만한 일이란 점에서 주목받기에 합당하다.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콜링>은 새로운 변화를 보여준다. 첫째는 영화를 상영하는 플랫폼(platform)으로 일반 극장이나 DVD가 아닌 유튜브를 택했다는 것과 둘째는 젊은 기독교인들의 일상적인 삶과 고민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그 변화는 물씬 느껴진다. 플랫폼의 변화는 디지털 시대가 한창 진행 중인 현시점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디지털 콘텐츠를 제작하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어떤 플랫폼을 선택하느냐가 성패를 가늠한다할 만큼 핵심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시점에서 <콜링>은 일반 영화관이나 DVD가 아닌 유튜브를 선택했다. 즉 영화라는 문화콘텐츠를 전달하는 플랫폼에는 영화관과 TV와 같은 전통적인 상영방식을 비롯하여 이제는 과거 유물이 된 VCR과 우리나라에서는 적극적인 호응을 끌어내는데 실패한 DVD가 있다. 또한 최근 각광받고 있는 IPTV나 인터넷을 통하여 원하는 영화를 선택해서 볼 수 있는 VOD 등도 영화를 볼 수 있는 플랫폼의 성격을 지닌다. 과거 영화의 경우 플랫폼은 원 소스 멀티 유즈(one-source multi-use) 시스템 안에서 이해되곤 했다. 즉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도 그것이 극장뿐만 아니라 DVD와 영화전문 케이블 TV 그리고 컴퓨터 게임과 책으로 까지 연계되어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활용될 가치가 높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졌다. 그러나 오늘날 플랫폼은 스마트폰과 연계되어 정보콘텐츠를 디지털세계 안에서 전달받을 수 있는 시스템 환경을 말한다. 쉽게 말자하면 아마존이나 구글, 페이스북 등이 플랫폼에 해당한다. 유튜브나 인터넷 VOD는 가장 성장세가 빠른 영화의 플랫폼들이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밝힌 지난 해 한국인들의 영화관람 태도가 이를 증명한다. 2018년 극장을 찾은 관객의 수는 총 2억1,649만 명으로 1인당 영화관람 편수는 4.18회에 해당한다. 이것은 세계최고 수준의 영화관람 경향을 보이는 것으로 한국의 영화의 나라임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수치는 2017의 2억 1,987만 명 보다 약 3백만 명 이상 줄어든 수치이기도 하다. 그러면 한국의 영화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지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극장을 찾는 관객 수는 줄어들었지만 극장입장권 판매액은 오히려 늘어났다. 이유는 극장관람료가 올랐기 때문이다. 평일 일반 영화를 관람비가 1만원이고 3D나 4D를 주말에 보려면 2만원을 줘야하는 현실은 주머니 사정이 열약한 학생들의 입장을 줄어들게 만든 주요한 원인이지만 전체관람료 수익은 증대시킨 또 다른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관람료에 부담을 느낀 한국의 젊은층들이 대신 찾아간 곳은 넷플릭스(Netflix)를 볼 수 있는 인터넷 VOD시장이었다. 흔히 말하는 디지털 온라인시장의 규모는 극장관람료 수입이 감소한 것과는 다르게 상승세에 있다. 2017년 4,362억 원이었던 온라인 영화시장은 2018년 4,739억 원으로 8.6% 증가했다. 이것은 영화관객을 만날 수 있는 곳이 극장만이 아니며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복음과 기독교의 가치를 전하기 위해서는 인터넷 세계와 유튜브 세상에 발을 옮겨놓을 수 있어야 함을 시사 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보람 감독의 영화 <콜링>이 유튜브를 놀이공원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는 매우 적절한 문화선교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현실적 삶을 코믹하고 성경적으로 풀다 <콜링>이 이전의 기독교영화들과 다른 두 번째 면모는 작품의 내적인 표현방식에서 나타난다. 주제는 선교를 향한 하나님의 부름심과 응답을 다루고 있지만 묘사하는 방식은 매우 현대적이며 새롭다. 중고자동차 딜러로 일하는 재민(임재민)은 어느 날 자동차를 보러 온 시연(김시연)을 만나면서 새로운 사랑을 꿈꾼다. 예전에 좋아했지만 오랫동안 보지 못하는 동안 시연은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고 재민은 정직한 기독교인으로서 나름 열심히 살아가는 삶을 살고 있는 중이었다. 영화가 보여주는 재미는 선교사로의 부르심과 옛 사랑에 대한 성취 사이의 갈등 속에서 전개된다. 재민은 시연과의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하나님께서 시연이를 따라 선교사로 부르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만일 시연과 다른 인생을 산다면 그것은 선교사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매우 감정적인 판단을 하고 있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교회에서 나름 진지한 신앙생활을 하지만 아울러 연애와 결혼에 대한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는 청년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실수를 영화는 갈등의 소재로 삼고 있다. 물론 영화는 정답도 제시한다. 선교는 선교이고 사랑은 사랑이지 선교를 사랑과 혼합시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혼잡케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영화는 관객에게 제시한다. 교회를 다니는 신실한 청년들의 고민 가운데 하나인 부르심 혹은 소명, 아니면 비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철저히 현실적인 언어로 영화를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감독의 영화관이라 볼 수 있는 재미의 추구는 기독교영화도 디지털 세대들에게 먹혀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주연은 묵직하고 진지하지만 주변 상황을 만들어가는 조연은 매우 코믹하다. 재민이 정직한 중고차딜러로서 방송을 타고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을 무렵 그가 인생의 중요한 결단을 내리는 장면에서 감독은 매우 코믹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장은 재민에게 아메리카노 커피 투 샷을 건네주면서 격려하지만 재민은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며 사표를 제출한다. 사장: “왜 갑자기 그만두겠다는 거야. 혹시 자리가 마음에 안 들어? 최실장이 괴롭혀? 재민: “아닙니다.” 사장: “그럼 뭐야, 아메리카노가 맛이 없어? 재민: “그런 게 아니라 더 이상 차 파는 일을 하는 게 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장: “임실장, 정신차려 자네가 대한민국 중고차 딜러 중에서 최고야. 자네가 웬만한 딜러 다섯 명 여섯 명 보다 훨씬 많이 팔고 있어. 재민: “저는 이제 선교를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사장: “그걸 왜 니가 해? 재민: “하나님께서 저를 선교사로 부르셨습니다.” 사장: “하, 하나님은 너를 중고차 딜러로 부르셨어!” 영화 연출자에게 가장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는 심오하고 중요한 얘기를 코믹하게 묘사하는 일이다. 신중하고 중차대한 일을 무거운 톤으로 연출하기란 어렵지 않다. 공포영화는 무섭게 만들고 멜로드라마는 달콤하게 묘사하듯 기독교영화라면 신앙의 결단을 내리는 장면에서 기품있고 은혜가 넘치는 느낌이 나도록 표현하면 될 것이란 생각을 영화는 뒤집는다. <콜링>은 결정적 순간에 코믹한 발상을 숨기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디지털 세대가 좋아하는 쿨한 방식인 셈이다. 슬프다고 눈물을 흘릴 필요도 없고 잘됐다고 해서 박수치며 좋아하는 것은 너무 고전적이다. 인터넷 세대에게 진짜 멋진 사람은 중요한 순간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대응하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한창 잘나가고 있을 때 사표를 쓰고 하나님의 소명임을 언급하며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일은 얼마나 훌륭한 기독교인의 모습인가? 그러나 이를 진지하게 묘사했다면 관객은 곧 부담을 느끼고 말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이라면 선교에 대한 관심과 소명을 생각해야 하지만 자신에게 적용했을 부담을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은 까닭이다. 이 때 주인공 주변의 인물들을 통한 코믹한 연출은 선교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고 가볍게 선교에 다가갈 수 있도록 의식을 전환시킨다. 유머는 두려움의 해독제란 사실을 아마도 이 영화의 감독은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디지털 세대에게 유튜브로 다가가는 코믹한 기독교영화 <콜링>. 중요한 신앙의 주제를 이 시대의 언어로 풀어나가는 모습은 분명 미래 기독교영화의 전망을 밝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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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27
  • [기독교교양읽기46] 인간은 하나님을 인간욕망의 도우미로 전락 시켰다
    팀 켈러의 짝퉁 神 식별법 십계명 제1, 2 계명, 다른 신을 네게 두거나 섬기지 말며, 우상은 어떤 형상으로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은 고대인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닌 오늘을 사는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말씀이다. 다만 그 모양이 조금 바꿨을 뿐이다. 섹스와 돈, 끝없는 욕망에 대한 성취와 이를 위한 권력의 추구뿐 아니라 기독교로 둔갑한 문화의 가면을 쓴 짝퉁들이 할거하는 ‘우상공장’인 우리의 마음에서 가짜를 몰아내고 하나님을 제자리에 모셔야 한다. 저자는 이를 위하여 신학적, 성적, 종교적 및 문화적 우상 등 10가지의 우상의 유형과 이를 식별하는 방법 등을 소개하였다. 이를 위하여 친숙한 성경의 얘기의 재해석과 권말목록을 활용한 심도 깊은 Tip은 독자로 하여금 독서의 즐거움을 더하게 한다. || 저자 팀 켈러(Timdthy Keller)목사(67세)는 미국 맨해턴의 리디머 장로교회의 담임목사로 재직 하면서 약 6천명의 교인을 둔 교회로 성장시켰다. ‘21세기의 C.S.루이스’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기독교변증가로도 영향력이 큰 구도자 중심의 복음전도자였고, 리디머교회를 통해 센터처치론을 정립하였다. 지역을 섬기는 사회참여에 적극적으로 헌신하여 한국에서도 새로운 세대를 위한 모델로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지난해 7월 조기은퇴 하여 리디머교회를 3개 교회로 분립하는 10년 장기계획인 리디머교회의 도시교회 개척네트워크인 ‘시티 투 시티’ 프로그램에 동참하고 있다. 저서로는 《팀 켈러의 묵상》 《센터처치》 《탕부하나님》 등이 있다. 두란노, 2017. 14,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하나님을 말하다》 팀 켈러 지음 / 두란노 《우상의 시대 교회의 사명》톰 라이트 지음 / IVP 인간은 하나님을 인간욕망의 도우미로 전락 시켰다 ‘쾌락의 역설’, 내가 만든 신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현호 기쁨의집 대표, 김형기 팔복교회 목사 인간의 마음은 우상공장“우상이란 무엇인가? 무엇이든 당신에게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무엇이든 하나님보다 더 크게 당신 마음과 생각을 차지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다른 데서 얻으려 한다면 그게 바로 우상이다.” 우상, 하나님보다 더 크게 생각하는 인간의 모든 시도김길구 21세기의 C.S.루이스라 불리는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 입니다. 원제는 counterfeit gods입니다. 카운터핏은 가짜의, 모조의 라는 의미인데요, 저자는 도입부에서 우상,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는 경고의 말로 시작합니다. 김형기 ‘세상에는 실체보다 우상(偶像)이 더 많다’란 니이체의 말을 인용했는데 저자를 따라가다 보면 문득 가짜가 진짜를 대신하는 슈퍼리얼리티의 영화 <트루만쇼>의 거대한 가짜세트장에 내가 들어있다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과연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있는가? 하는 질문과 함께‥김현호 당시 종교백화점 고대 근동 지방에는 많은 이방신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가짜인지 아닌지를 비교적 구분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고대종교의 그런 이방신들과는 또 다른 현대인들의 위장된 신들을 얘기합니다.김길구 우상은 금이나 은, 돌과 목재 등으로 형상을 만들어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말하는데 사도 바울에 와서는 탐심 등 정신적 영역까지도 포함한 개념으로 확대됩니다.김형기 구약에서도 바벨론 백성을 향해 ‘자신들의 힘을 자신들의 신’으로 묘사한 하박국 선지자나 이스라엘이 애급과 앗수르를 상대로 맺은 보호조약을 우상숭배로 질타한 에스겔과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도 있어요. 저자는 ‘하나님보다 더 크게 생각을 차지하는 것.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다른 데서 찾으려는 인간의 모든 시도가 바로 내가 만든 신, 곧 우상숭배라고 합니다.김현호 저자의 지적처럼 무엇이든 우상이 될 수 있고, 좋은 것 일수록 더욱 그러기 쉽겠죠. 나의 평생소원, 사랑, 돈, 성취, 권력, 문화와 종교, 은혜 없는 복음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최근 대중문화가 소비자 중심으로 발전하다보니까 사람들의 종교성에 편승하여 내 입맛에 맞게 신들을 만들어 내고 그것들을 사랑하고 믿고 따르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목상이나 신상이 아니더라도, 이미 우리 마음속을 지배하는 가짜 신들이 널려 있습니다.전인격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과하지 않은 중요하고 사랑스런 것들이 바로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경종입니다. ▲ 팝아티스트의 거장 앤디 워홀作 <마를린 먼로> 복제화 된 이미지가 환한 미소에도 덧없이 느껴지는 것은 허상을 좇는 우리 삶이 투영됐기 때문일까? 내가 만든 신은 반드시 나를 배신한다!김길구 왜 이런 우상들이 횡횡할까요? 우리 삶의 자본주의화와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우리의 신앙마저도 내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도구가 됐다는 의미지요. 이런 체계에서 중요한 것은 욕구의 충족입니다. 우리의 신앙마저도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예수를 닮아가는 제자로서의 삶이 아닌 종교소비자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김현호 교인들은 설교와 은혜의 소비자가 되고 목회자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대신 그들의 니즈를 충족시켜주기 위하여 노력한다면 예수님의 제자도와는 거리가 멀어지겠죠.김길구 이 책은 각장 마다 우리에게 친숙한 성경인물의 얘기를 통하여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평생소원, 야곱과 라헬과의 사랑이야기, 세리장 삭개오와 돈, 나아만과 성취, 느브갓네살과 권력, 요나를 통해온 문화와 종교가 그렇습니다. 팀 켈러는 다 아는 성경이야기를 새롭게 잘 풀어내는 재능이 있어요. 이 책의 장점이기도 하지만‥김형기 그중에서 인상적인 것은 사랑편에서 7년을 고생한 야곱에게 라헬대신 속임수를 쓴 레아와의 가상대화에서 야곱이 레아에게 “나는 어둠 속에서 라헬을 불렀는데 당신이 대답했어요. 왜지?”라고 묻자 레아는 “당신의 아버지는 어둠 속에서 에서를 불렀는데 당신이 대답했어요? 왜죠?”라고 되묻어 야곱의 분노가 잦아들었다는 랍비의 주해를 인용했는데, 곳곳에 통찰을 얻을 수 있어 유익한 글 읽기였습니다.김현호 저는 야곱이 원치 않은 결혼을 한 레아는 사랑을 받지 못한 체 장남 르우벤(본다), 둘째 시므온(듣는다), 셋째 레위(연합하다)를 낳고도 마음을 얻지 못했으나 후대에 그 자식들을 통해 예수를 낳게 되는 내러티브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김형기 풍족한 소유와 소비는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표면적 우상숭배에서는 단호하기 쉬우나 숨겨진 내면의 근원적 우상숭배에 대해서는 통제하기가 더 힘듭니다. 거부인 록펠러, 포드, 카네기가 자선사업을 많이 했지만 돈이라는 마음 속 우상까지 제대로 제어했는지는 의문입니다. 김현호 은혜 없는 복음은 가짜하나님을 만든다는 지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리나 은사를 강조하다보면 은혜에 의존성이 상실되고 교리의 정확성에 의존하게 되지요.김길구 성취는 우리시대의 술이다. 개인적인 성공과 성취는 여느 우상보다 더 우리에게 우리자신이 신이라는 잘못된 확신을 주게 됩니다.김현호 작은 성공에 우쭐해서 거짓된 안정감을 느끼며, 자신을 왜곡해 보기 시작하고, 제한된 분야의 성공을 모든 분야의 전문가처럼 행세한다면 우선 성공을 우상으로 삼는 징후로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만든 우상, 그리고 그 식별법김길구 이 책 에필로그에 우상의 종류를 수록해 놓았는데 다 열거할 수 없겠고 그중 몇 개만 소개하면 우선 신학적 우상입니다. 교리적 오류는 하나님에 대한 신관을 심히 왜곡시켜 거짓 신을 만들게 되고요, 정치적·경제적 우상도 좌우파, 자유방임 등 어떤 단면을 절대화해 궁극의 해법을 삼거나 자유시장을 신격화 하거나 악마처럼 여기는 것도 우상이라고 볼 수 있고요.김현호 종교적 우상의 경우 도덕주의와 율법주의, 성공과 은사의 숭배, 종교를 빙자한 권력남용 등과 인종적·민족적 우상은 인종차별, 군국주의, 국수주의 등으로 민족적 자긍심도 지나쳐 적의나 압제로 변하면 우상이 됩니다.김형기 관계적 우상도 있는데요. 병적으로 의존하는 역기능적 가족관계, 부적절한 끌림, 자녀를 통한 대리인생을 사는 것 등이 해당됩니다. 관계에 대한 의무감, 집착 등이 지나치면 분별력을 잃어 양심을 거스리게 되지요. 성적 우상도 마찬가진데요. 포르노와 페티시즘 같은 중독은 친밀감과 수용을 약속할 뿐 실제로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자신이나 파트너의 외모를 떠받드는 행위나 로맨틱한 이상주의자도 여기에 해당 되겠지요. 그리고 모든 ‘중독’도 우상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김길구 마지막으로 팀켈러의 우상퇴치법을 소개해 봅시다. 저자는 먼저 생각의 내용을 점검하라고 말합니다. 이를 위하여 대주교 윌리엄 템플이 ‘혼자 있을 때 하는 일이 곧 당신의 신앙이다.’이라는 말의 의미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로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돈을 어떻게 쓰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김형기 그리고 꾸준히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통제하기 힘든 자기감정에 주목하라고 합니다. 말씀의 묵상과 기도의 생활화를 통하여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지 않으면 계속 대상만 바뀔 뿐 우상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됩니다.김현호 팀 켈레는 세속적인 관심이나 욕구충족에만 관심이 있는 가짜들과 결별하고 래디컬하게 온전히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길을 가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합니다. 진짜냐 가짜냐?김형기 읽으면서 허구이긴 하지만 환타지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탐욕에 물든 악의 군주 사우론에게 압도적인 악의 실체를 느꼈다면, 이 책에서는 우리의 내면에 꽈리 튼 탐욕의 실체와 문화와 종교로 교묘히 위장한 가짜우상들이 우리 삶의 전 영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책이었습니다.김길구 수고하셨습니다. 이번호는 300쪽도 안 되는 작은 규격의 책이었습니다만 다룰 부분이 많아 토론이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다음에는 3.1절 특집으로 씨알사상연구소 박재순소장의 《삼일운동의 정신과 철학》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정리: 김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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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14
  • [영화] 기독교인은 코미디영화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코미디와 경건한 신앙 영화로도 만들어진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는 중세의 가톨릭이 웃음에 대해 얼마나 부정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제시된다. 1327년 이탈리아 북부의 베네딕트 수도회 소속의 한 수도원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의 윌리엄 수사와 그의 조수 아드조가 등장한다. 죽은 수도사들마다 손가락과 혀에서 검은 잉크의 흔적을 발견한 윌리엄 수사는 그들이 모두 독살되었고 모종의 책과 연계되었음을 알아차린다. 수도원에서 결코 읽으면 안 되는 금서로 밝혀진 책은 다름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s) 제2권이었다. 이 책은 인간을 웃게 만드는 희극에 관한 책이다. 그런데 수도원에서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호르헤 수도사는 경건한 수도생활에 웃음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웃음은 두려움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악마에 대한 두려움과 지옥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감을 호르헤 수사는 신앙의 본질이라 여긴다. 즉 두려움이 없다면 신앙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만큼 두려움을 없애는 웃음은 신앙에서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호르헤는 응징의 차원에서 남몰래 시학 제2권을 읽는 수도사들이 침을 발라 책장을 넘기는 습관을 이용 책 귀퉁이마다 독을 발라놓았었다. 그는 독살의 장본인으로 밝혀지자 도서관에 불을 지르고 시학 2권을 씹어 먹으며 죽음을 맞이한다. <장미의 이름>은 중세의 어두운 문화적 분위기를 현대인에게 잘 전해준다. 웃음과 핏기를 잃어버리고 신앙이란 이름아래 무겁고 창백한 그림자가 수도원 안팎을 깊게 드리우고 있다. 수도원의 타락과 수도회와 교황간의 갈등과 같은 역사적이며 정치적인 이해관계는 행간 사이에 숨겨져 있다. 그러나 움베르토 에코가 소재로 채택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다만 지금 현존하는 시학 제1권 6장에는 “서사시와 희극에 관해서는 나중에 말해보도록 하고, 지금은 비극에서 관해서 논의해보자.”라는 언급이 나온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먼저 쓰고 나중에 희극을 썼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바로 이 점에 착안 <장미의 이름>의 끝 장면처럼 시학 제2권이 사라진 연유를 중세 수도원의 엄숙한 분위기를 배경 삼아 상상력을 동원하여 해답을 내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기독교문화는 웃음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리고 있을까? 적어도 기독교 영화의 분야에서 웃음을 통해 관객에게 즐거움과 메시지를 주는 코미디 장르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지난 몇 년간 한국기독교영화의 주류로 자리 잡은 선교다큐멘터리 영화나 가뭄에 콩 나듯 등장한 드라마 장르에서 웃음은 배제되어 있었다. 신앙의 역사와 정체성 그리고 선교적 소명 등 매우 중요한 교회의 이슈를 다루었지만 웃음이 들어갈 틈은 없었다. 마치 기독교영화를 보면서 웃는 일은 불경건한 일이라고 생각한 듯 진중한 자세만이 요구될 뿐이었다. 권위의 붕괴에서 오는 웃음 이병헌 감독의 영화 <극한직업>은 코미디의 본질을 잘 살린 대중영화다. 설 연휴에는 온 가족이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부담 없는 영화를 선택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개봉시점도 매우 잘 선택했다. 거기다 맞대응할 만한 영화가 없었다는 것도 흥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바람에 <극한직업>은 불과 개봉 15일 만에 천만 관객을 훌쩍 뛰어 넘을 수 있었다. 영화는 마약범죄조직을 감시·소탕하기 위해 투입된 5명의 마약반 형사들이 작전상 치킨집을 인수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이 코미디의 주요 장면을 구성한다. 치킨장사는 단지 범인을 잡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까닭에 수사에 집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형사(진선규)가 개발한 ‘수원 왕갈비맛 통닭’이 대박을 터뜨리면서 치킨집은 맛집으로 소문나게 되고 형사라는 본업은 오간데 없이 치킨 장사에 매달리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극한직업>은 코미디의 종합선물세트다. 이병헌 감독 특유의 상대방을 비꼬는 언어감각이 살아있는 스크루볼 코미디(screwball comedy)의 형식이 주효하지만, 범인검거 현장에서 드러난 형사들의 과장되고 어설픈 행동들은 찰리 채플린이 했던 것처럼 슬랩스틱 코미디(slapstick comedy)의 연장선을 잇고 있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남녀 형사의 애정표현은 이 영화가 나름 로맨틱 코미디(romantic comedy)도 담아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기독교 관점에서 <극한직업>은 왜 기독교 영화 제작자들이 코미디영화 제작을 꺼려하는지를 깨닫게 도와주기도 한다. 대중이 좋아하는 웃음유발의 특징들을 선뜻 수용하기 어렵다고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극한직업>에서 관객의 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의 요소의 핵심에는 ‘권위의 붕괴’에서 오는 카타르시스 효과가 자리하고 있다. 영화에서 ‘권위의 붕괴’란 선하든 악하든 한 사회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가 사회적 기대와는 다르게 행동하며, 그 행동이 일반 사람들과 같거나 그 보다 못할 때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영화에서 마약반 형사들은 강력범을 잡은 경찰에 대한 이미지와 기대감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비록 위장전술이긴 하지만 형사들이 치킨집 종업원으로 변신하며 좌충우돌하는 모습은 경찰에 대한 기대가 무너질 때 웃음이 유발되는 ‘권위의 붕괴’를 보여준다. “180도 기름에 대이고 칼에 베이고 얼마나 쓰라린 줄 알아? 아파. 지금 현재도 굉장히 쓰라린 상태야.” 마형사는 마약범을 잡다 몸을 다친 것이 아니라 닭을 튀기다 얻은 상처에 대한 얘기를 한다. 그의 얼굴은 닭을 잡을 때의 표정이 아닌 범인을 잡을 때의 비장함이 묻어난다. 범인이 아닌 닭을 잡는데 온 힘을 다 쏟는 형사의 모습에서 권위는 전복되고 만다. 마약반 형사들이 치킨집 운영에 정신이 팔린 것을 보며 고반장(류승룡)은 반원들에게 크게 한마디 한다. “정신 안차릴래. 우리가 지금 닭장사하는 거야? 야 그럼 이 참에 사표 쓰고 닭집을 차리던가!” 마약반의 책임자로서 이 같은 말에는 권위가 살아있음을 관객은 느낀다. 그러나 전화벨이 울리자 그의 말은 곧 변해버린다.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이것은 갈비 인가 통닭인가, 네 수원왕갈비 통닭입니다.” 급 반전된 반장의 말과 억양에서 관객들은 권위의 붕괴가 가져오는 웃음을 만끽할 수 있다. 악당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극한직업>에 등장하는 마약조직의 보스인 이무배(신하균)나 테드창(오정세)이 잔인하고 포악한 범죄자의 모습만을 갖고 있지 않고 나긋나긋한 말투와 연예인 뺨치는 스타일로 등장한다. 심지어 헤어밴드와 노란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나온 것은 악당으로서의 권력을 행사하는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는 악당들도 코믹 연기를 하고 있다. 무엇을 위해 권위를 버릴 것인가? ‘권위의 붕괴’는 곧 잘 조롱이나 폄하 혹은 풍자로 읽혀지다. 지배자의 권위를 앞세우며 독재 권력이 지배하던 시대에 대통령이 코미디 프로그램의 소재로 등장하는 것은 금지되었었다. 민주화를 지향하던 한 대통령은 자신을 코미디의 소재로 삼아도 좋다는 언급을 공식적으로 할 만큼 한국사회는 권위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권위의 붕괴’로 얻는 것도 있다. 바로 대중적 친밀함이다. 그것은 새로운 소통방식이며 또 다른 리더십이기도 하다. 국민을 보호하는 역할로서 경찰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존재이지만 경찰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치킨집은 일상 그 자체다. 대표적인 서민음식이면서 퇴직 후 선택하는 1순위 직장이기도한 치킨집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친숙한 이웃으로 인식된다. <극한직업>에서 마약반 형사들이 치킨집에 몰두할 때 관객들은 권위의 붕괴에서 오는 웃음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영화가 그것으로만 끝났다면 결코 천만 흥행을 달성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권위는 내려놓았지만 역할은 살아있었다. 결국 형사들은 악당들을 일망타진하는데 성공한다.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역할에 충실한 주인공들을 보며 관객들은 웃음과 더불어 도덕적 만족감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교회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고 한탄하는 목소리를 심심찮게 듣게 된다. 세상이 교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교회를 우습게 여긴다는 뜻에서 한 말일 것이다. 세상의 영향력을 주는 의미에서 권위를 되찾고 싶다면 권위 자체에 몰두하기 보다는 교회의 역할을 바로 세울 일이다. 소금의 권위를 쫓기 보다는 본래의 맛을 내는 역할(마5:13)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이미 코미디의 주인공처럼 자신이 망가지는 것을 기꺼이 허용한 사람이다. 왜 일까?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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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2-20
  • [문화펼치기] ‘82년생 김지영’에게 ‘92년생 김지훈’이 말한다
    작년 2018년 말 문재인 정부에 대한 20대 남성들의 지지율이 급락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고 있다. 20대 여성들의 높은 지지도와 비교되는 20대 남성 지지율 저하는 무슨 의미일까? 20대 남성들의 가치관이랄까, 아니면 그들의 고민과 상황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고맙게도 20대 남성들을 분석한 몇 가지 키워드가 있다. 그것은 곧, ‘프레카리아트’, ‘밀레니얼 세대’, ‘90년대생’, ‘밀레니엄 대학생’이다. 이것을 분석하면 20대 남성들의 가치관과 그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1. 프레카리아트의 등장 먼저, 프레카리아트라는 말은 ‘불안정한 고용·노동 상황에 있는 노동자 집단’을 일컫는 말이다. 이탈리아어 ‘프레카리오(Precàrio, 불안정한)’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 노동자 계급)’를 합성한 것이다. 직역하면 ‘불안정한 노동 계급’이란 뜻이다. 직업이 불안정하고 저임금을 받고 사회보장제도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뜻한다. 한국의 삼포세대, 오포세대, ​칠포세대, N포세대 처럼 유럽에도 1,000유로 세대(Generazione 1000 euro)가 있다. 기본생활만이 가능한 수준인 월 1,000유로 정도를 벌기도 힘든 유럽의 20-30대를 말한다. 역시 일본에도 ‘사토리 세대(さとり世代)’가 있는데, ‘깨닫다, 득도하다’라는 뜻의 사토루(さとる)에서 나온 말로 일본의 오랜 경제 불황 속에서 성장하여 돈과 출세에 관심이 없는 일본의 20-30대를 말한다. 그리고 이들을 계급적으로 부를 때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프레카리아트는 전 세계적으로 노동 시장이 유연해지면서 등장했다. 대개 일용직 등의 비정규직이나 파견직과 같은 간접노동 형태로 불안정한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별다른 직업 경력이 없고 안정적인 고용 전망이 없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대다수의 프레카리아트는 불안정한 고용·노동 상황으로 인해 저임금에 시달리며, 사회보험 가입 등에서도 법적·실질적으로 배제된다. 무엇보다 이들의 불안정성이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며 일종의 계급으로 굳어지고 있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인싸(주류세력)들의 금수저-금수저의 계급 세습이 이들에게는 흙수저-흙수저의 불안정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 20대 남성 지지율 저하의 의미? 2. ‘밀레니얼 세대’의 등장과 ‘90년대생’이 온다 ‘밀레니얼 세대(Millennial Generation)’는 1980년대 초에서 2000년대 초 사이에 출생하여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사회생활을 시작한 세대로, 모바일 기기를 이용한 소통에 익숙한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시대의 아픔 속에서 문화적으로 ‘모자람이 주는 충족감’, ‘불완전함이 갖는 미학’에 매력을 느끼며 ‘낡고 보잘것없는 것’에서 정신적 충족감을 얻는다. 밀레니얼 세대를 좀 더 세분하여 90년대생들에 주목하여 보자. 임홍택은 『90년생이 온다』 (웨일북, 2018)에서 이렇게 말한다. “90년대생들의 의식은 기본적인 자아실현의 충족을 위해 힘쓰는 ‘유희 정신’에 기울어져 있다. 이념적 세계보다 연극적 세계가 더 중요하다. 물론 이들도 앞선 세대들과 마찬가지로 적자생존의 경쟁이 치열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전 세대들과 다른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점, 유희를 추구하며 살아간다는 점은 이들의 세계를 다르게 만든다. 이들은 스스로를 어떤 세대보다 자율적이고 주체적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갈 것이다.” 이 책은 1982년생인 저자가 1990년대에 출생한 신입 사원들과 소비자들을 접하며 받았던 충격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책이다. 90년대생들을 관찰하며 그들의 특징을 ‘간단, 재미, 정직’으로 정리해 준다. 그리고 90년생들이 생각하는 회사생활의 한 일면을 이렇게 들려준다. “회사에 헌신하면 헌신짝이 된다”, “충성의 대상이 꼭 회사여야 하나요?” 회사의 발전보다는 자신 개인의 발전 가능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상사 눈치 안 보고 정시 출근과 퇴근을 하며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싫으면 관두는 것이 바로 이들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임홍택의 말을 들어 보자. “과거 70년대생과 그 이전 세대에게 충성심이라는 것은 단연 회사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90년대생에게 충성심은 단연 자기 자신과 본인의 미래에 대한 것이다. 충성의 대상이 다르고 그 의미도 다르니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때문에 90년대생들을 위한 조직 문화 개선 방안은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충성도에 회사가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느냐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 90년대생은 어려서부터 이미 인터넷에 능숙해지고 20대부터 모바일 라이프를 즐겨온 ‘앱 네이티브’이다. 모바일 환경에 익숙한 이들 90년대생들은 웹툰이나 온라인 게임,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생겨나는 신조어나 유머 소재들을 빠르게 확산시키고 있다. 따라서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경계가 이들에게는 허물어졌다. 증강현실(AR)게임을 소재로 한 tvN 주말 드라마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은 드라마로 진출한 90년대생들의 세계관이다. 또한 종이보다 모바일 화면이 더 익숙한 90년대생은 온라인 게시물이 조금만 길어도 읽기를 거부하고, 그나마도 충분히 궁금증이 일지 않으면 제목과 댓글만으로 내용을 파악하고 넘겨버린다. 따라서 이들은 기승전결의 완결성을 가진 서사보다 맥락이 없고, 표현도 거칠고 어설픈 B급 감성에 열광한다. ‘참견(參見)’보다 ‘참여(參與)’에 긍정적인 세대인 것이다. 임홍택의 말이다. “새로운 세대는 참여라는 말에는 긍정적이지만 참견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참견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와 별로 관계없는 일이나 말 따위에 끼어들어 쓸데없이 아는 체하거나 이래라저래라 함’이고, 참여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에 끼어들어 관계함’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그들은 자기와 어느 정도 관계있는 일이나 말 등에 직접 나서고자 한다.”많은 90년대생들은 일과 삶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고, 일터에서도 즐거움을 잃지 않으려고 하며, 참여를 통해 인정 욕구를 충족하려고 한다. 그들은 회사가 평생 고용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헌신의 대상을 회사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자신의 미래로 삼는다. 안정을 추구하는 공무원을 선호하는 한편, 창업의 길을 꿈꾸기도 하며 언제든 이직과 퇴사를 생각하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그들은 사회적·경제적 환경에 적응하며 생존을 위해 각자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성세대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하기 마련이고, 자신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의 선택에 훈수를 두거나 참견을 하곤 한다. 그러나 임홍택은 기성세대의 ‘과거의 경험’이 더 이상 90년대생을 ‘판단할 근거’가 되지 못하는 세대라고 따끔하게 충고한다. 그래서 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상사의 모습이 ‘꼰대’인 것이다. 여기서 꼰대는 ‘전형적인 한국사회의 기성세대들’을 말한다. 기성세대들인 꼰대들은 무조건 가르치려 들고, 젊은 사람들을 야망 없고 패기 없고 조직에 안 맞는 나약한 인간으로 평가절하하면서 자기 말만 늘어놓는다. “한 때는 내가~!” “옛날에 우리 시절에는 말이야~!” 꼰대들은 양면적이다. 90년대생이 보기에 꼰대들은 이렇다. 알아서 하라고 해놓고 보고를 안 하면 야단을 치고, 원하는 것이 뭐냐고 물어보고 말하면 그건 들어줄 수가 없다고 하니 종잡을 수 없다. 꼰대들의 모임인 대한민국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능력 최우선’이라 말해놓고는 뒤로 가서는 은근히 ‘서열’과 ‘계약조건’을 따진다. 3. 밀레니엄 대학생 걱정이다. 이제 서기 2000년에 태어난 이들이 올 3월 2019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따라서 대학은 올해부터 21세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들을 성공회대 사회학과 조효제 교수는 ‘밀레니엄 대학생’이라고 부른다. 조효제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우선 밀레니엄 청소년들은 상충되는 두 흐름의 한복판에서 사회화를 거쳤다. 하나는 ‘이명박, 박근혜 시대’의 특징이었던 ‘경쟁’과 ‘실적주의’에 근거한 가치관의 내면화다. 모든 측면에서 ‘실력’과 ‘성적’ 순서로 보상이 주어지느냐를 면도칼처럼 따지는 것이 정당성의 기준이 되었다. 사회 전체에서 공정함이 제대로 발현될 수 있는 맥락이 소거된 채, 미시적이고 형식적인 공정성이 거의 이데올로기 수준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놀랍다. 우리 기성세대는 잊고 있었지만, 밀레니엄 시대는 ‘이명박근혜 시대의 세례’를 받았다는 말이다. 그것은 곧, ‘경쟁’과 ‘실적위주(성적)’의 가치관이라는 것이다. 전체의 공정함보다 작은(자신에게 해당되는) 공정성에 물들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들의 특성은 또 있다. 조효제 교수의 말이다. “또 하나는 이들이 세월호와 탄핵을 거치면서 사회와 정치의 토대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하고 체험했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들은 형성기의 청소년들에게 집단적·감정적 트라우마와 권위에 대한 냉소, 정치적 분노와 열광을 동시에 경험하게 하였다.” 세월호를 통해 정치가 소용없다는 것을, 동시에 탄핵을 통해 소용없는 정치가 무너지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았던 세대가 바로 밀레니엄 세대라는 것이다. 사실 이 두 흐름은 인권의 측면에서는 모순적 형태로 나타난다. 가령 불공정에 극도로 민감한 태도로 인해 ‘정유라 입시부정’으로 촉발된 사건을 촛불혁명으로까지 상승시킨 세대가 곧, 우리 사회 시스템을 공짜로 악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난민 신청자들을 거부하는 세대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미투 열풍’을 더해 성평등의 흐름으로 20대 여성보다 20대 남성들이 더 공정성에 민감해진 것이다. 한림대의 조형근 교수는 이렇게 분석한다. “평범한 20대 남성들도 재벌과 대형 교회의 세습에 분노한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가 있는 세상에 분노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누구보다 더 특권과 반칙에 반대한다. 이들의 보수화를 특권계급이나 노년 세대의 보수성과 동일시할 수 없는 대목이다. 이들이 양성평등 정책, 군 복무 가산점 폐지,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 진보적 정책에 분노하는 이유는 ‘개인들 간의 공정한 경쟁’의 기회를 빼앗는 반칙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학종’(학생부종합전형)에 분노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대학 서열화보다는 정확하지 않은 대학 서열에 분노하는 세대다. 부모의 경제력이 인생을 좌우하는 데 반대하는 만큼이나 성별이 인생을 좌우하는 변수가 되는 데 분노한다. 남자라고 우대받는 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는데, 남자라서 역차별 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오직 점수로만!’이 이들의 슬로건이다. 경쟁은 계급, 성별, 인종 따위의 비개인적 요소와 무관하게 공정해야 하고, 그 결과와 책임 또한 개인에게 귀속되어야 한다는 믿음은 자유주의 정의론의 전형적 사고방식이다.” 20대의 말을 들어보자. 바른미래당 청년대변인인 김현동 대변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20대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정체성과 생각을 공유하는 세대이다. 과거 대한민국에는 그 세대들이 공유하는 시대정신이 또렷이 있었다. ‘나의 가난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라는 새마을 정신,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던 민주화 정신, ‘나를 희생해서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자’는 생각을 기반으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체제 극복을 이루어낸 금모으기 운동 정신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저출산 위기, 다가온 통일 등 여러 가지 시대적 과제가 산적한 오늘날, 20대들은 뚜렷한 시대정신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유교 사회주의’라는 표현으로도 설명이 가능할 정도의, 국가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것이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었던 과거의 집단주의는 이제 해체 수순에 돌입하고 있다.” 따라서 평창올림픽 남북 단일팀 논란에서 20대의 대부분은 설사 이 팀이 남북 평화와 화해의 단초가 되는 길이라 할지라도, 열심히 노력한 선수를 엔트리에서 제외하는 것에 분노했던 것이다. 사실 남북 단일팀에서 60대 이상 강경보수의 분노는 ‘북’이라는 글자에 기인한 것이라면, 20대의 분노는 ‘단일팀’이라는 불공정에 의한 것이었다. 계속해서 김현동 대변인의 말을 들어보자. “오늘날 ‘성평등이 필요하다’라는 명제에 대해, 남녀는 서로 다른 시각을 바탕으로 보고 있다. … 20대 남성에게 성폭행 사건의 가해자는 내가 비난할 대상일 뿐, 책임과 잘못을 분담해야 할 동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에서, 20대 남성에게 지난 남성중심주의 사회의 책임을 분담하라는 요구는 불공정함 그 자체로 받아들여진다. 쉽게 말해 ‘82년생 김지영’이 살던 세상의 부조리는 ‘92년생 김지훈’이 감당해야 할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핵심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공정함의 확립이다.” 그러나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공정함이 가능할까? 미시적 공정함은 거시적 측면에서는 불공정으로 드러나지는 않을까? 따라서 조효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형식적 공정에 대한 집착을 실질적 공정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하고, 개별 원자적인 반차별 감수성을 인도적 성격의 반차별 의식으로 이끌어야 할 과제를 우리는 지고 있다.” 어쩌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20대, 혹은 90년대생, 밀레니엄 세대들은 ‘전지구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다. 아니, 아예 체념 하는듯한 태도를 보인다. 가령, 기후변화에 대해 숙명론적인 인식이 많고, 신자유주의에 의한 구조적 불평등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그리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 추상적인 문제 역시 귀찮아한다. 더욱이 ‘연대’와 ‘공동체’라는 의식은 저 멀리 사라진지 옛날이다. 너무 거대한 문제이기에 그 문제에 압도당하거나, 아니면 아예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다. 4. 희망의 인권과 새로운 혁명 그렇다고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간은 젊은 세대들에게 기회를 가져다준다. 임홍택의 말이다. “현재 우리나라도 일자리가 부족한 상태로, 이는 수요자인 기업에 유리한 시기다. 하지만 90년대생들이 구직 활동을 진행하는 이 시간을 지나, 2000년대 출생자들이 본격적으로 입사를 하게 되는 시점에는 일본과 같이 상황이 역전될 수 있다. 일자리보다 취업자가 적어지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의 90년대 출생자는 687만 명, 2000년대 출생자는 496만 명이다. 우리나라의 기업들도 구직자들의 눈치를 봐야 할 시기가 올 수 있다.” 따라서 조효제 교수는 밀레니엄 대학생들에게 ‘희망의 인권’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들어보자. “앞으로 십년, 이십년 뒤엔 한반도 상황이 지금보다 훨씬 진전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때엔 이 땅의 모든 사람들―남북한 선주민과 이주자―을 아우르는 포괄적 인권이 우리 공동체의 본질적인 화두로 떠오를 것이다. 그 일을 해낼 주인공들, 능동적 희망의 인권을 실천할 밀레니엄 신입생들을 하루빨리 만나고 싶다.” 지금 프랑스는 노란 조끼를 입은 프레카리아트들이 최저임금과 연금 인상과 함께 외주화 금지, 비정규직 양산의 중지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하고 있다. 1848년 6월 파리에 정치세력으로 무산계급(프롤레타리아트)이 탄생했다면 이제 2019년 프랑스의 노란조끼들의 반란은 정치세력으로서의 프레카리아트를 낳았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새로운 세상은 ‘촛불 혁명’ 다음에 전체(까지는 힘들다면, 적어도 약자들)의 공정함을 위해 연대하며 공동체의 선을 위해 노력하는 ‘밀레니얼 세대들의 혁명’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담임)
    • 문화
    2019-02-20
  • 평범한 오늘이 영원을 향한 비범한 하루
    1세기 평범한 일상으로 본 그리스도인의 하루 로버트 뱅크스의 1편 《1세기 교회 예배이야기》에 이은 후속작으로 작년 8월 다른 나라에 앞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출간되어 관심을 끌었습니다. 1편에 이어 2편도 본문 60쪽 안팎의 정말 얇은 책으로 소설과 삽화로 1세기 로마의 일상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담아 생동감이 느껴진다. 분량이 적다고 얕봤다는 큰 코 다친다. 다루는 주제가 다양하며 주제도 만만치 않아 심도 있는 논의와 논쟁이 필요하다. 그래서 소그룹 모임의 교재로도 유용해 보인다. 이 책을 간증으로 읽었다는 역자는 저서의 “나의 새로운 신앙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할 최선의 방법은 가족과 일과사회생활이 뒤섞인 아주 전형적인 하루를 묘사하는 것“이라는 말에 필이 꽂혔단다. 그 일상이란 가족, 신분, 자녀, 학교, 옷, 목욕, 헤어스타일, 장식, 부적, 동성관계, 부부관계, 음담패설, 젠더, 직업, 신용, 가난과 부, 재난, 정치, 벤처, 금융업, 비즈니스협력, 직원 징계, QT, 구별과 어울림, 우상, 박해, 변화, 구제, 예배 등이다. 뱅크스가 안내하는 타임머신을 타고 따라가다 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일상도 있지만 낯선 1C 로마의 역사와 풍경, 그리고 문화를 만난다. 물론 문화탐방 하는 가벼운 기분만으론 안 된다. 그 시대적 배경이 폭군 네로가 기독교인 박해의 명분으로 써먹은 로마대화재를 전후한 살벌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을 덮을 즈음 매일의 일상에서 생각 없이 소비하는 하루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나는 과연 그리스도인으로 하루를 살고 있는가?’ ◈ 《1세기 그리스도인의 하루 이야기》 || 저자 로버트 뱅크스(Robert Banks)는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신약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신학자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저술과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1세기 교회예배 이야기》 《바울의 공동체 사상》 《일상생활 속의 그리스도》 등이 있다. IVP, 2018. 6,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1세기 교회예배 이야기》 / 로버트 뱅크스 / IVP《십자가와 부활을 사는 일상 영웅》 / 팀 체스터 / CUP 《일상, 하나님의 신비》 / 마이클 프로스트 / IVP《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불렸던 사람들》 / 래리 허타도 / 이와우《로마와 그리스도교》 / 김덕수 / 홍성사 기독교 교양 읽기 Ⅱ 〈1〉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현호 기쁨의집 대표, 김형기 팔복교회 목사 2015년 3월부터 총 45회 연재된 기독교교양읽기가 Ⅱ로 새롭게 출발합니다. 그동안 수고하셨던 김수성 교수께서 개인사정으로 하차하시고, 경주 팔복교회 김형기 목사가 함께 합니다. 목사님은 서울대에서 교육학을, 장로교신학대학원과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전공하셨으며 1970년 후반 부산에서 양서협동조합을 설립하여, 좋은 책읽기운동을 주도한 바 있습니다. 로마와 기독교 문화의 차이를 보여주는 책김길구 이 책은 본 코너 30회에 게재된 《1세기 교회예배 이야기》의 후속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출간된 따끈따끈한 책으로 1편이 초대교회로의 회귀는 가능한가를 물었다면 이 책은 초대교인들의 하루 일상으로 우리를 초대하여 지금은 어떤지를 묻고 있습니다. 김형기 한 두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작은 책입니다만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은 책입니다. 신약학자인 저자가 1세기 타임머신을 타고 신앙과 생활을 하나로 접목하는 life story를 소설형식을 빌어서 재현한 창의적인 시도가 돋보이는데 이를 통하여 성서에 기록된 말씀들이 생활과 동떨어진 말씀이 아닌 지금 이 시대의 말씀으로 되살아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김현호 소설의 배경인 네로의 기독교인 박해의 빌미가 된 로마대화재가 AD 64년에 일어났으니 이교도였던 주인공 푸블리우스가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시기로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네요.김길구 교세로 보면 12제자로 시작된 예수추종자들은 AD 40년경이 되면 1천 명이 되고 100년쯤 되면 1만 명 200년경에는 20만 명 300년에는 500~600만 명으로 증가합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궁극적으로 ‘세상을 뒤엎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매일의 삶 속에서 구별된 삶의 방식을 개발했기 때문이었다”. 고 합니다. 그럼 일상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김형기 우리가 직면한 개개인의 기호부터 가정생활과 자녀교육, 직장생활, 그리고 사소한 일거수일투족까지 기독교적 세계관과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그 믿음에 걸 맞는 행동으로 실천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김현호 갓 믿은 주인공은 그의 가정부터 변화시킵니다. 당시 수직적 문화의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아내와 자녀의 관계도 상호존중의 방식으로 바꾸고, 자녀들의 교육적 차별을 없애고 세상풍조를 따르지 않고 가정을 중심으로 신앙을 계승합니다. 특히 노예를 재산으로 여기며 육체적 언어적 폭력과 성적학대의 갑질문화에서 노예를 공정하고 정당하게 대해 함께 식사하고 별도의 숙소를 제공하는 등 의 파격적인 대우와 ‘여러해 전에 해방시킨 몇몇 노예를 확대가족’으로 묘사한 부분은 초대그리스도인들의 노예에 대한 전향적인 사고를 볼 수 있습니다.김형기 이 책은 철저한 고증을 통하여 당시의 사회상을 마치 드라마를 보듯 글과 삽화로 재현해 놓았는데‥당시의 의복, 목욕, 음식, 헤어스타일, 장식, 부적, 부부관계, 음담패설, 금융업 등의 깨알상식과 네로치세의 정치상황, 그리고 기독교인의 대처방법 등이 흥미롭네요. 특히 다신교 문화에서 가정 신단의 폐지와 로마인들의 남자 중심의 문란했던 성의식과 만연했던 동성애를 멀리한 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김현호 흥미로운 것은 만연했던 동성애의 원인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특이한 성향의 성적 친밀감에서 찾지 않고 여성차별적 시각에서 접근했네요. “여기에 난제가 하나 있다. 우리문화에서는 남자가 이성보다도 동성과 더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여긴다. (중략) 아내는 남자와 같은 지적 혹은 정서적 능력이 없으므로 완전한 우정이나 사랑을 발전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긴다.”는 대목입니다. 이런 불평등한 남녀관계를 수평적인 관계로 인식하고 권장한 초대교회는 분명 시대를 앞서 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바울은 로마에 있는 우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미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강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그것을 먹음으로써 믿음이 약화될 수도 있는 사람들을 배려해야 한다고 단호히 말한다. <1세기 그리스도인의 하루> 본문 50~51p 중 만찬회장의 모습 ‘세상을 뒤엎은 힘’은 믿음 안에서 구별된 삶김길구 ‘실천적 무신론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입으로는 그리스도인인데 행동은 그렇지 못한 교인을 일컫는 말이지요. 이 50쪽 분량의 얇은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그렇지 않은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 책의 장점 같습니다.김형기 ‘나의 새로운 신앙이 내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할 최선은 방법은 가족과 일과 사회생활이 뒤섞인 아주 전형적인 하루를 묘사하는 것이다’란 말이 가슴에 와 닿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실천적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리트머스시험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김현호 초대받은 만찬장에서 이루어지는 신격화된 황제에 대한 헌주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기독교인이나 유대인들에겐 지지도 부인도 할 수 없는 불편한 자리였을텐데 책속에서도 그 상황을 애매하게 묘사했더군요?김길구 동시대의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라고 했지만 성서 전체의 맥락으로 보면 불의한 권력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만을 말하지 않아요. 당시의 초대교회는 세계최강의 제국 로마의 지배아래 흩어져 있는 소규모의 가정공동체 집단에 불과했고, 이들이 직면한 과제는 적대적인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바꿀 수 없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 아닐까요?김형기 불의한 권력의 상징인 네로치세의 로마대화재와 기독교인들의 박해로 얘기를 옮겨 보지요. 우리가 흔히 얘기하듯 네로가 로마재개발을 위하여 일부로 방화를 하진 않았지만, 열흘간 계속된 화재로 제국의 수도인 인구 100만의 도시 중 절반이 연기로 사라졌습니다. 대참사로 흉흉해진 민심을 돌리기 위한 네로 황제의 선택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화재의 주범으로 조작하여 많은 기독교인들희생되었습니다.김현호 유세비어스의 《교회사》에는 네로의 ‘비이성적인 광기’로 수천 명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사도바울과 베드로가 순교했지요.김길구 반론도 있어요. 교회사가 출간 된 해가 312년으로 화재가 일어난 64년과 시차가 너무 커 다소 과장되었다는 설입니다. 당시의 로마지역의 기독교공동체는 3,000여명에 불과 했으며 교인들 중 10%선인 200~300명 정도의 신자들이 순교했다는 주장입니다.김현호 역사의 아이러니 중에 하나지만 이 박해 후에는 목표를 달성해서 그런지 네로의 박해도 시들해지고, 기독교인들의 누명도 벗겨지자 로마시민들 중에는 동정심도 생겨나면서 그리스도교가 더욱 왕성해 집니다. 순교의 피가 헛되지 않고 열매를 맺은 것이지요. 구제활동도 ‘예배’의 일환으로김길구 다시 돌아가서 참혹한 화재 현장에서 초대교인들이 박해 직전까지 구호활동을 펼치는 장면이 나옵니다.김현호 이 구제활동을 결의하기 위한 회의에서 구제사역을 ‘예배’의 일환으로 여기는 결의를 한 것입니다. 시편의 노래를 부르며 옷을 수집하여 나누어 주고, 음식을 주변 동네에 가서 나누어 주고… 김형기 선한사마리아인의 예처럼 이웃사랑 실천이라는 관점에서 봉사는 당연하게 받아드려졌을 것이고.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했겠지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에 의하면 로마인들은 인근에 있는 국가들, 지성(知性)은 그리스인보다, 체력은 게르만족보다, 기술력은 에트루리아인보다, 경제력은 카르타고인보다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나면 상류층들이 먼저 나서는 희생정신, 그리고 기부정신과 활발한 사회공헌활동으로 평민들의 신뢰를 얻는 노블리스 오블리제 사회적 분위기가 최강의 나라를 만들었다고 했으니까요. - 끝으로 이 책의 부족한 면과 느낀 점 한마디씩 김형기 양도 적고 읽기도 편해 좋았습니다. 한정된 지면의 부족 때문이겠지만 그리스도인끼리의 토론과 대화의 부족, 개종에 따른 내면적 갈등과 심층묘사가 미흡했지 않았나 싶어요. 신앙과 생활을 접목시켜 우리자신을 돌아보게 하다는 면과 신선한 구상으로 신학적, 신앙적 주요 이슈들을 요약해서 잘 다뤄 그룹 활동교재로 활용하면 좋겠습니다.김현호 다 읽고 나니 크리스천의 하루는 하나님나라를 지어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상에서 복음의 가치를 어떻게 담을 건가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성찰의 시간이었습니다. 김길구 장시간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믿고 보는 톰 켈러의 《내가 만든 하나님》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정리: 김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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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인문학
    2019-01-22
  • [영화] 죄와 어리석음으로 가득 찬 세상의 발견
    무책임함 부모를 고소한 12살 아들 레바논 빈민가에서 생활하는 자인(자인 알 라피아)은 자신의 출생일도 모른 채 일곱 식구와 살고 있다. 부모님이 멀쩡히 살아있지만 여동생 사하르(세드라 이잠)와 함께 길거리에서 주스도 팔고 상점에서 배달 일을 도우며 집안생계를 돕고 있다. 자인의 부모는 어린 아들이 약국을 돌며 사온 약품에서 항정신성 약물을 물에 녹이고는 옷가지에 묻혀 교도소 재소자들에게 몰래 넘기는 일을 할 뿐 정상적인 가족생계는 자인이 모두 떠맡고 있다. 심지어 생리를 시작한 여동생 사하르를 돌보는 일 조차 한 살 터울 오빠인 자인의 몫이다. 이쯤 되면 관객들은 이 집안이 단순히 가난한 정도가 아니라 자식을 돌보는 일에는 무책임한 부모에 대한 이해를 자연스레 갖게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주인공 자인은 부모가 여동생을 상인에게 돈을 받고 시집보낸 것에 대해 분노하고 집을 나와 거리를 떠돌기 시작한다. 일찍이 찰스 디킨스는 19세기 초 런던 슬럼가를 배경으로 한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를 통해 소매치기 범죄 집단에 끌려가는 바람에 고초를 겪어야 했던 고아 소년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일이 있었다. 그 이후 빈곤의 상황에 처한 어린 아이와 그를 둘러싼 사악한 어른들의 풍경은 영화에서 심심치 않게 다루는 소재가 되었다. 이러한 영화들은 대개 주인공 어린이가 처한 심각한 일탈과 위기의 상황을 부각시키는 한편으로 어린이를 이용해 먹은 악당에 대한 죄과를 드러내어 관객으로 하여금 정의의 편에서 심판하도록 마음을 부추기는 한편 어린이를 위기에서 구해내는 의인을 등장시킴으로써 어린이의 미래에 대한 소망을 보여주는 행복한 결말로 끝을 맺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영화 <가버나움>은 다르다. 자식을 낳을 줄만 알았지 키울 줄 모르는 무책임한 부모와 어떤 돌봄도 없이 거리에서 자란 어린이의 삶 속에서 우리는 되풀이 되는 죄와 어리석음을 발견하게 되는 까닭이다. 관객의 마음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대중영화에서 자식을 거리로 내몰며 앵벌이에 가까운 노동과 범죄행위를 부추기는 경우 그 부모는 대개 진짜 부모가 아닌 경우가 많았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보는 까닭이다. 적어도 영화 속에서 친부모라면 돈 때문에 자기 자식을 팔아넘기고 거리의 부랑아로 살도록 만들기는 보다는 빈곤의 현실을 안타가워하며 어떻게든 자식을 정상적으로 교육시키려는 열망을 드러내는 일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가버나움>의 부모는 자식에 대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으며 방관을 넘어서 생계를 유지하는데 이용하는 무책임한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아동학대에 해당하는 부모의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서 자인은 부모를 법정에 고소한다. 왜 부모를 고소하는지 묻는 판사를 향해 자인은 지금까지 어떤 영화에서도 들어본 일이 없는 말을 남긴다. “태어나게 했으니까요. 이 끔찍한 세상에 태어나게 한 그들이니까요.” 이 영화의 제목이 ‘가버나움’인 이유가 납득되는 순간이다. 책망 받은 도시 가버나움 영화 <가버나움>은 기독교영화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성경의 내용이나 가치관을 명확히 드러내기 보다는 오히려 성경이 비판하는 인간과 세상의 모습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알아야 한다. 특히 예수님의 공생애 주요 사역지였던 갈릴리 인근의 ‘가버나움’이란 도시에 대한 예수님의 언행을 알고 보았을 때 비로소 영화를 통해서 감독이 의도하는 바를 읽어낼 수 있다. 사복음서에 등장하는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마태 등 다섯 제자를 부르셨고(마4:13,18-22 9:9), 백부장의 종과 베드로의 장모, 그리고 네 사람이 메고 온 반신불수 병자 등에게 여러 이적을 행하셨다(마8:5,14, 9:1, 요6:55-59). 마태복음은 ‘본 동네’(his own town, 마9:1)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가버나움이 그 누구의 장소도 아닌 ‘예수님의 동네’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되고 가장 많은 이적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이 목격된 도시인만큼 ‘예수님의 동네’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뜻밖에도 가버나움은 예수님으로부터 저주스런 질책을 받은 도시였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마11:20-24) 영화 <가버나움>은 가장 기적을 많이 목격한 도시가 책망의 대상으로 변한 상황을 현대적인 은유로 묘사하고 있다. 영화가 제시하는 기적은 생명성이다. 집을 나간 자인은 거리를 떠돌다 이디오피아 출신의 불법 체류 여성 라힐(요다노스 쉬페로우)의 돌봄을 받지만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자인은 라힐이 사라진 집에서 라힐의 젖먹이를 돌봐야 하는 신세가 되버리고 만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관객이 가장 재미있게 느낄만한 장면이 바로 이 부분이다. 12살 집을 나간 어린이가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젖먹이 요나를 돌보는 모습은 기적에 가깝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존엄과 가치가 인간성 안에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생명으로 충만할 기적의 아이는 더 이상 어른들의 이기심과 무책임한 사회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그들의 행동을 모방하고 만다. 자인은 자신의 부모가 여동생을 결혼이란 명목으로 팔아넘겼듯이 아이의 아빠라고 추정되는 남자에게 젖먹이를 돈 받고 넘겨버리고 만다. 이 저주스런 행동의 결말은 법정에 서는 일이다. 자인은 시집간 여동생이 임신 끝에 죽은 사실을 알고 남편이 되는 남자를 칼로 찌르는 바람에 교도소에 가게 되고, 아동학대가 위법이란 사실을 알고 난 후에는 부모를 고소하는데 이른다. 나딘 라바키 감독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 레바논의 현실이 성경의 ‘가버나움’과 다를 바 없음을 그렇게 묘사했다. ‘가버나움’을 보고 무엇을 할 것인가? 어린 아이가 처한 빈곤과 불의의 현실을 담은 영화를 만든 감독 가운데는 유난히 여성 감독이 많다. <가버나움>의 나딘 라바키 뿐만 아니라 우간다의 빈곤한 현실 속에서 체스우승을 꿈꾸는 어린이를 묘사한 <체스의 여왕>(2016, Queen of Katwe)의 미라 네어(Mira Nair) 감독 또한 여성 감독이다. 이 두 여성 감독은 여성 특유의 모성애를 발휘하여 사회의 약자인 어린이에게 가해지는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는 사회성 높은 영화를 만드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상업영화의 세계에서 매우 선정성 높은 묘사가 이루어질 수 있는 장면들이 순화되어 있는 것은 여성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결과로 볼 수도 있다. 영화 <가버나움>을 본 기독교인은 두 가지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첫째는 회개에 대한 촉구다. 성경의 가버나움이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이유는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이적을 보고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결국 저주의 말을 들어야 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하신 첫 번째 말씀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였다. 회개하라는 말씀이 가버나움의 대중들에게 납득되고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예수님은 가르치시고 수많은 이적을 보여주셨던 것이다. 둘째는 가버나움을 향한 구원사역에 대한 의지를 갖도록 촉구 받는 일이다. 영화에서 우리가 본 장면들은 모두 사실이다. 아니 현실은 이 보다 더 참혹할 수 있다. 마음이 불편할 수 있는 장면들이 대거 들어있는 이러한 영화들이 기독교인 관객에게 갖는 의미는 오직 한 가지다. 가서 그 영혼을 구하는 일이다. 영화의 끝 부분에는 교도소를 방문한 가톨릭 수녀들이 보여주는 위로의 찬양이 있고, 이슬람 사람들이 기도하는 장면이 있다. 감독은 자인에게 종교가 위로가 되지 못한 현실을 말하고 싶은 듯하다. 형식적인 종교행위는 어느 곳에서도 삶의 위로가 되지 못한다.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말씀과 행동이 필요할 뿐이다. 이제 영화를 본 우리에게 남은 생각거리는 한기지 뿐이다. 현대사회에서 가버나움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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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07
  • 2019년, 모두에게 돼지꿈을!
    1. 기해년, 모두가 돼지꿈을 꿀 수 있을까? 올해 2019년은 기해년(己亥年)이다. 己(기)가 황금색을 의미하기에 황금돼지띠의 해라고도 한다. 돼지는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복(福)과 다산(多産)의 상징이었다. 인간 곁에서 살며 고기와 기름 등 귀중한 식량도 제공했다. 황금 역시 재물의 대명사여서, 기해년 2019년은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걸게 만드는 한 해가 될 것이다. 물론 과학적인 근거도 없고, 신앙적으로도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김난도 교수가 『트렌드코리아 2019』 (미래의창, 2018) 서문에서 밝히듯이, “한 집단이 공유하는 ‘마음의 버릇’은 소비에 큰 역할을 한다.” 서로서로 좋은 해라고 덕담을 나누고, 결혼을 서둘러 하고, 돼지해에 아이를 낳고, 이사를 하고 사업을 일으키면 결과적으로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물론 기업들도 황금돼지에 컨셉을 맞춘 마케팅을 활용할 것이다. 서울대 소비트렌드 분석 센터 김난도 교수팀은 2019년의 트렌드로 ‘PIGGY DREAM’을 선정했다. 또한 2019년의 흐름을 “원자화, 세분화하는 소비자들이 시대적 환경 변화에 적응하며 정체성과 자기 컨셉을 찾아가는 여정(9쪽)”으로 읽어내고 있다. 사실 우리 사회는 극도로 개인화된 SNS를 기반으로 소통하고 1인가구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시간이 갈수록 원자화하고 있다. 그 결과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소비자들이 이제는 자기만의 기준으로 소비하고 스스로를 지켜내려는 소비자가 되어 간다. 개성을 키우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부작용도 있다. 어릴 때부터 디지털 미디어에 의존해 소통해온 젊은 소비자들은 감정을 타인과 나누기 어려워하고 결국 감정대리인을 통해 자기 느낌을 표현한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관계의 종착지인 가족관계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가족 제도에서 당연하게 인식되고 있던 자기 역할을 부정하고 개체로서의 정체성을 재모색하는 새로운 가족 관계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시장 환경도 급변하고 있다. 취업은 어렵고 자영업은 고전하는 가운데 수많은 1인 사업자들이 SNS와 플랫폼을 기반으로 자신의 재능과 상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환경문제 역시 심각해져 가고 있다. 이제는 친환경이 아니라, ‘必(필)환경’ 시대에 진입한 것이다. 동시에 정보기술(IT)의 발전은 이제 인공지능(AI)을 넘어 ‘데이터지능(Data Intelligence)’을 요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충분한 데이터 없는 인공지능은 소프트웨어 없는 컴퓨터와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시적, 거시적 변화 속에서 우리 모두는 어떻게 스스로를 지키며, 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신앙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김난도 교수팀은 모든 것을 정체성의 문제로 본다.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가 변혁의 시대에 가장 필요한 ‘마음의 방패(11쪽)’라고 한다. 곧, 개념(컨셉)의 연출로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업도 마찬가지지만, 교회도 살아남기 위해 마케팅을 넘어 컨셉팅이 필요한 것이다. 기해년 돼지의 해에 모두가 돼지꿈을 꿀 수 있을까? 2. 돼지꿈(PIGGY DREAM) 김난도 교수팀은 2019년 소비트렌트를 ‘돼지꿈(PIGGY DREAM)’의 첫글자로 10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교회와 목회자 관련으로), 1) Play the Concept(컨셉을 연출하라) 지금 시대는 가성비나 품질보다 컨셉(concept, 광고가 내세우는 주장이나 의견을 말하며, 구매의욕을 불러일으킬만한 광고의 새로운 주장을 뜻한다)이 화두가 된 시대이다. 교회의 가성비나 목회자의 품질(인격)보다 소개된 이미지가 중요한 시대라는 말이다. 따라서 자신만의 개성 있는 컨셉을 연출하는 ‘컨셉러(concepter)’가 되어야 한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직관적인 미학’, ‘순간적인 느낌’, ‘가볍고 헐거운’ 컨셉에 빠르게 반응하기 때문에 목회자의 설교도 구구절절 설명하는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보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콘텐츠에 열광하는 소비자들의 기호에 맞춰,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컨셉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승전결로 이어지는 스토리 중심의 서사보다 순간적인 자극과 호기심 유발에 더 익숙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시 부흥회의 시대가 돌아올 것임을 보여준다. 너무도 기계적이고 이성적인 시대에 좋은 찬양을 통한 감성적 접근과 순간적인 성령의 역사가 필요한 시대라는 것이다. 2019년의 첫 번째 트렌드 키워드가 그냥 ‘컨셉’이 아니라 ‘컨셉의 연출’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재미있거나 희귀하거나 공감할 수 있는, ‘갬성(자기 연출에 푹 빠진 소비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단어로 ‘감성’이라는 단어를 굴려서 말하는 것)’터지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컨셉이 될 수 있다. 이미지에 열광하고 변화무쌍함을 원하는 소비자들은 기능이 아니라, 컨셉을 소비한다. 구구절절한 설명보다 컨셉이 우선인, ‘기승전­컨셉’의 시대이다. 마케팅은 컨셉팅으로 진화한다. 설교는 기승전-컨셉으로 승부해야 한다. 2) Invite to the ‘Cell Market’(세포마켓) 유통이 세포 단위로 분화하고 있다. 수많은 1인 사업자들이 SNS를 기반으로 자신의 재능을 바탕으로 한 정보와 상품을 팔고, 1인 크리에이터들은 자기만의 콘텐츠를 모바일 라이브로 방송한다. 이들은 기존의 대형 유통 기업이나 방송사들과 협업할 정도로 존재감이 커졌다. 이런 트렌드의 배경에는 세포마켓이 있다. 세포 단위의 시장이 만들어진다는 의미인데, 1인 미디어의 등장이 미디어 판을 뒤집었다면 이번에는 유통의 판이 흔들리고 있다. SNS를 기반으로 한 개별 크리에이터들은 이제 1인 미디어에서 ‘1인 마켓’으로 발전한다. 누구나 온라인에서 가게를 열고 물건과 서비스를 팔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거대 플랫폼과 각종 비대면 결제 서비스의 발달이 기폭제가 되면서 이른바 ‘셀슈머(판매자인 seller와 소비자인 consumer의 합성어인 sellsumer는 인터넷상에서 서로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을 말한다)’의 등장을 촉진시키고 있다. 취업은 어렵고 자영업은 고전하는 상황에서 여러 직업을 수행하는 ‘N잡러(2개 이상 복수를 뜻하는 ‘N’과 직업을 뜻하는 ‘job’, 사람을 뜻하는 ‘~러(er)’가 합쳐진 신조어)’가 소비자를 직접 만날 수 있는 다양한 SNS 채널을 통해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세포마켓은 불법 거래의 온상으로 지목되기도 하며, 콘텐츠의 선정성과 폭력성 문제로 유해 콘텐츠와의 차별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 대형 교회 목사들이 독점한 방송 설교를 듣는 이들이 SNS상의 팟케스트, 유튜브를 통해 다양한 설교를 듣는 ‘말씀의 세포마켓’으로 나서고 있다. 3) Going New-tro(요즘옛날, 뉴트로) 최근 40대가 유년 시절에 신던 추억의 운동화가 10대들의 패션 ‘잇템(꼭 있어야 하거나, 갖고 싶어 하는 아이템)’이 되고, 촌스러워 보이는 빅로고 디자인의 티셔츠가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출시된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복고 음반과 과거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한 디자인의 가전제품들이 불티나게 팔린다. 복고의 열기가 뜨거운 것이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2018)의 그룹 ‘퀸’에 열광하는 90년대 이후에 출생한 젊은이들을 보라! 사람들이 TV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 열광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향수 때문이 아니다. 1020 세대에게 과거는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움’이다. 새로운 것이 넘쳐나는 시대에 소비자들은 서울 익선동 한옥 마을 골목길을 찾고, 이미 자취를 감춘 LP판을 꺼내 들며, 추억의 전자오락실 게임에 열중하는 것이다. 사실 복고는 수시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트렌드이지만, 지금의 복고는 중장년층이 아닌 1020 세대를 공략하는 새로운 복고라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이것을 김난도 교수팀은 ‘돌아온 복고(Retro)’가 아니라, 새로운 복고, ‘뉴트로(new-tro)’라고 말한다. 레트로가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지난날의 향수에 호소하는 것이라면, 뉴트로는 과거를 모르는 1020 세대들에게 옛것에서 찾은 신선함으로 승부한다. 뉴트로 감성을 찾는 밀레니얼 세대(Millennial Generation, 1980년대 초에서 2000년대 초 사이에 출생하여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사회생활을 시작한 세대로, 모바일 기기를 이용한 소통에 익숙한 사람들)는 ‘모자람이 주는 충족감’, ‘불완전함이 갖는 미학’에 매력을 느끼며 ‘낡고 보잘것없는 것’에서 정신적 충족감을 얻는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부흥회와 성경공부, 사경회가 다시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의 것 그대로는 안 된다. 레트로가 아닌 뉴트로가 되어야 한다. 철저한 인문학적, 신학적 기반 위의 부흥회, 사경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4) Green Survival(필환경) 미국의 한 환경운동가는 4년 동안 버린 쓰레기를 1리터도 안 되는 작은 병에 담았다. 이제 목표는 아예 쓰레기 배출량을 ‘제로’로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가능할까?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가능해야 하는 것이 ‘필(必)환경’이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먹고, 입고, 쓰는 모든 것에 들어가는 환경 부담을 제로로 만드는 것. 이는 우리와 같이 살아가는 지구의 전 생명체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닌 즐겁고 유쾌한 ‘필환경’의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소재 선정부터 제조 공정까지 친환경적인 과정을 통해 생산된 의류 제품을 소비하는 ‘의식 있는 의류소비’인 ‘컨셔스 패션(Conscious Fashion)’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폐기물을 재사용하는 리사이클링(recycling)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가치를 더해 친환경 제품으로 리디자인(redesign)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어린 시절부터 친환경 소비자교육인 에코 페어런팅(Eco Parenting)이 필요할 것이다. 5) You Are My Proxy Emotion(감정대리인 내 감정을 부탁해) 자기 감정을 스스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많은 소비자들이 “나 화났다”는 감정을 이모티콘으로 표현하고, 연애나 여행을 액자형 관찰예능 프로그램으로 대신 경험한다. ‘대신 욕해주는 페이지’에 들어가 차오른 스트레스를 푸는 방식으로 감정을 외주화(outsourcing) 해버린다. 최근 액자형 관찰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서 아기를 키우고, 연애를 하고, 반려견을 입양하고,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경험한다. 사람들은 이제 즐거운 것만 보고 좋은 감정만 느끼려고 한다. 이러한 감정대리인을 찾는 유형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감정대리인’을 통해 자기 감정을 대신 느끼는 사람들이다. 둘째, ‘감정대변인’에게 자기 감정을 대신 표현하도록 맡기는 사람들이다. 최근 액자형 관찰예능 프로그램을 즐기고 뉴스를 읽을 때도 기사보다 댓글을 먼저 읽으며 타인의 감정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바로 이런 유형이다. 마지막으로 ‘감정관리인’이 자기 감정을 대신 맞춰주기를 희망한다. 감정 코칭이나 감성 큐레이션 서비스가 자신의 기분을 맞춤형으로 조절해주기를 바란다. 노동의 외주화를 넘어 ‘감정의 외주화’, 곧 ‘감정의 맥도날드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신앙의 외주화도 가나안 성도들을 통해 펼쳐질 것인가? 6) Data Intelligence(데이터지능) “오늘 뭐 입을까? 내일 데이트 어디로 갈까? 점심은 뭘로 하지? 어디 입맛에 맞는 커피 없을까?” 이제 이에 대한 답은 엄마나 친구가 아니라, ‘데이터’가 알려준다. 의사결정의 패러다임이 인공지능(AI)에서 데이터 지능(DI)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시대는 데이터는 정보로, 정보는 지식으로, 지식은 지혜로 한 단계씩 업그레이드된 시대이다. 그러나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데이터 인텔리전스는 누가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정부가 국민의 일상생활을 감시하거나 국민 개개인의 성향을 파악하기 위한 정치적 용도로 사용한다면 인권 침해는 물론이고 엄청난 부정적인 파급 효과를 낳게 될 것이다. 또한 국경이 없는 온라인 데이터의 성격상, 그 수집 및 활용과 관련해 전 세계가 공동으로 법적, 제도적, 기술적 기반을 갖출 필요도 제기될 것이다. ‘데이터, 알고리즘, 인공지능’이 데이터 인텔리전스의 삼위일체이다. 교회는 이제 데이터지능을 통해 인류 역사상 종교성이 차지한 영성의 깊은 차원을 다시금 회복해야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종교와 교회, 신학의 역사라는 데이터, 이를 학문과 영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목회자의 능력(알고리즘), 그리고 이러한 내용을 성도들의 참된 신앙으로 이끌 지능인 신학적 인텔리전스가 필요하다. 7) Rebirth of Place(공간의 재탄생, 카멜레존) 최근 공간이 다시 태어나고 있다. 유통 공간이 카페로, 도서관으로, 책방으로, 강연장으로 전시회장으로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중이다. 현대의 소비 공간은 카멜레온이 주변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색깔을 바꾸듯 변신한다는 면에서 카멜레존(Chamelezone)이라 부를 수 있다. 특정 공간이 협업, 체험, 재생, 개방, 공유 등을 통해 본래 가지고 있던 하나의 고유 기능을 넘어서 새로운 정체성의 공간으로 변신하는 트렌드를 말한다. 은행과 카페, 호텔과 도서관, 자동차 전시장과 레스토랑 등 공간의 협업이 즐거움을 준다. 주변환경에 따라 피부색을 바꾸는 카멜레온처럼, 공간의 화려한 변신이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 ‘카멜레존’으로 이름 붙일 수 있는 명소들이 속속 생겨나는 중이다. 쇼핑몰은 물론이고 전시장과 공연장 등이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색다른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온라인에 밀리는 오프라인에게 카멜레존은 생존을 위한 필수 전략이 된 것이다. 교회에 카페가 생긴지는 좀 됐다. 이제 교회 건물은 도서관으로, 영화관으로, 동네 사랑방으로 바뀌어야 한다. 거룩한 성(聖)은 세속의 속(俗) 안에서 자리 잡는다. 교회는 산 속에 있는 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8) Emerging ‘Millennial Family(밀레니얼 가족)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 이어 ‘밥 잘 사주는 예쁜 엄마’가 등장했다. 엄마가 변한 것이다. 밥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사주고, 남는 시간은 자기계발에 투자하는 엄마들을 말한다. ‘3신가전’이라는 말도 있다. 밀레니얼 가족의 밥 잘 사주는 엄마에게 꼭 필요한, ‘로봇청소기와 식기세척기 그리고 빨래건조기’ 3총사를 말한다. 이제 집안일은 3신가전에 맡기고 엄마들은 자신을 가꾸는 데 시간을 투자한다. 밀레니얼 가족의 등장인 것이다. 사실 햇반을 비롯한 가정간편식의 주 구매층도 1인 가구에서 다인 가구로 빠르게 이동 중이다. 물론 이들 밀레니얼 세대에게도 가족은 소중한 존재다. 가정이 중요한 것도 안다. 하지만 먼저 ‘나’가 있고 그리고 ‘가족’이 있다. 이들에게 집은 ‘적정 행복’의 장소일 뿐이다. 따라서 탈며느리, 탈시부모를 선언한다. 부부 사이엔 동반자적 의식을 지니면서도, 개인의 취미와 성취를 중시해 자기계발에 열심이다. 밀레니얼 세대에게 이제 가정은 절대적인 희생을 해야 하는 곳이 아니라, 대충 만족할 수 있는 ‘적정행복’의 장소로 변화되었다. 앞으로 교회도 충성을 다하는 신앙의 장소에서 적정행복의 장소로 변화될 것이다. 가급적 교회는 건물을 이웃 주민들을 위해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고 교인들은 한 주에 한번 예배를 드리고 친교하며, 나머지 시간은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삶을 살아야할 것이다. 9) As Being Myself(그곳만이 내 세상, 나나랜드) 흔히 한국 소비자들은 타인지향성이 강하다고 알려져 왔지만, 이제 자기만의 기준으로 스스로를 사랑하고 지켜나가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따라서 남의 눈길은 중요하지 않다. 나만의 시선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것이다. 라라랜드(로스앤젤레스의 별명이자, ‘현실과 동떨어진 상태’를 의미)가 꿈꾸는 이들의 도시라면 ‘나나랜드’는 궁극의 자기애로 무장한 사람들의 땅이다. 나나랜더에게 타인의 시선은 중요치 않다. 오로지 나의 기준이 모든 것의 중심이다. 탈 규범화에 익숙한 이들은 기존 세대가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관에 반기를 든다. 넉넉한 체형의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최고의 모델로 등극하고, 40대 여성이 아이돌 팬으로 ‘입덕’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곳, 바로 나나랜드다. 나나랜드를 찾고 있는 이들은 ‘다름’에 대한 수용력과 타인에 대한 인정과 이해 또한 높다. 자연스레 개개인의 다양성을 중요시하며 시대에 뒤떨어진 관습이나 획일적인 규범을 거부한다. 나나랜드는 진정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이 정착한 기회의 땅인 것이다. 교회가 이제 라라랜드에서 나나랜드로 변하지 않으면 교회는 사라질 것이다. 10) Manner Maketh the Consumer(매너소비자) 최근 조사 결과, ‘노쇼(No-Show, 식당 등에서 예약하고 나타나지 않는 손님)’로 인한 사회적 피해비용이 연간 8조 원에 이른다고 한다. 소비자의 악의적인 갑질에 고통 받는 근로자들도 너무 많은 것이다. 유교적 전통에 기반한 뿌리 깊은 위계질서 문화가 갑질, 혹은 블랙컨슈머(Black Consumer, 이익을 얻기 위해 부당한 민원을 제기하는 악성 소비자로, 한국에서만 사용한다. 미국에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소비자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이처럼 소비자의 비매너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면서 근로자들의 ‘감정노동 보호’ 논란도 심화되고 있다. 고객 만족을 위한 서비스 경쟁의 과열로, 기업이 근로자에게 고객에 대한 무조건적 맹종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근로자들은 심리적 부조화를 겪는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Smile Mask Syndrome, 숨겨진 우울증)’에 시달리며 정신건강에 큰 위협을 받고 있다. 따라서 워라밸에 이어 근로자와 소비자 사이의 매너 균형을 도모하는 ‘워커밸(worker-customer-balance)’도 중요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신세대 직원들의 이직을 더 이상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라라랜드에 가고자하는 신세대 직원들은 더 이상 스마일 마스크를 쓰지 않을 것이다. 목사도 더 이상 감정노동에 혹사당하지 않아야 한다. 장로와 교인들이 사회생활에서의 스트레스를 목사에게 푼다면 잘못된 것이다. 갑질하지 않는 목사와 장로, 매너 있는 성도가 교회를 새롭게 만들 것이다. 3. 돼지에 관하여 2019년 돼지의 해에 돼지가 재발견되고 있다. 고기 생산과 의학, 산업 연구는 많았지만 정작돼지란 동물 자체는 잘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최근 동물행동학과 비교심리학 분야의 연구 성과는 우리가 몰랐던 돼지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돼지는 개나 어린아이와 비슷한 인지능력을 갖고 있으며 자의식이 있고 창조적 놀이를 즐기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 인간과 다를 게 없다는 공감대가 퍼지고 있는 것이다. 기해년 돼지의 해에 타자의 아픔에 공감한 컨셉을 통해 나나랜드만이 아니라, ‘우리우리랜드’를 꿈꾸는 것도 한번쯤 괜찮지 않을까? ▲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 문화
    2019-01-07
  • [기독교교양읽기 44] “연탄은 작은 자들을 위한 따뜻한 나눔!”
    ‘연탄신학’은 생명신학이다 이 책은 연탄은행전국협의회에서 편집하였다. 한마디로 연탄은행에 관한 책이다. 그러나 연탄은행보다는 밥상공동체가 먼저였다. 즉, 1998년 4월 원주시 원동 쌍다리 아래서 외환위기로 갈 곳을 잃은 노숙자들을 위해 무료 급식을 하면서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2002년 12월부터 연탄 무료 나눔을 시작하면서 연탄은행도 시작하였고, ‘연탄신학’으로 성경적 해석을 덧붙였다.이들에게 있어 연탄신학은 먼저 ‘작은 자의 신학’이다. 작은 자는 연탄 한 장에 의지하여 한 겨울을 보내는 춥고 외로운 우리 이웃이며, 날마다 따뜻한 밥상을 그리워하는 배고픈 우리 이웃이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신학’이다. 밥상과 연탄이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돌보고, 생명을 지켜준다. ‘타자(他者)를 위한 신학’으로서, 연탄처럼 오직 타자의 생명과 행복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는 신학이다. 그렇기에 연탄신학은 ‘눈물과 고난의 신학’이다. 연탄 한 장이 어려운 이웃에게 가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눈물이 있다. 연탄은행의 연탄은 눈물로 만들어진다. 또한 ‘소통의 신학’이다. 연탄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혔던 벽을 허물고 소통하게 하는 힘을 지녔다.그리고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만약 예수께서 우리나라 이 땅에 오신다면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 아마도 밥상과 연탄을 통해 고난 받는 이들을 위로하는 모습으로 오셨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연탄신학 이야기》 || 저자 정해창 목사는 감리교신학대학원, 미국 리전트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했다. 현재 춘천제자교회 담임목사로서 오랫동안 춘천연탄은행과 밥상공동체를 사역하였다. 솔라피데, 2018. 18,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긍휼-예수님의 심장》 / 하재성 / SFC《여리고 가는 길》 / 팀 켈러 / 비아토르 “연탄은 작은 자들을 위한 따뜻한 나눔!” ▌좌담: 김길구, 김수성 경성대 초빙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예수는 아마 오늘 이 땅에 오신다면 밥상과 연탄 활동가가 되어, 골목을 누비며 연탄을 배달하고 굶주린 어르신들에게 따뜻한 밥상을 차려드리는 일을 몸소 행하셨을 것이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불쌍한 우리를 너무 사랑하신 예수는 밥상과 연탄을 통해서 고난 받는 이들을 위로하며 한없는 사랑을 보여주셨을 것이다.” [본문 227쪽에서] ‘연탄’이 친근한 느낌을 주는 이유는?김길구 오늘은 시기적으로 가장 적절한 주제를 가진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맞아 ‘연탄 나누기’를 이야기합니다. 최근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가 거론되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연탄을 때야만 겨울을 날 수 있는 가정이 너무도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김현호 우리가 아파트에 살면서 도시가스로 편안하게 난방을 하면서 살다보니, 우리 주위에 아직도 연탄에 의지하며 살고 있고, 그것마저도 넉넉하게 사놓지 못해 불안해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자꾸 잊고 산다는 부끄러운 고백을 하게 됩니다.김수성 이 자리에 앉은 우리 모두 연탄에 관한 추억이 제법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연탄’을 이야기하면 어렵고 힘든 생활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물론이지만, 한편으로는 ‘따뜻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김길구 아무래도 ‘나눔’을 떠올리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당시의 삶은 어렵고 궁핍했지만 이웃 간의 정은 아파트 생활과 비할 바가 아니죠. 연탄불에 고등어를 구우면 이웃집 아낙이 부르기도 전에 먼저 “이 집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네.”하면서 대문을 밀고 들어오곤 했습니다. 그렇기에 연탄에 관한 추억은 항상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김현호 거기에 더하여 지금도 연탄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활활 타오르는 연탄불과 겹치면서 더욱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 아닐까요? 겨울철에 연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연탄은행’인 것 같습니다.김수성 이 책을 읽으면서 연탄은행에 관해 좀 더 공부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연탄은행의 ‘4C 가치’라는 것이 있더군요. ‘1) Christ-예수님을 중심으로, 2) Community-공동체를, 3) Care-섬기고, 4) Common welfare-모두를 위한 복지의 가치를 실현한다’입니다. 첫 번째가 바로 ‘예수님을 중심으로’입니다. 그래서 연탄은행 섬김이는 대부분 목사님입니다. ▲ ‘연탄신학’은 밥상공동체와 연탄은행을 통해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살리는 신학이다. 그렇기에 행동하는 신앙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연탄은행뿐 아니라 다양한 봉사활동김길구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가 생각났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 너는 /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 시는 이기주의적 인간에 대해 이타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졌죠. 연탄은 이렇듯 나눔은 물론이고, 여타 다른 면에서도 우리에게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김현호 제가 다니는 교회에서도 겨울이 되면 연탄 나눔을 합니다. 그런데 그냥 물질적 후원에만 그치지 않고 실제로 현장에 가서 연탄배달 봉사활동을 하고 온 교인들과 이야기해보면 마음가짐이 달라진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 주위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김수성 부산에도 연탄은행이 있습니다. 2004년 12월에 개설했으니 벌써 14년이 되었습니다. 서구 감천2동에서 시작하여 아미동으로 확산되었고, 이어서 영도구, 동구, 남구 등으로 퍼져나갔습니다. 2008년에는 ‘사랑의 쌀’ 나눔과 함께 아궁이 교체작업을 하는 등 활동범위도 넓혔습니다. 지금은 연탄은행 외에도 무료 급식, 반찬 나눔, 집수리, 푸드 뱅크, 공부방 등을 운영하면서 1년 내내 어려운 이들과 함께하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김길구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과연 연탄 나눔에 신학을 붙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는지요?김현호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작은 자들을 위한 나눔신학’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도 캘커타에서 마더 데레사가 베풀었던 사랑의 손길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밥상공동체와 함께 운영하는 연탄은행에 대해 어느 누구도 단순한 베풂이라고 폄하하지는 못할 것입니다.김수성 그렇기는 해도 이 책으로만 이야기한다면 신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좀 더 체계화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민-관-교회’ 연대로 복지 향상시켜야김길구 이러한 논란을 의식한 듯, 필자는 신학은 곧 인간학이 될 수밖에 없다는 변명(?)을 합니다. 즉, 신학은 곤궁한 처지에 놓인 우리의 현실을 결코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의 현실은 연탄신학이 필요한 시점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갈수록 심화되는 사회적·경제적 불평등, ‘갑질’로 대표되는 가진 자들의 횡포는 물론, 밑바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는 현실 등을 볼 때, 작은 자를 돌아보고 그들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신학적 노력이 당연히 있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서툴고 부족하기는 하지만 필요한 노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김현호 이 책의 장점은 읽을 재미가 쏠쏠하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연탄의 역사에서부터 현장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열정을 확인할 수 있는 글을 중간 중간 배치해 놓았습니다. 실천적인 면을 강조한 신학답게 실천하는 사람들의 사례를 소개한 것입니다.김수성 저는 ‘철사로 묶은 연탄’을 보면서 감탄했습니다. 이러한 사례는 현장에서 발로 뛰는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것이거든요. 또한 신학적인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이 책에는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음을 잘 보여줍니다.김길구 이 사업을 처음에 시작한 허기복 목사님의 사례에서 이를 볼 수 있습니다. 교회를 담임하다가 결국에는 사임하고 나와서 밥상공동체와 연탄은행을 운영하였다고 합니다. 즉, 교회 안이 아니라, 밖으로 나와서 이러한 사업을 운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나라 현실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사업은 ‘운동’이 될 수밖에 없고, 교회나 교인은 후원자 또는 봉사자로서만 참여하게 됩니다.김현호 교회가 이제부터라도 나서야 할 것입니다. 직접 도와줄 형편이 안 된다면, 교회 주위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정을 파악하여 관청이나 지원단체와 연결해주는 일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이 결국에는 지역을 섬기는 교회로서의 모습 아닐까요?김길구 그동안 기독교회가 기득권에 속함으로써 상당히 거칠어졌다는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그래서 ‘무례한 기독교’라는 말이 회자한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민관(民官)에 더하여 교회가 연대하여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의 한계를 조금이라도 더 벗어날 수 있도록 노력하였으면 하는 바람 간절합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목회’ 아니겠습니까?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진정으로 기뻐하는 크리스마스 맞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수성]
    • 문화
    • 기독교인문학
    2018-12-26
  • [영화] 로마의 어둠을 밝힌 순교자를 마음에 담다
    새롭고 오래된 성서영화의 발견 영화 <바울>(Paul, Apostle of Christ, 2018)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지난 10월 31일 국내 개봉을 시작한 이후 12월 4일 현재 233,863명의 유료 관객을 동원하여 전통적인 형식의 성서영화(Bible Cinema)로서는 보기 드물게 꾸준히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추정 제작비가 5백만 달러에 불과한 작은 영화로서 과거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 서사적 특징을 배제한 가운데 이룬 성과로 의미가 매우 깊다. 한국 영화계의 비수기인 11월을 택해 개봉하는 바람에 대형 상업영화로부터 상영관을 뺐기지 않을 가능성을 높인 것도 흥행에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상영관수가 적은데다 여전히 한국극장가의 고질적인 병폐인 징검다리 식 개봉(1회, 3회, 5회 상영과 같이 띄엄띄엄 상영시간을 배정하는 것)에도 불고하고 이룬 성과여서 차후 한국의 기독교영화 관객의 기호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가치가 충분하다. 지금까지 제작된 성서영화는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영화로써 세실 드 밀 감독의 <왕중왕>(1927)에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까지 영화사 초기부터 현재까지 기독교영화를 대표해왔다. 둘째는 예수 외에 성경의 인물이나 사건을 다룬 영화로써 <십계>(1956)나 금년에 새롭게 제작 개봉된 <삼손>(2018)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셋째가 매우 흥미로운 성서영화의 부류인데 예수시대 혹은 초대교회를 배경으로 삼은 기독교영화들이 있다. <벤허>(1959, 2016)나 <부활>(2016)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들 영화들의 주인공은 예수가 아닌 가공의 인물들이다. <벤허>의 주인공은 유대인 귀족이었다가 노예로 전락한 유다 벤허이고, <부활>의 주인공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현장에 있었던 로마의 군인이다. 이 두 인물의 경우 예수님 시대에 살았을 가능성은 있지만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인물로서 성서영화가 단지 성경의 내용을 영상화하는 기능에만 머무르지 않고 상상력을 통해 외연이 얼마든지 확대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세 번째 부류의 성서영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간접적으로 묘사하거나 제한된 노출을 시도하면서도 주인공의 인생변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로서 예수를 등장시킴으로써 전통적 성서영화의 흐름으로부터 단절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중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영화 <바울>은 두 번째와 세 번째의 특징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작품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사도 바울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 회심할 뿐만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신앙 가운데서 순교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한다. 영화에서 이 부분은 바울의 회상 장면으로 처리되고 있으다. 즉 주인공은 바울이지만 바울을 주인공으로 만든 이는 예수 그리스도란 점에서 성서영화가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의 정통성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흥미로운 사실은 바울이 갇힌 로마 감옥의 새로운 소장으로 부임한 모리셔스 갈래스란 인물의 등장이다. 그는 물론 성경에 나오지 않는 인물이지만 이 영화가 역동적으로 진행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충실한 로마 군인 출신으로 처음에는 바울을 학대하며 그리스도인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도 바울과 그의 편지를 적어 나르는 누가와의 만남을 통해 내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관객은 갈래스 교도소장의 등장으로 인해 긴장감과 더불어 마침내 신앙의 감동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거룩한 상상력이 얼마나 관객들에게 재미를 부여하는 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고난 속에서 사랑과 은혜를 강조하다 앤드류 아이엇(Andrew Hyatt) 감독의 영화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의 현실과 회고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강조하는 작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표현하는 일은 성서 영화에서는 흔한 일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잔혹한 죽음이 이어지는 박해 속에서 사랑과 은혜를 관객에게 이해시키는 일은 매우 특별하다. 특히 복수가 스크린에 가득 찬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현대사회에서 힘으로 응징하지 않고 용서와 사랑 그리고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일은 매우 특별할 수밖에 없다. 서기 67년 로마는 예수를 믿는 추종자들이 로마의 불을 질렀다는 소문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거리에서 화형을 당하거나 몰래 숨어 살아야 하는 불안과 공포의 분위기에 휩싸인다. 신실한 믿음을 지닌 브리스길라(조앤 월리)와 아굴라(존 린치)는 예수 믿는 공동체를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지만 사람들은 극심한 박해 속에서 로마를 탈출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지고 만다.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지도자인 사도 바울(제임스 펄크너)의 의견을 구하고 그의 편지를 기대하고 있다. 이 때 의사 누가(제임스 카비젤)가 로마를 방문하여 로마에 숨어 지내는 그리스도인과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 사이를 왕래하며 서로의 뜻을 전달하는 한편으로 바울의 신앙여정에 대한 구술을 받아 적음으로 인해 ‘사도행전’이 탄생하게 되는 과정을 관객은 목격할 수 있다. 영화가 제공하는 세 가지 미덕 영화 <바울>에서 관객이 지켜 본 가장 큰 미덕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고난 받는 로마 그리스도인의 상황과 이에 대응하는 바울의 ‘성경적 방식’이며, 둘째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식이고, 셋째는 누가의 의료행위에 나타난 신앙과 지성의 통합적 이해 방식이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관객들은 역사의 기록에 남아있는 ‘인간 촛대’의 순교현장을 접하게 된다. 로마제국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타키투스(Tacitus, 56?~120?)는 14년에서 68년 사이의 로마 역사를 다룬 〈연대기>(Annals〉)에서 네로가 광적인 잔학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인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다. <연대기> 속에 묘사된 그리스도인의 순교 장면 가운데는 십자가의 처형뿐만 아니라 짐승의 가죽으로 싸서 개들에 의해 찢겨 죽기도하고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해가 진 후 로마의 거리 곳곳 마다 화형에 처해져서 히브리서 11장 후반부에 나오는 믿음을 지키는 신앙인이 겪었을 시련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깨닫게 한다. 로마의 골목 곳곳 마다 나무에 매달려 산 채로 화형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고난의 현실을 대변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로마의 어둠을 밝힌 것은 그리스도인들 이었다’는 역사의 기록은 사실이며 또한 진실된 신앙의 결과였다. 가로등이 없던 시절 그리스도인들은 ‘인간 촛대’라는 순교방식을 통해 거리의 어둠을 밝혔고, 사랑과 봉사를 통해 부패하고 잔인한 로마인의 마음에서 어둠을 내쫓았다. 로마에 대한 복수와 저항의 의지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솟구쳐 올랐을 때 영화 속 사도 바울은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12:17)고 누가에게 전한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율법에 미쳐서 예수를 따르는 자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과거가 있었고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고 사랑으로 변화된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감옥에서 누가에게 구술한 바울의 회상장면은 사도 바울을 생애를 연대기로 처리한 과거의 영화와 달리 매우 생동감을 갖게 만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영화를 빛낸 공로는 누가가 바울이 갇힌 교도소 소장의 병든 딸을 고치는 장면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로마의 제3군단 사령관 출신으로 마멀틴 감옥의 소장으로 부임한 모리셔스 갈래스(올리비에 마르티네즈)는 제3자의 입장에서 바울과 누가를 지켜보는 사람이다. 바울이 결코 로마에 불을 지를 사람이 아니며 누가 또한 참된 신앙인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는 입장이다. 그는 자신의 병든 딸이 회복될 수 있도록 사도 바울에게 기적을 행해줄 것을 바라지만 바울은 누가를 존경받는 의사로 갈래스 교도소장에게 소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간직한 사람들이 생존해 있던 시절에 병 고침의 기적은 어쩌면 로마인의 마음을 순식간에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감독은 그 병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의사 누가를 등장시킨다. 사람들은 감독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도록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교도소장의 딸이 병중에서 회복되는 장면과 기독교인들이 로마인들의 구경꺼리가 되기 위해 순교의 현장으로 나아가는 정면을 교차 편집함으로써 신앙이 일으키는 기적이 무엇인지를 감동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즉 인간 촛대로 순교한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어둠을 밝혔듯이, 또 다른 순교자들의 믿음으로 인해 로마의 어린 아이는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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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12
  • [문화펼치기] ‘액괴’의 시대와 액체근대
    1. 액괴의 시대와 강한 것들의 전성시대 요즘 딸아이가 갖고 노는 장난감 중 단연 으뜸인 것은 ‘액괴’이다. ‘액체괴물’의 줄임말이다. 액괴를 주무르는 것이 그리도 재미있는가 보다. 액체는 형태가 없는 무정형의 물질이다. 물과 같은데, 쏟아지지는 않는다. 아이들은 이러한 부드러운 무정형의 물질을 갖고 노는데, 어른들의 세계는 지금 강한 것들의 전성시대로 국가, 자본, 군사력, 경제력이라는 견고한 정형(solid)의 힘이 맞대결하고 있다. 현재 미-중 경제 대결이 유예되기는 했지만, 끝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트럼프라는 기이한 인격의 소유자가 벌리는 일이 아닌, 그 이면의 다층적인 그룹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시사IN>의 이종태 기자는 그 세력들을 이렇게 분석한다. “오래전부터 중국 제품에 대한 고율 관세 부과를 주장해온 ‘보호무역파’, 관세 인상 자체엔 회의적이지만 중국의 무역 행위를 공정(fair)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유무역파’, 중국이 미국의 글로벌 패권과 안보를 위협한다고 보는 ‘군부와 정보기관’, 중국산 수입품 때문에 일자리 보전에 위협을 느끼는 ‘노동조합’, 중국공산당의 여론 탄압과 불법적 인신 구속에 분노하는 ‘인권 및 환경운동 진영’까지 느슨한 ‘반중 연합’에 발을 걸쳤다.” 그럼 중국은 어떤가? 지금 중국은 옛날의 중국이 아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 경제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미국을 따라잡겠다고 발 벗고 나섰다. 그러나 중국은 삼권분립과 법치주의, 인권 보장 등 미국이나 한국, 서구 유럽 등이 갖고 있는 민주적 가치가 없다. 특히 시진핑 시대 이후 중국은 ‘아시아 인프라 은행’,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 육·해상 신실크로드 경제권을 형성하고자하는 중국의 국가전략)’, ‘위안화 국제화’ 같은 초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미국을 꺾고 중국의 의지를 세계적 차원에서 관철시키고자 한다. 결국 미-중 대결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대결이 아닌, ‘시장’ 자본주의인 미국과 ‘국가’ 자본주의인 중국의 자본의 힘 대결이라는 것이다. 이 대결에서 미국이 이기면 ‘팍스 아메리카’는 좀 더 오래 갈 것이다. 그러나 미국도 타격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전쟁에서 중국이 버틴다면?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 체제가 유지될 것이다. 혹, 이 전쟁에서 중국이 이긴다면 이제 ‘팍스 차이나’가 다가 올 것이다. 강한 것들의 전성시대가 날개를 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유동하는(liquid)’ 액체의 이미지를 통해 성찰한 사회학자가 있다. 현대성 이론의 대가인 폴란드 출신의 영국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다. 그는 이론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고, 수많은 주제들을 횡단하며 끊임없이 ‘지금, 여기’를 묻는다. 2. 액체근대, 그 유동성에 관한 우려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의 삶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공포, 불안, 자유, 빈곤, 도시, 공동체, 진보, 유토피아 등에 관해 살펴보며 근대를 “유동적 근대(liquid modern age)”로 호명한다. 쉽게 말하면 ‘액체 근대’라는 말이다. 근대성이 가진 특성이 액체성, 곧 유동성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언제 어디에서나 출렁이는 위험 앞에서 우리가 겪는 불확실한 불안에 붙인 이름이며, 그 위협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우리의 인식 불능성에 붙인 이름이며, 그것에 대항해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판단할 수 없는 우리의 무력함에 붙인 이름’이라고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에 내포되어 있는 신비성을 액체근대라는 말로 제거해 버린 바우만은 『모두스 비벤디』(후마니타스, 2010)라는 책에서 액체근대의 5가지 특성을 잘 정리해 준다. 우선, 근대성이 ‘견고한(solid) 국면에서 ‘유동하는(liquid) 국면으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 개인의 선택을 제한하는 구조나, 일상적인 일들과 용인될 만한 행동 양식이 반복될 수 있도록 지켜주는 제도들과 같은 사회적 형태들이 더 이상은 제 모습을 오래 유지할 수 없는(또한 그럴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없는) 여건으로 변해 버렸다. 둘째, 근대국가의 등장 이후부터 아주 최근까지도 사람들은 권력과 정치가 한 쌍이 되어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국민국가라는 한 가정을 공유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이제 이들은 별거 상태로 이혼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다. 셋째, 과거에는 개인이 실패하거나 불행해지면 공동체가 보호해 주는 국가 공인 장치가 있었으나 이제는 이런 장치가 점점 일관되게 줄어들고 있다. 각자 도생의 시대로 전환된 것이다. 넷째, 장기적인 안목으로 생각하고 계획하고 행동하던 유형이 무너지고 오랫동안 이런 유형을 유지해 주던 틀인 사회구조들도 사라지거나 약해진다. 그리고 이처럼 파편화된 삶은 ‘종적인 사고방식(vertical orientation)’보다는 ‘횡적인 사고방식(lateral orientation)’을 조장한다. 사람들은 이제 각각의 단계를 넘어갈 때마다 다른 기회와 상이한 확률분포에 반응해야 하며, 그럴 때마다 다른 기술을 사용하고 자산을 새롭게 배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순식간에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당혹스러운 일들을 해결해야 하는 책임을 이제 개인이 떠맡게 된다. 오늘날 개인은 ‘선택하는 자유인’이 되어 자신의 선택에 따르는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 개인의 이해관계에 가장 도움이 된다고 선언되는 덕목은 규칙(여하튼 극히 드물고 종종 서로 모순적인)에 순응하는 태도(conformity)가 아니라, 그런 규칙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flexibility)이 되는 것이다. 인류가 고체처럼 견고한 사회를 지나 액체(유동적) 근대를 지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전자가 예측 가능한 사회였고, 공동체가 존속했던 시대였다면, 후자는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보호막이 모두 사라져버린 시대이다. 전자의 사회에서 개인은 노동하는 존재로 인식되었고, 따라서 노동 능력을 지니고 있는 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고체 사회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기준은 ‘노동’이었고, 설령 한 개인이 실직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노동능력을 상실하지 않는 한, 그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되어 국가 또는 사회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이 전 지구적으로 이동하는 유동적 근대 시대에 접어들어 상황은 변했다. 이제 한 개인에게 요구되는 조건은 노동력이 아니라 소비력이며, 소비능력이 없다고 간주되는 개인들은 더 이상 공동체의 일원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그들은 없어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 차라리 없어야 하는 존재, 즉 ‘쓰레기’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3. 레트로토피아, 실패한 낙원으로의 귀환? 위기의 때에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대안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실패한 낙원으로 귀환하는 것이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것보다 나은가? 최근 출간된 유작 『레트로토피아: 실패한 낙원의 귀환』(아르테, 2018)에서 바우만은 이렇게 말한다. “대안이 없다며 아늑한 과거에만 머문다면 같이 공동묘지에 들어가는 일만 남을 뿐이다.” 어쩌면 ‘심리상담’과 ‘떡볶이’로 마음을 달래는 역사상 가장 우울한 지금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또한 태극기와 성조기와 이스라엘기로 숨어드는 한 많은 태극기 부대 어르신들에게,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진리 탐구자들에게 주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레트로토피아는 과거(레트로)와 유토피아의 합성어이다. ‘국경 없는 자본’, ‘영토 없는 통치’를 통해 지구화와 개인화를 실천하고 있는 현실의 자본주의 체제를 통해 그 어느 때보다도 비참한 조건 아래 놓이게 된 이들이, 분노와 절망에 내몰린 이들이, 유토피아에 대한 ‘이차 부정’으로 ‘이미 실패한 과거’를 새로운 유토피아로 삼은 것을 지적하는 말이다. 사실 미래와 달리 과거의 기억은 친숙하다. 2016년 영국이 총선거로 유럽연합(EU)을 탈퇴하겠다고 결정할 때, ‘브렉시트’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던 극우 정치인 나이절 패라지(N. Farage)는 이렇게 외쳤다. “내 나라를 돌려 달라(My Country Back).” 2016년 말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캠프 구호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였다. 두 나라의 핵심은 “우리의 삶이 이렇게 망가지기 이전으로 돌아가자.”라는 것이다.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 지구의 경찰국가 미국으로, 디시 옛날로 돌아가자는 이야기이다. 바우만에 따르면 이렇게 과거로 회귀하려는 사유는 그 속에 4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홉스로의 회귀’, ‘부족으로의 회귀’, ‘불평등으로의 회귀’, ‘자궁으로의 회귀’ 등이다. 먼저 ‘홉스로의 회귀’는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으로 상징되는 ‘폭력을 독점하는 근대 주권국가’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미 실패한 것이었다. 둘째 ‘부족으로의 회귀’는 공동체와 개인 사이의 모순이 끝내 ‘나’와 ‘그들’을 나누고 ‘그들’을 배제하는 ‘부족주의’를 다시금 부추기고 있음을 알려준다. 사실 지금 들끓는 전쟁과 테러, 민족주의의 새로운 열풍은 이런 부족 회귀 현상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셋째 ‘불평등으로의 회귀’는 ‘복지국가’ 정책의 실패 이후, 좌파의 복지, 평등을 비판하고, 급격히 확대되는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며, 우파의 경제정책(경제적 불평등을 옹호하는) 복귀를 내포한다. 마지막 ‘자궁으로의 회귀’는 자본주의가 구축한 문화와 생활세계 속에서 갈수록 개인의 문제에만 침잠하는 나르시시즘의 문제를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들의 원천에는 변덕스럽고 불확실한 현재에 내재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레트로토피아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 이상 미래를 꿈꾸지 않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것이다. 4. 기본소득과 초대교회 공동체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과거로 회귀하지 않고, 미래로 가는 대안은 무엇일까? 바우만은 이렇게 말한다.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 결국 서로 다른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것만이 미래를 만들어가는 발판이 될 수 있다. 대화는 타인을 유효한 대화상대로 바라보고, 외국인, 이주자, 그리고 다양한 문화에서 온 사람들을 경청할 가치가 있는 존재로 존중하게 한다. 오늘날 우리는 ‘대화를 만남의 한 형태로 특별하게 생각하는 문화’를 형성하고, ‘공정하게 반응하는 포괄적인 사회라는 목표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합의와 동의를 구축하는 수단’을 창조하는 데 모든 사회 구성원들을 긴급히 동참시켜야 한다.” 그럼 대화만 하면 될까? 대화 이전에 대화가 가능할 전제 조건은 없을까? 바우만도 그것을 알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서로를 ‘유효한 대화 파트너’로 인식하고 대우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추가적인 조건들이 부합되어야 한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상호인정한 평등한 지위’의 보장, 곧 모두에게 적용되는 공정한 경제모델이다.” 쉽게 말하면 경제적 균등이 대화의 전제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적 균등은 어떻게 가능한가? 바우만은 ‘보편적 기본소득’ 프로젝트를 대안으로 제시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파국을 향하는 흐름을 뒤집으려는 투쟁에서 유례없이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곧, ‘보편적 기본소득’에 담긴 철학은 과거 지구화·개인화의 흐름 속에서 끝내 실패해버린 ‘복지국가’의 기반을 뒤집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것이다. 자, 이제 교회부터 시작해 보자. 교회의 모든 헌금을 ‘종교국(이름은 어떠하든 상관없다)’으로 모은다. 그리고 종교국은, 목회자의 사례는 가족 수에 비례해서 지급하고, 교회 운영비는 교회 규모에 맞추어 지급한다. 그 외 남는 모든 금액은 그 교회가 속한 마을의 사회적 약자를 위한 기본 소득으로 쓴다. 그러면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구원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더할 것이다. 거짓말 말라고? 사도행전에 이미 시행되었고, 나와 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 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2-47).” ▲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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